일곱 금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1, 9-16)

계 05 일곱 금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 (계 1, 9-1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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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7:11,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눅 17:12, 개역)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눅 17:13, 개역)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궁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눅 17:14, 개역)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

(눅 17:15, 개역)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눅 17:16, 개역) 『예수의 발 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저는 사마리아인이라』

(눅 17:17,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눅 17:18, 개역)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하시고』

(눅 17:19, 개역) 『그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17:20, 개역)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눅 17:21, 개역)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1:9, 개역)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1:10, 개역)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1:11, 개역)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멜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1:12, 개역)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1:13, 개역)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1:14, 개역)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1:15, 개역)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1:16, 개역)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1:9, 새번역)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인 나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에 대한 증언 때문에 밧모라는 섬에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 ,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

(1:10, 새번역)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 ''

(1:11, 새번역) 그 음성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12, 새번역) 그래서 나는 내게 들려 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1:13, 새번역)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 7:13

(1:14, 새번역)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1:15, 새번역)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1:16, 새번역)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계시록 11절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아니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너희는 저의 말만 들으라 라고 하셨다 말이죠.

 

왜 하나님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입니까?

 

기존의 하나님의 계시가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와 버리면

 

이 둘의 충돌에서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식으로

우리는 헷갈리게 됩니다.

 

하나님 본인이 스스로 두 개로 분절 시켰다는 겁니다.

 

어려운 의미인데 쉽게 말하면 분절 곧 단절이란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겠다고 하니까

안됩니다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했다 말이죠.

 

이것이 베드로가 소위 하나님께 나아가는 방식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한테도 그렇게 적용하는 겁니다.

이것이 너와 나의 하나 됨이라는 소통이고 연결이고

우리 한 식구 아이가? 라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남이가? 라고 현수막 내걸듯이 말이죠.

그러다가 박살이 났잖아요.

 

어딜 감히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냐 말이죠.

사탄아 물러가라 말이죠.

 

소통이 아니라 단절이다는 겁니다.

이제 하나님께 나아갈려면

과거랑 다르다는 겁니다.

예수님께 가라 라는 겁니다.

그럼 베드로처럼 하나님께 가듯이 예수님께 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일이고 사탄의 일이라는 겁니다
.

어딜 감히 되도 않는 모호하고 의문의 것으로

모잘라고 부족한 666으로 오냐 말이죠.

사람의 수로 오냐 말이죠.

 

단절이다 말이죠.

즉 우리는 뭘 해도 죄요 뭘 해도 사람의 일이요 뭘 해도 부족한 666이다 말이죠.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안되다 말이죠.
이 안되는 단절성
뚝뚝 끊어짐을 격으라 라는 겁니다.

오히려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그 대상물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지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로 취급하냐 말이죠
사람이, 인간이 넘어오는게 아니라
주님이 넘어오심이다는 겁니다.

 

올려면 완벽한 거룩으로 오라는 겁니다.

즉 십자가로 오라는 겁니다.
제단 숯불로 모잘라고 부족한 부정함을 제거하고
완벽한 거룩으로 오라 라는 겁니다.

 

네 그러니깐요.


어허 그래두


십자가는 너가 지는게 아니야


내가 지는 거야

 

넌 단절 되었어

 

아니 왜? 너는 화목 제물이 될 수가 없어

너는 사랑이 아니야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 ~~~

오히려 넌 원수야 원수

? 완벽한 거룩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쁜 짖을 해야 원수가 아니야
그건 역사로 보는 거야
나쁜짖을 점점 많이 해서 점점 많이 쌓여서 그래서 원수가 되는게 아니라
완벽한 거룩 아니면 무조건 원수야
선함도 점점 많이 쌓아야 선이 아니라
미래완료가 아니면 선함도 아니야
그러니 무조건 원수야 원수
율법 완성 할수 있어? 도리어 율법 아래에 갇혀버린 죄 아래에 있잖니!!!

 

그러니 연결은커녕 소통은커녕, 개방은커녕,

단절인데 더더욱 단절 된 철저한 단절인 단절의 단절인 것을

저 십자가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십자가의 원수이다는 겁니다.

친구가 아니라

 

(16:2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8:33, 개역)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가라사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 단절성

 

이 원수됨을 화목케 하는 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본인이 원수인줄 모르고 자꾸 원수를 사랑할려고 이웃사랑을 실천할려고 한다는 거죠.

오히려 단절성을 느껴야 할 판국인데 말이죠.

 

그래서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겁니다.

아니 이제는 또 십자가를 지라네?

내가 원수요 주님이 그 원수를 사랑했다는 이 단절성을 증거하는 자가 되라는 겁니다.

증거하라 라고 하니까 또 지킬까봐

다른 용어로 하면 즐겨라 라는 겁니다.

막살아라

막살아라를 지키는 자가 있어요 글쎄

지키면 막사는게 아니라 법을 지키듯이 지키는 것 아닙니까?

안식일을 얼마나 못 지키면 ㅋㅋㅋ 지킬려고 할까요?

즉 안식을 못 누리는 겁니다.

쉬지를 못해요

평안하지를 못해요

 

평화를 못 누리는 겁니다.

아니 왜?

내 속에 또 다른 법이 있다는 겁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르나

육체는 거스린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즉 단절 된 자 로구나

 

이 말은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해방 된 자만이

누리는 고백이다는 겁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이 고백을 지켰나요?

아니잖아요

저절로 원인 없는 결과로 나왔잖아요

그래서 이 단절성이 오히려 고마운 겁니다.

아니 왜?

거꾸로 미래완료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에서

거꾸로 역사로 쳐들어 와서 고백하게 된 것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단절 된 자로구나 라는 겁니다.

 

미래완료에서 안 쳐들어 오면 절대로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라는 고백을 못하는 겁니다.

예수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음에서 오는 고백이기에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먼저 있었고 그 증상물로 그 흔적물로 그 선물로

받아서 나오는 표현이 떠억 허걱 뜨악 으악 이라는 탄식 감탄이 바로

이 표현이다는 겁니다.

 

주님이 제대로 일하셨다는 겁니다.

 

그러니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로구나 라고 욕먹는 것 자체도

예수님께서 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오는 증상입니다.

 

이것이 관계요 우리요 뭐였죠? 아 셀프 ㅋㅋㅋ

 

그런데 동시성으로 베드로 독단적인 자아를 주장하게 되면

이렇게 미래에서 오는 완료를 모르게 됩니다.

 

똑같은 행동을 하는 하나님나라 운동가

이스라엘 독립운동가

독립군 가룟유다는 이런 책망을 못 받잖아요.

사생아 이거든요.

야단 맞을 일이 없잖아요.

 

그 거룩한 이스라엘 독립

로마로 부터의 해방을 추구하는데 있어서

예수님은 하등의 도움이 전혀 안되는 겁니다.

팔아버려야 하는 거죠.

 

똑같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이야 이야 ! 편파 판정, 편파 복음 아닙니까?

 

베드로는 가룟유다와의 차이점이 뭘까요?

없습니다.

 

이 없다는 것에서 기존의 개혁주의 또는 성화론

또는 모든 종교는 다 무너지는 겁니다.

 

없어요.

 

원인 없어요.

 

없는 채로 그냥 나타난 결과입니다.

 

그래서 이 없음을 이 단절성을 더더욱 부각 시키고자

더더욱 떨어뜨리고자

간격을 더더욱 벌리고사

 

의도적으로 부정성을 덧 붙여 버립니다.

그냥 라합이 아닌

기생 라합이듯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말이죠.

 

그러니 인간 쪽에서 옳음으로 또는 선함으로 다가오는 것 다 박살내어서

오히려 부정성으로 까까득 채워서 십자가라는 단절성에 접붙이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에서 태어난 그 새피조물 조차도

거리끼는 걸림돌이 될 것 아니겠냐 말이죠.

 

바보같이 창녀 기생 세리 죄인을 존재로 해석해요 글쎄

기능입니다. 역사물이 아닙니다.

묵시물입니다.

그래서 부정해요 글쎄

즉 단절 되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단절 안 되었어요.

모든 사람과 하나님으로 인해 소통 할 수가 있어요

매매가 되어요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해서는 소통이 안됩니다.

뚝뚝 끊어진 단절성 뿐입니다.

매매가 안되어서 굶어 죽습니다.

 

그러니 모든 개념들이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이 됩니다.

즉 모든 사람들 종교와 민족과 상관 없이

천국은 가는 길만 다를 뿐이지 어차피 같은 천국이다 라는

인간이 가는

인간이 걸음걸이로 고고씽 하는 그런 천국인데

심지어 유대교도 그런 천국인데

그래서 결국 따지고 보면 서로 통한다 말이죠.

물론 아무리 종교연합운동을 해도 절대로 자기 종교를 버릴 이유가 없지만 말이죠.

 

그런데 졸지에 예수님에 의해서 그런 천국이 다 사라졌다 말이죠.

가는 천국이 없고

오는 천국 밖에 없다 말이죠

 

자 종교들이 곧 666

사람의 수를 받은 자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천국을 없애 버렸는데

마치 성전을 없애 버리는 것과 같다 말이죠.

 

성전을 헐라

국가를 헐라

종교를 헐라

 

3일만에 다시 짖겠다

 

기존의 것이 뻔히 있는데 헐어야 하고

새롭게 새성전을 3일만에 짖겠다고?

 

이 단절성을 연결 시키겠다고요?

말도 안되죠.

 

그 동안 공들인 공든탑을?

그 기념비를?

전 재산을 가난한 자 한테 다 나누어 주라굽쇼?????

 

개방이라면

소통이라면

저런 무시 무시한 말을 하면 안되죠~~~~~~

근심하고 돌아서잖아요 ~~~

 

모든 종교가

모든 교회가

저 부자 한 사람 들어오면 팔자 다 피는데?

왜 돌려 보내냐 말이죠.

아예 다음 기회 조차도 상실케 만드는

근심케 만들어서

 

다시는 안 돌아오게 하는

이 철저한 단절성 ~~~~

 

모든 종교 모든 교회가 예수님을 죽이고 싶어 할꺼다 말이죠.

약대를 삼켜야 하는데

하루살이를 차라리 근심케 만들어 돌려 보내지?

왜 약대를 걸러내냐 말이죠.

 

종교든 세상이든 국가든

하루살이를 걸러내는 것이

암묵적인 소통방식이다 말이죠.

그리고 약대는 삼킬려도 하는 것이 모든 곳에서 소통되는 방식이다 말이죠.

부자를 마다하는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거꾸로 부자는 쫏아내고

가난한 자는 극진히 대접하고 섬기고

의로운 자는 쫏아내고

부정한 죄인은 끝까지 끝까지 끝까지 섬겨 죽기까지 복종하고?

 

이게 말이 되나요?

 

 

이게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이라는 것은 막연하잖아요

그냥 보편성이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구체적 보편성입니다.

 

보편성이 안 통해서

보편적으로 소통되는 신관 구원관 진리관 등등 안 통해요

 

오로지 구체적 보편성만 즉 단절성만 추구하신다 말이죠.

다른 말로 성령만 예수의 영만 예수의 마음만

십자가의 영만 추구하십니다.

다른 것 일체 안 통합니다.

 

그래서 그 단절성의 증상물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사도요한 본인이 그 단절성으로써

단절성의 증상물로써 표현 합니다.

 

어떻게

구체적 보편성으로 표현 합니다.

 

분명 본인이 알던 예수님은 흠모할 모양이 없었다 말이죠.

그런데 지금 어떻습니까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겁니다.

 

놀라운 표현 하나가 있는데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이요 라고 했다 말이죠.

 

표현이 이상하지 않습니까?

모든 성경은 하나님이 감동으로 쓰여졌다는 말이 맞는 이유가

모든 성경이 단절성으로 적혀 있다는 겁니다.

즉 말도 안되는 소리 뿐이다는 겁니다.

말 되는 소리가 없다 말이죠.

말 되는 소리가 없다는 말이 맞다 말이죠 ㅋㅋㅋㅋ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모순성만이 진리이다는 겁니다.

부조리성만이

스캔들 만이 진리이다는 겁니다.

 

얼마냐 표현이 이상하냐 하면

그가 찔림을 당하는 것을 본 자도 볼 것이요 이렇게 안 적혀 있고

그를 찌른 그 당사자가 본다는 겁니다.

말도 안되죠

그를 죽인 그 당사자가 본다는 말은

물론 그 정도로 제대로 사신분이고

정작 그를 찌른 자는 죽어 없다 라는 것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니 가해자는 없애 버려서 본인은 살아 있어야 하는데 없어져 버리고

정작 찔림 당한 자는 죽어 사라져 버려야 하는데

오히려 사라지지 않고 또렷하게 살아 있다 말이죠.

 

이것을 뭐라고 하면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다른 말로 단절성 또는 분절

또는 원인 없는 결과 이다 말이죠.

 

쉽게 한다고 해놓고서는 더 어렵게 된 것 같은데

낯선 용어, 잘 안 접하는 용어 때문이지

또 기존의 자리잡은 의미 때문이지

그냥 포기해 버리면

술술 이해가 됩니다.

즉 말 되는 소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말 안되는 소리가

단절성이요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말 되는 소리는 진리가 아니다는 거죠.

말되는 진리인 보편성은 널리 널리 모든 사람들이 다 알아먹는 것, 보편성은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보편적 진리)은 진리가 아니다는 겁니다.

오히려 우상이다는 겁니다. 가만히 멍청하게 인간이 갖다 바치는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 하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도 못하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유대교(모든 종교의 대표성)의 하나님

유대인(모든 인간의 대표성)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 나머지 민족, 종교, 신은 이 대표성으로 인해 들통나는 겁니다.

 

멍청하게 인간이 오기를 기다리는 천국이다 말이죠.

그런 천국은 없어요

그 반대이지

 

천국이 침략 한다 말이죠.

쳐들어 오더라 말이죠.

 

어떻게????

 

바로 저 인간들이 조작해 낸 천국과의 차이성으로 또렷하고 명료하게

밝히 보이면서 두 패로 쫘악악 갈라내면서 말이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 벌벌 떠는 예수님이 바로

유일한 약속이자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단절이다는 겁니다.

 

쳐들어 오는 천국 곧 예수님 자신이 천국이다 말이죠.

 

인간들이 바라는 유토피아 이데아 다 사기라는 것이

예수님 때문에 들통나버리는 겁니다.

 

철학자들 거짓선지자들 예수님 가만히 두겠습니까?

진리를 망쳐놨으니 ㅋㅋㅋ

성전을 허물어 버렸으니

이데아를 뭉개버렸으니

 

그래서 반드시 부정성

껄끄러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그냥 라합이 아니라

반드시 부정성을 붙여서

반드시 기생 창녀 세리라는 불의한 의미를 반드시 붙이는 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보편성의 반대

부정의 부정이다 말이죠.

 

그래서 기생 라합이 바로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는 것이

 

무식하게 기생라합이 천국에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갔다고

기생 창녀에 대한 반발성을 누가 시비를 거는데

바보같이 예수님이 곧 기생라합이다는 겁니다.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영광인데

이 십자가의 지혜가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지혜로운게 아니라

정반대로 미련하고 어리석다는 겁니다.

거 봐요 구체적 보편성이지

단절성이지

분절 이다 말이죠.

 

저들이 스스로 발라 차버리게 한다는 겁니다.

분절 시키고자 스스로 갈라지자 라고 나서돌 하는

 

이게 첫사랑의 의미 아니냐 말이죠.

스스로 발로 차버리게 하는

첫사랑이 뭡니까?

유치 치사 짬뽕 아니냐 말이죠.

 

그 구체적 보편성을 발로 차버리고

이제는 보편성으로

유치함을 다 제거하고

치사한 것 다 제거하고

세련되고

남의 눈을 의식해서 사랑하겠다는

윈도우 부부? 창문에서만 부부이고

창문에서 보여지지 않는 곳에서는 남남인

믿음도 행함도 신앙도 모조리 남의 눈 때문에 ㅋㅋㅋㅋ

 

심지어 십자가도 ㅋㅋㅋㅋ

 

그러니 그냥 라합이 아닌 기생라합이라야

저들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리는 기능으로 작용하는 겁니다.

부정의 부정이니까

부정한 마귀의 눈에 나쁜놈으로 보여야만 하는

그래서 막사는 놈은 마귀에게만 잡히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마귀에게만 잡혀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는 마귀에게만 잡혀 오는 겁니다.

 

얼마나 고맙냐 말이죠. 새 옷 입혀 줄려고 기다렸는데

데리고 와 주니 ㅋㅋㅋㅋ

 

주님 쪽에서 자신의 증상물 자신의 새피조물로 삼아서

예수님과 하나된

그래서 증상물로써

예수님이 기생라합이다는 겁니다.

 

이 기생이 졸지에 예수님의 족보에

그래야 마귀가 격동하고 견디지를 못하는 겁니다.

 

거 보세요 바로 바로 반응이 나타나잖아요.

얼마나 감사한지

마귀가 반발하면서 바로 태클을 걸더라 말이죠 ㅋㅋㅋㅋ

 

이게 말이 되는 소리로 그 자에게 듣낄까요?

절대로 말이 안되니까 반발 하죠

미끼를 덮썩 무는 겁니다.

 

이길수 없으면 안 물어요

이길수 있다고 여기기에

부정성을 덮썩 무는 겁니다.

기능을 말이죠.

 

존재는 절대로 안 물어요.

잉여성이 없거든요,

늑대에게 늑대를 보내면 안 물어요

늑대에게 양을 보내면 바로 바로 문다 말이죠.

덮썩 ~~~~~~

 

그래서 더 반발하도록

예수님이 기생라합이다고 말하면

아마 미쳐버릴껍니다 ㅋㅋㅋㅋ

 

인간의 구별짖기는

자기 보다 높은놈 잘난놈으로는 안해요

힘들어요

쉬운 쉬운 존재를 찾아요,

자기 보다 못한 놈

그래야 뜯기가 쉽지 딱딱한 것 뜯으면 이빨 다 상한다 말이죠.

짐승이니까

 

그냥 라합이 아니라

기생라합이라고 해야 덮썩 물어요.

 

즉 자기존재는 지금 현재 기생이라는 그 의미와 거리두기가 제일 멀어졌기에 안전빵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덮썩 무는 겁니다.

애매하고 거리가 짧으면 안 물어요.

얼마나 조심성이 많은데

완벽한 무방비의 무능한

양을 잡아먹는다 말이죠.

먹이사슬이 그래요 어쩔수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죽였다 말이죠.

양 이라서

 

기생라합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기생라합이다는 겁니다.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막살지 않는 자를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막사는 자를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예수님이 막사시는 분이시거든요.

 

이 단절성을 쉽게 말해서 모순성이지요.

이 모순성을 무슨 수로 극복하시겠습니까?

원인 없는 결과인데

 

과거 없이 미래만이 덮쳐 버렸는데

과거가 날라가 버렸다니깐

삭제 당해 버렸어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그런데 마귀는 자꾸 과거를 들추어낸다 말이죠.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로

즉 저 놈이 무시했던 피 용서로 덮어버린 것을

자꾸 뚜껑열어서 피용서 카바씌운 것을 덮개를 치워버리고 들따 볼려고 하더라 말이죠.

 

 

마귀는 과거 승부 걸자 이고

예수님은 미래완료로 승부걸자 라고 하시는 겁니다.

현재란 이 과거가 덮느냐?

미래완료가 덮느냐의 싸움현장이자

결과물입니다.

 

모든 허물을 다 덮은 십자가의 피 용서냐

아니면 피 용서를 거두어내고서 따져보자 라는 것이다 말이죠.

 

자 처음으로 다시 돌아와서

그래서 양을 잡아 죽였는데

지금 그 양이

만만했던 무능한 양이

먹이사슬 제일 아래 였던 양이

지금 어떻습니까?

늑대 보다 더 위의 순서에 있는

사자 보다 더 높아

 

그래야 찌른 자도 본다는 말이

말도 안되는 이 말이

말이 안되기 때문에 맞다 즉 진리이다.

그냥 진리가 아닌 구체적 보편성의 진리이다는 겁니다.

늑대가 양이였던 분을 잡아먹었는데

먹이사슬 제일 높은 분임을 보고

또 잡아먹을려고 할까요 아니면 죽게 되었다고 벌벌 떨면서 볼까요?

 

사도요한이 지금 그 심정이다는 겁니다.

 

죽게 되었다고

 

성령을 받았다는 말은 죽었다는 겁니다.

? 너무 너무 영광스러움 앞에서

왜 안 타죽지 이상해 이상해

뭘 해도 샬롬 샬롬

간밤에 주를 만나고도

주의 얼굴을 보고도 왜 안죽었지?

이해가 안된다는 겁니다.

 

주의 얼굴을 보면 죽거든요,

 

이 봐요 죽었잖아요

사도요한이 말이죠.

 

과거에 봤던 그 예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다음주에 할 건데 미리 보면

 

(1:17, 개역) 내가 볼 때에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죽은자 같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죽은자를 찾겠다고 한 자가 도리어 죽이고 다녀 ㅋㅋㅋ

? 죄인 되라고 하니까 죄인이라는 기능은 될줄 모르고

죄인이라는 존재를 되게 해서 죄인이라고 우겨요 글쎄

죽은자는 존재가 아니라

기능이다 말이죠.

 

부정성

 

존재는 죄인이라는 존재가 되었으니까 거봐 나 옳잖아 라고 존재로 남아요

긍정성으로 남는다 말이죠.

죄인 되라고 하니까 죄인 되었으니 거봐 나는 너가 못 되는 죄인이 될수 있잖아

넌 못하지 이라고 있다 말이죠.

 

죽은자를 찾습니다.

성령받은 자를 찾습니다.

구체적 보편성과 하나가 된 자를 찾습니다 이래 된다 말이죠.

구원자와 하나가 된 자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고

의사와 하나가 된 자가 건강한 자가 아닌 환자 이다 말이죠.

 

존재는 따로 챙겨놓아요

마치 강도만난 자를 그냥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기능이 아니라

존재이기 때문에 만질수도 가까이 할 수도 없다 말이죠,

부정성을 만질수가 없어요.

따로 있거든요. 존재는 존재를 따로 만나요

자기 마누라 이다 말이죠. 존재이거든요. 기능이 아니니까

제사장도 레위인도 따로 꼬불쳐 놓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못 만져요

만지고 싶어도 못 만지도록 마누라가 말려요 말려 ~~~~~

 

그러나

사마리아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써

강도만난 우리들을

부정한 우리들을

유대인으로써가 아닌

대제사장으로써가 아닌

왕같은 제사장으로써가 아닌

유대인의 왕으로써가 아닌

그래 되면 십자가의 의미가 아니다 말이죠

반드시 십자가란 부정성의 의미이거든요,

용서 용서가 아닌

반드시 마귀가 반발하는 용서이어야 하기에

의인들 다 냅뚜고

그들 코 앞에서 손 마른자를 고치셨듯이

어차피 반발하기에 반발할 세력을 쫘악 깔아놓고서

용서를 해야 그 용서가 구체적 보편성의 용서이기에

반발하지 않는 용서는 용서가 아니무이다. ㅋㅋㅋ

그래서 부정한

유대인의 원수

사마리아인으로써

그냥 사마리아인이 아니라

약을 바짝 올리고자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써

누가? 예수님이

강도만난 자 그 부정한 시체를

만지시는 겁니다.

부정함을 저들은 때려죽어도 못 만진다는 뜻이다 말이죠.

예수님의 족보에 기생이 들어간 것에 대한 반발성을 반드시 나타내도록 하는 부정성이다는 겁니다.

 

이게 단절성

구체적 보편성

곧 성령

즉 육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고자 반드시 반응하고

성령은 육의 소욕을 거스리고

반드시 맞물리도록 하는

 

그러니 부정성으로 나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이제 내가 알던 그 예수님이

완벽한 거룩

완벽한 심판으로 나오게 되니까

 

얼마나 제대로 된 거룩이요 제대로 된 심판이였으면

전에는 그 앞에서 숨도 못 쉴정도로 바짝 엎드려 죽게 되기는커녕

만만하게 봤는데

지금은 내 몸이 저절로 기능하더라 말이죠.

저절로 자동으로 엎드려 죽더라 말이죠.

 

전에는 내가 자동적으로 무시했는데 내가 자동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이제는 내가 자동적으로 못 박히고 내가 자동적으로 바짝 엎드려서 바닥을 쳐 박더라 말이죠.

 

욥이 그랬잖아요

세친구는 보편성을 자꾸 외치고

욥은 구체적 보편성으로 인해 머리를 땅에 박을 정도로 바짝 엎드려 죽게 되더라 말이죠.

미래완료가 미리 덮쳐버렸다 말이죠.

 

세 친구는 회개 하라고 자꾸 과거를 따지고 말이죠.

원인을 따져요 글쎄

 

원인이 있어야지?

 

피부병 아토피는 성령이 침범한 결과이다 말이죠.

그래서 죽게 되었다 말이죠.

 

아니 마귀 아닙니까?

그 마귀 누가 꼬쳤나요? ㅋㅋㅋㅋ

마귀가 언제 독자적으로 움직이던가요?

 

마귀도 다 주님이 조종하시는 겁니다.

이걸 또 반발하는 자들이 있어요 글쎄

그러니까 말 안되는 구체적 보편성이라니깐 ㅋㅋㅋㅋ

 

마귀는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행동 못합니다.

 

마귀를 격동케 할려고 세상이 견디지 못하게 하는 지혜로써

십자가의 지혜인데

예수님의 피 용서 자작극인데

마귀 없으면 일이 안되죠

 

그래서 마귀가 반발하는 일곱교회이다 말이죠.

 

마귀가 반발하지 않으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오락 단체일 뿐이다 말이죠.

 

욥에 대해서는 마귀가 반발을 하지만

욥의 세친구에 대해서는 마귀가 전혀 반발하지 않아요.

 

그래서 욥을 저들 속에 집어넣었다가 빼내시는 겁니다.

차이를 내시고자

갈라낼려고

구별 시키는 겁니다.

 

과연 구별한자 꼬라지 보자 말이죠.

아이고 구별한자 밤새도록 끍어대고 있네

저게 무슨 구별된 자 입니까?

아무리 봐도 아토피 저주 받은 거 같은데

 

거룩한 자 맞아요?

 

바로 그 아토피 저주가 바로 구별을 이미 했다는 증거이다 말이죠.

그러니 덮썩 물 잖아요.

 

부정하니까 거룩과 가장 멀다고 덮썩 물었는데

도리어 말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마귀가 격동해요

저 부정한 계집이 왕의 신부가 되었다고 왕비가 되었다고

천한 계집이 온 애굽의 주가 되고 아비가 되었다고

 

견디질 못해요

탕자가 금가락지를 꼇다고

 

아니 맏아들이 금가락지를 껴보세요

격동 하는가?

견디질 못해 하는가?

 

말도 안되는 놈이 금가락지를 껴야 마귀가 견디질 못해 하지

 

이 부정성을 글쎄 마귀랑 똑같이 시비를 거네 글쎄 ~~~~~

 

마귀새끼 라서 그래요 ~~~~

 

그래서 아무나 보면 안되요

 

반드시 그를 찌른 자가 보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야 말이 안된다 말이죠.

 

참 이것 조차도 꼼꼼하게 부정성으로 도배를 ~~~~~

구체적 보편성으로 도배를 ~~~

성경 전체가 십자가 라는 부정한 스캔들의 피로만 도배가 되어 있다 말이죠.

말 되는 소리가 단 하나도 없다 말이죠. ㅋㅋㅋㅋㅋ

 

참 내가 말하고도 기가 차다

 

누가 듣겠습니까?

 

듣는 소리를 해야지

아무도 말 귀 못 알아 듣는 소리를 해야 하니

 

그래서 반드시 일곱 교회 조차도

부정성으로써

 

반드시 이 일곱교회를 반발하는

일곱교회를 붙드시는

주의 오른손으로 잡으신 일곱교회에 대한 반발 세력을

 

반드시 그 반대편에 세우시는데 그것이 바로 사단의 회를

일곱 교회 하나 하나 마다 배치를 시키시는 겁니다.

 

여기서 또 놀라운 점을 제가 발견했는데

깜짝 놀랬어요.

 

아 그래서 계시록은 미래에 아직 미완료 상태가 아니라

이미 다 이루었다 라는 말씀이 맞구나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룬 결과물이

계시록이지

역사상에서

존재상에서 백날 게산기 두들겨 보세요

답이 나오나?????

 

이미 다 끝났다니깐

 

아 참 무엇을 발견해서 놀랬는가 하면

 

이 사단의 회가 글쎄

 

예수님의 4 복음서에서 나타난

예수님의 활동 마다 반드시 사단의 회가 반대편에 놓이고

예수님이 벌리시는 복음 사건

십자가 사건 하나 하나 마다 주의 오른편에 선 자들이

글쎄 일곱교회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러니 이미 다 나타나있더라 말이죠.

그 사단의 회를 보고 제가 놀랬던 것이 바로

 

가장 사단의 회 라는 속성과 거리를 가장 멀리 멀리 두었던 자들

곧 유대인들 모습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반드시 대동해서 예수님께서 그들 코 앞에서

세리 강도 창기를 구원했듯이

 

사단의 회 앞에서

일곱교회를 자녀처럼 때리시고 나무래시고 토닥 토닥 어루만져주시는

 

마치 바리새인 코 앞에서 사마리아인을 세리를 창기를 강도를 다루셨던 모습이였다 말이죠.

 

그땐 시시하게 보였던 예수님이였는데

죄인의 집에서 먹고 마신다고 비웃었는데

그 비웃은 당사자가

그를 찌른 당사자가

허걱

납작 엎드려서 죽게 되어 버렸다 라는 겁니다.

 

왕이 행차 하면 얼굴 봐야 엎드리지 하고 엎드리는게 아니다 말이죠.

무조건 이유 없이 얼굴도 확인하지 않고서도 엎드린다 말이죠.

 

그런데 어 그때 그분이 그 모습이 아니네 라고 하는데

내 몸이 저절로 나사가 풀린 듯 바짝 엎드리 라고 내 몸이 나를 다구쳐서

다리에 힘빠지고 몸이 저절로 절을 하듯이 머리를 땅에 쳐 박아서

죽은 듯이 하더라 말이죠.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자동으로 말이죠.

 

그때 예수님을 극구 부인했던 이 몸뚱아리가

이 육체가

싫어버린바 되었다고 고개를 돌렸던 육체가 저절로 바짝 엎드리더라 말이죠.

 

내 마음은 그때 안 그랬었었었는데

내 육체가 말을 안들어

그랬던 육체가

오히려 내 마음 보다 더 앞서서 바짝 엎드려 죽는 겁니다.

 

어 이 놈 봐라????

그때는 그렇게 무시하더니

내 몸이 사시나무 떨 듯이 벌벌벌벌 떨더라 말이죠.

 

어쭈 너 왜그래? ??????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가장 반발했던 자가

가장 높이 찬양하는

가장 반발했던 청년 사울이

하나님애 대한 열심히였거든요.

그랬던 사울이

가장 십자가의 피 용서를 가장 높이 찬양하는 사도바울

곧 배신자가 되었다는 겁니다.

기생라합이 되었다는 겁니다.

 

유대교의 가장 최고의 행동대장이

십자가의 가장 최고의 증인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이 구체적 보편성

가장 반발했던 그 당사자가 가장 앞장서는 증거인이 되는

 

아니 왜?

도대체 뭘 봤는데 뭔데 뭔데 뭐뭐뭐

 

라고 청년사울이 도대체 뭘 봐서 저렇게 되었나 싶어서 같이 봤다 말이죠.

찌른 자도 도대체 뭘 봤길래 저렇게 180도로 변했나 싶어서 같이 봤다 말이죠.

 

보니까

무시무시한 거룩이 지나가는데

저절로 바짝 엎드려져서 죽은자 같이 되어버리는

내 몸뚱아리를 내가 볼 정도로

무시 무시한 거룩

감히 그 앞에서 되도 않는 거룩을 내밀수 없을 정도로

족히 비교도 안되는 거룩을 보고서는

 

내 몸이 사시 나무 떨 듯이 덜덜덜 떠는 내 몸을 내가 볼 정도로

 

아 이제서야 기생라합이 간담이 40년 동안 녹아서

왜 이 나라 너거 꺼다

왜 이 땅 문서 다 너거들 했뿌라 라고 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더라 말이죠.

 

기생 기생 이라는 부정성이 전혀 부정하지 않고 껄끄럽거나

거리끼는 불편하거나

막살아라 라는 표현에 걸려넘어지지 않고

오히려 본인이 막살려고

자기는 기생이라고

창녀라고

이런 원수도 예수님이 용서하셨다고 외치는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나의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어요 라고

그 사마리아 동네에서

성전에서 예배 드릴 필요가 없어

예수님과 오손 도손 이야기를 몇 달동안 내내 나누고 있지

그것이 신령과 진정한 예배인 사귐이지

 

뭐 성전이 뭐 필요하며

안식일이 뭐 필요하며

 

오히려 그런 것들이 더 부정해 ~~~~

예수님과의 사귐에 방해꺼리가 돼

사귀지 못하도록 하는 것들인줄 모르고

배설물인지 모르고

그것이 거룩한 줄 알고 ~~~~ 쯧쯧쯧

 

사마리아 우물가의 여인과 함께 동네 사람들과 함께

그저 모닥물 피워 놓고 밤새 밤새 구체적 보편성인 진리를 나누었으니

곧 예수님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여섯남편 데리고 온다

없습니다.

맞다 지금 남편도 없제

내가 너의 신랑이 되어 줄게

내가 너의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어 줄게

 

그래서 몇 달 동안 그 생명수를 마음껏 마셨다 말이죠.

다시는 목마를까요 안 마를까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이미 드렸뿟네 그려

 

아 그런데 제가 이 이야기를 어무이께 하면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는 이렇게 하던가요?

전혀 안해요 글쎄

 

신령과 진정한 예배가 글쎄 예수님이였뿟넹

아까는 기생라합이 예수님이 아니다고 했고

예수님이 기생라합이다고 했는데

사람이 앞에 있으면 그건 예수님이 아니고

예수님이 앞에 나와야 기생라합이다고

기능의 의미를 나타낼수가 있지만

 

신령과 진정한 예배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는 예수님이다

믿음은 예수님이다 라고 말해야

저쪽이 화를 내도록 하는 기능이 저절로 반응한다 말이죠.

 

존재가 아니기에 기능이기에 앞에 붙이고

존재면 뒤로 해서 기생이라는 부정한 기능

세리라는 기능을 부여해서

예수님을 앞세울때에

저들이 앞세우는 저들의 아비인 배후세력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물론 바리새인이 마귀가 자기들 아비 라고 내세우던가요?

당연히 아니죠

오히려 예수님에게 뒤짚어 씌우죠

바알세불 걸린 대 마왕이라고

 

그럼 바리새인은 누구를? 당연히 모세요

당연히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지요.

다윗이지요.

부정한 것 붙일수가 없지요.

 

오늘날은 그럼?

당연히 예수님은 당연히 들어가고

바리새인이 하나님을 내세웠듯이

오늘날도 당연히 하나님도 들어가고

십자가도 들어가고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도 다 들어가요.

 

누가 부정한 것을 집어넣겠어요??

 

그래서 부정한 의미로써의 기능을 예수님이 자신의 증상물로써 내세우면

마귀가 얼마나 바로 바로 즉각적으로 반응을 한다 말이죠.

 

이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지혜이다 말이죠.

피 용서에 대한 반발성이다 말이죠.

 

가만히 있는 지혜는 없어요.

움직인다 말이죠.

그냥 움직이는게 아니라

부지런히 마귀를 격동케 하고

마귀가 견디질 못하게 하는 지혜이다 말이죠.

 

탕자가 금가락지를 낄 때

마귀는 미쳐요

맏아들이 금가락지를 끼면

하나도 격분 안해요

 

어디 그 뿐이겠습니까?

탕자가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아니 왜?

 

어두운 데서 끄집어 내었기 때문에 반짝 반짝 빛난다 라는 겁니다.

 

저번에 계시록 마지막 부분 예루살렘도성의 12 보석이

그냥 돌삐일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빛이 들어가고

약속이 들어가고

금가락지가 끼여지고

새신발이 신겨지고

살진고기를 먹이시고

좋은 옷을 입히시고

성령을 주시니까

 

졸지에 졸지에 그 아무것도 아니였던 돌삐가

무가치했던 돌삐가

반짝 반짝 돌 삐 속에 마치 심장처럼 뛰는 약속이 반짝 반짝 빛을 비추니까

돌삐가 보석처럼 반짝 반짝 거리면서

누가 봐도 돌삐가 아니라 보석으로 보더라 말이죠.

 

부정한 돌삐이어야지만 마귀가 격분해요

저거 저거 돌삐인데

기생인데

창녀인데

세리 매국노 친일파 인데

 

왜 보석이지?

 

말도 안돼

 

그래 그래 바로 이거다 말이죠.

말도 안되어야 반발을 한다 말이죠.

여러분 속지 마세요 저것은 돌삐이지

보석이 아닙니다 속임수입니다 라고

마귀는 거짓말을 못해요 글쎄

 

문제는 피 용서를 말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생은 부정합니다.

창녀는 부정합니다.

말 맞잖아요.

 

그 말 마따나 걸레를 빤다고 새 옷 되던가요?

그래서 열심히 잡아서 예수님께 베드로를 잡아 왔거든요.

걸레 빨던가요? 안 빨아요.

걸레 버려요

그냥 새옷을 입혀요

베드로를 세탁기에 넣어 빨지 않아요.

그냥 예수 그리스도의 자신의 옷을 입혀 버려요

 

빨아서 깨끗해 질 리가 없지만

빨아서 때가 쪼끔 사라졌다 칩시다

마귀가 격분 안 합니다.

 

마귀가 격분 할려면

예수님 자신의 거룩한 옷을 입혀줘야

예상 못했던

말도 안되는 일을 주님께서 하셔야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셔야

그래야 반발 합니다. 격분해요.

 

그 흰 옷을 계시록은 입이 마르고 달토록

이 일곱 교회에게 꽃단장을 시키십니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일곱 교회가 책망 듣고 야단 듣고

그것만 보도록 마귀들에게 삯꾼들에게 속았는데

 

아니 흰 옷을 입히시더라 말이죠.

도대체 뭐가 부족합니까?

자기 옷을 벗어서 주시는데??

 

그것도 그 흰옷을 신부 꽃단장을

쉽게 말해서 혼인잔치때만 입는 옷? 뭐죠?

신부드레스 새하얀 드레스를

 

옆에서 따지고 있는 마귀 보란 듯이

코 앞에서

 

반드시 사단의 회 코 앞에서 말이죠.

 

그래야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완벽한 거룩 완벽한 심판의 주로써

즉 최고 중의 최고이다 라는 겁니다.

그 분이 글쎄

 

제일 천하고 천하디 천한

구스 여인

기생 라합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런 베드로에게까지

매일 매일 달려와서 창문을 열어 달라고

술람미 여인에게 그 섬 머슴아 같은

남자 손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돌 머슴 같은 여인에게

나랑 결혼해줘 라고 매일 밤마다 찾아와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예수님께서 사랑하시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죽기까지 내어주신

그 사랑에 그만 마귀는 혀를 내 두르는

 

바로 이 장면이 바로 창세전에 타락한 천사가 쿠테타를 일으킨 그 장면과 똑같잖아요

 

그러니 이 계시록이야 말로

 

그 천하디 천한 구스여인과 온유한 모세와의 결혼식처럼

그것은 맛배기 이고

 

진짜 실상

진짜 리얼의 실상이

 

십자가의 피 용서로 인해

다 이루심으로 벌어진 것을 누리는

혼인잔치의 그 기쁨을

 

우리는 이 금촛대 사이로 지나가시는 인자를 보고서

나 같은 구스여자와 같은 천한 자를

신부 삼고자

 

신랑 입장 하시는 그 위엄

그 거룩

상상도 못할 심판의 주인

거룩 중의 거룩의 주인으로써

 

마귀도 머리 쳐 박고 엎드린 채로 만드시는

 

그 위엄의 신랑 입장이

주님이 설레어서 이 계시록 종말잔치 곧 혼인잔치를 벌리시고자

 

드디어 입장 하시는 겁니다.

 

이루 말도 못할 감격으로 너무 기뻐

숨 쉬는 것도 까먹을 정도로

심장이 벌컥 벌컥 뛰는 마음으로

 

이 신랑 입장을

우리는 부러워 하는 마음으로 일곱교회

곧 기생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랐데 글쎄 부러워라 부러워

그런 마음으로

일곱교회가 글쎄 신부래 라고 다들 부러워 하는 마음으로

저절로 그런 부러워 하는 마음이

이미 일곱 교회 속에 들어온

일곱이 붙잡은 신부 로써

 

이 혼인잔치를 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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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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