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가라 생명책 과 도적같이 임한 선물 (동행=함께 다니리니) (3, 1- 6)

 

산자 같으나 죽은 자 vs 너나 되세요 어린아이 (죽은 자 같으나 산 자)

계 11 산 자 같으나 죽은 자 vs 너나 되세요 어린아이 (죽은 자 같으나 산 자) (계 3, 1- 6).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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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개역)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3:2, 개역)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3:3, 개역)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적 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3:4, 개역)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3:5, 개역)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3:6,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1, 새번역) "사데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것이다. / 또는 '천사'

(3:2, 새번역) 깨어나라. 그리고 아직 남아 있지만 막 죽어 가는 자들을 굳건하게 하여라. 나는 네 행위가 나의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3:3, 새번역) 그러므로 네가 그 가르침을 어떻게 받고 어떻게 들었는지를 되새겨서, 굳게 지키고, 회개하여라.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않으면 내가 도둑같이 올 것인데, 어느 때에 내가 네게 올지를 너는 알지 못한다.

(3:4, 새번역) 그러나 사데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 몇이 있다. 그들은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인데, 그들은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3:5,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인데, 나는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않을 것이며, 내 아버지 앞과 아버지의 천사들 앞에서 그의 이름을 시인할 것이다.

(3:6, 새번역)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수 있습니까? 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우상을 쫏고 있는 인생들의 질문입니다.

인간의 소원이거든요. 허구인 모든 인생들의 소원입니다.

예수님 예수님 저의 소원을 들어주세요 라고 마술램프 취급하듯이 말이죠.

 

그런데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예상치 못한 선물은

아무도 원치 않는 겁니다.

오죽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그럼 구원을 얻겠냐 라고 되묻습니다.

맞습니다.

즉 소원 안 들어준다는 말을 들었거든요. 아니 구원이 불가능하데요 글쎄???

 

정말 제대로 된 답변을 들었다면 되묻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정말 제대로 된 결과를 얻으면 원인을 없애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즉 기존의 것들이 다 무너졌다는 뜻이거든요. 허구임이

허상 우상 임이 제대로 들통났거든요.

 

아무도 되묻지 않고 수긍하는 답변을 했다면

제대로 된 답변이 아니다는 겁니다.

 

종교가 그래서 짐승의 수 666이다 말이죠.

다들 수긍해요 글쎄 ㅋㅋㅋㅋ

얼마나 안 맞으면, 너무 너무나 달랐으면 되 묻도록 되어 있는데

얼마나 수긍을 하고 있는지

아무 댓꾸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 기존의 종교

곧 우상숭배자들이다는 증거인거죠.

 

누가 그럼 구원을 얻습니까? 캬 지금 다시 봐도 명대사입니다.

어디 이것 뿐이겠습니까?

 

모세가 저들은 나의 말을 들을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합니다.

바로 그겁니다.

들을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가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들을 것 같으면 말라꼬 가겠습니까?

 

애굽만 안들을려고 할까요?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도 전혀 원하지 않았던 구원입니다.

그래서 갑자기 아이구 배야 라고 핑계를 대듯이

아이고 입술이야 나는 입이 뻣뻣한 말더듬이라서 안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즉 이 정도로 그 어떤 인간도 주님의 구원방식에 동의를 아무도 못하는 겁니다.

모세 조차도 말이죠.

 

저들이 추호도 원치 않는 구원이다는 겁니다.

 

누가 갇혔다고 포로되었다고 얽매였다고 살려주세요 라고 외칩니까? 아무도 여기지 않아요.

예수님 혼자 너희는 포로되었고 갇혔고 얽매였다고 풀어주러 왔다고

예수님 혼자 그래요

 

불났어요 늑대가 나타났어요 라고 예수님 혼자만 외칩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쳐다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늑대를 풀어버립니다.

그래서 불을 지르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불뱀을 풀어버리는 겁니다.

 

이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니가 가라 하와이 ~~~~~~~~~

 

그래 그 좋은 구원 니가 받아라 구원

구원하겠다는 구원자 꼬라지 하고는

 

너나 구원 받으세요 ~~~~

 

친절한 애굽 노예들(친절한 금자씨) 이다 말이죠.

 

명대사가 오늘 줄줄이 나오는데

 

본인이 이렇게 친절한데 더 나은 친절한 예수씨를 쳐다보겠습니까?

이미 본인들이 주인공으로써 그 명대사를 치고 있는데??

 

이게 우상이다는 겁니다.

 

이게 인생입니다. 수에 칠 가치가 없는 인생

 

이미 구원받았는데

그래서 우상인데

뭘 구원 받아요????

 

구원의 장치들이 새때까리로 널려있는데????

오로지 흙수저들만이

저런 쓰잘데기 없는 유대독립을 외치고 있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지

바리새인이 뭐가 아쉬워서 저런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느냐 말이죠.

 

혹시 모르니 군자금이나 대주면 되는거고

그래야 저 세리 곧 매국노 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보험 하나 더 드는 겁니다.

 

모세도 알았던 겁니다.

누가 구원을 얻고자 하겠냐 말이죠.

이미 아브라함 조카인 롯이 애굽이 천국동산 같이 여겼듯이

 

(13:10, 개역)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들도 그러하기에

애굽이 천국 같았기에

 

뭔 천국을 또 다시 가겠냐 말이죠.

추호도 빠져나올 생각이 없더라 말이죠.

 

바로 이런 상황에 구원을 펼치는 겁니다.

갇혔다

포로되었다

얽눌렸다 라는 의식을 전혀 가지지 않은 상황에서 말이죠.

 

그럼 이 희년이라는 기쁜소식

곧 복음은 누구한테만 해당되는 기쁜소식이 되겠습니까?

 

불뱀 물렸다고 여기는 자

우상숭배에 빠졌다고 여기는 자

고아 과부 나그네로써 포로되었다고 갇혔다고 여기는 자에게만 해당 된다 말이죠.

 

누가 자신을 불뱀 물린자라고 보겠습니까?

죽게 되었다고 여기겠습니까?

아무도 그렇게 묻지 않습니다.

그저 인간은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라고

불뱀 물려 죽은자로 보는게 하니라

뭐뭐뭐 하면 구원 얻느냐 라고

죽는자로 안 보고

살아 있다고 보고 있더라 말이죠.

이게 인생이라는 허구를 구원받고자 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가룟유다는 갇혔거나 포로되었거나 얽눌렸다면

이스라엘의 독립을 저 애굽의 자립국가 독립국차처럼 해달라고

저 로마처럼 독자적은 국가로써 이스라엘도 그런 독자적인 자립국가로 만들어 달라고

여전히 우상숭배자처럼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말이죠.

 

그딴 구원이나 바랄 뿐이지

진짜 구원 자체도 모를 뿐이고

엉터리 구원만을 바라는 것은

그때 모세의 때나

바리새인의 독립운동이나

오늘날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때나

 

다 엉터리 구원을 바라고 있더라 말이죠.

저마다의 결핍으로써의 소원인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전혀 원치 않는 구원을 준다면 어떻게 하실래예?????

 

나를 원수 만드는 구원

나를 우상숭배자로 만들어 빼내는 구원

나를 죄인 중의 괴수 만드는 구원

나를 창기 세리 만드는 구원

나를 의인이 아닌 죄인으로 만들어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 말이죠.

 

이것이 개인 구원이 아닌

그리스도의 몸 구원이다 말이죠.

동행입니다.

 

나를 구원하는게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구원이다 말이죠.

 

그런 구원을 다들 고개를 돌려버리고

싫어버린바 되는 구원이다 말이죠.

 

즉 때려죽어도 그런 구원은 싫다 싫어 라고 발악을 하고 막 때를 쓰는

내가 원하는 구원 달라고 그러니 뭘 하면 구원해 줄래 라고 한다 말이죠.

 

바로 그런 나를 들추어내는 구원을 좋아라 하겠냐 말이죠 싫어한다 라는 겁니다.

인간들이 십자가 앞에서 얼마나 발악을 했습니까?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 라고 말이죠.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거봐 거봐 예수도 하나님께 원망하고 있잖아 라고

다들 싫어한다는 것에 예수 너도 그렇지? 동의하지? 라고

정당화 할려고 끌어들인다 말이죠.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거봐 거봐 안된다를 것을 아니까 포기하네?

어딜 감히 우리를 꺽을려고 해?

우리가 싫어하는 구원을 감히 주겠다고?

 

너나 잘 하세요 ~~~~

니가 가라 하와이 구원

니나 가지세요 생명책

 

즉 아무도 원치 않았다 라는 것이 증명이 되는 겁니다.

 

구원요? 사람들이 원치 않아요.

이거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럼 사람들이 원하는 구원은 뭔데?

약속이 구원되는 것을 원하는게 아니라

우상이 구원이 되는 것을 원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자기를

생명나무를 따먹고 영생 할려고 하는 짖을

멈추지 못해서

예수님에게 까지 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냐고 영생을 얻냐고 하더라 말이죠.

 

생명 곧 생명책은 생명되신 예수님이 직접 주는 것인데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을 먼저 마시면서

어떻게 하면 생명책에 기록될수 있나요? 구원받나요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뭘 하면 되죠?

 

결국 사람이 원하는 구원은 역시나 없어요.

숙주로써일 뿐이지

우상이 원하는 구원이더라 말이죠.

 

마귀는 존재만 관심 둘 뿐이다 말이죠. 육이 어떻게 영원하게 영생불멸하는가?

여기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면 영생얻느냐 라는 마귀의 전도사로 활동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서 나옵니다.

 

돌이 떡덩이 되게하는 구원자가 되는 소원을 이뤄달라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게 천사가 두손으로 받쳐주는 그런 구원자가 되게 해 달라는 소원 (시편 91)

온 천하 만국을 다스리는 구원자가 되게 해 달라 (시편 2)

 

결국 내가 슈퍼맨이 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남을 7번 용서할 수 있는 구원자가 되게 해 달라고

 

원수를 멸망시키는 어벤져스 Avengers

Avenger 복수하는 사람, 원수를 갚는 사람, 심판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이게 인간이 원하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반대를 하니까

복수한 것이

인간의 믿음이 결집이 된 증거물

곧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믿음이 복수심으로 가득차 있음을 보여줍니다.

어딜 그 앞에서 십자가가 또렷히 밝히 보이는데

구원해 달라고 하느냐 말이죠.

속으로는 복수 해 달라고 하는 줄 모르고 있다 말이죠.

 

복음은 누구에게만 해당된다?

갇힌자 포로된자 억눌린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즉 저는 뭘해도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라는 자에게만

회개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3:1, 개역)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곧 첫아담이다 라는 거죠.

그러나 실상은 죽은자 이다는 겁니다.

 

즉 살아있다고 여기니까 인생을 의지하고 있고

그 인생이 구원 받기를 바라지만

실상은 죽어있는 우상이 너를 숙주로 삼아서

우상이 영생불멸해 달라고 하는 식이다는 겁니다.

 

그 우상요 설사 영생불멸해 본들 그게 사는 겁니까? 죽은거지?

죽어있으니까 그 죽은 것을 계속 잇고 잇고 잇고픈 겁니다.

 

? 새생명이 아니니까 말이죠.

오늘 나오는 생명책 곧 생명은

 

마귀가 생명나무를 못 따먹은 것에 대한 분풀이로써

여전히 이 생명나무를 먹고자 하는 그 결핍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 먹는다는 행위를 설사 성사시켰다고 칩시다.

그게 존재이거든요.

그런데 기능이 안되어요

기능이 되어버리면 존재가 사라져요

원인이 사라져요

원인이 사라지는 곧 마귀 본인이 사라지는 짖을 마귀가 할 리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바로 그런 기능으로써 마귀를 풀어서

그런 존재를 사수할려는 자들을 골라내고자

마귀를 쫘아악 깔아놓는 겁니다.

 

그럼 이렇게 첫아담 곧 이전 것

사라지는 것

기존의 것

삭제되는 것

이 인생을 의지하는

실상은 죽은 것에 대조되는 것이 바로

 

새로움은

기존의 것에서 변화하는게 아니라

그렇게 되면 해 아래 새것이 있게 되죠

해 아래 새것이 없습니다.

 

아예 기존의 것이 사라지는 별개의 것으로써

즉 해 자체 마저도 없애 버리는 새로움이다는 겁니다.

 

새로움이란 곧 생명이란

예수님의 처한 상황에 함께 놓여지는 것이 새로움이요 생명이다 말이죠.

즉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살고 하는 관계성

 

그 앞에서 살려주세요 라고 하는

 

그런데 인간은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자는 없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도둑이 필요 없다고 하더라 말이죠.

 

오히려 미래완료인 새로움에서 새로 만들어내는 새피조물이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자만이

미래에서 와서 투입되어서

억눌린자로 포로된 자로 갇힌 자로써

예수님에게 살려주세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처한 상황에 함께 놓여지는 자가 바로 새피조물이고 생명입니다.

이 예수님의 처한 상황이 아닌 곳은 죽음이요 생명이 아닌 선악의 법칙만 있을 뿐인

누가 누가 구원을 얻고자

무엇을 어떻게 열심히 미션을 완성하는 자 인가 라는 게임법칙으로

아 그래? 원수에 대한 복수를 누가 누가 많이 달성하느냐에 대한 미션 완성

그래 독립투사가 되어서 저 일본놈들을 저 로마놈들을 저 미제국 트럼프 패거리를

저 매국노 세리를 타도 타파 투쟁하자 이 미션들을 달성할려고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묻고 있더라 말이죠.

 

이런 오이디푸스가 한 바퀴를 돌고 돌아 보니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 드디어 외나무 다리에서 만났구나

그렇게 저마다의 오이디푸스를 펼치다가

결국 한바퀴를 다 돌아보니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자기도 누군가의 원수로 자리 잡고 있더라 말이죠.

 

이것이 지난주에 말한 사단의 깊은 것입니다.

 

본인이 누군가의 원수인줄 모르고

자기 원수 갚아 달라고 하나님 부처님 예수님 십자가 모조리 다 끌어오는 겁니다.

이것이 고상하게 변해서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말만 번드르 하게 나오는 거지

실상은 누굴 죽일까요? 내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어떻게 갚을까요? 이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오늘날도 마침이 없이 드리는 인간의 예배는 곧

누구를 죽일까요 라는 겁니다.

언 놈을 제물로 바칠까요?

그 놈만 제물로 바쳐 죽이면 우리가 복 받고 살겠지요?

그 죄만 없애만 우리가 축복 받겠죠 라는 겁니다.

인신제사를 피하겠다는 것이 오히려 실상은 더 인신제사이더라 라는 겁니다.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는 것이 결국 인간의 믿음이다는 겁니다.

이게 죄요 죽은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것과 대조를 이루는 새로움 곧 생명이란

예수님이 처한 상황 곧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하는 모습이더라 말이죠.

원수 갚아달라는 인간의 소원을 안 들어주겠다는 이유로

불태움을 당하는 저 개같은 이방여자 다말 때문에 우리 믿음의 가문이 얼마나 힘들었는줄 아느냐 라고

예수님을 불태워 죽일려고 하는 이 상황

여기에 함께 처하지 못한다면 생명이 없더라 말이죠.

이것만이 생명이더라 말이죠.

기능이지 존재가 아닙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겁니다.

그 미움에 함께 쳐해지지 못하고

정반대로 예수님이 미워 죽겠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림으로써

그 미움과 거리두기 간격벌리기 차별화 시키는 것이

실상은 죽은거다 라고

오히려 저 불 속에 있는 것이 생명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냥 불 속이 아닌

예수님이 불 타고 있는 그 불속인 주와 함께 처하는 상황

어린아이처럼 무시받는 그 무능함

어느정도로 불태움을 당하는

그 정도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이 십자가 사건이 벌어지는 그 상황

 

장로들에게 넘겨지고

삼일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고

제자들은 다 도망치고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외치는 베드로가 죽음으로 함께 해도

죽어서도 오지 못하는 이 처소를 예수님이 마련함으로써

아무도 오지 못하는

이 전반적인 예수님이 십자가사건을 벌리심으로써 벌어지는 모든 주변의 상황이

살아있다고 여겼으니 실상은 죽었다 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시는 겁니다.

 

그럼 산 것은 뭡니까? 새로움은 뭡니까?

이전 것을 지나가게 하는

살았다고 여졌는데 실상은 죽은 것을 들추는 진짜 새로움은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다 말이죠.

 

그러니 아무리 내가 눈물 회개 금식 기도 4종 세트로 함께 한다고 해서

꺽으신 뼈와 함께 할 수 업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그 꺽으신 뼈의 대상물이 되어야

기뻐하는 겁니다.

 

베드로도 같이 죽겠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실제로 죽어도 소요없다 말이죠.

주님이 처소를 마련하심으로써 선물을 줘야

그 선물이 오늘 나오는 도둑입니다.

아무도 원치 않는 낯설기 짝이 없는 선물이 도둑인데

그 도둑이 집주인을 묶고 새간을 빼앗는 겁니다.

주인의 숙주를 말이죠.

 

https://www.youtube.com/watch?v=qN18DmCzoBg

 

도둑이란 빼앗는 약탈의 의미입니다. 그 기능이 말이죠.

그럼 숙주는 스스로 나올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누가 약탈해 주지 않으면

그 주인의 손아귀에서 나올수 없다는 입장이다는 거죠.

 

도둑이 나타나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아무도 도둑을 원치 않습니다.

당연하죠 말도 안되거든요.

누가 도둑을 원합니까?

 

이것은 곧 절대로 네버 네버 네버

자신이 갇혔거나

포로되었거나

얽매인 상황이 아니다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사단의 깊은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구원을 어떻게 하면 받습니까 라고 묻는 겁니다.

즉 이 말은 내 원수 어떻게 하면 갚죠?

이 놈의 원수 때문에 구원받는 조건을 갖추는데 방해가 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저 세리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저 창기 저 강도 저 죄인 저 사마리아인 과 어울리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이 놈의 방해꾼들의 방해를 피할수 있게 해 주셔서 ~~

그런데 그게 바로 그 원수가 바로 너야 너

 

때려죽어도 도둑을 원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니까

세리 강도 죄인 사마리아 인에게는 졸지에 도둑이 나타났다 말이죠.

우물가의 여인에게는 새남편이 되어주마 라고 주님 본인이 주겠다고 했지

사마리아 여인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말이죠.

그저 귀찮은 몸 다시는 물 길어오지 않게 해 달라고

말도 안되는 것 알면서도 그냥 귀찮아서 내 뱉은 고달픈 자신의 처지를 그냥 푸념하듯이 내 뱉었는데

주님 쪽에서 안달이 나서 영생수를 주겠다는 둥

영원히 목 마르지 않게 해 주겠다는 둥

너무 너무 저 바리새인과 차별을 두더라 말이죠.

아니 비교할 만한 것 끼리도 아닌

하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바리새인이고

또 다른 하나는 개같은 이방여자로써 그것도 남편 5에 하나더 추가해서

몰래 남편을 감추고 있는 그러나 그 어떤 머슴아로부터 사랑한번 못 받는

자신의 처지를 보니 기가막혀서 그냥 헛나온 말이

다시는 물길러 오지 않도록

다시는 나를 노예삼는 전남편과 같지 않는 제대로 된 섬기는 남편 주실랍니까?

뭐 없다는 것 나도 알아요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라고 했을 뿐인데

그래 주마

내다 내

내가 너를 나의 신부로 삼고자 나의 피로 너를 깨끗이 씻으마 너를 꽃단장 시켜주마 라고

여자가 갚자기 물동이를 던져버리고

동네사람들 동네사람들 나의 신랑이 나의 더러운 옷 육체를 씻어준데요 글쎄 ~~~

온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더라 말이죠.

 

참 말도 안되죠????

유대인들은 그저 말이 되는 구원을 갖추고자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냐 라고 고상하고 엘레강스하고 온갖 격식을 다 갖추어서

아 그래

그래야 구원받을 만 하지 라고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구원을 추구하는데

예수님은 그들 보란 듯이

말도 안되는 구원을 우물가의 여인에게 펼치더라 말이죠.

오히려 저들에게는 그럼 누가 구원받냐 라는 반응만 나오도록 하고

반대로 우물가의 여인 사마리아여자에게는

오히려 구원 달라는 말 추호도 한 적이 없는데

구원 주고파서 안달이 난 솔로몬처럼 술람미 여인 대하듯이

막 찾아오고 막 침범하고 막직진하는

유대인들은 삥둘러 가는 길을 거침없이 하이킥으로 뚫고 들어오는

도둑

도둑이야 도둑이야 나의 마음을 훔쳐가는 도둑이야 이 노래가 아가서 아닙니까?

 

그래서 주님이 벌리시는 사건

곧 십자가 사건은

도둑이야 도둑이야 도둑 잡아라 라고 나오는 겁니다.

아예 본인을 대 놓고

도둑 안 잡으면 너희들 큰일날걸? 이라고

마귀에게 선포 하는 식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빼앗긴 놈이 있고

빼앗은 놈이 있고

새간 노략물, 전리품이 있고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 놈

빼앗긴 놈 빼앗은 놈 전리품놈 놈놈놈

 

그 장면이 바로 베드로에게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다 라고 막침범해 버리는 겁니다.

안 빼앗고는 못배기는 것이 도둑 아닙니까?

밤새도록 구상해서 도둑이 훔치고자 하는 물건을 반드시 손에 넣는

여기에 마귀라는 숙주의 주인은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백전백패에 놓여지는 겁니다.

 

그래서 도둑놈 개념이 들어가는 겁니다.

부정적으로 표현한 예수님의 표현에 비해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거룩한 표현을 쓰고자 하지만

그 정도로 도둑이 부정한 도둑이 안오면

저런 악마로부터 무슨 수로 건짐을 받느냐 고

예수님 자신이 도둑으로 표현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반드시 이 도둑에게 안 빼앗길려는 주인의 개념이 들어가고

이 둘의 전쟁 속에 고래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새우 곧 베드로 라는 교회 개념이 있는 겁니다.

 

교회란 전리품이라는 기능이지 존재가 아니거든요.

교회를 고상하게 표현한다는 자체가 여전히 마귀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는

이 유대인들과 다를바가 없게 되는 존재 곧 우상숭배에서 벗어날 수가 겁니다.

 

마귀가 베드로를 신나게 잡아왔습니다.

예수님 보셨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 푸하하하하

제가 드디어 잡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원수 제가 갚아드리겠습니다.

이제 이 베드로는 내 껍니다. 내 새간입니다.

도장 찍으세요

 

이렇게 마귀가 베드로에게 주인 행세를 하고

베드로는 심각하게 있는데

글쎄 느닷없이 생뚱맞죠 ~~~~~~~

 

도둑같은 사랑을 이 상황에 따지고 있다 말이죠.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냐?

 

아니 저는 옷이 더러운데요?

아니 주님 지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하시 ~~~~~~~

 

~~~~~~~

너가 나를 사랑하냐고 ~~~~

 

아니 그야 당연히 제가 주님을 사랑하죠 암요 사랑하죠 ~~~~

 

그래서 내가 너의 옷을 세탁기에 빨아서 미리 준비 해 왔잖니?

신나게 그 새옷을 피로 빤 새옷을 미리 준비하고 신나게 기다렸다 말이죠.

맨발로 탕자가 어서 와야 할 텐데 라고 기다린 그 아버지의 마음처럼

자 여기 새옷이란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놈의 옷 때문에 더러운 육체 때문에

더럽다고

제사장 옷 에봇을 더럽혔다고 잿더미로 만들었다고

마귀로부터 잡혀 왔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상상도 못한 선물을 주시다니

그 선물에 그만 마귀가 무너지더라 말이죠.

마귀가 따지고 있던 것들이

이 도둑의 사랑

이 죽음 보다 강한 사랑

시기하는 사랑이

가장 더러운 자인 베드로를 가장 높여버리니까

마귀가 경찰로써 범인을 잡았는데 졸지에 왕비를 잡아버린 꼴이 되더라 말이죠.

네 맞습니다. 눈치 채셨군요. 에스더 왕비.

그리고 하만이라는 마귀

십자가에 매 달려고 하다가 결국 본인이 매 달려 죽는

 

그래서 도둑이라는 부정성입니다.

도둑이라는 반칙이 아니면 구원받을 자 없다 라는 겁니다.

누가 마귀를 결박할 수 있겠습니까?

마귀의 숙주들이? 바리새인이? 택도 없죠.

 

곧 사랑은 말도 안되는 반칙이다 라는 겁니다. 아가서 말이죠.

 

세상에나 금가락지를 끠워주시다니

새옷으로 꽃단장 시켜 주시다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니

 

반칙이다 말이죠 반칙

 

결국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상황 속에 처하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요 죄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게 죄가 아니라

새것을 안보는 것이 죄입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 보는 것이 말이죠.

 

마귀가 펄쩍 뛰고 미친 듯이 격노하더라 말이죠.

마귀가 주장하는 죄는 죄가 아닙니다.

 

놀랍게도 오늘날 모든 신학 모든 교리는

마귀가 말하는 죄를 죄라고 해요 글쎄

마귀의 숙주 답죠

무슨 수로 빠져 나올수 있겠습니까?

완벽한 신학과 완벽한 교리를 갖추었는데

누가 도둑을 원하겠습니까?

말되는 것만 잔뜩 갖추었는데

말도 안되는 짖을 인간이 하겠습니까?

 

내가 너의 더러운 옷을 내 피로 빨았단다

이 새로움만을 거부하는 것이 죄 이다 말이죠

 

죄란 자기가 짓는게 아닙니다.

마귀가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니 마귀가 왜? 괜히 죄가 왕노릇하게 해서 나를 숙주로 삼은게 아니다 말이죠.

 

(7:14, 개역)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7:15, 개역)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7:16,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7:20, 개역)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7:21, 개역)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7:22, 개역)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5, 개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도둑이라는 주인공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갑자기 반칙이 벌어집니다.

725절에서 갑자기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정죄함이 없데요 글쎄

말이 되나요?

그 어떤 신학 그 어떤 논리

그 어떤 이론을 다 들고와서 이거 설명할 인간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없어요

 

이미 결과적으로 반칙이 즉 도둑이 빼앗았다 라고 선언해 버린 이상

이 결과를 바꿀수가 없더라 말이죠.

즉 우물가의 여인처럼 되어버린 결과 뿐이다 말이죠.

정죄함이 없다 무시험 합격 끝 ~~~~

말도 안되는 탕자에게 금가락지 끠워주심이다 말이죠.

 

여기에 맏아들이 이 결과에 반발하는 겁니다.

유대인들이 반발을 해요 글쎄

마귀가 격분을 하더라 말이죠.

 

마귀라는 주인이 죄 지은 더러운자로 만들었다고 노예로 삼았다고 그렇게 좋아라 했는데

하나 꼬투리 잡혀서 영원히 죄인 만들었다고

예수님이 아무리 나서도 소용 없도록

 

그런데 아뿔사

예수님 자신의 피로 덮어버리니까

안 보여요 글쎄

죄가 아무리 아무리 찾아봐도 안 보여요

너희 죄가 붉을 지라도 흰눈같이 흴 것이요

너희 죄가 아무리 주홍같을 지라도 양털같이 희리라

아무리 들따 봐도 더러운 죄가 보이기는커녕

아이쿠 눈 부셔

 

눈이 부셔서

죄를 찾을 래야 찾을수가 없다니깐

너무 너무 아름다운 흰옷으로 꽃단장한 순결한 신부이더라 말이죠.

 

여기에 마귀는 아니야 아니야 이건 아니야 라고 격분하더라 말이죠.

 

마귀가 아무리 죄라고 잡아버린 그 죄는

죄 축에도 못 끼이는 겁니다.

원인 만을 따졌으니까 말이죠.

그럼 원인 갖추면

세 번 부인하지 않으면

막살지 않으면

그게 구원 될까요? 구원이 아니다 말이죠.

유대인 곧 사단의 회가 다 그런 식입니다.

 

죄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을 죄라고 우겨요

진짜 죄는

원인에서 찾는게 아니라

결과에서 찾는 겁니다.

결과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이걸 마귀가 말을 못해요 글쎄

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말을 못한다고 하니까

얼마전에 어떤 놈이 자기는 말 할 줄 안다고 그 문장을 이야기 하고서는

다시 나는 말할 줄 안다고 원인을 갖추고서는 다시 정죄하는 마귀가 따지는 죄를 따져요

우와 정말 놀랬어요

주님이 보여주신 대로 맞구나

 

결과에서 찾기 때문에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나사로는 말을 할 필요가 없고

반박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하이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주더라 말이죠.

 

마귀는 때려죽어도 원인만 따져요

그래서 막살면 안된다고 눈물까정 흘리면서 외쳐요

이게 마귀이더라 말이죠.

 

죄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선언 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는 겁니다.

즉 도둑과 함께 하지 않는 겁니다.

도둑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전히

빼앗기지 않는 물건

전주인의 물건으로 남아 있다는 거다 말이죠.

 

그럼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속에

곧 예수님이 처한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되면

새로움이요 생명이다 말이죠.

도둑의 손에

반칙의 손에

약탈자의 손에

 

이미 주님께서 내 옷 더럽다고 내 육체 더럽다고 따지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곧 도둑은 새옷으로 빨았다는 자신의 기능만 외칠 뿐입니다.

 

옷이 더럽다고 따지는 그것은 마귀만이 따져요

원인 만을 따져요. ? 백전백승한 도둑에게 빼앗길까봐 안 빼앗길려고

백전백패 한 마귀 자신이 들통날까봐

 

그러나 이미 다 이루었거든요.

어떻게? 이미 십자가에서 나의 육체를 세탁기 물 가득 담아놓고서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그 속에 나의 더러운 육체를 집어 넣어 빠시는 겁니다.

그 세탁기라는 십자가 속에 안 들어가는 것이 마귀이다 말이죠.

 

어떻게 새옷으로 만드셨을까요? 라고 누가 묻습니다.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4, 새번역)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7:14, 공동) "어른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더니 그는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7:14, 쉬운) 나는 모릅니다.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장로는 내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들은 큰 고난을 겪은 자들입니다. 이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신들의 옷을 씻어 희게 하였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씻어서 희게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 구원 얻느냐는 그 인생을 그 허구를 구원하시는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그리스도의 몸만 구원하시는 겁니다.

다른 몸입니다.

다른 몸만 구원해요

예수님의 몸

그 몸만 새피조물인데

새옷인데

어린양의 피로 빨았다는 겁니다.

그럼 이 어린양의 피 흘리심의 사건인 십자가

십자가 세탁기 속에 놓여지는 그 상황이

예수님이 처한 상황 속에 놓여지는 것이 바로 새로움이요 생명입니다

 

맞습니다. 전혀 생명 같지 안보입니다.

불입니다.

불 속에 누가 들어가겠습니까?

누가 저 심판 속에

저 십자가의 저주 속에 들어가겠습니까?

성령이 들어간자는 자기 옷이 너무 너무 더럽다고 비로소 새것이 나타났다고 막 뛰어듭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자는

다들 고개 돌려버립니다.

 

아무리 봐도 불 속(여호와의 심판의 불)은 생명이 없습니다.

십자가의 저주 속에는 생명이 없어요.

말이 됩니까?

불 속에는 그 어떤 생명도 다 타버리는 잿더미가 되는데

누가 그 속에 생명이 있다고 외칩니까?

 

오히려 그런 생명, 그런 구원을 들고온 예수님을

에라이 너나 받아라 라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거 보세요 예수님도 죽었다 말이죠.

 

다시 사는 것을 본 자만이 믿는둥 마는둥 할 정도인데

오죽하면 도마가 그 말을 안 믿잖아요

그러니 억지로 믿음을 만들어 낼려고 하지 마세요

 

엉뚱한 자신의 결핍과 이것을 연결시키다 보면

종로에서 빰 맞은 것 한강에서 화낸다고

받지도 않은 성령을 받았다고 우기게 된다 말이죠.

억지로 성령받은 것을 티 내고자

나오지도 않는 방언을 억지로 터트려서 하듯이

아나리아 삽비라처럼 안 내면 될 것을 내겠다고 하니까 즉사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내지 말아라 하면 될 것을

이것을 또 목사들은 오히려 더 협박공갈 하면서 아니리아 삽비라 부부처럼 될래?

죽고 싶냐? 안 내면 죽어 라고 협박하더라 말이죠.

 

동행을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말이죠. 조작을 해요

그러다가 다윗의 후손이 죽어야만 하는 다윗 곧 원수 다윗이 과연 되고파서 될려고 할까요?

다 거짓입니다.

 

그냥 생긴대로 살면 됩니다.

 

오히려 다윗이 원수로써 새로움 곧 이전 것이 통하지 않는

기존의 것이 다 무너지는

새로움 그래서 먹고 마시고 씹고 뜯고 노래하더라 말이죠.

새로움이 왔으니 더 이상

이전의 법칙에 매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막 사는 겁니다.

사랑의 법칙이 왔거든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왔거든요.

이거 주고픈 주님의 마음이 덮쳐진 선물이지

그것도 도둑처럼 주인을 결박하고 숙주를 빼앗는 도둑

얼마나 낯선 방식입니까? 결박 당하는 주인을 봐야 되요.

베드로가 드디어 보잖아요.

 

우리는 안 보여요

 

땡씨 땡씨 땡씨 결박하시는 것 보여주잖아요.

그리고 금가락지를 끼우시는 겁니다.

 

이것이 도적같이 임하는 방식인데

우리는 무지 무지 싫어하는 방식입니다. 곧 십자가의 방식을 너무 싫어해요

그런데 이거 아니면 새로움이 없어요.

여전히 마귀라는 주인의 숙주로써

마귀가 원하는 구원만을 외칠 수밖에

 

진짜 구원은 이 마귀를 결박함으로써 도적같이 임하는 겁니다.

그러니 실상은 죽은자 인줄도 모르고

그 인생을 의지하면서

그 인생을 어떻게 하면 구원이 되냐 라고 묻는데

 

예수님은 그런 구원 주시지 않고

다윗 속에 다윗의 자손을 구원하실 뿐입니다.

다윗 구원하지 않아요

오랜만에 복음을 말하는데 아마 다들 달려들꺼다 말이죠. 이단이라고

문제는 이단이 문제가 아니라 이단의 이단이 못 되는게 문제이듯이

이단으로부터 이단 소리 못 들으면 그거 지옥갈 자들이다 말이죠.

 

다윗을 구원하지 않아요.

개인 다윗 구원해서 뭐하게요?

개인 구원은 모조리 종교 곧 666이 소통시키는 장사 매매 돈을 사랑하는 자들인

마귀 씌인 자들 짐승의 수를 받은 자들이 유통시킨 종교이고

그게 666이고

 

다윗 속의 다윗의 자손만을 구원하신다 말이죠.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동행 다윗과 다윗의 자손이 함께 하는 동행이라고

숙주의 주인이 뒤 바뀌는 겁니다.

어떻게? 다윗을 죄인 곧 원수 만들어서 말이죠.

옷을 더럽게 만들어서 말이죠.

 

그래야 두 주인의 싸움을 보게 되고

누가 도둑처럼 빠져나올수 없는 자신을 빼앗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래서 새노래를 부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빼앗아서 금가락지를 끼우는 겁니다.

이 말도 안되는 상황이어야

마귀가 발악을 해요 글쎄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베드로가 신부 되는 꼴을 못 봐요

새옷 입는 꼴을 못 봐요

막산다고 더렵혔다고 세 번 부인했다고

옳타구나 신나서 잡아 오면 올수록 백전 백패를 완패를 해요 글쎄 ~~~

 

마귀는 무조건 십자가의 피에 지도록 완패 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입니다.

질 것 뻔히 알아도 소용없어요 기능이니까

그 기능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어요

 

얼마나 놀랍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의 영광이?????

 

베드로와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가 한 세트로써

베드로가 의인의 자리가 아닌

죄인의 자리에

원수의 자리에 놓여짐으로써

마귀가 덮썩 무는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를 자랑하시고자

얼마나 놀라운 능력인가를

말도 안되는 저 죄인 중의 괴수

저 고멜과 같은 저 베드로 저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그 기능을 발휘 하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존재 믿어서 뭐하게요?

기능이 나와야죠.

얼마나 씻어주고파 기다리고 기다린 그 피를

드디어 다 이루셨는데

말만 할까요?

실상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글쎄 멀쩡한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세탁기에 넣더라 말이죠.

 

여기에 마귀는 동행 자체를 못해요.

 

이렇게 예수님의 동행해 주심으로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약탈전쟁 말이죠. 도둑이다는 겁니다.

교회 속에서도 이 동행(도둑)으로 두 패거리로 나누시는 겁니다.

 

사단의 회와 새옷으로 꽃단장입혀짐을 당한 피로 사신 자기 신부인 교회로

 

이것이 모든 인간이 우상의 숙주로써 살아가고 있는 그 터 위에

말도 안되게 피로 사신 교회를 세우시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곧 어린양의 피를 거부하고 맹렬하게 공격하는 그 예수님이 처한 상황에

같이 함께 신랑의 신부로써 함께 놓여진 자가

새로움이지

 

함께 하지 못하면 기존의 것으로 생명과 죄와 더러움 또는 죽음은 운운하는

그 엉터리 개념들을 가지고 장난치는 짐승의 놀이에 빠져서

빠져나올수가 없는 겁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바로 이 기생한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말씀만 하셨다 말이죠.

그래서 자꾸 자꾸 사단이 가시를 푹 찔러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그 숙주에게 기생한 마귀만을 상대로 한 폭격을

함께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구원을 펼치시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인간이 좋아라 하겠습니까? 아니면

놀라서

너무 너무 깜짝 놀라서 그럼 누가 구원 얻냐고

그야말로 몸이 제대로 반응을 하는 겁니다.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10:26, 개역)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18:26, 개역) 듣는 자들이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19:25, 새번역)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하였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

(10:26, 새번역) 제자들은 더욱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는가?" 하고 서로 말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에게'

(18:26, 새번역)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말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19:25, 쉬운)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매우 놀라서 물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19:25, 킹흠정) 그분의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심히 놀라며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 하거늘

(10:26, 킹흠정) 그들이 극도로 놀라며 자기들끼리 이르되, 그러면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리요? 하매

 

심히 놀라

극도로 놀라

매우 놀라

깜짝 놀라

 

과연 우리도 그 말씀을 보고서 과연 깜짝 놀라워 할까요?

 

부자청년이 유대인들에게는 구원받을 자의 모범생으로 대표성을 보여주는데

그런 자가 탈락이면

그럼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없죠.

 

어느 정도로 탈락이면

낙타가 바늘 구멍 들어가는 것이 더 쉽겠다고 (불가능인데)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그 정도로 말도 안되게 어렵다고 (더 더 불가능하다고) 하신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

안되는데 더 안되는, 불가능의 불가능성

 

다들 부러워 했던 그 기대치가 졸지에 경악스러움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바로 이렇게 놀래키는 것이

낯설기 짝이 없는 도적같이 오는

부자의 천국 가기 허물기입니다.

 

다들 당연시 했던 것이 부자는 합격, 구원 받았을 거야, 부자로 축복받았으니까!

그런데 도적같이 한 순간에

설마 라고 지옥이래 라고 한다 말이죠.

부자가 지옥이다고 하니까 다들 난 텃구나 라고 한다 말이죠.

한 숨을 푹 쉬고

우와 안되는 구나

절 망 ~~~~~~

 

늘 올 수 수 수 수 를 받던 자가

최고의 대학에 합격은커녕

일반 대학도

아주 제일 낮은 대학에도 합격이 안되더라 말이죠.

 

이래서 놀래고

탈락이라서

 

오히려 대학의 대 자도 꺼낼수 없는 늘 꼴찌를 최고의 대학의 수석으로 집어 넣겠다고 하시더라 말이죠. 그것도 무시험 합격으로

 

여기서 말도 안된다고 하면서

오히려 화내면서 달려들더라 말이죠.

 

왜 금가락지를 끠우냐고

이것은 역사의 순서로 시간의 순서로

선하게 살아서 선을 쌓고 쌓고

올 수를 쌓고 쌓아서가 아니라

그것은 기존의 사라질 방식이고

 

새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미래에서 쳐들어와서 선물로써 막 주시더라 말이죠.

무시험 합격을

여기에 대한 반발로써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것을

생명책에서

미래완료에서 쳐들어와서

원인을 다 삭제시킴으로써 나온 결과

곧 금가락지 씌우기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는 겁니다.

이 소식을

곧 어린양의 피가 내 옷을 흰옷같이

양털같이 희게

눈 같이 하얗게 만들었다고

이 십자가를 피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에서가 곧 맏아들이 곧 이스라엘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 이꼬르 사단의 회가

결과적으로 이 어린양의 피에 반발하더라 말이죠.

 

옷이 더러워서 빨아주세요 라고 했다면 이 피의 기능이 뭔가를 혜택을 누렸을 텐데

옷이 나는 안 더럽다고 오히려 더러운 놈과 달라서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기에

소경 아니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소경이였고

더럽지 않다고 하니 결과적으로 더럽기 짝이 없는

 

이 원인 없는 결과인

말도 안되는 첫사랑

십자가의 피 흘리심

어린양의 피를 무시함으로써

어린양의 피와 무관하기에

새로움과 무관하기에

죄가 없다고 하니 여전히 죄가 있게 되더라 말이죠.

죄를 차라리 예수님에게 빨아 달라고 했다면 되었을 것을 말이죠.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9:41, 현대인)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소경이었다면 죄가 없었을 것이나 지금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하고 대답하셨다.

 

죄가 없다고 하니 여전히 죄가 있게 되더라 말이죠.

이게 말이 되는 소리냐 말이죠?

 

새로움이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고 미래완료 곧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지면

 

기존의 법칙이 다 사라져요

삭제 되요

죄가 있습니다 라고 하면 죄가 없게 되고

죄가 없습니다 라고 하면 죄가 있게 되는

나를 기준으로 하는 첫아담은 사라지고

 

새로운 법칙 곧 어린양의 피 법칙에 의하면

죄 있다는 자는 죄 없고

죄 없다는 자는 죄가 있게 되는

어린양의 피 기준으로 새피조물이 되는거다 말이죠.

 

죄가 있습니다 저는 죄인입니다 더럽습니다 빨아주세요 라고 하는 자는

흰눈과 같이 되고

죄가 없다고 하니까 여전히 세탁기 곧 어린양의 피가 씻어주지 않으니까 여전히 죄가 있더라 말이죠.

 

어린양의 피에 싹싹 빌어도 발라줄까 씻어줄까 말까 하는 판국에

이 십자가를 거부하더라 말이죠.

 

왜 최고의 대학에 수석으로 들어갈 자는 탈락 시키고

왜 대학의 대 자도 모르는 저 꼴찌 중의 상 꼴찌를 최고의 대학 수석으로 입학시키냐 라고

 

촛불시위를 해서 탄핵하고자 하는 자가 바로 인간의 믿음이다 말이죠.

그 정도로 분괴할 수 밖에 없는

 

그런 구원을 펼치는 것이

우상을 깨뜨리는

우상의 손에서 건지시는 구원이다 말이죠.

 

우리는 정작 우상이 원하는 구원을 바라고 있으니

그 주인을 결박하는 이 십자가가 도둑처럼 오지 않으면 우리는 죽은자인줄을 모른채

이미 죽었다고 살려주세요 라고 말을 못하는 겁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숙주 곧 새간을 약탈하는 도둑에게 달렸다는 겁니다.

 

이 도둑이 글쎄 사데교회에 찾아온 겁니다.

약탈당해 탈탈탈 털리는

기생라합의 집문서 땅문서 팔아넘기는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이 오지 않으면

여전히 죽은자로써 좀비로써 살 뿐이고

살았으나 실상은 죽은 자요.

 

감사하게도 도둑에게 모조리 탈탈탈 털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글쎄 미리 세탁기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다 이루어서

어서 어서 베드로가 빨리 빨리 더럽혀진 옷 때문에 마귀에게 붙잡혀 오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설레이는 마음을

옳치 드디어 잡혀 왔구나 신난다

어서 빨자 빨자

내가 끝내주는 새옷으로 만들어줄게 라고

자신의 피 자랑을 하심으로써

신부로 꽃단장 시키시는데 신이 나서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룰루 랄라

나랑 결혼해 줄래 Will You Marry Me 이카고 있는데

 

마귀는 씩씩 거리면서 심각하게

베드로 야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데요 글쎄

온갖 죄악을 밀까부듯이 송사를 해요

믿을 것은 법 밖에 없다고 말이죠.

 

지 혼자 심각해요

그래 왜 세 번 부인했는데 뭐 어쩌라고

내가 용서했다 왜?

 

내가 용서했는데 니가 와

 

자 이것이 마귀라는 주인이 인간을 숙주로 삼아서

살아있다고 여기게끔 그러나 실상은 죽은 모습으로써

 

새로운 어린양의 피를 쳐다보지 못하게 할려고

자꾸 자꾸 이전 것을 붙들고

지나간 것을 붙들고

 

니나 받아라 새옷

니나 받아라 생명책

니나 빨아라 더러운 옷

 

어떻게 해서든 마귀는 주인 행세를 하겠다고

도둑에게 빼앗긴

이 십자가의 지혜에 격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니나 빨아라 더러운 옷

 

나는 안 더럽다 라고

계속해서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해요 글쎄

 

이렇게 고집을 피우는 그 마귀의 세계에서

도둑처럼 새간을 빼앗는

그 전리품이 바로 피만 바라보고

저 더러운 자입니다 씻겨주세요

그 십자가의 어린양의 피로 씻어주세요 라고 외치는 자가

새로움을 바라보는 자입니다.

 

다른 새로움은 없는데

자꾸 어떻게 하면 영생 구원얻냐 라고

십자가의 방식을 거부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깨끗하게

거룩한 말씀을 지키고

선한 행동을 하고

더러움을 스스로 씻어내는

남을 7번 용서하기를 쌓고 쌓는

마귀의 숙주 노릇을 하고 있는

산 자 같으나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방식은 반대로

죽은 자 같으나 산 자로 하시는 겁니다.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9, 새번역)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2:20, 개역)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에 마귀는 유일하게 죄를 씻는 저 어린양의 피를 거부하는 자로써

나를 자꾸 살았다고 여기겠끔

막살면 안된다고 여기겠끔

어떻게 해서든

저 어린양의 피를 거부하도록 만드는

격렬하게 반박하는 모습으로써 등장함에 있어서

 

주님과 함께 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움입니다. 오히려 더 신났습니다.

누가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 있는지를

마음껏 누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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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스플로어 인터넷 브라우저나, 폭스에서는 안 보입니다.

스마트폰 인터넷 삼성 앱에서는 보이고요. 나머지 앱브라우저는 모르겠구요.
그 동안 몰랐는데 다 되는 줄 알았는데 크롬만 쓰다가 익스플러어 에서 단추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참고하세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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