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보여주어야만 하는 이스라엘의 기능 (3, 1-12)

 

의사를 외치는 환자,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를 외치는 죄인 중의 괴수


(
3:1, 개역)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 의뢰하는 모든 양식과 그 의뢰하는 모든 물과

(3:2, 개역)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3, 개역)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공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3:4, 개역) 그가 또 아이들로 그들의 방백을 삼으시며 적자들로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3:5, 개역)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3:6, 개역) 혹시 사람이 그 아비의 집에서 그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너는 의복이 오히려 있으니 우리 관장이 되어 이 멸망을 네 수하에 두라 할 것이면

(3:7, 개역)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않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로 백성의 관장을 삼지 말라 하리라

(3:8, 개역)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스려서 그 영광의 눈을 촉범하였음이라

(3:9, 개역)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3:10, 개역) 너희는 의인에게 복이 있으리라 말하라 그들은 그 행위의 열매를 먹을 것임이요

(3:11, 개역) 악인에게는 화가 있으리니 화가 있을 것은 그 손으로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임이니라

(3:12, 개역)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3:1, 새번역) 주 만군의 주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백성이 의지하는 것을 모두 없애실 것이다.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빵과 모든 물을 없애시며,

(3:2, 새번역) 용사와 군인과 재판관과 예언자, 점쟁이와 장로,

(3:3, 새번역) 오십부장과 귀족과 군 고문관, 능숙한 마술사와 능란한 요술쟁이를 없애실 것이다.

(3:4, 새번역) "내가 철부지들을 그들의 지배자로 세우고, 어린것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겠다.

(3:5, 새번역) 백성이 서로 억누르고, 사람이 서로 치고, 이웃이 서로 싸우고, 젊은이가 노인에게 대들고, 천한 자가 존귀한 사람에게 예의없이 대할 것이다."

(3:6, 새번역) 한 사람이 제 집안의 한 식구를 붙잡고 "너는 옷이라도 걸쳤으니,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다오. 이 폐허에서 우리를 다시 일으켜 다오" 하고 부탁을 하여도,

(3:7, 새번역) 바로 그 날에, 그가 큰소리로 부르짖을 것이다. "나에게는 묘안이 없다. 나의 집에는 빵도 없고 옷도 없다. 나를 이 백성의 통치자로 세우지 말아라."

(3:8, 새번역) 드디어 예루살렘이 넘어지고 유다는 쓰러진다. 그들이 말과 행동으로 주님께 대항하며,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현존을 모독하였기 때문이다.

(3:9, 새번역) 그들의 안색이 자신들의 죄를 고발한다. 그들이 소돔과 같이 자기들의 죄를 드러내 놓고 말하며, 숨기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에게 화가 미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인다.

(3:10, 새번역) 의로운 사람에게 말하여라. 그들에게 복이 있고, 그들이 한 일에 보답을 받고,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말하여라.

(3:11, 새번역) 악한 자에게는 화가 미칠 것이다. 재난이 그들을 뒤덮을 것이다. 그들이 저지른 그대로 보복을 받을 것이다.

(3:12, 새번역) "아이들이 내 백성을 억누르며, 여인들이 백성을 다스린다. 내 백성아, 네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들게 하며,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구나." / 칠십인역에는 '채권자들이'

 

 

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특이한 비존재입니다.

기존의 민족들과 차원이 다릅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본인들이 자부심을 느끼겠지만

그 자부심 조차도 엉터리로 자부심일 정도로 족히 비교가 안된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스라엘 조차도 모르는 이스라엘을 예수님이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족히 비교도 안되는데

겨우 그 정도의 자부심 밖에 없다 말이죠.

 

즉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을 이스라엘이 느끼는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 느끼는 자부심과 차원이 다르다 라는 겁니다.

 

?

피로 사셨거든요.

자신의 피로 사셨다 말이죠.

자신의 피에 대한 자부심

그 피를 이스라엘에 발라 버리심에 대한 자부심이다 말이죠.

말이 자부심이지

이것을 믿음이라고 표현하면

이스라엘의 믿음 조차도 이 예수님의 믿음에 의해 엉터리로 드러날 정도입니다.

 

도둑으로써 빼앗은 전리품이니까 말이죠.

구체적 보편성의 잉여 이다 말이죠.

 

여기에 오히려 이스라엘이 기분이 팍 상해서

예수님에게 반발하는 겁니다.

 

?

 

아니 내가 뭐 물건입니까? 사고 팔고 하게?

 

그래 너 물건이야 넌 새간이거든.

 

이건 뭐 이스라엘에 대한 자부심을 예수님이 이스라엘 보다 더 느낀다고 해 놓고서는

이스라엘을 오히려 기를 팍 죽이는 것 아닙니까? ㅋㅋㅋ

 

이스라엘 본인들도 모르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밀!!!

이스라엘이 몰라요 글쎄

 

아니 왜? 자꾸 존재로 보고 있다 말이죠.

기능으로 안 봐요.

그래서 죄인이 안되고

멸망도 안할려고 하고

심판도 안 보여줄려고 해요 글쎄

? 존재이니까

존재이니 보여줄수가 없는 겁니다.

 

앞의 글에서 어린아이는 기능입니다. 존재 개념이 아니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어린아이와 같은 존재가 될려고 한다 말이죠.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까 라고 오로지 존재만 의식한다 말이죠.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어린아이 존재가 되는게 아니라

어린아이의 기능이 되어버리니까

인생을 의지 할 수가 없도록 되어 버리는 기능이 되더다 말이죠.

어린아이가 되더라 말이죠.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비존재인데

비존재란 존재 보다 더 초과잉적인 존재를 비존재 라고 합니다.

 

즉 기능입니다.

존재 보다 앞선 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이 기능을 저들 존재가 보기에는 심판 받은 무능한 모습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존재는 이 기능을 싫어해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 심판 받아 저주 받은 모습이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존재는 십자가에 못 안 박히기 위해서

오히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잖아요

심판 했다 말이죠.

? 부정하니까

 

다시 말해서 존재는 삶과 죽음에 갇혀 있습니다.

죽으면 더 이상의 삶이 없다 말이죠.

그런데 비존재는 보이지 않는 기능이기에

삶과 죽음 조차도 먹혀들지 않는다는 겁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니까 말이죠.

그래서 기능은 심판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남들이 보기에 징계 받는 것처럼 보이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 말이죠.

 

(5:17, 개역)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고전 11:32, 개역)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그러니 이스라엘은 결국 예수님 딱 한 분 뿐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다 말이죠.

보고픈 것만 보고, 듣고픈 것만 듣고, 믿고픈 것만 믿는 자들에게는 절대로 안 보이는 거죠.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 4:12, 개역)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고후 4:13, 개역)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고후 4:14, 개역)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고후 4:15, 개역)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6, 개역)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고후 4:17, 개역)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8, 개역)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존재가 되어버리면 선악의 법칙으로 따져야 합니다. 선이거나 악이거나?

어린아이 존재는 선이되고, 어린아이가 되지 못하는 어른의 존재는 악이 되는,

그래서 어린아이가 못 되니까

의문의 해석이 반복이 되는 겁니다.

순수하고 착하고

이거는 어른들도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말이죠. 모호하니까 양다리를 걸쳐 놓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교리와 신학을 구성하더라 말이죠.

때려죽어도 어린아이는 되기 싫고

그 중에 가능한 것만 뽑아서 갖추는

 

그런데 기능이 되어버리면, 즉 성령이 덮쳐버리면, 거룩이 덮쳐지면

선악의 법칙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주의 인애와 자비를 보여주는 기능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거룩한 자신을 자랑하는 육이 아닌 존재가 아닌

거룩이라는 두 패로 가르는 십자가의 심판성을 보여주는 사건의 촉발자 매개자가 되더라 말이죠.

 

마침 바로 위에서 찾은 구절에 나옵니다.

보배는 눈에 안 보입니다. 질 그릇 속에 들어있어 가리워져 있다 말이죠.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7, 새번역)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릇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엄청난 능력은 하나님에게서 나는 것이지, 우리에게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후 4:7, 공동)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럼 이 반짝 반짝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서

이 질그릇은 자기 스스로 도딱고 수양을 해서

유리그릇으로 투명하게 반짝 반짝 윤나게 만들면

그릇 속의 그 보배가 반짝 반짝 빛나는 것을 보게 되니 빛이 나겠지요?

이 말이 사람들에게 유통되는 종교 이다 말이죠.

교리 플러스 실천

짐승의 수 이다 말이죠.

 

보배를 나타내기 위해서 질그릇을 깨뜨린다는 의미입니다.

겉 사람은 후패 하고 즉 깨지고

속 사람은 날로 새롭고

 

오늘 이사야 3장의 본문에 딱 맞는 의미입니다.

겉사람은 새로운게 아니다 말이죠.

속사람은 새롭다 말이죠.

그럼 어떻게 해야 속 사람의 새로움을 보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겉 사람은 후패해야 합니다. 깨져야 합니다.

 

새롭다 라는 의미가

기존의 질그릇을 도 닦아서 유리그릇으로 만드는 것이 새로움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말하는 몸이다 말이죠.

그 십자가가 뭡니까? 심판 아닙니까?

주님의 심판을 담은 자가 바로 이스라엘 이라는 기능입니다.

 

이것이 계시록에서는 일곱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일곱 교회

 

또 계시록 후반부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고 해도 달도 없이

12보석이 이스라엘로써 예루살렘에 있다고 했습니다. 12지파 말이죠.

 

아무튼 일곱의 이미는 완벽한 거룩인데

그 앞에서 되도 않는 거룩을 들이대다가는 심판

그것도 제대로 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겁니다.

그러니 일곱교회야 말로

심판이 임한 자 이다는 겁니다 아니 왜? 제대로 된 거룩이 덮쳐졌다는 거죠.

사생아가 아니다는 증거죠.

 

사생아 에게는 아예 심판이 없어요.

징계가 없다 말이죠.

 

유일하게 이스라엘 만이 심판을 몸에 담고서 주를 증거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다른 민족에게는 없는 거다 말이죠.

 

그래서 참선지자가 다들 주의 심판을 몸에 담게 됩니다.

반대로 그런 참선지자를 오히려 거짓선지자들이 저주 하는데 앞장 선다 말이죠.

말려드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었기에 참선지자는 누락 되어도 상관없는

심판과 멸망을 당함으로써 주가 누구이신가를 보여주는

심판 주를 증거하는 것이 참선지자이고 이스라엘의 참 기능이다 말이죠.

 

죄 값을 단번에 치르시는 율법의 완성인 제대로 거룩한 분임을 보여줌에 있어서

심판을 몸에 담는데

거짓선지자들은 그것을 공격하는 겁니다.

마치 마귀가 베드로를 미끼 물 듯이 덮썩 물더라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 제대로 된 거룩 앞에서

미흡하기 짝이 없는 것을 거룩이랍시고 내밀었는데

진짜 거룩 앞에서 보니까 배설물 똥냄새가 진동 하기에

심판 받는 것이 천부당 만부당함을 알았다 말이죠.

 

당장 타 죽어 마땅한 심판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그 거룩 앞에서 뭘 해도 죄인이기에 뭘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하기에 말이죠.

이것이 새로움을 제대로 본 자인데

 

그래서 부정함을 제거 당함으로써

새로운

해 조차도 심판 하시는 새로운 영광을 입혀짐을 당하고서는

임마누엘 곧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이 다르다를 외치는 겁니다.

그것도 이스라엘 한 복판에서

사단의 위에 세움을 받는 버가모교회처럼

늑대무리 이리 떼 속에 보내는 양처럼 보내심을 받는다 말이죠.

 

진짜 거룩을 만나지 않았거나

그래서 제대로 된 심판을 못 만나게 되면

 

즉 일곱이 덮쳐지지 않으면

 

자꾸 도 닦을려고 한다 말이죠.

깨어질 질그릇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판받아 마땅한 질그릇으로 안 보고

정반대로 유리 그릇으로 만들고자 도 닦을려고 한다 말이죠.

 

기존의 것, 이전 것, 삭제 될 것, 사라질 것, 처음 것, 첫 아담의 것을 자꾸 연장 연장

잇고 잇고

할려고 하더라 말이죠.

 

새로움이 떳는데!!!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가 떳는데

그렇다면 기존의 것과 단절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심판성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의 기능인데

오히려 정반대로 그런 심판성이 오면 안된다고 방어를 하더라 말이죠.

거짓선지자를 다 따르더라 말이죠.

절대로 이스라엘은 멸망 당할 리가 없다고.

 

새로움이 없으니까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없으니까

 

기존의 것으로 승부를 거는 겁니다.

그 널널해진 헌 것으로 말이죠.

 

새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기에

심판성을 이스라엘을 보여주는 겁니다.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음을 말이죠.

 

그러니 원인에서는 답이 없다고

기존의 것에서는 답이 없다고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어야 하는데

심판 받아야 하는데

 

심판을 못 보여주니까

단절을 못 보여주니까

기쁨으로 단을 못 거두는 겁니다.

 

여전이 자신의 회개 눈물 기도 금식으로

이 꺽으신 뼈를 살려 보겠다고 하는 겁니다.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게 아니라

선물로 보는게 아니라 말이죠.

 

나의 선하고 착함으로 말씀을 지킴을 통해서

거룩을 보여주겠다는 것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주의 인애와 자비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보여주는 기능

곧 오히려 정반대죠 죄인으로써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십자가에 다 이루셨다를 외치는

구원자를 외치는

환자로써 의사를 외치는 기능이다 말이죠.

환자에게 의사가 등장하면 이미 게임 오버 다 이루었다가 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이다 말이죠.

 

이것이 원인이 없는 무조건적인 이스라엘이라는 결과물인데

증상물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의 증상물인 이스라엘인데 기능인데

자꾸 존재로 만들려고 하니

도 닦을려고

성화론 할려고

개혁주의 할려고

자꾸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하더라 말이죠.

그게 사단의 회 이다 말이죠.

 

바로 앞의 글 계시록 사데 교회 글에서

죄란 예수님의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주일예배때 더 많이 강조했어야 하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는데

오히려 이사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전체 내용으로 장식할 수 있어서 기쁘다 말이죠.

 

결국 새로운 세계를 안 쳐다보는 것이 죄이지

죄를 지은 것이 죄가 아니다 말이죠.

 

죄란 회개란 과거를 즉 원인을 따지는게 아니다 말이죠.

정반대로 미래완료 곧 결과를 못 보는 것을 말하고 있다 말이죠.

 

시간의 거꾸로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순서로 따지는 죄는

마귀가 추궁하는 거다 말이죠.

 

회개란 과거나 원인을 따져서 그것을 수정하고 반성하는게 아닙니다.

과거가 아니다 말이죠.

미래완료 곧 다 이루셨다는 보는 것이 회개 이다 말이죠.

새로움을 보는 겁니다.

 

원인을 따지는 회개란

종교가 외치는 돈을 삥 뜯기 위한 용도이고

그게 666으로써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이야기 이고

속임수이고 인간의 꾀이다 말이죠.

매매, 소통, 대화가 되고, 이해가, 납득이 되는, 말이 되는 회개이고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회개는 원인이 없이

결과만을 받았을때에 저절로 나오는 것이 회개입니다.

처음사랑이 말도 안되듯이

회개도 말도 안되기 때문에

결과를 못 받은 자는 회개를 못하도록 되어 있어요.

이래 말하니까 또 회개를 행하는 지키는 것으로 본다 말이죠.

아닙니다. 결과를 받아버리면 회개 하는 것을 회개 해야 하는 겁니다.

 

 

다윗의 신하가 다윗왕을 보고

좀전까지만 해도 우시더니 왜 이제는 먹고 마시고 노래하냐 라고 되묻더라 말이죠.

 

그럼 신하 말대로 울고 금식하고 회개하고 기도하면

아이가 살아날 수 있겠냐 말이죠?

살려 낼수 있을꺼 같으면 심판 이라고 붙일 이유가 없다 말이죠.

 

도리어 그 꺽으신 뼈가

죽은 다윗을 살려내더라 말이죠.

? 주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니까 말이죠.

 

이게 새로움이다 말이죠.

즉 기존의 헌 것에서는 말도 안되는

믿음의 세계이기 때문에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선물 선물 선물 이다 말이죠.

 

죽은 다윗은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것처럼

이게 회개이다 말이죠.

 

심판을 누가 받았습니까?

징계를 누가 받았습니까?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은 겁니다.

이 십자가의 방식을

사단의 회인 유대인은 거부하는 겁니다.

 

내 죄는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식이다 말이죠.

이게 종교에서 세상에서 먹혀드는 겁니다.

 

새로움을 몰라요 글쎄

 

헌 술을 헌 부대에 담고자 하는 것이 뭐 대단한 것인냥

새로움을 거부하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거부해요 글쎄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을 회개하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서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3초도 안되어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것이 회개이다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새로움이지

나의 반성이 새로움이 아니다 말이죠.

 

다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을께요

이것을 글쎄 가르치는 것이 마귀

오늘날 성화론 개혁주의 이다 말이죠.

언제 부인할지 몰라서 전전긍긍해야 돼 글쎄

왜 이 의문에 목숨거냐 말이죠.

누가 꾀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아직도 선악의 법칙으로 꾀냐?

육체의 법으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아직도 심판 받아 마땅함을 모르니까

자기에게 기대를 걸더라 말이죠.

 

회개의 달인인 바리새인이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안 쳐다 보는 겁니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왜 쳐다보냐고 따진다 말이죠.

이렇게 구원의 장치들이 많고 많은데

왜 단 하나 십자가만을 봐야 하느냐 라고

 

졸지에 이 십자가가 저들에게는 걸림돌이 되어 버렸어요

십자가를 보면 무조건 이유없이 뭘 해도 마귀라고 자신을 고백해야 할 판국이니까 말이죠.

 

거리끼를 걸림돌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 기존의 것을 주장하고

지나가고 사라지고 삭제될 것을 여전히 붙잡고 있기에

 

그러니 회개할 생각 말고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나라 말이죠.

회개 안 한다고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왔지만

예수님은 베드로를 아예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해 버렸다 말이죠.

다시는 묻지 않으시더라 말이죠

모든 허물을 다 덮어버렸다 말이죠.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다윗이 꺽으신 뼈로 안 기뻐 할래야 안기뻐하고는 못배기는 기능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정작 마귀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못 외치니까

사랑의 관계성을 못 누리고 못 증거한다 말이죠.

 

마귀가 회개 안한다고 베드로를 잡아왔지만

오히려 베드로가 심판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넉넉히 누리고 있는 겁니다.

다윗처럼 씹고 뜯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십자가에서 태어났거든요.

 

마귀는 십자가에서 태어나지도 못하면서

회개 안한놈 잡아 오는데 귀신이야 글쎄

바리새인이 누가 율법에 의하면 더러운 자인지 기가막히게 잘 알아요

그래서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해요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다들 이렇게 성전에서 기도해요 글쎄

다들 바리새인이라 ~~~

 

밀까부듯이 초정밀 조사해서 말이죠.

헛짓을 하고 있고

실컷 남 좋은 일 하고 있더라 말이죠.

 

~~~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는 줄 제대로 보여주시는 구나 라고

또 새로움을 팍팍 보여주신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죠.

 

기도하지 말고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믿는 자가 기도의 사람이고

기도하기를 실천하는 자는 그 사람의 기도의 사람이 아니다 말이죠.

맨날 천날 성전에서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기도하는

그런 자이다 말이죠.

의문의 반복에 마침이 없어요 글쎄

 

아니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면 뭐합니까? 결과는 지옥인데??????

 

흐릿하고 모호한 그 똥냄새를 오히려 몸에 쳐바르고 있더라 말이죠.

성화 곧 거룩을 지킨게 아니라 똥을 발라요

배설물인 줄 몰라요.

 

자 그렇다면 일곱 교회는 죄인으로써 구원자 곧 새생명을 몰고 오신 예수님의 세계를 외치는

새피조물로써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를 외치는

새로운 세계를 외치는 자들이 일곱교회다 말이죠.

 

그 새로운 세계란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라는 하나님의 깊은 것이다 말이죠.

 

반대로 사단의 깊은 것은 바로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거부하고자

베드로에게 이 십자가를 맛 못 보게 하고자

속이는 자요 꾀는 자 이다 말이죠.

십자가를 자기들 습관대로 흐릿하고 모호하게 하지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외친

십자가의 증상물이거든요.

십자가에서 태어났거든요.

 

저들은 십자가에서 태어나지 못했기에

자꾸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를 외치는 자기를 주장해요

 

신앙생활 203-4-50년 했기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게 전혀 없어요.

정통신앙의 수천년된 교파에서 나온 증상물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에서 나온 증상물이 아니다 말이죠.

그들은 십자가를 외치는게 아니라 역시나 과거 곧

시간과 공간인 역사를 우려 먹어요 재탕 삼탕

 

자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는 그 과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마귀의 속임수가 베드로를 꾈 수 있겠습니까?

누가 끊을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모태신앙이라는 시간 역사 따위에 얽매이지 않아요.

지금 이 순간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잘 아십니다를 외치는 자입니다.

어딜 그 앞에서

십자가의 피 흘리심 앞에서

어딜 감히 막살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울수가 있냐 말이죠

결과 밖에 없는데

[원인]이 뭐 있어야 내세울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내세워! 참 믿음도 좋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마귀는 못 외친다고 하니까

언 놈이 자기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외쳤다고 해 놓고서는

다시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외치더라 말이죠.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외쳐놓고서 취소 취소 이거 쳐다보지 말고

막살지 않기를 실천합시다 라고

역시나 대장놀이를 하더라 말이죠.

 

 

주님이 삭제한 기존의 것, 이전 것,

다시 휴지통에서 복구를 해요 글쎄.

방금 쓰레기 통에 배설물을 버렸는데 다시 끄집어 오더라 말이죠.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는, 않겠다는 둥

 

자꾸 원인을 챙겨요 글쎄 ~~~~~~

 

원인 없니 결과에 맞겨 버리면

그 결과가 또 언제 배신 때릴지 몰라서

원인을 챙겨놓는 겁니다.

나중에 딴소리 못하게 말이죠.

 

이게 믿음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은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아예 원인을 없애버려요.

과거에 나 믿음 좋았다고 인정 받고 본인도 그렇게 자부심을 느꼈던 것 모조리 다 똥으로 취급하더라 말이죠.

그래서 막 다 뜯어내버리는 겁니다.

집문서 팔고 밭문서 팔고 자기 재산도 아니면서 국가재산 민족의 토지문서를 다 팔아버려요 글쎄

 

지금 이사야가 기생라합처럼 이스라엘을 바닥 뜯고 있더라 말이죠.

마치 다윗의 시편 149150편처럼

다른 것으로는 일체 기뻐하지 않는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어도 난 여호와로 기뻐한다고

저 꺽으신 뼈로 기뻐한다고

다른 것은 새로움이 아니다 라고

유일하게 십자가만 새로운 것이라고

 

내가 절대로 막살지 않는 것 조차도

십자가에서 배설물이요 새로움이 아니다고 하더라 말이죠.

 

그 원인이 정작 사도바울 앞에서는 내밀수도 없는

뻔데기 앞에서의 주름인데

그 사도바울 조차도 그 원인들을

똥 떵 어 리 라고 선언해 버렸다 말이죠.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도 이런 판국인데

 

????? 거룩해야 한다고? 성화 되어야 한다고???

 

~~ 이제 우짜실래예????

뭐 대단한 거냥 들이댔는데

정작 바울이 자신의 것들을 배설물로 냄새난다고 선언해 버렸으니

뭘 들이내밀 꺼냐 말이죠.

 

성화론자들을 보면 무슨 결백증 환자들 같아요.

세상 때 안 묻을려고 뻘짓을 하니 말이죠.

개인으로 안 다룹니다.

전체 판대기로 다룬다 말이죠

 

주님께서 그 꼴을 보기 싫어서

흔들어 버렸다 말이죠.

어떻게?

어린아이가 대장질 하고

부녀가 대장질 하는

그런 사회로

 

단절성을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3:12, 개역) 내 백성을 학대하는 자는 아이요 관할하는 자는 부녀라 나의 백성이여 너의 인도자가 너를 유혹하여 너의 다닐 길을 훼파하느니라

(3:12, 새번역) "아이들이 내 백성을 억누르며, 여인들이 백성을 다스린다. 내 백성아, 네 지도자들이 길을 잘못 들게 하며, 가야 할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구나." / 칠십인역에는 '채권자들이'

(3:12, 공동) , 나의 겨레야, 철부지에게 시달리고 여자들에게 지배를 받는 나의 겨레야, 너희를 바로 인도할 자들이 도리어 엉뚱한 길로 이끌어 너희의 갈 길을 망쳐놓는구나. / 칠십인역에서는 "채권자에게"라고 번역되어 있다.

 

부녀 곧 철부지 공주 박그네가

철없는 아이 트럼프 한테 시달리게 된다는 겁니다.

부녀 최순실이 국가권력 1위로써 등쳐먹힘을 당한다 라고 말이죠.

 

그 앞에서 막아볼테면 막아보라는 겁니다.

 

자기 혼자 성화론을 펼치며

자기 혼자 자기 교회만 깨끗하면 된다고

거짓선지자들이 외칠때에

정작 이스라엘 오늘날로 치면 교회는 이런 판국이다 말이죠.

 

그래서 낙심이라도 하면 참 다행이게요?

낙심도 안해요

 

(73:1, 개역) [아삽의 시]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73:2, 개역) 나는 거의 실족할뻔 하였고 내 걸음이 미끄러질뻔 하였으니

(73:3, 개역)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시하였음이로다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라고만 외칠 뿐이지

대충 대충 심상히 고쳐요

저들 철부지 애들이나

고리대업 부녀나

곧 딴나라 당이죠.

 

나는 저들과 다르게 거룩한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는 거짓선지자나

곧 민주주의 바리새인 당이죠.

둘다 도진개진 똑같다 말이죠.

 

판대기 전체 흐름을 보는게 아니라

 

주님의 심판을 기뻐하는게 아니라

남겨진 씨로 기뻐하는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계속해서 질질질 끌고 다니는 것으로 보더라 말이죠.

 

그렇게 거짓선지자는 본인만 깨끗하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고 본다 말이죠.

 

그게 아니라 이미 새것이 떳다 말이죠.

남은 씨가 떳다 말이죠.

이미 미래에서 떠 버린 이상

삭제 당해도 상관이 없다 말이죠.

피 흘리심이 떳으니

피로 사심이 떳으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가 떳으니

단번에 제사 드림이 떳으니

 

무수한 번제와 제사는 이제 철거 당해야 하고

심판성을 저 다 이루셨다 땜에 보여줘야 하는데

악령이 씌였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다 이루셨다가 떳기 때문에

 

베드로야 너는 나를 세 번 부인 할 것이다 가 된다 말이죠.

그래 그래 걱정마 세 번 부인 하게 될 거야 라고

아무리 세 번 안 부인 할려고 해도 넌 소용이 없단다.

 

결과가 떠 버렸으니까

원인을 아무리 만들어도 소용이 없어요.

원인이 없다니깐

이유 없어요.

무조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게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인간의 믿음이 뒤 바꿀수가 있을까요?

 

베드로가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나 아니요 예수님이 옳았습니다.

 

결국은 새로움이 옳았다 말이죠.

 

(73:17, 개역)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저희 결국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오히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지 3초도 되지 않아서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외치는 기능이

바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의 기능이다는 겁니다.

 

오히려 마귀의 세계가 주장하는 죄로

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못 쳐다보겠끔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마귀의 전도사들입니다.

사단의 회

 

죄책감을 심어서 글쎄 장사를 해요

종교죠

666을 소통시켜요 글쎄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서 때려 죽어도 안 알려주는게 있습니다.

미란다 원칙을 반드시 말해야 하는 형사처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말해야 하는데

미란다 원칙을 말하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웃끼게도 어떤 놈이 제가 이런 소리를 하니까

자기는 말한다 라고 주장해 놓고서는

또 다시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고

다시 선악의 법칙으로 교인들에게 사기를 치더라 말이죠.

 

양다리를 걸쳐요 글쎄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에 넘어오던가?

아니면 선악의 법칙으로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하던가?

 

물론 말만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외치고서는

안 넘어오고 결국 결과적으로 막살면 안된다를 외칠 수밖에 없더라 말이죠.

그것이 종교 짐승의 수 사람의 수

사람을 의식하는 교회를 본인이 하고 있으니까 그런 겁니다.

절대로 교회를 포기를 못해요 글쎄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특징입니다.

이스라엘을 포기를 못해요 글쎄

 

아 그런데 오늘 나오는 이사야는 포기를 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망을 시켜 버리는 겁니다

바닥을 막 뜯어내고 있더라 말이죠.

 

?

이스라엘은 존재가 아니거든요.

아니기 때문에 막 흔들어 대는 겁니다.

막 흔들어대면 반드시 떨어져 나가는 자가 생기죠.

 

광야에서도 주님이 그랬잖아요

원망할 만한 곳으로만 인도를 한다고

 

그 중에 누구도 있었냐 하면 모세도 글쎄 탈락했다 말이죠.

반드시 탈락을 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이다 말이죠. 존재가 아닌 기능

곧 주의 심판성을 보여주는 이스라엘 말이죠.

 

얼마전에 유다서를 언급했죠.

광야에서 탈락한 자 다 멸망시키셨다고

 

어 그런데 모세도 있네

그럼 모세는?

 

(1:9, 개역)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마귀가 꼬투리 안 잡겠습니까?

당연히 잡죠.

 

그러니 광야에서 탈락 한자들이 지옥갔다 안갔다 라고 단정 짖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오히려 반증하고 있다 말이죠.

마귀는 모세의 시체 내 놓아라

베드로 내 놓아라 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결제를 안하셨다 말이죠.

 

광야에서 탈락 당한 자도

모세도

예수님의 심판 주 되심을 보여주는 기능을 말하는거지

존재가 지옥이니 천국이니 하는 프레임은 마귀가 물고 늘어지는 거다 말이죠.

천사 미가엘이 변론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말이죠.

마귀는 에이 저 말도 안되는 반칙이라고 우기겠죠.

이 얼마나 부정의 부정 입니까?

 

그래서 이사야 참선지자가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합니다.

반면에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교회 망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 다 라고 외칩니다.

 

결국 하나님이 달라요.

참선지자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존재로 안 보고 기능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성을 보여주는 기능을 이스라엘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고 보고 있고

 

반면에 거짓선지자가 외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존재로 보고 있기 때문에

존재가 사라지면 무슨놈의 신앙이 필요하겠냐 라고

절대로 심판은 없다고 외치는 겁니다.

내가 제대로 믿으면 심판은 없고

내가 믿지 못하면 망하게 되니까

우리가 제대로 믿는 열심을 내고 있기 때문에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우리가 충분히 절대로 막살지 않고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이 숙제를 잘하고 있는 이상은

망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참 눈물 나죠? 누가 지도자 답습니까?

 

다윗도 이랬더래요~~

저 나쁜 부자 곧 가난한 자의 딸같이 여기는 양을 잡아서 손님을 대접한

자기 양을 잡지 않은 저 부자를 율법대로 4배나 갚아서

사회 정의를 실현토록 하여라

 

자 그럼 사회 정의 올까요?

오히려 사회 정의가 못 오도록 주님이 막아버리는 겁니다.

 

최순실 풀어버리고

박그네 풀어버리고

트럼프 풀어버리고

 

그래서 아무리 회개 눈물 금식 기도 4종 세트를 드려도

아이를 살릴수 없도록 하셨다 말이죠.

 

아니 왜죠?

아이를 살리면 역시나 기존의 것만 연장할 뿐이다는 겁니다.

 

마치 죽은 나사로를 살릴 필요가 없듯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의 관심사는 나사로의 죽음이지

예수님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를 외치실분

곧 부활에 관심이 없다 말이죠.

생명에 관심이 없어요.

 

인생을 의지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나사로에 대한 연민을 자기 인생에 대한 연민으로 투사해서 우는 겁니다.

 

생명에 관심이 없는데 나사로에 대한 죽음을 본다는 자체가 얼마나 모순이냐 말이죠.

그래놓고

너가 사랑한거 맞니? 사랑하는데 왜 3일 일부러 늦게 왔니?

마치 일부러 지체해서 온 것을 아는냥

사람들의 눈빛이 살기가 넘쳐 흘러서

 

(3:9, 개역) 그들의 안색이 스스로 증거하며 그 죄를 발표하고 숨기지 아니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저 예수 땜에 우리 동네의 참한 청년 하나가 죽었다고 외치는 겁니다.

 

자 이런 상황인데

누가 예수님이 생명이요 길이요 부활이요를 믿겠습니까?

믿음이란

이미 인간 속에 뭔가 가득한 것이 있다는 것을 들추어내시고

그것을 밀어내는

그 암덩어리를 빼내고자 수술칼로 푹 찔러서 건드리는 것이 믿음이다 말이죠.

 

도둑이라고 표현했다 말이죠.

빼앗는 자 약탈자

내 속의 암덩어리를

나를 숙주로 삼은 주인을 결박하는 자가 도둑이다 말이죠.

그 도둑을 믿음이라고 한다 말이죠.

 

인간의 믿음 백날 해보세요 그럴려고 하는가?

 

우리가 말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예수님에 대한 복수심만이

인간의 믿음이다 라고

늘 틈만 나면 꼴에 자랑질을 해요 글쎄.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건지러워서 못 살아요.

 

그래서 다들 통곡을 합니다.

나사로 살려내라 살려내라

예수는 나사로를 살려내라 살려내라

촛불 시위를 벌려요 글쎄 ~~~

 

어차피 못 살려낼 것 아니까 이 꼬투리 잡아서 물고 늘어지는 겁니다.

마귀가 모세 시체를 내 놓으라고 하듯이

베드로를 내 놓아라 결제 싸인해라 라고 하듯이 말이죠.

 

솔로몬이 아이를 두 동강 내라고 하니까 물개 박수를 치면서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도록 하는

이 심판성이 옳았다고 박수를 피면서

모세 시체 내 놓으라꼬

나사로 살려 내라 라꼬

베드로 빨리 내 놓으라고

무지 무지 정의 롭지 않나요?

 

자기만 심판의 저주 안 묻으면 되니까

아주 아주 물개 박수를 쳐요

 

자 멸망 받아 마땅하죠?

 

솔로몬의 지혜에 관심이 없어요.

그저 자신의 눈 앞의 목적만 달성하면 되요.

덮 썩 물지요.

 

새로움 속에 못 들어와요.

이 심판이 뭔지 모르는 겁니다.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말하는 심판을 몰라요 글쎄.

 

그래서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보고

유다를 보고 우시는 겁니다.

 

?

 

이들이 예수님을 안 쳐다 보고 있다고

지금 울고 있는 이 예수님을 안 쳐다 본다고

 

이스라엘이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유다가 죄악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새로운 세계를 몰고온 예수님을 안 쳐다보고 있기에

지금 울고 계시거든요.

안 봐요 글쎄

 

부활을 안 봐요

? 부활교리를 때우고 있거든요.

 

믿음을 안 봐요

? 자기에게 믿음이 이미 충분히 있거든요.

 

없다고 여기면 차라리 볼텐데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여기면

차리라 의사를 구원자를 볼텐데

건강하다고 여기니까 볼 이유가 없는 겁니다.

심판 받을 이유가 없다고 보더라 말이죠.

 

새것이 낳은 자가 아니다 말이죠.

미래완료가 낳은 자가 아니다 말이죠.

십자가가 낳은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물을 안 쳐다 봐요 글쎄

왜죠? 자기들고 울고 있어요.

? 나사로가 죽어서 말이죠.

 

예수님은 그들을 눈물을 보시고 민망해서 더 우시는 겁니다.

아니 왜죠?

나사로가 안 죽었거든요.

 

그런데 죽었다고 울고

그 죽음이 예수 너가 일부러 지쳬를 해서 죽었다고

예수님에게 다 뒤짚어 씌우면서 우는 것을

 

다시 예수님께서 보시고 우시는 겁니다.

아이고 이 놈들아 어딜 감히 꾀느냐

십자가가

다 이루셨다가

이렇게 또렷하게 밝히 보이는데

누굴 꾀느냐

 

그런데 끝까지 꾀고 끝까지 속여요 글쎄

오로지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에서 눈물 흘리는 겁니다.

 

지금 두 세력이 서로 자기 소욕으로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하고자

둘 다 울어요 글쎄 ~~~ ㅋㅋㅋㅋ

 

리얼 하지 않습니까?

실화 냐?

네 실화 맞습니다.

 

인간의 믿음은 결국 예수님을 꺽고자 하는 믿음 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믿음은

이스라엘을 너희 손에 안 맞기겠다는 겁니다.

이 이스라엘을 끝까지 책임지고자

다윗과 다윗의 자손의 동행이 하나님의 동행이듯이

이스라엘과 예수님의 동행이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로 나타나는

예수님의 믿음이다 말이죠.

 

이 예수님의 믿음을 곧 믿음이 예수님이지요.

이 믿음을 누가 방해를 합니까?

자칭 이스라엘이 방해 하고 있더라 말이죠.

아무리 방해해도 안 속아 넘어갑니다.

이스라엘을 누가 책임진다?

예수님이 책임지니까 말이죠.

교회를 예수님이 끝까지 책임 지신다 말이죠.

 

그러나 인간의 믿음은 자기가 교회를 교회 답게 하겠다고 하다가

오히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더라 말이죠

이 예수님과 적대관계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아니 그렇게 해서라도 심판의 주 예수님과 꽝 하고 충돌을 해서 박살이 나는

사도바울처럼 되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더라 말이죠.

 

여기에 베드로는 본인이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 만 하는 자신의 숙제로 보고 있어요. 글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선언하신 예수님이 책임지시지

교회가 교회를 책임지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그 책임이 뭔가?

 

맞습니다. 일부러 나사로를 죽이는 겁니다.

일부러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해서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오도록 하는 겁니다.

 

맞습니다 마귀가 나서 줘야 합니다.

거짓선지자가 나서 줘야 합니다.

그래야 구체적 보편성으로써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보기 때문에

주님이 고맙게도 눈에 안 보이는 마귀를 보여주셔서

마귀를 거쳐서 십자가의 복음을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귀가 어떤 짖을 하는지를 통해서

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새것을 외치는 지를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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