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의 회인 한국교회 vs 적은능력으로 배반치 않은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된 새이름이 새겨진 빌라델비아교회 ( 3: 7-13)

 

사울 왕의 문을 외치는 사단의 회 이냐? vs 다윗의 열쇠로 다윗의 문을 통과하는 주님이냐?

 

이유 없이 무조건 손 더러운 사단의 회 vs 원인 없이 무조건 손 깨끗한 일곱교회

계 12 사단의 회 vs 빌라델비아 교회 ( 계 3, 7-1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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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1, 개역) [다윗의 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2, 개역)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4:5, 개역)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8,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10,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3:7, 개역)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3:8, 개역)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3:9, 개역)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10, 개역)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키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3:11, 개역)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3:12, 개역)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3:13,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3:7, 새번역) "빌라델비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라. '거룩하신 분, 참되신 분, 다윗의 열쇠를 가지고 계신 분, 여시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시면 열 사람이 없는 그분이 말씀하신다. / 또는 '천사'

(3:8, 새번역)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보아라, 내가 네 앞에 문을 하나 열어 두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닫을 수 없다. 네가 힘은 적으나,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모른다고 하지 않았다.

(3:9, 새번역)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3:10, 새번역)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 때에, 나도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3:11, 새번역) 내가 곧 가겠다. 너는 네가 가진 것을 굳게 붙잡아서,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여라. / , '월계관'

(3:12,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내가 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겠다. 그는 다시는 성전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하나님의 이름과 내 하나님의 도시,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또 나의 새 이름을 그 사람의 몸에 써 두겠다.

(3:13, 새번역)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일곱교회는 예수님 자신의 피로 사셨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일곱교회의 반대편에 놓여진 자들을 반드시 대조 시키면서

 

예수님 자신의 흘리신 피를 그들에게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도록 조치했다는 겁니다.

 

 

 

그럼 그들은 무엇으로 의미를 둘까요?

 

오늘 본문에 적은 능력으로 내 이름을 배신하지 않았다 라고 나옵니다.

 

 

 

즉 그들은 큰 능력을 쫏고서 주의 이름을 배신했다 가 되는 겁니다.

 

 

 

이것이 참교회와 가짜교회

 

곧 일곱교회와 사단의 모임()와의 차이가 되는 겁니다.

 

 

 

그럼 물어봅시다. 참 교회 있던가요?

 

여기서 유다서에서 모세 시체로 변론하는 마귀가 개입하듯이

 

가장 대표성으로써의 교회 곧 반석인 베드로를 봅시다.

 

베신 했다 안했다? 배신 했지요. 그것도 세 번 씩이나 부인, 배신했다 말이죠.

 

적은 능력자 입니까? 아니면 절대로 주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십자가의 죽음까지 끝까지 따라 가겠다고 큰 능력을 과시했다 말이죠.

 

 

 

자 이거 대략난감입니다.

 

아니 교회라는 의미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

 

베드로가 이런 판국인데

 

우리에게서 무슨 기대를 가지겠느냐 말이죠.

 

 

 

? 모세 나왔죠.

 

탈락 아닙니까?

 

마귀가 안 달려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겠죠.

 

 

 

또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입니다.

 

다윗 또한 배신자입니다.

 

적은 능력요? 아닙니다. 그 또한 사울왕과 다를바 없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눈치 채셨군요.

 

다윗 베드로 모세 모조리 해당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적은능력으로 주의 이름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하셨을까요?

 

 

 

여러분 존재로 보면 개인의 자질을 따지게 됩니다.

 

그러나 기능은 개인의 자질을 따지지 않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1 2 3 4 시간 순서의 역사로 따지지 않고

 

무시간 무공간 무육체 비존재로 보는

무시간(비시간-먼저된 이스라엘은 나중 되고, 나중 된 개같은 이방인은 먼저 되는, 창기와 세리가 먼저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는)

무공간(비공간-빈터-성전의 두 사람의 기도,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바리새인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세리는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심판받아 마땅한 자인 나를 제대로 심판하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무육체(비육체-맞습니다 맞고요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님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비존재(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리석고 미련한 무능한 무존재인 어린아이에게는 나타내시는)

 


예수님 자신의 피 흘리심 이라는 결과로만 따진다 말이죠
.

 

그 결과에서 나오는 것이 기능이요.

 

다윗의 열쇠로 열어재끼니까 열리고 닫히는 문이 열쇠의 기능의 증상물로 나온다 말이죠.

 

그럼 조건 갖출 필요가 없어요. 원인이 없어요.

 

 

 

또 오랜만에 복음을 증거하게 되니 이단 소리 안듣고는 못 배기는

 

마귀가 개입을 안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방종을 유도 한다 고 보는 자들에게는 오히려 더 심한 표현이거든요.

 

 

 

조건 갖출 필요가 없어요.

 

 

 

아 그럼 마음대로 해야지

 

뭘 마음대로 하겠다고 새삼스럽게 마음대로 하는 것을 지키냐 말이죠.

 

여지껏 마음대로 해 놓고서는

 

 

 

그러니 막살기 라는 것도 결국 자기 존재에 관심을 두는 이상

 

자유가 아니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자유냐?

 

해 아래 새것이 없지만

 

해를 없애 버리는 자유의 영광 앞에서는

 

개인이 없어져 버릴 정도로 자유이다는 겁니다.

 

 

 

그럼 자유란?

 

맞습니다. 그리스도의 몸만 자유하는 겁니다.

 

오히려 철저한 복종이지요.

 

 

 

더 나은 예수님의 죽도록 충성하심이 덮쳐지는 겁니다.

 

조건 안 갖추는게 아니라 그렇다고 갖추는게 아니라

 

더 나은 예수님의 피가 덮쳐졌다는 겁니다.

 

이 피 흘리심 아니면 모조리 다 거짓이다는 겁니다.

 

마귀가 이걸 노려요 글쎄.

 

거짓의 영이니까 그것 밖에 못해요.

 

 

 

어느 정도로 복종 하셨다?

 

죽기 까지 말이죠.

 

버림받기 까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27:46, 개역)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26:39, 개역)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14:36, 개역)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그래서 일방적으로 선언해 버리는 편파해석을 하는 겁니다.

 

누구에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에게

 

너는 적은 능력으로 나의 이름을 배신하지 않았다고 하는 겁니다.

 

 

 

아니 왜? 배신 했잖아요

 

맞습니다. 배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를 흘리셨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 말이죠.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말이죠.

 

그 새것의 증상물로써 베드로의 모든 허물을 덮었다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뒷 북 치듯이 이미 다 끝난 게임을

 

다시 허물을 들쳐 보는 겁니다.

 

이것을 거짓이라고 한다 말이죠.

 

? 속이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어딜 감히 흐릿하고 모호하고 의문의 것으로 들쳐보느냐 말이죠.

 

 

 

(3:8, 개역)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이 덮어버렸으면 덮 덮 덮은 것은데

 

왜 들추어내느냐

 

오히려 들추어내겠다는 것이 도리어 들추임을 당하는

 

거짓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배 배 배신이야 배반 배신

 

배신한 베드로 잡을려다가 도리어 배신자임이 드러나는 식이다 말이죠.

 

 

 

정작 예수님은 베드로를 새 몸 곧 그리스도의 몸에

 

새것에 넣어버렸는데

 

과거의 헌 옷을 붙잡고 시비를 걸다가

 

자신이 도리어 거짓으로 들통나는 겁니다.

 

그 육체 잡아서 뭐하게? 어차피 쓰레기요 배설물인데????

 

 

 

마귀가 미치고 팔짝 뜁니다.

 

격동을 해요 글쎄

 

견디질 못해요

 

아니 왜?

 

반칙을 하니까 말이죠.

 

 

 

아니 제가 그래서 베드로를 잡아왔고

 

물증도 있고 모든 증거와 정황을 다 카메라로 찍어서

 

도저히 빠져 나갈수 없도록 했고

 

심지어 베드로 본인도 시인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 이 베드로를 위해 피를 흘려서

 

죄 값을 치러서 피로 사시느냐 라는 겁니다.

 

미치고 펄쩍 뜁니다. 환장할 노릇이다 말이죠.

 

 

 

우리는 베드로처럼

 

또 모세나 다윗처럼

 

적은능력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늘 눈만 뜨면 큰 능력을 추구하고 싶어 한다 말이죠.

 

그러다 보니 늘 수시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말이죠.

 

 

 

이런 판국인데 뭐 성화하겠다고?

 

 

 

아 그런데 일방적인 편파 해석으로

 

반칙으로

 

십자가의 불륜으로

 

십자가라는 부정함으로

 

 

 

(3:8, 개역)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내 말을 지켰다고

 

너가 적은 능력으로 그랬다고

 

편파판정 하더라 말이죠.

 

거짓말 하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참말 하는 정통신학 마귀와

 

거짓말 하는 이단 예수님과의 충돌에 놓여지는 겁니다.

 

도둑놈 예수님과 물건의 주인과의 충돌이다 말이죠.

 

 

 

누가 진짜 거짓으로 밝혀집니까?

 

누가 넉넉히 이깁니까?

 

 

 

여기에 마귀는 무조건 백전백패입니다.

 

 

 

이 십자가를 고맙게도 마귀는 못 쳐다본다 말이죠.

 

자기만을 못 박고자 만들었는데

 

그것을 보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박히심으로써

 

더더욱 못 쳐다보는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아무리 베드로를 잡아와도 소용이 없는 짖만 할 수 밖에 없더라 말이죠.

 

이 헛짖

 

거짓을

 

우상이라고

 

약속을 못 지키잖아요.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신부로 삼겠다는 약속을 주님이 이루신다 말이죠.

 

베드로는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힘으로

 

100세 전에 이룰려고 하다가 쭐꾸덕 미끄려져서

 

사단아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자이다 라고 욕은 비록 얻어먹었지만

 

이것 조차도 마귀를 끌어당기기 위한 주님의 자작극

 

십자가의 자작극이였기에

 

그 십자가의 증상물로써 베드로는 잡혀야 하는 겁니다.

 

 

 

마귀가 노리는 것은 가룟유다가 아니다 말이죠.

 

자기 새끼를 자기가 데리고 가는데 그게 무슨 의미 있습니까?

 

남의 새끼를 잡아가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예수님이 막 부추겨요 글쎄

 

욥기 에서도 마귀야 나랑 내기하자

 

에이 질꺼 뻔한데 제가 바보입니까? 내기하게?

 

차 포 졸 까정 다 때줄게 라고 하자 마자

 

입에 침이 막 고이는 겁니다.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

 

 

 

부정의 부정이다 말이죠.

 

마귀에게 악하다 거짓이다 라는 소리를 못 듣는 하나님은 가짜다 말이죠.

 

예수님만이 마귀에게 욕 먹는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분입니다.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어요.

 

 

 

앞의 글 이사야 에서도 이스라엘의 의미는 결국 이런 마귀와 거짓선지자가

 

오히려 또렷하게 밝혀주는 겁니다.

 

이스라엘 본인도 모르는 이스라엘의 의미를 말이죠.

 

그래서 신나게 풀어버리신다 말이죠.

 

아무리 거짓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를 해도

 

정작 입에서는 축복이 나가듯이 말이죠.

 

 

 

오히려 이스라엘 본인들만 몰라요 글쎄 ㅋㅋㅋㅋ

 

 

 

이 얼마나 아이러니 하냐 말이죠.

 

자꾸 존재로 보고있으니

 

개인의 숙제로 보고 있는 이스라엘이 되어버리니까

 

결국 사단의 회가 되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 이렇게 추구하거든요.

 

단 한 번도 복음을 증거 해 본적이 없는 자들이다 말이죠.

 

이들은 오로지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만 할 뿐이다 말이죠.

 

그거 촛불 시위자들도 다 하는 말이다 말이죠.

 

그게 종교 아닙니까? 666

 

 

 

그리고 이들은 사울왕처럼 여호와를 믿지

 

하나님을 믿지

 

곧 우상을 믿고 있지

 

 

 

다윗왕처럼 여호와의 이름을 믿지 않는다 말이죠.

 

 

 

존재를 믿고 있지 기능을 안 믿더라 말이죠.

 

우상을 믿고 있지 약속을 안 믿어요 글쎄

 

 

 

우상을 믿고 있다는 증거가 바로 큰 능력을 추구하는 겁니다.

 

신앙을 가지게 되면 또는 교회에 다니게 되면

 

또는 교회에서 봉사를 하든 그 속에서 벌어지는 관심사가

 

작은 나를 큰 내가 되기 위해서 하더라 말이죠.

 

성화론이 그렇잖아요.

 

작은 성화됨에서 크게 성화됨을 추구하듯이

 

수준 낮은 성화가 아닌 수준 높은 성화 거룩함을 추구하는

 

늘 관심사가 이렇다 말이죠

 

이런 인생을 의지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약속은 바로 그것을 배설물 똥덩어리로

 

오히려 적은 능력을 추구하게 되더라 말이죠.

 

아니 적은 능력이 뭡니까?

 

이것을 정의 내리면 또 다 달려들어서 지킬려고 할꺼다 말이죠.

 

저 사람은 죄를 지을줄 모른다고 하니까

 

나는 죄를 지을 줄 알기에 죄를 죄를 행해요 글쎄 1 2 3 4 시간 순으로

 

육체가

 

존재가 말이죠.

 

그게 우상을 쫏고

 

인생을 의지하고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개인의 숙제인냥

 

막살지 않겠다고 나오는 거다 말이죠.

 

 

 

적은 능력이란 없어요.

 

안 보입니다.

 

적은 능력을 지켜버리면 그게 큰 능력이지 적은능력이겠습니까?

 

적은능력을 지킨 자기를 지울수가 없는데

 

그 육체를 자랑하는 기념비를 부술수가 없는데????

 

 

 

적은능력은 예수님 자신의 피 흘리심으로 인해

 

일방적으로 편파해석한 것이지

 

인간에게서는 없어요.

 

시간에서 역사에서는 없다 말이죠.

 

존재에서는 없어요.

 

 

 

기능이다 말이죠.

 

그 적은능력이라는 기능이 바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말하는 기능이거든요.

 

죄인은 구원자를 말하는 기능이고

 

환자는 의사를 말하는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정작 적은능력의 기능이 아니라 이름의 기능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다 말이죠.

 

정작 죄인의 기능이 목적이 아니라 구원자의 기능이였던 것이였던 것이였다 말이죠.

 

정작 환자의 기능이 목적이 아니라 의사의 기능 병을 다루시는 기능이였던 것이였던 거다 말이죠.

 

 

 

죄인 되었다고 죄인인 자기가 옳았데?

 

그럼 죄인입니까? 옳았다고 하니 의인입니까?

 

 

 

배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배신하지 않았다고 하는

 

원인 없는 결과인 피로 사심입니까? 배신 안하기를 지키고 완성함 입니까?

 

 

 

자꾸 말 되게 할려다가

 

오히려 말 안되는 것에 의해 압도적으로 무너지는 판국이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속임수 꾀를 펼치냐 말이죠.

 

 

 

십자가가 말이 되냐 말이죠?

 

말이 되면 한번 십자가에 달려 죽어보라 말이죠.

 

누굴 구원해 줄 수 있는지?

 

아무도 없어요.

 

오죽 하면 다들 비웃습니다.

 

 

 

너나 구원 받으세요 남 구원할 생각 말고 라고

 

다들 비웃더라 말이죠.

 

 

 

? 아무런 능력이 없거든요.

 

이것이 적은능력입니다.

 

 

 

결국 예수님 본인이 다 해놓고서는 우리에게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워서 칭찬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본인이 슬픔으로 씨앗을 뿌려놓고서는

 

우리에게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예수님 혼자 다 이루셔 놓고서는

 

그냥 값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공짜로 베풀어 주시더라 말이죠

 

 

 

가장 배신한 자의 대표성이 베드로인데

 

가장 배신하지 않았다고 하시니

 

 

 

아예 대 놓고서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놓고서

 

넉넉하게 마귀에게 잡혀와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자 없다고

 

예수님 본인이 선언하시는 겁니다.

 

우리는 심심하면 끊어버리는데

 

베드로처럼 말이죠.

 

배신하는데

 

그런 고멜인데 말이죠.

 

 

 

오히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영생을 얻습니까 라고 하는 자들에게서는

 

구원을 가로막더라 말이죠.

 

 

 

이 부분을 지난 주에 했는데

 

월요일에 다시 말씀을 나누면서 또 뻔뻔이 찬양을 계속 부르시던데

 

 

 

아니 구원 받고 싶어서 다가오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면 구원받냐 라는 질문에

 

답변을 하니

 

그럼 누가 구원얻냐고?

 

구원받을자의 가장 가까운 근사치가 탈락인데

 

저 사람이 구원 못 받을 정도면 우리는 그럼 어떻게 구원 받냐고

 

철저한 단절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구원 안 주겠다고 막는

 

어떻게 해서든 가로막는 식이다 말이죠.

 

 

 

반대로 구원 받을 생각 조차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아예 삥둘러 가지도 않고 직진으로 가로질러 다가 와서는

 

구원 주고파서 안달이 난 사람처럼

 

구원주겠다고 영생수 주겠다고

 

막 다가 가시더라 말이죠

 

술람미 여인에게 솔로몬 왕이 안달이 나서 왕비를 삼고자 말이죠.

 

그 천한 계집이 졸지에 왕비가 되었으니

 

 

 

마귀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미치고 팔짝 뛰지

 

 

 

바로 이것이 약속입니다.

 

마귀가 견디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말이죠.

 

마귀가 팔짝 뛰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무이다.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워야

 

맏아들이 발악을 한다 말이죠.

 

 

 

그래야 아버지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 원인 없는 결과이니까 말이죠.

 

마귀가 팔짝 뛰는 것은 오로지 원인을 잡았거든요.

 

마귀가 베드로의 세 번 부인만을 잡았거든요.

 

원인이면 말이 되잖아요.

 

 

 

그런데 말도 안되는 결과가 덮쳐버리니까

 

이건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 마음대로 이니까

 

여기에 마귀가 반발 할 수 있겠냐 말이죠.

 

 

 

마귀를 세 번 부인한게 아니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다 말이죠.

 

그럼 예수님이 심판하고 용서하고 예수님 마음대로 인데

 

왜 마귀가 미치고 팔짝 뛸까요?

 

 

 

이것이 마귀의 기능이거든요.

 

제발 베드로 잡아 오라는 겁니다.

 

잡아 와서 마귀 보는 앞에서

 

마귀 보란 듯이

 

당당하고 뻔뻔하게

 

새옷을

 

피옷을 입히신다 말이죠.

 

약을 올려요 글쎄

 

너 피 옷 입을레?

 

못 입어요 글쎄

 

 

 

그런데 베드로는 입어요.

 

? 죄인인줄 아니까

 

소경인줄 아니까

 

심판받아 마땅한 자인줄 아니까

 

 

 

그러나 마귀의 기능은

 

끝까지 죄인임을 거부하고 의인임을 주장하고

 

소경 아니다고 우기고

 

심판받아 마땅한 자임을 거부하니까

 

 

 

저 십자가가 거리끼는 겁니다.

 

 

 

마귀가 거리껴 하는 그 십자가를

 

아니 글쎄 유대인들이 그러질 않나

 

한국교회가 그러질 않나

 

 

 

그래서 보란 듯이 나 삐뚤어질테야 하고

 

성화론으로 광명한 천사 노릇을 해요 글쎄

 

의인 되기를 해요 글쎄

 

큰 능력을 추구해요 글쎄

 

기껏 해 놓고서는

 

저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개인을 외쳐요 글쎄

 

 

 

개인만 잘 났을 뿐이지

 

전체는 개판이 되든 말든 관심이 없더라 말이죠.

 

 

 

그래서 개인으로써 이룬 것을

 

부자청년에게 가난한 자 라는 전체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라 라고 하시니까

 

그 큰 능력

 

너무 많은 재산들이

 

작은 능력이 될까봐

 

근심하고 등돌리고 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더라 라는 겁니다.

 

그저 개인 구원

 

개인 천국 가기 밖에 없어요.

 

오늘날 성화론자들 보세요

 

하나님 나라 운동 하는 자들 보세요.

 

 

 

아니 언제 주님이 헐벗었고 배고팠고 목말랐습니까?

 

그거 우리가 전문가 인데

 

 

 

소자에게 하지 않은 것이 나에게 하지 않았다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즉 개인에서 전체로

 

바리새인처럼

 

성화론자들처럼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 개인들이 모여서 전체가 되어본들 어차피 개인이다 말이죠.

 

 

 

그냥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당신이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지 않는 이상

 

저는 도저히 살수 없는 죄인일 뿐입니다.

 

제가 770번 용서 받아야 할 환자 죄인 가난한 자 소경 심판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그리스도의 몸을 곧 새이스라엘을 염두하지도 않고

 

생각지도 않더라 라는 겁니다.

 

 

 

약속은 이스라엘과 했지

 

개인하고 한 적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약속은 반드시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아닌 것과 대조를 해서

 

이스라엘과 약속 했다고

 

그래서 나오는 것이 다윗의 열쇠입니다.

 

 

 

상대적인 사울왕에게서는 열쇠가 없다 말이죠.

 

 

 

그 다윗의 열쇠를 통해서 문을 열고 닫고 하심으로써

 

다윗의 자손과 맺은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그럼 새이스라엘은 어디서 나온다?

 

오늘 나오는 교회는 그럼 어디서 나온다?

 

다윗의 문에서 나온다 말이죠.

 

 

 

그러니 다윗의 가문인 예수님에게서 나오는 이스라엘

 

곧 약속의 성사 된 증상물

 

다 이루셨다의 결과물이

 

오로지 예수님에게서만 나오는데

 

 

 

예수님 마음이지

 

마귀가 뭐 안다고 베드로를 넙쭉 잡아오느냐 말이죠.

 

오히려 잘 됐죠

 

새 옷을 입혀 줄라꼬 왜 안오지 하고 있는데

 

마귀가 잡아와 주니

 

새 옷을 입혀 주시는 겁니다.

 

금가락지를 끼워 주시는 겁니다.

 

 

 

? 십자가 가 낳은

 

십자가에서 태어난 아기가 베드로 아기

 

베드로라는 교회

 

베드로 라는 적은능력이다 말이죠.

 

 

 

다들 무시했던 그 권력이

 

오히려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오히려 가장 큰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어린아이 베드로를 태어나게 했다 말이죠.

 

뭘 해도 죄 밖에 없어서

 

쪼로록 엄마 품으로 달려가듯이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으로 달려가서 예수님에게 모조리 다 떠 맡겨 버리는

 

참으로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적은능력으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얼마나 유치한 표현 아닙니까?

 

아기와 엄마 와 만의 대화이거든요.

 

 

 

그래서 엄마는 똥을 싸질러놓은 아기가 이쁘다고

 

그래 그래 너는 나를 배신하지 않았네 라고

 

오히려 똥 쌌다고 배신자 라고 잡아오는 마귀와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예수님 곧 약속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존의 것이 아닌

 

이전 것이 아닌

 

사라지고 삭제되는 것이 아닌

 

 

 

새 것으로써

 

새 이름으로써

 

이름의 기능으로써

 

결과로써 원인을 도리어 삭제 시키는

 

약속이다는 겁니다.

 

 

 

그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원인이 삭제 된 결과로써만의

 

약속의 결과물이지

 

 

 

사단의 회처럼 원인을 따져서

 

나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외치는 것이 아니다 말이죠.

 

나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거짓이 되는 겁니다.

 

? 원인만 있지 결과가 없어요.

 

? 또 언제 거짓말이 나올지 모르는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이니까 말이죠.

 

차라리 나는 거짓말 쟁이입니다 라고 하면

 

십자가가 밝히 보임으로써 고쳐주실텐데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여전히 꾀는 속임수를 펼치더라 라는 겁니다.

 

그 모호한 것을 왜 질질질 끌고 다니냐 말이죠.

 

 

 

(3:9, 개역)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3:9, 새번역) 보아라, 내가 사탄의 무리에 속한 자들을 네 손에 맡기겠다. 그들은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자들이다. 보아라, 내가 그들이 와서 네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였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3:9, 공동) 사탄의 무리에 속하는 자들이 자칭 유다인이라고 떠들어대지만,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들로 하여금 너에게 나와서 네 발 앞에 엎드려 너를 경배하게 하겠으며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하겠다.

 

(3:9, 쉬운) 주의하라! 사탄에게 속한 무리들이 보인다. 그들은 자기들이 유대인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거짓말이다. 그들은 참 유대인이 아니다. 내가 그들을 네 앞으로 끌고 와, 네 발 앞에 무릎 꿇게 할 것이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들에게 보여 주겠다.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부자청년이 거짓말 하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 예수님께 다가왔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이 너는 거짓말 쟁이이다고 들추어내니까 등돌리고 가더라 말이죠.

 

 

 

만약에 거짓말 진짜 하지 않았다면

 

금가락지를 탕자에게 끼워주는 그 사랑에 감사하고 찬양하고 기뻐할 것이다 말이죠.

 

 

 

(3:9, 개역) 보라 사단의 회 곧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않고 거짓말하는 자들 중에서 몇을 네게 주어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마귀 보란 듯이 그들 보는 앞에서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아버지의 사랑을

 

맏아들 보는 앞에서

 

탕자에게 금가락지를 끼우겠다 라는 겁니다.

 

 

 

그럼 거짓말 하지 않았다면

 

기뻐하고 감사하고 찬양할 것인데

 

 

 

오히려 거짓임이 들통난 것이 바로

 

견디질 못하더라 말이죠.

 

 

 

때린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더라 말이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사랑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새생명은

 

원인 없는 결과는

 

곧 약속은

 

반드시 세상이 견딜수 없게 지혜를 펼쳐서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쓴 거짓을 들추어 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참이라면

 

왜 탕자에게 금가락지 끼우시는 아버지의 사랑에 반발 하느냐 말이죠.

 

 

 

거짓으로 들통하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지혜가 펼쳐지는 그 순간에는

 

반드시 참의 가면을 쓴 것들이 거짓으로 들추어지는데 있어서

 

사랑의 진가를 드러내더라 말이죠.

 

솔로몬의 지혜를 그래서 놀라워 하듯이

 

십자가가 어리석다고 미련하다고 헬라인은 거부하고

 

유대인은 거리껴 하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 곧 개인이 아닙니다. 우리 에게는

 

자아가 아닌 셀프? 뭐뭐 아니요 뭐뭐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무한 영광이다는 겁니다.

 

 

 

노래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기능이다 말이죠.

 

기능이란 해야 한다는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어서는 겁니다.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저절로 튀어나오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이다는 겁니다.

 

미래완료에서 덮쳐졌다는 겁니다.

 

 

 

자 그러니 일곱교회 곧 오늘 빌라델비아 교회는

 

무조건 이유 없이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는 고백 밖에 안 나오도록 되어 있고

 

 

 

이에 상대적인 사단의 회인 유대인

 

또는 오늘날 한국교회는

 

거짓말하는 자로써

 

부끄러운 구원이라는 종교용어로 세뇌시키면서

 

스스로 666임을 드러내는

 

 

 

탕자를 사랑으로 금가락지 끼워주심에 대한 반발로써

 

말이 되는 구원을 갖추라고 오늘도 세뇌 시키는

 

사단의 회로 자리잡고 있더 말이죠.

 

성화론자들이나 개혁주의나 다들 그래요

 

안 그러는 한국교회가 없어요.

 

이상하게 반발도 안해요

 

다들 넘어가요

 

그 꾀임에 그 속임수에

 

절대로 막 살면 안된다는 말에 다 넘어가요

 

말이 되거든요.

 

 

 

탕자가 글쎄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잖아요 글쎄

 

오늘 나오는 표현으로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둥이 되고

 

새이름이 새겨진 자 이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즉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약속 성취의 결과물

 

원인 없이

 

이것이 새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이다 말이죠.

 

 

 

십자가에서 태어난 자들 말이죠.

 

 

 

이런 일곱교회를 글쎄

 

원인을 만들어서 일곱교회가 되겠다고 하는 자들이

 

바로 사단의 회요 거짓말 하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단 한 번도 거짓말이 발각되지 않았는데

 

탕자를 금가락지 끼우시는 그 사랑 앞에서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신 용서하심 앞에서

 

 

 

베드로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시는

 

모든 허물을 덮는 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십자가의 피 용서 앞에서

 

 

 

비로소 마귀의 거짓말을 그 어떤 누구도 들추어 낼 수가 없었는데

 

오히려 가장 적나라 하게

 

마귀가 견디질 못하고 격분하면서 드러내도록 되어 있는

 

 

 

참 제대로 된 십자가 라는 걸림돌 맞죠?

 

 

 

이 십자가가

 

이 반칙이

 

이 불륜 만이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는 그 거짓을

 

그 사단의 깊은 것을 제대로 들추어내는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곧 이름입니다.

 

 

 

(3:12, 개역)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이긴 자 =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된 자 = 하나님의 이름, 새 예루살렘의 이름, 새 이름 이 새겨진 자

 

 

 

이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금가락지 끼워주심을 당한자 곧 탕자

 

 

 

이 일방적인 편파사랑으로 인한

 

금가락지 끼우시는 그 기능

 

그 이름이

 

그 반칙을 벌리는

 

무조건 이유없이 일방적으로 뒤집어 씌우시는

 

이 이름이 말이죠.

 

 

 

여기에 사단의 회는

 

이 사랑을 거부하는 거짓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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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인터넷 삼성 앱에서는 보이고요. 나머지 앱브라우저는 모르겠구요.
그 동안 몰랐는데 다 되는 줄 알았는데 크롬만 쓰다가 익스플러어 에서 단추가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참고하세요.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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