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똑!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3,14-22)

 

발가벗어 내쳐지는 미지근한 자 VS 더불어 함께 먹는 라오디게아 교회 

계 13 똑똑똑!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계 3,14-2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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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3:14, 개역)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3:15, 개역)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3:16, 개역)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3:19, 개역)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3:20, 개역)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3:21, 개역)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3:22, 개역)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3:14, 새번역) "라오디게아 교회의 심부름꾼에게 이렇게 써 보내어라.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 또는 '천사' 또는 '기원' 또는 '근원'

(3:15, 새번역)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3:16, 새번역)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3:17, 새번역)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3:18, 새번역)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 옷을 사서 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3:19, 새번역)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3:20, 새번역)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3:21, 새번역)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3:22, 새번역)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마 6:19, 개역)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마 6:20, 개역)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마 6:21, 개역)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마 6:22, 개역)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개역)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마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마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마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마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오늘 본문을 보니 유구무언이던 예복을 입지 않아 쫏겨나는

 

어떤 임금의 자기 아들을 위해 벌린 혼인잔치 비유(마 22장)가 생각납니다.

 

 

 

맞습니다. 계시록은 그야말로 혼인잔치입니다. 잔치 중의 가장 최고의 잔치인 결혼 말이죠.

 

그럼 상대적으로 누구는 이 혼인잔치에 못 온다고 내쳐져버림당한다고

 

잔치의 의미를 상대적인 자의 대조를 통해서 증거됩니다.

 

일곱교회는 반드시 사단의 회와의 대조를 통해서 증거 되듯이 말이죠.

 

 

 

그럼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떤 자들과 대조를 이룰까요?

 

미지근한 자 라고 나오는데

 

찹지도 덥지도 않는 자로써 내쳐져 쫏겨남을 당하는 자인데

 

 

 

그렇다면 무엇이 찹냐 덥냐 미지근하냐 라고 규정하는 기준이 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창조의 근원이 그 기준입니다.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입니다.

 

 

 

(3:14, 개역)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자 그럼 이 창조의 근원에 반대하는 자는 과연 누가 해당되나 싶었는데

 

마침 며칠 전에 어머니께서 사사기 마지막 부분을 읽으시다가 질문을 하시는 겁니다.

 

 

 

왜 단 지파는 제하여 버리셨지? 라고 말이죠.

 

 

 

그런데 사실상 단 지파가 아니고 베냐민 지파가 거의 사라질 뻔했지요

 

그렇지만 오히려 그 단 지파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미가 이야기를 통해서 사실상 이스라엘 전체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거든요.

 

즉 미가 집안의 우상숭배에 모든 지파가 특히 레위인이 다 동의를 해 버리는 식이 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결국 힘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사건의 처음시작을 이야기 했습니다.

 

여호수아 서에서

 

12지파의 정탐꾼이 가난한 땅을 분배해서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전쟁도 하지 않았는데

 

미리 갈라먹기를 하더라 말이죠.

 

 

 

주님이 주셨다는 이유, 약속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우상타파와 연관된 주의 이름의 전쟁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스라엘은 그 전쟁의 기능의 증상물로써 공격자들이 되는 셈입니다.

 

거룩한 전쟁 곧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의 군사 로써 말이죠.

 

약속의 땅은 저들 거주민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써 여호와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천국을 침략하는, 천국은 침노 당하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천국은 침략하는 빼앗는 자의 것이 된다는 거죠.

(마 11:12, 개역)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자 여기서 그럼 입에 침이 고이면서 그러면 빼앗으면 빼앗을수 있나요 라고

 

인간은 여전히 힘의 원리로만 생각한다 말이죠.

 

이 힘의 원리가 바로 우상입니다.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하니까

 

그 검 또한 힘의 원리로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모든 것을 존재로 해석하지

 

기능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해석을 못해요

 

그렇게 해석이 쉬울 것 같으면 존재만 추구하면 되는데

 

기능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곧 불가능의 단절성을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말이 안되지요. 불가능을 무슨 수로 보고

 

단절성을 무슨 수로 보겠냐 말이죠.

 

안 보이는데 봐야 한다니???

 

 

 

힘의 원리가 아닌

 

우상의 원리가 아닌

 

희생의 원리 곧 십자가라는 창조의 근본원리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천국이라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데 있어서의 전쟁

 

그냥 전쟁이 아닌 거룩한 여호와의 전쟁은

 

오로지 언약의 정신

 

희생정신으로만 침략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도 안되게 떡 줄 자는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 마시듯이

 

가나안 땅을 미리 갈라먹기를 하는데 있어서

 

제일 험난하고 동시에 제일 좋은 땅은

 

아무도 안 가질려고 해서 유다가 차지하고

 

전쟁 하나 없을 만한 곳을 단 지파가 차지 합니다.

 

즉 유다는 차지할 줄 미리 알고 차지하지만

 

단 지파에게서는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라고

 

이런 이상한 행동들에 동참을 하기 싫은 의미로써

 

내가 왜 언약을 뭘 믿고 믿냐? 라는 식으로

 

제일 소극적인 방식을 택해서

 

전쟁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써 전쟁이 가장 없는 곳

 

제일 쉬운 곳을 택하여서 분배 받습니다.

 

 

 

이것이 언약정신이 아니다는 거죠.

 

그런데 이런 사고방식이 결국은 우상숭배로써 이스라엘 전체로 퍼지는데 있어서

 

결국 사사기 의 핵심은 왕이 없음으로 자기 소견대로 행하더라 라는 겁니다.

 

 

 

누구 하나 희생정신이 아닌 정반대인 힘을 추구하는 우상화 곧 자기를 위한

 

자기만을 살고하는 모습

 

인생을 의지하는 모습으로써

 

심지어 우상을 나무나 돌조각을 섬기는게 아니라

 

우상으로써 여호와를 섬기는데 있어서

 

십자가의 언약 방식이 아닌

 

희생정신이 아닌

 

여호와라는 이름만 따와서 우상종교와 혼합시키는 방식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우상화 했다는 겁니다.

 

 

 

기드온의 에봇도 그렇구요

 

힘으로만 자기와 자기자식을 살릴수 있다는 의식 말이죠.

 

 

 

조물주 위의 건물주를 추구하듯이

 

차라리 그냥 건물주를 추구하면 될 것을

 

꼭 하나님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건물을 섬기듯이

 

저 세리와 같이 되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나님을 우상화 하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되면 모든 기독교의 신앙은 결국 우상이 되는 겁니다.

 

유대인만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장악 당한게 아니라

 

지금 현대의 모든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러니 우상이냐 예수님이냐

 

바알이냐 여호와냐 라고 둘 중에 택하라 라고

 

엘리야가 외쳐도

 

그 외침이 소용이 없어져 버리는 이유가

 

둘 다 썩어버렸기에

 

저들은 둘로 안 보이고 하나로만 보기 때문에

 

두 개이어야

 

둘로 구분이 되어야

 

차이가 나야 하나를 택하고 하나를 버리던가 할텐데

 

둘이 썩어져 버렸으니

 

택할 수가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미지근 하다는 겁니다.

 

 

 

(왕상 18:21, 개역)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머뭇머뭇 유구무언 할 수 밖에 없는

 

뭔가 다르게 차이나게 또렷하게 구분이 되면 참 좋을텐데

 

이것도 같고 저것도 같은데

 

구별이 없는데 어떻게 한 쪽을 쫏을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래서 사사기의 단 지파를 통해서

 

여호와 라는 이름을 차용해서 썩어버린 혼합성을

 

누가 구별해 주지 않는 이상 소용이 없는 겁니다.

 

레위인이 그 일의 담당자 이지만

 

자기 먹고 살길이 없기 때문에

 

오히려 동조를 해 버린다 말이죠.

 

이렇게 단 지파는 또 에브라임 지파도 마찬가지

 

우상숭배자의 대표성으로써

 

계시록의 12지파에서 빠지는 겁니다.

 

 

 

그렇게 12지파가 사사기에서 모두다 개판이 되어버려서

 

언약성을 상실한 가운데서도

 

주님은 포기하시지 않는 겁니다.

 

제거할 지파를 제거해서라도 12지파라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다 이루십니다.

 

 

 

그렇다면 일곱교회 곧 라오디게아 교회는

 

바로 저들 지파와 다른 차이성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상제거에 적극적인 회개를 하는 겁니다.

 

그 회개란 과거의 반성이나 우상적인 요소를 제거할수 있는 모습을 취하는게 아니라

 

이미 십자가에서 다 완성했다 라는 새것을 쳐다봄으로 인해서

 

약속 성취를 봄으로 인해서

 

구지 약속도 못지키는 의문이 힘 추구인 우상을 섬길 이유 조차 없게 되더라 말이죠.

 

오히려 우상을 제거하는 정의를 추구하겠다고 직접 나서다가 베냐민 지파 하나를 다 날려버릴 판국에 까지 이르렀지만

 

사실상 악을 제거하겠다는 그 정의감 속에

 

그 정의감 자체가 하나의 악으로써 자리잡게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겁니다.

 

 

 

그러다가 각자의 소견을 끊고 왕이라는 한 인물로의 집결로 인해서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지는 왕을 따르면 저런 각자의 소견을 안 추구하게 될꺼다? 라고 생각했건만

 

 

 

이 왕이 우리의 각자의 소견을 오히려 대변해 주는

 

욕망의 덩어리 걸어다니는 우상이 되고 말았다 말이죠.

 

 

 

왕의 희생이 없으면 결국 백성은 죽게 되는

 

도리어 빼앗김을 당하게 되는

 

그래서 어린아이가 골목대장하듯이 왕놀이를 하고

 

부녀자 박그네가 채권놀이 돈놀이 이자놀이 하는 장난감 화장품 모으는 것에

 

다들 죽어나가게 되더라 말이죠.

 

 

 

그러니 여전히 각기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더라 말이죠.

 

이것을 무슨 수로 끊겠습니까?

 

 

 

즉 미지근 하다는 겁니다.

 

언제든지 불리하면 힘의 원리에 따라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입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면 왜 안불렀냐고?

 

불렀으면 같이 싸워 전쟁했을 텐데

 

기드온이 승리하고 돌아오면 또 왜 안 불렀냐고 섭섭하다

 

우리를 불렀으면 진작 함께 했을 텐데 라고

 

에브라임 지파가 입다에게 기드온에게 요리 붙었다 조리 붙었다 하더라 말이죠.

 

이게 힘을 쫏는 에브라임 지파의 우상숭배이다 말이죠.

 

즉 이스라엘 12지파가 다 동일하게 나타내는 모습의 대표성으로 나타내는 겁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이구요.

 

 

 

그러니 언약정신이 없는 이상

 

약속의 땅에 살수가 없음을 주님이 보여주시는 겁니다.

 

결국 약속의 땅이 뱉어 버리지요

 

내쳐버리는 겁니다.

 

 

 

천국이 뱉어요.

 

천국을 침략하면

 

빼앗으면 좋을 것 같지요?

 

천국의 정신이 없으면 도리어 천국으로부터 내뱉어짐을 당하는 겁니다.

 

 

 

괜히 말려들었어 말려들었어

 

차라리 미지근하지 말고 처음부터 차갑던가 더웁던가 하면 될 것을

 

이것도 저것도 아닌

 

바알도 아니고 여호와도 아닌

 

어중간한 모습을 취함에 있어서

 

오히려 천국인 약속의 땅으로부터 내 뱉어짐을 당하는 웃사꺼리를 당하는 겁니다.

 

 

 

혼인잔치의 예복을 입든지? 아니면 천국잔치에 아예 들어오지를 말던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저 약속에는 관심없이

 

자신의 생존과 존재감만으로 살아왔던 버릇

 

그 버릇이 바로 우상숭배이다고 했다 말이죠.

 

처음것을 버리던가

 

아니면 지나간 것을 버리고 새것을 보던가?

 

처음것도 안 버리고

 

새것도 안 보는

 

머뭇 머뭇하면서 유구무언인 모습이

 

우상이라는 인생을 의지하고 있기에

 

언약정신을 거부하는 거다 말이죠.

 

 

 

천국에 들어가던가

 

아니면 아예 들어가지나 말던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천국 가는 길목에 서서 삥을 뜯고 있더라 말이죠.

 

이게 종교이다 말이죠.

 

오늘날 한국교회 사단의 회이다는 겁니다.

 

 

 

자기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둘 사이에 어중간하게 서서 말이죠.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23:1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사람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닫기 때문이다. 너희는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 (14절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4. 이 위선자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서운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첨가되어 있음

 

(23:13, 공동)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놓고는 사람들을 가로막아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려는 사람마저 못 들어가게 한다."

 

 

 

오늘날 기독교 신학이나 교리가 다 이런식이다 말이죠.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는

 

그저 눈에 보이는 교회라는 권력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자 그렇게 인간의 소유가 되어버린 교회를 방해하는 자를 가만히 안두죠 제거합니다.

 

성전을 헐라 라고 하신 예수님이 그래서 제거 당하더라 말이죠.

 

나의 소유를 방해하던 예수를 부자청년이 등돌리는 이유입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이야 말로 가장 벌거벗은 자이다 말이죠.

 

풍요 속의 빈곤 아닙니까

 

덧입고 입으면 입을수록 오히려 더더욱 발가벗겨진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말이죠.

 

소유가 너무 많으니까 말이죠.

 

 

 

입에 한 가득 개구리처럼 잔뜩 입에 넣고서 바늘구멍을 통과 할려고 하니

 

그 소유를 뱉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 힘과 권력을 무슨수로

 

 

 

그런데 이런 우상화된 교회를 다들 부러워 죽어요 글쎄

 

크게 될려고들 꿈꾸고 있는데

 

 

 

이렇게 인간은 이스라엘의 기능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지만

 

주님은 포기하지 않으시면서

 

제거할 거 제거하고 단 지파 에브라임 지파

 

특히 호세아서에서는 에브라임아 돌아오라 라고 아무리 외쳐도

 

회개하라 라고 아무리 외쳐도

 

즉 이 말은 안 돌아온다는 것을 구체화 하기 때문에

 

우상과 합한 자를 제거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12지파 144천명이라는 새찬양자들 속에 속하지 못하더라 말이죠.

 

 

 

어차피 줘도 안 먹어요

 

왜 이미 그들에게는 여호와 보다 우상이 더 좋거든요.

 

심지어 여호와가 우상으로써 썩여져 버렸으니 말이죠.

 

곧 가장 잘 믿는 자들이라고 소문이 난

 

바리새인 율법학자 사두개인 서기관 이런 자들이다 말이죠.

 

오늘날로 치면 성화론자들 개혁주의자들 정의사제구현단들 ㅋㅋㅋ

 

정통신학자들 신학박사들

 

안 그런 자들이 없지요.

 

 

 

선생 노릇하면서 전갈과 뱀과 독을 주는 자들이다 말이죠.

 

 

 

복음을 위해 죽는 자들이 아니라

 

복음으로 장사하는 먹고 사는 자들 말이죠.

 

 

 

우리도 뭐 욕할 입장이 못될정도로

 

심판받아 마땅한 입장에 놓여진거다 말이죠.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습니까?

 

다들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데

 

예수라는 장난감

 

하나님이라는 장난감

 

십자가 라는 장난감

 

 

 

그래서 누가 죽어야만 하는 겁니다.

 

 

 

24장로들 모두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거든요.

 

안그런자가 있다면 십자가를 쳐다봤겠냐 말이죠.

 

십자가를 거부하겠지요.

 

여전히 자신의 신앙을 소유로 삼아서 이 신앙 건드리면 제거해 버리겠다고

 

역시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딧히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맞습니다. 회개란 이 십자가와 부딧히는 겁니다.

 

누가 이기겠습니까?

 

저 쪽이 이만 군사를 몰고 왔고

 

내 쪽이 일만 군사를 소유했다면

 

이것은 보나마나한 게임이라서 또렷하게 구분 됩니다.

 

그래서 빨리 화친을 청해야 할 판국입니다

 

화친을 청하면 살수 있다가 아니라

 

저쪽이 나를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모든 권리를 넘겨버린다는 의미가 된다 말이죠.

 

 

 

마침 몇주전부터 하나 빠드린게 있는데 말해야 되는데

 

늘 타이밍을 놓치고 까먹어서 못햇던 내용이

 

바로 종말의 3종세트 비유

 

열처녀 비유

 

충성된 종과 악한 종 비유 곧 소위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 비유인데

 

중간의 달란트 비유를 빠뜨렸는데

 

 

 

열달란트 다섯달란트 한달란트 받은 종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장사를 하라 라는 주인의 명령에

 

두 명은 장사를 해서 이윤을 남기는데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이윤을 못 남기게 될까봐

 

아예 원금 그대로 주면 된다 싶어서 땅에 파 묻어서 주었다 말이죠

 

왜 주인은 엄격하고 무서운 분이니까 이윤을 못 남기면 내가 벌 받으니까 말이죠.

 

 

 

이것이 종말의 악한 종들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주의 충성된 종은 무조건 이유없이 이기도록 이윤을 남기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거든요,.

 

 

 

그런데 새 것을 쳐다보지 않기 때문에

 

자꾸 자신의 역량으로 따져서 계산하니까

 

말이 안되는 것을 추구할 빠에

 

말이 되는 식으로 계산을 했다 말이죠.

 

 

 

즉 주인과의 별개의 마음이다는 겁니다.

 

주인과의 하나된 마음 자체가

 

잃든 얻든 뭐든지 있는자는 더 받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 마저도 빼앗기게 되는

 

십자가의 희생정신

 

언약정신으로 주님만을 외치는 종인데

 

 

 

종인 주제에 주인 보다 종인 자기가 더 크게 보이기에

 

희생정신이 있을 수 없다 말이죠.

 

주인 보다 자신이 종인 자기가 더 중요해요

 

 

 

주인의 증상물로써의 종이 아니라

 

자기가 주체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러니 계산을 하는 겁니다.

 

 

 

잃지도 않고

 

따지도 않는

 

이윤을 남기지도 않고

 

원금을 잃지도 않는

 

어 중간한

 

 

 

이것이 사랑이 아닌 두려움으로써 여호와 라는 이름을 우상화 했던 미가 집안의 우상숭배였듯이

 

공포가 아닌 사랑으로

 

즉 희생정신으로

 

마음껏 신나게 죽어가도 상관없는 믿음을 주님이 보여주신 그 사랑을 보는게 아니라

 

이것이 회개인데

 

십자가를 안 쳐다보고

 

자신의 처지를 계산하고 거기에 맞는 행동을 하겠다는

 

말이 되겠끔 계산하겠다는 식이

 

 

 

종말에서는

 

곧 성령의 세계

 

약속의 세계에서는 악한 종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열처녀 비유와 같습니다.

 

아직 오지 않았다고 미리 준비할 필요가 없으니

 

그때 가서 사귐을 가지면 된다는 식이고

 

 

 

오히려 미련하고 어리석은 처녀는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귐을 가지고 있는냥

 

미리 준비를 하더라 말이죠.

 

 

 

말이 되게 계산해서 똑똑하고 슬기로운 다섯처녀는

 

종말에서는 악한 처녀가 되고

 

 

 

말이 안되게 어리숙하게 미련한 다섯처녀는

 

종말에서는 슬기롭고 지혜로운 다섯처녀가 되더라 말이죠.

 

 

 

종말의 시선에서는

 

곧 심판의 시선에서는

 

기존의 가치를 팔을 어긋맞게 전도 전복 시키더라 말이죠.

 

 

 

누가 오지도 않았는데 왔는냥 미리 준비합니까? 그게 어리석은 거죠.

 

이것이 세상에 소통되는 방식인데

 

말 되거든요.

 

 

 

종말에서는 안 통해요

 

오히려 말도 안되는 것이 새것을 미리 앞당겨서 끝을 당겨와서 누리는 겁니다.

 

참 제가 말해도 말도 안된다고 이 육체가 반응할 정도로

 

격렬히 저항하는 것이 본능이다 말이죠.

 

? 내 육체를 소유한 이상 이 육체를 사수하기 위해서는

 

저런 말도 안되는 종말을 미리 앞당기는 짖은 미련하고 어리석은

 

죽음을 심판을 저주를 당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러니 사사기의 12지파들의 모습을 지금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말자 라고 아무리 해도 하도록 되어 있어요

 

 

 

문제는 이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더불어 먹고 마시자 라고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오시는 주님이 있다는 것

 

문을 두드리는 분이 있다는 것

 

 

 

내가 찾고 두드리고 구해야 하는데

 

할 줄 몰라서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 인해

 

오히려 두드려 주시는 분이 있다는 것

 

 

 

베드로와 가룟유다의 차이점이 뭐냐 말이죠?

 

둘 다 미지근한 자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결국 정직한 영 곧 새 영을 주시는 분이

 

외부에서 문을 두들겼다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베드로는 건짐을 받고

 

가룟유다는 내버려둠을 당하는

 

역시나 언약의 완성을 보여주시더라 말이죠.

 

 

 

존재 구원은 의미 없어요. 베드로 존재를 구원한게 아니다 말이죠.

 

개인으로써가 아닌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베드로를 구원했기에

 

이것 또한 약속 성취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게 회개 이다 말이죠.

 

 

 

그러니 회개란 회개의 달인들인 바리새인에게서는 불가능해요

 

그 불가능한 회개가 다윗에게는 회개한 적도 없이 덮쳐지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에서 출발해서 다윗에게 덮쳐졌으니 말이죠.

 

결국 구원받은 다윗

 

구원받은 베드로를 쳐다 볼 이유가 전혀 없어요.

 

 

 

그것은 여전히 존재에 관심 두기에

 

나도 같은 존재로써 나도 구원받고 싶다 라는

 

나도 구원이라는 우상의 구원

 

헛된 인생의 구원을 원하는 셈이다 말이죠.

 

여전히 우상숭배자요 여호와 라는 이름 용어를 따와서 바알숭배하듯이 하더라 말이죠.

 

 

 

재물을 섬기는 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거나

 

뭐가 다른 줄 모르는

 

차이점이 없다 말이죠.

 

왜 존재로 보니까

 

 

 

(6:19, 개역)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6:20, 개역)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저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6:21, 개역)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6:22, 개역)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6:23, 개역)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6:24, 개역)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6:30,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6:31, 개역)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6:32, 개역)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6:33, 개역)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6:34, 개역)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기능이란 차이성이거든요.

 

또렷히 구별 되는 것이다 말이죠.

 

거룩이란 사건이지 깨끗하게 손씻는 청결을 말하지 않아요

 

그것은 번제와 제사의 달인들인 바리새인들이 도사입니다.

 

그게 우상숭배이다 말이죠.

 

거룩을 지키는 것이 우상숭배예요

 

 

 

그래서 개같은 이방인과의 거리두기를 하더라 말이죠

 

본인들이 더러운 개 같은 자 인줄 모르고 말이죠.

 

아무도 몰랐는데 예수님에게서 들통나버린 겁니다.

 

그러니 이 십자가가 자꾸 걸리적 거리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거든요.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말이죠.

 

 

 

자 이렇게 말하니까 또 이웃사랑실천을 해요 글쎄

 

남을 7번 용서했데요 글쎄

 

 

 

그러니 약속을 모르는 겁니다.

 

언약정신이 덮쳐지지 않아서

 

여전히 그것이 우상숭배인줄 몰라요 글쎄

 

 

 

인애와 자비가 없다면 구해야지요?

 

못 구해요

 

왜 인애와 자비 앞에서 번제와 제사를 주장했거든요.

 

부자청년처럼 자꾸 우상숭배한 것을 과시했더라 말이죠.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긴 우상숭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두 주인을 섬긴 것을 아예 예수님앞에서 까정 자랑질을 했으니

 

확 벗겨버리는 겁니다.

 

 

 

제발 값없이 흰옷을 사라 라고 말해줘도

 

안 사 입어요,

 

발가벗겨진 채로 살아가고 있어요.

 

썩어질 옷을 더덕 더덕 누더기로 걸쳐서

 

솔로몬의 옷이라고

 

가장 비싼 옷을 부자랍시고 입고 말이죠.

 

그런데 여전히 발가벗겨져 있더라 말이죠.

 

이것이 치장한 모습

 

사치 이더라 말이죠.

 

 

 

차라리 그 가짜 발가벗겨주시는 예수님이 얼마나 고맙냐 말이죠.

 

주님이 입혀주신 옷 아니면

 

마귀에게 못 벗어난다 말이죠.

 

우상에게 못 벗어나요.

 

재물이라는 주인에게 못 벗어나요.

 

 

 

언약정신인 십자가의 피 용서가 덮쳐진 자는

 

남을 7번 용서할려고 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770번 용서받아야만 하는 사건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제대로 된 거룩

 

제대로 된 흰 옷이다 말이죠.

 

 

 

770번 용서 도리어 받아야 한다는 말은 무슨 의미 입니까?

 

예수님은 인간 상대 안해요

 

마귀를 염두하시고 하시는 말씀이다 말이죠.

 

너 마귀에게 잡혀오면 우짤래 라는 겁니다.

 

770번의 용서이어야만 마귀 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7번 남 용서한다고 마귀가 고분고분하게 속아 넘어가 주질 않아요.

 

오히려 그게 우상이다 말이죠.

 

약속의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자기자신만 쳐다 보고 있으니

 

그것을 힘으로 보고 있는

 

우상 숭배

 

오늘 나오는 미지근함 이다는 겁니다.

 

바알에도 안 서고

 

여호와에게도 안 서고

 

뭐하자는 짓이냐 말이죠.

 

 

 

차라리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책망을 듣는 겁니다. 이것이 거룩이다 말이죠.

 

이 간섭이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다른말로 일곱이다 말이죠.

 

완벽하게 제대로 심판받고

 

완벽하고 제대로된 거룩이 덮쳐지는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다시 사는

 

십자가사건이 덮쳐지는 것이 일곱이다 라고 말이죠.

 

관계성의 의미인 기능의 의미이지

 

숫자 일곱 개 라는 개수를 말하는 존재가 아니다 말이죠.

 

일곱이라는 완벽한 다 이루심이 붙잡은 오른손에 사로잡힌 교회를 일곱의 신부 이라는 겁니다.

 

일곱이랑 결혼한 신부

 

같은 운명

 

동행 이다 말이죠.

 

우리는 불과 결혼한 겁니다.

 

안 깨끗할래야 안 깨끗하고는 못 배기는 거죠

 

모든 허물을 활활활 다 태어버리시면서 일체 보시지 않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마귀는 이미 다 타버린 것 가지고 뒷북치듯이 시비를 걸어요.

 

심각하게 법을 들고와요 법 법 법

 

 

 

오히려 주님은 지금

 

나와 더불어 함께 먹고 마시는 겁니다.

 

이 사랑의 관계이지

 

지키고 행하는 법이 아니다 말이죠.

 

 

 

지도 못 지키면서 왜 자꾸 행하라 라고 하냐 말이죠.

 

회개는 지키는게 아니라

 

회개는 다시는 회개하지 않겠다고 회개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곧 다 이루셨다는 보는 겁니다.

 

새것을 보는 거지

 

처음 것

 

지나가는 것 쳐다 봐서 뭐합니까?

 

그것은 마귀가 붙잡고 늘어지는 거다 말이죠.

 

 

 

다윗이 그랬거든요

 

회개 금식 눈물 기도

 

다시는 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회개하고 금식하고 눈물흘리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죽을때까지 십자가사건이 계속 터지는 겁니다.

 

기도 안하고는 못배기고

 

눈물 안흘리고는 못배기고

 

금식 안하고는 못배기고

 

회개 곧 새것을 안 쳐다 보고는 못배긴다 말이죠.

 

 

 

? 회개할 필요가 없이 회개의 사람으로 태어났고

 

눈물 흘릴 필요 없이 눈물의 사람으로 태어났고

 

금식할 필요가 없이 매일 매일 씹고 뜯고 먹고 마시는 금식의 사람으로 태어났고

 

기도할 필요가 없이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말이죠. 기쁜자로 범사에 감사자로 태어난 이름이 김감사 이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이름을 외부에서 불러요

 

어이 감사

 

어이 웃음아

 

웃음으로 태어났다 말이죠.

 

그것을 일곱교회라고 한다 말이죠.

 

함께 죽고 함께 살고

 

너 죽고 나 죽고 ~~~~~

 

 

 

이 얼마나 또렷하냐 말이죠.

 

 

 

그런데 왜 의문의 흐릿하고 모호한 것으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바알에 서든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께 서든가

 

유대인이 그래서 더 나빠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거리끼는 걸림돌에 톡 하고 걸려넘어진 상태로써

 

 

 

예수님도 아니고

 

바알화 된 하나님을 따르고 있으니

 

자기들은 오히려 우상을 거부한다고 역정을 내지만

 

그게 바로 우상숭배자들이다 말이죠.

 

차라리 교회 안 다니면 될 것을

 

교회는 다니는데

 

재물을 섬겨

 

하나님을 섬겨

 

두 주인을 동시에 섬겨

 

 

 

재물이라는 천박한 것 안 섬긴다고 성화론자들이 외치지만

 

그게 바로 재물이다 말이죠.

 

소유가 된 믿음

 

자기 믿음을 믿고 있으니

 

그 성화된 것 한 방이 날려버리면 우짤려고?

 

부자청년 꼴 나는거다 말이죠.

 

 

 

그러니 정작 기능은

 

존재성이 아니라

 

그러면 독자적인 계산

 

조건 갖추기만 신경 쓸 뿐이고

 

 

 

관계성이라는 기능은

 

지금 누구와 함께 먹고 마시냐 라는

 

그 누구를 보여주고 있지

 

나를 보여주지 않는 겁니다.

 

 

 

기드온이 왜 나를 쳐다보느냐 라고 오히려 따지죠

 

베드로가 왜 날 쳐다보느냐 나는 손가락일 뿐인데

 

저 분을 쳐다 보라 라고

 

 

 

함께 더불어 먹고 마시는 그 함께하신 분을 말하는데 있어서

 

 

 

존재는

 

자신의 성공 실패 여부만을 따지더라 말이죠.

 

 

 

이것이 우상숭배 곧 실질적으로 우상숭배이면서

 

바알과 여호와 둘 사이에서 양다리 다 걸치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는

 

이것도 아닌 저것도 아닌 둘 다 놓칠수가 없는

 

소유성으로써

 

독자성으로써

 

존재로써

 

 

 

이 머리되신 예수님의 증상물인 그리스도의 몸인 일곱교회와의 차이성을

 

 

 

대조된 모습으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지적에 감사하시면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문 두르리지 않는 이상

 

문고리가 밖에 있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는 이상

 

우리는 저 미지근함 속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자이기 때문에

 

주님의 긍휼 외에는 바라볼게 없는

 

의지할게 없는 자임을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회개해야 합니다.

 

 

 

 

 

 

 

 

똑똑똑!!!

 

 

 

누구세요?

너를 피로 샀단다

 

 

 

아 예수님이시군요.

 

예수님은 문 두드릴 필요없어요

 

그냥 들어오세요

 

 

 

열쇠는 당신이거든요.

 

 

 

 

 

똑똑똑 문 좀 열어주세요 누가 찾아왔나봐

 

우리들의 마음 문에 누가 찾아왔나봐

 

조용하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 들리지 않나요

 

우리들의 마음 문에 누가 찾와왔나봐

 

 

 

똑똑똑 문 좀 열어주세요 우리 예수님의 음성

 

우리들의 마음문을 예수님이 두드려요

 

조용하게 부르시는 예수님의 음성 들리지 않나요

 

고마우신 예수님 어서 들어오세요

 

 

 

 

 

문들아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아멘

 

 

 

(24:1, 개역) [다윗의 시]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24:2, 개역)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24:3, 개역)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24:4, 개역)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24:5, 개역)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24:6, 개역)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24:7,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8,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9, 개역)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24:10, 개역) 영광의 왕이 뉘시뇨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셀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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