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보좌와 네 생물 (4: 6-11)

계 15 거룩한 보좌와 네 생물 (계 4, 6-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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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개역)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 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4:7, 개역)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4:8, 개역)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4:9, 개역)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4:10, 개역)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4:11, 개역)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4:6, 새번역) 보좌 앞은 마치 유리 바다와 같았으며, 수정을 깔아 놓은 듯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 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

(4:7, 새번역) 첫째 생물은 사자와 같이 생기고, 둘째 생물은 송아지와 같이 생기고,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과 같이 생기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이 생겼습니다.

(4:8, 새번역) 이 네 생물은 각각 날개가 여섯 개씩 달려 있었는데, 날개 둘레와 그 안쪽에는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거룩하십니다,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전에도 계셨으며, 지금도 계시며, 또 장차 오실 분이십니다!"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4:9, 새번역)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셔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께,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드리고 있을 때에,

(4:10, 새번역) 스물네 장로는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분께 경배드리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놓으면서 / , '월계관'

(4:11, 새번역)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1:1, 개역) 제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

(1:2, 개역) 여호야긴 왕의 사로잡힌지 오년 그 달 오일이라

(1:3, 개역)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1:4, 개역)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1:5, 개역)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1:6, 개역)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1:7, 개역)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1:8, 개역)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1:9, 개역)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10, 개역)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1:11, 개역)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1:12, 개역)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1:13, 개역)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1:14, 개역)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1:15, 개역)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1:16, 개역)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1:17, 개역)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 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1:18, 개역)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1:19, 개역)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1:20, 개역)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1:21, 개역)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1:22, 개역)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1:23, 개역)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으며

(1:24, 개역)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1:25,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1:26, 개역)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1:27, 개역)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1:28, 개역)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3:24, 새번역) 그를 쫓아내신 다음에, 에덴 동산의 동쪽에 그룹들을 세우시고, 빙빙 도는 불칼을 두셔서,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 살아 있는 피조물; 날개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됨(1:5-12; 10:21)

(1:1, 새번역) 때는 제 삼십년 넷째 달 오일이었다. 그 때에 내가 포로로 잡혀 온 사람들과 함께 그발 강 가에 있었다. 나는 하나님이 하늘을 열어 보여 주신 환상을 보았다.

(1:2, 새번역) 여호야긴 왕이 포로로 잡혀 온 지 오 년째가 되는 그 달 오일에,

(1:3, 새번역) 주님께서 바빌로니아 땅의 그발 강 가에서 부시의 아들인 나 에스겔 제사장에게 특별히 말씀하셨으며, 거기에서 주님의 권능이 나를 사로잡았다. / 또는 '갈대아' 또는 '부시 제사장의 아들 나 에스겔에게'

(1:4, 새번역) 그 때에 내가 바라보니,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는데, 큰 구름이 밀려오고, 불빛이 계속 번쩍이며, 그 구름 둘레에는 광채가 나고, 그 광채 한가운데서는 불 속에서 빛나는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반짝였다.

(1:5, 새번역) 그러더니 그 광채 한가운데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들의 모습은 사람의 형상과 같았다.

(1:6, 새번역) 얼굴이 각각 넷이요, 날개도 각각 넷이었다.

(1:7, 새번역) 그들의 다리는 모두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의 발바닥과 같고, 광낸 놋과 같이 반짝거렸다.

(1:8, 새번역) 그 생물의 사면에 달린 날개 밑에는 사람의 손이 있으며, 네 생물에게는 얼굴과 날개가 있었다.

(1:9, 새번역) 그들의 날개 끝은 서로 닿아 있으며, 앞으로 나아갈 때에는 몸을 돌리지 않고,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1:10, 새번역) 그 네 생물의 얼굴 모양은, 제각기, 앞쪽은 사람의 얼굴이요, 오른쪽은 사자의 얼굴이요, 왼쪽은 황소의 얼굴이요, 뒤쪽은 독수리의 얼굴이었다.

(1:11, 새번역) 이것이 그들의 얼굴 모양이었다. 그들의 날개는 위로 펼쳐져 있는데, 두 날개로는 서로 끝을 맞대고 있고, 또 두 날개로는 그들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1:12, 새번역) 그들은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갈 때에는, 각각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그들은 몸을 돌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갔다. / , '하루아흐'

(1:13, 새번역) 그 생물들의 모양은 마치 활활 타는 숯불이나 횃불과 같이 보였다. 그 불은 그 생물들 사이를 오가며 빛을 냈고, 불 속에서는 번개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1:14, 새번역) 그 생물들은 이쪽 저쪽으로 번개처럼 빠르게 달렸다.

(1:15, 새번역) 그 때에 내가 그 생물들을 바라보니, 그 생물들의 곁 땅 위에는 바퀴가 하나 있는데, 그 바퀴는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었다.

(1:16, 새번역) 그 바퀴의 형상과 구조를 보니, 그 형상은 빛나는 녹주석과 같고 네 바퀴의 형상이 모두 똑같으며, 그 구조는 마치 바퀴 안에 바퀴가 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1:17, 새번역) 그 바퀴들은 사방 어디로 가든지, 방향을 돌이키지 않고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1:18, 새번역) 그 바퀴의 둘레는 모두 높고, 보기에도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였다.

(1:19, 새번역) 그 생물들이 나아가면, 바퀴들도 생물들의 곁에서 함께 나아갔고,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들도 함께 떠올랐다.

(1:20, 새번역) 그 생물들은 어디든지, 영이 가고자 하면, 그 영이 가고자 하는 곳으로 갔다. 바퀴들도 그들과 함께 떠올랐는데, 생물들의 영이 바퀴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21, 새번역) 생물들이 나아가면 그 바퀴들도 나아갔고, 생물들이 멈추어 서 있으면, 바퀴들도 멈추어 서 있었다. 또 생물들이 땅에서 떠오르면, 바퀴도 그들과 똑같이 떠올랐는데, 생물들의 영이 바퀴들 속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22, 새번역)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는 창공 모양의 덮개와 같은 것이 있는데, 수정과 같은 빛을 내서, 보기에 심히 두려웠으며, 그 생물들의 머리 위에 펼쳐져 있었다.

(1:23, 새번역) 그런데 창공 모양의 덮개 밑에는 그 생물들이 펼친 날개가 서로 맞닿아 있었다. 이쪽 생물들이 두 날개로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고, 저쪽 생물들도 두 날개로 자기의 몸을 가리고 있었다.

(1:24, 새번역) 그들이 움직일 때에는, 나는, 그들이 날개치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마치 힘찬 물소리와도 같고, 전능하신 분의 천둥소리와도 같고, 떠드는 소리 곧 군인들의 진영에서 나는 함성과도 같았다. 그들은 멈추어 서 있을 때에는 날개를 드리웠다. / , '샤다이'

(1:25, 새번역)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멈추어 서 있을 때에는 날개를 드리웠다.

(1:26, 새번역) 또 그들의 머리 위에 있는 창공 모양의 덮개 위에는, 청옥처럼 보이는 보석으로 만든 보좌 형상을 한 것이 있었고, 그 보좌 형상 위에는, 사람의 모습과 비슷한 형상이 있었다.

(1:27, 새번역) 또 나는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위쪽에서 금붙이의 광채와 같은 것이 불꽃처럼 안팎으로 그를 둘러싼 것을 보았는데, 그의 허리처럼 보이는 그 아래쪽에서도, 나는 불꽃과 같은 모양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광채로 둘러싸여 있었다.

(1:28, 새번역) 그를 둘러싼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 속에 나타나는 무지개 같이 보였는데, 그것은 주님의 영광이 나타난 모양과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다. 그 때에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내가 들었다.

 

 

오늘 본문에 네 생물이 나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서 이 네 생물을 어떻게 설명하지? 라는

무지 무지 어려운 의미 라는 생각이 계속 되어서

아침에 일어나면서 얼떨결에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과

생뚱맞게 연관된 의미라는 것이 떠올라서 일어났는데

또 며칠 지나니 다 까먹어버렸다 말이죠.

 

즉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곧 사랑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사랑을, 다른 구원을 바란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차이가 나는 겁니다. 구원이 차이가 나요.

 

그래서 반드시 출애굽이라는 구원 사건을 반복함으로써

주님의 사랑을 확증 하셨는데

우리는 이런 주님의 사랑 곧 출애굽의 구원사건이 아닌

다른 사랑을 바라는 겁니다.

 

결국 출애굽을 통해서도 원망했고

광야에서도 원망 했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면서도 원망했고

들어가서도 원망하는 모습을

 

거치지 않고서 사랑하기를 바랬는데

오히려 주님은 이런 원망의 과정을 다 거침으로써 사랑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네 맞습니다. 원수 사랑입니다.

원수로 만들어서, 죄인을 만들어서 사랑하신다는 겁니다.

 

우리는 왜 우리가 뻔히 원망할 줄 알면서 왜 이런 원망을 거쳐서

사랑을 나타내시느냐에 대한 반발성이 강하지만

 

주님의 입장에서는 바로 화목제를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마귀를 들추어내시는 입장에서의 사랑입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이 다 다리걸려 실족해 넘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를 통해서만 사랑을 나타내시겠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뭡니까? 하나님의 저주 아닙니까?

 

그 저주를 대신 받는 원수사랑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러니 일단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입장에서는 물 건너간 구원이요 사랑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완성인데

남을 구원하고자 율법을 지키는 자는 없습니다

모조리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애, 자기 사랑을 위한

네 맞습니다. 우상숭배죠.

자기 구원을 목적으로써

어떻게 하면 영생 얻냐? 구원 얻냐?

어릴적부터 율법 지켰다. 큰 계명 두 계명 지켰다 라고 우기지만

정작 이런 모습을

주님은 사랑으로써 원수가 가리지를 뿌렸다 라고

어 분명 좋은 씨로 뿌렸지 않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왔냐 말이죠.

다른 열매, 다른 사랑, 다른 구원, 다른 복음을 원수가 뿌렸다 라고

이 원수 마귀를 들추어내시면서

이 원수 마귀와의 차이성으로써 우리 성도를 저들과 구분시키고

구별 차이 분리 시키는 작업으로써의 구원 곧 사랑을 베푸신다는 점에서

 

인간의 사랑이 아니요 주님이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를 베푸신다는 겁니다.

즉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시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신다 말이죠.

 

그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은 그야말로 혼인잔치입니다.

또 여기서 혼인잔치라고 하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혼인잔치가 아니라

예수님의 비유에서 나타났듯이

어떤 임금이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그 비유 그 비밀을 통해서

예수님 나라의 혼인 잔치를 증거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한 쪽은 잔치에 참여하는 결혼 곧 혼인의 의미를 더더욱 부각 시키고자

다른 한 쪽은 잔치에서 쫏겨나는 모습으로써 이 결혼이라는 사랑의 의미를 높이더라 말이죠.

 

자 그럼 원수 마귀를 반드시 거침으로써

이 십자가 라는 어리석고 미련하고 또 거리끼는 걸림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지혜 곧 영광을 찬양하고 경배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출애굽의 구원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가 바로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을 통해서 살코기를 먹고 함으로써 한 쪽은 잔치를 벌리는데 반해

다른 한 쪽은 그야말로 여호와의 긍휼 곧 불쌓히 여겨주심이 없이

진노와 심판인 저주로 인해서 미워하심을 통해서

철저한 심판으로써 두 부류로 구분 시켜 버리는 겁니다.

 

마치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된 모습처럼

야곱과 에서는 개개인의 개별적인 것이 아닌

한 쌍의 한 세트처럼

 

한 쪽은 사랑이라는 결실의 혼인잔치로

다른 한 쪽은 미움이라는 버리시는 진노의 그릇으로써

 

하나님 자신의 사랑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가라지를 뽑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알곡 까지 다칠테니까 말이죠.

 

추수때 종말때에 즉 새 것이 떳을때에

이전 것은 다 지나가고 보라 새 것이 등장할때에

저절로 분륜작업이 벌어지는데 있어서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꺼지지 않는 불못에 던져지는 겁니다.

 

이것이 사랑이다 말이죠.

 

여기에 인간들이 반발하는 것이 이것이 무슨놈의 사랑이냐 라고 한다 말이죠.

즉 이 말은 이미 인간들 속에서 다른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오죽 하면 성경에서 이 부분을 잘 나타내는 것이

토기장이 비유입니다.

하나는 귀히 쓰고

다른 하나는 천히 쓸 권한이 없느냐 라고 말이죠.

즉 그 정도로 인간은 반발하는 마음으로써

절대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늘 다른 사랑을 꿈꾸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헛된 인생을 구원코자 하는 것으로써

자꾸 인간 쪽에서 사랑했다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냐 라는 증거들을 모으는 겁니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이것들이 다 뭡니까? 거룩했다 아닙니까?

 

그럼 모든 인간이 여기에 동의를 해야 하는데

졸지에 성령이 들어간 자는 여기에 한사코 동의는커녕 반대를 한다는 점입니다.

사도바울이 그거 나도 했다 그런데 거룩이 아니라 더러운 배설 물 똥 덩 어 리 였다 라고 했고

다윗은 그것으로 이름없는 아이를 살릴 것 같으면 벌써 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택도 없더라 거룩(남을 7번 용서 하리이까?)이 아니라

도리어 다시는 거룩 안지키겠다는(회개-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할 죄인임을 아는 회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닭이 울어주지 않으면 바로 저런 사고방식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철저하게 갇혀 버린 마귀의 손에서 원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인간의 사랑, 사람의 일, 사단의 깊은 것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포로 되었고 갇혔고 억눌린

개같은 이방인이요 흑암의 백성이요 사망의 그늘에 폭 삭 주저앉은 앉은뱅이이기에

누가 불쌍히 여겨주지 않는 이상

770번 용서해주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는 갇힌 자이다는 겁니다.

그런 포로된 자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만이 유일한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다른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원수 문제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사랑이지

내 쪽에서 십의 이조라는 둥

때려죽어도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는 둥

끝까지 예수님을 따라가겠다는 둥

예수님을 따라 죽겠다는 둥 하는 것이 바로

원수가 뿌린 가라지의 모습

곧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 이다

하나님의 일, 사랑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 인간의 사랑인 자기 열심만 생각하느냐 라고

 

다른 열매(원인 있는 결과) 다른 사랑(원인,조건을 갖추어서 구원받겠다는)을 거쳐서

그 차이로써 (즉 우상과 약속이 한 세트로써 그 둘의 차이로)

사랑의 열매 곧 원인 없는 결과인

무조건적인 십자가의 사랑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그렇기 때문에 일곱교회를 언급하실 때 마다 반드시 그 차이로

사단의 회를 언급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혼인잔치이다 말이죠.

한 쪽에서는 긍휼의 그릇으로써

다른 한 쪽에서는 진노의 그릇으로

 

이 차이를 구별 구분 시키는 것이 바로 거룩이요 사랑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반드시 구원사건에는 한 쪽에는 심판의 진노를

다른 한 쪽에는 유월절 어린양 잔치인 혼인잔치를 벌리시더라 말이죠.

 

이렇게 둘 로 나누는 작업이 사랑인데

여기에 대한 반발이 바로 인간 쪽에서의 사랑 또는 믿음, 행함, 거룩 등등을 자꾸 들이내민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을려고 하더라 말이죠.

 

오늘 네 생물이 나오는데

에스겔 1장에서 나오는 네 생물입니다.

존재가 아니라 기능 즉 무슨 일을 하느냐로 그들의 등장이 왜 필요한가를 알수 있습니다.

 

먼저 눈이 여러개입니다.

즉 이 말은 모든 것을 다 속속히 다 꿰뚤어 보고 있다는 겁니다.

눈이 밝아서 세상 구석 구석을 다 보고 있습니다.

 

다윗이 정직한 영이 자기 속에 없음을 알고서 회개함으로써 성령을 받고서 비로소

주의 목전에 항상 죄 밖에 없음을 고백합니다.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감추어지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비밀이 없다 말이죠.

 

즉 상대적으로 인간은 눈이 두 개 뿐이라서 눈이 어둡다는 겁니다.

그래서 뭘 해도 미흡하고 뭘 해도 엉터리요 뭘 해도 배설물 밖에 안되는 짖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광야에서 원망할 만한 곳으로만 데리고 가시니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들통나듯이 말이죠.

 

엘리사가 아람군대로부터 포위를 당했을때에

저들의 눈을 닫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 맞지 싶은데

사환이 아 이제 우리는 죽었구나 라고 포기했을때에

사환의 눈을 열어 달라고 엘리사가 기도 하니까

아람 군대를 삥 둘러싼 천군천사들이 도리어 포위 하고 있어서

엘리사는 여유로운 반면

게하시는 두러워 떨었다 말이죠,

즉 안 보이는 것을 보는 겁니다.

 

이렇듯 인간의 눈은 어둡습니다.

자기에 유익이 되는 선과

자기에게 손해가 되는 악에는 무지 무지 또 눈이 밝을 정도로

거꾸로 된 청개구리이다 말이죠.

그래서 게하시는 나아만 장군은 정작 문둥병이 낫는데

게하시는 자기 유익에는 기가막히게 눈이 밝아서 도리어 본다고 하니 못 보는

그래서 문둥병이 게하시에게 넘어가는

그 정도로 눈이 어둡다는 겁니다.

문둥병자 나아만은 정작 고침을 받아서 눈으로 보게 되었는데 말이죠,

무엇을 봤다는 겁니까? 자신의 문둥병 고침 받은 것이

자기 쪽에서 무엇을 행하거나 조건을 갖추거나 용서받을 만한 그 어떤 요소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 쪽애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그저 하시고자 하시는대로

긍휼을 베푸심이지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사랑하사 화목제물을 주심이지

인간 쪽에서는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방금 문둥병을 고침 받아도 이 생명을 취해도 상관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심지도 거두지도 않았는데 오늘 귀히 입히시더라 말이죠.

그럼 오늘 귀히 입히셨다면 안 죽여야지요

그런데 내일 아궁이에 던질 풀도 오늘 귀히 입히서더라 라고

반드시 예수님의 죽음과 연관 시켜버리는 긍휼이다는 겁니다.

 

긍휼도 내 개인의 구원을 위한 긍휼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24장로들이 면류관을 반납하지요.

탕자가 금가락지를 끼워주심을 받았다고

맏아들에게 과시를 하던가요?

만약 그렇다면 맏아들이나 탕자나 무슨 차이 곧 구별이 있겠습니까? 도진개진이지요.

주님의 구별은

정작 말도 안되는 이 긍휼을 통해서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비로소 죄인인줄 알고 구원자의 사랑만 외치도록 되어 있는

이것이 바로 사랑의 열매인데

 

사랑을 심었는데 사랑이 안나오고

선악이 나와버리면

24장로가 그 면류관을 받아 챙겨서 또 하나의 자기 것이 생겨서

너는 없지? 나는 있잖아? 라고 또 갑질을 하게 된다 말이죠.

정유라처럼 능력 없으면 니네 부모를 원망해 라고 하듯이 말이죠.

모조리 다 선악으로만 통하는 세상을

 

심판 하는 겁니다.

 

그래서 네 생물이 눈이 여러개가 있고

보좌를 이동시키는데

 

이것은 오로지 직진이다는 겁니다.

즉 모든 것을 다 뚫어버리고 돌파해 버리는 겁니다.

박치기하듯이

구원의 뿔처럼 말이죠.

박살이 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돌 위에 떨어져도 박살이 나서 깨어져 가루가 되고

돌이 그 사람 위에서 떨어져도 박살나 가루가 되는

 

건축자의 버린 돌이

건축자가 버렸다고 해서

버림받았다고 해서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멈춰 버리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뭡니까? 멈추는 것 아니냐 말이죠.

더 이상의 움직임이 없다 말이죠. ? 생명이 없으니까?

그래서 더 이상 못 움직이도록

더 이상 못 활동 못하도록 하고자

죽여 버렸다 말이죠.

 

그런데 멈출수가 있겠습니까?

멈추면 그거 사랑 아닙니다.

 

죽음을 뚫어서라도 또 무지 무지 활발하게 움직이는 겁니다.

막을 수가 없어요 죽음도 막지를 못해요.

 

이런 이동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언약궤를 아무도 못말려요

다리도 없고 바퀴도 없는데 혼자 모든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우상의 머리를 자르고 손모가지 발목 다 짤라 다니더라 말이죠.

 

즉 네 생물의 네 천사는 이런 이동성을 통해서

죄에게 죽음에게 사망에 의해

포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괜히 건드렸다 말이죠.

도리어 죄와 죽음이 빵구멍이 뚫혀버리더라 말이죠.

 

마치 발람이 이스라엘을 저주 할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저주가 이스라엘에게 묻지 않더라 말이죠.

오히려 축복만 이스라엘에 묻더라 말이죠.

 

마치 보좌처럼

성령의 전인 우리가 보좌처럼 가만히 못 있더라 말이죠.

죽음 조차도 묻지 않으니까

일부러 버림받는 모습이 되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넉넉히 이기더라 말이죠.

? 우리가 사랑하였기 때문에? 아니지요.

주의 사랑을 끊을 자가 없기 때문에

그래서 마귀 원수를 거치는 겁니다.

 

오로지 거룩은 주의 보좌에서만 끊임없이 일방통행으로 직진하듯이

흘러 흘러 넘쳐서 사막까지

죽은 광야까지 샘이 흘러 넘치게 하는 겁니다.

 

죽은 땅을 살려낼수 있습니까? 못 살려낸다면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죽은 땅으로써 우리가 살려주심을 당하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흘리만을 찬양하고 경배하기 위해서 살려내주심을 받은 겁니다.

곧 새 피조물 이전 것은 지나간 보라 새 것이 된

새노래를 부르는 자로써

죽음도 마땅한 영광인줄 알고 면류관 반납하듯이 생명을 내어놓는

그 정도로 주님의 피로 사신 신부에 대한 혼인잔치로써의 사랑을

찬양 아니하고는 못 배기는 기쁨으로써 새노래를 부르며 경배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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