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헬살랄하스바스, 노략이 속히 올 것이다 (8: 1- 4)

 

 

(8:1,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큰 서판을 취하여 그 위에 통용문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 쓰라

(8:2, 개역)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갸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8:3, 개역) 내가 내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 하라

(8:4, 개역) 이는 이 아이가 내 아빠, 내 엄마라 할 줄 알기 전에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긴바 될 것임이니라

 

(8:1,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큰 서판을 가지고 와서, 그 위에 두루 쓰는 글자로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써라. / '노략이 속히 올 것이다'

(8:2, 새번역) 내가 진실한 증인 우리야 제사장과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가랴를 불러 증언하게 하겠다."

(8:3, 새번역) 그런 다음에 나는 예언자인 나의 아내를 가까이하였다. 그러자 그 예언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의 이름을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 하여라. / 또는 '여자 예언자' 또는 '예언자의 아내'

(8:4, 새번역) 이 아이가 '아빠, 엄마'라고 부를 줄 알기도 전에, 앗시리아 왕이 다마스쿠스에서 빼앗은 재물과 사마리아에서 빼앗은 전리품을 가져 갈 것이다."

 

 

참선지자들의 이상한 행동은 마치 예수님의 비사와 같은 의미입니다.

즉 비밀로써 단절이기에 모든 인간의 역사는 허물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치 애굽왕이, 또는 느부갓네살 왕이 부랴 부랴 이 사태를 풀어보라고 점쟁이? 제사장들에게

해석해 보라고 닭달을 내듯이

꿈 풀이를 해 보라고 닭달내듯이

그 어떤 해석 풀이도 통하지 않는 단절성을 보여줍니다.

비밀인데 누가 해석할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다 그런식입니다.

한 쪽은 미워하기로, 또 한 쪽은 사랑하기로 작정하시 바를 나타내는데

어떤 누가 역사적인 의식으로 이 묵시를 해석할수 있단 말입니까?

 

마치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분은 예수님 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만이 제대로 해석하시기에

그 어떤 누구도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죽은자는 없다는 의미에서

비유를 해석할 자가 없다 라는 것에 기뻐하시면 됩니다.

 

선지자 본인들은 해석 할 줄 알 것 아니냐

아닙니다. 모릅니다.

선지자의 기능은 그저 단절성을 보여줄 뿐입니다.

그리고 저 분이 해석할 유일한 분이다 라고 손가락으로 달을 외치고

무대 뒤로 누락 될 뿐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더 맞아죽을 짖이 되는 겁니다.

너도 모르면서 왜 이런 이상한 비유를 펼치느냐 라는 겁니다.

자 그래서 이 얼룩을 제거하고자

모든 역사는 달려들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 말씀의 증상물, 결과물이 바로 이사야의 아들이다는 겁니다.

즉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육이라는 시간과 공간으로서의 아들이 아니라

도리어 단절성이라는 시공간을 허물어 버리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증상물이다는 겁니다.

이사야의 아들 이름이 바로 마헬살랄하스바스입니다.

노략이 속히 올 것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름이란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비존재(묵시)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름이 아무것도 아닌 비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존재(역사)들은 이 이름에 의해 배치물로 동원이 됩니다.

 

유다 나라의 아하스 왕 이라는 존재가 배치되어야 하고

이 아하스 왕은 징조 곧 성령을 구하지 않고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는 명목으로 자기가 믿는 구석으로써 이방나라처럼 힘을 의지 합니다.

 

또 이 유다나라를 노략하고자 하는 아람과 북이스라엘 나라가 연합국으로 배치물로써 동원이 되고

 

또 이 두 연합국이 노략한 것을 다시 노략하는 앗수르가 배치물로 동원이 됩니다.

 

즉 이것은 시간 순으로 생각할게 아니라 거꾸로

미래완료로써 일곱이 서게 되면 그 일곱에서 123456이 나오듯이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떳으면 자동적으로 그 증상물로써

교만한 유다의 아하스 왕이 등장하고

두 나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등장하고

다시 이 두 나라의 노략물을 다시 탈취하는 앗수르가 등장하는 겁니다.

 

이 모든 사건이 바로 마헬살랄하스바스 라는 묵시에서 비롯 됩니다.

그래서 아하스 왕은 교만해야만 하고

나라의 움직이는 방식이 강력한 이방나라의 힘처럼

충분히 나라를 움직일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러나 유다 나라는 인간왕이 이방나라처럼 움직이는게 아니라

주님이 움직인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하스왕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앗수르와 연합하고자 함이 그 나라의 강력한 힘을 부러워 하고 있음이고

그 힘만 있으면 유다 나라도 충분히 강성한 나라로 만들 수 있다고 본 겁니다.

 

바로 이 사고방식을 깨뜨려서 탈취하고자 함이다 말이죠

즉 이미 이스라엘 자체가 노략물입니다.

증상물이다 말이죠

 

그런데 따로 자기만의 노략물을 따로 챙기고자 한다는 것은

본인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잃어버린 동전인 주님이 되찾은 기쁨물인데

이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로 전쟁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로 전쟁하심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전리품 노략물 강탈물인데

 

이것을 마치 조건 갖추듯이 구원의 조건

선민국가의 조건 인냥 인간 쪽에서 갖추겠다는 그 심뽀를

허물어 버리시고자 매를 들어서 징계하시는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패역한 아하스 왕처럼 구원의 조건을 갖추고자

성화를 하겠다는 둥, 개혁을 하겠다는 둥,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으니 부족한 것 있으면 말씀만 하소서

당장 지키겠다는 둥

이런 조건을 갖추면

어떻게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는 질문의 답이 된다고 패역한 백성임을 자처하더라 말이죠.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다움은 인간에게 맡기질 않습니다

주님이 직접 다루신다는 점에서

마헬살랄하스바스 라는 징조를 이루신다는 겁니다.

노략물의 노략물 다움은 그들의 주인을 결박시켜서

진짜 노략자가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미래는 이미 완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이 완료된 미래에서 거꾸로 현재를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이 낳은 육의 자식으로 육을 낳아 육으로 역사를 해석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이것은 왜 묵시에 맞물려서 한 세트로써 동원이 되는지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이 되듯이 왜 역사는 미움을 당해야 하는지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듯이 왜 묵시는 이미 완료된 채로 마헬살랄하스바스 대로 이루어지는지를

 

육의 단절성으로써 펼쳐짐에 있어서 도리어 묵시는 이 육의 역사로부터 무시당하는 모습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십의 이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조건갖추기가 역사의 대세를 이루는데 있어서

 

세리는 감히 머리도 못 들고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묵시는 심판당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묵시가 역사로부터 죽임을 당하는 모습은

도리어 역사가 심판받아야 함을 보여주는 증거가 됩니다.

 

오히려 묵시는 목이 댕캉 댕캉 날라가서 주님의 눈물 한방울처럼

주의 병에 담기듯이 주의 말씀에 기록이 된다 말이죠

 

이것이 종말에서, 끝에서, 미래완료에서

거꾸로 현재를 파악하는 시선이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시선입니다.

임마누엘의 시선입니다.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시선입니다.

이 시선을 따라가야만 하는데

 

이 시선을 말하기 위해서 동원이 되는 한세트가 바로

아하스의 시선

두 나라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노략물을 취하고자 하는 시선

다시 이 두 나라의 노략물을 다시 노략물로 취하는 앗수르의 시선이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시선과 한세트로 동원이 됩니다.

 

주님은 마헬살랄하스바스를 원하고 곧 인애와 자비를 원하고

 

아하스 시선, 두 나라 시선, 앗수르 시선을 원치 않습니다 곧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과거 고대에서는 전쟁에서 승리한 전리품을 인간들은 신엑게 제물로써 바칩니다.

바로 이런 번제와 제물 싫어하신다 말이죠.


그러나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이미 전리품으로써의 제물이다 말이죠.

즉 실상인 인애와 자비라는 예수님이라는 화목제물을 보여주는

보배를 담은 그릇으로써 말이죠.

 

누가 주인을 결박하고 세간을 빼앗는 도둑인가? 사랑인가?

새남편인가 라는 겁니다.

번제와 제물이라는 전남펀과 이혼케 만드는 새남편인가 라는

결혼 개념이다 말이죠.

 

쉽게 말해서 이스라엘 본인들이 전리품이다는 것은

본인들이 복덩이인데

복덩이인 본인들이 복을 따로 받고자 복권을 사는 격이 되더라 말이죠

아하스 왕이 그런 시선입니다.

 

우리가 요즘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MB가 바로 그런 식입니다.

그러니 복권을 사듯이 돈을 이유 없이 끌어모으게 되니까

도리어 저주를 받는 식입니다.

돈을 복으로 착각해서 돈을 많이 모으면 복의 사람이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저주를 끌어 모은 식이 된거다 말이죠.

 

이스라엘 본인들이 복덩이인데 왜 복을 사냐 말이죠

바리새인이 그랬습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것을 잔뜩 모아요

그게 본인들이 복 받은 모습의 결과이다는 겁니다.

아니 말씀을 잔뜩 지킨 것이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래서 반드시 상대적인 저주받은 자를 대조시키도록 되어 있는데

바리새인의 시선에서는 그것이 졸지에 세리 강도 창녀가 되어버린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도리어 먼저 천국에 간다 말이죠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질까요?

 

진짜 복은 오로지 예수님 혼자 받으심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의 저주를 받았다 말이죠

 

이 십자가의 저주를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우겨도 복으로 안 보입니다.

? 맞습니다. 우리는 아하스 왕의 시선, MV의 시선에서 못 벗어납니다.

그런 의문만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갇혀버린 포로된 세간입니다. 노략물 전리품이다 말이죠.

 

이 전리품들은 세상 왕의 새로 등장할 때 마다 뺑뺑이 돕니다.

그들의 제물로써 바쳐지는 전쟁승리의 증거물이니까 말이죠

 

그런데 이 밑도 끝도 없는 챗바퀴 도는 마침이 없는 의문이

드디어 찢겨지는 또렷한 십자가의 승리로 인해 종식이 됩니다.

그게 바로 번제와 제사를 종식시키는 인애와 자비인 사랑입니다.

십자가의 저주로 인한 용서입니다.

 

대신 이 저주를 감당하시는 단번의 제사 드림이 되는 화목제물이 아니면

아하스의 시선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그래서 세 가지 징조

스알야숩

임마누엘

마헬살랄하스바스 로 인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로 인해

끝나는 겁니다.

 

그 끝에서 현재를 해석하라는 겁니다.

 

진짜 복이 뭡니까

진짜 승리 진짜 평화가 뭐냐 말이죠

십자가에서 내 대신 저주 받으신 예수님의 인애와 자비가 최종적인 승리이다는 겁니다.

이 승리를 말하고자 동원이 되는 것이

한 세트로써 저런 전리품 노략물 빼앗기 하는 의문의 전쟁의 반복입니다.

끝이 없다 말이죠 마침도 없어요

평화가 없어요

계속해서 이 의문의 번제와 제사를 반복만 할 뿐입니다.

 

그것이 저주 이다 말이죠

MB가 저주를 끌어모은 줄도 모르고 복인줄 알고 돈을 끌어모았다 말이죠

그것을 알면 또 다행스럽게도 복받은거다 말이죠 이미

미래완료로써 말이죠

그런데 끝까지 못 그래요

부자가 지옥에 가서도 지옥사람인 티를 팍팍 낼 수 밖에 없듯이 말입니다.

 

누가 봐도 심판 받은 자로 보이는 저 세리가

도리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 속에서 긍휼과 인애와 자비를 바란다 말이죠

아니 왜? 주님만이 유일하게 복 받은 자이기에

 

우리는 그 복을 받은 자격이 없는 원래 심판 받아 마땅한 자이기에 말이죠

 

자 이렇게 이야기 하니까 복권을 안 사면 되는구나 라고 말귀를 그렇게 알아먹는데

그게 아니라 복권을 사서 1등 당첨되어서

아 이래서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이구나 라고

도리어 심판 속에서 예수님만이 복 받으신 분이구나를 아는 것이

복 받은 자 이다 말이죠

 

복권 안 사는 것이 구원 또는 복 받은 조건이 아니라

아예 우리에게는 그런 원인이 아예 없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심판 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가 복 받은 자입니다.

왜냐하면 독자적인게 아니라

비로소 단절로써 연결 연합이 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자꾸 역사로써 연결 할려고 하니까 행동 행함이 나온다 말이죠

복권 안 사는 것이

막살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인냥

 

아닙니다.

애초부터 이스라엘은 복덩이 이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독자적으로 혼자서 자기인생이라는 독자성을 자꾸 인생이라고 손볼려고 한다 말이죠

이미 복덩이 인데

? 예수님의 피가 발렸거든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발렸거든요

피를 보고 넘어가지

봐주시지

복권 안 샀다고

막살지 않았다고 넘어가는게 아니다 말이죠

혹시 당첨되시면 저에게도 좀 주세요 ㅋㅋ
저도 돈에 환장한 자이니까 말이죠


주님이 보따리 채로 먹으라 하면 먹으면 되지

그 부정한 음식 안 먹겠다고 베드로가 막 버틴다 말이죠

이렇게 베드로가 지적당하고 들통나고

부정한 음식 안 먹는 자신의 의로움이 무너지는

부정함 속에 들어가는 심판 속에 들어가는 것이 마땅함을 아는 것이

복받은자 아닙니까

오죽하면 세 번 씩이나 꿈에서 나타나서 징조로써 보여준다 말이죠

얼마나 복 받았냐 말이죠

아하스 왕이 이스라엘을 포기 못하겠다고 나서는 모습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이스라엘을 포기 안하겠다고 끝까지 책임지시겠다고 하시는 모습으로써

 

이런 사건들을 벌리시는 겁니다.

도리어 아하스 왕이 탈락 되어야 할 정도입니다.

이스라엘을 이방나라처럼 다룰려고 하고 있으니 말이죠

마찬 가지입니다.

 

말씀을 지켰다는 둥 바리새인 또는 맏아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둥

이들이 자꾸 말씀을 본인들이 다룰려고 한다 말이죠

 

아닙니다 말씀이 거꾸로 우리를 다루는데 있어서

우리는 원래 심판 받아 마땅한 자 였다는 것을 아는 것이

복을 주시는 예수님으로부터

저런 노략물로 의문의 제사를 드리는 자들로부터 빼내시는

전리품이 이스라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은 본인들이 전리품이지

전리품을 따로 챙길 필요가 없는 겁니다.

본인들이 복덩이인데

복이 될려고 따로 행한다는 것 자체가 저주를 끌어 모으기에

 

이 징조를 쳐다 보겠습니까?

관심도 없는 겁니다.

 

스알야숩 징조를 구할까요 구하라

임마누엘 징조를 찾을까여 찾으라

마헬살랄하스바스를 두드릴까요 두드리라

 

안 찾습니다.

 

아니 누가 독을 달라고 아무리 자식이 외친다고 해서 독 주는 부모가 어디있겠습니까?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성을

 

이들은 독자성을 추구함으로써

나 혼자 밥을 먹고 나 혼자 영화 보고 나 혼자 말씀지키고

나 혼자 십의 이조 드리고 나 혼자 율법 지키고

 

나 혼자 이스라엘을 승리의 나라로 만들고

나 혼자 왕 다운 왕, 이스라엘 다운 이스라엘 만들겠다고 하다가

도리어 저주 받았다 말이죠

우리가 MB를 보면서도 여전히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주인을 결박하고 빼내주시는 이 십자가의 저주 받으신

영적전쟁의 승리가 덮쳐지지 않으면 영원히 몰라요 지옥에 가도 몰라요

 

서울봉헌하겠다고 해 놓고서 불교계에서 반발하니까

아내를 보내 불교에 입교해서 법명을 받는 겁니다.

서울이든 대구든 이미 주님것이고 독도는 한국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의 것인데 뭘 새삼스럽게 바치겠다고 하니까

바로 바로 거짓임이 들통나더라 말이죠

 

종교에서 주는 세례명이든 법명이든 그딴 저주 받지 마세요

666이다 말이죠

 

세례명 바울로를 왜 받아요

이미 다 완료된 상태에서 지적받는 사랑을 누리도록 되어 있기에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들을 격어봐야 하는데

그들이 지적받은 사랑을 같이 누리도록 되어 있는데

 

왜 베드로만 왜 바울만 한정적으로 받냐 말이죠

그것이 바로 구원장사에 말려든 겁니다.

666은 이 장사를 못하면 매매를 할 수 없어요

매매가 목적이다 말이죠 누구처럼 아하스 왕처럼

 

자기인생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우리는 마치 이사야가 자신의 아이들의 이름이 징조로서 나타나야 하듯이

이미 끝에서 완료된 이 사랑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게 없이 말이죠

우릴 몸 뚱아리 자체가 이 아름다운 소식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

마구 마구 뿜어져 나오는 겁니다.

새삼스럽게 외쳐야만 하는게 아니라

그럼 벙어리는 못 외치게요?

그 반대로 벙어리이니까 도리어 우주에까지 외치더라 말이죠.

 

말을 못하는

외칠수 없는 그 자리가

심판의 자리가 도리어 예수님을 더더욱 외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더더욱 예수님을 또렷히 보고

도리어 본다고 하는 바리새안은 때려죽어도 예수님이 안 보이는 겁니다.

 

안 보인다고 구하거나 찾거나 두드리기라도 할까요?

안 합니다.

 

이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사입니다 비밀

 

이사야는 이 비밀을 외치는데 신났습니다.

죽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신나게 외치고 있습니다.

입을 막아도 다리가 외치고

다리를 막아도 손이

머리카락이

땀이

오줌이

 

어린아이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를정도로 이미 완료인 상태로써

주름이 겹쳐진 일곱이라는 완성이 이제 부채펼치듯이 펼치니까

이런 역사들이 동원이 되어 일곱을 말하기 위해서 진노의 그릇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대나무의 마디처럼 한 마디 단락을 형성한다 말이죠

말씀 스스로 혼자서 말이죠.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 말이죠

 

이 모든 것이 이미 완료되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쳐지는

심지어 아들의 이름이

존재가 아닌 비존재인

이름이 무슨 일을 합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게 이름이거든요

그런데 존재 보다 더 존재로써

발이 달린냥

손이 달린냥

눈이 달린냥

더 또렷하게 증거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역사를 가지고서 묵시를 증거하는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