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 (7: 9-17)

 

일찍 죽임 당한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

계 23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된 자 (계 7, 9-1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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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7:10, 개역)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7:11, 개역)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7:12, 개역)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7:13,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7:15, 개역)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7:16, 개역)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7:17, 개역)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7:9, 새번역) 그 뒤에 내가 보니, 아무도 그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에서 나온 사람들인데, 흰 두루마기를 입고,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 있었습니다.

(7:10, 새번역) 그들은 큰 소리로, "구원은 보좌에 앉아 계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의 것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

(7:11, 새번역) 모든 천사들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을 둘러 서 있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면서,

(7:12, 새번역)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영원무궁 하도록 있습니다. 아멘!" 하고 말하였습니다.

(7:13, 새번역) 그 때에 장로들 가운데 하나가 "흰 두루마기를 입은 이 사람들은 누구이며, 또 어디에서 왔습니까?" 하고 나에게 물었습니다.

(7:14, 새번역) 내가 "장로님, 장로님께서 잘 알고 계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더니, 그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 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린 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서 희게 하였습니다.

(7:15, 새번역)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밤낮 그분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좌에 앉으신 분이 그들을 덮는 장막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7:16, 새번역) 『①그들은 다시는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도 않고, 해나 그 밖에 어떤 열도 그들 위에 괴롭게 내려 쬐지 않을 것입니다. / 49:10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23:2; 49:10 25:8

 

 

지난 주에 일곱 번째 인을 땠다고 7장의 시작을 언급했는데

제가 잘못 봤습니다. 아직 안 땟고 8장에 가서야 뗍니다.

아직 여섯 번째 인을 떼었을때의 내용이 오늘 까지의 내용입니다.

 

오히려 그 실수로 한번더 생각해 보게 된 것이

큰지진으로 인해서 특히 왕들이 심판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심판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권력자들이 말이죠

 

 

그럼 상대적으로 한 세트로 구성된

에서는 미워함을 받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것처럼

이 사랑받는 자인 도장 맞은자 곧 십사만사천은

 

오늘 본문의 내용처럼 바로 큰 지진인 환란 속에서 죽음 속에서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로써 그 옷을 씻어 희게 되었다 라는 겁니다.

 

어떤 사건이 생각 나십니까? 네 맞습니다.

출애굽 사건이 생각 나지요???

그럼 그 출애굽 사건은 하나의 증상이고 모형이고 진짜 실상은 무엇입니까?

네 맞습니다. 십자가 사건입니다.

출애굽 때는 또렷하고 두 패로 나누어지는

문설주의 어린양의 피를 바르느냐의 여부로 갈라졌음이 또렷하게 보였는데

 

십자가 사건에서는 그런 손 할례처럼 인간이 행동 가능한 여부로 갈라지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사건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의 피를 바르시느냐 안 바르시느냐 라는

마음판의 할례로 갈라지게 되니

 

인간의 눈으로 확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출애굽때처럼 눈에 확연하게 보이는 기적이 나타나는게 아니라

천사들이 칼 들고 등장하는 모습 하나 일체 보이지 않으나

오히려 정반대로 아무 능력 하나 보이지 않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기적하나 없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가 라는 밝히 또렷히 보이는 다 이루셨다 라는 사건이 완성이 되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다 이루심 때문에

 

베드로 본인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야만 하는 겁니다.

즉 날때 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야만 하는 실로암소경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말이죠.

 

바로 이 점이 바리새인이 누구의 죄냐 라고 따지듯이,

오늘날 성화론자들에게서는 안 믿겨지는 십자가의 피를 거부하는 모습이 되는 겁니다.

 

그럼 그들은 누구처럼 그 뒤를 따르느냐 바로 가룟유다입니다.

사단의 회 또는 거짓선지자 이죠.

아니 바보가 아니고서는 누가 가룟유다를 쫏습니까?

당연히 십자가의 피를 믿는다고 말 할텐데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가룟유다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을 해요 글쎄

지금도요

현재도요

2018년에도 요 17년에도 했었고 앞으로 192020년 앞으로 계속해서 할 꺼다 말이죠

 

아니 맞잖아요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것이 주님의 자녀 다운 모습 아니냐 말이죠


아닙니다.

주님의 구원방식은 인간에게 맡겨진 바가 없습니다.


아니 그러면 어떻게 천국 가냐 말이죠

(사실상 천국에 가는게 아니라, 가는 천국은 없습니다.

이미 와 있는 천국을 누리는 겁니다.
123456으로 가는게 아니라 7이 넘어와서 덮쳐지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 해서 오고가는 천국은 없고, 긍휼이 7에 70번 넘어와서 덮쳐는 천국 밖에 없습니다.
이게 피입니다. 이미 완성된채로 말이죠.)

 

 

지난 주에 도장깨기를 통해 노략당해야 하듯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표현하자면

이것을 환난, 고난, 삼일의 간극, 광야 이라고 합니다.

 

어떤 장로(24장로) 중에 한 장로가 어떻게 천국에 왔냐고 묻는다 말이죠

아니 당신이 더 잘 알잖냐 라고 되묻습니다.
즉 장로는 누구 라는 출처, 그리고 장소 개념이라는 어디 곧 주소가 아닌 그것 또한 출처를 상기 시키고 있습니다.
흰옷 입은 자들이 누구냐 라는 누구는 감추어진 비밀이 바로 그 누구를 흰옷 입히신 분이 누구냐 라는 출처 근원을 강조하고 있고,
어디서 왔느냐 라는 장소 주소는 장소개념이 아니라 환난 속이라는 삼일의 간극 곧 광야 환란 고난이라는 아버지의 징계에서 왔다 라는 겁니다.
존재는 장소가 되지만 기능은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어떻게 환난이 장소가 되겠냐 말이죠.
그러나 환난이 성도의 출처 곧 십자가 라는 삼일의 간극이 성도가 태어난 출처가 되는 겁니다.
마치 야곱의 허리가 부러진 그 허리(할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기능이 나오듯이 이스라엘의 출처가 바로

새이스라엘의 출처가 바로 십자가 라는 피의 빈터인 삼일의 간극(환난)에서 나오는 겁니다. 
.

 

(7:13, 쉬운말) 『○ 그때 장로들 가운데 한 사람이 내게 물었습니다. “그대는 이 흰옷 입은 무리들이 누구이며, 또 어디서 왔는지 알고 있습니까?”

(7:14, 쉬운말) 내가 대답했습니다. “장로님, 전 모릅니다. 하지만 장로님께서는 아십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은 사람들로서, 그들은 어린양의 피로써 자기들의 옷을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

 

 

장로가 대답하기를 이 사람들은 환란 속에서 나온 자로써 어린양의 피로 옷을 빨아 희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에 온 자의 모습이다는 겁니다.

 

아니 자기가 한 게 일체 없다는 겁니다.

아니 옷을 피에 빨았잖아 자기들이?

아니죠 피가 없으면 무슨 수로 씻냐 말이죠

주의 살과 피를 내가 먹어줬잖아?

아니죠 주님이 안 주시면 못 먹는거죠.

숟가락 언졌다고 자기가 행한게 아닙니다.

 

만약 자기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해서 천국에 왔다면 이 환란 속에서 나올수가 없습니다.

(환란 곧 출애굽 후에 다시 광야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너무 후딱 빨리 죽은 마른뼈가 살이 붙어서 못 봤다 말이죠

그것을 천천히 보여주는게 인생인데 너무 느려서 또 못 본 것을

우리에게 천천히 적당하게 보여주시는 것이 광야입니다.

즉 낮추심입니다. 자기 영역 하나 없도록 탈탈탈 털려서 빈터로 만드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사야를 통해서 아하스 왕의 모습을 봤거든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 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본인이 직접 하는 것을 믿겠다고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더라 말이죠

이미 임마누엘이 떳는데

새신랑이 떳는데

이 혼인에 관심 없고(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신 비유- 22)

자기영역이라는 기존의 것을 고수하더라 말이죠

그거 다 깨는 겁니다. 예복을 입지 않는 것도 자기영역을 따로 가지고 있으니

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기존의 것

이전의 것

지나가는 것을 고수하는 겁니다. 그래서 소도 사야하고, 밭도 사야하고,

자기영역을 질질질 끌고 다니니까

임마누엘이라는 하나님의 일 곧 종말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22: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누가 보면 가룟유다가 성화를 하겠다고, 또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갰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반대입니다.

 

그 반대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기에 구원하시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에 구원하시는 방식으로써 저 하나님 나라 운동이 바로

사단의 회의 모습이다 라는 것을 밝히 보여주시는 십자가사건을 펼치시는 겁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에 예수님이 안 도와준다고 은 30냥에 팔아 넘겨버렸으니까 말이죠

막살지 말자 운동에 예수님이 동참해 주지 않으니까 팔아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이라는 배부른 소리 하는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입에 풀칠할 재간이 없을 정도로

심판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환란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평준화 시켜버립니다.

 

물위로 걸어버리면 특화 되니까 도리어 물에 빠뜨려서 평준화 시켜버립니다.

광야 속에 집어넣어서 애굽의 10가지 재앙처럼 10번을 원망케 만들어 평준화 시킵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평준화 시킵니다.

밤이면 모조리 어두워서 누가 누구인지 안보이듯이

심판 속에 집어넣으면 모든 인간은 어두움 그 자체가 되고 맙니다.

잘난거 못난거 일체 안 보입니다.

이 평준화가 바로 죄인의 자리에 놓으시는 종말의 영 곧 징조입니다.

 

베드로를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을 증거케 만드시는게 아니라

물 속에 빠뜨려서 죽게 만들어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보도록 하신다 말이죠

 

즉 남을 7번 용서 할게 아니듯이 남에게 예수님을 7번 증거 할게 아니라

본인이 거꾸로 770번 용서함을 받아야 하듯이

? 아는 어두움이기에

평준화 되었기에

나는 죄인이기애

 

번제와 제사 드린 것이 일체 안 보입니다. 남을 7번 용서 한게 안 보여요

보이는 것은 오로지 어두움 이거든요.

그래서 불뱀에게 물리도록 해서 평준화 시키십니다.

거기서 구할 것은 오로지 종말의 영 외에는 구할것이 없도록

인애와 자비만을

빛 만을

환자는 오로지 의사만을 부르짖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실로암 소경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데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데

구원자를 부르는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이름을 못 부르는 겁니다.

아니 내가 어두움도 아닌데

소경도 아닌데 예수님을 왜 불러?

나는 건강한데

두 눈이 멀쩡한데 왜 의사를 불러?

나처럼 막 살지 않는 자가 왜 살려달라고 구원자를 부르냐?

 

구원자 보다 구원만 따 내면 되지 라고 아하스처럼 구원만 따내고자

구원자를 버리는 겁니다.

 

소경 아니다고 하니 고쳐주시는 분이 필요없다고 한다 말이죠

그냥 약만 달라고 합니다.

쳐다는 안 보겠다는 겁니다.

쳐다 보면 사귀어야 하거든요

사랑해야 하거든요

사랑하면 자기영역이 없어져야 하거든요

그래서 환란 속에

광야 속에

죽음 속에 들어가도 상관이 없어야 하거든요

그게 싫은 겁니다.

즉 피로 옷을 빨아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옷을 더럽히기 싫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일부러 옷을 더럽혀 버리시는 겁니다.

세 번 부인케 만드십니다.

원망 1014번 하게 만드십니다.

막살게 만들어서 옷을 제사장 거룩한 에봇을 더럽히게 만드십니다.

이미 준비한 피로 씻은 새 옷을 준비해 놓고서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 본인이 예수님으로부터 물에 빠뜨림을 당해서
770번이나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제대로 봐야 할 입장이다는 겁니다.

 

남에게 보여줄게 아니라 너나 잘 똑똑히 보라 말이죠
770번 봐야 알 듯 말 듯 할 정도이니까 끝까지 참으시면서 보여주시는 겁니다.

너나 제대로 보라 말이죠.

 

그래서 건짐을 당한 자들이 24장로들인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다 말이죠
율법으로 의로운 구석이 하나도 없어요

막산 것 뿐이다 말이죠

오로지 율법 외의 한 의 로 씻음 받은 것 뿐입니다.

 

그런 허물을 예수님이 자신의 피 흘려서 일찍 죽임당하심으로써
이들 24장로들의 옷을 빨아

피로써 희게 만들었거든요


하나님 나라 운동은커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했던 자들이 천국에 왔다 말이죠

이들이 하나님 나라 운동 했다는 것을 천국에 와서 과연 자랑할수 있을까요??

 

바로 이 천국이 우리에게 이미 완성된 채로 덮쳐져서 활동을 천국이 하고 있어요

죽어서 가는 천국은 없다 말이죠.

 

그러니 도리어 면류관을 반납하더라 말이죠 생명을 반납해요

아니 우리는 심판 받아 마땅한데

당신 홀로 생명이실 뿐인데

어떻게 우리가 면류관을 받아야 합니까 라고 반납하듯이

 

베드로처럼 마귀에게 잡혀와서
마귀가 밀까부듯이
초정밀조사하면 당장이라고 지옥가야함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번제와 제사로 하시지 않으시고

일체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면 피로 모든 허물을 덮어버리셨다 말이죠 이미

이미 벌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말이죠

그것을 이제 누리는 겁니다. 마귀에게 잡혀와야지만 주님이 준비하신 새옷을 누린다 말이죠.

인애와 자비로써 결제서류에 도장 안 찍고, 허물잡혀 지옥행 결제싸인 안 하시고

도리어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셔서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하셨듯이

24장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면류관을 씌워 주심으로써

천국(혼인잔치)에 왔다고 하더라 말이죠

 

즉 이 방식 외에는 천국 올 길이 없다는 겁니다

 

신부 될 길이 없어요

교회 될 길이 없어요

아무리 교회 충성 봉사 안식일 주일성수 지켜도

천국 못 갑니다.

가는 천국

오는(도착) 천국이 아니라

관계 곧 신랑 신부의 관계성(이미 다 이룬)을 천국(혼인잔치)라고 한다 말이죠.

 

혼인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는 나의 영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더 잘아십니다 라고

갑자기 사랑가 아가서 노래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아니 이것이 마귀에게 잡혀 온자의 자세 맞나요?

노래가 나오다니?

얼마나 신났으면

천국은 공간이 아닙니다. 가고 오고 하는게 아니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희 안에 있는 관계성이다 말이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면류관을 반납하더라 말이죠

내가 가질 것이 하나도 없으니 말이죠

그래서 도로 반납합니다.

 

면류관이, 생명이,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서 24장로 또는 베드로 또는 십사만사천 인맞은자에게 옮겨지고

 

다시 이 면류관과 이 생명을 받은 자는 다시 예수님 곧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에게

당신만이 옳았습니다 라고 반납하며서 옮기듯이

 

서로가

신랑 신부 서로가 자기 것 하나 없이

그저 주고픈 마음 뿐이다 말이죠

전부를 말이죠

그래서 부부가 환란 속에 있으면 얼마나 당신이 큰지를 보게 됩니다.

자기영역이 있는 세상임금은 상대방이 커 보이지 않는 것이

도리어 환란때에 드러나는 겁니다.

자기것만 커 보입니다.

 

사랑은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환란이 오면 왜 기쁜고 하니 나를 작게 만들어서

주님이 크도록만 보여주시니까 말이죠

 

물 위를 걸었을때는 예수님이 전혀 크게 안 보입니다.

그런데 풍랑을 일으켜서 물에 빠뜨리니까 죽게 되니

주님의 건지시는 그 긍휼 앞에서

십자가의 피 앞에서 비로소 주여 누구십니까 라고 주님만 보이고 주님만 크게 보이는 겁니다.

나는 안 보여요 이미 물에 빠져 죽었는데요 뭘

다시 살려 본들 의미 없어요

 

그래서 세리가 주님만 크게 보이니까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심판 속에서 주님을 보고 크신 주님을 보고 있지만

 

바리새인은 십의 이조를 드린 나의 영역이 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 자기 영역이 있고

막살지 않은 성화된 나의 의를 쌓은 것이 있기에

어떻게 주님이 크게 보이겠습니까?

심지어 심판도 오지도 않았는데

그때 가서 등불 준비하면 된다고

 

종말을 구하지 찾지 두드리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구원자가 크게 보이는 이들에게는

어딜 감히 면류관을 따로 챙길 이유가 없기에 반납할 뿐이다 말이죠

이것만이 천국에서 계속해서 펼쳐지더라 말이죠

 

이것을 찬양이라고 합니다.

 

홀로 영광 받으소서 라고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인애와 자비하심이 죽은 나를 건지시는 유일한 분이다고

마치 당신 아니면 죽을뻔 했다고

날 살려낸 자라는 소리 밖에 안하는 것이 시편의 마지막을 장식하더라 말이죠

주의 인자하심이 세세토록 영원무궁할 지어다 라고 찬양하는 겁니다.

이것은 물에 빠졌다가 건짐 받은 자에게서만 나오는 소리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다시는 뭐뭐 없을 것이먀

다시는 그것들을 격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그것들을 볼 일이 없을 것이다 라고

표현이 뭔가 전복이 되었다는 의미로써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찬양사건이라고 했지요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앞과 뒤가 안 맞아요

원인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 이다는 겁니다.

 

슬픔으로 씨를 뿌리는 우는 자가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복 된 자 라는 겁니다.(팔 복)


다시는 주리지 않을 것이며 등등등

라고 말이죠.

이것이 공명 곡

짝꿍노래

사랑노래 아가서 라고


천국에서는 이것 외에는 없어요.


그래도 뭔가 자기 영역을 꿈꾸는 자는

이미 지옥이다 말이죠

 

아가서 시편 조차도 인간들은 율법으로써 지키기로 행하니까

정작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을 시편대로 죽여요 글쎄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그러니 시편을 어릴적부터 달달 외워도 소용이 없습니다.

외우지 마세요

오랜만에 기쁜 소식을 전하네 ㅋㅋㅋㅋ

주님이 안 받습니다.

 

왜 안 받으실까요? 백날 해 봐도 미완의 상태 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의문의 반복이다 말이죠. 마침이 없어요 완성이 안되요.

 

그야 당연한 것이 이미 완성 된 것이 살아 움직여 운동하고 있거든여

다른 것은 없어요

그런데 따로 완성 할 필요가 따로 한 개 더 추가 할 필요가 있냐 말이죠.

또 또 성화론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를 해 버렸네요 ㅋㅋㅋ

종교꾼들이 돈 장사 안된다고 아우성 치면서 죄 없는 옷을 찢어 회개하겠다고

안 들은 귀 되겠다고 회개의 달인의 모습을 또 또 보여줄려고 환장 할 겁니다.

 

그러든 말든 주님께서 다 이루신 채로 주십니다. 그 다 완성된 것을 받기만 하라 말이죠

일체 행하고 지키고 하는게 없어요

그냥 누릴 뿐입니다.

 

그런데 안 받을려고 해요

? 남을 기여이 7번 용서를 하겠데 글쎄

기여이 남을 7번 용서하는 막살지 않는 나를 구축하겠데

예수님이 나중에 딴소리 하면 안되니까 믿을 구석은 이것 뿐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광야 속에 다 집어넣어서

환란 속에 다 집어넣어서

10번 원망케 만드시고

세 번 부인케 만드시는 겁니다.

 

우리는 잘못된 거짓선지자들에게 거꾸로 엉터리로 배웠다 말이죠

10번 원망 했기에 목이 곧은 백성을 낮추신다고 말이죠

아닙니다.

단 한번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그 사고방식이 목이 곧은 백성이라서 낮추시고자

10번 원망케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으로 몰고 간 거다 말이죠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고자 나의 기능을 쓸모 없게 만들고자 하는 구나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

 

이미 일곱이 떳는데

임마누엘이 떳는데

그 종말에 걸맞는 종말 백성이 되어야 하는데

잃어버린 이스라엘이 되어야 하는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이 되어야 하는데

 

원망하지 않는 99마리 양이 되고자 하니까

남을 7번 용서하는 99마리 양이 되고자 하니까

세 번 절대로 부인하지 않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니까

 

그거 환란 속에 집어 넣어서

어린양의 피 가 아니면 씻겨질 길이 없는

흰 옷이 될 길이 없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나의 영역을 따로 구비하는 조건 갖추는게 아니라

한 인물과의 만나느냐를

율법 외에 한 의를 만나느냐를 주님은 말씀하시는데

다들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맏아들과 만나주지 않습니다.

아버지 말씀을 단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99마리 양인 맏아들과 만나주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버지의 사랑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을 만나주실 뿐이다 말이죠.

 

여기에 동참하는게 아니라 비로소 본색이 들어나서 안색이 변해

분개를 하더라 라는 겁니다.

십자가의 사랑에 적개심을 느끼는 겁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 나쁜놈이 천국간다면 그 천국 가지 않겠다고 하는

그 자를 천국이 끌어당기는 식이 진짜 천국이다 말이죠

그래야 세상이 분개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진짜 지혜는 천한 기집이 왕비가 될 때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크신 사랑에

세상은 격동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지혜 가 펼치는 일입니다.

 

베드로 너를 하나님의 일로써 마귀가 격동케 하는 이 지혜를 펼칠려고 하는데

자꾸 베드로는 지혜 지식을 쫏는게 아니라

십자가의 지혜를 쫏는게 아니라

자꾸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 쌓더라 말이죠

그것이 육의 자랑이 되고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저 막사는 세리와 같이 토색치 않케 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나님에 대한 자기 열심만 쌓앗지

의를 쫏은게 아니다는 겁니다.

이 의가 뭡니까?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게 하나님의 의 아닙니까?

율법 외에 한 의를 보내심 말이죠,

 

그런데 자꾸 자기가 하나님께 열심을 내고자

나는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다 는 둥

나는 반드시 남을 7번 용서할 수 있는 그런 인격과 역량을 갖추겠다는 둥

지나가고 이전 것에 목숨 걸겠데요 글쎄

자기 목숨에 자기목숨을 걸겠데요

그게 무슨 목숨 거는 겁니까? 자기 영역을 더 크게 확장하고자 하는

아하스 왕의 노림수 이지

 

베드로도 마찬가지로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데요 글쎄 손에 장 지지겠데요 글쎄

 

사단의 일만 생각하더라 말이죠
이게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666 매매 소통 거래 네트워크 연결 유비쿼터다 말이죠

 

이거 꺽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네 바로 그겁니다

 

예수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꺽으시면 사랑받는 자이고

예수님이 꺽지 않으시면 내어버려둠을 당한 자 일 뿐이다 말이죠

 

베드로를 꺽어요 글쎄

그루터기로 만들고자 베어버려요 글쎄

탈탈탈 털려서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셔서 만나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해 주시던데

바로 그겁니다. 탈탈탈 털려서 아무것도 없게 만드셔서

부활의 씨 곧 남겨진 씨로 인해 다시 남은자로써 돌아오겠끔 부르시는 겁니다.

제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인적 없어요

다 각자 제각각 뿔뿔히 흩어졌을 뿐일 정도로

탈탈탈 털렸는데

주님이 새로 부르시는 겁니다.

 

남은 자만 돌아오도록

주님이 부르신 것이지

남은자가 자발적으로 돌아올 길이 없어요

다 꺽이고

다 짤렸고

다 탈탈탈 털렸는데요 뭘

 

주님이 불러 모으시지 않으면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을 뿐이다 말이죠

 

각기 제 길로 가지 않겠다고 하지 마세요

목이 곧은 겁니다.

꺽으셔서 각기 제 길로 가도록 하십니다.

주님이 각기 감당하시고 주님이 각기 우리의 허물을 그에게 담당 시키시는 겁니다.

 

오히려 사단의 회가 결집을 해요

어떻게 해서든 막살지 않는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하도록 말이죠

 

왜냐하면 이사야서 5장에서도 언급이 되었듯이

 

(5:1, 개역)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개역)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5:3, 개역) 예루살렘 거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 판단하라

(5:4, 개역)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 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13:27, 개역)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어떻게 분명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포도나무에 포도열매가 나지 않고 다른 열매가 나느냐 라고 했을때에

 

예수님께서 마귀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그의 증상물로써 들추어내십니다.

바로 이들과 대조를 이루어 한 세트로 구성해 갈라내시는 겁니다.

어떻게 심판이라는 종말을 미리 땡겨버리심으로서 심판 속에 집어넣습니다.

주님의 자녀를 탈탈탈 털려서 자기영역이 삭제당해 피로 씻음 받고

반대로 주님의 자녀가 아닌 자는 자기영역으로 구비한 것으로 내 영혼아 쉬자,
이 종말을 이 환란을 이 심판을 이 종친 인생을 이 생명을 질질질 끌고 나가고자 한다 말이죠

 

(13:8, 개역)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13:9, 개역)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3:10, 개역)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13:19, 개역)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는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13:20, 개역)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13:21, 개역)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3:22, 개역)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13:23, 개역)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13:24, 개역)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13:25, 개역)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13:26, 개역)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13:27, 개역)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면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13:28, 개역) 주인이 가로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13:29, 개역)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13:30, 개역)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13:31, 개역)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13:32, 개역)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13:33, 개역)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34,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13:35, 개역) 이는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13:36, 개역)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룰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13:37,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13:38, 개역)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13:39, 개역) 가라지를 심은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13:40, 개역)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13:41, 개역)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13:42, 개역) 풀무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13:43, 개역)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있는 자는 들으라

 

 

아까 말한 큰 지진 속에서 하나님의 심판과 거리가 멀다고 여기는 세상임금과 권력자 부자들

그리고 출애굽사건때의 애굽왕

또 위에서 언급한 아하스 왕 등등

심지어 하나님 나라 운동을 펼치고 있는 가룟유다와 바리새인

저마다 자기 영역을 다 구비해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믿음이라는 것도 말이죠

행함을 믿음으로 포장해 놓고서는 행함이라 쓰고 믿음이라고 읽으면서 자기최면을 걸고서 말이죠.

놀랍게도 베드로도 그 속에 있다 말이죠

 

절대로 부인 하지 않겠다고 행함이라고 쓰고 믿음이라고 읽더라 말이죠.

 

안 속한 자가 없어요

그러니 빼내셔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꺽으셔야 합니다

 

환란 속에 집어넣습니다.

환란이라고 아니까 자꾸 찡그리는 그것만 생각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로또 110번 연속으로 당첨케 만들어서 심판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남들은 복 받았다고 외치는 가운데

당사자는 아 주님의 사랑이 나를 심판 속에 환란 속에 집어넣으셔서

돈에 미치지 않은 막사는 자가 안되겠다는 교만을 목을 꺽으시는구나 라고

환란 속에 집어넣는

바로 그런 교만한 마음을 베어서 그루터기로 만드시는 것이

이미 천국이 임한 자

혼인잔치의 신랑을 만난 피로 씻음 받은 신부인 교회이다는 겁니다.

 

즉 주인을 결박해서 세간을 빼내시는 겁니다. 770번 용서를 퍼부어서

곧 어린양의 피로 옷을 빨아 씻어서

 

이런 하나님의 일은 관심이 없고

 

사람의 일로써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할려고 하니

막살지 않겠다는 둥 그런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한다 말이죠.

 

종말의 영을 구하지 않는 이상 스스로 못 벗습니다.

오죽하면 장대 높이 달린 놋뱀 쳐다보는게 뭐가 어려워서 다 죽을까요?

쉬운 것은 불가능하고

불가능한 것은 이미 넉넉히 누리는

이것이 성령의 일이다 말이죠. 반대를 위한 반대. 종말의 종말이다 말이죠.

하나님의 일입니다.

 

(5:12, 개역) 그들이 연회에는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저와 포도주를 갖추었어도 여호와의 행하심을 관심치 아니하며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의문의 중간 것

이전 것

지나간 것

끌어들이지 말고

끝의 종말을 구해서 끝에서 보라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보라 말이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만 관심있지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에서는 관심이 없듯이.

 

770번 용서받기(게임 끝났음)는 관심이 없어요

 

가룟유다는 끝까지 하나님 나라 운동(이미와 아직의 미완료형 의문의 반복인 현재진행형)을 펼칩니다.

 

즉 무엇을 거부한다? 770번 용서받는 하나님의 일은 거부하고

 

끝까지 남을 7번 용서하는 사람의 일만, 하나님 나라 운동만(하나님애 대한 열심)을 죽으면서까지 하는 겁니다.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 예수라는 방해자를 제거해야 하나님 나라 운동이 계속된다고 사람의 일로 생각하더라 말이죠.

 

그 결과가 십자가 사건으로 나타난 겁니다. 맞물렸다 말이죠.

 

가룟유다가 자살도 깨달아서 자살하지, 깨닫지 않으면 자살도 안한다 말이죠.

하나님 나라 운동을 계속해야 하는데

 

예수 한테 말려서 실수했다고 보는 겁니다.

실수만 안했어도 하나님 나라 운동 계속 할텐데

 

실수를 했기에 하나님 나라 운동에 본인 자신이 방해 된다고

자신을 해하여 심판해 버리더라 말이죠.

 

그러니 복수는 하나님한테 맡겨야 하는데 결국 그 복수가 누워서 침뱉기 식으로

되다 보니

 

바리새인과 가룟유다 또는 오늘날의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의 속임수에 예수님이 넘어갈 리가 있겠습니까?

 

하나님 나라 운동은 인간의 속임수 꾀입니다.

 

!! 막살면 안된다 굽쇼? 이거 꾀입니다 노림수입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럼 그렇게 열심인 자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안두었다니 믿겨지지가 않는 겁니다.

바리새인 보세요 얼마나 열심입니까

바로 그것이 마귀가 심은 거다 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자수 하잖아요 회개 하더라 말이죠

본인도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다고 하잖아요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께 열심 있으면 된거 아닙니까?
그런데 지식이 아니였다는 겁니다.

!! 이게 무슨 말인지!!!

 

그 뒤에 나옵니다.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른채 열심이다 보니까 자기 의를 세운 결과가 된 겁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주를 삼키더라 말이죠.

(2:17, 개역)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2:17, 새번역) 제자들은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69:9

 

그래서 하나님의 의 되신 예수님께 복종 했나요 안했나요? 안 했죠

 

율법 외에 한 의 에게 복종 안했고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열심 했다고 자부한 것이 도리어 자기 의를 세운 결과로

 

율법 외의 한 의 이신 예수님이라는 하나님의 의가 등장함으로써 들통나버렸다는 겁니다.

무기력하게 예수님의 그 어떤 저항하나 없이 드디어 성공했다고 자축하며 한숨 돌리는

자기 꾀에 다 빠지도록 했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처럼 맨날 맨날 어떻게 하면 저 예수를 죽일꼬

하나님의 의를 죽일꼬 하는

사람의 일만 생각했지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딱 하나 하나님의 일만 빠졌다 라는 겁니다.

지식을 쫏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침이 없이 의문의 사람의 일만 반복하는 겁니다.

지금도 말이죠.

 

(10:4, 개역)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10:5, 개역)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10:6, 개역)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10:7, 개역) 혹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10:8, 개역)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10:9, 개역)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10:10, 개역)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11, 개역)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2, 개역)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참선지자 보내면 또 죽이고

 

아니 개같은 이방인이 죽였다고요? 천만의 말씀

이스라엘이 죽입니다.

 

그리고서 그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킵니다.

거짓선지자를 죽인게 아니라

참선지자를 죽여놓고서

거짓선지자와 함께는 율법을 지켜요 글쎄

 

지금 현재 이스라엘이 그래요

오늘날 한국교회도 다 그래요

 

이스라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스라엘이라고 우깁니다.

 

그리고서는

 

의문의 증서인 율법은 또 계속 지키고

안식일을 지금 까지도 지키고

 

여전히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쫏지 않는 즉 안식의 주인을 죽여버리는

 

참선지자는 죽이면서 율법은 목숨처럼 지키는 이 모순을 그들은 못 보는데

드디어 십자가에서 다 밝혀 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서 지식이란 야다 안다 라는 남녀 성적인 관계성을 말한다 말이죠


씨뿌리는 비유는

밭 비유가 아니라 좋은 밭 비유가 아니라

좋은 씨 비유입니다.

 

좋은 밭 비유로 해석한다는 자체가 하나님께 열심 있지 지식을 쫏은게 역시나 아니였다는 겁니다.


한국교회 어떤 교회도 좋은밭 되자 라는 결론으로 해석 안하는 교회가 없다는 것은

이미 자기영역을 구비한 것에 그 정당성을 추구하는 해석만 할 뿐이다 말이죠.

 

(12:19, 개역)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12:20, 개역)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12:21, 개역)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12:22, 개역)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12:24, 개역) 까마귀를 생각하라 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골방도 없고 창고도 없으되 하나님이 기르시나니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12:25, 개역)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12:26, 개역) 그런즉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능치 못하거든 어찌 그 다른 것을 염려하느냐

(12:27, 개역) 백합화를 생각하여 보아라 실도 만들지 않고 짜지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12:28, 개역)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12:29, 개역)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12:30, 개역)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

(12:31, 개역) 오직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씨앗이 땅의 감추어진 속성을 들추어내어서 좋은밭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라는 삼십배 육십배 백배라는 증상물로써 좋은 밭이라는 속성을 상대적인 다른 땅과 대조로써 들추어내지

 

좋은 밭이라는 조건을 갖추자 라는 기존의 해석은 여전히 지식을 쫏지 않고

 

신랑을 쫒지 않고

성령을 쫏지 않고

안식의 주인을 쫒지 않고

 

안식일을 잘 지켜서(전남편과 이혼 안하고, 임마누엘 징조를 구하지 않고)

좋은 밭이 되자 라는 사단의 회의 해석방식

아하스 왕의 해석을 하더라 말이죠

 

그게 믿음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정작 주님이 방해를 해요 글쎄

임마누엘이 방해를 합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의 생각은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한다 말이죠.

 

가룟유다가 그 방해를 못 이기고 다리 걸려 실족하여서 자살했다 말이죠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러니 아하스 왕처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역시나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즉 임마누엘의 징조를 안 구한다는 겁니다.

성령을 구하지 않고 찾지도 않고 두드리지도 않는 겁니다.

종말의 영 곧 끝에서

싲ㅂ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에서 보는 시선이 아니기에

 

지금 현재를 세상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세상임금처럼 전쟁을 힘으로 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래서 베드로든 아하스 왕이든 뭐든 다 물에 빠뜨려 죽여 버립니다.

나무를 다 베어버립니다.

 

언제? 종말때를 미리 앞당기듯이 나무를 다 베어버리는 그 때를 미리 앞당겨 보자 말이죠

끝에서 보자 말입니다.

추수때의 시선을 미리 앞당겨 보자 말이죠

다 베어버린 나무에서

 

즉 심판 속에서 보자 말이죠

 

심판만이 평준화가 됩니다.

 

높은자도 없고 낮은자도 없는 뭘 해도 다 죄인이다는 겁니다.

막살아라 라는 뜻은 평준화입니다. 모조리 다 죄인 만드는

심판 받아 마땅한 자로 만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는 심판만 퍼붓습니다.

그의 길을 평평케 하기 위해서 쏟아난 것 짤라버리고 움푹파인 것 매꾸어 버린다 말이죠.

 

(3:3, 개역) 저는 선지자 이사야로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하였느니라

(1:3, 개역)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3:4,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

 

 

오늘 본문에서는 큰 환란 속에 집어넣음으로서 평준화가 됩니다.

 

그 죽음 속에서 자기영역이란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만을 쳐다 보라?

누구 만이 참 생명이다?

 

즉 임마누엘의 징조를 구하라 말이죠

 

성령을 구하라


불뱀에게 다 물려 죽는 평준화 속에서 무엇을 쳐다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어린양을 보라 라는 겁니다.

 

자기 영역이 있으면 결혼이 안됩니다.

결혼이란 자기 영역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저 분만 쳐다 보는 것이 결혼입니다.

 

그 남겨진 씨로 인한

그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루터기에서 싹이 납니다.



24장로가 외칩니다.

누구만이 천국의 혼인잔치를 누린다?


남을 7번 용서함으로써 자기영역이 있는자는 못 오고

오로지 예수님의 피로 770번 씻음받을 정도로 자기영역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자에게

그저 면류관도 반납할 정도로 자기 것 하나 없는

믿음도 없고 행함도 없고 의도 없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770번 용서

 

즉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음성에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넙쭉 받아먹는 주님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할 정도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는 자에게

 

긍휼을 자비를 사랑을 베푸시는

신랑으로 맞이하는 자가

 

천국에서의 피로 흰옷을 입은 신부이다는 겁니다.


?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주었기에

이 화목제물에 걸맞는자 되도록 심판 속에 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 심판 속에서 나온 자는 이 화목제물 곧 어린양의 피 씻음 외에는 없습니다.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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