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라는 실족케 하는 걸림돌 (십자가라는 걸림돌) (8: 5-15)

 

임마누엘이라는 거치는 돌, 거리끼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의 머릿돌



(
8:5, 개역) 여호와께서 다시 내게 일러 가라사대

(8:6, 개역) 이 백성이 천천히 흐르는 실로아 물을 버리고 르신과 르말라야의 아들을 기뻐하나니

(8:7, 개역) 그러므로 주 내가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 위에 덮을 것이라 그 모든 곬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

(8:8, 개역) 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창일하고 목에까지 미치리라 임마누엘이여 그의 펴는 날개가 네 땅에 편만하리라 하셨느니라

(8:9, 개역)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8:10, 개역)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8:11, 개역) 여호와께서 강한 손으로 내게 알게 하시며 이 백성의 길로 행치 말 것을 내게 경성시켜 가라사대

(8:12, 개역) 이 백성이 맹약한 자가 있다 말하여도 너희는 그 모든 말을 따라 맹약한 자가 있다 하지 말며 그들의 두려워하는 것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8:13, 개역)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룩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

(8:14, 개역) 그가 거룩한 피할 곳이 되시리라 그러나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거치는 돌, 걸리는 반석이 되실 것이며 예루살렘 거민에게는 함정, 올무가 되시리니

(8:15, 개역)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하여 거칠 것이며 넘어질 것이며 부러질 것이며 걸릴 것이며 잡힐 것이니라

 

(8:5, 새번역) 주님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8:6, 새번역) "이 백성이 고요히 흐르는 실로아 물은 싫어하고,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을 좋아하니,

(8:7, 새번역) 나 주가, 저 세차게 넘쳐 흐르는 유프라테스 강물 곧 앗시리아 왕과 그의 모든 위력을, 이 백성 위에 뒤덮이게 하겠다. 그 때에 그 물이 온 샛강을 뒤덮고 둑마다 넘쳐서,

(8:8, 새번역) 유다로 밀려들고, 소용돌이치면서 흘러, 유다를 휩쓸고, 유다의 목에까지 찰 것이다."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8:9, 새번역) 너희 민족들아! 어디, 전쟁의 함성을 질러 보아라. 패망하고 말 것이다. 먼 나라에서 온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 또는 '너희 마음대로 행하여 보아라'

(8:10, 새번역) 전략을 세워라. 그러나 마침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계획을 말해 보아라.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 , '임마누엘'

(8:11, 새번역) 주님께서 그 힘센 손으로 나를 붙잡고, 이 백성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고, 나에게 이렇게 경고의 말씀을 하셨다.

(8:12, 새번역) "너희는 이 백성이 모의하는 음모에 가담하지 말아라.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무서워하지도 말아라. / 또는 '맺는 맹약에'

(8:13, 새번역)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

(8:14, 새번역)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8:15, 새번역) 많은 사람이 거기에 걸려서 넘어지고 다치며, 덫에 걸리듯이 걸리고 사로잡힐 것이다."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23,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치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1: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집 짓는 사람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일이요, 우리 눈에는 놀라운 일이다.' / 118:22;23

(21:4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21:44, 개역)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

(21:45, 개역)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21:46, 개역) 잡고자 하나 무리를 무서워하니 이는 저희가 예수를 선지자로 앎이었더라

 

(24:1, 새번역)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걸어가시는데, 제자들이 다가와서, 성전 건물을 그에게 가리켜 보였다.

(24:2,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이 모든 것을 보고 있지 않느냐?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2

(24:3, 새번역)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 앉아 계실 때에, 제자들이 따로 그에게 다가와서 말하였다. "이런 일들이 언제 일어나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다시 오시는 때와 세상 끝 날에는 어떤 징조가 있겠습니까?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19:41, 개역)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2, 개역) 가라사대 너도 오늘날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기웠도다

(19:43, 개역)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19:44, 개역)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권고 받는 날을 네가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하시니라

(19:45, 개역) 성전에 들어가사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시며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9:33, 새번역)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3, 새번역)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낌이고, 이방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2:13, 새번역)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8:17(칠십인역) 8:18(칠십인역)

 

(5:11, 개역)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벧전 2:8, 개역)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벧전 2:8, 새번역)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 8:14


(벧전 3:14, 새번역)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 또는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8:12



거치는 돌, 걸림돌, 부딪히는 돌, 거리끼는 돌로써의 내용을 담은 신약 구절들을 쭈우욱 나열해 봤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케 하는 돌로써 표현합니다.

흔히들 예수님을 다들 중보자로 성경공부를 통해서 배우다 보니

이 실족케 하는 돌로써의 의미는 부정적이라서 빼 버리니까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로 듣고 거부감을 많이 느끼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 중보자 라는 의미 조차도 사실은 이 실족케 하는 의미를 거치고 난 뒤의 의미입니다.

그러니 앞의 것을 빼먹고 뒤엣것을 이야기 하면 안된다는 겁니다.


즉 심판 속에서의 구원이지

그냥 딸랑 구원만 주어지는게 아닙니다.

결국 중보자란 다른 중간 매개체는 없다는 겁니다.

바로 그 중간 매개체를 다 허물어 버리는 것이 중보자이신 예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예수님에 의해 걸려 넘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

아! 참! 주님이 중보자였지 라고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는 자가 있고

다시는 못 일어나는 자는 이 중보자로 인해서 실족케 되는 겁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말이죠

복이란 흔히 종교에서 말하는 복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즉 예수님이 피 흘려주심으로 피로 씻겨주심으로 흰옷을 입은 자를 복된자 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피 흘리지 않은 자는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

사도바울도 중보자가 될 수 없습니다.

 

바울이 언제 십자가를 너희를 위해서 진 적 있더냐 라고 하니까 말이죠

(고전 1:13, 쉬운말) 『그래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나누어졌다는 말입니까? 나 바울이 여러분을 위해 십자가에 달리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또 여러분이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기라도 했습니까?』

 

그렇다면 이 십자가라는 걸림돌이 아니고서는 중보자를 가려낼 길이 없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우리는 어두운 눈으로 예수님을 중보자임을 못 알아챘습니다.

그러나 인자를 훼방하는 것은 용서가 되지만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함이 없다고 하셨다 말이죠

아니 왜죠? 인자이신 예수님이 더 높지 않나요?

높다 안높다 라는 우리의 시공간적 인식이 아니라

성령 자체가 역사를 거부하면서 육의 소욕을 거부하면서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것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 되게 하는 그 구체적 보편적 진리를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영이다 말이죠

그러니 비록 우리가 어두운 눈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만

이제는 다시 사심으로써 십자가의 피로 용서하심으로써 머릿돌이 되신 이 믿음의 세계를 알려주는 유일하신 분이다 말이죠

다른 보혜사는 성령 밖에 없어요

그 성령이 들어간 자들이 사도들이니까 말이죠

그러나 사도들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리지는 않았다 말이죠

중보자는 예수님 뿐입니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우시는 분은 딱 한 분 뿐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실족케 하는 돌로써 표현함으로써

그냥 단순히 넘어뜨리는게 아니라

반드시 사건의 의미를 곧 십자가의 지혜죠 그 지혜를 담아서 표현합니다.

그렇게 되면 기존의 것들을 아무리 동원해도

무슨 의미인지를 아무도 알수 없는 비밀이 되어버립니다.

 

맞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비밀을 외치는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역사는 이 비밀을 중심으로 해서 재배치가 됩니다.

 

그 비밀이 뭐였죠? 임마누엘입니다.

 

자 그럼 이 임마누엘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이 임마누엘에 의해 다 넘어져 실족케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의미는

예수님의 하나님만이 진짜 이다는 겁니다.

그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만드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는 점입니다.

아하스 왕이 그랬다 말이죠

그럼 유대인의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이 왜 이렇게 다를까요

달라도 너무 다른 정반대의 쌍극에 서 있더라 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것을 직접 격었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쟁이들은 다 이단으로서 다 잡아 죽이고자 했다 말이죠.

? 정반대 이니까

그래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로써 밖에 안보이는 것이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쓸모가 없다는 겁니다.

 

건축이 뭡니까? 유대인에게서는 이스라엘 아닙니까

이것이 나라 라는 국가 라는 건축물이다 말이죠. 신체, 유기체.

그리고 곧 하나님의 집인 성전이 건축물이다 말이죠

이 성전에 이스라엘 구성인() 하나 하나가 건축물로써 차곡차곡 세워질 성전으로써

얼마나 귀한 자재물로서 한명 한명이 귀한재료가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죠

 

아 그런데 쓸모 없는 재료가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방해꺼리 밖에 안되기에 퍼뜩 퍼뜩 치워야 한다 말이죠

 

그래서 버렸다 말이죠

 

분명 버렸는데 그 돌이 어느새 머릿돌 곧 끝났다 라고 빨래끝 ~~~ 완성을 의미하는
머릿돌로써 들어가 있는 겁니다.

 

아니 아직도 이쪽 건축가들은 건물완성이 끝나지도 않았고 또 분명 버렸는데 어느새 머릿돌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럼 건축가들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이 뭐가 되냐 말이죠.

 

 

가룟유다가 이 하나님나라 완성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바쳤는데

예수님이 빨래 끝 이라고 외치면서 건축자들의 힘씀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니까 어떻게 될까요?

졸지에 아벨 꼴이 나 버리더라 말이죠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가룟유다는 졸지에 가인 꼴이 나 버린 겁니다.

 

베드로도 가인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는 똑같은 가룟유다인데

주님이 후딱 저런 가인의 사고방식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죄인의 자리에 놓으심으로써 예수님은 아브라함처럼

베드로는 아브라함 조카 롯처럼 소돔과 고모라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베드로 스스로 물에 빠진 자로써 그 죽음의 지옥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말도 안되게 긍휼을 베푸셔서 지옥에 들어가서 빼내시는 겁니다.

 

율법 지키는 것이 사랑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 이유 없는 용서인 사랑으로 나오는게 아니라

자꾸 조건 갖추기가 되는 죄아래 갇힌바로써 나타나기에

건축자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짖는다고 주의 전을 사모했는데

결과는 정작 그 주의 전에 모실 주님을 삼키는 결과가 되는

그 지옥 속에서 빼내시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율법을 완벽하게 지켜도 지옥이요 울리는 꽹과리이다 말이죠

자꾸 이렇게 말하니까 그럼 사랑하면 될 것 아니냐 라고 우기는데

그게 사랑으로 안 나오고 자꾸 조건갖추기가 되는

이 육의 사망의 몸에서 갇혀 버렸다 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주를 삼켜 버릴 정도로 내 자체가 음부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율법 외에 한 의가 와야 한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꾸 그럼 율법이 거룩하지 않다는 말이가? 라고 따지는데

율법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이기에

아무리 율법을 손아귀에 장악해 버려도 신체 자체가 음부라써

예수님을 삼키는 결과로만 무한반복한다는 점에서

외부에서 한 의가 율법 바깥에서 실행된다는 점에서

 

임마누엘이라는

기존의 하나님과 다른 바깥의 새로운 하나님의 등장으로써

기존의 역사 특히 성전 특히 이스라엘을 허물어 버림으로써

졸지에 이스라엘이 잃어버린바가 되는 겁니다.

 

죄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자가 되는 겁니다.

 

광야에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10(14=애굽 10가지 재앙)씩이나 원망하는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런 죄인을 만드셔서 즉 교만한 목이 곧은 뻣뻣한 목을 꺽으셔서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써만 약속에 부합된 약속의 자녀 만들어서

의사에 부합된 환자 만들어서

구원자에 부합된 죄인 만들어서(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약속의 땅 곧 천국에 집어넣으시는 겁니다.

 

곧 약속의 땅은 이 약속의 의미인 긍휼 자비인 인애와 자비로써만 발현되고 유지됩니다.

여기에 졸지에 하나님이 싫어하는 번제와 제사가 개입이 되니까

이 약속의 땅을 마치 에덴동산 철거하듯이 부랴부랴 철거 시키더라 말이죠

그래서 아하스 왕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 약속의 땅을 오로지 인애와 자비로만 가득채우겠다는

임마누엘의 징조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졸지에 본인들에 바벨론으로 포로 당해서

이 약속의 땅에(심지도 거두지도 않은)

이스라엘(심어야 땀흘려야 거두어야 한다고 우기는)을 쫏아내심으로써 청소를 하시고

입주자 강제 퇴거를 강행하시고

다시 청소 청결케 하신 후에 다시 오로지 인애와 자비만을 바라보는 자만

곧 스얄야숩 남은 자만 돌아온다고 70년 뒤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케 됩니다.

 

 

우리가 지금 계시록을 살펴보면서 소름끼치게 놀라운 점은

계시록에서도 나타났듯이

이미 일곱이 떳기에 임마누엘이 떳기에

인간의 손으로 지어나가는 역사가

이 임마누엘에 의해서 허물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허물어진다는 자체가 임마누엘이 이미 완성된 채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고 그 증상물로 작용하는 것이 인간일 찐데

그것을 초월해서 시공간을 넘어서는 새이스라엘로써 피신랑의 피 신부로써

인간을 넘어서는 새이스라엘로써

인간의 역사가 아닌 예수님의 계시 예수님의 세계가 어떻게 인간 역사를 허무는

전체를 본다는 점에서

계시록은 인간 역사 전체이고

이사야서는 육적 이스라엘 역사 전체를 허무시는

예수님 세계의 침노, 임마누엘의 침노의 실상을 미리 앞당겨 누리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조국에 대한 사랑으로써 조국애, 애국심, 독립운동(갸룟유다, 바리새인)을 펼칠께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철저한 매국노가 되어서

기생라합처럼 헌나라 가지고 가시고 새나라 달라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친다는 것은

마치 이제 그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 곧 율법 지키기의 마침이 되는

율법 외의 한 의만 쳐다보고자

인애와 자비에게 모조리 집문서 땅문서 국가문서를 다 팔아넘겨버리는 기생라합이 되는 것이

주님이 죄인 만드시는 방법이다 말이죠.

물론 아벨처럼 죽임을 당하고

예수님도 독립운동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듯이

 

저들은 헌 나라, 헌 술, 헌 부대, 옛 것 만을 고집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꼰대다 말이죠.

젊은 꼰대들이 자기 부모에게도 하지 않는 짖을 대학 신입생들에게 하니

적폐가 딴데 있는게 아니다 말이죠.

이미 새것의 활동 자체를 안 쳐다 보고 있다는 증거 증상이지요.

 

마침 꼰대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얼마전에 염력이라는 초능력자를 다룬 한국영화를 보고 생각한 것이

요즘 미국 영화에서 자꾸 영웅들이 점점 판을 친다는 자체가
물론 미국이 이미 유대화가 되었지만

오히려 이제는 감추는게 아니라 더더욱 자랑하듯이 노골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보게 되었다 말이죠

 

영웅 매매가 곧 666 매매 아니냐 말이죠

 

원래 슈퍼맨이 미국으로 이민온 유대인의 이민, 이민자 이방인에 대한 차별로 인해서 격게된 그 증상으로써 나타난 것이 슈퍼맨이다 말이죠.

 

얼마나 겸손한 마음으로 약자를 위해서 도와주는 영웅을 바랬겠습니까? 구원자를 바랬겠냐 말이죠.

 

니쁜 악당들을 물리치는 슈퍼 히어로 ~~~~

 

 

그런데 말입니다 그알싶

영웅이 많다는 것은 결국 그 사회가 살만한 곳이다는 말일까요? 아니면 궁지에 몰릴정도로 벼랑끝이다는 말일까요?

 

추운 겨울이 되면 이상하게도 불우이웃을 돕고자 이름없이 큰 금액의 돈을 기부하는 자가 나타나면

우리 사회가 그래도 살만한 곳이다 라고 아직도 우리 곁에는 영웅이 있다고 뉴스가 나옵니다.

 

그런데 뜨거운 여름에는 그런 소식이 안나오거든요.

춥다 라는 결핍이 공동분모로서 보편화 될 때

나는 못 돕는 형편에 처한 추운겨울에 누가 대신 나서줄 때 그 결핍을 채워주니까 고마운거지

정작 내가 그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가 된다면

매년 마다 기부금을 받아야 하는 폭삭 주저앉은 자리에 놓이게 된다면

과연 그것이 영웅에 대한 고마움으로써 기쁜소식이 되냐 말이죠.

 

그러면 장애인들은 왜 거리에 마음껏 나오지 않고 왜 숨어살까요?

 

영웅이 많다 라는 것은 그 만큼 사회가 더더욱 살기 힘든 척박한 곳이 된 정글이다는 겁니다.

저마다 화살과 활을 들고서 짐승을 사냥해야 하는 척박한 땅이다는 거죠.

(사 7:24, 새번역) 『온 땅이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로 덮이므로, 사람들은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사냥을 갈 것입니다.』

그것이 약속의 땅까지 그렇게 만들어버린다는 겁니다.

미국을 약속의 땅이라고 별명까지 붙여놓고서는

지금 척박한 땅이라고 한다 말이죠.

영웅이 너무 많아
구원자가 너무 많다 말이죠

그것을 자랑해

가인 성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각종 영웅들의 조상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유럽문화를 시기하고 부러워하는 결핍을

성경컴플렉스로 덧때우기를 하면서 각종 영웅들의 조상 곧 신화를 창조하고 있으니

과연 살기좋은 땅인지 아니면 척박한 땅인지

각종 기술의 조상이 되지 않으면 활과 화살로 짐승사냥을 못하는 곳이다 말이죠.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

다시는 물길러 오지도 않는

우물가의 여인이 죄인이 되어서 비로소 약속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를 마시는 그런 예수님의 세계가 아니라

 

철저한 오이디푸스가 매매 되는 곳으로써

인애와 자비라는 것은 일체 없는
척박한 땅

철저한 번제와 제사로서만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 곳이

바로 인간의 역사 모든 활동 인간세계이다는 겁니다.

짐승세계

 

이 세계에서 빼내시고자

이스라엘 나라 마저도 그렇게 헌 것으로 헌 부대로 옛것으로 채워버리는

이 이스라엘 왕들로부터 탈출 시키는
구원자들로 부터 구원을 구원하는
약속을 구원하는

출이스라엘을 펼치심으로써 도리어 바벨론에서 탁란 시켜서 피신시키시는 겁니다.

 

마치 사울왕으로부터 다윗을 피신 시켜서 블레셋 땅에서 유대왕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이것도 모형이지요 바로 예수님이 이방인의 구원자로 세움을 받듯이 말이죠.

 

약속의 땅을 다 청소한 뒤에 다시 들여보내는 이 모형이

이제는 실상이신 예수님으로 인해 펼쳐지는 겁니다.

이제는 이동하는 공간 자체도 다 사라지고
시공간이 아니라

( 8:13, 새번역) 너희는 만군의 주 그분만을 거룩하다고 하여라. 그분만이 너희가 두려워할 분이시고, 그분만이 너희가 무서워할 분이시다.

( 8:14, 새번역) 그는 성소도 되시지만, 이스라엘의 두 집안에게는 거치는 돌도 되시고 걸리는 바위도 되시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함정과 올가미도 되신다.


실상인 예수 안에 예수님께서 피 용서 속에 들여 보내주시느냐 아니냐

즉 주님이 피 발라 주심의 여부이지, 긍휼을 베푸시느냐로 달려있지,

 

인간의 믿음에 좌우 되지 않는 예수님의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 분 만이 유일한 성소 이다 말이죠.
다른 인물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말이죠.

유일한 심판 자를 만나게 되면 이렇게 외칠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서워 해야할 유일한 분이시거든요.

오히려 저 개맞습니다. 절대로 약속의 자녀인 유대인이 될 수 없습니다.
태생이 그런데 어떻게 바꾸겠습니까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임마누엘에 딱 맞은 잃어버린 동전인 남은자에 딱 부합되더라 말이죠

구원자에 딱 맞는 기능인 죄인을 부르러 오심에 딱 맞더라

긍휼의 그릇에 딱 맞더라 라는 겁니다.

 

도리어 인간의 믿음을 다 뜯어내는 기생라합과 같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 펼쳐지는 곳이

마치 지금 이사야처럼 이스라엘의 바닥을 뜯어내는

성전을 뜯어내는

예수님의 세계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파하시기 전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받으시는데

시험을 이기시니까 마귀가 잠시 물러가는데

그 마귀가 바로 바리새인들을 통해서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럼 이 복음의 이미 승리된채로 등장함에 있어서

마귀가 동원이 되는데 바리새인이 동원이 되는데

어떻게 동원이 되는고 하니

 

(8:9, 개역) 너희 민족들아 훤화하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먼 나라 백성들아 들을지니라 너희 허리를 동이라 필경 패망하리라 너희 허리에 띠를 띠라 필경 패망하리라

(8:10, 개역)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훤화 라는 잘 사용하지 않는 표현이 나오는데 결집 단결 전쟁용어로 하면 돌격 집중공격 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즉 그래 그래 모여봐 그러나 이미 승리했기에 반드시 망하도록 되어 있거든 이라는 겁니다

아무리 바리새인들이 모두 모여서 예수님 한 분을 공격해도 이미 끝난 게임이다는 겁니다.

 

이사야 하나를 죽인다고 해서 임마누엘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사야는 임마누엘의 증상물이지

콧물 딱아낸다고 감기가 사라지지 않는데

이사야를 죽임으로써 그것을 노린다는 자체가

이미 패배한 채로 나오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자기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푸는 임금의 신하인 참선지자를 죽여버려도

혼인잔치는 이미 아름다운 소식으로써 이미 전파 된 겁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 죽여 본들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8:10, 개역) 너희는 함께 도모하라 필경 이루지 못하리라 말을 내어라 시행되지 못하리라 이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니라

 

(8:9, 새번역) 너희 민족들아! 어디, 전쟁의 함성을 질러 보아라. 패망하고 말 것이다. 먼 나라에서 온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싸울 준비를 하여라. 그러나 마침내 패망하고 말 것이다. / 또는 '너희 마음대로 행하여 보아라'

(8:10, 새번역) 전략을 세워라. 그러나 마침내 실패하고 말 것이다. 계획을 말해 보아라. 마침내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 , '임마누엘'

 

(8:9, 공동) 민족들아, 너희는 결국 실패할 줄 알아라. 먼 데 있는 나라들도 모두 귀를 기울여라. 허리를 동이고 나서 보아라, 결국은 실패하리라. 허리를 동이고 나서 보아라, 결국은 실패하리라.

(8:10, 공동) 아무리 모의를 해보아도 되지 않을 일, 아무리 결의해 보아도 이루지 못할 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즉 그들은 모인다고 전쟁준비 싸울 준비에 힘들이 권력이 결집이 된다고 좋아라 합니다만

사실은 임마누엘이 그렇게 모으는 겁니다. 왜 아무리 모여도 패망했기에 모인다 말이죠

계시록이 딱 그렇잖아요

이미 혼인잔치가 완료된 채로 펼쳐지기 때문에

참선지자를 잡아 능욕하여 죽이는 겁니다.

 

참선지자의 목 하나 하나가, 주의 눈물 방울 하나 하나가 되어서

주의 병에 담기는 것만 생명책에 기록이 되기 때문에

이미 생명책에 완료된 바 대로 펼쳐지는 것인데

그것도 모르고 전쟁한다(허리를 동이고 허리에 띠를 띤다)고 힘이 결집이 된다고 좋아라 하더라 말이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고 좋아라 했다 말이죠 얼른 잡아서 예수님께 바쳤더니

도리어 꽃단장시켜서 화관 생명의 면류관으로 신부화장을 시켜 버리더라 말이죠

 

마귀에게 아무리 힘이 결집이 된다고 해도 그 자체가 임마누엘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너거 하나님을 결집해야 우리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 나타나니까 말이죠.

 

그러니 차라리 이 십자가 라는 걸림돌에 넘어져서

주여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저는 폭삭 주저 앉은 자입니다 라고 죄인이라고 해야 할 판국이고

흑암의 백성일 뿐입니다 라고 해야 할 판국이고

개같은 이방인이라고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그래야 흑암에 뛰어드신 예수님을 만난 것인데

흑암에 아무리 뛰어들어도 예수님이 만날 자가 없네?

도대체 어디 갔냐 말이죠?

 

전신에 다 99마리 양처럼 문둥병자 9명은 예루살렘 성으로 가더라 말이죠

그런데 단 한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 하나는 왜 너도 가지 않냐 라고?

당신이 예루살렘입니다 라고 하더라 말이죠

 

즉 찬양받으실 분이다는 겁니다.

 

인간은 인물을 찾지 않고 시간과 건물과 환경을 찾는다 말이죠

인물은 나도 같은 인물이기에 타인은 곧 지옥이거든요.

인물을 만난다는 것은 그 분 외에는 나도 인간 아닙니다 라는 의식

즉 성령을 받지 않는 이상은

종교 곧 666 곧 국가라는 시, 공간, 역사를 찾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곧 자아의 결합상품인 국가를 찾도록 되어 있어요 나에게로 회귀하는 겁니다.

 

왜 남을 7번 용서하고파 할까요? 나로 회귀가 되거든요.

즉 통장에 입금이 된다는 겁니다.

통장에 입금이 되지 않으면 절대로 식스팩 안 만든다고 배우들이 말하듯이 말이죠.

 

그러나 내가 도리어 770번 용서 받아야 한다면

시도때도없이 영원히 빚진자로만 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내가 없어요 나를 아무리 찾을려고해도 헛수고인 마이너스 통장만 있을 뿐이다 말이죠.

이것이 다 저 예수님 때문이라는 겁니다. 간 때문이야 간 때문이야

예수님 때문에 나는 매일 매일 당뇨병환자처럼 수혈을 받아야만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가 없는 삭제당한 자입니다.

이런 자기가 없는 죄인 병자를 가지고서 십자가의 전쟁을

저들 힘이 결집 되었다고 좋아라 하는 저들과 싸우는 겁니다.

이미 승리한 채로 말이죠.

 

그런데 이스라엘이 이 긍휼로 싸우는게 아니라

율법 지켰는데 왜 저 개같은 이방인하고 전쟁하면 지냐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러니 율법이 왜 주어진 지를 모르는 겁니다.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죄 아래 가두기 위함입니다.

바로 율법 지킨다는 것이 주의 긍휼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유월절 어린양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도리어 힘을 결집하는 저 마귀와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 곧 힘 곧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쫏을 뿐이지

지식을 안 쫏는 겁니다.

 

그래서 도리어 사울왕의 이스라엘은 율법을 쫏고

다윗왕은 그 율법을 어겼다고 이스라엘로부터 쫏겨나서 블레셋에서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지는 겁니다.

예수님처럼 말이죠.

 

다윗은 그림자이고 예수님이 실상이다는 겁니다.

 

그 다윗처럼 지금 이사야 때의 이스라엘을 저 아하스 왕으로부터 탈출 시켜서

바벨론으로 피신하여서 바벨론에 탁란하여 거기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메시아로 고레스 왕을 세우신다는 겁니다.

 

이것도 그림자인데 진짜로 고레스를 메시아로 끝까지 섬기는 유대인 종파들이 있다 말이죠.

문자에 구약에 적혀 있으니까 말이죠

잠시 임시방편으로 스알야숩 남은자가 돌아올때까지 말이죠

그럼 임마누엘을 메시아로 실상을 섬겨야 하는데

고레스는 종일 뿐인데 하나님이 세운 종인데

종을 하나님과 같이 섬기더라 말이죠

그 버릇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오늘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다들 해당된다는 겁니다.

 

자기의 영웅이 되었기 때문이다 말이죠 예수님도 그렇게 섬겨요

 

그러니 십자가가 그들에게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지 않겠느냐 말이죠

이미 다 완료 되었는데

왜 그런 의문들을 섬길까요?

왜 그런 미완료들을, 번제와 제사를 섬길까요?

그것이 바로 자기의 우상화 곧 자기유익 때문이다는 겁니다.

 

반사작용 투시 투사작용으로 반사이익을 노리기 때문이다 말이죠

다 이루었는데 뭘 또 이루냐 말이죠.

심지도 거두지도 않는데

이 약속성을

도리어 활과 화살을 쥐어서 척박한 짐승사냥하듯이

마일이지 쌓아서 획득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약속과 어긋나는 겁니다.

 

이런 의문의 역사는 예수님의 세계인 말씀에 의해 계시에 의해 묵시에 의해 다 무너지도록 되어 있기에 모여드는 겁니다.

그래서 저들이 대세를 이룬냥 착각하듯이 힘이 모여드는 겁니다.

저들의 힘들이 모여들때에 오오 말씀대로 진짜로 결집된다고 좋아라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도 무슨 파 무슨 파 파당 싸움으로 때려죽어도 안 모이고 결집이 되지 않던 자들이

자기들끼리도 철천지 원수들끼리였던 자들도

 

마치 계시록에서 음녀가 짐승을 올라타 결집 하듯이 말이죠.

그것 자체가 이미 패망 한 증거로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리심 때문에,
어린아이 하나 죽이는데는 온 동네가 다 동원이 되고 전세계가 결집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촛불집회처럼 말이죠.
아기 예수님 하나 죽일려고 두 살 밑으로 다 죽이듯이 전 세계가 들썩 들썩 힘을 모으는 겁니다.

마귀들은 반드시 힘을 결집 하도록 되어 있어요.

 

그 자체가 아 이미 말씀이 다 이루어졌다 라는 십자가의 피의 활동 때문에 벌어진 것임을 보고

기뻐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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