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을 피하시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바라보리라 (사 8:16-22)

 

율법을 감추고 얼굴을 피하시는 여호와

 


(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8:16, 개역) 너는 증거의 말씀을 싸매며 율법을 나의 제자 중에 봉함하라

(8:17, 개역) 이제 야곱 집에 대하여 낯을 가리우시는 여호와를 나는 기다리며 그를 바라보리라

(8:18, 개역) 보라 나와 및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이스라엘 중에 징조와 예표가 되었나니 이는 시온산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8:19, 개역)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8:20, 개역)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8:21, 개역)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8:22, 개역) 땅을 굽어보아도 환난과 흑암과 고통의 흑암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8:16, 새번역) 나는 이 증언 문서를 밀봉하고, 이 가르침을 봉인해서, 나의 제자들이 읽지 못하게 하겠다.

(8:17, 새번역) 주님께서 비록 야곱의 집에서 얼굴을 돌리셔도, 나는 주님을 기다리겠다. 나는 주님을 의지하겠다.

(8:18, 새번역) 내가 여기에 있고,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아이들이 여기에 있다. 나와 아이들은, 시온 산에 계시는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여 주시는, 살아 있는 징조와 예표다.

(8:19, 새번역) 그런데도, 사람들은 너희에게 말할 것이다. "속살거리며 중얼거리는 신접한 자와 무당에게 물어 보아라. 어느 백성이든지 자기들의 신들에게 묻는 것은 당연하다. 산 자의 문제에 교훈과 지시를 받으려면, 죽은 자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8:20, 새번역)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결코 동트는 것을 못 볼 것이다!

(8:21, 새번역) 그들은 괴로움과 굶주림으로 이 땅을 헤맬 것이다. 굶주리고 분노한 나머지, 위를 쳐다보며 왕과 신들을 저주할 것이다.

(8:22, 새번역) 그런 다음에 땅을 내려다 보겠지만, 보이는 것은 다만 고통과 흑암, 무서운 절망뿐일 것이니, 마침내 그들은 짙은 흑암 속에 떨어져서, 빠져 나오지 못할 것이다.


(9:33, 새번역) 그것은 성경에 기록한 바와 같습니다. "보아라, 내가 시온에,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를 둔다. 그러나 그를 믿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 8:14; 28:16(칠십인역) 또는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은'

(2:13, 새번역) "나는 그를 신뢰하겠습니다" 하고 말씀하시고, "보십시오, 내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 8:17(칠십인역) 8:18(칠십인역)

(벧전 2:8, 새번역) 또한 "걸리는 돌과 넘어지게 하는 바위"입니다. 그들이 걸려서 넘어지는 것은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그렇게 되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 8:14

(벧전 3:14, 새번역) 그러나 정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여러분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의 위협을 무서워하지 말며, 흔들리지 마십시오. / 또는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8:12

 

 

 

고린도전서에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본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내용은 하나님께서 얼굴을 가리우고 숨기고 피하시고

율법을 감추고 봉인하라고 합니다.

 

한번은 라디오에서 이런 말을 들은적 있습니다.

명절때에 멀리 떨어진 친지들이 모여 나눔을 가지는데

그러다가 막상 남자들만 남게 되면 마치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는 겁니다.
명절이 뭡니까 다들 모여서 재잘재잘 까르르르 대화가 오고가면서
왁자지껄 막 떠들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로 평안함이 넘치는 날 아니냐 말이죠

아이들에게는 그렇거든요

그런데 어른이 되면 졸지에 이 은혜의 날이 졸지에 법의 날이 되어서

그 동안 너는 어느 정도로 성공했냐 라고 완벽을 따지고 따지는
저마다의 조건을 저울질 하는 날이 되어버리고 만 겁니다.

서로가 못 잡아 먹어서 안달이 난 날이 되어버린 가정해체날이 되더라 말이죠

가는 날이 장날이 될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보는 날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얼굴을 피하는 날이 된 겁니다.

그래서 제삿날 없애자 라는 청원운동이 벌어질 정도이니까 말이죠

 

소위 교회의 주일성수가 그런 명절과 같은 날처럼

어린아이처럼 그날은 그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주의 날일세 라고 즐거워 하는 날인데

은혜의 날이 되지 못하고

저울질 하듯이 재고 재어버리는 조건을 따지는 법이 서게 되면

언제 짤릴지 모르는 불안한 날 밖에 안되는 겁니다.

 

법이 서게 되면 가정해체가 되듯이

교회도 해체의 순을 밟게 되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낯을 가리우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바라본다고 합니다.

아니 왜 얼굴 돌리시는 주님을 기다릴까요?

얼굴 안 돌리시는 주님을 봐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것은 주님이 그 정도로 싫어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은혜로만 일하시는 주님 앞에서

정작 인간은 법을 추구함으로써 완벽을 추구하는 것에 얼굴을 돌리시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은혜로 세워진 새이스라엘은 바로 이런 주님을 바라본다는 겁니다.

그것이 성전에서 두 사람의 기도처럼

한 사람은 완벽을 추구하는 자인 바리새인에게서는 얼굴을 돌리시고

또 한 사람인 세리는 불쌍히 여겨달라고 은혜를 바라는 자에게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시는 방식이기에

 

바로 저 얼굴을 돌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참 하나님은 은혜를 바라는 자의 하나님이지 (탕자)

완벽을 법을 바라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맏아들) 라는 겁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결국 은혜를 바라는 자인

남은자의 하나님이기에

남은자는 오히려 완벽을 추구하는 자의 하나님에 대해서

얼굴을 피하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는 겁니다.

 

법을 바란다! 완벽함을 바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나는 실패하면 안된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깔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저 세리 저 실패한 인생이 되지 않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저 탕자에 비해서 나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고 맏아들은 주장하고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혹 부족한 것 있으면 말해라 당장 하겠다고 한다 말이죠

 

율법이 주어진 이유는 율법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율법이 몽학선생으로써 저분이 사랑입니다 라고 화살표 방향으로써 저분을 가리킨다 말이죠

그러니 저분이 바로 나를 용서하고 사랑하실 유일한 분

곧 십자가에 달려 내 죄를 씻고자 십자가에 달려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분이다는

긍휼 곧 모든 허물을 덮는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랑을 쳐다볼 생각 안하고

긍휼을 쳐다볼 생각 안하고

자꾸 자기가 건강하다는 완벽하다는 것만 내세운다는 자체가

임마누엘 곧 그루터기로써 모조리 다 평준화 시킨 심판 고요함을 못보니까

 

남은자를 거꾸로 해석을 해서 완벽한 자로 해석해서

구색을 갖추니까

예수님의 이사야 남은자 해석과

바리새인의 남은자 해석이 완전 정반대가 되더라 말이죠

 

마치 시편의 원수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과

시편을 어릴적부터 달달 외운 유대인의 해석이 다르듯이 말이죠

 

시편과 이사야를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장 많이 인용하시는 이유는

딱 정반대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그런 조건 갖추었다고

자신만만해 하신다는 것을 아시고서

그 시편 대로 하심과 이사야 말씀이 너희에게 응했다 라고

다가오시는데

정확하게 시편이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이사야 말씀대로 응하시는 예수님을 죽이더라 말이죠

이게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버림받는 돌이 머릿돌로써 거치는 돌이 될려면

이미 세워진 이미 완료된 임마누엘의 증상으로써

이런 사건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마치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리심이 먼저 있었다는 이유로

애굽왕과 애굽군사들이 결집하고 단결해서 모이도록 되어있는

그들로 인해 영광받으시는 겁니다.

 

반대로 우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볼 뿐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받습니다.

 

예수님께 다가오는 유대인들이 어떻게 하면 구원얻냐 라고

그 조건을 갖추겠다는 생각 뿐입니다.

그래야 구원이 되니까요

 

그러나 구원자는 죄인을 부르러 왔고

의사는 환자를 부르러 왔다는 것은

그 어떤 구원의 조건을 인간 쪽에서 갖출수 없는

오로지 은혜로만

불쌍히 여겨주시는 긍휼로만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겁니다.

 

막살지 않겠다는 것으로 구원을 못 이룬다는 겁니다.

막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원하심은

 

율법을 지켜 완벽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구원얻냐 라고 어떻게 해서가 아니라

아무 조건 없이 주시는 이 긍휼 앞에서

도리어 조건 갖춘자에게 얼굴을 피하시고 고개를 돌려버리심으로써

 

이 은혜에 대해 양보하지 않겠다는 것은

오로지 십자가의 피로써만 다 이루시겠다는 고집을 피우시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는 겁니다.

법으로 하면 그것보다 딱딱하고 삭막하고 답답한 세상이 어디있겠냐 말이죠

 

인간 자체가 법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완전하지 못하면 견딜수 없어 답답해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번조 라는 표현인데

 

굶주림을 결핍을 해결하지 못하면 답답해서 울화가 치밀어 올라 화병이 난다 말이죠

이 울분을 번조라고 하는데 이거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종교든 뭐든 결국 울분 치밀어 오르는 화병으로 먹고사는 것이 인간 사회요 종교요 국가요 역사입니다.

종교는 병주고 약주고 약주고 병주고 한다 말이죠

 

답답함을 해결하고자 대중성을 찾는데 그 대중성이 바로 종교가 되는 겁니다. 이데올로기

 

마귀의 첫 번째 시험이 돌을 떡덩이 되게 하는 메시아가 되라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 경제문제 해결하는 경제살리는 대통령을 구하듯이


(8:19, 개역)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배고픔이라는 답답한 문제 답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신접한 자와 마술사를 찾는 이유가 되는 겁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하나님까지 죽이겠냐 말이죠

 

(8:20, 개역)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고

(8:21, 개역) 이 땅으로 헤매며 곤고하며 주릴 것이라 그 주릴 때에 번조하여 자기의 왕 자기의 하나님을 저주할 것이며 위를 쳐다보거나

 

에이 설마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을 저주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더라 라는 겁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고 하니

율법을 쫏지 않았다는 겁니다.

아니 언제는 율법 지키면 안된다메?

네 안 되죠

그럼 왜 또 이제 와서는 율법을 쫏지 않는다고 하냐

율법 지키는 것과 율법 쫏는 것은 다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 몸이요 육체입니다.

그래서 완벽을 추구하지 완전함을 추구하지

은혜를 구하지 않더라 말이죠

아하스 왕이 임마누엘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하더라 말이죠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힘 곧 완벽함 완전함 이다는 겁니다.

긍휼을 구하지 않아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고요

 

율법을 쫏지 않았다 라고 지적하심을 율법을 쫏으라 라는 것인데

율법을 지키면 내 육체가 내 몸이 율법을 행하냐 못행하냐의 여부를 따지는 것에 비해

율법을 쫏는다는 것은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것을 주목하라 라는 겁니다.

내 몸이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의 유무를 따지는것과 무관한

 

율법이 어디서 오느냐 라는 겁니다.

시온에서 오는데 이 시온이라는 특정장소에서 율법이 오냐 안오냐의 여부로 달려있음에 주목하라 라는 겁니다. 쫏으라 라는 겁니다.

 

결국 율법이 곧 거룩한 말씀이

인간의 지킴과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쳐들어오는 특정장소와 연관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이 시온에서 나온다는 겁니다.

인간의 육체에서 안 나옵니다.

행하느냐 아니냐의 여부와 무관하게 율법이 시온에서 나옴으로써

거치는 돌로써 모조리 다 넘어뜨리고 자빠뜨리는 실족케 하는 것이 율법이다는 겁니다.

 

맏아들이 어릴적부터 아버지 말씀을 다 지켰다고 자부하는데 있어서

시온에서 나오는 돌은 도리어 맏아들을 다리걸어 자빠뜨려 넘어뜨리는 실족케 하는 율법이다는 겁니다.

 

결국 시온산은 상대적인 인간들이 찾고자 하는 답답함을 해결하는 대중적인 장소인 산당 곧 종교와 한세트를 이루면서 그 산들을 깍아버리는 거친돌로써

불도져로 밀어붙이는 평평하게 평준화 시키는

주의 첩경을 평탄케 하는 것이 바로 시온산 곧 율법이 나오는 시온산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거룩하지 못한것들이 민생문제를 해결하겠답시고 사기를 치는

그 산들을, 그 높은 신기가 가득한 영험한 장소를,

다 깍아버리는 거치는 반석으로 평준화 시켜버리는

진짜 거룩이자 무시무시한 심판이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이다는 겁니다.

그 앞에서 니 잘났니 못났니 하는 것이 다 평평하게 됩니다.

 

그렇게 첩경 울퉁불퉁 다 모조리 깍고 홈파인 곳은 매꾸어서 평탄게 한 후에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더라 말이죠

 

곧 긍휼과 자비인 은혜가 말이죠

 

결국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라는 은혜가 이미 떳기에

아무리 세상왕 세상종교가 높고 깊은 산에 대중들이 몰려들어서

그 답답한 마음을 해결하고자 종교가 활성화 된다고 해도

이 시온산에서 나온 율법이라는 거룩 곧 거치는 돌로 인해서

머리에 떨어지고

또 가루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28:16, 개정)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촛돌이라 그것을 믿는 이는 다급하게 되지 아니하리로다

 

(9:33, 개정)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벧전 2:6, 개정) 성경에 기록되었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로운 모퉁잇돌을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계시록에서 자주 언급한 일곱이 바로 시온에서 나오는 돌입니다.

완벽한 거룩이기에 제대로 된 심판을 하는 것이 일곱이요

그 증상물이 일곱교회이지 숫자가 아닙니다. 인물입니다 인물.

 

자 그렇기 때문에 내가 붙잡는 일곱이 없듯이

일곱이 나를 붙잡듯이

내가 지키는 율법은 없다 말이죠 그건 법이다 말이죠

은혜가 나를 붙잡는데 먼저 율법으로 그냥 율법이 아닌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기에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 나를 가루로 만들어서 곧 평준화 시켜서

그 심판 속에서 그 고요함 속에서 그 잠잠함 속에서 은혜로 값없이 구원하시지

조건 갖추어서 구원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조건 갖추겠다는 것들이 바로 저런 답답함을 번조를 해결해 주겠다고
높은산에 신기한 영흠을 찾는 대중들의 종교(마귀 두 번째 시험)를 다 허물어 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시온에서 나오는 돌인 율법이다 말이죠

 

그러니 맏아들처럼 또는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할게 아니라

율법사처럼 큰 계명 두 계명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저 지켰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 얻죠 라고 물을게 아니라

 

탕자처럼 뭘 해도 심판받아 마땅함을 무시무시한 주님을 보고서야 제대로 두려워 할 자를 만났다고 저를 심판해 달라고 하는 자에게

율법을 쫏아 곧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그런 심판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에게

주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는 주의 긍휼과 자비인 은혜 용서를 베푸시는 여호와임을 보기에

 

율법을 감추시는 주님을 바라라

얼굴을 피하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바라라 라는 겁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낙망하느냐 주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율법을 감추시고 얼굴을 돌리시는 분이 진짜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 나나 모든 인간이나 모조리 다 은혜를 안 쳐다보고

그저 지켰다고 선함을 가지고 오고 율법지킨 것을 따질 뿐이기에

그거 안 볼란다 라는 주님을 못 보고 있더라 말이죠

주님은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을 쫏기를 바라더라 말이죠

율법 지키는 것을 원하는게 아니라 번제와 제사를 싫어하시고

인애와 자비를, 통회하고 자복하는 상한심령을 원하시더라 말이죠

번제와 제사가 통할 것 같으면 벌써 다윗이 했다 하고도 남앗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상한심령은 내 쪽에서 갖출수가 없는

도리어 내 때문에 770번 죽어야만 하는

남을 7번 용서하기를 조건으로 완벽하게 갖추겠다는 완악한 나 때문에

막살지 않겠다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겠다는 그 나 때문에

 

대신 770번 죽어서라도 다윗을 원수다윗을

원수 대식이를 살리겠다고
쓰리희생번트를 날리는 꼬끼오(우리야) 꼬끼오(밧세바) 꼬끼오(이름없는 아기 꺽으신 뼈)로 가루가 되어서 평준화 시켜서

이 꺽으신 뼈로 기뻐하리라 라는 겁니다.

 

마침 지난주 말씀을 나누는 중에 알게 된 것을 막 할려고 하니까 시간초과해서 녹음이 길어질까봐 다음주 오는 주에 할려고 입이 건질 건질 설레이는 마음에

마침 엄집사님이 질문을 해 주시더라 말이죠

 

내가 원수인 것을 말하는 구체적인 성경구절이 있냐 라고 물으셨는데

없다 라고 했습니다

 

만약 있어 버리면 문자를 손아귀에 잡은 유대인들이 그거 다 지켰다고 또 자부할꺼다 말이죠

지켰는데 바라는 바를 안 들어주면 하나님을 저주하는 것이 인간이다는 겁니다.

 

성경전체는 비밀 비유입니다

문맹률이 가장 작은 유대인도 못 푸는 비밀을 이방인인 우리가 무슨 수로 풀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에게서 마저도 율법을 봉해서 감추어 버렸는데

우리 이방인은 그저 백부당만부당 그저 심판은 아예 따 놓은 당상이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도 못 보는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되니

그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실로암소경 사건입니다.

정작 소경 그것도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소경은 율법이 시온에서 나와서

자신의 어두운 눈을 가루로 만들어 뿌사 버리는

죄를 심판하시는 거치는 돌을 보는 반면에

 

정작 성경박사라고 자부하는 자들은 아무리 봐도 율법이 시온에서 나오는 것 전혀 못 보고

도리어 율법 지킬수 있냐의 여부로 태생 자체가 어두운 실로암소경은 아예 따놓은 당상으로써 죄인이기에

단절이기에

거룩한 말씀인 율법이 실로암소경에게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기에

그저 신학 놀이개로 죄를 연구하는 실험자재로써 예수님을 시험하는데 이용했다 말이죠

 

그런데 결과는 그 성경박사인 바리새인이 글쎄 소경이라는 진단을

시온에서 나온 율법이 탕탕탕 규정해 버리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되니 바리새인 그 사람들 개인을 공격하는게 아니라

바리새인 곧 유대인 전체를 하나의 높은산에 산당을 지은 종교세력집단으로써

결집했냐? 허리에 띠 동여맸냐? 라고

 

이들 애굽왕과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받듯이

유대인을 장악한 마귀와 그의 똘마니인 마귀자식인 바리새인을 가지고서 영광받으시는

거치는 돌 앞에서 우수수 낙엽떨어지듯이 추풍낙엽이 되더라 말이죠

 

졸지에 번조 위기의 순간이 되었기에 그들은 화를 내면서

대중들을 선동하기 시작하더라 말이죠

 

자 이것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에

그들이 결집을 하지

자신들이 하나님을 저주하고 힘써서 모여든게 아니다는 겁니다.

거치는 돌이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깡패들이 모여주어야만 그 마귀들을 통해서 영광받는다 말이죠

즉 아무리 모여본들 이미 승리한 십자가의 피 은혜를 막을 길이 없다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저들은 더더욱 완벽함과 완전함을 갖추어서 무장하더라 라는 겁니다.

그래야 신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손에 피를 안 묻히는 모습을 갖추어서

저 이단 예수를 심판하고 저주하는데 성공하고자

얼마나 답답했으면 옷을 찢으면서 참람한 말 곧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소리 안 들은 귀 될려고 금식 회개를 하더라 라는 겁니다.

 

종교 답죠

끝까지 선함을 추구합니다

그래야 신이시여 나를 도와주소서 라는 기도에 응답하도록 구색을 갖추거든요

 

그것에 반해 예수님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도움을 청하는 종교적인 것을 추구하는게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선언해 버리니까

저쪽이 더 좋아라 할만한 소리를 아예 대 놓고 하니

마음 푹 놓고 죽이도록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이미 승리했기에 끝에서 보는 시선

미래완료에서 보는 시선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저쪾이 더더욱 그 완벽함을 추구하도록 착각케 만드는 것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인간이 율법을 쥔 악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율법을 쥐고 거룩한 율법을 지키면 지킬수록 더더욱 악마가 되는 것을

율법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외친 다윗을 통해서 봤따 말이죠

 

정직한 영이 없는데 자꾸 있다고 하니 도리어 소경이고

정직한 영이 없어서 새 영을 달라고 하니 주님이 고치시는

드디어 죄인 하나 돌아오고

드디어 환자를 만나 자신의 의술을 자랑할 수 있게 되는 기능을 펼치시는데 있어서

의사만을 보고서 환자는 벌벌벌 떪으로써 고침을 받는다 말이죠

세상 그 어떤 누구도 나를 환자로 규정하는 자는 의사 밖에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율법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안식일을 지키는 자에게서 나오는 안식은 엉터리이다 말이죠

 

시온에서 나오는 율법 만이 모조리 다 부서뜨린다 말이죠

안식의 주인에게서 나오는 그 안식만이

평화 곧 전쟁의 종식을 가져온다 는 겁니다.


(2:1, 개역)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2, 개역)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2:4, 개역)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칼 연습, 군사훈련을 안 한다는 겁니다.

이미 다 박살나버렸기에

심판받았기에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온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케 된다 말이죠

? 하나님은 하늘 보좌에 있으니까

 

지근 지근 빫아서 사랑 하신다 말이죠

 

(3:17, 개역)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3:17, 새번역) 주 너의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신다. 구원을 베푸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너를 보고서 기뻐하고 반기시고, 너를 사랑으로 새롭게 해주시고 너를 보고서 노래하며 기뻐하실 것이다. /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을 따름. , '그는 잠잠할 것이다'

 

잠잠히 사랑 하시며

 

이 부분을 이야기 하면서 갑자기 떠오른 내용이 입이 건지러워서 참았는데

지금 말합니다.

 

곧 잠잠히 고요히

원수 만들기

죄인 만들기 하시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여리고성 돌 때 나는 광야에서 여호와를 열 번 원망한 죄인입니다 라고

하루에 한 바퀴씩 도는 겁니다.

 

이것이 일곱인처럼 나는 뭘 해도 죄인임을 주님의 고요하심 땜에

즉 주의 보좌에 주께서 앉으심 때문에

온천하가 벌벌 떨면서 요동하듯이 고요하더라 라는

그 증상물로써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뺑뺑이 돌더라 라는 겁니다.

 

자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함으로써

그 상한심령이 된 죄인의 기도인 부르짖음으로 인해

이제 저쪽 애굽을 치는 근거가 되는 겁니다.

니 왜 우리 아이를 때렸냐 라고

졸지에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이 된다고

 

신들의 전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전쟁 개시 라고 나팔을 불 듯이

 

매일 6일 동안 하루에 한 바퀴씩 돌다가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7바퀴를 돌면서

전쟁 시작도 안했는데 이미 전쟁승리했다 라고 나팔을 뿌뿌 불더라 말이죠

희년을 선포하는 겁니다.

죄 용서 받았다고

주의 은혜를 외치며 피 용서를 노래하는 겁니다.

 

아니 여기서 십일조를 드렸다는 둥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그런 완전함을 내세울 꺼리가 되는 상황이던가요? 전혀 없어요

그런데 뿌뿌뿌 라고 죄용서 받았다고 희년을 외치니까

 

손하나 까딱한거 없는데

나팔소리로 인해 여리고성 그 배경에서는 가장 견고한 성이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높은 산에 산당을 지었다고

역사적으로 가장 대중적이고 가장 인간들의 답답한 한풀이를 해결해주고자 봉사하는

그 종교들이 높은산 견고한 성들이 와르르 무너지더라 말이죠

 

이것이 구약의 맛배기 샘플들이

신약의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에서 실상으로써 펼쳐지고

다시 그 혼인잔치의 십자가의 승리를 무한반복으로써 계시록에서 실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을 두려워 벌벌 떨면서 무서워 놀래서 피해야 할까요?

바로 예수님을 무서워 하며 그 분에게로 피하라 라는 겁니다.

 

율법을 봉했고 얼굴을 가리우시는 그 분에게 우리는 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 제대로 심판하시는 분이 제대로 구원하실 창조주 일곱이시니까 말이죠

 

그래서 우리는 이 모든 상황들이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으로써 봐야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미 다 끝난 완료에서 보게 되면

화낼꺼도 없고 분히 여겨서 격분 곧 번조(煩燥)하여

자기 왕 자기 하나님을 저주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미 다 이루어졌기에 완성이 되었기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뭐가 답답해서 자기 울분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고 가인처럼 살인을 하느냐 말이죠

 

그러니 미완료에 놓여진자는 이 의문의 반복에 빠져

시치프스처럼 계속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반복하는 겁니다.

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지지 않았기에 말이죠

 

자꾸 자기자신에게 완전함 완벽함을 바라기 때문에

자기를 자기가 해꼬지 하듯이 자해를 하듯

남에게도 기대를 잔뜩하면서 완벽을 요구하니까

희년의 잔칫날이 졸지에 의문의 반복인 전쟁터가 되어서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그런 것들로 자랑하게 되니

해체 될 것 뻔하다 말이죠

 

이것 조차 보여주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다 이루심 때문에 보여주시기에

남은자는 이 남겨진 씨가 떳다라는 그 이유 하나 만으로

미래완료가 덮쳐져서

평준화 되어서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루에 한 바퀴 돌면서 법궤 언약궤를 메고서
나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10번씩이나 원망한 죄인입니다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라고
그 증거가 여기 세 가지 물증이 있습니다.

꼬끼오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

꼬끼오 아론의 싹난 지팡이

꼬끼오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렇게 회개를 곧 심판주로부터 심판받아 마땅한 원수임을 알고 상한심령으로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새 영을 달라고 뺑뺑이 도는데

아니 글쎄 일곱째 날에 용서 해 주셨다고 기뻐 나팔 부는 것이

 

저쪽 우리가 늘 두려워 하는 힘의 집결지 여리고성 최신무기 신상품들이 다 와르르

이 회개의 눈물(성도의 기도)과 어린양의 보좌에서의 고요함(잠잠히 사랑, 3:17)으로

천지가 요동하면서 여리고성이 무너지듯이

세상의 모든 권력

모든 높은 산들이

이 시온산에서 나오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 앞에서 거친 돌 앞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이것를 목격하는 자가 증인

 

십자가의 피의 증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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