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악한 유다를 치시는(징계) 여호와, 다윗의 위와 한 아기 (9: 8-21)

 


(
9:6, 개역)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9:7, 개역)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9:8, 개역)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9:9, 개역)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9:10, 개역)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9:11,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9:12, 개역)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9:13, 개역)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9:14, 개역)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9:15, 개역)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9:16, 개역)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9:17, 개역)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9:18, 개역)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9:19, 개역)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9:20, 개역)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9:21, 개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9:8, 새번역) 주님께서 야곱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를 것이다.

(9:9, 새번역)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마침내는 알게 될 터인데도,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말하기를

(9:10, 새번역) "벽돌집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다시 쌓고,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을 대신 심겠다" 한다.

(9:11, 새번역) 이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르신의 적을 일으키셨고, 그들의 원수를 부추기셨다.

(9:12, 새번역) 동쪽에서는 시리아 사람들이, 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입을 크게 벌려서 이스라엘을 삼켰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9:13, 새번역) 그런데도 이 백성은 그들을 치신 분에게로 돌아오지 않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지도 않았다.

(9:14,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머리와 꼬리, 종려가지와 갈대를 하루에 자르실 것이다.

(9:15, 새번역) 머리는 곧 장로와 고관들이고, 꼬리는 곧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들이다.

(9:16, 새번역) 이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잘못 인도하니, 인도를 받는 백성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

(9:17,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의 젊은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경건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 사해 사본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기뻐하지'

(9:18, 새번역) 참으로 악이 불처럼 타올라서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를 삼켜 버리고, 우거진 숲을 사르니, 이것이 연기 기둥이 되어 휘돌며 올라간다.

(9:19, 새번역) 만군의 주님의 진노로 땅이 바싹 타버리니, 그 백성이 마치 불을 때는 땔감같이 되며, 아무도 서로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9:20, 새번역) 오른쪽에서 뜯어먹어도 배가 고프고, 왼쪽에서 삼켜도 배부르지 않아, 각각 제 팔뚝의 살점을 뜯어먹을 것이다. / 또는 '자식의'

(9:21, 새번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먹고,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고, 그들이 다 함께 유다에 대항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4:15, 새번역) 『⑤"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 9:1;2

 

 

지난 시간에 미디안의 날과 한 아기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었는데

계시록 녹음에서 보충설명을 했습니다.

 

다윗의 위란 다윗이 있고 그 다윗이 앉는 왕자리 보좌가 따로 있는게 아니라

새번역에서는 그런 느낌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그게 아니라

다윗 자체가 의자가 되어서

그 의자에 한 아기가 앉는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아니 이것부터 먼저 이해가 되신다면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성전 곧 성령의 전, 교회이다는 겁니다.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2:22, 개역)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예수님이 거하실 안식처 라면(안식의 주인과 손마른자와의 관계)

그 거처가 되지 못하는 안식일만 지키는 완악하고 교만한 자라는

거하시지 못하는 자들을 대조하여서 그 차이로 한 세트를 구성 하는 겁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교만하고 완악한 이스라엘입니다.

 

자 그럼 여기서 이 이스라엘을 그냥 넘어가버리고

내어버려두시고

저 이방인처럼 냅따 간섭도 안하시고 징계도 하지 않고 치시지도 않으면 그만 아닐까요?

오늘 나오는

 

(9:11,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9:12, 개역)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하나님의 원수인 르신(앗수르), 북동쪽의 아람, 남서쪽의 블레셋

이들의 교만과 완악은 이스라엘보다 더 심한 자들인데 왜 이들은 안 치시고

도리어 이들을 몽둥이로 삼아서 이스라엘을 치실까요?

 

바로 이것이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차이점으로

 

치시는 여호와를 통한 이스라엘의 관계성을 전하느냐 못하느냐 라는 점입니다.

 

당연히 거짓선지자는 이 치시는 여호와를 못 증거합니다.

하나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아 그럼 치시는 여호와를 증거하면 참 선지자이겠군요 라고

그때 이사야 때와 달리 지금은 징계를 하심으로써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를 이야기 하는

현대 삯꾼 목자들이 참 많습니다 돈 뜯을려고 또는 성추행할려고 말이죠

 

참선지자가 그렇게 문자 그것도 신약에 나오는 문자를 따와서 그대로 한다고 해서 될 것 같으면

지나개나 다 참선지자가 되겠지요

 

차라리 뭘 해도 나는 거짓선지자입니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교회에서 쫏겨날꺼 아니겠습니까?

 

그런 심정으로 복음을 증거해보세요

교회가 박살나고 복음만 남겠지요

 

즉 이 말은 어떻게 해서든 눈에 보이는 교회가 먼저이지

복음이 먼저가 아니다는 겁니다.

거짓선지자에게서는 말이죠. 강도의 소굴이다는 겁니다.

 

자 그런데 이사야는 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는 치시는 여호와를 말함으로써

거짓선지자가 때려죽어도 말 못하는 이 교만하고 완악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는 주님을 증거할까요?

 

이것은 한 아기가 떳기 때문에

다윗이라는 자리에 앉기에

다윗도 죽고 없는 판국에 이 다윗이 자리가 되듯이


이제는 누가 다윗이라는 자리로써

한 아기가 앉는다는 겁니까?


정작 다윗때에 한 아기가 나타나서 앉으시지

그때는 눈으로 보기에는 안 앉고

다윗도 없는데 어떻게 앉냐 말이죠


차라리 저 새번역처럼 다윗이 앉았었었었었던 그 자리

그 보좌 그 왕좌는 지금도 있으니 거기에 앉으면 되지

왜 진노와 치심이라는 심판성을 가지고서 구지 죽고 없는 다윗을 찾아서

그 다윗에게 앉겠다고 하시느냐 말이죠

 

하나부터 열까지 말이 되는게 단 하나도 없더라는 겁니다.

 

차라리 거짓선지자는 말이 되요

거짓선지자의 특징은 항상 말 되는 소리만 한다는 겁니다.

곧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절대로 멸망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참선지자 이사야는 아예 정반대로

이스라엘은 멸망한다는 겁니다.

그 멸망을 위해서

르신 곧 앗수르가 준비 되어 있고

아람을 준비 해 뒀고

블레셋을 준비 해 놨다는 겁니다,

하나도 못 이기는 판국에

서이나? (셋이나?)

 

차라리 어차피 죽고 멸망하는 판국에 너이나(넷이나) 다섯이나
더 많은 민족으로 멸망시키지 않냐 말이죠

서이(셋)면 충분합니다

일곱이든 아홉이든 이 셋 속에 다 들어가는 이중반복에 속하는 겁니다.

 

즉 심판성이 완벽하다는 겁니다

곧 이것이 거룩성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라는 말씀은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거룩하라 깨끗하라 거룩을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완전한 심판을 퍼부음으로써 부정함이 제거되는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라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미래완료를 종말을 미리 땡기는

회개를 말하는 겁니다.

물론 성화론자들의 귀에는 회개도 지킬려고 하겠지만

회개하지 않으면 자꾸 완벽해(회개의 달인이 되어) 질려고 한다 말이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말이죠

 

남들은 징계 받지 않아도 이스라엘만큼은 징계하신다는 것은

거룩성이 늘 함께한다는 거죠

 

자 눈치 채셨지요

맞습니다.

다윗 개인에게 퍼붓던 그 거룩성(완벽한 심판성)

이제는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되는 겁니다.

 

? 한 아기가 떳기 때문에

다윗이 이 꺽으신 뼈로 기뻐했듯이

이 기쁨의 소식이 이스라엘 전체로 확대되는 겁니다.

 

그럼 반드시 다윗과 사울왕이 한 세트를 구성했듯이

반드시 사울왕과 같은 거짓선지자의 무리들이 반드시 도출이 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이 징계를 그들은 무시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약속과 무관한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과 무관하게

반드시 자기자신 쪽에서의 완벽함을 갖추고자 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것이 바로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는 둥

맏아들(탕자 형)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둥

또는 성전에 기도하러 온 두 사람 중 바리새인처럼

십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다는 둥, 절대로 막살지 않았다는 둥

또 율법사처럼 큰계명이 두 계명이 뭐냐고 예수님에게 물어서

그 두 계명을 지켰다고

그래서 구원 얻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이런 것들이 바로 교만과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완벽함을 갖추었다고 우기는 회개하지 않는 모습으로써

오히려 예수님은 그런 완벽함을 갖추고자 하는 자에게

그 반대인 날 때부터 소경

창녀 세리 강도의 친구

막사는 자들에게서의 포도주를 즐기며 먹기를 탐하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써

저들의 상대적인 자들을 내세우면서

십자가의 지혜를 펼치시는 겁니다.

어중이 떠중이들을 말이죠.

성화론자들 중에 누가 이런 지혜를 펼치겠습니까?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약속과 무관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와 무관한 모습을

치시는 여호와를 통해서

징계를 통해서

다윗이 그래서 까불다가 작살이 났듯이

다윗을 지근 지근 밟아서 드디어 그 딱딱한 다윗이라는 의자를

부들 부들한 부드러운 의자로 맹글어서, 죄인 만들어서,
인애와 자비만 바라는 의자 맹글어서


그 위에 한 아기가
(꺽으신 뼈가) 앉듯이

이스라엘을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오직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도록 말이죠 다윗처럼 이스라엘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안 그러면 자꾸 완벽을 추구할려고 한다 말이죠

꺾으신 뼈의 반대인 긍휼과 인애 자비의 반대인 번제와 제사를 추구할려고만 할꺼다 말이죠

그 흐릿함과 꺽으신 뼈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십자가와 대조를 자신만만하게 하시는 겁니다.

 

약속이 담겨진 그릇이 이스라엘인데

자꾸 다른 이방인처럼 약속이 안 담겨지고 자꾸 진노의 그릇처럼

행함을 완벽함을 교만함을 완악함의 그릇이 되고자 하기 때문에

약속의 그릇으로 만들고자 약속의 땅에서 쫏아내시는 겁니다.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고서도 약속으로 인한 소산물을 먹도록 되어 있는 약속의 민족이

(마 6:25, 개역)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 6:26, 개역)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마 6:27, 개역)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마 6:28, 개역)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마 6:29,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졸지에 약속을 거부하고 종말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거부하고

자꾸 완벽함을 갖추어서 땅의 소산물을 먹고자 하니까

긍휼 곧 십자가의 피 용서로 값없이 가 아니라
자꾸 먹을 자격 조건 갖추어서 먹을려고 하니까 

딱딱하고 거친 음식들로써

약속 자체가 이스라엘을 약속의 땅에서 쫏아내는 겁니다.


은혜가 아닌 행함의 여부로 계산하고
7번 용서했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는 둥


이것이 약속과 무관한

은혜와 무관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과 무관한

한 아기와 무관한


교만하고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회개치 않는 완벽을 추구하는 모습으로써

껍데기만 약속의 민족이요 이스라엘이지

정작 애굽의 사고방식으로 피라미드 짖는거랑 뭐와 다르냐 말이죠

괜히 거인 애굽과 어린아이 이스라엘을 대립 시킨게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만 이라고 말만 번드르 하지

밑에서는 계산하기 바쁘고 조건 갖추기 바쁘다 말이죠

 

그래서 척박한 땅

활과 화살이 없으면 못 사는 짐승을 잡아야지만 살 수 있는 땅을 만들어서

쫏아내시는 겁니다.

 

즉 여전히 주님은 약속만을 고수하시는 거죠

그래서 다윗을 세 번 부인케 만들 듯이 쓰리 희생번트 우리아 장군 밧세바 이름 없는 아기 라는

닭의 세 번 대신 울어주는 그 눈물로 그 회개로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는 교만한 목을 꺽어서

죄인 만들어서

드디어 부드러워진(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입니다. 화로다 화로다) 의자로 만들어서 거기에 한 아기가 앉듯이

다윗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를 다윗처럼 죄인 만들어서

약속이 담겨진 그릇으로

의자로

처소로

교회로

신부로 삼겠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끝을 곧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아는 끝을 미리 앞당겨 버린자는

곧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끌어 당겨버린자는

내가 완벽해져야지만 살아가는게 아니라

오로지 주님이 원하시는 마음은 상한심령이라는 것을 알기에

자신의 능력으로 행함으로 사는게 아니기에

십자가의 피 용서가 붙잡아 주심이기에

그 한 아기 곧 꺾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겁니다.

 

마치 불의한 청지기가 오로지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산다는 것을 알기에

주인에게 쫏겨나든 말든 자칭 빛의 아들들이 불의하다고 정죄를 하든 말든

이미 끝을 미리 당겨 버린 것처럼

앞으로 벌어질 모든 세상만사가 바로 이 십자가의 피 용서 중심으로만

다 이루었다 라는 종말 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알기에

탕자처럼 아버지의 품만 긍휼만 바라보는 겁니다.

 

탕자가 신약에 갑자기 뚝 하고 떨어진 개념이 아니라

구약의 야곱을 보세요 사기꾼 아닙니까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요


반면에 에서는 보세요 아버지 말대로 시킨대로 합니다
.


또 다윗을 보세요 우리야, 밧세바, 솔로몬 형, 
그렇게 우리야 장군을 고의적으로 죽음 속에 집어넣죠
철저하게 계획해서 미필적고의로 살인을 하더라 말이죠

자기 손 하나 까딱 안하고 권력으로

누구처럼 닭그네처럼 내가 살인을 안했는데 칼을 손 댄적도 없는데 어떻게 내가 죽였냐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거죠 손 안대고 죽이는


유대인이 빌라도 손을 빌려 예수님을 죽일려고 얼마나 바랬냐 말이죠
빌라도도 거기에 안 말려들려고

손에 피 안 뭍히겠다는 유대인의 속셈을 알았다 말이죠


아무튼 그런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난 다윗과 대조적인 사울왕을 보세요

밤낮으로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하지?

자신은 어떻게 하면 이스라엘 왕 답게 행동할까 라는 생각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 다윗이 눈에 까시다 말이죠

다윗이 얼마나 율법을 어기기를 기다렸었냐 말이죠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으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다윗을 심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다 말이죠

이게 교만이요 완악함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에게 달려드는 바리새인들이 다 이런 마음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 주변인 85명을 다 죽여버리는 겁니다.

감히 율법을 제사장이 어겨서 다윗에게 진설병을 주다니

거룩한 율법을 어겼다 말이죠

 

(삼상 21:6, 새번역) 제사장은 그에게 거룩한 빵을 주었다. 주님 앞에 차려 놓은 빵 말고는, 다른 빵이 달리 더 없었기 때문이다. 그 빵은 새로 만든 뜨거운 빵을 차려 놓으면서, 주님 앞에서 물려 낸 것이었다.

(12:3,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굶주렸을 때에,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를,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삼상 21:6

 

(12:5, 개역)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12:6,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12:7, 개역)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12:8, 개역)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안식의 주인이 안식을 범해도 죄가 안 된다 말이죠 제사장도 마찬가지

즉 번제와 제사를 지키는 사울왕이 아닌

인애와 자비를 바라는 다윗왕을 사랑했다 말이죠

이게 바로 탕자입니다 곧 회개자로 태어난 자 이다 말이죠


그런데 맏아들은 회개자로 태어나지 못했기에

회개를 지키기에 달인이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는 완벽한 자가 될려고 하는

사울왕과 형 에서가 아니냐 말이죠

 

이들은 손마른자로써 안식의 주인이 필요없는

건강한 자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것 밖에 내세울 것 없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
3:5, 개역)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3:5, 새번역)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굳어진 것을 탄식하시면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말씀하셨다. "손을 내밀어라." 그 사람이 손을 내미니, 그의 손이 회복되었다.

(3:5, 공동)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3:5, 우리말) 예수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한 것을 마음 깊이 슬퍼하시며 그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손을 펴 보아라.” 그가 손을 쭉 내밀자 그 손이 완전하게 회복됐습니다.

 

 

자 왜 징계 곧 여호와의 진노를 개같인 이방인 보다 이스라엘에게 혹독하게 하시는 겁니까?

약속에 대해서 일체 양보하시지 않겠다는 겁니다.

종말 곧 끝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대해서 말이죠

생명책에 기록된 이것은 이것 밖에 없거든요 예정된 것은 이것 뿐이예요 십자가의 피

그런데 바리새인이나 사울왕이나 형 에서나 맏아들이나 이 약속을 쉽게 쉽게 양보를 해 버리더라 말이죠

장자권을 소홀히 여기듯이 이 십자가를 소홀히 여기니까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걸림돌이 되어서라도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서

이 한 아기 곧 꺾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다윗의자가 되어야만

이스라엘을 살 수가 있는데

정작 바리새인들은 다윗의자가 때려죽어도 되기 싫다고 하니

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아서 망하더라 말이죠


이사야 때는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셔서 간섭 징계라도 하시지만

신약의 유대인 때는 내어버려두사

누구 하나 가루로 징계로 간섭으로 만들어주지 않는 내어버려 두심이 더 무섭다 말이죠


구원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하라 라고 했는데

이것 마저도 완악함으로 완벽함으로 할려고 하니

이들에게는 십자가가 그저 거리끼는 걸림돌

구원달성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기에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에 최대의 걸림돌이 되더라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이 참선지자의 치시는 여호와를 썩은 이 뽑듯이 뽑아낼려고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일려고 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소용이 없습니다. 이미 한 아기가 떳다 말이죠

그럼 이사야는 불의한 청지기처럼 이 한 아기만을 바라보면서

종말을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증거하는 자로써

기생라합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 곧 거짓말처럼

이스라엘은 이미 다 완성이 되었다고 더 이상 손 댈것이 없다고

바닥을 뜯어내어서 기생라합처럼 집문서 국가문서 토지문서 다 여호와께 팔아 넘기는 기생처럼

저들에게 즉 거짓선지자와 합한 절대로 치시는 여호와가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은 절대 망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빛의 아들들의 상대적인 불의한 청지기인 이사야의 주장에 반발하는 모습으로써

이미 완료 되었기에 뜯어내어도 망해도 상관없다는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이는 겁니다.


여기에 선봉자가 바로 사도바울 아니였습니까
? 그런데 그자가 도리어 예수를 증거하는 이단이 되었어요

빛의 아들들이라고 주장하고자 스데반도 죽이고 예수 이단 지구 끝까지라도 쫏아가서 죽였는데

그랬던 당사자가 도리어 나사렛 이단 예수를 증거하는 이단이 되었으니 이게 바로 구체적 보편적 진리가 아니고 무었이냐 말이죠


이 걸림돌이 도리어 살리는 돌이다 말이죠

저들 거짓선지자의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는 주장에서 빼내어서

이미 예수 안에서 십자가의 피 용서로 다 이루었다는

일곱이 떳음으로 인해 열둘이라는 보석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는

새이스라엘의 완성을 봤기에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은 망해도 상관 없다고

좀전 3초전 까지만 해도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하면 안된다고 이단 예수 잡아다 죽이고

절대로 예루살렘 성전 무너지면 안된다고 사수하고자 예수라는 참성전을 무너뜨려 죽였는데

 

그 십자가가 도리어 머릿돌이 되는 12보석의 머릿돌이 되는 참성전으로써

우리 눈에 기이하더라 말이죠

 

(21:42,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에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12:11, 개역)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하도다 함을 읽어 보지도 못하였느냐 하시더라

(20:17, 새번역)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시고 말씀하셨다. "그러면,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하고 기록된 말은 무슨 뜻이냐? / 118:22 또는 '모퉁이 돌'

 

어떻게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머릿돌이 되느냐 말이죠

이것이 약속이요 믿음인데

인간들은 행함으로 성전을 건축할려고 하니

거룩한 돌(완벽한 성화론자, 건강한자 의인 바리새인)으로만 짖고자 했던 그 성전에

쓸모 없는(흑암의 백성, 고아 과부, 창녀 세리 강도, 날 때부터 소경) 돌을 버렸는데

그 쓸모 없는 돌 곧 성도를 가지고서 참성전을 짖고서 그 참성전의 머릿돌이 되시더라 말이죠

 

자 그럼 이스라엘은 이미 한 아기가 떳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이미 다 완성이 되었기에

이미 천국에 와 있는 백성으로써 바벨론에 포로 당하는 징계를 받아도 상관없고

나라 멸망해도 상관이 없는

약속으로부터 사로잡힌바 된 다윗의 자리 이다는 겁니다.

 

다윗의 자리를 내가 스스로 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꼼꼼하게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해 주신다 말이죠

 

그럼 물어봅시다 돌아올때에

약속이 이제 약속의 땅을 다 청소했다고 이제 돌아오너라 라고 했을때에

아니 바벨론으로부터 독립운동을 해서 돌아왔습니까? 광복을 맞이 했나요?

아니잖아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돌아왔다 말이죠


성전건축 조차도 고레스가 하지 무슨 재산이 있어서 무슨 나무가 있어서 성전건축하겠냐 말이죠

물론 그 성전 또한 허물어져야만 한다 말이죠


모조리 예수님이라는 참 성전 실상을 말하기 위함이지

모형은 예수님을 가리키는 몽학선생일 뿐인데

자꾸 모형에 또 또 또 집착하게 되니

주의 전을 사모할때마다 주를 삼키는 식이다는 겁니다.

두 주인의 두 소욕이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한다는 겁니다.

 

자 우리의 인생 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다 라는 그 이유로 우리는

저런 과정을 격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못 볼 때 마다 우리는 우리 힘으로 이런 사태를 벗어나고자 할려고 하는

완악하고 교만한 마음에

한 아기가 이 사태를 펼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오로지 그 분의 긍휼만을 쳐다봄으로써

 

이 꺾으신 뼈로만 기뻐 즐거워하는 약속이 담겨진 그릇으로 삼고자 하시는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고전 11:32, 개역)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12:6, 개역)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12:7, 개역)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12:9, 개역)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12:10, 개역)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3:19, 개역)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