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 같이 단 말씀 (10: 8-11)

계 29 배에는 쓰나 입에는 꿀 같이 단 말씀 (계 10, 8-1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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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개역) 세세토록 살아계신 자 곧 하늘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로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10:7, 개역) 일곱째 천사가 소리 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10:8, 개역) 하늘에서 나서 내게 들리던 음성이 또 내게 말하여 가로되 네가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섰는 천사의 손에 펴 놓인 책을 가지라 하기로

(10:9, 개역)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책을 달라 한즉 천사가 가로되 갖다 먹어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10:10, 개역)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갖다 먹어버리니 내 입에는 꿀 같이 다나 먹은 후에 내 배에서는 쓰게 되더라

(10:11, 개역) 저가 내게 말하기를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임금에게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하더라

 

(10:7, 새번역) 일곱째 천사가 불려고 하는 나팔 소리가 나는 날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 예언자들에게 전하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질 것이다."

(10:8, 새번역) 하늘로부터 들려 온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가서,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펴 있는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라."

(10:9, 새번역)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로 가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니, 그는 나에게 말하기를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것은 너의 배에는 쓰겠지만, 너의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습니다.

(10:10, 새번역)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그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서 삼켰습니다. 그것이 내 입에는 꿀같이 달았으나, 먹고 나니, 뱃속은 쓰라렸습니다.

(10:11, 새번역) 그 때에 "너는 여러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왕들에 관해서 다시 예언을 하여야 한다" 하는 음성이 내게 들려 왔습니다.

 

 

지난 시간에 하나님의 비밀이 참선지자의 노선으로써 복음이 내려온다고 했습니다.

즉 복음이라는 기쁜소식은

곧 희년은 미디안의 날을 거쳐서 그 탈취물을 먹는 날이다 말이죠

그 희년 곧 복음은 그래서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자에게만 들리는 기쁜 은혜의 날이 되지

곧 죄인에게만 은혜가 되는 날이지

의인에게는 하나도 안 기쁜날입니다.

 

은혜 곧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인데

자기의 능력으로 성취하여 의를 쌓은 자에게는 도리어 복음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되는 겁니다. 마치 애굽왕에게 앗수르에게 미디안에게 말이죠

그 속에서 건져내는 것이 희년인 복음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구원은 그냥 구원 어떻게 하면 얻습니까 라는 것이 안된다는 거죠

뭔가 갇혀 있다는 겁니다.

그 갇혀짐 속에서 포로된 상태인데 내부에서 조건을 갖추어서 구원이 아니라

구원을 받을려면 뭘 행해야 합니까 라는 부자청년이 아니라

그런 구원 받아본들 그 다음에 또 모호해지는데

 

갇혀진 상태인 손마른 자를 안식일날 고쳐버림으로써

안식일 지키는 자들에게서 포로된 자를 빼내시는 건지시는

안식의 주인을 만나는 것이 바로 희년이 되는 겁니다.

 

자 하나님의 비밀은 바로 이렇게 두 패로 가르심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말씀을 지키는 자들인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자에게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타 넘어오심으로써

저들에게서 포로된 정죄당하는 자들을 빼내는 것이 하나님의 비밀이듯이

이렇게 두 패로 나누심이 하나님의 비밀인 십자가의 피 이듯이

이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롭고 똑똑하다는 자를 폐하시는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

곧 십자가의 전쟁을 벌리시는 겁니다.

 

다 이루었다의 전쟁 말이죠

 

그러니 참선지자는 거짓선지자의 차이성으로써 치시는 여호와를 신체에 담아서 증거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짓선지자는 절대로 치시는 여호와를 못 증거하죠

 

오늘 나오는 배에는 쓰나 입에는 단 말씀 곧 하나님의 비밀을

참선지자는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이미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하나님의 비밀)를 증거하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내 대신 하나님의 저주를 받으신 주님의 인애와 자비다 말이죠

그런데 그 앞에서 십일조 내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어릴적부터 말씀을 다 지켰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것이

다 가루가 되어 부서진다 말이죠

어딜 감히 안식의 주인 앞에서 안식일 지켰다 라는 것을 내세우냐 말이죠

만약 내일 못 지키면 우짤려고?

그런 의문의 모호한 것을 들고오지 말고

차라리 십자가의 밝히 보이는 또렷함을 보자 말이죠

 

그 밝히 보이는 또렷함이란

내가 당해야 할 심판을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고자 화목제물이 된 분은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단번에 드린 제사이다 말이죠

 

결국 심판이 오히려 또렷하다는 겁니다.

이 심판이라는 전쟁이 종식됨으로써 화평 화목이 된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곧 원수가 없데요

죄인이 없는데

원수가 없는데 어떻게 탈취물을 나누느냐 말이죠

 

그래서 참선지자는 이 심판성 곧 완벽한 제대로 된 심판성을 담은 그렇기에 완벽한 거룩을 담았기에

참선지자들은 말씀이라는 책을 먹음으로써 배에는 쓰고 입에는 단 쓰디쓴 말씀으로 인해

심판을 증거하는 겁니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음으로써 아내가 죽어도 울수 없고

이스라엘의 심판을 말하고자 좌로 390일 누워야 하고 우로는 40일 동안 누워라 라고

쓰디쓴 혹독한 심판으로 이스라엘의 죄악을 담당하는 겁니다.

 

(4:3, 개역) 또 전철을 가져다가 너와 성읍 사이에 두어 철성을 삼고 성을 향하여 에워싸는 것처럼 에워싸라 이것이 이스라엘 족속에게 징조가 되리라

(4:4, 개역) 너는 또 좌편으로 누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당하되 네 눕는 날 수대로 그 죄악을 담당할지니라

(4:5, 개역) 내가 그들의 범죄한 햇수대로 네게 날수를 정하였나니 곧 삼백구십 일이니라 너는 이렇게 이스라엘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고

(4:6, 개역) 그 수가 차거든 너는 우편으로 누워 유다 족속의 죄악을 담당하라 내가 네게 사십 일로 정하였나니 일 일이 일 년이니라

(4:7, 개역) 너는 또 에워싼 예루살렘을 향하여 팔을 벗어 메고 예언하라

(4:8, 개역) 내가 줄로 너를 동이리니 네가 에워싸는 날이 맞도록 몸을 이리 저리 돌리지 못하리라

 

 

자 이렇게 사도요한이 에스겔처럼 말씀을 먹는 것은

본인이 그렇게 쓰디쓴 말씀을 먹고자 평상시에 바랬던 것이 아니다 말이죠

곧 사명인데 이 사명을 감당하고자 자격의 조건을 갖추지 않았다는 겁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명을 감당할려고 한다면 미리 자격 조건을 갖출려고 할꺼다 말이죠

마치 탕자의 형 맏아들처럼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는 조건을 갖춘다거나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그러나 쓰디쓴 말씀은 그 어떤 준비성도 없이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만약 미리 준비한 자세를 갖추어서 사명을 감당케 되면

구원은 더 이상 하나님의 비밀이 아니요

그렇게 되면 바리새인의 기도처럼 저 세리와 같지 않은 자기가 구원 받아 마땅하게 되니

이건 인간의 아이디어로 충분히 구원받으니 이것이 무슨 하나님의 비밀이 되겠냐 말이죠

마귀도 끌어들일 필요도 없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도 필요도 없이

인간의 믿음으로 충분히 구원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이것이 유대교입니다.

모든 인간의 종교의 대표성인 유대교 곧 666이다 말이죠

 

분명 유대교만 666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종교, 모든 국가도 666이다 말이죠

모든 인간이 다 666이다는 겁니다.

 

그 대표성만 치면 다 치는거다 말이죠

한 놈만 패면 되요.

모든 인간의 지혜와 구원의 아이디어는 이 유대교에 다 나온다 말이죠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거 부수는 겁니다.

 

인간 구원 없어요

모든 종교는 인간 구원이거든요

인간의 모든 지혜는 인간의 꾀, 트릭, 속임수 입니다.

 

그런데 쓰디쓴 말씀 앞에서 인간구원은 다 탈락이 되는 겁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는 그 꾀가, 그 속임수가 다 들통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처럼 헛되고 의문의 반복이 없거든요

 

그럼 복음은 뭐냐? 예수님만 구원하는 겁니다. 이게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약속만 구원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 구원할 뿐입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다 말이죠

떳다는 이유로 그 증상으로 징조를 나타내는 겁니다.

 

이것을 참선지자들은 쓰디쓴 말씀을 먹음으로써 사명을 감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그래서 욥이 재를 뿌리고 머리를 땅에 쳐박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이 옳았다고

나 욥의 구원은 헛됩니다 라고 외치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비밀을 담은 자들은 이 심판성을 증거하는 겁니다.

 

마침 삼손이라는 영화를 2018년 판을 봤는데

보면서 얼마나 우스운게 너무 김종국이랑 닮았는지

얼마전에 김종국이랑 김종민이랑 나오는 티비를 보고

어머니께서 너무 우습다고 했거든요

 

삼손하면 수수께끼가 바로 연관된 의미로 생각나죠

이 수수께끼라는 비밀은

아무도 못 푼다 말이죠

 

에이 결국 풀었잖아 블레셋이 풀었잖아

또 결국 들릴라를 통해서 머리카락이 짤리잖아

이게 무슨 비밀이고 다 풀렸는데

 

풀면 뭐합니까 합격이 안되는데

아버지 말씀을 단 하나도 어긴 적이 없으면 뭐합니까 맏아들은 탈락인데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키면 뭐합니까 근심하고 등지고 돌아서는 데!!

 

그러니 구원을 얻고자 자기 쪽에서 무엇을 뭔들 하고 다 갖추어도

소용이 없어요

그 다음날 또 의문이 되는 겁니다.

구원받아도 소용없어요 또 의문이 된다 말이죠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니깐요

 

의를 갖출게 아니라

죄를 심판 받아야 한다 말이죠

 

시편에서 사람의 구원이 왜 헛된고 하니

죄를 제대로 심판하는 원수에 대한 심판이 없다 말이죠

 

개인 구원이 없기에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제대로 심판하는

원수에 대한 심판을 끌어당기는 것이

바로 참선지자의 사명이다는 겁니다.

 

바로 이 원수가 누가냐 가 시편에서의 찬양인

원수에 대한 승리로써의 찬양인데

원수가 누구인지를 알 길이 없다 말이죠

 

본인 스스로가 원수로써 이 심판을 담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사망 권세를 이기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증상으로써

심판의 자리에 참선지자가 놓여지는 겁니다.

이 쓴 말씀을 먹는 겁니다

 

그러니 소위 자기가 구원받고자 스스로 고난받는 자리에 가는게 아니다 말이죠

그건 오히려 바리새인의 꾀였죠

한 율법사가 큰 계명이 뭐냐고 그 두계명을 자기가 얼마나 힘들게

고난 속에서 지켰는줄 아느냐 라고 한다 말이죠

과연 그런가 보자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못 나누는 부자청년처럼

율법사 또한 영생받는 조건갖추기가 얼마나 헛된지

고난받는 조건 갖추기가 얼마나 속임수인지를 보여주고자

원수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자의 이웃이지

너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했다고 들통나는 겁니다.

그러니 부자청년처럼 등지고 갈 수밖에 없도록 주님께서 떠밀어 버리는 겁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따라와도

주님은 떠밀어 버린다 말이죠

 

내 살과 피를 먹지 않는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이 살과 피를 먹는 자는

죄인 밖에

심판받아 마땅한 원수 밖에 없다 말이죠

 

나는 원수가 아닙니다 라는 자에게는 절대로 이 살과 피를 먹지를 않는다 말이죠

살인자 가해자 원수 죄인이

누가 스스로 될 수 있겠냐 말이죠

 

그 어떤 누구도 막사는 원수가 아니고 싶어요

만약 있다면 쓰디쓴 말씀을 먹여보면 안다 말이죠

 

전 재산을 나누어 준다 라든지

그냥 이웃이 아닌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든지

탕자처럼 아버지로부터 받은 기업을 날려먹고 꿀꿀이 죽 먹고자 아버지께로 돌아온다든지

아니면 불의한 청지기처럼 회계장부 조작을 한다든지

 

한번 해 보라 말이죠

절대로 막살면 안되는 자에게서는 나올수 없는 거다 말이죠

 

상대적인 그 반대의 악마성(의인의 가면을 쓴)을 끌어와서 말이죠

 

개인의 자질과 행동에서는 안 나옵니다.

 

판대기 전체구조에서 나오는데

무슨 수로 악마를 갖추고자 그 원수를 대비할려고 데리고 와서 차이성을 드러내냐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엉터리 원수를 가지고 오더라 말이죠

전제구조로 안보고

개인 구원을 따 낼려고 한다 말이죠

 

사명은 전체구조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감당하고자 에스겔은 옆으로 눕는 징조를 나타내는 겁니다

에스겔은 그저 소모품이요 바둑알일 뿐이지

검은 바둑알이면 하얀바둑알을 못 움직인다 말이죠

전체 바둑판을 운영할 수 없다 말이죠

장기로 치면 그저 그의 사명은 차면 차로 직진 밖에 못해요

졸이면 한 칸 밖에 못하는 사명이다 말이죠

전체를 쥐고서 졸이 차로 변해서 뒤로 못간다 말이죠

 

어떻게 하면 구원얻습니까 라는 질문이 아니라

주여 드디어 나의 죄악을 심판하는 심판주를 만났습니다

내 죄악을 심판하여 주소서 라고 하는 것이

주여 용서해주소서 나는 원수에게 물린자입니다 라는 거다 말이죠

 

이스라엘의 죄악을 왜 이스라엘에게 퍼붓지 않고

에스겔에게 퍼붓냐 말이죠

왜 모든 인간의 죄악을 각 개인인 모든 인간에게 퍼붓지 않고

예수님에게 퍼부어 십자가에 매 달아 죽이시냐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비밀이다 말이죠

 

아바 아버지 하실수만 있다면 이 잔을 이 쓴잔을 옮겨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라고

 

(20:22, 현대인)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곧 마시게 될 고난의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마실 수 있습니다.'

(10:38, 현대인)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마셔야 할 고난의 쓴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아야 할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겠느냐?'

(10:38, 쉬운말)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가 지금 내게 요청하는 것이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나 알고 하는 말이냐? 너희는 내가 마셔야 할 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내가 받아야 할 고난의 침례를 받을 수 있느냐?”

 

(20:17, 현대인)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때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면서 도중에 이렇게 말씀하셨다.

(20:18, 현대인) `지금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서 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손에 넘어갈 것이다. 그들은 나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다음

(20:19, 현대인) 나를 이방인들에게 넘겨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박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3일 만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

(20:20, 현대인) 그때 세베대의 아내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부탁하자

(20:21, 현대인) 예수님께서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저의 이 두 아들을 주님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주님의 왼편에 앉게 해 주십시오.'

(20:22, 현대인) `너희는 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다. 내가 곧 마시게 될 고난의 쓴 잔을 너희도 마실 수 있겠느냐?' `마실 수 있습니다.'

(20:23, 현대인) `너희가 정말 내 잔을 마실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편과 왼편에 앉는 것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미리 정해 놓으신 사람들의 것이다.'

(20:24, 현대인) 듣고 있던 열 제자가 두 형제를 보고 화를 내자

 

 

열제자가 두 형제를 보고 화를 냄으로써 자신들은 안 그런것처럼 화를 내지만

정작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는 역시나 똑같은 마음이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쓴잔을 마시고 죽음을 말하는 가운데서도

우리는 그저 내 구원 내 구원 내 돈 내 축복만 외칠 뿐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에 하나님의 비밀은 우리를 원수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은 이 원수에게 베푸시는 인애와 자비의 피 용서가 된다 말이죠

 

그런데 다들 의의 자리에 앉더라 말이죠

마귀가 베드로를 잡아 오는 모습도

하만이 임금으로부터 상 받는 자리에 앉는 모습도

앗수르가 몽둥이를 쥐고 우상을 파괴함으로써 마치 본인들은 이 우상과 거리가 먼 모습을 갖추는 것도

 

자기 꾀에 자기가 말려들도록 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비밀은 베드로를 원수의 자리에

죄인의 자리에

죽으면 죽으리라의 자리에

환자의 자리에

포로되고 갇히고 억눌린 자의 자리에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인

바로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인 첫사랑의 자리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받는 그 자리에 놓음으로써

 

환자를 부르러 온 의사

죄인을 부르러 온 구원자

바로 기능

이름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내 구원은 하나도 옳지 않죠

오히려 저 구원자가 옳았다는 겁니다

나를 환자 만들고

죄인만들고

원수 만들어서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옳았다고 찬양케 하시니

 

이 하나님의 비밀인 말씀을 쓰디쓴 말씀이 옳았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다 이루었다 라는 그 달고 오묘한 말씀이 떳다는 이유로

사도요한은 쓰디쓴 심판의 자리에 죽으면 죽으리라 라는 자리에

무조건 죄인 중의 괴수의 자리에 놓여짐으로써

환자로써

죄인으로써

원수로써

뭘 해도 나는 아니요

 

주님만 옳고 십자가만 달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나팔이라는 전쟁의 의미입니다.

힘의 전쟁이 아닌

인애와 자비라는 화목제물 전쟁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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