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나팔과 그리스도의 나라가 된 세상 (11:15-19)

계 32 일곱 번째 나팔과 그리스도의 세계 (계 11,15-19).mp3
8.80MB

(11:15, 개역)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1:16, 개역)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1:17, 개역)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1:18, 개역)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1:19, 개역)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11:15, 새번역)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었습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났습니다. "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의 것이 되었다.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다." / 또는 '메시아'

(11:16, 새번역)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 보좌에 앉아 있는 스물네 장로도 엎드려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11:17, 새번역)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던 전능하신 분, 주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님께서는 그 크신 권능을 잡으셔서 다스리기 시작하셨습니다.

(11:18, 새번역) 뭇 민족이 이것에 분개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이 주님의 진노를 샀습니다. 이제는 죽은 사람들이 심판을 받을 때가 왔습니다. 주님의 종 예언자들과 성도들과 작은 사람이든 큰 사람이든 주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상을 주실 때가 왔습니다.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킬 때가 왔습니다."

(11:19, 새번역) 그러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고, 성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습니다. 그 때에 번개가 치고, 요란한 소리와 천둥소리가 나고, 지진이 일어나고, 큰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나팔은 전쟁입니다. 그런데 이 나팔은 원인 있는 결과로써 나팔을 불어 전쟁을 하는게 아니라

그래 되면 또 결과는 유보 유보 계속 해서 유보되는 미완료의 상태이기에

나팔 자체는 이미 끝났어요 라고 끝을 미리 당겨 버리는 전쟁이 바로

언약의 전쟁입니다.

 

반대로 비언약의 전쟁은 결과는 없는채 원인만 대따 갖추다 보니

소돔처럼 주를 위해 죽겠다는

남들의 시선에서 납득이 되는 것들을 잔뜩 모아 모아서

주를 위해 죽겠다고 자기 쪽에서 사랑하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비언약입니다

음녀의 특징이 자기 쪽에서 사랑하겠다는 것이 음녀이듯이 말이죠

짐승의 특징입니다.

 

그러니 결과가 없어요 나팔이 없어요

 

앞의 글에서 감사가 저런 자에게는 없는 겁니다

원인을 갖추니까 결과가 없어요

감사도 없고

찬송도 없다 말이죠

 

그럼 감사나 찬송은 원인 없는 채로 덮쳐지는 겁니다.

 

바로 벙어리 인데 찬송을 해요 글쎄

원인이 없어요

 

반대로 노래 잘 부르는 가수인데

원인은 있는데 도저히 찬송을 못해요

 

네 맞습니다

실로암 소경은 예수님을 보는데

눈뜬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곧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때려죽어도 몰라요

 

찬송요? 시편을 달달 외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찬송 못해요

반대로 시편을 외울줄 모르는 까박눈 벙어리가 글쎄 예수님을 찬양하더라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이거든요

 

끝에서 쳐들어 오는 것이지

원인을 갖추는 역사 시간 공간을 채워서 순서대로 나아가는 행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자 그럼 복음 아닌 것이 이런 행함이라면

 

믿음은 그 반대로 단 한번도 노래한 적도 없는데 찬송의 옷이 입혀지고

? 주님 쪽에서 노래를 했거든요

끝에서 노래를 해요 글쎄

 

어떻게?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라고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찬양했다 말이죠

 

그 화답가로써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화답송을 부르는 것이 바로 찬송의 옷 곧 회개입니다.
주님이 먼저 찬양하심으로써 사랑하심으로써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해 주심으로써 그 화답가로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화답하는 겁니다.
이 여디디야는 선물이거든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원인 없이 용서 받았다 선물 받았다는 겁니다.

 

천국이 덮치면 회개가 나와요

회개 하면 천국이 오는게 아니라
 

이것이 복음이고

 

반대로 복음이 아닌 것은 이름없는 아기를 살릴려고 다윗이

회개 눈물 금식 기도를 한다 말이죠

혹시나 살려주실까봐 말이죠

 

그런 꾀가 안 통해요
원인을 갖추겠다는 그 속임수는 안 통합니다.

 

? 이미 다 이루었거든요

그런 행함이 아니라

이미 원인 없는 결과로써

 

너를 여호와께서 아주 아주 사랑했다 허물치 않았다 용서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 원인 없는 결과 때문에

너는 그 원수의 자리에 놓여져서 십자가의 용서를 받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원수의 자리 앉기 싫었죠 뭐 율법 4배나 갚으라 라는 그 자리가 좋았거든요

그 의인의 자리에 앉고 싶었으나

주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다 말이죠

마귀의 기능이 뭡니까?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못 보도록 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주님은 자신의 의사 기능을 구원하시고자

다윗을 환자의 자리에

원수의 자리에 놓아서

원수를 사랑한 그 십자가의 피를 자랑코자 함이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들의 행함은 곧 인간의 믿음은 죽은 믿음은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은

마귀가 장악한 유대교처럼

모든 종교가 이런 짐승처럼 666처럼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한다 말이죠

원인 없는 결과를 거부해요

 

그래서 원인을 갖추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바로

방종하면 안된다는 논리가 사람들에게 먹혀들기 때문에

이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를 거부하는 겁니다.

 

끝을 못 끌어당겨요

기여이 비싼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는

율법사처럼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큰 계명을 지킨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이게 거짓영을 받은 자들의 특징입니다.

음녀 곧 자기 쪽에서 막살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말이죠

그게 말이 되고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경험에서 온 바로 육의 생각이다 말이죠

 

그들은 그것 말고 진리가 뭐냐 라고 우기지만

?

원인을 따지는데 있어서 가장 거룩하거든요

원인이 거룩하면 결과가 거룩하다고 보고 있지만

결과가 거룩하지 않는다는 문제를 그들은 거부하고 있어요

 

아니 그런 육의 생각은 모든 종교가 다 외치잖아요

선을 행하고 악을 버리라고

그런데 이런 비복음은 악마를 이길수 있다고 본다 말이죠

마귀가 바보입니까? 인간에게 지게?

 

그 생각 자체가 이미 마귀에게 장악 당한 모습이거든요

마귀는 선의 가면을 쓰고 그 선함의 뒤에서 악을 추구한다 말이죠

아니 선과 악 자체를 인간에게서는 구분 못해요

 

구분 못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시면 되요

아니 매일 매일 매 순간 마다 달라지는 선과 악을 무슨 수 인간이 구분합니까?

 

난 구분 못해요 라는 자리에 가시면

즉 원인이 없으면

 

선악은 마귀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이미 구분되었다 라는 완료가 덮쳐져서

그 결과로 인해 나팔 곧 찬송이

이미 승리했음을 노래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벙어리의 자리에서 외치는 겁니다

아니 벙어리인데 어떻게 외치냐 말이죠

그러니까 찬양이란 감사란 원인 없는 결과다 말이죠

 

감사의 반대가 뭡니까?

원망 아닙니까

 

아니 글쎄 주님은 광야에서 10번 원망한 자에게서 감사를 받아내시더라 말이죠

 

찬송의 반대가 뭡니까?

저주 아닙니까?

우리는 모두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저주 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라 못 박아라

아 그런데 그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치도록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시아버지 유다라는

찬송이 유다에게서 떠나지 않는 이유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유대인은 유다인은 이것을 인위적으로 원인으로 갖출려고

조건화 시키더라 말이죠

 

그런다고 찬송이 될 것 같으면 벌써 다윗이 아이를 살렸겠죠

절대로 살려서는 안되는 겁니다.

못 살리는 죄인이어야 하는 겁니다.

찬송은 내가 하는게 아니라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짐승입니다.

 

주님이 하십니다 어떻게?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세 번 노래하십니다 그 꼬끼오 세 번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엘리야가 그래서 삼년반동안 비오지 않도록 기도했고

모세가 10가지 재앙 속에 이스라엘도 원망하도록 집어넣습니다.

베드로가 그래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로 만들고자 예수님께서 세 번 속에 집어넣습니다.

 

왜죠?

 

이미 결과만 있으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실상만 떳으면 되요 그림자 필요 없잖아요

 

이 결과가 바로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너의 모든 허물을 다 사했다고 주장하시는 겁니다.

 

이 일곱 곧 완벽한 죄에대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으로써 너에게 뒤짚어 씌우겠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을 거부하는 마귀의 주장은 바로

맏아들처럼 원인을 갖추는 겁니다. 그런데 결과가 없어요

원인을 괜히 갖춘 겁니다.

바로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겁니다

그럼 과연 어긴적 있는지 없는지 보자 말이죠

 

동생 탕자를 용서하시는 그 아버지의 사랑에 동의를 할까요 못 할까요?

못해요 아니 왜죠

나는 원인을 갖추었고

동생 탕자는 원인을 안 갖추었거든요

 

나는 십일조를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지만(오늘날 모든 교회 목사 또는 모든 종교가 외치는 비복음 사기치는 꾀가)

저 세리는 토색하니까 매국노이니까 원인은커녕 원인 근처도 못가는 가장 거리가 먼 자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저 탕자가 가는 천국은 때려죽어도 가기 싫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왜 큰 계명 두 계명을 왜 지켰죠?

왜 십일조 했죠? 왜 이레에 두 번 금식했죠?

십일조란 맏물(거룩)을 바침으로 인해서, 맏물을 희생 시켜 나머지 것들을 살리는

약자보호법 이웃환대법 아니냐 말이죠

이레에 두 번 금식은 일종의 회개다 말이죠

무엇을 회개 할까요?

바로 탕자를 이미 용서하셔서 맨발로 죽은 자식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사랑

이 결과만을

원인 없이 무조건 용서하시는 그 사랑을 쳐다보게 해 달라는 것이 회개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십일조 지킨 것이 십일조를 어긴것이고

이레에 두 번 씩이나 금식한 것이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하는 식이 되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어야 하는데

 

다들 웃고 있더라 말이죠

 

? 지켰으니까

행했으니까

원인을 갖추었으니까

 

저 탕자는 못 갖추고

나는 갖추었으니까

 

아니 이런 생각을 어쩌면 똑같이 마귀가 했던 모습과 똑같더라 말이죠

마귀가 아버지의 사랑을 거부해서 쿠테타를 일으켜 쫏겨났거든요

 

이미 마귀가 그랬거든요

또 놀랍게도 마귀는 그 짖만 할 줄 밖에 몰라요

그래서 십자가에 턱 하고 걸려 넘어지는 겁니다.

 

뭘 해도 이 십자가 라는 다 이루셨다 라는 결과에 도달 못해요

그래서 의문의 반복만 해요

십일조 냈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고

이것 밖에 내세울게 없어요

얼마나 그 배설물 똥떵어리를 몸에 도배를 했으면 그것 밖에 내세울게 없을까요?

 

십일 조 냈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을 한 것이 선이라고 주장하지만

그게 바로 악입니다

십일조와 금식을 어긴 것이다 말이죠

그림자에 도사들이지 알맹이가 없어요

실상이 없어요

결과가 없어요

 

이 결과가 이미 떳기에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을 지키는게 아니라

그 반대의 자리인

아버지 재산 탕진하고 탈탈탈 털려 빈털터리가 되어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의인의 자리가 아닌

아들의 자리가 아닌

노예의 자리에서

심판의 자리에서 뭘 해도 나는 심판받아야 할 뿐인 죄인의 괴수의 자리에서

긍휼을 바라보더라 말이죠

 

원인을 내세울 꺼리가 없어요

벙어리가 말을 못하니 말로 뭔가를 했다는 것을 내세울수가 없듯이

날 때부터 소경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무능 무식자이듯이

원인 자체가 없으니 내세울 꺼리가 없는데

 

졸지에 결과가 덮치고

탕자에게 아버지의 사랑이 덮치니까

살진소 금가락지 새신발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이

원인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함을 받아 버렸기에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11, 개역)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5:12, 개역)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5:13, 개역)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5:14, 개역)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15, 개역)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5:16, 개역)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5:17, 개역)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8, 개역)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5:19, 개역)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15:20, 개역)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15:21, 개역)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15:22, 개역)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3, 개역)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15:24, 개역)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15:25, 개역)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웠을 때에 풍류와 춤추는 소리를 듣고

(15:26, 개역)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15:27, 개역)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 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15:28, 개역)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15:29, 개역)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30, 개역)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15:31, 개역)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15:32, 개역)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반대로 맏아들에게는 이 결과 원인 없는 결과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 용서가 졸지에 턱 하고 걸려 버리니

넘을 수가 없는 겁니다. 걸림돌에 넘어지더라 말이죠

원인 따져본들 소용없어요 결과에 넘어지면 다 끝난거고
결과가 넘어오면 그 어떤 원인도 일체 없어도

아무 조건 하나 갖춘 것 없어요 이 결과(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만 있으면

다 좋은거다 말이죠)

 

목상태가 안좋아도 저절로 화답할 수 밖에 없는 찬양이 덮치더라 말이죠

무조건이거든요 무조건이야 ~~~ 짜짜라 짜라 짜라 짠짠짠

물동이 던져 버리고 동네사람들이 내 죄를 아는 선지자가 나타났다고

우물가의 여인이 동네방네 외치는 졸지에 찬양가가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콩나물 대가리 전혀 몰라요 악보도 볼줄 몰라요

음치 박치 몸치라서 나만 가수 아니다 이다 말이죠

나만 음치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못 부르는 노래를 불러요

십자가를 노래 해요 글쎄

어디에서? 죄인의 자리에서

탕자의 자리에서 말이죠

 

절대로 의인의 자리에서

맏아들의 자리에서는 나올수 없는 노래를 말이죠

 

바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을 노래 해요 글쎄

시편 외운 자는 못하는데

시편 외운적도 없는 까막눈 문맹자에다 소경에다 도저히 불가능해요

그런데 말도 안되게 이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너무 너무 잘 노래해요

 

알고보니 화답이라 누가 이미 불러줬어

반칙이다 말이죠

뭐라고 불러줬는가?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아니 이미 답을

결과를 다 알려주는데

줘도 못 먹냐 말이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이 결과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공명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는데

 

마귀는 엉뚱하게 원인만을 따져요 조건을 따져요 글쎄 십자가에 탁 걸렸거든요

오늘날 교회나 모든 종교가 바로 666인 짐승인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넘어서질 못하고 탁 하고 걸려 넘어 엎드려 지는 겁니다.

그러니 쓰잘데 없이 죄를 다스릴려고 해요

그 의문의 반복을 해요 글쎄

 

죄를 왜 쓰잘데 없이 다스릴려고 합니까

그냥 죄인입니다 뭘 해도 죄인입니다 라고

율법 외에 한 의를 쳐다봐야지요

 

정작 탕자는 쳐다보는데

맏아들을 못 쳐다 봐요

맏아들이 쳐다볼려면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그 원인을 없애 버려야 하거든요

동생이 미워 죽는데 그 동생 보다 자신을 더 미워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이미 동생을 미워해서 죽은 상태라서

사랑 조차도 못한다 말이죠

더더욱 그 미움 속에서 턱 걸려 넘어져서 그 문지방을 넘어올수 없는

엎드려진 상태로 죄를 다스려야만 하더라 말이죠

 

그냥 죄인 되면 되는데 말이죠

 

탕자 되면 되는데 말이죠

 

오늘 나팔이라는 전쟁은 그 어떤 무기도 필요 없이

그저 찬양

 

내 죄를 용서하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옳았습니다 라고

끝을

결과를

원인 없는 결과를 끌어당기는 것이

승리냐!!! 아니냐!!!

 

? 승리 자체가 이미 승리한 채로 쳐들어와서 덮쳐지기에

내가 승리해야 할 꺼리가 없는 채로 승리하는데

 

(11:15, 개역)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1:16, 개역)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1:17, 개역)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종교라는 666은 또 자기 숙제처럼 자기가 승리를 하기 위해서

이 전쟁을 자기가 할려고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의 자리에

 

곧 원망의 자리에서 감사를 외칠수가 없고

십자가라는 저주의 자리에서 피 용서라는 찬양을 못하더라 라는 겁니다.

 

자 물어봅시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라는 끝 종말 결과를 예수님께서 이루는데 있어서

저와 여러분이 뭐 하나 조금이라도

아주 아주 미약하지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게 있을까요?

없습니다.

 

그럼 우리 빼고 제자들이나

참선지자나

사도들이나

아주 아주 위대한 신앙인? 두 증인요? 그래 두 증인 모세와 엘리야

심지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뭐 하나 보탬이 된게 있을까요?

 

없어요

 

여기서 놀라운 점은 목사들은 보탬이 있다고 주장한다는데 있어서

거짓선지자들이다는 겁니다

이 주장을 안하면 교인들이 안 움직이거든요

그 결핍을 채울 방법이 없기에

기여이 주장해요 글쎄

그게 참 신기해요

 

누가봐도 존경받는 목사인데

도리어 그런 모습으로 존경받는 목사라는 자체가

아 마귀구나를 보게 됩니다.

 

목사가 마귀로 도배 되어 있어요

 

복음이라고는 눈꼽만치도 안나오고

그저 눈에 보이는 교회에 미쳐있어서

그 불안함을 교인들에게 심을려고 해요

 

거의 다 넘어갔죠 뭐

 

24장로가 왜 엎드려서 경배할까요?

단순히 왕에 대한 경외가 아닙니다.

 

24장로들 조차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라 라고 외쳤던 자들이다 말이죠

예수님을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고 저주 했던 자들이다 말이죠

 

그런데 지금 경배를 하고 있어요 글쎄

말도 안되죠

 

그러니까 면류관을 도로 반납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니까

보탬도 된적이 없으니까

 

그러니 십자가를 노래 할 수가 있고

전혀 거리끼지 않게

찬양할 수가 있는데

 

반대로 나는 주님을 저주 한적 원망한 적 없다 라는 자들은

경배를 못해요

십자가에 턱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그것이 죄인줄 모르니까 말이죠

 

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 라고 외친적도 없고 원망 저주한적이 없다 라고 하는 그 주장 자체가

턱 하고 걸려 넘어지니까

탕자가 죽도록 밉듯이

그 탕자를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하는 아버지의 사랑도 밉듯이

이 십자가가 미운 겁니다

 

마귀가 그래서 이 십자가와 꽝하고 부딧히는 기능으로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잡아와야 하는 수갑쥔 형사노릇을 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다 말이죠

 

수갑을 왜 괜히 쥐어가지고서

자기를 채울 리가 없잖아요

반드시 누구 잡지 않고서는 못 배기는 겁니다.

마침 바로 코 앞에

마침 예수님이 지나가는 타이밍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예수님에게 들이내밀 듯이

베드로가 마침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 주니까 잡아왔따 말이죠

 

자 예수 당신 같으면 어쩔래?

 

어쩌기는 뭘 어째

 

결과의 싸움이지

원인의 싸움이 아니다 말이죠

 

뭘 어째 내가 베드로를 대신해서 매 다 맞았거든

죄 값을 단 번에 치렀거든

 

마귀가 유구무언이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세요

목사나 그의 똘마니들은

정죄 밖에 없어요

 

결과 싸움은 없어요

? 결과가 없으니까

 

원인 싸움만 해요

니 잘났니 내 잘났니

 

나팔전쟁은 바로 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라는

주의 주 되심

주의 왕노릇이라는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이미 승리하심이라는 십자가 전쟁인데

원인 없는 결과의 전쟁인데

 

졸지에 마귀가 넘지도 못할 의문의 반복을 쥐고서

쓰잘데 없는 선악전쟁을 하고 있더라 말이죠

나는 선 너는 악

그 다음 날에 선이 못 되면 안되니까

죄를 다스릴려고 별짖을 다 해요 글쎄

 

이 마귀 짖을 아예 대 놓고 오늘날 교회가 자랑하듯이 해요 글쎄

 

미친놈들이다 말이죠

 

이미 끝났는데

그 의문의 반복을 기여이 하겠데

 

그러니 그 어두움 속에서 나올수가 없으니

배고파서 울부짖는 겁니다.

채워 질수가 없는 무저갱이다 말이죠

 

아침을 맞이할 수가 없어요

노래가 안 나와요

 

그런데

십자가의 피 용서가 덮쳐진 성도에게는

주님의 왕노릇 때문에

결과 만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룰루 랄라 노래 할수 있는 겁니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말이죠

죽인다는 겁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다시 사는 아침을 보리라 새벽을 보리라 말이죠

 

그러나 너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주셨다고 했는데

기여이 자기 쪽에서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잠이 없으니까 그 어두운 터널에서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못 빠져 나오는 겁니다

챗바퀴 돌 듯이 의문만 반복하면서

십일조 이레에 두 번 지켰다는 그 원인 갖추기에 미쳐 있는 겁니다

 

이런 종교라는 마약에서 빼내주시지 않으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부짖었는데

 

갑자기 주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나팔을 뿌뿌뿌 신나게 부는 겁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덮쳤기에

그 증상으로 아니 외칠수가 없게 되었으니까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