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승리와 용 (12; 1- 6)

 

혼인잔치 비유와 여자의 승리와 고난 그리고 용

계 33 여자의 승리와 용 (계 12, 1- 6).mp3
9.22MB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 개역)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가라사대

(22:2, 개역)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22:3, 개역)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22:4, 개역)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가로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22:5, 개역)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하나는 자기 밭으로, 하나는 자기 상업차로 가고

(22:6, 개역)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22:7, 개역)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22:8, 개역) 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예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22:9, 개역)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22:10, 개역)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22:11, 개역)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22:12, 개역)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22:13, 개역)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22:14, 개역)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22:15, 개역)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12:1, 개역)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12:2, 개역) 이 여자가 아이를 배어 해산하게 되매 아파서 애써 부르짖더라

(12:3, 개역) 하늘에 또 다른 이적이 보이니 보라 한 큰 붉은 용이 있어 머리가 일곱이요 뿔이 열이라 그 여러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는데

(12:4, 개역) 그 꼬리가 하늘 별 삼분의 일을 끌어다가 땅에 던지더라 용이 해산하려는 여자 앞에서 그가 해산하면 그 아이를 삼키고자 하더니

(12:5, 개역) 여자가 아들을 낳으니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

(12:6, 개역) 그 여자가 광야로 도망하매 거기서 일천이백육십 일 동안 저를 양육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예비하신 곳이 있더라

 

(12:1, 새번역) 그리고 하늘에 큰 표징이 나타났는데, 한 여자가 해를 둘러 걸치고, 달을 그 발 밑에 밟고, 열두 별이 박힌 면류관을 머리에 쓰고 있었습니다.

(12:2, 새번역) 이 여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는데, 해산의 진통과 괴로움으로 울고 있었습니다.

(12:3, 새번역) 또 다른 표징이 하늘에서 나타났습니다. 머리 일곱 개와 뿔 열 개가 달린 커다란 붉은 용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머리에는 왕관을 일곱 개 쓰고 있었습니다.

(12:4, 새번역) 그 용은 그 꼬리로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서, 땅으로 내던졌습니다. 그 용은 막 해산하려고 하는 그 여자 앞에 서서, 그 여자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삼켜 버리려고 노리고 있었습니다.

(12:5, 새번역) 마침내 그 여자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는 장차 쇠지팡이로 만국을 다스리실 분이었습니다. 별안간 그 아기는 하나님께로, 곧 그분의 보좌로 이끌려 올라갔고, / 2:9 또는 '보살필'

(12:6, 새번역) 그 여자는 광야로 도망을 쳤습니다. 거기에는 천이백육십 일 동안 사람들이 그 여자를 먹여 살리도록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곳이 있었습니다.

 

 

지난 시간에 녹음에서 설명중에 하나 생각한 것을 빠뜨린 것이 뭔고 하니

요셉이 왜 뺑뺑이 세 번 돌리는가

뭐를 자꾸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그거 가지고 오지 않으면

자신의 기능과 안 맞다는 거죠

 

예수님은 왜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을까요

 

예수님 자신의 기능에 부합되는 것이 바로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거든요

뭐뭐가 아니라가 반드시 먼저 있고 그 뒤에 기능에 딱 맞는 뭐뭐다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겁니다.

 

요셉의 기능에 딱 맞는 것 가지고 오기 전 까지는 계속해서 뺑뺑이 돌립니다.

광야에서 10번 원망하기 전 까지는 계속 뺑뺑이다 말이죠

 

그래서 세 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를 뺑뺑이 돌린다 말이죠

 

맞습니다. 죄를 가지고 오기 전 까지 말이죠

죄를 가지고 와야

용서를 할 꺼 아닙니까?

피 바를꺼 아니냐 말이죠

모든 허물을 다 덮는 사랑을 보여주실꺼 아니냐 말이죠

 

그래서 요셉을 죽은 죄를 가지고 오는지를 보는 겁니다.

 

그럼 시아버지 유다는 어떻게 죄를 가지고 오게 된 것일까요

다말 덕분입니다.

 

다말이 죽음의 자리에 놓여지지 않았다면

아뿔사 그가 나 보다 옳았다를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유다 곧 찬양이라는 의미는

죄인을 용서하시는 구원자를 노래하기 위해서

죄인의 자리에 놓여져야지만 하는 겁니다.

간첩을 만들어서라도

 

요셉의 죽음을 가지고 오기 전 까지는 계속해서 뺑뺑이 돌린다 말이죠

이미 뺑뺑이를 돌린다는 자체가

이미 다 완료되었기에

요셉이 바로의 주가 되었기에

애굽의 주가 되었기에

회개가 덮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삼년반 1260일 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세 번 뺑뺑이 돌림으로써

한 때 두때 반때의 자리에 놓음으로써

십자가의 죽음의 3일의 간극에 놓음으로써

죽었다가 다시 3일만에 살아난 요셉을 봄으로써

회개가 덮쳐져서

3일의 간극에서 만나는 겁니다.

이 어리석은 지혜를 마귀는 거부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여자와 아이(남자) 그리고 용이 나옵니다.

창세기 3장의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옵니다.

 

즉 한치도 인간의 역사가 아무리 반복이 되어도

이 창세기 3장의 구조에서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곧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의 전쟁 말이죠

 

(3:14,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을지니라

(3:15, 개역)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3:16, 개역)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3:17, 개역)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3:18, 개역)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3:19, 개역)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3:20, 개역) 아담이 그 아내를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3:21,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3:22,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 손을 들어 생명나무 실과도 따 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3:23,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어 보내어 그의 근본된 토지를 갈게 하시니라

(3:24, 개역)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모든 인간은 죄 아래 갇혔다 말이죠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포로 되었고 갇혔고 억눌렸다 말이죠

 

이 전쟁의 구조 속에서

누가 구원의 전쟁을 벌리시는가

 

이미 승리한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창3장의 전쟁 구조를 표현했고

 

계시록 12장의 여자는 마리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기능이 바로 여자인데

아들을 낳은 여자입니다.

그것도 남자없이 아빠없이 말이죠

즉 육의 개입이 없다는 겁니다. 단절이다는 거죠

 

그럼 유일하게 여자를 인정하시는 반면에

세상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데

그 이유가 바로 자기능력으로 세상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세력을 용이라고 합니다.

 

이 용은 창3장처럼 선악의 도사입니다.

선악으로 고소했던 천사였었다 말이죠

그래서 자기능력으로 가득찬 것을 추구하면 선으로

그 반대인 무능하면 악으로 취급한다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세상사람들이 이 용에게 갇혀서 살고 있는 방식인데

 

여기에 비해 여자는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인정함으로써

성령으로써 잉태하여 그 아이를 낳는

아빠없이 남자없이 육없이 아이를 낳은 여자

곧 동정녀 마리아입니다.

 

이 아이를 품었다는 이유로

붉은 용에게 쫏겨다니는 운명이 된 거죠

처녀가 아이를 임신하니까

율법을 쥔 남자들이 유대인들이 돌삐 쳐 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아이를 놓으면 잡아죽일려고 한다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처럼 불에 태워 죽일려고 말이죠

 

그런데 이 여자가 이 마리아가 광야로 도망을 칩니다.

자 여기서 독수리가 나오는데

이 독수리는 출애굽 19장에 나오는 독수리입니다.

즉 광야란 없다 말이죠

좁은 길은 없어요

 

저희 집에 갑자기 이장로님과 김권사님이 찾아오셨는데

이야기 중에 작은자에 대해서 언급하셨는데

그때 제가 작은자란 없다고 했습니다.

기능이니까 존재가 아니거든요 존재는 없어요 기능만 있을 뿐이지

 

그럼 광야는 독수리가 등장해야지만 나타나는 것이 광야다 말이죠

독수리가 날개로 이 여자를 광야로 피신 시킵니다.

 

(19:4, 개역)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1, 개역)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올 때부터 제삼월 곧 그 때에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19:2, 개역)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19:3, 개역)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19:4, 개역)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19:5, 개역)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19:6, 개역)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지니라

(19:7, 개역) 모세가 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 앞에 진술하니

(19:8, 개역)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명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회보하매

(19:9,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일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으로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로 여호와께 고하였으므로

(19:10, 개역)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케 하며 그들로 옷을 빨고

(19:11, 개역) 예비하여 제삼일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제삼일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9:12, 개역) 너는 백성을 위하여 사면으로 지경을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지경을 범하지 말지니 산을 범하는 자는 정녕 죽임을 당할 것이라

 

이 표현이 꼭 십계명 전문에서도 나오더라 말이죠

애굽의 종 되었던 너희를 이끌어낸 여호와 라고

 

(20:1, 개역)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20:2, 개역)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20:3, 개역)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19장의 중복이지요

 

이것이 바로 구원사건입니다.

인간 구원이 목적이 아니다 말이죠

그럼 개인 구원이 생기고

존재 구원이 생겨요

 

그게 아니라 구원을 구원한다 말이죠

기능을 구원해요

 

그렇기 때문에 광야라는 죽음의 자리로 피신시킵니다.

개인구원으로 보면 이게 무슨 구원이냐고 따질겁니다.

죽음의 자리에 놓는 것이 무슨 구원이고 도리어 저주이지 라고

누가 봐도 저주의 자리에 놓는게 무슨 구원이냐고 따질꺼다 말이죠

 

그런데 이 광야에서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겁니다.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거룩의 옷인 신부의 옷을 입히신다 말이죠

그래서 애굽에서 빼내었다 말이죠

이 신부의 옷을 입히시는 거룩을 입히시는 단절 구분을 입히시는 것에 반발했던 것이

바로 애굽에 대한 심판이요 바벨론에 대한 심판이였듯이

마태복음 22장을 언급한 이유는 바로 이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거룩을 입히시는 이 분

이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리심이 옳았다를 보기 위해서

마귀한테 세가지 물증을 잡히는게 아니라

이미 벌써 십자가의 피 흘리심으로 모든 허물을 덮고자

예수님한테 세가지 물증을 잡히심으로써 허물을 보시지 않고자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하신

그 사랑의 잔치가 바로 마 22장의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벌리는 혼인잔치 비유이다 말이죠

계시록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혼인잔치입니다.

이 기쁨의 잔치를 모조리 공갈협박의 공포로 증거하다 보니

다들 계시록을 안봐요

신나는게 없으니까

 

그저 돈 뜯어낼려고 계시록을 언급할 뿐이다 말이죠

 

아무리 봐도 기쁨이 없으니 그 사기에 당하는 겁니다.

 

자 그래서 광야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우리를 시아버지 유다로 만들기 위해

즉 찬양자로 만들기 위해서

딴사람이 아닌 며느리 다말에게 세가지 물증 허물을 잡힘으로써

그 저당물 때문에

그 볼모 때문에

그 빚 때문에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기 때문에

 

주의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더라 말이죠

 

그래서 죽은자 같으나 산 자로써 찬양을 하는 겁니다.

3일의 그 간극의 자리에서 살려주시는 죽은자를 살리시는 그 사랑을 노래한다 말이죠

그 죽음의 자리에서

원망의 자리에서

저당물 잡힌, 빚진자 자리에서

주의 허물치 않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죄 용서 받은 그 행복을 노래하는 겁니다.(4)

일만달란트 탕감을 노래하는 겁니다.

 

바로 그 자리가 주의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가 된다 말이죠

아 내가 죄 지은게 아니라

이미 죄 아래 갇혀서 포로되었고 갇혔고 억눌렸는데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의 손에서 건져내시는

주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전쟁을 보여주시고자

3일의 간극에

한때 두때 반때

12년 반년

의 자리에 놓아서 요셉처럼 볼모작전 저당물 잡히는

빚진자로 만들어서

그 요셉의 죽음을 들고오라고

요셉이 용서해 줄려고

이미 벌써 용서해 주시고자

애굽의 주 바로의 아비의 자리에서

이미 승리자로써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다 이루었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마귀에게 잡혀오라고 하신거다 말이죠

 

주님이 이미 허물치 않고자 덮었는데

마귀는 또는 죄책감은

자꾸 이미 덮어버린 것을 자꾸 들추어 보는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하는

이 사단의 깊은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하나님의 깊은 탕자를 긍휼히 여기심을

저 마귀와의 대조로

선악의 대조로써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여주신다 말이죠

 

소위 방종이라고 사기치는 것도 죄책감을 유도하는거다 말이죠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사기치는 것도 죄책감 유도다 말이죠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못 쳐다보도록 하는 거짓이다 말이죠

막살면 안되고 제대로 살아야 한다고 사기치는 거다 말이죠

 

이미 게임 끝났다 말이죠

지는 매일 매일 매 순간 막살면서 남에게는 무거운 돌을 얹이고 있으니

이미 끝난 것을 또 모호하고 흐릿하게 만든다 말이죠

 

요셉으로부터 내가 죽인 요셉

예수님으로부터 아직 저당물을 안 잡히니까

죄인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안 놓여지니

원망의 자리에 안 놓여지니까

 

감사가 없는거다 말이죠

 

자꾸 의인이 될려고 한다 말이죠

십의 일을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이 막살지 않고 토색치 않게 해 주심에 대해 감사하다고

그 의문을 그 모호함을 자랑하더라 말이죠

자기 능력으로 사는

하나님이 인정치 않는

바로 선악을 쥐고 있는 저 붉은 용 저 마귀처럼

고소하는 자로써 살려고 하니까

주의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안 쳐다보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이미 게임이 끝난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땡기기 때문에

미래완료에서 땡기기 때문에

죄인의 자리 광야의 자리 저주의 자리 죽음의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왜 삼일만에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믿음의 세계이니까

 

그럼 저 용들은 저 자기능력으로 사는 자들은

이유 없이 지옥에서 땡기고 있기 때문에

그들 또한 원인 없는 결과로써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이미 벌써 지옥인데 뭘 또 새삼스럽게 죄를 지어야지만 지옥에 가는게 아니라

지옥에서 땡기기 때문에

저들은 더더욱 선악으로 자기능력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바벨론이 몽둥이를 쥐기 싫어도 더더욱 쥘 수 밖에 없도록

척박하게 했기 때문에

만인을 위한 만인의 투쟁 속에 집어넣었으니 더더욱 선악에 목 맬 수밖에 없도록

더더욱 갈증과 더더욱 결핍 속으로 집어넣으니까

주의 인자(인애에 자비=아침에=어두운 밤을 통과한)하심을 못 쳐다본다 말이죠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지

죽음에서 다시 3일만에 살아난

이 말도 안되는 부활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덮쳐진 것이지

자기가 무슨 수로 부활할수 있겠냐 말이죠

죽음 속에 들어갈수도 없고 곧 광야로

독수리가 날개로 업어주지도 않는데 어떻게 광야로 피신하며

1260일 삼년반동안

닭이 세 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울어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말이죠

 

이게 없으니까

그 결핍을 몽둥이를 쥐고

자기능력을 쫏으니까

 

붉은 용으로부터 쫏기는 운명이 아니라

도리어 주님의 자녀를 죽이고자 쫏아내고 있으니

무슨 수로 광야 곧 삼년반 동안의 그 간극에 놓여지냐 말이죠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을 기생라합처럼 전재산 전국가 전체인간을 다 팔아서

예수님에게 팔아넘기냐 말이죠

삼년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냐 말이죠 엘리야

이삭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자기가 나음을 입는

다시 살아나는

아브라함 본인이 죽은자임을 고백하냐 말이죠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에

거기서 나오는 것이 회개로써

회개가 덮쳐져서

감사가 덮쳐져서

 

이와 같이 회개치 않는 자는

저 실로암망대가 무너져 18명 깔려 죽은 것이

예루살렘은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 다음 차례는 예루살렘이듯이

누구든지 회개치 않는 자는

즉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나오는 회개가 덮쳐지지 않는 자는

다 망한다는 겁니다.

 

그 망함을 미리 앞당겨서 예수님이 대신 죄 값을 치르심으로써

저당잡고자 볼모작전으로 세 번 부인케 만든

죄인을 부르러 온 의사 구원자이다 말이죠

 

이 사랑의 깊이 높이 넓이 길이를

 

(3:18, 개역)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3:19, 개역)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선악을 추구하는 용과 그의 자녀들은 이 십자가의 지혜를 어리석다고

거리끼는 걸림돌이라고 무시하도록 되어 있는데

 

이것이 죄를 지어서 지옥가는게 아니라

이미 완료된 십자가의 피 용서를 쳐다보지 않음으로써

미래완료에서 땡기기 때문에 저들은 일곱이 완벽한 거룩이요 심판인데

자기가 일곱 면류관을 쓰고서 심판자 노릇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의 꾀에 빠진셈이다 말이죠

 

심판주는 저 분임을 못 쳐다보니까 자기가 보좌에 앉으니까

선이라고 십의일조를 내었다고 우기고

저 세리는 악이라고 판단하는 그 엉터리

의에 대해 죄에 대해 심판에 대해 그 엉터리가 심판받는다 말이죠

 

차라리 심판의 자리에 놓여져서 나 아니요 저분이 옳았다고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신 저 분이 옳았다고 외치는 자리가 바로 광야이다 말이죠

광야교회는 이것만 찬양할거 밖에 없어요

유다지파는 존재가 아니라 혈통이 아니라 기능이다 말이죠

유대인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찬양자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는데

혈통 유대인

존재 유대인들은 아무도 찬양하는 자가 없더라 말이죠

 

오히려 개같은 이방인이 예수님을 찬양해요

맞습니다 저 개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부스러기를

긍휼을 얻지 않습니까?

 

이 여인이 글쎄 신부의 옷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덮쳐지는 거룩한 흰옷을 입은자로써

광야에서 예수님을 노래하는 겁니다.

 

붉은 용의 등장은 바로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진노의 그릇을 하도록 말이죠

 

그러니 이 마리아처럼 곧 성도의 운명은

오로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피용서만을 찬양하고자

이런 사건들이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신나게 주님의 십자가를 노래합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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