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기로 작정된 이스라엘, 미움받기로 작정된 바벨론 (14; 1-23)

 


(
14:1, 개역)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14:2, 개역) 민족들이 그들을 데리고 그들의 본토에 돌아오리니 이스라엘 족속이 여호와의 땅에서 그들을 얻어 노비를 삼겠고 전에 자기를 사로잡던 자를 사로잡고 자기를 압제하던 자를 주관하리라

(14:3, 개역) 여호와께서 너를 슬픔과 곤고와 및 너의 수고하는 고역에서 놓으시고 안식을 주시는 날에

(14:4, 개역) 너는 바벨론 왕에 대하여 이 노래를 지어 이르기를 학대하던 자가 어찌 그리 그쳤으며 강포한 성이 어찌 그리 폐하였는고

(14:5, 개역) 여호와께서 악인의 몽둥이와 패권자의 홀을 꺾으셨도다

(14:6, 개역) 그들이 분내어 여러 민족을 치되 치기를 마지 아니하였고 노하여 열방을 억압하여도 그 억압을 막을 자 없었더니

(14:7, 개역) 이제는 온 땅이 평안하고 정온하니 무리가 소리질러 노래하는도다

(14:8, 개역) 향나무와 레바논 백향목도 너로 인하여 기뻐하여 이르기를 네가 넘어뜨리웠은즉 올라와서 우리를 작벌할 자 없다 하는도다

(14:9, 개역) 아래의 음부가 너로 인하여 소동하여 너의 옴을 영접하되 그것이 세상에서의 모든 영웅을 너로 인하여 동하게 하며 열방의 모든 왕으로 그 보좌에서 일어서게 하므로

(14:10, 개역) 그들은 다 네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도 우리 같이 연약하게 되었느냐 너도 우리 같이 되었느냐 하리로다

(14:11, 개역) 네 영화가 음부에 떨어졌음이여 너의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14:12, 개역)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14:13, 개역)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별 위에 나의 보좌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좌정하리라

(14:14, 개역)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하도다

(14:15, 개역) 그러나 이제 네가 음부 곧 구덩이의 맨 밑에 빠치우리로다

(14:16, 개역) 너를 보는 자가 주목하여 너를 자세히 살펴 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이 땅을 진동시키며 열국을 경동시키며

(14:17, 개역) 세계를 황무케 하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자를 그 집으로 놓아 보내지 않던 자가 아니뇨 하리로다

(14:18, 개역) 열방의 왕들은 모두 각각 자기 집에서 영광 중에 자건마는

(14:19, 개역)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

(14:20, 개역) 네가 자기 땅을 망케 하였고 자기 백성을 죽였으므로 그들과 일반으로 안장함을 얻지 못하나니 악을 행하는 자의 후손은 영영히 이름이 나지 못하리로다

(14:21, 개역) 너희는 그들의 열조의 죄악을 인하여 그 자손 도륙하기를 예비하여 그들로 일어나 땅을 취하여 세상에 성읍을 충만케 하지 못하게 하라

(14:22,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내가 일어나 그들을 쳐서 그 이름과 남은 자와 아들과 후손을 바벨론에서 끊으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23, 개역) 내가 또 그것으로 고슴도치의 굴혈과 물웅덩이가 되게 하고 또 멸망의 비로 소제하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4:1, 새번역) 주님께서 야곱을 불쌍하게 여기셔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선택하시고, 그들을 고향 땅에서 살게 하실 것이다. 그 때에 외국 사람들도 그들에게 와서, 야곱의 겨레와 함께 살 것이다.

(14:2, 새번역) 여러 민족이 이스라엘 사람의 귀향을 도울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께서 주신 땅에서 외국 사람을 남종과 여종으로 부릴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을 사로잡았던 자들을 사로잡고, 자기들을 억누르던 자들을 다스릴 것이다.

(14:3, 새번역)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고통과 불안을 없애 주시고, 강제노동에서 벗어나서 안식하게 하실 때에,

(14:4, 새번역) 너희는 바빌론 왕을 조롱하는, 이런 노래를 부를 것이다. "웬일이냐, 폭군이 꼬꾸라지다니! 그의 분노가 그치다니! / 히브리어 본문이 불확실하여 사해 사본과 칠십인역과 시리아어역을 따름

(14:5, 새번역) 주님께서 악한 통치자의 권세를 꺾으셨구나. 악한 통치자의 지팡이를 꺾으셨구나.

(14:6, 새번역) 화를 내며 백성들을 억누르고, 또 억눌러 억압을 그칠 줄 모르더니, 정복한 민족들을 억압해도 막을 사람이 없더니,

(14:7, 새번역) 마침내 온 세상이 안식과 평화를 누리게 되었구나. 모두들 기뻐하며 노래부른다.

(14:8, 새번역) 향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도 네가 망한 것을 보고 이르기를 '네가 엎어졌으니, 이제는 우리를 베러 올라올 자가 없겠구나' 하며 기뻐한다.

(14:9, 새번역) 땅 밑의 스올이, 네가 오는 것을 반겨 맞으려고 들떠 있고, 죽어서 거기에 잠든 세상 모든 통치자의 망령을 깨우며, 한때 세상을 주름잡던 그 왕들을 깨운다. / 또는 '무덤' 또는 '죽음'

(14:10, 새번역) 그 망령들이 너에게 한 마디씩 할 것이다. '너도 별 수 없이 우리처럼 무력해졌구나. 우리와 똑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14:11, 새번역) 너의 영화가 너의 거문고 소리와 함께 스올로 떨어졌으니, 구더기를 요로 깔고, 지렁이를 이불로 덮고 있구나!

(14:12, 새번역) 웬일이냐, , 아침의 아들, 새벽별아, 네가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민족들을 짓밟아 맥도 못추게 하던 네가, 통나무처럼 찍혀서 땅바닥에 나뒹굴다니!

(14:13, 새번역) 네가 평소에 늘 장담하더니 '내가 가장 높은 하늘로 올라가겠다. 하나님의 별들보다 더 높은 곳에 나의 보좌를 두고, 저 멀리 북쪽 끝에 있는 산 위에, 신들이 모여 있는 그 산 위에 자리잡고 앉겠다.

(14:14, 새번역) 내가 저 구름 위에 올라가서, 가장 높으신 분과 같아지겠다' 하더니,

(14:15, 새번역) 그렇게 말하던 네가 스올로, 땅 밑 구덩이에서도 맨 밑바닥으로 떨어졌구나.

(14:16, 새번역) 너를 보는 사람마다, 한때 왕노릇하던 너를 두고 생각에 잠길 것이다. '이 자가 바로 세상을 뒤흔들고, 여러 나라들을 떨게 하며,

(14:17, 새번역) 땅을 황폐하게 만들며, 성읍을 파괴하며, 사로잡힌 사람들을 제 나라로 돌려보내지 않던 그 자인가?' 할 것이다.

(14:18, 새번역) 다른 나라의 왕들은 모두 화려한 무덤에 누워 있는데,

(14:19, 새번역) 너는 무덤도 없이 오물처럼 버려져, 칼에 찔려 죽은 군인들의 시체 더미 밑에 깔려 있다가, 지하 세계의 밑바닥으로 내려갈 것이다. 너의 시체를 사람들이 짓밟을 것이다. / 칠십인역 참조. 마소라 본문에는 '보기 싫은 나뭇가지처럼'

(14:20, 새번역) 네가 너의 나라를 황폐하게 하고, 너의 백성을 죽였으니, 너는 왕들과 함께 묻히지 못할 것이다. 너의 자손도 이 세상에서 살아 남지 못할 것이다.

(14:21, 새번역) 사람들아, 조상들의 죄를 물어야 하니, 그 자손을 학살할 준비를 하여라. 그들이 일어나 땅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막아라. 그들이 이 땅 위에 성읍의 기초를 놓지 못하도록 막아라."

(14:22,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일어나 바빌론을 치겠다. 내가 바빌론을 멸하겠다. 그 명성도 없애고, 살아 남아서 바빌론의 이름을 이어갈 자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멸종시키겠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14:23, 새번역) "또 내가 그 도성 바빌론을 고슴도치의 거처가 되게 하고, 물웅덩이로 만들며, 멸망의 빗자루로 말끔히 쓸어 버리겠다. 만군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제가 앞의 글 계시록 12장 글에서 언급했듯이
(앞의 글 계시록을 찾을려면, 항상 앞의 글을 언급할때에 인터넷주소를
http://crosslamb.tistory.com/2006
번호 앞의 수로 수정해서
http://crosslamb.tistory.com/2005
엔터 치시면 바로 앞의 글이 뜹니다

 

이미 여자는 또는 성도는 승리한 채로 고난의 자리에서
십자가의 사랑을 외치는 찬양자 곧 찬송의 옷이 씌워져 덮혀 입혀진자로 언급 됩니다
.

곧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그러합니다.

 

성경은 참 편파적입니다.

부조리 합니다.

어느 정도로 부조리 하냐

세상이 감당이 안되어서 격동할 정도로 도저히 견딜수 없을 정도로 부조리 합니다.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즉 이 말은 마귀는 번제와 제사에 목맬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것도 지옥이 땡기기 때문에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 때문에 약속이 이미 성취가 되었기에

 

이것이 바로 선악인데

 

이 선악이 부조리 한데 이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가 바로 은혜입니다.

 

공짜로 용서를 해요 글쎄

즉 이것은 한세트를 구성하고 있는 번제와 제사를 염두하고서 그 보다 더 나은

인애와 자비를 구성해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겁니다.

 

반드시 이스라엘만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 이스라엘의 기능에 반드시

미움 받기로 작정이 된 형 에서가 반드시 쌍둥이로 등장해야

그 차이로써 거룩이 덮쳐지는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 야곱이 설명이 됩니다.

 

구분이 됩니다. 단절이 됩니다. 차이가 됩니다.

 

그런데 이 야곱 곧 이스라엘을 그냥 사랑하시는게 아니라

사랑이라는 기능에 맞도록 탕감하셔야 하기 때문에

빚진자의 자리에 놓는다는 겁니다. 그래야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하죠

 

그래서 잃어버립니다. 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음을 통해서

3일의 간극에 놓음으로써 사랑을 확정 하시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

환자를 부르러 오신 의사의 기능 곧 사랑을 화정하시고자

오늘 본문에 다시 선택하신다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그럼 반대로 버리는 자가 있는데 그들이 바로 바벨론이다 말이죠

지난 시간에 바벨론 심판을 통해서

이 심판의 기준이 뭐다고 했지요?

 

계시록 11장 끝 부분에 약속의 궤에 언약의 궤에 물증이 세가지 잡히지 않아서

그 시은좌 뚜껑에 피 발리시는 약속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이들 애굽이 심판받는다고 했다 말이죠

 

이 심판의 기준이 분명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엉뚱한 심판 기준으로 인해서

바벨론 심판을 자신들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인과응보로 심판받는다고 좋아라 했지만

그것 또한 같이 바벨론과 같이 심판받는 엉터리 심판이다고

그래서 실로암망대 무너진 사건을 언급한 겁니다.

 

엄연히 심판의 기준은 미래완료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피 흘리신 그 사랑을 쳐다보느냐 안텨다 보느냐입니다.

헬라인은 어리석다고 안쳐다 보고

유대인은 거리끼는 걸림돌이다고 안 쳐다보지만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의사가 나타난 환자에게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난 죄인에게는 이 보다 더 좋은 순 없는 영광

황공무지 로소이다

많이 탕감받은자가 많이 사랑하는 겁니다.

못 고치는 불치병일수록 더더욱 많이 고침을 받는 의사의 기능을 만난 겁니다.

그래서 한 명 단 한명

이스라엘도 아니요 이스라엘의 문둥병자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니요 이방인의 많은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인 문둥병자 중에 단 한 사람 나아만 장군에게만 보내심을 받는 복음이다는 겁니다.

기쁜 소식이다 말이죠

많이 탕감 받아야만 하니까 말이죠

 

이것이 남겨진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 한 씨, 한 사랑 때문에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야만 하는 남은자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야곱은 사랑받은 자격이나 조건들이 있어서 사랑받기로 작정이 된게 아닙니다.

태어나기도 전부터, 아니 아예 창세전부터 사랑받기로 작정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그 이름의 기능을 말하고자 하는 그릇으로써 기능으로써 등장하도록 되어 있는 증상물입니다.

 

그럼 받대로 진노의 그릇도 반드시 설명이 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것도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에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의 결과로 반드시

형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된 채로 등장합니다.

 

이 얼마나 부조리 합니까

 

그런데 이 부조리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선악의 부조리를 알면 그렇습니다.

이 선악의 부조리를 모르면

선악의 부조리 보다 더 나은 부조리인 십자가의 은혜를 싫어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마치 막살지 않고 제대로 사는 자

곧 바리새인의 예를 들면

성전에서 기도하기를 십일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는 누가 봐도 가장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이 바리새인이

 

그 어떤 이유로도 십자가의 피 흘리심과 연관성이 없는 겁니다.

 

자기가 충분히 잘하고 있는

의인이요 건강한 자인데

무슨 수로 쓸데 없이 의사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구원자가 필요가 없다 말이죠

본인 스스로가 의를 추구하니까

율법을 지켜서 의를 추구하니까

 

율법 외에 한 의 라는 반칙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선악으로 완벽함을 추구하고 있으니 말이죠

 

아무리 봐도 바리새인이 뭐가 부조리 한가를 모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 더 나은 부조리가 안 나타났거든요

 

이 더나은 부조리가 나타나면 그때서야 왜 순종이 제사 보다 나은지를 알게 됩니다.

순종은 인간에게서는 없거든요,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아무도 화목제물이 될 수가 없어요

독생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원수 마귀에게 내어주사

그 죄값을 치르심으로써

화목케 되는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다 말이죠

 

자 이 부조리 더 나은 부조리로 인해

 

아 나는 어두운 눈이였구나

예수님을 마귀로 몰았구나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였다면

마귀로 몰수가 없었는데

율법을 괜히 지키는 바람에 마귀로 몰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는 눈뜬 장님이였구나 라고

아무도 그 말 안하면 참 좋았을텐데

제일 선봉에 앞장선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을 함으로써 배신자로써

구체적 보편성 지혜를 외침으로써

더 나은 부조리가 참 감사하지 않고는 못배기더라 말이죠

 

왜 그럼 우리는 예수님을 마귀로 몰 수밖에 없는 가

 

누가 봐도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자는 율법에 의하면 심판받아야 한다 말이죠

누가 봐도 탕자는 아버지께서 준 재산 말아먹고 방탕했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자들은 그 어떤 조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십자가로 용서 팔팔 해 버리니까

 

그 동안 말씀지키고 율법지키고 했던 자들이 졸지에

주여 참 인자하심이 넘치시군요 저도 이렇게 용서 해주소서 라고

아버지의 사랑에 감사하고 고마워하는게 아니라

 

그 반대로 위계질서를 무너뜨리는 조직을 위협에 빠뜨리는 자로써

아무죄도 찾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가지 죄를 뒤짚어 씌워서

기여이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뒤짚어 씌워서 죽이더라 말이죠

 

그래놓고 번제와 제사를 지켰데

율법과 성전을 사수했데

 

저 성전을 허무는 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데

 

이것이 의로움 일까요 아니면 진짜 부조리요 악일까요 부정일까요

 

이 부정함을 들추어내는 것은 더 나은 부정 밖에 없다 말이죠

안 그러면 눈에 안약을 넣지 않은 겁니다.

외부에서 넣어줘야지

눈 스스로가 밝히 볼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런 외부에서 안약을 넣는 것을 거부하고

자기 스스로 눈 스스로가 밝히 보는 방법을 추구하는데

그것이 번제와 제사를 지키면 된다고

그것을 많이 지키면 선이요

저 세리처럼 하나도 못 지키고 거꾸로 마이너 리그로 빠지면 악이고 하는

선악으로 방법을 해결할려고 하니

이것 보다 부조리한게 어디있냐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고 눈이 밝아졌다고 여기지

눈이 어둡다고 아무도 여기지 않는다 말이죠

그래서 실로암소경을 일부러 옆에 붙인다 말이죠

그러면 그럴수록 나는 더더욱 눈이 밟다고 여기지

누가 나는 어두운 눈이다고 여기겠냐 말이죠

번제와 제사에 빠졌다는 자체가 어두운 눈인데

종교요 666인데

 

어떤 철학자는 종교를 마약이라고 엄청공격하던데

그 놈의 결론은 역시나 사랑이더라 말이죠

뭐 자본주의는 10년내로 망한다고 몇 년전부터 우기던데

이 놈 또한 역시 사랑이라는 마약에 빠졌다 말이죠

종교를 욕하고서는 자기가 종교를 외쳐요 글쎄

 

그 동안 시기 질투한 거죠 부러워서

자기가 해 봐도 역시나 종교예요

자기가 마약을 뿌리고 있어

쓸데 없는 희망을 기대치를 막 높여요 글쎄

자기는 하나도 실천하는거 없으면서

남보고는 실천하래 연자맷돌을 막 얹더라 말이죠

지도 못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도록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여전히 사람만이 가치가 있다고

사람이 먼저다를 외치더라 말이죠

강땡땡 입만 살았어요

 

실천하지 마세요

이미 갇혔습니다.

 

그것을 아시고 주님께서 고난의 자리

잃어버린 자리에서 다시 선택하시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겁니다.

 

그게 약속이다 말이죠

 

고난의 자리 곧 광야에서 세가지 물증을 저당잡히는 겁니다.

 

그래야 세가지 물증이 잡혀야 회개가 덮쳐지거든요

 

이미 바벨론이나 그 뒤에 나오는 앗수르 등등의 만국은 이미 무릎 꿇은 자로써 등장합니다.

비록 우리의 어두운 눈에는 몽둥이를 쥔 채로 보이고 있지만

그게 진 거다 말이죠

붉은 용이 일곱 면류관을 쓴거 자체가 이미 졌다는 겁니다.

이미 졌기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의 증상으로써 이미 진채로 등장하는데

일곱 곧 완벽한 거룩으로써 완벽한 심판을 마귀가 글쎄 쓰고있고

정작 여자가 낳은 아이는 광야로 도망치는 쫏겨나는 운명

싫어버린바 된 운명

잃어버린바 된 운명처럼 보인다 말이죠

그런데 그게 바로 3일이라는 간극 속에 놓음으로써

주의 사랑의 깊이 넓이 높이 길이를 누리는

아 이것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의 허물을 대신 담당했구나를 누리는

광야교회의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주님을 찬양 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광야에서

고난의 자리에서

빚진자 자리에서

10번 원망한 자리에서

이 허물도 다 덮으신 탕감하신 그 사랑을 노래하는 겁니다.

이것이 회개가 덮쳐진

언약궤를 메고 여리고성을

세상의 성을 뺑뺑이 돌고서 나팔부는

희년의 노래 모세의 노래

새노래 유리바다를 건너는 노래이다 말이죠

 

주의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같았었다 말이죠

 

그래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3일의 간극을 격도록 하십니다.(둘째아들 비유가 생각나네요)

그런데 저들은 이 십자가의 흔적

예수의 흔적이 없다 말이죠

 

(21:23,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새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21: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너희가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

(21:25, 개역)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21:2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21:27, 개역)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21:32, 개역)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21:33, 개역)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이것은 성화론자들 주장대로 아버지 말씀을 지켰다 실천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럼 창기와 세리는 그들 주장대로 못 지킨다 말이죠 그런데 지켰고

반대로 성화론자들처럼 맏아들은 지키겠습니다 해 놓고서는 안 지킨다 말이죠

 

이것은 주님이 못 지키도록 맹글어 버렸고

도저히 못 지키는 창기 세리는 이미 지켰다고 반칙을 벌리심으로써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간다고 하신다 말이죠

바로 그 뒤에 나오는 타국에 간 아들과 포도원 농부가 그러하다 말이죠

 

사람이 말씀을 지키고 실천한다 라는 것에 다들 속아요

아버지 뜻대로 지키고 실천하는 것이 옳다고 이미 선입견으로 자리잡았으니까 말이죠

그런데 과연 끝까지 지켰느냐 보자 말이죠

 

지킨다 해놓고 안 지켜요

이 부조리라는 부정을 알려면

이 속임수

인간의 꾀를 알려면

더 나은 부조리

즉 창기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가는 그 부조리가 등장해 줘야지만

완악한 수건이 벗겨진다 말이죠

 

아뿔사 그가 나 보다 옳았다 라는 이 세가지 물증이 안 잡히면 몰라요

십자가는 그래서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때려죽어도 말씀 지켜야 한다고 외치지만 정작 안 지켜요

그 반대로 도저히 말씀 못 지키는 저 세리 강도 창기는 말씀 아예 못 지킨다는 것을 알고

마음껏 심판하고 정죄했는데

 

예수님께서 저들의 친구로써 저들의 허물을 다 덮어버리니까

졸지에 예수님을 죽이더라 말이죠

 

이것이 더 나은 부조리도 못 되면서

더 나은 부조리를 시기 질투하는

엉터리 부조리 곧 번제와 제사이다 말이죠

 

안식일날만 골라서 손마른 자를 그냥도 아닌

안식일날 지키는 자들 눈 앞에서 코 앞에서 고쳐야

자신들의 부조리르 더 나은 부조리를 통해서 알게 된다 말이죠

 

안식의 주인이 나타났으면 안식일 지키는 것을 멈추어야 하는데

그 의문의 반복 그 흐릿함을

또렷함 앞에서 멈추어야 하는데 못 멈추는 겁니다.

 

누가 부조리하냐 말이죠

옳다고 여긴 것들이 다 죄악임이 드러나는 겁니다.

죄란 미래완료가 덮쳐져야 미래에서 규정하지

 

과거에서 현재로 규정하는 죄는 죄가 아니다 말이죠

심판의 기준은 이 십자가의 피를 안 쳐다봄이다 말이죠

그래서 바벨론도 앗수르도 에돔도 다 이 삼판의 주를 말하기 위해서

심판 받는 진노의 그릇으로 동원이 되고

 

그 반대로 말도 안되게 더 나은 부조리로써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방식으로써 이스라엘은 다시 선택을 받습니다.

예수의 흔적 곧 광야의 자리 고난의 자리

3일의 간극을 통해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천국에 먼저 가는 창기 세리로써 이스라엘은 더 나은 부조리로 십자가의 피 용서를 외치고

 

반대로 저들은 십자가의 피 용서가 무조건적인 편파 부조리 용서가 덮쳐지지 않아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예수의 흔적이 없이 십자가의 흔적이 없이

말씀 지켰다는 둥

안식일 지켰다는 둥

십일조드렸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 (맏아들)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부자청년)

바로 이런 번제와 제사라는 선악을 그대로 가지고 주장함으로써

 

진노의 그릇 역할을 톡톡히 하는 겁니다

 

이렇게 지옥이 땡기는 자 또한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 곧 행함의 책처럼 자신의 행함을 의지하지만

 

반대로 사랑받기로 작정된 야곱은

자신이 행한 것을 쳐다보는게 아니라

주의 인애와 자비를 쳐다봄으로써

십자가의 피 용서 앞에서

재를 뿌리고 생일을 저주하면서

주신이도 여호와요 취할이도 여호와임을

그저 주의 믿음만 쳐다보는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 예수님의 피흘리심만 쳐다보는 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