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림돌, 스캔들 :  롯은 의인이 아니다?

부재성이(없음,단절,차단,삭제,지우개) 제대로 실감나게 (말씀의 운동력) 실상으로 증거 되네요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6 23:58:16,

소멸과 생성이 영생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봐야 할까요

그리고 롯은 의인이 아니다

신약에서 말한 의인이다 라는 말은 자기 의를 말하는 것이다 라고하는데 이것도 궁금하네요


답변 :  

(벧후 2:7, 개역)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거봐요 거봐

성화론자들의 특징이 인간의 행함에 대한 숙제를 실컷 선생질하였기 때문에
만약 롯을 의인 취급해 버리면 자기들의 주장들이 와르르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앞 뒤가 맞지 않는 논리적인 모순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도록 어쩔수 없이 그렇게 계속 주장을 해야만 일관성을 유지 할수가 있는 거죠.

(일관성 자체가 죄 가 되는 줄도 모르기에, 11월 12일 일관성 있는 바리새인 이라는 제목만 붙여놓고 정작 내용을 쓰지 못했는데 결국 철저한 일관성을 바리새인에게서 철두철미 하다, 성화론자들도 논리 일관성 빼면 시체임)

베드로가 롯을 의인이다 라고 한 이유가
바로 베드로 자신이 롯이 의인 되는 방식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셔서
소돔과 고모라에게 잡혀 있는 롯처럼
마귀의 밀까부듯이 까부는 그 손아귀에서
아브라함 투입시켜 라이언 일병구하기 하듯이
아브라함을 보내지 않았다면
구원될 수 없는 방식으로 롯을 꺼내고
롯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음에도 건짐받는 방식은
다윗 또한 롯처럼 철저하게 죄 아래 가두어서
단절과 절망속에서 건지시는 방식 외에는 없습니다.

일부러 주님은 어떠한 인간의 구원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건지시는 방식인데
인간들은 반대로 구원의 조건을 조금이라도 갖추어야 구원되지 않냐 라는 식입니다.

제가 강조했죠 반대의 길만 일부러 간다고
그런데 그 반대의 길이 불가능한 길이지
반대의 길이라고 하니까 선의 길의 반대의 길이면 악의 길로 가면 되지 않겠냐
그것이 또 법을 쥐는 방식이다 라고 했습니다.

반대의 길이란 인간들이 도저히 법(행함,선악)을 쥔 상태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길입니다.

그래서 요나의 표적입니다.

요나의 표적이란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야만 여호와의 구원의 가치가 비로소 생생하게 실감나게 작렬하는 곳입니다. 그곳이 어딜까요? 네 맞습니다. 지옥이요
음부의 권세가 작렬하는 곳에 들어가봐야 구원이라는 것이 실감이 납니다.
성화론자들이 장난을 치는 이유는 지옥과 대비된 새언약
죽음과 대비된 새언약이 아니라
자꾸 인간의 가능성과 연결된 새언약을 주장할려고 하다 보니
자꾸 자기 숙제인냥 가르치고 그것으로 결국은 돈벌이의 수단과 연결이 된다는 겁니다.

교회란 음부의 권세와 대비가 되어야만 합니다.

원수의 성문을 열지 않는 교회는 가짜입니다.

성도란 죄와 싸우지 않는 자는 가짜 성도입니다.

결국 죄가 뭔지도 모르기 때문에
싸움의 방향도 다른 겁니다.

자기들의 그런 주장 조차도 죄가 되는 줄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만약 롯을 의인 이라고 주장하게 되면
자기들이 한 짖이 죄가 된다는 것을 시인하게 되는 결과가 되는 거죠.

반대의 길을 좀더 설명해 보면 다음 마태복음 공부에 다룰려고 한 것이지만

결혼이라는 한 몸을 가지고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시험 합니다.
 
바리새인의 한 몸 개념은 결국 한 몸 되자 라는 오늘날의 성화론자들의 사고와 같습니다.
되자 라는 의미는 결국 인간들의 자기 숙제인 셈이기에
교회에도 적용해 보면 일종의 단합대회인 셈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 몸을 자기가 취사선택이 가능해 집니다. (자유의지)
취사선택이 가능해 지기에 결국은 버리는 것도 자아의 결정에 따른 결과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혼증서를 써준 이유는 저들의 완악함 때문이지
하나님이 짝 지어준 바를 인간이 나눌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것을 빌미로 다른 여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자의 검은속셈을 예수님은 지적했고
바리새인들은 그런 인간의 중심을(사실상 그렇게 질문하는 그 바리새인의 마음 중심이 그것으로 가득차 있는 겁니다.) 꿰뚫치 못하면서 한 몸 되자 운동을 펼치고 있기에
오늘날 성화론자들의 한 몸 되자 운동은 사실상 우상과 하나 되자 라는 식과 같은 겁니다.
왜냐? 그들의 하나님이 바로 우상인 마귀이니까요

자 이렇게 하니까 제자들이 가관입니다.

(마 19:10, 개역)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제자들은 한 바퀴 더 돌립니다. 계산을 더 앞서갑니다.
반대의 길이니까 그럼 장가 안 가면 되겠네요 라고
안가는 것 뭐 어렵냐고 그것 마저도 인간의 행함의 숙제에 둬 버립니다.

바로 이런 점을 제자와 베드로가 톡톡히 그 역할을 해 줘야
우리들 또한 저 성화론자들의 발상이 왜 죄가 되고 거짓인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지금 이 글을 읽는 성화론자들이 있다면 무슨 소리인지 모르도록
도저히 이해불가능한 의미로써 지금부터 설명해야 겠지요

예수님의 답변은 장가 라는 결혼 개념을 인간은 도저히 받을 수 없다 곧 취사선택의 개념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행함의 숙제 개념이 아닌 셈이지요

(마 19:1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마 19:12, 개역)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오직 타고난 자라야만 된다는 겁니다.
어미 태부터 고자가 된 자
사람이 만든 고자 즉 인간 자기 스스로의 고자가 아닌 타인에 의한 고자 예로 내시 이지요
그 다음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 여기서 스스로 된 고자 라고 하니까 스스로가 마치 인간 스스로인줄 알면 큰 착각입니다.

천국이 주체가 되지 인간이 주체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천국이 그를 고자 되게 만들었다는 취지입니다.

자 그럼 이 3가지 고자의 의미가 뭐냐?

바로 할례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할례 마저도 인간의 포경 수술 생각하듯이 생각한
자기들의 취사선택과 연결된 인간의 숙제로 본겁니다.
이것과 결혼의 의미, 장가의 의미를 다루었던 겁니다.

왜 이것이 중요한고 하니 바로 위의 질문의 롯과 또 생성과 소멸을 영생으로 연결 시키는 이유도 모조리 인간 하기 나름이다 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바리새인과 같고
이 바리새인을 통해서 예수님이 악마의 세계를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바로 한 몸이란 예수님 자신의 숙제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의 숙제로 보는 개념과 차이를 두기 위함입니다.

또 특히 할례 개념은 율법의 전부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도바울이
자주 할례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옛언약과 새언약을 대비시키는데 있어서
엄청나게 중요하게 할례의 의미를 다루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할례란 두 가지의 종류가 있는데
그냥 할례 곧 인간이 자력으로 할 수 있는 할례와
마음 판의 할례 곧 인간의 손 댈수 없는 고유영역으로써의 할례

이 두 할례로
두 나무의 상황으로 만들 듯이
옛언약의 속성과 새언약의 속성으로써 극과 극으로 대비시키는 겁니다.
새언약이 덮친 상태로써 곧 마음 판의 할례를 외부에서 덮쳐진 자는
이 두 할례의 차이를 알게 되지만

새언약 곧 십자가의 의미가 덮쳐지지 않은 자는
두 할례를 둘 다 인간의 숙제로 자기들이 할 수 있는냥 보고 있고 또 그렇게 가르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니 롯의 구원방식이 아니면 구원은 없는데
얼마니 이 의미가 알 수 없는 방식이였으면
롯의 구원방식을 일부러 피하는 인간의 행함의 방식의 구원이기에
이 걸림돌과 같은 스캔들인 롯이 구원되는 방식을
일부러 빼는 길만의 구원방식을 가르치는 거죠

거봐요 그러니까 마귀는 롯이 구원되는 방식이 뭔지 모르기에
비밀을 알수가 없는 겁니다.

결국 모른다는 이유로 마귀와 한 몸이다 라는 그들의 한 몸인 마귀를 끄집어 내는 방식입니다.

한 몸인 누구와 하나인지를 끄집어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롬 2:29, 개역)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롬 2:29, 쉬운) 『마음으로 유대인인 사람이 진정한 의미에서 유대인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마음에 받는 할례가 진정한 의미의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롬 2:29, 현대인) 『오히려 마음에 참된 변화를 받은 사람이라야 참 유대인이며 기록된 율법이 아닌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칭찬을 사람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받습니다.』

(롬 2:29, 현대어) 『참유대인이란 그 마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놓여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표면적으로 할례를 받아 몸의 일부를 잘라 낸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생각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의 생활이 변화된 사람이야말로 비록 사람들에게는 칭찬받지 못한다 해도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인 자가 할례받은자인 유대인인데 곧 신부 곧 한 몸인데
참유대인이 바로 칭찬 곧 유일하게 주님이 인정한 방식인 십자가의 방식만이
이는 내 기뻐하는 자요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다 라는 방식인 한 몸의 방식인 겁니다.

그렇기에 의문의 증서의 방식과 대비된 차이로써 사도바울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왜 할례를 말하고 또 마음판의 할례를 말하는가? 할례란 십자가의 의미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고
또 할례 개념은 곧 나의 거룩한 신부이다 라는 주님이 말하는 한 몸의 의미와 연관이 됩니다.
그것을 말하고자 인간이 말하는 한 몸(결혼)과 반드시 대비 시키는 것이 바로
마태복음 19장인 셈이지요.

그래서 제자들이 장가 안가면 되겠네 라고 반대의 길을 또 엉터리로 해석하는 것을
또 다시 반대로 즉 불가능으로 만드시는 겁니다.

이 버릇은 그 뒤에 또 나옵니다.

부자청년에게 모든 것을 가난한 자에게 버리라 라고 하니까?
왜? 율법의 완성은 남을 사랑하는 것이니까요
즉 불가능한 겁니다.

남을 사랑해서 율법 지키는 인간은 없고
성화론자들처럼 자기 의를 쌓고 구원의 알리바이를 형성하기 위한
그야말로 악마중의 악마 다운 생각으로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기에
계명을 지키는 그 취지인 그들의 한 몸이 된 그 신랑인 마귀를 끄집어 내기 위해서
말한 것인데

제자들 특히 베드로가 자기 신랑인 마귀는 들킬 생각은 없고
아 그럼 반대의 길로만 가면 되겠구나 라고 가능으로 본 또 법(행함)을 쥐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여 저는 물고기 잡는 그물도 버리고
가족도 버리고
재산도 버리고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자기부인을 가능성으로 행함으로 해석해 버리는 겁니다. 법으로 해석한 거죠.
역시 반대의 길로 가 봤자 그 또한 법의 반대가 아니라 또 법인 셈인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진짜 반대의 의미를 말해 줍니다.

(마 19:22, 개역)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마 19:23, 개역)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마 19:24, 개역)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마 19:25, 개역)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마 19:26, 개역)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마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치 이런 베드로의 질문은 몇 번 용서 해야 합니까 저는 7번 했는데요 라고 하는 것과 같죠

그렇다면 예수님은 70 곱하기 7 이라고 답한 이유는 490번 하라는 뜻이 아니라.
용서란 너가 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내(예수) 숙제이므로
예수님의 숙제 대상이 바로 너 베드로 다 라는 취지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남을 용서할 입장이 못되고 (철저하게 갇힌 롯이기 때문에)
도리어 용서 받아야만 할 입장 뿐이다 라는 겁니다.
건방지게 용서 받아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자가
그 자리가 싫어서
용서 하고픈 자리인 구원자 자리에 있고 싶어 하니

도통 이 땅에 구원자가 찾는 죄인은 없고
모조리 아무 쓸모짝도 없는 의인들만이 가득하다는 겁니다.


의사는 환자에게만 의미 있지
의사들 자기들끼리만 있다면 더 이상 의사 라고 부를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주의 이름이란 죄인에게만 해당 되는 죄인만이 부르는 이름입니다.


자 그렇다면 소멸과 생성 이라는 창조는 곧 예수님 손에만 달려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그 분은 흥하고 나는 쇠 하여야 마땅하다고 합니다.
즉 창조주는 이 분이고
자신은 바로 이 창조 앞에 무능한 자 임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성화론자는 소멸과 생성에도 관여하고픈 취사선택으로 보는 거죠.

즉 영생도 자기가 생명나무 따먹는 자기 숙제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생명나무 영생나무 되신 예수님이 얼마나 일을 잘하셨는가를 볼려면
얼마나 제대로 막았는가를 보시면 됩니다.

어느 정도로 제대로 막았는가? 제대로 차단했는가?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예수님은 철저하게 막는 것에 집중 하십니다.

마치 선악과 먹고 난 뒤에

부랴 부랴 생명나무 치워 버리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말씀을 씨앗처럼 뿌려놓고
엉뚱한 놈이 이 말씀의 씨앗을 취하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기도하듯이

저번에 말했죠?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 이삭의 한 몸을 찾는데 있어서
자신은 철저한 무능함을 철저하게 고백하는 것이 기도이고
또 그 무능함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천사의 개입이다 라고 영의 일이다 라고

마치 예수님이 엘리에셀처럼 자신과 한 몸인 잃어버린 자기 양 자기 신부 찾는데 있어서
기도하고 기도하듯이 하나님 아버지에게 맡기고 기도하고 소망하는 겁니다.

뭐라고? 예언 대로만 되게 하소서
예언 되지 않은자 곧 예정되지 않은 자
이미 한 몸 이 아닌자는 절대로 복음의 씨앗을 먹고 영생 못하도록 해주세요
라고 철저하게 막고 제대로 막는 모습을 통해서
영생을 증거 하는 겁니다.

결국 소멸과 생성이라는 창조성은
인간이 해석 할 수가 없습니다.

하겠다고 달려든다는 자체가
예수님도 기도할 정도의
두려움과 떠시는 것을

자신들은 건방지게 차단된 영생나무를 선악과 나무 취사선택으로 다루듯이
떡 주므르는 모습을 보면

가증한 것이 세워졌다고 보시면 됩니다.

(마 24:15, 개역)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 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막 13:14, 개역)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서지 못할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결국 성화론자야 말로 가증한 그 자체로써
주님이 일부러 주변에 빽빽하게 깔아 놓는 이유는?

그렇죠 차단하기 위함입니다.
생명나무가 중요하지 인간은 하등 중요치 않습니다.

생명나무는 이 철저한 차단 성으로만 그 가치와 진가를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아무리 인간들이 해석해도 알수 없는
차단된 의미 라고 보시면 됩니다.

해석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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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00:00:45,

롯은 주님의 씨가 없기에 그렇다고 하거든요

답변 :

해석 불가 이기에
롯은 아무리 봐도 인간들의 구원관과 반드시 맞지 않아야 하는 거죠.

철저한 차단

이것이 생명나무의 특징입니다.

철저한 공개는 마귀 방식이고
도리어 마귀야 말로 철저하게 공개 당하는 입장에서

십자가는 그 마귀의 모든 내막을 까발려 놓는 겁니다.

어제 설교가 생각 나네요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8강-사63장,7-14,(모세의날)-isa081126.mp3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8강-사63장,7-14,(모세의날)-isa081126.wmv
http://media.woorich.net/성경강해/이사야-2005/168강-사63장,7-14,(모세의날)-isa081126.hwp

구약의 광야 교회의 상황을 지금 현재 신약에서 그대로 적용하는 이유가
바로 모든 상황을 두 나무의 상황으로 배치시키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또한 약속 이니까요

선악나무에 해당되는 뱀의 후손과
생명나무 되신 여자의 후손인 예수님과의 전쟁 구도

이것이 언약입니다.


(참 소멸 생성 이라고 하니까
영혼불멸 영혼소멸도 생각 나네요

그거 다 엉터리입니다.

영혼불멸은 모든 종교가 주장하고
그것이 바로 부활 개념인 셈이니까
부활 증거하지 않는 종교는 돈 욕심을 포기하겠다는 취지와 같지요.

보험 회사는 돈 포기 죽어도 못합니다.
자기의 하나님이 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국으로 꼬시고 지옥으로 협박을 해야
소멸 생성을 자기들이 손에 쥔냥
선(생성)악(소멸)의 법, 선악의 행함을 손아귀에 꽉 쥐어야
말이 먹혀드는 겁니다.(사람이 법을 쥘려는 이유는 딱 하나입니다. 법도 안 지키고 말빨 먹혀들기를 바란다면 요행을 바라는 거죠, 그래서 말빨이 어느정도로 잘 먹혀드는가의 여부는 결국 법을 더더욱 강하게 또한 실천을 많이 하면 할수록 상대방이 코 끼이는 자석처럼 턱 하고 단번에 달라 붙는 겁니다.)

괜히 마이다스의 손을 그들에게 허락한게 아닙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야만 하는 (반드시 절대로 요행=거져먹는, 요행을 철저하게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행의 결과였다 라는 것을 뒤짚어 씌우는 죄의 소원이 덮치는 방식)(반대로 롯은 아무리 봐도 요행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데 보이지 않는 아들의 소원이 덮쳐서 아들의 목숨까지 버리시는 그 수고와 열심과 귀하게 귀하여 여기시는 그 의사의 땀방울과 모든 열심을 퍼부어서 딴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방식의 비밀로써 증거 됩니다. 무시험 합격에 주님의 철저한 섬김이 안보이게 내장 된채로 곧 피 뿌림으로 이루심)

차단의 일을 멋들어지게 하시는 거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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