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하나님의 궤

2009년 12월 6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6:1-3

(삼하 6:1, 개역) 『다윗이 이스라엘에서 뺀 무리 삼만을 다시 모으고』
(삼하 6:2, 개역) 『일어나서 그 함께 있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바알레유다로 가서 거기서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
(삼하 6:3, 개역) 『저희가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하나님을 모셔온다는 것은 가당치 않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어디에 계신다면 그 곳 말고는 다른 곳에서는 아니 계신 것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어느 곳에 계신다는 말은 다른 곳에는 하나님이 없는 셈이 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소지하고 독점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궤를 소지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법궤를 소지한 사람만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님을 빼앗긴 셈이 됩니다. 이것은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압수당하거나 포획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그 궤는 그룹들 사이에 좌정하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름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하늘의 천사들의 호위에 둘러싸여 계십니다. 따라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 법궤를 소지한 자에 의해서 포획당할 일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법궤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잠시 여기 배추 상자와 법궤를 비교해봅시다.

둘 다 상자입니다. 배추상자에는 배추가 담겨 있다면 그렇다면 하나님의 상자에는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하나님을 붙잡아서 상자에 담아 이리저리 이동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고 한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담은 상자를 지상에 마련하신 것입니까? 쉬운 예를 들면, 무대에서 노래하는 가수에게 천장에 달린 조명기구가 방향을 바뀌어가면서 따라가면서 비쳐줍니다.

이럴 때 결코 ‘가수가 조명빛을 가지고 다닌다’고 말할 수는 없고, ‘조명이 그 가수를 떠나지 않는다’고 해야 옳습니다. 지상에 있는 법궤라는 상자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불리운다고 되어 있습니다. 상자 안에 뭐가 담기느냐 하며는 곧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해야 될 일이 담깁니다.

물건이 담기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앞으로 하실 일이 그 물건을 증거물로 하여 드러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지상에 드러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군의 하나님’이란 쉽게 말해서 많은 천사들의 진두진휘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보면 됩니다.

많은 천사는 영적 전쟁 할 때 동원됩니다. 따라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의 전쟁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전쟁의 의미를 드러내는 것이 지상의 법궤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벌린 전쟁이 무엇일까요?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과 골리앗이 맞짱 떤 전쟁이 나옵니다.

남들 보기에 분명히 1:1로 붙은 싸움입니다마는 정작 싸움에 나선 소년 다윗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전쟁은 ‘만군의 하나님’에게 속한 일이라고 했습니다. 즉 골리앗을 이긴 자는 자신이 아니라 만군을 지휘하시는 하나님의 몫이고 공로요 능력이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젖을 먹는 갓난 아이가 강도를 물리칠 수 있습니까? 어느 강도가 자기 생각에 분명 빈 집이라고 여겨서 침입하다가 어떤 인기척을 느끼고 화들짝 놀라면서 그 집에 뛰쳐나왔는데 나중에 다른 사람이 가보니 갓난 아이가 잠에거 깨어 혼자 방에서 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갓난 아이가 강도를 이긴 격이 될 것입니다. 시편 8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젖먹이 아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원수를 물리칠 수 있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런 기능을 만군의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런데 이 만군의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벌릴 때는, 힘의 우세에 의존해서 하는 인간들의 전쟁과 전쟁 방식이 확연히 다릅니다.

여호수아 11:20에 보면,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벌리시는 전쟁은 ‘붙이시는 전쟁’입니다.

‘붙이시는 전쟁’이란 마치 자석이나 지남철처럼 당겨지는 사람만 구원받아 천국가고 그렇지 않고 스스로 오겠다는 자들은, 즉 당겨지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해도 구원되지 못하고 저주받아야 하는 전쟁입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술집에서 술취한 사람이 행패를 부려서 경찰서에 신고를 하게 되면 경찰관들이 나타나서 술 취한 그 사람만 잡아갑니다.

하지만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출동하시면, 비록 그 술집이 조용해도 그 근처에 있는 모든 깽패들이 몰려들게 만들어서 그들을 저주케 하는 전쟁을 벌리게 됩니다. 이런 붙이시는 전쟁만 하시는 하나님을 만약에 인간들이 기어이 자기 수중에 소지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그 사람 또한 하나님의 적이 되게 됩니다.

왜냐하면 만군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의 안목에서 맞쳐드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성경에서 답을 원합니다. 예를 들면, 사업가들에게 맞는 성경귀절, 혹은 예술가에게 맞는 성경 구절, 같은 지침서 같은 것으로 따로 모을 수 있다고 여깁니다. 이는 인생에서의 해답을 성경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문제 자체를 만들어내는 식으로 일하십니다. 즉 “너희들은 답을 찾을 그런 처지에 있지 않다. 나 하나님은 너희들이 궁금증을 풀어줄 그런 상담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은 자체가 문제거리입니다. 인간들은 절대적 기준을 자신이 갖고자 합니다. 법궤를 소지하겠다는 의도도 같은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 원하는 답은 본인들이 여전히 뭐가 문제거리인 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얻고자 하는 답일 뿐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기준은, 답은 만군의 하나님 소관입니다. 배추 상자 안에는 배추가 들어있지만 법궤 안에는 십자가가 들어있습니다.

누구든지 십자가 자신 분으로서 예수님의 의의를 모르면 지옥갑니다. 이 소식이 지남철이요 자석 기능을 하면서 영적 전쟁은 진행됩니다. 오늘날 성도들 속에 법궤가 들어있습니다. 곧 십자가입니다. 성도가 법궤를 소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법궤가 성도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통 자체가 이미 하늘의 정답으로 만들어진 몸통임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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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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