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기도 (시편 88편)
죽어야만, 잃어버림받아야만 부르짖게 되는 노래 (희년, 성령의 때)
(시 88:10, 새번역)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시 88:11, 새번역)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파멸'. 히, '아바돈'』
(시 88:12, 새번역)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시 88:1, 개역)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레 맞춘 노래]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시 88:2, 개역)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시 88:3, 개역)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나의 생명은 음부에 가까웠사오니』
(시 88:4, 개역)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함께 인정되고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
(시 88:5, 개역)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누운 자 같으니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끊어진 자니이다』
(시 88:6, 개역)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데 두셨사오며』
(시 88:7, 개역)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셀라)』
(시 88:8, 개역)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 가증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시 88:9, 개역)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손을 들었나이다.』
(시 88:10, 개역)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시 88:11, 개역)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시 88:12, 개역)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 88:13, 개역)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시 88:14, 개역)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시 88:15, 개역)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시 88:16, 개역)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시 88:17, 개역)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시 88:18, 개역)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
때 라는 것은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종말의 사건
즉 그 어떤 인간의 경험 속에서도 나올수 없는 것이 때(종말)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한 인물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 본문처럼 가장 절망 JM 의 상황에 놓여졌다는 것은
곧 한 인물이 그 속에 놓여졌기 때문에 덩달아 찬양자가 그 죽음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그 인물이 아니다면 그 속에 (스올=지옥) 놓여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상대적으로 이 한 인물과 상관이 없는 자는 상대적으로 어디에 놓여졌다?
천국과 같은 배부름 속에 놓여졌다는 겁니다.
악인의 형통함에 실족할 정도였다고 앞의 글들에서 언급했는데
이제는 악인의 형통이 아니라 악인이 아예 천국에 있고
찬양자는 아예 지옥으로 떨어져 사망의 그늘 속에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지는 때 사건이다?
한 인물인 예수님 때문이다는 겁니다.
자 이래도 예수님 믿겠습니까?
욥의 고통, 아토피도 죽을 맛인데
이건 아토피 저리가라입니다.
욥의 고통은 고통 축에도 안끼인다는 겁니다.
이래도 예수 믿겠냐 말이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상대적인 저들의 미움 속에 들어오는
저들을 자극하는 말이지
사실상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서가 아니라
불가능 그 자체를 불가능성으로써 누리는 것은
내 믿음이 아닌
예수님의 믿음 때문이다는 겁니다.
내가 예수 믿고 싶어서 믿은게 아니라
믿기 싫어도 믿음이 나에게 덮쳐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선물이라고 표현하는데
은사란 미움받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한 인물의 운명이 덮쳐졌기 때문에
내 운명은 날라가 버리고
그 한 인물의 운명을 그 불가능을 누리게 되는 삶 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찬양자는 원인도 없는 결과로써의 절망을 격게 됩니다.
시편 88편은 시편 중에서 가장 암울한 내용이다고들 해석합니다.
왜냐하면 내용이 없이 그냥 결과만 나열이 되어 있으니
아예 손을 댈 수가 없는 그 자체
불가능의 고통 그 자체이다는 겁니다.
고통을 당하는 이유가 그 내용으로써 파악이 되어야 하는데
파악할 내용이 없는 겁니다.
미움을 받는다면 그 원인이 있음으로써 미움이 이렇게 발생하는구나 라고 이해가 되는데
내용이 없다 보니
까닭없는 미움이기 때문에 무조건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무조건 싫다 말이죠.
억울하게도
미움을 퍼붓는 자들이 싫어서 무조건 싫은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무슨 내용이라도 파악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무조건 싫은게 아니라
억울하게 미움 당하는 자가 무조건 싫어서 고개를 돌리게 된다는 겁니다.
우리들 역시나 마찬가지입니다.
가해자가 싫어서 얼굴을 돌려 숨겨버리는게 아니라
피해자가 오히려 더 싫어서 다들 고개를 돌려버린다는 겁니다.
이 시편 88편을 유식하게 고상하게 해석하기를 숨어있는 하나님 이라고
은폐한 하나님이라고
루터의 표현, 칼 바르트의 표현을 참 배부르게 인용들을 하고 있지만
물론 다른 성경구절에서는 몰라도
적어도 시편 88편 앞에서는 그야말로 배부른 소리입니다.
정작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 앞에서 과연 그딴 배부른 소리가 나오냐 말이죠.
정작 욥도 그런 표현을 못 쓸 판국이다 말이죠.
얼굴을 아예 돌려버렸다니깐요
외면해 버렸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상에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울부짖음에
아무런 대답이 없으심이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도 외면당하는 판국에
우리는 마치 이런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는 버림받는 예수님을 실로암 소경 다루듯이
저 버림받음은 곧 얼굴을 돌리심은 숨어버리시는 아무런 대답도 안하심은
저 예수가 날때부터 죄인인지? 아니면 자기 죄로 인해 소경됨인지를
배부르게 신학논문꺼리로 교리논쟁꺼리로 삼듯이
숨어계신 하나님
은폐하신 하나님을 운운하고 있다는 겁니다.
마치 남의 운명인냥 말이죠.
남 보듯이 하더라 말이죠.
물론 어쩔수 없어요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나선다고 해서 변호가 될 것 같으면 벌써 했지요.
하나님 조차도 얼굴을 돌려버렸는데 ~~~~~~~
우리는 그저 솔로몬 재판의 가짜엄마기생처럼 물개박수나 치면서
좋은 신학논제꺼리 하나 발견했다고 물개박수 짝짝짝 기뻐할 뿐이지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기 때문에
그저 좋은 설교꺼리로만 여길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카다가 시편 88편 찬양자 본인이 당해버리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구차한 내용꺼리를 넣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짧고 굵은 외마디 뿐입니다.
헉 ~~
아파서 으아악 하고 크게 고함을 외칠 틈도 없이
심장을 단칼에 찔려 심장에서 바람빠지듯이 나오는 소리입니다.
이미 목소리는 상실해 버린채
죽음이 SSG 하고 쳐들어 와서
생명의 심장이 죽어버린 바람 빠지는 소리로써
들릴 듯 말듯한 소리인 헉 ~~~~~~
HHG
읽어바요 ~~~
읽는 순간 심장에 바람이 HHG 하고 빠지는 겁니다.
자 여러분 우리는 이해를 해야합니다.
거짓선지자의 평강이냐
아니면 다윗의 버림받음이냐?
당연히 우리 역시나 거짓선지자의 평강을 쫏는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은 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또렷합니까?
악마의 형통이 자극적인게 아니라
십자가의 죽음이 더 자극적인 겁니다.
악인의 형통 따위는 족히 비교도 안될 정도로 또렷하고 명료합니다.
그래서 다들 외면하는 겁니다.
하나님도 얼굴을 돌려버리고 외면하는 판국에 우리인들 별수 있냐 말이죠.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버리고
얼굴을 숨겨버리는
싫어버린바 된 겁니다.
우리 또한 미워했다는 겁니다.
왜? 같이 당할까봐~~~~~
이것이 숨어계신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얼굴을 숨기고 돌려버리심)
그렇게 고개를 돌린다고 그 한 인물의 운명이 우리 운명이 안될줄 아십니까?
오히려 더 신나게 누려야 할 판국이다는 겁니다.
원인이 없을수록
내용이 없을수록 더 좋다 말이죠.
오히려 원인이 있으면 구차해 집니다.
깔끔하지 않아요
걸리적 거리기만 할 뿐이니
차라리 더 낫다 말이죠.
그냥 죽으면 되지 뭐
주인공도 아무 원인 없이, 까닭없이 죽는 판국에
엑스트라다 주제에
으아악악 만 10시간째 외치기만 하고 아무리 죽으라고 싸인을 줘도 안죽고 있으면
감독이 컷 하고 끊어버리지 않겠냐 말이죠.
감독이 그냥 죽으라 하면 이유도 알 필요가 없이 그냥 죽으면 됩니다.
창세전에 쓰여진 대본이 이미 다 기록이 되어있으니
구차하게 왜 나는 죽어야 합니까? 라고 따질 필요가 없다 말이죠.
차라리 원인도 없고
연고도 없고
이유도 없고
까닭도 없고
내용도 없는 것이
깔끔해요 명료하고 또렷하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증거인 겁니다.
제가 제목을 죽은 자의 기도라고 했습니다.
벌써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있죠.
어떻게 죽은 자가 기도를 할수 있냐 말이죠.
죽었으면 기도를 못하니까 말입니다.
입도 눈도 이미 다 감아버린 상태인데
어떻게 기도하냐 말이죠.
올스톱 멈춰져서 단절이 된 상태인데 말입니다.
입이 열려야 기도를 할 것 아닙니까?
입이 닫혀버렸는데 ~~~~
심장이 찔려 바람이 HHG 하고 헉 ~~~~~ 빠져버렸는데
어떻게 기도하냐 말이죠.
네! 맞습니다.
인간이 하는 기도는 원래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기도한 적도 없고요.
십일조나 율법 단 한개라도 지킨 인간이 있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불가능한 기도를 하게 하시는 방법은 바로
이것은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여~~~
임의로 부는 성령의 바람이 심장을 갈라서 나는 소리여 ~~~~
HHG
심장 곧 생명이 죽어서 나는 소리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인 거죠.
상한 심령 말입니다.
기도는 한 인물이다 말입니다.
기도를 인물이다 라고 하면 또 문법 파괴라고 달려들테지요.
네 그래야 합니다. 달려들도록 하기 위함 입니다.
기도는 어디까지나 인물이고 찬양도 어디까지나 인물입니다.
그러니 인간과 연결 시키지 말자 말이죠.
다른 인물을 쳐다봐야할 판국입니다.
자기를 쳐다볼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오히려 죽어야만 나오는 것이 기도입니다.
시편 88편 보자마자
(시 88:1, 개역) 『[고라 자손의 찬송 시 곧 에스라인 헤만의 마스길, 영장으로 마할랏르안놋레 맞춘 노래]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야로 주의 앞에 부르짖었사오니』
(시 88:2, 개역) 『나의 기도로 주의 앞에 달하게 하시며 주의 귀를 나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소서』
이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부르짖음은 어디까지나 주님의 아이디어이지
인간에게서 나올수 없습니다.
출애굽기에서 부르짖음은 그야말로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의 등장 때문에 시작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기여이 애굽왕 바로왕을 강퍅케 함으로써
그들의 생명이 위태로움을 격게 됨으로써 나오게 되는 부르짖음이다는 겁니다.
심장이 안 찔리면 나올수 없는 것이 부르짖음이다는 거죠.
자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스스로가 이런 부르짖지 않고서는 못배기도록
악마 애굽왕 바로를 강퍅케 했다는 겁니다.
악마에게 17대 1로 싸우라고 17이라는 힘을 주었다 말이죠.
악마에게 힘을 팍팍 주었습니다. 강퍅케 말이죠.
실로암 소경 사건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라는 때 사건의 의미도 바로 이런 의미이다는 거죠.
그러니 이 시편 찬양자는 하나님의 아이디어에 말려들어서 부르짖게 되는 겁니다.
시편 88편 첫구절부터
아침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시 88:13, 개역)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시 88:14, 개역)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시 88:15, 개역)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렵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또 소시 어릴적부터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침과 소시 곧 어릴적은, 출발, 처음출발 자체가 죽음이였다는 겁니다.
갑자기 가스펠이 떠오르더라 말이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품이 좋으나이다.
시편 92편을 인용해서 만든 가스펠인데
지금와서 생각해 보니 참 배부르게 부른 찬양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배 쫄쫄 굶어서 부르라는 말이 아니라
불가능한 노래를 불렀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을 시편 88편에서 부른다면
물론 그런다고 될것이 아니지만
아주 아주 다급하게 부르는 모습이 시편 88편이지 않냐 하는 생각입니다.
가락이 아름답고 부드러운
너무 평온하게 부른다는 것은
아침의 다급함이 아니다는 거죠.
즉 제가 말하고자 하는 아침은
상상을 초월하는 죽음의 침범이다는 겁니다.
처음출발 하루의 출발 부터가
초장부터 죽음으로 출발하더라 말이죠.
시편 초반에 아침에 제발 살려달라고 아침부터 외치는 울부짖음이라면
일요일 쉬는날에 평온하게 기지개를 펴면서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는 그런 천국같은 상황이 아니라
아침부터 헬리콥터가 추락해서 아파트에 떨어져
날벼락을 맞아 눈뜨자 마자 지옥이 되어버린
막 사람들이 막 죽어나가고 폭발하고 전쟁이 발발한 듯이
아침부터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라고 울부짖는 그런 상황
너무 너무 다급해서 갑자기 실어증과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쉰소리조차도 안나는
쇳소리 헉 만 반복되는
그런 다급한 상황
주님!! 제발 살려주세요!! 라는 아침 기도 (시편 5편)
http://crosslamb.tistory.com/1589
그 어떤 인간도 아침에 이런 기도 할줄을 꿈에도 몰랐다 할 정도로
이런 경우를 격는 일이 거의 없는
경험 자체가 불가능한
그래서 오히려 우리들 조차도 이런 상황을 당하는 자에게 얼굴을 돌려버리는
고개를 돌려 버리고
얼굴을 숨겨버리는
그 정도로 처참해서 아무도 나설수가 없는
그런 아침
이게 과연 아침입니까?
이것이 바로 기도
인간이 부르짖는게 아니라
부르짖음이 덮쳤을때의 때 가
곧 종말이
바로 아침이라는 사건의 때 라는 겁니다.
시간이 아니라
역사가 아니라
역사는 기술(기록)이 가능하고
편집이 가능하지만
사건은 편집이 불가능 합니다.
넣고 빼고 가위질이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원인이 없으니
내용이 없으니
그냥 결과만 덩그라니 나타났을뿐
기록할게 없어요.
결과 자체로 충분하니까
따로 보충설명의 주석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해석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여러분이 기도하면서 그 기도를 다시 주석을 다시거나
해석을 다십니까?
내 뱉어짐으로써 끝난 겁니다.
결과이니까 말이죠.
아이 타임!!!
취소 취소
수정해서 다시 기도할께요
이것이 아침에 가능할까요?
아침이라는 사건에
종말에
때에 가능하냐 말이죠.
아침에 지옥처럼 초토화 되었는데????
이것이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인애와 자비
즉 번제와 제사는 다 날라가 버린 상황이다는 겁니다.
밤에는 주의 성실함인데
참 기가막히죠.
주의 성실함이 뭐냐?
미워서 미워서 그 분노를 밤에도 삭히지 못하고
잠도 못자고 쫏아오도록 강퍅케 만든 것이 주의 성실함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까닭없는 미움 맞지요
연고 없는 미움을 만들려고
사울왕을 밤에도 쉬지 않고
배고픈 배를 더더욱 굶주리게 해서
잠도 안자고 쫏도록 만드시는 것이 바로 주의 성실이다는 겁니다.
아히멜렉 제사장과 85명의 제사장을 죽이고 또 그들의 연고자 또는 가족까지 다 죽여도
다윗 하나 못 죽이면 멈출수가 없는 배고픔이요 목마른 갈증이기에
어두움을 통과 할 수가 없도록 하신 것이 주의 성실입니다.
이유 없는 미움을 구체화 하심이 주의 성실하심이다는 거죠.
똑같이 우리가 얼굴을 숨기고 고개를 돌려버림은
사울왕에게가 아니라
다윗에게 그러했거든요.
우리 또한 그렇게 고개를 돌리도록 한 것이 주의 성실이다는 겁니다.
이래야 우리가 변명을 못하는 겁니다.
변명을 못할 정도로 무엇이 또렷하다?
물증까지 다 있으니 말입니다.
무엇이 밝히 보이냐 말이죠?
오늘 시편 88편의 수많은 설교자의 해석들을 보고서
기뻐하거나 감사하는 설교자가 없더군요.
그런데 이런 주의 성실하심에 우리는 감사 아니하고는 못배기는 겁니다.
십자가가 또렷히 밝히 보이시기 위해서
이런 일들을 주님은 성실하게 벌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미움을 구체화 하는 인자하심
한 인물의 운명과 하나로 묶어버리고자 미움을 또렷하게 하는 성실하심
예수님은 그래서 부활을 믿는다고 말로만 믿는다고 했던 마르다 마리아 에게
그런 가능성의 부활이 아니라
미움받는 부활을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3일을 땡땡이 칩니다.
그래서 이 부활을 미워하겠끔 되어 있다 말이죠.
그 3일의 간극 벌리는 주의 성실하심이라는 땡땡이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며 세리 매국노와 강도와 창녀와 죄인의 친구
곧 동류 이다 라고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냈다는 겁니다. 주의 오른팔을 나타냈다는 겁니다.
그래야 주의 인자하심을 미워할 것 아니겠습니까?
친구이니까 동류 이니까 저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미워하듯이
같은 친구를 미워할 수밖에 없는 거죠.
주의 인자하심 (얼굴과 얼굴의 만남, 긍휼과 진리의 만남)
주의 성실하심 (얼굴과 얼굴의 입맞춤, 의와 화평의 입맞춤)
참 신기하죠
아무도 고개를 안돌린자가 없고 얼굴을 숨겨버리지 않은 자가 없는데
바로 그 얼굴이 긍휼과 진리의 만남이고
아무도 안 미워한자가 없어서 그를 밤새도록 쫏고 쫏아가서 죽일려고 했는데
바로 그 한 인물의 얼굴이 바로 의와 화평의 입맞춤이라는 주의 성실이라니
이게 과연 믿으라는 소리이기는 하냐 말이죠?
믿겠다고 달려드는 인간들이 어디 한둘입니까?
미치도록 믿고싶다는 믿음의 달인들이 새 때까리인데
그런 인간은 믿음을 쪽쪽 다 비켜가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믿을 수 없는 믿음이니까 말입니다.
그런 불가능성을 오늘 시편 88편에서
내용 없이
까닭 없이
원인 없이
찬양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가스펠가수 중에서 이런 노래 할 수 있는자 있을까요?
오늘날 기도달인들 중에 이런 부르짖음을 하는자 있기는 할까요?
가스펠 가수가 왜 되었겠습니까? 먹고 살려고 즉 인정받을려고 말이죠.
미움 받을려고 가스펠 가수 된게 아니잖아요
은사 받았다고 우기는 자들 특히 목사들 다 그렇잖아요
과연 죽어야 찬양과 기도가 나오는
그런 찬양 그런 설교 그런 기도 하는 자 본적 있기는 있나요?
죽어야만 하는데?
죽으면 다시 살아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어떻게?
다시 산다는 것은
곧 부활은
죽은자에게만 해당되는 것인데
찬양이라는 것이 그래서 불가능한데
이 불가능을 찬양자는 겁도 없이 뻔뻔스럽게
HHG 심장에 바람이 꼿혀서
바림이 새어나가는 소리로써 외치는 겁니다.
종말 때에 말입니다.
제가 건방지게 앞부분에 두 세구절을 올렸습니다.
(시 88:10, 새번역)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시 88:11, 새번역)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파멸'. 히, '아바돈'』
(시 88:12, 새번역)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실렵니까?
죽었는데 기적 베풀어서 뭐하냐 말이죠.
죽은자는 의미 없다 말이죠, 누구 말 마따나 없는 것은 없는 거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의 답변은 응 그래 죽은사람에게만 기적을 베풀란다 라는 겁니다.
있음을 가지고 영광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없음을 가지고 영광 받으시겠다는 겁니다.
죽은 나사로에게만 예수님 자신이 부활임을 즉 미움받는 부활임을 나타내지
딴 사람은 오히려 그렇게 일부러 3일이나 땡땡이치는 예수님이 미운 겁니다.
다들 미워해서 거짓 눈물을 흘리는 연기를 펼칠때에
예수님은 더더욱 우십니다. 아이고 아이고 나 안볼란다
저런 거짓 눈물로 날 속일려고 하는 것 안 볼란다 라고
더더욱 저들의 거짓눈물에 더 나은 거짓눈물을 흘리십니다.
제가 더 나은 참된 눈물 흘리신다고 하지 않고
거짓눈물이라고 하는 이유는
참된 눈물은 상대적인 눈물이 아니라 독자적으로 자꾸 보기 때문에
저들의 거짓눈물에 더더욱 미움받는
세상을 악하다 증거했기에 예수님을 미워하는
그 미움을 구체화 하기 위해서 더 나은 거짓눈물이라고 표현한 겁니다.
저들을 보라꼬
막살아라 라는 표현은 안막사는 인간들만이 예민하게 반응하듯이 말이죠.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술꾼이고 세리와 강도와 죄인의 친구이다 라고
바리새인이 별명을 붙일 수밖에 없도록 하시는 주의 성실함 말입니다.
그래서 밤에 저들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결론을 짖는 거죠.
이렇게 밤에 벌어져야
주의 성실함 때문에 밤에 원수와의 전쟁이 벌어져야
새벽을 깨우는 주의 인자하심이 또렷히 승리하는 겁니다.
저들은 감사하게도 아침이 없어요.
이렇게 처참하게 아침을 망가뜨려도 아침이 없이
어두움을 통과하지 못하고 여전히 배고픈 늑대처럼
이유없이 배를 채우고자 먹고 먹고 밑빠진 장독대처럼 아무리 먹어도
아침을 맞이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물론 저들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멸절 당하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성소를 다 없애 버리고
시온 조차도 다 없애 버리고
심지어 시온 되신 예수님을 없애 버려도
오히려 존재를 없애버리니까
비존재로써 전체에 존재하게되는
오히려 더 퍼트리고 확대시켜버린 결과를 낳아버린 겁니다.
밟으면 밟을수록 더욱더 퍼지더라 말이죠.
이것이 번제를 원치 않고 제사를 원치 않는
주의 인애와 자비가 아침에 나타나는 겁니다.
물론 우리의 눈에는 아침부터 폭탄이지만
이것이 종말때에는 구원사건 십자가 사건이다는 거죠.
자 그럼 다시 한번
(시 88:10, 새번역)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시 88:11, 새번역)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파멸'. 히, '아바돈'』
(시 88:12, 새번역)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시 88:10, 새번역) 『주님은 죽은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시렵니까?
응 그래 그렇게 할란다 왜?
나사로를 죽여서 바로 뛰어가 부활케 만들어 부활교리를 부활신학을 믿도록 하는게 아니라
부활인 예수님을 미워하도록 했다 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믿음이듯이 예수님이 부활이라야
곧 부활이 인물이어야 미워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나 예수를 제발 믿어다오 라고 믿어달라꼬,
믿게만들려고 믿음주실려고 안달난게 아니라
믿도록이 아닌 미워하도록 미움을 구체화 시키는 주의 성실하심을 펼치겠다 라는 겁니다.
(시 88:10, 개역)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시 88:10, 새번역) 『주님은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겠습니까? (셀라)』
혼백이 일어나서 주님을 찬양하게 만들겁니까? 귀신이 일어나?
죽어서 찬양해 뭐하느냐 말이죠. 죽은 뒤에 떠도는 혼령이 찬양하길 바랍니까?
응 그래 귀신들린 딸 때문에 사마리아 흑암의 백성인 여인이 나를 찬양했다.
귀신 아니다고, 멀쩡하게 생명이 붙어있다고 외치는 인간들은 아무도 예수님에게 입맞추지 않았다 우짤래?
오히려 벙어리가, 눈봉사가, 귀머거리가 찬양자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다.
(시 88:11, 개역)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중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시 88:11, 새번역) 『무덤에서 주님의 사랑을,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님의 성실하심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 ㉡또는 '파멸'. 히, '아바돈'』
무덤 속에서 주의 사랑을 외쳐야 합니까?
어떻게 죽은 자의 세계에서 주의 성실함을 이야기 합니까?
와? 이야기 한다 와?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도 있지만
죽은자로 취급당했던 실로암 소경봐라
죽었는데 나를 보고 주를 외쳤지 않았냐?
흑암의 백성인 우물가의 여인이 주를 외치지 않았냐?
그럼 너희는 소경 아니다고 하면서 왜 주를 외치지 않고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지 않은 지옥백성이 아니다고 하면서
왜 주를 보고도 기뻐하지 않고 입맞추지 않았느냐?
이것이 주의 성실함이다.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성실함
(시 88:12, 개역)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시 88:12, 새번역) 『흑암 속에서 주님의 기적을, 망각의 땅에서 주님의 정의를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시 88:13, 새번역) 『주님, 내가 주님께 부르짖고, 첫새벽에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너희는 못하나
나는 할 수 있다.
주의 의를 알수 있다
암 그렇고 말고
잊음의 땅의 사마리아 사람이
주의 의에 입맞춤했듯이
다니엘 봐라 이스라엘의 향하지 않고도 주의 정의를 보았지 않았느냐?
이스라엘의 멸망 속에서도 거뜬히 주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는 의로움이시다.
인간의 의로움은 의문의 반복이라서 멸망 속에 놓여지면 당연히 끊어지지만
주님의 의는 인간이 실패했다고 멈춰지지 않는 의입니다.
이미 벌써 창세전에 다 이루어진 의이기 때문에
창세전에 네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더 기뻐하라 말이죠.
인간이 의를 세우는 것은 불법이다 말이죠.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말이죠.
인간의 의를 무시하고 깨뜨리시는 것이 예수님의 정의이다는 겁니다.
그럼 성화론이라든지 정의사제구현단 인간의 바른소리 이런 것들이
사실은 정의가 아니라
특히 민주주의 이딴것이 주의 의이기는 커녕
의문의 죽이는 것의 반복인 불법이다 말이죠.
막살지 않겠다 라는 것이 불법인줄 모르는 겁니다.
예수님의 정의를 인간에게 의라고는 일체 없도록 다 깨부수는 것이 예수님의 의입니다.
그래야 긍휼을 입히실 것 아닙니까?
인간의 의로는 어두운 밤을 통과 할수 없고, 새벽을 깨울수 없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맞이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은 다들 얼굴을 숨겨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거든요, 의문의 제사를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몇 개를 뽑아서 예를 들었듯이
사실상 희년 기쁜소식 은혜의 해에 해당되는 겁니다.
분명 절망입니다.
절망 맞습니다.
그 어디에도 기쁨과 연결 시킬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철저한 단절입니다. 차단입니다.
그런데 원인 없는 결과가 덮쳐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덮쳐졌습니다.
희년에 대상들이 바로 이런 자들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 개같다는 말은 더럽다
거룩이라는 구석은 단 하나도 없다. 성화 가능성이 아예 없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들에게 희년이 덮쳐졌습니다.
원인이 있어서?
내용이 있어서?
아닙니다.
그야말로 까닭없는 희년입니다.
기쁜소식이요 은혜입니다.
은혜 받을 만 해서 받는 은혜는 가짜죠.
인간들이 조작해낸 은혜입니다.
아무리 봐도 저 사람은 은혜받은자가 아닌데 라는 자에게 은혜가 덮쳐지는 겁니다.
가망 없는 자에게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이것이 복음입니다. 희년입니다.
이 기쁜소식은
절망인 자에게만 해당됩니다.
까닭없이 미움을 구체화 한 주의 성실하심이듯이
까닭없는 긍휼 또한 주의 인자하심입니다.
이것이 까닭없는 성령으로 인한 죽은자의 부르짖음입니다.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엘리야 때 때 때 때 때 곧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은
이스라엘 많은 과부도 아닌
이방인 많은 과부도 아닌
이방인 많은 과부 중에 단 한 사람 사렙다 과부 여인에게만 복음이 증거되고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엘리사 때 때 때 때 때 곧 이스라엘 많은 문둥병자도 아닌
이방인 많은 문둥병자도 역시나 아닌
이방인 많은 문둥병자 중에 단 한 사람, 단 한명의 문둥병자 나아만 장군에게 복음이 증거 되는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미움을 구체화 하는
분노가 가득하게 만드시는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이요 주의 성실하심이다는 겁니다.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응하게 하셨으니까 말입니다. 이것이 희년입니다.
그래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에게 가야
나머지 99마리 양이 이 선한 목자를 미워할 것 아니겠습니까?
미움을 구체화 하는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99마리의 까닭없는 미움이 구체화 되는 것은 곧 동시적으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 대한 이유없는 편파 편애입니다. 무조건적인 용서 입니다.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된 대로 응하게 하심인 겁니다.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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