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존자(안식의 주인)의 찬양 (시편 92편)
(시 92:1, 개역) 『[안식일의 찬송 시]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2,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3, 개역)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시 92:4, 개역)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
(시 92:5, 개역)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시 92:6, 개역)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시 92:7, 개역) 『악인은 풀 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시 92:8, 개역)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시 92:9, 개역)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흩어지리이다』
(시 92:10, 개역) 『그러나 주께서 내 뿔을 들소의 뿔 같이 높이셨으며 내게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시 92:11, 개역) 『내 원수의 보응 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일어나 나를 치는 행악자에게 보응하심을 내 귀로 들었도다』
(시 92:12, 개역)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시 92:13, 개역)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시 92:14, 개역) 『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시 92:15, 개역)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먼저 인간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찬양했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한 10년도 넘었지 싶은데 어떤 청년이랑 대화를 하는데
인간이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먼저 찬양하고 그 찬양에 대한 화답이 우리의 찬양이라고 했는데
그 청년이 말귀를 못 알아먹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아마 처음듣는 모양이라서 충격적이라서
반발성을 아주 강하게 표출하더라 말이죠,.
당연히 종교꾼들에게서 인간의 숙제를 먼저 강조하는 이야기만 듣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요.
인간은 찬양 할 줄 모릅니다.
그래서 들려줘야 합니다.
마치 아기 엄마가 아기를 위해 늘 노래를 불러주면
아기가 크면서 그 노래를 따라부르면서 화답을 하듯이 말입니다.
역시나 오늘 시편 92편에서 안식일의 찬송의 시 라고 했습니다.
결국 이렇게 안식일의 찬양을 가르쳐줘서 그것을 따라한 것이 인간의 찬양이지만
알고보면 주님의 찬양입니다.
안식일날도 못 지키는 주제에
예수 당신의 제자는 왜 안식일을 어기느냐 라고 하듯이
안식일이 뭔지도 모르면서 안식일을 지키고
찬양이 뭔지도 모르면서 노래를 부르는 셈이다는 겁니다.
결국 주인이 등장해야 합니다. 그것을 오늘 지존자 라고 시편 92편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존자! 무슨 의미 입니까? 왕이라는 의미입니다.
왕이란 외세에서 백성을 구하는 자입니다.
마치 의사는 죄인 곧 환자에게만 필요하듯이
왕은 자신의 왕됨을 지존함을 존귀함을 뽐내기 위해서
외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구하는 일에 대해 따봉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존자는 바로 원수 문제와 항상 연결된다는 점에서
지존자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원수를 만들어내어서 강퍅케 해
자기백성을 부르짖도록 만드는 겁니다.
지존자의 자작극이지요.
이것을 시편에서 자주 나오고 자주 강조했듯이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 이라고 했습니다.
밤에 원수를 깨부수는 일 곧 출애굽을 감행하시니까 말입니다.
밤에 지존자의 기능을 발휘하니까
깜깜한 밤에 빛을 비추이니 그 빛을 따라 가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따라와 놓고도 발뺌 할 수 없겠지요
누구든지 다 봤던 빛이니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리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노래하는 겁니다.
아침을 맞이하도록 하는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반대로 원수는 그 밤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밤을 통과 패쓰 못하는 겁니다.
패쓰 오브 데이 구원의 날을 맞이하지 못하는 거지요.
그래서 잠도 안자고 허기진 배를 무조건적으로 채울려고
밤에 쉼도 없이 쫏아오는 원수는 그 허기진 배를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배고픔 속에서 아침을 맞이할수 없는 영원히 어두움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역시나 또한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저런 의문의 죽이는 것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아니 못하도록 만드시는 주의 인자하심이다는 겁니다.
주님은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지
의문의 죽이는 제사나 번제를 원치 않는 겁니다.
자 이렇게 지존자는
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원수를 강퍅케 만들어서 주의 백성을 부르짖도록 하시고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으로 잠도 안자고 원수들이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서
끝까지 잡고자 뒤따르도록 하지만
주의 백성을 마치 빠다 기름 바른 듯이 잡아도 소용없이 미끄러져 놓쳐버리고
결국 어두운 밤을 통과 못하지만
주의 백성은 주의 인자하심으로 아침을 맞이하도록 한다는 겁니다. 빛을 말입니다.
이렇게 지존자는 자신이 행한 일을 노래하도록
먼저 이렇게 노래를 부른 겁니다. 찬양을 부른 겁니다.
이것이 안식의 의미이다는 겁니다.
안식의 주인이 등장해서 부르는 노래 말입니다.
구약은 이렇게 출애굽을 항상 언급해서
즉 원수를 언급해서 눈에 확확 보이도록 했고
시편 92편에서는 그 때의 출애굽을 다시 재현하는 방식에서 이렇게 노래하는 겁니다.
그런데 시편은 곧 예수님을 말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시편이니까
또 예수님이 안식이니까
신약에서는 어떻게 재현하겠습니까?
눈에 보이는 애굽의 군사들
구름 기둥 불기둥
웅장하게 스펙타클한 홍해를 가르는 블랙버스터의 장면
이런 것 이제 일체 없습니다.
그저 의도적으로 바리새인 코 앞에서
안식일날 일부러 제자들을 마침 배고프게 만들어서
안식일날 밀 이싹을 먹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구지 다윗이 사울왕에게 쫏겨다니면서 그런 극적인 장면 재현하지 않아도
예수님 본인이 다윗이고 바리새인을 사울왕으로 만들어서
역할극처럼 조그마한 연극 무대로 옮겨오면 되듯이 말입니다.
이제 그런 영화적인 장면 보다
땡전 한 푼도 들 필요가 없이 재현가능하다 말이죠.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뭔 놈이 돈이 그리 많이도 드는지 원.
심심하면 돈 달래
아주 마이너 적으로 소규모로 의미만 전달해도
충분히 십자가라는 초과잉적인 사건은 벌어진다 말이죠.
다 이루었다를 넉넉히 예수님은 이루시니까 말입니다.
그 정도로 인간의 악함이 거룩 뒤에 감추어져서 작용함을
십자가는 충분히 감당해 내더라 말이지요.
어리석은 지혜라는 십자가로도
인간의 악마성은 너끈하게 충분히 드러나는 겁니다.
그리고서
지존자의 찬양은
안식의 주인의 찬양은
제사와 번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로 물에 빠진 우리를 건지시는 겁니다. 그것도 안식일날 일부러 말입니다.
쉽게 말해서 안식일날 찬양 부르는 자들로부터 찬양이를 구하라입니다.
제사와 번제를 드리는 자들로부터 안식일을 구하고 찬양이를 구하라입니다.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하라입니다.
아마 그 청년이 지금은 중년이 되었겠지만
여전히 어려운 표현으로 들리겠지만
이런 충격적인 표현이 아니면
안식일이 아니라
안식의 주인을 생각하지 않는다 말이죠.
맨날 인간 숙제만 생각할 뿐이지
예수님의 숙제를
지존자의 숙제를 모른다 말이지요.
찬양을 찬양자들로부터 구하라 말이죠.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로부터 안식의 주인을 구하라 말입니다.
이게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그럼 지식적으로 알면 다 입니까?
지식적으로 알아도 소용없습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사건이 터져야 합니다.
터지게 되면
지식적으로 안다는 놈은 에이 너도 몰랐네 라는 결과가 터져나올수 있고
넌 모르지 난 알아 라고 너 모르는 놈이야 라고 낙인 찍힌 자가 결과적으로 알게되는 원인 없는 결과가 덮칠수도 있다 말이죠.
그러니 인간에 의해 좌우되는 결과란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그저 원인을 따질 뿐이니
원인을 어떻게 해서든 자기에게 끼어 맞출려고 할 뿐이다는 겁니다.
어제 메일로 질문이 와서 답변을 했는데
인격적인 만남이 뭐냐 라는 질문이였는데
제가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억수로 이 인격적 이라는 말 때문에
무지 속고 속아서
도대체 인격적이 뭐냐 라고 어떤 젊은 목사(손O식)에게 간절함을 담고 물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역시나 말을 어렵게 하던데.
저도 역시 성화론자들에게 속아서 무지 그 수준높다고들 하는 인격적 이라는 말에 세뇌 당할뻔 했는데
그냥 인간적으로 대한다 라는 것인데
이것이 신이라는 예수님까지 확대 되다 보니까
인간적이다 라고 하면 안되고 천박스럽고
수준을 높여서 인품있게 품위를 극대로 높여서 인격적이다 라고 종교적인 용어로
거기에다가 좋다 싶은 의미 가득 담아서
지도 모르고 남도 모르는 용어로 만들어서 세뇌 시키더라 말이죠.
그런다고 이스라엘 됩니까?
성도 되냐 말이죠.
그냥 솔직하게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 라고
그냥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면 될 것을
온갖 간사함을 다 집어 넣어서 만들어내는 용어로 칭칭칭 온 몸을 감고 있는 겁니다.
참 이스라엘은 무식한채 그대로, 수준 낮은 그대로 주님께 맡기는 겁니다.
왜냐? 이스라엘의 주인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예수님이거든요.
주인에게 달린 문제를 자꾸 인간(종)의 숙제로 떠 넘긴다는 것은
지도 천국 안 들어갈려고 하고
남도 못 들어가게 가로막는 것과 같다 말이죠.
그런 갑질은 종만 하고 있지
주인은 하지 않습니다.
지존자는 도리어 찬양을 우리에게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지도 안가고 남도 못가도록 막는 자의 말을 듣지 말아라 라고 노래 부릅니다.
그럼 이들은 뭘 합니까? 일단 비밀을 알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일만 합니다.
마치 대구에 어떤 백화점 앞에서 찬양자들이 입구를 가로막아서 노래하듯이
지도 안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고 오로지 찬양하기만을 지키기 할 뿐이다는 겁니다.
숨겨진 비밀을 안 붙잡은 자들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어차피 자기들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안 대하거든요.
단 1초도 대한 적이 없습니다.
자기 기분 내키는대로 해 놓고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우길 뿐입니다.
어차피 확인할 길이 없으니 그 사기를 치는 거죠.
인격적으로 단 1초도 예수님을 만난 놈이 없어요.
바리새인이 단 1초라도 안식일을 지킨적이 있던가요? 없었어요.
인간 중에는 앞으로도 없습니다.
십일조 인간 중에 드린 인간 있던가요? 없었습니다.
그냥 받기만 하세요.
단 한 놈도 예수님을 찬양한 인간이 없습니다.
자 이렇게 말하니까 자꾸 방종을 유도한다고 또 사기를 칩니다.
방종을 유도한다고 그렇게 듣는 귀가 과연 올바른 귀일까요?
듣기는 들어도 못 듣는 귀 아닙니까?
그래서 이제는 전능자가 바로 저들과 구별 분리 차단 시키기 위해서
저들을 곧 듣기는 들어도 못 듣고 보기는 보아도 못 보는 저들을 지근 지근 밟는게 아니라
반대로 성도를 지근 지근 밟는 겁니다.
예수님을 지근 지근 밟는 겁니다.
왜?
구별이 되었기에
이름까정 갈아치운다 말이죠.
방종을 유도하는 자로 낙인이 찍힌채로
저들과 구별 시키는 겁니다.
이것이 말씀을 지키고 읽는 자와
말씀이 그 사람을 읽는 자 와의 차이 이다는 겁니다.
종의 숙제와
주인의 숙제가 덮쳐진 자와의 차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존자가 찬양을 해서
찬양이 덮쳐진 자가 이렇게 화답 노래 합니다.
바로 출애굽을 벌려 달라는 것이고
안식일날 찬양사건을 벌려 달라는 겁니다.
즉 원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겁니다.
아마 바리새인이 들었으면 성화론자들이 들었으면 또 달려들었을 겁니다.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 출애굽을 요청하고
원수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하느냐
다른날에 해결해 달라고 해야지
왜 안식일날 일하느냐? 쉬어야지 왜 일함으로써 안식일을 더럽히느냐 라고 말이죠.
그게 바로 원수들이 하는 말이다는 겁니다.
뛰어내려라 발이 상하지 않도록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줄 것이다 단 안식일날에는 뛰면 안돼
이렇게 되는 겁니다.
결국 어떻게 해서든 선악적인(양심적, 도덕적, 율법적) 의미를 조금이라고 의미부여 하겠다고 붙이는 겁니다.
그래야 자기가 의미가 있거든요.
자기가 원인에 포함이 된다 말이죠.
의미 없으면 절대 안되고
원인 없으면 절대 안된다는 거죠.
그런데 지존자의 찬양은
바로 그런 의미
그런 원인을 그냥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환자 앞의 의사요
죄인(원수) 앞의 구원자이니까 말이죠.
구원자 즉 지존자 자신의 영광을 위함이지
환자를 위한 의사가 아니다는 겁니다.
인간 구원을 위한 구원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자들로부터 구원을 구하라입니다.
의사 자기영광을 위한 의사됨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지존
절대지존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죄인 됨이
환자 됨이
구원자를 위한다고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일부러 지을수 없다는 거죠.
그것은 인간의 숙제에 달린 절대지존이 되니까 말이죠.
그렇다고 방종을 유도한다는 비아냥에 겁먹고 저들과 합류하느냐?
그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전능자에게 정작 밟히는 것은 저들이 아니라 바로 성도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사생아가 아닌 증거이다는 겁니다.
저들과 구별시키기 위해서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그럼 뭐냐 말이죠.
바로 아무것도 아닌
하나 마나한, 있으나 마나 한 존재로써
안식의 주인 때문에
물에 빠진 양
안식일 지킨다고 아무도 건져주지 않는
주인이 오셔야만 건짐받도록 되어있는 양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일 뿐이다는 겁니다.
누가 일부러 안식일날 물에 빠질려고 하겠습니까?
그런데 주인 때문에 그것도 안식의 주인 때문에
안식일날 물에 빠지게 되었다면
주변의 모든 사람들 특히 안식일 지키는 자들로부터 공격 당하는 것이 당연하구나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욥 신세가 되는 거죠. 아무 이유 없는 고난
그래서 모든 주변의 교인들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공격자들로 변한다는 사실
그러니 그런 욥에게 회개하라는 둥
방종을 유도하는 자라는 둥
이단이다는 둥
마귀라는 둥
등등의 말이 통하겠냐 말이죠.
지존자라는 주인이 그를 붙잡고 있는데
원수를 끌어들이고 (마귀와의 내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
욥을 지근 지근 밟아서 (전능자 =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
십자가의 능력을, 원인 없는 결과를 보여주는데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욥 자기 자신도 이 십자가가 옳았고 나는 무조건 가짜입니다 해야 할 판국에 놓여졌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것이 임금 됨
왕 됨
지존자 되심 때문에
바로 주의 주 되심 때문에
벌어져야만 하는 사건이다는 겁니다.
그 사건을 오늘 시편 92편 찬양자는 지존자의 찬양을 듣고 화답하듯이 찬양이 덮쳐져서
출애굽을 요청하는 겁니다.
원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십자가 사건을 또 반복해서 일으켜 달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이런 매일 매일의 찬양을 하실수 있으냐 말이죠?
걱정 하지 마세요 매일 매일 그냥 찬양 스스로가 이런 사건들을 매일 벌리시는 겁니다.
우리는 그저 우와 우와
윽 윽 하면서 뿅 하고
매일 매일 죽어나아가는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그렇다면 찬양하기 라는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아무리 봐도 귀머리거리 인데
아무리 봐도 벙어리 인데
오히려 목소리 있는 자들 보다 더 끝내주는 찬양을 잘 부르는 겁니다.
정작 귀 있는 자들과 눈 있는 자들과 입 있는 자들에게서는
들려지지도 보여지지도 말하여지지도 않는데
들을수 없는데
예수님 혼자 벙어리의 찬양이 제일 낫다고 더 나은 찬양이라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으로
부조리 편애로만 찬양을 펼치시는 겁니다. 찬양사건.
참 기가막히지요
정직한 영이 없는 다윗과
부조리한 편애로만 일하시는 여호와와의 불의(십자가)가 만나서
긍휼 곧 인애와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다.
(시 92:15, 개역) 『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시편 92편에서
아무도 찬양하지 않는 가운데
벙어리 다윗은 출애굽을 찬양하고 출애굽을 요청합니다.
곧 출이스라엘입니다.
이제 드디어 출이스라엘을 감행하시라고
지존자의 찬양을 스피커처럼 울려 퍼트리는 겁니다.
마치 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죽지도 않은 예수님을 미리 장사치르는 것처럼 말이지요.
이것이 종말의 시선
자꾸 종말 종말 해서 저도 별로 쓰고 싶지 않은 단어인데
바꾸어서
십자가 시선에서 예수님을 대하는 모습입니다.
찬양도
지존자의 찬양도 십자가 시선에서 대하여 본다면
바로 시편 92편의 내용이 바로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십자가 사건을 매일 매일 터트려 달라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누가 이런 찬양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무도 못하기 때문에
인간이 찬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존자가 찬양을 하는 것이며
그 찬양이 우리에게 덮쳐져서
이런 사건
찬양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일부러 안식일날만 골라서 사건을 터트림으로써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을
한 순간도 쉬지 못하도록
불편하게 거리끼게 만드는
걸림돌을 제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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