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시편 131)

 

책임 질 것이 없는 즐겁고 신나는 인생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31: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개역)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개역)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31:1, 새번역) 주님, 이제 내가 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 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 나서지 않으며, 분에 넘치는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131:2, 새번역) 오히려, 내 마음은 고요하고 평온합니다. 젖뗀 아이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 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

(131:3, 새번역) 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18:1, 개역)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18:2, 개역)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18:3, 개역)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국에 천들어가지 못하리라

(18:4, 개역)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18:5, 개역)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18:6, 개역)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18:7, 개역)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10:13,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10:14, 개역)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0:15,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10:16, 개역)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18:15, 개역)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6, 개역)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3:1, 개역)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3:2, 개역)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가로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의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라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3:4, 개역)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삽나이까

(3:5,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3:6, 개역)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3:7, 개역)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3:8, 개역)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3:9, 개역)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3:10,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3:11, 개역)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 증거를 받지 아니하는도다

(3:12, 개역)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시편 131편이 3절로 되어 있어 짧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니 뭐 그리 어려운 내용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라는 내용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해석하는 그 자체가 이미 성령이 필요없이 그저 실천하면 된다고 본다는 겁니다.

 

마치 앞의 계시록 글 '목베인 영혼과 다섯 번째 인' 에서 언급했던

마태복음 23장을 언급하면서 긍휼의 그릇과 강퍅의 그릇을 설명했는데

 

(23:29,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23:30, 개역)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23:31, 개역)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23:32, 개역)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23:33, 개역)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만약 조상때로 타임머신을 타고 가게 되면 우리는 절대로 조상과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그게 바로 너희 조상이 했던 말이기 때문에

그 아비에 그 자식이다고 하신다 말이죠.

 

그럼 여기에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은 뭡니까?

 

주여! 시편 131편을 모두 다 알아먹는 이야기를 저는 모르겠습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이고

제발 모르겠으니 제발 성령을 주세요

저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시고

이 내용을 해석해 주세요 라고

해석을 포기하고 해석해 달라고 하는 마음이어야 하는데

누가 저 내용을 보고 해석을 포기할 자가 어디 있으며

저 내용을 보고 성령이 따로 반드시 오셔야 한다고 할 것이며

구지 저 시편 131편 때문에 예수님까지 오셔야 한다고 여길것이겠냐 말이죠.
더더욱 예수님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저 시편 131편을 보고 외칠수가 있겠냐 말이죠.

 

저 내용은 불교 땡중들도 다 아는 내용이다 말이죠.

불교도 성경 연구하거든요. 어느 불교대학에도 성경연구과가 있으니까 말이죠.

 

모든 종교에 다 있는 내용입니다.

마음을 겸손하게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각자의 신을 바라는 마음을 가지자

이게 유대인들도 똑같은 해석을 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이 시편 131편을 예수님이 언급하자

졸지에 해석할 줄 아는 자가 아무도 없게 되는 겁니다.

마치 모두다 다 아는 씨뿌리는 농부의 이야기를 아무도 모르게 비유로 만들어 버리는 식이다 말이죠.

오죽하면 밤 중에 몰래 찾아온 바리새인 니고데모가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를정도로 만들어 버리니까 말이죠.

성경 박사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도통 무슨 소리인줄 모르니까

너 이스라엘 선생 맞기는 맞니? 라고 하시는 겁니다.

 

(3:9, 공동) 니고데모는 다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3:10, 공동) 예수께서는 다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의 이름난 선생이면서 이런 것들을 모르느냐?

 

결국 우리는 백날 해도 시편 131편을 해석할 길이 없어야 한다 말이죠.

해석 못하면 당연히 지킬수가 없고 지키지 못하면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심판 받아 마땅해야 한다 말이죠.

 

웃찾사의 어떤 개그맨이 개그청문회 코너에서 강O범씨는 천당 못 갈 것 같다고 하니까

아니 이것 때문에 천당을 못 갑니까 라고 되 받아 치더라 말이죠.

아주 아주 사소한 이것 때문에?

그래서 다들 웃끼다꼬 웃더라 말이죠.

 

시편 131편을 해석한 내용들을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다들 이거 어렵지 않다고 다들 해석하더라 말이죠.

물론 무지 무지 겸손한 마음으로 해석하더라 말이죠.

그런데 그게 교만하기 짝이 없어 보이더라 말이죠.

어려운 난해한 해석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직접 와서 꽝 하고 부딧힌 자가 있는데

바로 바리새인 니고데모입니다.

바리새인이란 일단 실천가 이다는 겁니다. 실천의 달인.

 

그런 실천의 달인에게 예수님의 해석이 실천 가능할 것 같으면

예수님 자체가 의미가 없어요.

해석 자체도 안될 뿐만 아니라 실천 불가능해야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인가를 보게 된다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을 쳐다 볼려고 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실천할수 있느냐 그 방법과

해석 방법과

실천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는 겁니다.

 

즉 예수님이 구원을 해 주러 오신 분으로 봤다는 겁니다.

그러니 임금 삼아야 겠지요.

 

그런데 에수님이 도망친다고 했지요?

왜 도망치죠.

표적을 본게 아니다는 겁니다.

 

저들은 표적을 본게 아니라

기적을 보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달라고 요청하는 식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곧 구원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곧 심판 입니다.
잃어버림 입니다.

주의 인자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것이다 말이죠.

이것이 존재 보다 먼저 있었다 말이죠.
 

즉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

마귀 속에 갇혀 있음을

그래서 불쌍히 여겨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왜? 심판 주를 제대로 봤기 때문에 말이죠.

그런데 구원자로 보게 되니
다들 임금 삼을려고 한다 말이죠.

그렇게 되니 다들 실천할려고 달려들더다 말이죠.

 

어린 아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가질까요?

그러죠 뭐 당장 실천하겠습니다.

아 그래?

그럼 전 재산을 가난한자 어린아이와 같은 자에게 나누어 주어라

 

방금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셔놓고

부자청년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이죠.

바로 아래에 이어진 내용이 부자청년 이야기이거든요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이죠.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란

난 할 줄 몰라요 라고 냅따 숙제를 엄마에게 떠 넘기는 자 이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숙제는 엄마 전문이거든요.
죄는 예수님 전문이거든요.

 

그런데 다들 숙제 하겠다고 달려드는 것이

그 숙제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는 숙제이다 말이죠.

 

바로 그렇게 똑같이 생각했던 다윗이 율법 4배나 갚으라 라고 했던 겁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라는 숙제를 풀려고 말이죠.

그거 박살이 났습니다.

 

주여 저에게는 정직한 영이 없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없습니다 라고 해야할 판국이다 말이죠.

 

거듭나지 아니하면 아무리 표적을 보고 따라왔다고 해 본들 소용이 없다 말이죠.

성령으로 난 자는

자기 숙제를 보는게 아니라

예수님께서 왜 죽으셔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주여 죽어주세요 제발 별세해 주세요 하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숙제를 다 이루심에 관심이 없고

자기 숙제로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옵니까 라고 본다 말이죠.

 

아무도 시편 131편을 그렇게 안 봤거든요.

다들 구지 성령이 필요치 않아도 실천할수 있는 해석들을 한 겁니다.

정직한 영이 없음을 실감치 않아도

충분히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판결할 줄 아는 지식으로 풀었다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쉽디 쉬운 시편 131편이

예수님이 해석하니까

졸지에 아무도 실천은 커녕 무슨 소리인지를 모르는 겁니다.

이스라엘 선생 조차도 말이죠.

 

누가 어린아이와 같이 어리석고 철딱서니 없이

자기 숙제를 남에게 떠 넘길려고 하겠냐 말이죠.

 

자기 숙제는 자기가 해야지 말이야

 

그럼 너 숙제 한 번 풀어보라 말이죠.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말이죠.

이것이 첫 번째 강령이다 말이죠.

곧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다 말이죠.

첫 문제 첫 번째 숙제부터 막혔는데

무슨 놈의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세성은 외칩니다.

자기 숙제 자기가 풀어야 한다고

대표적인 것이 사단의 회 인 유대교 이다 말이죠.

 

그것을 이어 받은 자들이 성화론자 개혁주의자들이다 말이죠.

천주교 욕하면서 자기들도 똑같아요.

 

그런데 자기 숙제 자기가 푸는 놈이 없다는 라는 것이 기쁜소식 복음이다 말이죠.

 

딴 사람이 다 이루었어요.

예수님이다 말이죠.

 

여기에 저들만이 반발하는게 아니라

세상이 다 덤벼들면서 반발합니다.

 

특히 오늘날까지의 철학자들이 제일 심한 놈들이다 말이죠.

거짓선지자 아닌 놈들이 없어요.

 

여기에 덩달아 따라하는 놈들이 목사 신학자 신학도 교인들 다 똑같은 놈들이다 말이죠.

 

자기 숙제 자기가 풀었다고 으스대는 곳이 그만 교회가 되었다 말이죠.

사실은 강도의 소굴인데 말이죠.

강도동아리

 

마치 아브라함 품에 있는 거지나사로가

지옥간 부자에게 물 좀 달라고 요청 받아도

자기 숙제 있을까요?

아브라함이 다 알아서 처리한다 말이죠.

 

그런데 어떤 자살한 목사는 거지나사로 같이 되자 라고 하더라 말이죠.

그게 바로 지옥간 부자가 자기 식구들 동생들 지옥오지 말라고 선지자 보내달라고 하는 것과 같은거다 말이죠.

선지자 보내면 선지자 말을 듣고 돌이키게 해서 지옥에 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하는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16:27, 개역)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16:28, 개역)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16:29, 개역)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30, 개역)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1, 개역)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지옥에 가도 숙제가 끝나지 않아요

제발 다섯 형제 회개케 기도한다 말이죠.

기도를 해서라도 책임 지겠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게 지옥이다 말이죠.

책임 지겠다는 것이 지옥인거다 말이죠.

 

책임 질게 없는 나사로를 아무리 봐도 못 보는 겁니다.

어린아이란 책임 질게 없어서

아니 책임 자체가 없어서

그냥 떠 넘긴다 말이죠.

 

그러니 니고데모 말 마따나

아 이제 숙제가 졸지에 생긴거다 말이죠

책임지지 않는 자 되기 라는 숙제가 또 주렁 주렁 달리니까

문제는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면

어머니 뱃속에 다시 들어갔다 나와야 하는가 라고 보는 겁니다.

이것이 성경 박사들 주장이다 말이죠.

 

오늘날도 똑같아요.

성경에 도 틴 자들이 어디 한둘이겠습니까?

똑같이 해석해요.

 

이미 긍휼의 그릇과 강퍅의 그릇으로 나누어진 것이 바로 완료이다 말이죠.

이것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러 오신거다 말이죠.

 

그러니 땅을 일을 말하여도 안 믿는데

지옥간 부자가 아브라함 말을 이미 안 듣고 있잖아요

? 자기 숙제가 있으니 말이죠.

그 자체가 이미 안 듣는데

무슨 수로 듣겠냐 말이죠.

지옥 자체가 공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미 지옥이 장악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지옥적인 사고방식에서 못 벗어나기 때문에

거지 나사로 같이 되자 라고

지옥간 부자가 외친다 말이죠.

자꾸 숙제가 주렁 주렁 생기더라 말이죠.

 

그럼 어린아이는 뭐냐?

어린아이와 같이 될 필요가 없는 자가 어린아이다 말이죠.

관계성이기 때문에 내가 백날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 본들 소용없어요

그것은 또 하나의 숙제가 생기는 셈인데

그러니 어린아이는 뭐냐

숙제가 없는 자입니다.

아니 왜 숙제가 없죠?

어린아이는 엄마 라는 관계성 때문에

졸지에 증상물이다 말이죠.

의사의 증상물이 환자이듯이

어린아이는 엄마만을 외치도록 되어 있는 증상물

마치 거지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을 말하기 위한 증상물이듯이

관계성을 말하는데

다들 독자적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어린아이란

자기 숙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어요.

엄마가 땍지 하고 숙제 다 풀어버리더라 말이죠.

맞습니다.

엄마가 넘어와서 반칙으로 숙제를 다 해버리는 관계성이 바로 어린아이이다 말이죠.

 

그러니 어린아이란

나는 어린아이와 같이 되기를 숙제 했어요 라고 말 할수 없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저 어린아이는 엄마 엄마 엄마만 찾아서

엄마에게 숙제 떠 넘기는 그야말로 철딱서니 없고

시근 없고 뻔뻔스럽기 짝이 없는 자가 어린아이이다는 겁니다.

 

엄마가 숙제 전문가 인데

왜 자기가 왜 하냐 라는 거죠.

 

거지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을 말하기 위한

즉 천국의 품을 말하기 위한 자이고

 

지옥간 부자는 지옥을 말하기 위한 자이다 말이죠.

 

그런데 얼마나 다들 엉터리로 해석을 하는고 하니

부자가 지옥에 안 가는 방법을 말하듯이

우리는 그런 숙제를 풀 듯이

억지로 목사들에게 신학자들에게

그런 숙제를 떠 안고서

교회에서 협박 공갈을 당하면서 살더라 말이죠.

마치 그 당시 바리새인들이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하게 하는 식으로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바리새인의 높은 콧대를 확 낮추어 버리니까

가만히 있겠냐 말이죠.

 

목사 자기들도 못 지키는 것을 자꾸 지키라고 협박하더라 말이죠.

웃끼는 놈들입니다.

 

뭐 멀리도 갈 것도 없이

십계명 중에 단 한 개라도 지킨 목사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없어요.

 

자기들이 만약에 조상 때에 갔다면 절대로 참선지자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웃끼시고 있네

그 말을 그들 조상이 그대로 똑같이 했다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바로 내 앞에 오시면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웃끼시고 있네

예수님이 반드시 내 손에 죽으실려고

나의 속내를 박박 긁어댈텐데 안죽인다굽쇼?????

 

내 숙제가 아니다니깐요.

 

그럼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가는데

어떻게 어린아이 되기 라는 숙제를 할수 있는데

 

하지 마세요

어차피 불가능한 소리를 주님이 하신 겁니다.

절대로 하지 마세요

어린아이 같이 될려고 하다 보니

예수님을 또 죽인다 말이죠.

정중앙의 개그처럼 두 번 죽인다 말이죠.

 

그냥 갇혀 있음을 인정하는

그래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갇혀버린 죄인입니다 라고 하시면 됩니다.

 

오늘 시편 131편도 다윗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라고 했습니다.

즉 완료로써 왜 완료인지를 보게 되는 내용이다 말이죠.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한 적도 없는데 어린아이로 만드시는 주님의 작업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자기가 숙제 할려고 율법 4배나 갚으라 라는 사고방식에

박살이 난 거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다윗 개인의 경험이 아닙니다.

앞으로 이스라엘 전체가 격게 되는 경험이다 말이죠.

 

요나 혼자 격는 경험이 아니다 말이죠.

쫄딱 망해서 바벨론 포로가 되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포로 귀환때 꿈만 같도가 라고 노래부르게 되는

주의 인자하심 때문에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두게 되는

말씀이 다 이루어서 그 말씀을 나는 양탄자처럼

말씀을 우리를 타고서 그것을 격게 되는 거다 말이죠.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게 되는 사건 말이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큰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구원은 여호와께로 라는 외침을

바벨론 포로 되어 들어갔다 나오는 구원은 여호와꼐로를

요나가 아닌 이스라엘이 외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내가 지키는 말씀은 없고

말씀이 나에게 넘어와서 격게 되는 사건의 말씀

실상의 말씀을 누리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131:1, 개역)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131:2, 개역)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131:3, 개역)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123: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하늘에 계신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123:2, 개역) 종의 눈이 그 상전의 손을 여종의 눈이 그 주모의 손을 바람 같이 우리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기다리나이다

(123:3, 개역) 여호와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기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123:4, 개역) 평안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심령에 넘치나이다

 

 

결국 이미 완료되었기에

한쪽은 어린아이와 같이 될려고 한 적도 없는데

어린아이로 삼은 채로 되고

 

반대로 이미 완료되었기에 다른 한 쪽은 반대로 강퍅한 자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어떻게?

여호와를 바라는 것이 어린아이의 마음인데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될려고 시편 131편을 외웠는데 실천했는데

정작 여호와 되신 예수님을 죽이는 마음이 드러났다 말이죠.

오히려 시편 131편을 모르고 알지도 실천하지도 외우지도 않았던 자들이

어린아이 마음처럼 예수님을 영접했다 말이죠.

 

이것이 주의 인자하심인데

이 주의 인자하심에 반발하더라 말이죠.

오늘날도 이 주의 인자하심인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십자가를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물론 십자가를 이용하는 자들도 많지요. 역시나 주의 인자하심을 거부하는 강퍅한 자들인 겁니다.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께서 자신의 다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의 완성 때문에

자 이렇게 둘로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지옥이 땡기는 강퍅한 자인 진노의 그릇과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을 찬양하는 천국이 땡기는 긍휼의 그릇으로 말이죠.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의 인자하심을 누리는 겁니다.

 

거지나사로와 부자로 나누어 지듯이 말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