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을 임마누엘 (내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과 너의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과 다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이라 하리라 (마 1;18-25)
니 임마누엘과 내 임마누엘이 틀리다 를 누리기
(마 1:18, 개역)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 1:19, 개역)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 1:20, 개역)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개역)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2, 개역)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마 1:23, 개역)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4, 개역)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마 1:25, 개역)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 1:18, 새번역)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은 이러하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나서,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 1:19, 새번역)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서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
(마 1:20, 새번역) 『요셉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주님의 천사가 꿈에 그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네 아내로 맞아 들여라. 그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 1:21, 새번역)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예수는 '주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 이름 여호수아의 그리스어 형태』
(마 1:22, 새번역) 『이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은, 주님께서 예언자를 시켜서 이르시기를,』
(마 1:23, 새번역)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사 7:14(칠십인역)』
(마 1:24, 새번역) 『요셉은 잠에서 깨어 일어나서, 주님의 천사가 말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마 1:25, 새번역) 『그러나 ㉪아들을 낳을 때까지는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하지 않았다. 아들이 태어나니, 요셉은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였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첫 아들을'』
(민 13:16, 새번역) 『모세가 땅을 탐지하라고 보낸 사람들의 이름이 이와 같다. 모세는 눈의 아들 ㉠호세아를 여호수아라고 불렀다. / ㉠호세아와 여호수아는 같은 이름의 두 형태로서 '주님께서 구원하시다'라는 뜻. 여기에서 그리스어 이름 '예수'가 나옴(마 1:21)』
(사 7:14,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 ㉢칠십인역을 따름. 히, '젊은 여인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미 5:3, 공동)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 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 ㉠이사 7:14참조.』
(마 1:23, 새번역)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사 7:14(칠십인역)』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는 의의 족보요 산 자의 족보 라고 했습니다.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간극을 보여주는 것이 의라고 했지요
그럼 반드시 산 자의 하나님은 반드시 죽은 자의 하나님과 한 세트를 구성해서 대조를 이룹니다.
빛과 어두움이 한 세트를 구성해 그 차이성을 나타내듯이 말이죠
그럼 예수님의 족보가 산 자의 하나님 족보이다면
상대적인 죽은 자의 하나님 족보는 그럼 무엇이겠습니까?
맞습니다. 마태복음의 대상인 유대인입니다.
흔히 성령의 족보와 반대되는 육의 족보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만
지금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다는 말은
곧 오늘날로 치면 기독교인들 교회 다니는 자들을 말한다 말이죠
아예 안 믿는 자들이라면 구분이 훨씬 쉽지만
구별 자체가 인간의 눈에서는 불가능 한 입장에서 본다면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고
심지어 임마누엘이라는 의미를 처음 이야기 했던 이사야 선지자 때도 마찬가지였다는 겁니다.
그러니 묵시적인 공동체라는 이스라엘이
눈에 보이는 역사를 의지한다던가
아니면 설령 가룟유다처럼 하나님 나라 운동인 묵시운동을 펼친다고 해서
성령의 족보에 들어갈수가 없다는 거죠
심지어 사울왕도 성령을 받았다가 떠나버렸다고
(삼상 16:14, 개역)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삼상 16:14, 새번역) 『사울에게서는 주님의 영이 떠났고, 그 대신에 주님께서 보내신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혔다.』
속담까정 나돌았다 말이죠 사울도 선지자에 있더냐 라고 말이죠
(삼상 10:12, 개역) 『그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비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가로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우리가 계시록에서 살펴봤듯이
음녀가 제사장 딸이였다 말이죠
그리고 일곱교회에 반드시 상대적인 사단의 회는 유대인들이였고
그들이 다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다 말이죠
문제는 믿는다는 종교성을 믿음이라고 믿음의 주 되신 예수님은 취급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그런 신념과 오기는 울리는 꽹과리를 잔뜩 모을 뿐이거든요
바로 그런 울리는 꽹과리를 모으는 자들로써
이 마태복음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족보와 충돌케 되는 겁니다.
곧 산 자와 죽은 자의 대립으로써
산 자가 떳다는 이유로
임마누엘이 떳다는 이유로
나는 죽은 자입니다 라고 그 앞에 무릎 꿇어야 할 판국인데
그것이 이름 임마누엘인데
이 이름을 도리어 유대인이 무시를 한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름 신앙은 자기들도 가지고 있거든요
여호와 라는 이름 말이죠
심지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도 안다 말이죠
소위 소유한 이름이지요
누가? 임마누엘을 유대인이 말이죠
구약만을 따르니까
아니 그런데 예수님이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들고 오게 되면
같은 하나님이 될까요? 아니면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는
하나님이 둘로 쪼개지는 두 하나님이 될까요?
이 상황은 이사야 때도 똑같았습니다.
임마누엘이 떳다는 이유로
이스라엘은 전체적으로 죽은 자의 자리에 놓여집니다.
그래서 포로 당한다는 식으로 이사야가 이야기 할 때
이스라엘 백성 뿐만 아니라
거짓선지자들 조차도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만세이다 라고 했다 말이죠
자 그러니 이사야 선지자의 하나님과
거짓선지자의 하나님이 달라서
이사야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너거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 아닌 문제는 거짓선지자는 이미 이스라엘을 다 장악했다 말이죠
이사야는 딸랑 혼자 지 혼자만 그렇게 주장해요
아무도 동의를 안 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이 떳다는 겁니다.
그 증상으로써 말이죠
그럼 마태복음 1장의 상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이스라엘 전체를 마귀가 다 장악했다 말이죠
마태복음 4장에 마귀의 세가지 시험에
돌을 떡 덩이 되는 시험에 유대인은 다 넘어갔고 (경제)
거룩한 성전에 뛰어내려라 천사가 시편에 기록된 대로 두 손으로 받쳐준다 라고 (종교) 넘어갔고
온 천하 만국을 줄테니 절 하라 (정치) 라는 유혹에 이미 다 넘어가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고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을 펼쳐요 글쎄
경제 종교 정치적으로 다 넘어간 겁니다.
왜? 임마누엘이 떳기에 나타난 증상이다는 겁니다.
임마누엘이 먼저 있었고 마귀에 다 장악 당한 것이 후에 그 증상으로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광야에서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먼저 떳고
그 증상으로 광야에서 모두다 불뱀에게 물린 상태가 된 겁니다.
그래서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이
임마누엘 이름으로 오신 분이 장대 높이 달리는 십자가를 쳐다보면 낫는다고 하니까
다들 비웃는 겁니다.
즉 자신들은 살아 있다고 여기고 있지
죽은자가 아니다
불뱀 물린 자가 아니다
마귀에게 장악 당해 갇히고 포로되고 억눌린 자가 아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그런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 의원이 쓸데 없지만
환자에게는 이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님이 기쁜 소식인 희년이 아닐수가 없는 거죠
의의 이름은 오직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만 펼치시거든요
그런데 저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산자의 하나님을 안 믿고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더라 말이죠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를 보여주질 않아요
그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지
울리는 꽹과리만 모으고 있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그때는 젊은 장로였나? 아니면 강도사 까지 했던가?
아마 지금은 목사 될려고 무지 공부했으니까 목사가 되었지 싶은데
아는 선배인데
왜 개혁주의 라는 그 좋은 단어 이름을 너희들 이단이 왜 사용하느냐 라고 짜증을 내더라 말이죠
역시나 똑같이 누가 댓글을 달았는데
구원이 무엇인가 라는 제목으로 말이죠
단어를 똑같이 구원이라고 했지만
정작 구원이 누구인가 라고 다른 의미의 구원을 답변으로 달았습니다.
어떤 장로가 구원이 뭐냐 라고 저에게 한 수 가르쳐 들겠다고 했던 방식과 똑같아서
제발 예수님 외에는 구원 받을 자 없다 라는 그런 구원 좀 바래라 라는 식으로 말이죠
바로 이런 식으로 저들은 문자를 소유한 입장에서 그런 배경을 깔고서
주님은 임마누엘로 오시게 되면
이미 저들이 임마누엘을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물론 무슨 의미인줄도 모르고
그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라는 단어 뜻만 외우듯이 자신들만의 소유권인냥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오시게 되면
졸지에 충돌이 아니 나타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더라 말이죠
임마누엘을 소유하는 단어로 여길게 아니라
임마누엘 자체가 모든 인간은 다 불뱀에게 물렸다 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등장하는 의미이기 때문에 불뱀에게 물린 티를 임마누엘이 등장 하니까 팍팍 내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아예 노골적인 충돌이 바로 안식일도 있지만
제일 예민한 것을 건드린 것이 바로 성전이거든요
교회 말이죠
우상처럼 자기자신의 신체로 투시했기 때문에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짖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가장 예민한 것을 건드린 겁니다.
임마누엘을 헐라 아니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헐다니요
진짜 함께 함이란 죽었다가 다시 삼일 만에 다시 사는 임마누엘이 진짜 임마누엘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성전이라고 삼일 만에 다시 세워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성전이라고 했고
반대로 예수님은 저들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이라고
죽은 자의 하나님으로 부활이 없는
도리어 과부를 등쳐먹는 의와 신과 인은 버려버린 껍데기만 지키는 자들로써 언급했다 말이죠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1:13, 공동) 『그리고 그들에게 "성서에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리리라.' 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 하고 나무라셨다. / ㉠이사 56:7 하반.예레 7:11.』
(막 11:17, 공동)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 ㉠이사 56:7 하반. ㉡예레 7:11.』
(눅 19:46, 쉬운)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성경에 쓰여 있는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 로 만들었다.”』
즉 단순히 말썽 피우지 않는 착한 교회 온순한 교회가 아니라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의가 덮쳐지지 않는 이상은 강도의 소굴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종교시설이니까 말이죠
그리고 그 종교시설에 종사자 들, 곧 음녀들 자기 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울리는 꽹과리를 모으니까 말이죠
과부를 책임지는 의가 과연 있냐 말이죠?
정의가, 거룩이, 정직한 영이 과연 있냐 말이죠다윗도 정직한 영이 없다고 달라고 상한심령이 되었다 말이죠
아니 상한심령이 되게 하시는 성령이 다윗을 팍 썩어뭉드러지는 마음을 퍼부은 겁니다.
의가 없다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외치는 것이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졸지에 의인이다는 자들만, 건강하다는 자들만 잔뜩 모여있으니
그게 강도의 소굴이 아니고 무엇이냐 말이죠. 종교 동아리 죠
그래서 지난 주에 왜 이스라엘 왕들 곧 남유다 왕들을 이스라엘 왕 자리에 앉히는게 아니라
반드시 끌어내려서 죽은자로 만들어서 남유다 왕들이 예수님이 족보에 들어오게 했는지를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인해 권능을 받았다는 의미이다 말이죠
(행 1:8, 개역)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8:19, 개역)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롬 1:4, 개역)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새번역) 『㉠성령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나타내신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신 분이십니다. 그는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그, '거룩함의 영' ㉡또는 '확인되신, 지정되신, 지명되신'』
(롬 15:18, 개역)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을 순종케 하기 위하여 나로 말미암아 말과 일이며 표적과 기사의 능력이며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 외에는 내가 감히 말하지 아니하노라』
(롬 15:19, 개역) 『이 일로 인하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롬 15:19, 새번역) 『표징과 이적의 능력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루살렘에서 일루리곤에 이르기까지 두루 다니면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남김없이 전파하였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하나님의 영의 권능으로'』
(미 3:8, 개역)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미 3:8, 새번역) 『㉢그러나 나에게는, 주님께서 주님의 영과 능력을 채워 주시고, 정의감과 함께, 야곱에게 그의 죄를 꾸짖고 이스라엘에게 그의 범죄를 꾸짖을 용기를 주셨다. / ㉢미가의 말』
(미 3:8, 공동) 『그러나 나에게는 거역하기만 하는 야곱의 죄상을 밝히고 못할 짓만 하는 이스라엘의 죄를 당당하게 규탄할 힘과 용기가 차 있다.』
(미 3:8, 쉬운) 『<하나님의 정직한 예언자 미가> 그러나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는 정의를 외칠 힘과 능력을 채워 주셨다. 내가 야곱 백성의 허물을 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밝히겠다.』
자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권능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능력 힘 권세로 알고 있는데
부자청년이 그렇게 생각했는데 오늘날 우리도 똑같습니다.
과연 진짜 권능은 가난한 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는
약자보호법인 율법의 완성인 사랑을 펼칠수 있냐 이웃사랑을 할수 있냐 인데
권능을 울리는 꽹과리인 무기라는 음부의 권세를 잔뜩 모았기 때문에
근심하고 돌아서는 겁니다.
말만 그렇게 알고 있지 정작 우리가 원하는 식이 아닌
그 반대의 의미로써의 권능이다는 겁니다.
곧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다 내어주신 사랑이 진짜 권능이다 말이죠
이 권능으로
이 의로움으로
이 만군의 여호와 되심으로
죽은자를 살리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려라 라고 해도 못 살리는게 무슨 놈의 권능이겠습니까
못하면 차라리 주여 제가 죽은 자입니다 저를 살려주세요 라고 하던가 말이죠
남을 7번 용서 못하는 권능이라면 차라리 예수님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는
이 권능을 받으라 말이죠
(마 6:13, 개역)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쉽게 말해서 주의 기도에서도 나오지만
우리가 원하고 있는 그 권세로부터 구해달라고 하는 성령의 권세를 주옵소서 라는 겁니다.
우리는 빌바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울리는 꽹과리를 달라고 하니까 말이죠
반대로 낮추시고 목이 곧은 백성을 꺽으시는 권능에 곧은 목이 꺽여지는 것을 당하는 것이
주님이 베푸시는 권능이다는 겁니다.
그럼 다들 무시하지요
에이 그게 무슨 권능이고
바로 그겁니다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는데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다는 겁니다.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가 뭡니까? 몽둥이 아닙니까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 정의 공의 아닙니까
이 심판의 불과 함께 동행 할수 있는 것이 진짜 권능 아닙니까?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곧 음부의 권세로부터 건져 달라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사랑 곧 의, 정의, 공의를 말한다 말이죠
그런데 거짓선지자나 오늘날 삯꾼 목자들이나 다들 음부의 권세를 오히려 달라고
성전에서 그런 짖을 하고 있으니 강도의 소굴이 맞잖아요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면 도망치라 말이죠
다들 교회에서 우상 숭배하고 있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성전도 두 성전
두 언약처럼
하늘에 속한 자유하는 여자와
계집종 하갈의 언약처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성령으로 난 자는 반드시
육체로 난 자들로부터 핍박을 받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식을 먼저 낳았다고 말이죠
그런데 성령으로 난 자가
잉태치도 못하는 죽은 태 였는데
죽은자 과부와도 같았는데
졸지에 부활이 덮쳐지니까
의가, 공의가, 정의가 덮쳐지니까
남편 있는 자의 자녀 보다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더 많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의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으니까 말이죠
그들이 뭐가 잘나서 의를 보여줬겠습니까?
맞습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의가 덮쳐져서 의를 보여주게 된 것이지
그들 자체에서는 의가 없어요
네 네 맞습니다 반칙입니다. 부조리입니다
이것을 구원이라고 해요 원인 없는 결과
만약 이 부조리가 아니였다면 아무도 구원받을 자 없다 말이죠
그래야 천한 기집이 왕비가 되니까
세상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육의 계산 또는 역사 곧 시공간에서 백날 따져보세요
원인에 따른 결과로 계산해 보세요 답이 나오나
이 십자가의 비밀이 풀리나
십자가의 피 용서가 과연 원인을 누가 갖추어서 받을수 있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어요
계산기 백날 두드려도 안되요
성화론자들이 여기서 안색이 변합니다.
막살면 안된다고 또는 그런 반칙을 부리면 안된다고
그것이 마귀를 겨냥한 사랑이요 은혜인줄 모르니까
선악의 법칙인 역사와 행함 곧 원인 있는 결과를 따지는 겁니다.
그래 그래 그럼 원인 있는 결과를 따져서 보자 말이죠
과연 십자가의 피 용서가 답으로 나오는가
안 나옵니다.
의로움이 아니거든요
거룩이 아니다 말이죠
자 그러니 이 비밀이 풀릴 리가 없어요
어떻게 혼자 사는데, 남편이 없는데, 처녀인데 자녀가 많을 수가 있냐 말이죠?
이것은 무조건적인 다 이루심에 해당되는 의미이지
시공간이 없는 역사의 끝인 종말을 땡겨온 의미이지
시공간이라는 행함이 개입에서 나올수 있는 문제의 답이 아니다는 겁니다.
따진다고 답이 나온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성령으로 난 자. 하나님께로 난 자는 다 이렇다는 겁니다.
즉 산자의 하나님이 임마누엘 곧 처녀가 아들을 낳은 것이다 라는
(마 1:23, 개역)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 1:20, 개역)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마 1:21, 개역)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이름이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죄인을 부르시러 왔지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다 말이죠
이 이름의 증상을 즐겨라 라는 겁니다.
반대로 이 구원자의 욕망을 이 이름의 욕망을 저들은 못 누리도록 되어 있고
반드시 선악의 법칙인 시공간을 기여이 개입시키기 때문에
막살수 없을 뿐더라 반드시 막살지 않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왜곡된 의를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기는커녕 도리어 살해 할 수밖에 없는 이 죄의 소원을 못 벗아난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를 못 이긴다 말이죠
자 그런식으로 요셉 또한 요셉의 꿈에서 졸지에 이름이 두 번 언급됩니다. 두 이름
임마누엘과 예수 라는 이름입니다. (누가복음은 반대로 여자인 마리아와 천사로 이야기가 펼쳐지고요)
(눅 1:26, 개역)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눅 1:27, 개역)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눅 1:28, 개역)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눅 1:29, 개역)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눅 1:30,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눅 1:31, 개역)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눅 1:32, 개역)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눅 1:33, 개역)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눅 1:34, 개역)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눅 1:35, 개역)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눅 1:36, 개역)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눅 1:37, 개역)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눅 1:38,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눅 1:46, 개역)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눅 1:47, 개역)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눅 1:48, 개역)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 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눅 1:49, 개역)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눅 1:50, 개역)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눅 1:51, 개역)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눅 1:52, 개역)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눅 1:53, 개역)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 1:54, 개역)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눅 1:55, 개역)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눅 1:56, 개역)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유대인들에게도 예수 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이다 말이죠
여호수아처럼 구원자 라는 뜻으로 말이죠
그럼 두 쪽 다 유대인이나 예수님이나
두 쪽 다 임마누엘과 예수 라는 이름을 다 알고 있지
낯설지는 않습니다. 혹 낯설다 라고 해도
이미 익숙하게 만들어 버렸다 말이죠
개혁은 때려죽어도 안해도 개혁이라는 이름 곧 단어는 몸에 도배를 해버리는 것처럼 말이죠
그 정도로 나는 모세의 제자이다 천 삼백년 묵은 정통있는 뼈다구 양반 가문이다
너는 어디서 굴러온 뼉따귀냐? 겨우 3년된 예수 제자냐 라는 식으로
용어와 단어를 쥐고서 역사와 시공간 그리고 행함 실천으로
교리실천을 선점해서 싸울려고 하지
정작 내용물은 없어요
인과 신과 의는 없다 말이죠
자 그래서 그 내용물을 저마다 끄집어 내기 위해서
예수님은 충돌 하십니다 유대인들과 말이죠
마치 요셉처럼 유대인들은 점잖게 체면차리면서 우리는 그런 악한 짖 안한다는 식으로
요셉처럼 종용히 끊고자 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나 주님 쪽의 기능은 저희 죄에서 구원해야 한다 말이죠
한 쪽은 종용히 끊고자 하고 곧 유대인이지요
예수님은 그 반대로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고자 한다 말이죠
자 이렇게 역시나 둘 다 의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어요 글쎄
이거 무슨 수로 구별 구분 할수 있겠습니까?
어쩔수 없어요
끊임없이 충돌시켜서 두 패로 명료하게 갈라지기 전까지
두 쪽다 같은 하나님, 같은 의, 같은 임마누엘, 같은 여호와 여호수아 예수 라는
단어 용어에 서로 썩여 있을 수밖에 없지만
결국 영원히 둘로 갈라질 수밖에 없는 거죠
아예 안 믿는 자와의 대조라면 누가 봐도 구분이 가겠지만
같은 집안의 같은 형제의 같은 쌍둥이 인기라~~~
에서와 야곱
이거 무슨 수로 구분하냐 말이죠
저쪽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다는 종용히 끊고자 할려고 하고
무엇을?
하늘에서 자유하는 여자를
반대로 이쪽 예수님의 임마누엘은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다는
종용히 끊고자 함이 아니라 그 반대로 저희 죄에서 저들을 구원하고자 다가가는 식이다는 겁니다.
싸움을 걸어요 주님 쪽에서
저쪽은 싸움을 피할려고 하고
예수님의 모든 행동 하나 하나가 싸움을 걸어요
그것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저쪽이 의가 아니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의는 이겁니다 라고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정의, 공의, 자유, 막살기)를 보여주고자
안달이 났고
저들은 의가 없으니까 죽었다가 다시 사는게 없으니까
자꾸 피할려고 한다 말이죠
자 그러니 성령으로 난 권세가 뭐냐?
(요 1:9, 개역)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요 1:10, 개역)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가 권세를 받는데
이 권세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하나님께로 난 권세이다는 겁니다.
그 이름 예수를 믿는 것이 말이죠
그런데 저들에게도 예수 라는 단어로써의 구원자 이름이 있다 말이죠
소위 메시아 사상이 있어요
예수 여호수아 여호와 라는 단어를 자기들 것 인 마냥 가지고 있다 말이죠
자 그러니 이름은 기능이지요 곧 사건입니다.
단어 문자를 백날 소유해도 사건이 안 벌어지는 이상
그 이름은 부적에 불과하다 말이죠
실지로 부적으로 사용하는 자들 많아요
그럼 이 이름의 기능이 뭐냐?
이 이름이 저희 죄에서 건져내는 겁니다.
즉 죄인 만들어서 죽은자 만들어서 다시 살리는 의를 펼친다는 겁니다.
그럼 반대로 저쪽의 같은 이름은 뭐냐?
죄에서 건져냄을 받는게 아니라
악한 상황
나는 착하게 살았는데 뭔가 잘못 되어서
악들이 자기를 괴롭힐때에 거기서 건져 달다는 식이지
자기는 악이 아니다 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선민이고
선민 답기에 악할 수가 없이죠 도리어 악으로부터 건짐을 받는 착한 자 라는 식입니다.
그러니 의인이다는 것이고, 건강하다 라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그런 하나님을 외치는 것이 도리어 죽은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산자의 하나님을 외칠려면 자신이 죽은 자의 자리인 환자 죄인의 자리에 놓여지도록 되어 있는데 말이죠
그런데 그런 것은 역사에서 허용을 하지 않아요
율법이라는 상징계 속에서는 허용 못한다 말이죠
어떻게 혼자 사는 여자가 자녀가 더 많을 수 있냐 말이죠?
원인에 따른 결과인데
심은 대로 거두는데 말이죠
자 그러니까 죽은 자의 하나님이란
바로 원인을 따지니까 죽은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라면 원인을 따져서 나오는 결과 라는 그런 법칙에
얽매이겠냐 말이죠
어떻게 혼자 사는데 자녀가 많냐 말이죠
말이 안되잖아요
이거 풀수 있는 사람 나와보라 말이죠
처녀가 아이를 무슨 수로 낳냐 말이죠
육의 세계에서는 백날해도 답이 안나옵니다.
원인에 따른 결과의 법칙에 위배 되기에
이런 계산기에서는 안나와요
오히려 예수님을 다들 종용히 끊을려고 해ㅇ
자 예수님이 무슨 수로 혼자 처녀의 몸으로써 아이를 낳냐 말이죠
100세 넘은 아브라함처럼 죽은 자가되어서
또 마누라 사라가 죽은 태인데 이스라엘이 죽은 태인데
무슨 수로 아이를 낳아 열국의 아버지가 되냐 말이죠
시아버지 유다가 다말에게 어떻게 해서든 씨를 안 줄려고
약속의 씨앗을 안 줄려고
기여이 혼자 되게 만들려고
종용히 끊을려고 하듯이 단절 시킬려고 했지만
도리어 씨를 더 많이 주게 되는
죽은 과부가 나 보다 옳았다 의롭다 인 것이
과연 아브라함 이야기를 말할려고
며느리 다말 이야기를 말할려고 한게 아니다는 겁니다.
바로 그들은 맛배기이고 샘플이고 그림자이고
실상은 예수님을 말하는 거다 말이죠
그러니 구약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고 그래서 임마누엘로 와야만 하고
다시 사는 이름인 의의 이름으로써
저희 죄에서 건져낼 이름으로써 예수 라는 이름으로 오시는 겁니다
즉 이 말은 이 이름에 다 걸려 넘어 자빠진다는 거죠
단어가 아니라
동명인 사람에게 백날 해도 안 자빠지지만
이 의의 이름 앞에 다 자빠진다는 겁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아 제발 이 예수님의 이름에 다 자빠지자 라고 나오는 겁니다.
두 이름이 요셉의 꿈에 언급이 그런 이유로 되는 겁니다.
이유 없이 이 이름에 자빠지고 이유 없이 이 이르에 다시 일어난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응답하라(일어나라) 만왕의 왕 의의 이름이다는 거죠
앞의 글 제목에 만군의 여호와 앞에 일어나라를 붙일려고 했는데
어차피 또 언급해야 한다 싶어서 생략했지만 말이죠
물론 그 앞글인 이사야 33장에는 언급이 되거든오
(사 33:3, 개역) 『진동 시키시는 소리로 인하여 민족들이 도망하며 주께서 일어나시므로 인하여 열방이 흩어졌나이다』
(사 33:10,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이제 일어나며 내가 이제 나를 높이며 내가 이제 지극히 높이우리니』
일어난다는 것은 바로 의를 펼친다 공의를 펼친다는 죽었다가 다시 살린다는 의미로써
상대적으로 저들은 못 일어나는 우상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0장처럼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시기에
가시떨기로 이스라엘을 죽은자로 만들어서 불로써 나타나시니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눅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누가 이 불과 함께 동행 할 수 있겠냐
함께 하는 임마누엘을 펼칠수 있겠냐 라는 거죠
불과 동행하는 자 만이 임마누엘을 영접할 것 아니냐 말이죠
(사 33:14, 공동) 『시온 산에서 죄인들이 무서워 떨고 불경한 자들은 겁에 질려 떨리라. 삼킬 듯이 넘실거리는 이 불길을 누가 견디어낼 것인가? 누가 이 영원한 불꽃 속에서 견디어낼 것인가?』
(히 12:29, 공동) 『㉠사실 하느님은 태워버리는 불이십니다. / ㉠신명 4:24, 9:3; 이사 33:14.』
(사 33:14, 현대어) 『그러나 악인들은 시온 산성에서도 두려워 떨고 하나님을 버린 죄인들은 시온 성중에서도 모두 벌벌 떨면서 탄식할 것이다. `이 휘도는 불꽃 속에서 도대체 누가 살아남을 수 있으며 이렇게 끊임없이 치솟아오르는 화염 속에서 도대체 누가 견딜 수 있느냐?'』
저들은 건강한 자로 의인으로 펼치겠다고 하는데
주님은 가시떨기의 불꽃으로 펼치는 일어남을 의를 추구하겠다는데 있어서
인간의 의로움 곧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이 도리어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는 것이 들통나더라 말이죠
이 불을 이 심판을 이 완벽한 거룩인 심판인 의를 영접하는 자가
함께 동행하는
가시떨기 나무의 불꽃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의 의로운 이름으로
막힌 담을 헐어버리는 모든 가짜들
가짜 구원인 칼과 창을 쳐서 쟁기와 낫으로 만드는
평화의 이름으로써 어떻게 화평을 이루는지
이 이름의 활약상
의의 족보의 활약상
산자의 하나님이 어떻게 죽은자의 하나님과의 전쟁을 벌리시는지를 보여주시면서
우리는 이 승리를 누리는 겁니다. 다 이루심이 떳다는 이유로
임마누엘이 떳다는 이유로 그 증상을 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너거와 함께 하지 않는다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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