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대제사장 책임제
산상수훈과 대제사장 책임제
2010년 9월 12일 일요일 오후 12:36:56 김대식
산상수훈에 대해서 오늘 한목사님이 설교를 했다.
거룩한 율법
일점일획이라도 떨어지지 않는 완전한 율법을
누구에게 전하시는 고 하니
(마 5:17, 개역)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마 5:18, 개역)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바로 사망에 그늘에 주저 앉은자
흑암의 백성들
개같은 이방인
(마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마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마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마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마 4:18, 개역)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마 4:19, 개역)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20, 개역)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1, 개역)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마 4:22, 개역)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마 4:23, 개역)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 4:24, 개역)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 4:25, 개역)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 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이들에게 복음을 개시하면서
산상수훈을 언급하신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고 하니
새는 바가지 라는 뜻이다. 깨진 장독대, 밑빠진 독에 물붓기
(영화 "파괴된 사나이"가 생각 난다 ㅋㅋ)
바가지에 물을 담아도
바로 새어 버리는
아무리 담아도 담을 수 없는 새는 바가지에게만
이 산상수훈의 대상자로 삼았다.(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새는 바가지 성질이다. 곧 할례다. 죽은자 이다. 단절된 종말인간이다.)
이것을 지난 주에 오목사님 말대로 하면
뭘해도 어길 수밖에 없는
산상수훈 줘도 지킬수 없는 범법자 한테만
산상수훈을 줬다는 것이다.
아무리 주차노선에 맞게 주차를 해도 노선이 움직여 버려서
주차위반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것이다.
거룩을 신체에 담아버리면 그 신체가 찢어버리는 것이다.(거룩을 봉투에 담으니까 봉투가 찢어짐)
이것을 회개 라고 한다.
죽은자 라고 한다.
결국 산상수훈이라는 거룩의 완성은
이 죽은자에게만 해당 된다.
마치 청함을 받은 60만명의 장정이
광야에서 율법을 받는다.
십계명의 전문은 애굽의 종 되었던 여호와 이다.
즉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이다.
마치 3가지 물증으로 잡혀서 빼도박도 못한 시아버지 유다와 같다.
무조건적인 약속을 며느리 다말은 그 3가지 부정적인 물증으로(성령의 일이란 집단부정성)
유다 속에서 약속을 끄집어 낸다.
유다의 신체는 바닥을 쳐야 한다.
즉 할례 온 사람가죽이 다 벗겨져짐을 당해야 한다.
애굽의 종 되었던 자들에게 십계명이라는 거룩한 율법을 주시는 이유는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라.
애굽의 종 되었듯이 이제는 반대로 여호와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는 취지로써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준 것이다. 그것이 십계명이다.
결국 지킬수 조차도 없는 것을 준 것이다.
구약의 십계명도 못 지키는 주제에 신약의 산상수훈을 지킬려고 한다니 웃기는 것이다.
이렇게 60만명이 청함을 받았지만
그 거룩을 담는 종이부댓자루로 거룩을 담아보면
즉 거룩한 십계명의 율법을 담아보면
정작 자아가 튀어나오는 자와
거룩 앞에서 자신이 더러운 죄인임을 아는 자
두 패로 나누어 진다.
결국 어떤 누구도 율법을 지킬수 있는 신체란 없고
오로지 완악함을 발현하는 신체의 또렷함을 보게 된다.
결국 지난 글에 말했듯이
주님의 관심 사는 다른 신체 이다.
다른 몸이다.
그 몸은 이웃사랑하는 율법을 일점일획도 떨어뜨리지 않는 완전한 몸이다.
지켜서 지키는 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이웃사랑의 몸이다.
놀랍게도 우리는 그 몸을 아벨처럼 쳐 죽여 버린다.
그리고 우리는 가인처럼 자신의 제사만을 고집하게 된다.
몰래 감추어버린 아벨의 죽음을 땅은 호소 한다.
선지자들은 호소 한다.
다른 몸은 호소 한다.
그래서 그 다른 몸이 율법의 테투리 그대로 완벽하게 이루시고
의문의 증서를 찢어버린다.
더 이상 지킬 율법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라 하지말라 속으로 집어 넣는 이유는
그런 자신의 신체는 보는자 인지
다른 신체를 보는 자인지
뻔뻔스럽게 바울은 그 구조 속에 집어 넣어버린다.
이것이 십자가 구조 이다.
왜 다른 신체를 못 보는가 하니
보여주지 않으니까 믿을 구석은 자기 신체가 전부이다.
왜 다른 신체를 볼 수 밖에 없는고 하니
보여주니까 보여주고 내 신체 죽여버리니까 달리 다른 신체를 말할 것이 없기에
다른 몸이 전부이기에 내 몸은 박살이 낫기에 그 다른 몸을 증거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대상이 먼저 설정이 되어 있다고 했다.
십계명 전문에 이미 대상이 먼저 설정이 되어 있다고 했다.
즉 죽은자 이다.
이스라엘의 특이성이다.
처음 자리이다.
이스라엘의 처음자리는 죽은 자리 이다.
없는데서 생겨난 자가 이스라엘이다.
죽은 태에서만 태어난 자들이 약속의 자녀이다.
단순히 생뚱맞게 죽은태 라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두 태를 설정해 두고서 이것 아니요 이것이다 라고
하나를 반드시 밀치고서 나온 태가 죽은태 이다.
그 죽은 태에 약속이 담겨져 있고,
그 죽은 태를 믿음으로 삼아 버렸다.
즉 처음자리 특이성으로 삼아버렸다.
두 언약 속에서 종의 계집이 아닌 하늘의 어머니에게서 난 자들이다.
(갈 4:19, 개역)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 4:20, 개역)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갈 4:21, 개역)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갈 4:22, 개역)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갈 4:23, 개역)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갈 4:24, 개역)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갈 4:25, 개역)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갈 4:26, 개역)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갈 4:27, 개역)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갈 4:28, 개역)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갈 4:29, 개역)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갈 4:30, 개역)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갈 4:31, 개역)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산상수훈의 완성은
광야로 치면 원망하는 자에게만 해당 된다.
즉 죽은자에게만 해당 된다.
언약궤에 담겨질 자의 조건은 원망한 자 이다.
죽은 자 이다.
바닥을 친 자들이다. 종말의 끝 사람이다.
종말인간이 되기 싫어도
물없는 곳으로 양식없는 곳으로 몰고가면 다 튀어나온다.
그리고 담는다.
피를 드러내기 위함이지 그들이 원망한 조건이 잘해서가 아니다.
지독하게 시리 피를 드러내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맹글어 버린다.
신체의 바닥을 쳐서 보게 되는 피 말이다.
그리고 그 피가 뿌려짐으로써 비로소 두 패가 나누어진다.
이 피 때문에 우리를 원망할 수 밖에 없는 부정적 몸, 부정적 신체로 만들었다는 말이지?
이 고작 피 때문에?
거부다 거부
라는 식과
이 피 때문에 우리를 원망 할 수 밖에 없는 자로 만드심이 이 용서의 피 때문이였군요 라는
자로 나누는 식이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용서를 지킬려고 그렇게 자신의 한계점을 넘어서면서까지 도저히 불가능한 용서를 드디어 펼치게 되니까
그 용서가 한낱 무용지물이 되게 만들어 버리는
이미 용서해 버린 자가 있다는 것에서
죽은 아들의 어미는 폭파 한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나도 제발 용서 할 수 있도록 용서의 한가닥을 걸치게 해 달라
내가 용서하기 전에 누가 미리 용서 해 버렸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라고 해 달라
이것이 용서의 완성이 미리 더 낫게 나타난 것에 대한 분노이다.
더 나은 제사가 이미 앞서서 있다는 것이 거짓말이길 바라는 것이다.
더 나은 지킴이 이미 앞서서 지켜져서 완성 되었다는 것이 거짓말이길 바라는 것이다.
가인의 제사는 더 나은 제사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괜찮은 제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괜찮은 제사가 되어 본들 소용이 없다.
이미 더 나은 제사는 처음부터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있었고
미래완료로 있었기 때문에
더 나은 제사가 앞에 나타나든
뒤에 나타나든
나의 제사(행함)가 있는 이상은 이미 걸리끼는 걸림돌로로만 작용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인간이 구축한 믿음에
그 믿음을 치고 들어오는 다른 몸에서 난 믿음이다.
다른 몸에서 난 믿음이다 라는 표현 보다 더 정확하게하면
다른 몸 자체가 믿음이다. 죽음이기 때문이다.
첫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몸은 죽음 아래에서 나온다. 죽음에서 다 걸려버린다.
죽음도 못 넘어서면서 믿음은 운운한다는 자체가 말이 안된다.
그래서 그 몸은 결국 지키기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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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3일 월요일 오전 10:51:32
이스라엘에게서 두 물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있는 물로써, 고인 물로써 그것으로써 뚝딱 뚝딱만들어 개조 제조 할려는 생산 공장이 있고 (10지파 북이스라엘)
또 하나는 있는 물 바닥쳐서 어디에서도 공급받을 길이 없는데 외부에서 물이 공급함을 당하는 바람에 공급하시는 물로써 생산되는 공장이 있다. (남이스라엘 2지파 유다, 베냐민 지파)
그렇다면 우리는 또 눈치챈다. 아 두 지파가 약속을 이구나!
아니다.
남이스라엘이 약속을 담음으로써 찢어진다. 멸망한다. 자기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찢어진 흔적에서 죽은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미래완료만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에서는 같이 멸망하지만 다시는 일어남이 없다.
둘 다 어차피 망한다. 망해도 한 쪽은 자신에게 공급해준 공급자를 드러내고 외치고 죽고
다른 한 쪽은 공급해 준자가 없기에 외칠 것은 자기 신념만 외칠 뿐이다.
결국 산상수훈은 죽은자를 대상으로 미리 설정하고 주어진 거룩 완벽한 선함이다.
이것이 바로
죽은 가시떨기나무에 소멸하는 불이 붙어도 타들어가지 않는 기이하고 특이한 현상이다.
그것은 소멸하는 여호와 불이 많이 참고 참아서 당장에 불태워 소멸케 만들어도 되지만
안타들어가도록 낮아지시고 섬기시고 배려했다는 것이다.
아니 생각을 해 보라
얼마나 특이한가.
가시떨기나무에(죽은자와 방불한 히 11:12) 맹렬한 불, 소멸의 화염의 불이 붙었음에도 불구하고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히 11:11, 개역)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히 11:12, 개역)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다 태어버리지 않고
다 쟂더미로, 허구로, 허무로, 타들어가지도 않는다면
한 줌의 티끌 로 먼지로 날려버리지 않는다면
참으로 이상하다.
아니 그것보다
그렇게 안만들려고 무지 무지 땀흘리시는 불
낮아지시는 불
자신에게 붙어버리면 다 타버림에도 불구하고 안타도록 하고자 애쓰시는 불
얼마나 특이한가?
안 태워버릴려고 무지 무지 애쓰는 불
결국 자신의 불을
꺼 버리시는 방식 뿐이다.
이것이 모순이다.
반대의 반대이다.
이 정도로 사랑은 반칙이다.
자신의 속성인 불을 자기의 사랑에게만 예외로 빼돌리는 반칙이다.
그러나 이 용서의 불은 일만달란트 탕감받은자에게는 맹렬히 퍼붓는다.
용서란 인간에게 좌우 되지 않는다는 한치오차 없는 일체양보없는 예리한 검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낮아지셨으면 안타버리는 것일까?
상해버려 새카맣케 타버리고 썩어 문들어 졌기 때문이다.
얼마나 배려 했으면 불을 꺼버렸을까? 하나님의 자리를 버렸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죽음의 자리
종의 자리
원수로 몰려 버리는
마귀 들린 대마왕의 자리도 마다 하지 않았다.
이것이 믿음 되신 예수님 이다.
믿음이다.
대제사장 책임제는 이 사랑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하나님을 자기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타인의 몸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건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
하나가 빠져도 안된다.
하나가 지연되어도 안된다.
이 두 가지 계명을 동시에 만족하는 것은
소멸하는 불이 자신의 언약을 깨뜨리는 방식 외에는 없다.
그래야 안 타죽는다.
그런데 예수님이 막상 이런 낮아지신 모습으로 오니까
다들 한결같이 이용해 먹는 모습 뿐이다.
도리어 참 잘된 모습이다.
이스라엘을 찾기가 더욱 쉬었다.
죽은자 찾기란
마치 광야에서 원하는대로 메추리 고기를 퍼부어 준다. 기적이다.
그러나 한 입도 씹어먹지도 못하고 숨막혀 죽었다.
잉여를 먹고 그 잉여에 목졸려 죽은 것이다.
그 독을 오늘날도 달란다.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한다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표적은 요나의 표적 뿐이다.
마땅히 죽어야할 죄인임을 찾을 뿐이다
예수님 입장에서 너무 너무 잃어버린 자기양 찾기란 쉬웠다.
다들 한 가닥 믿음이 있다고
한가지씩 내밀어서 내놓기에 바쁜 마당에
아무것도 내놓것이 없다는 자가 자동적으로 구분 구별 된다.
마치 사사기 기드온 전쟁에 군사 뽑기 방식과 같다.
자동적으로 작은 쪽이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에 군사로 뽑힌다.
많은 쪽은 탈락이다.
그 군사들은 이미 단절된 종말인간이다. 죽은자이다.
가시떨기나무다.
가시떨기나무인 죽은자는 오로지 산분만 앞장세운다.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 것인가?
(사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사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사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제가 가겠습니다.
성령이라는 불도져로 협곡을 짤라버려서 평지로 만들어 버리고
웅덩이를 맥우어서 지평선으로 만들어버리는
성령의 전쟁을, 십자가의 전쟁을
곧 낮은자 높이고 높은자 낮추는
비천한 자 높이시고 높아진자 꺽어버리는
희년전쟁
평지전쟁
모든 것을 무로 돌려 버리는 희년전쟁
모든 것을 처음 자리로 만들어 버리는
누가 높은 선한자인지 누가 낮은 악한자인지 무용지물인
불도져로 밀어붙어버리는
모든 자를 죽은자로 만들어버린느 십자가 전쟁을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그 사랑 때문에
자기 몸을 내어준 자기언약을 쳐 버린 불륜에 뛰어든 그 사랑 때문에
성도는 죽어도 상관 없는 것이다.
불 속에 들어가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심판 속에 들어가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숙제이지
인간의 믿음이나 행함력과는 무관하다.
(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사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사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사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도리어 그 전쟁에 목격자로써
왜 이 두 패로 나누어지는지를 감격할 뿐이다.
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는 말씀인지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도록 하는 말씀인지
오히려 마음으로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을까봐 염려하고
두려워 벌벌 떠는 말씀인지를 확인할 뿐이다.
(마 13:11,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마 13:12, 개역)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 13:13, 개역)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마 13:16, 개역)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마 13:17, 개역)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 13:18, 개역) 『그런즉 씨 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요 12:20, 개역)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요 12:21, 개역)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요 12:22, 개역) 『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짜온대』
(요 12:2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요 12:24,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 12:25, 개역)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요 12:26, 개역)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요 12:27, 개역) 『지금 내 마음이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 12:28, 개역)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신대』
(요 12:29, 개역) 『곁에 서서 들은 무리는 우뢰가 울었다고도 하며 또 어떤이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고도 하니』
(요 12:30,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소리가 난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
(요 12:31, 개역)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
(요 12:32, 개역)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 12:33, 개역)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요 12:34, 개역)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요 12:35,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개역)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요 12:37, 개역)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 12:38,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요 12:39, 개역)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 12:40, 개역)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 12:41, 개역)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결국 산상수훈과 대제사장 책임제란
반드시 미워할 자를 미워하겠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시겠다는 에수님의 단호하심이다.
목숨까지 버려가시면서(언약을 깨시면서 까지) 이룬 언약갱신이다.
이 최종 언약을 갱신하셔서
시온에 두시는 이유는 십자가만 옳다 함을 받기 위함이다.
유일한 우리를 걸려넘어뜨리는 거친돌이기 때문이다.
이 거친돌을 쳐다보고 자랑하는 자는 살고
이 거친돌을 거부하는 자는 이미 심판받은 자이다.
(롬 9:6, 개역)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 개역)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 9:8, 개역)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9, 개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