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질투하시는 하나님
김 대식
2008. 5. 28. 17:46
질투하시는 하나님
지독한 미움과 지독한 편애는 오로지 예수님(십자가의 지혜)만이 드러내시는 비밀
Q . 질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2008-05-27 11:02:36
A . 답변을 두 개의 글을 통해서 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성경에 나타난 문자를 토대로 그 의미를 파악하고
또 하나는 이번주 오전 설교를 듣고 느낀 것을 결부시켜서 질투에 대해서 파악하고자 합니다.
1 . 첫 번째로
질투라는 것은 상대적인 대상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기준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그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즉 율법에 질투를 허용된 것처럼 나타나고 있습니다.
(출 34: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민 25:11)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나의 질투심으로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의 노를 돌이켜서 나의 질투심으로 그들을 진멸하지 않게 하였도다』
(민 25:13) 『그와 그 후손에게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그가 그 하나님을 위하여 질투하여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신 4: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라』
(신 5:9)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신 6: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신 29: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로 그의 위에 붓게 하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로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필경은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하시되』
(신 32: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신 32: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수 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요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습 1:18) 『그들의 은과 금이 여호와의 분노의 날에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할 것이며 이 온 땅이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삼키우리니 이는 여호와가 이 땅 모든 거민을 멸절하되 놀랍게 멸절할 것임이니라』
(습 3:8)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일어나 벌할 날까지 너희는 나를 기다리라 내가 뜻을 정하고 나의 분한과 모든 진노를 쏟으려고 나라들을 소집하며 열국을 모으리라 온 땅이 나의 질투의 불에 소멸되리라』
(슥 8: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그를 위하여 크게 분노함으로 질투하노라』
즉 율법은 이것을 겨냥한 질투를 허용하는 듯 보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라는 것에 의해서 그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우상에 대한 지독한 미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일체 양보가 없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모세(제사장)가 이스라엘을 대하면서 가장 큰 악마의 실체이며
또 다윗(왕)이 이스라엘 속에 감추어진 어두움의 실체이며
이것이 선지자가 목숨을 걸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 내에 감추어진 비밀로써
이 실체를 까발리는데 선지자가의 목숨이 미끼와 소모품으로써 동원되기도 했으며
예수님이 바로 이 세가지 (제사장, 왕, 선지자) 역할로써 이 비밀을 밝혀 내시고
이 우상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다 이루었도다)
그럼 이 우상이 뭐냐? 곧 자아입니다. 그럼 단순히 자아라는 막연한 의미를 우상이라고 보는게 아니라 그 자아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관계를 파악해야 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의 열매를 통해서 선악을 알게하는 매개체가 된 것이 바로 마귀입니다.
즉 마귀와의 관계성에 놓여진 모든 것이 우상입니다.
좀 더 더 적극적으로 나 외에 라고 여호와 하나님 외 와의 관계성은 다 우상이다고 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여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에 와서는 아주 적극적으로 누구든지 주를 사랑치 않는 자는 이미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이미 저주를 받은 과거완료입니다.
(잠시 추가할 사항은 질투는 반드시 진노와 분노와 응보=원수갚기 와 연관이 된 전쟁개념입니다. 진노의 의미가 항상 포함되었다는 겁니다. 결국 심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구원의 하나님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의 하나님이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인간의 하나님이란 심판을 빼버린 구원의 하나님만 따로 설정 합니다. 그것이 우상입니다.)
자 나 외에 라고 했을때에 이 자체가 이미 모순이 되는 이유는 인간이란 자기자신 외에는 사랑하지 않습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염두하고 겨냥해서 나오는 것이 바로 신명기 큰계명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라고 못지킬 것을 알면서도 겨냥하면서 다가옵니다.
즉 뭔가를 자꾸 지적하겠다는 겁니다. 즉 관계성입니다. 배후세력을 끌어들여서 잡아내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곧 배후세력에 갇혀버린 종이 된 자이고 그 배후세력인 주인을 겨냥해서 율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십계명의 전문이 중요한 이유는 애굽의 종 되었다 라고 그 종의 주인을 겨냥한 십계명입니다. 그럼 여호와 하나님은 이 종을 두고서 빼앗는 자와 뺏기는 자냐 로써
나 외에 라는 의미를 자신의 숙제로 해결하여서 예수님 자신의 숙제를 어떻게 완성했는지를 그 기쁨의 격동과 감격을 아무 값없이 성령을 부으셔서 나 형상에 같은 운명의 관계성에 놓이게 됩니다. 그 외에의 관계성은 우상과의 관계성으로 몰아붙이고 지독하게 미워하는 질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자 그럼 여기서
(출 20:1)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일러 가라사대』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 20: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6)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이 출 20장의 십계명이 신6장의 두 계명으로 전환되면서
뭔가를 겨냥한 것이 들추어졌습니다. 곧 나 라는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 [나]에 대해서 철저하게 갇혀버린 자아라는 허상의 실체를 보여주고자 이웃 개념이라는 타인이라는 차이성으로써 나를 정립하게 합니다.
즉 나 외에라는 여호와 하나님과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나(허상 우상) 와의 차이성을
타인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느냐로 시합게임을 걸 듯이 사랑을 결정합니다.
만약 이 사랑을 못하면 가짜요 질투의 대상 곧 심판 공격 진노의 대상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세 예수님은 자기 몸 같이를 어떻게 실행하시는고 하니
자기의 몸을 죽이시는 지혜인 십자가로 완성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무슨 사랑입니까?
일방적인 선언일 뿐이지
사랑이라고 볼수 없습니다.
사랑할려면 계속 곁에 남아주어서
죽지 말고 곁에 남아서 보호해 주고
감싸주고 위로해 주고 고쳐주고 계속적인 관계를 형성해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어버리고 없어져 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의 대상인 우리를 겨냥한 것보다
먼저 우리와 관계된 배후세력을 겨냥한 모습입니다.
즉 마귀요 육입니다.
이 육의 실체를 들추어내지 못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육을 방치하고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모든 육을 반드시 제거하고 육을 다 지워버리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순되게 역으로 육의 실체와 육의 최대의 무기인 살인의지에(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음 살인의지 뿐임) 의해 죽임을 당하는 어리석은 십자가의 지혜로 오셔서 그 육의 무기가 아무 소용없는 육의 소욕을 영의 소욕이 실체를 까발리는 겁니다. 육은 결국 영에 의해서만 심겨지고 실체가 드러나지 육 스스로의 어떠한 권한이나 독자적인 행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즉 육도 영만이 와서 알려주지 육이 육을 알 재간이 없습니다. 여기서 영이란 예수님만 말하지 종교에서나 인간의 사유에서 나오는 영이란 다 거짓정보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넌 육이야 이게 바로 육이란다 라고 알려줄때에만 육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자 이런 육을 알려주기 위해서 십자가가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은
너희도 마찬가지로 심판받아 마땅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또 자기 챙기기 위한 수단인 구원으로 해석을 하게 되는 겁니다.
즉 여전히 육을 잇고자 하는 것이 바로 육의 사고방식인 선악의 사고방식이고
육의 마침이 곧 새피조물인 영과의 관계성에 놓였다 라는 것을
주와 함께 죽고 주와 함께 사는 관계성으로써 비로소 이끌어주시고 알려주셔서 알게 됩니다.
그 외의 길은 다 질투의 대상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을 알지 않기로 했다는 겁니다.
율법의 대가가 왜 율법을 다 버리고 십자가 라는 어리석고 미련한 버림과 저주만을 알기를 원하노라 라고 할까요?
내가 받아야 할 진노인 질투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신 것은
십자가의 어리석음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육을 단절 지워버리기 차단 구별 구분 가르기 쪼개기 나누기 질투하기 진노하기 심판하고 저주하기 부정하기 부인하기 는 오로지 영만이 하는 고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부정적인 표현으로 나타남 즉 선악을 겨냥한 표현임 예로 그냥 예수님의 승리로 이기는 교회라고 표현하지 않고 항상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라고 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을 이미 거부하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음, 또 나 외에 라고 바로우상 섬기지 마라 라고 하면 될 것을 나 외에 라고 나를 염두한 것은 인간은 자아성만 추구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아버리는 것임)
그래서 십자가만을 앞장세우는 겁니다.
자 그럼 결론적으로 질투란
십자가에서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질투는 십자가를 말하기 위함입니다.
다 이루었도다 라는 십자가의 외침은
곧 질투의 외침입니다.
어떤 질투요
죄에 대한 지독한 미움에 대한 질투입니다.
사랑만이 죄에 대해서 질투하고 진노하고 분노하고 저주를 퍼붓고 심판을 합니다.
그 자리에서 빼내시고 빼앗고 주인을 교체하고자 하는 모습을 질투의 예수님이
마귀의 세상의 실체를 밝혀내시고 사랑이라는 질투로써 완성하시는 겁니다.
2 . 두번째로
2008-05-25 일자
본문 : 마가복음 3장 20- 30절
제목 : 예수님이 받은 오해
듣기 : 음성 , 보기 : 동영상
오전 설교에서 아주 중요한 비유가 하나 나옵니다.
도둑이 주인을 결박한 후에 가구를 빼앗는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도둑은 예수님이고 곧 예수님은 빼앗는자 인 도둑이고
주인은 마귀요 곧 마귀는 빼앗기는 자요
그 마귀의 물건은 곧 우리 인간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인간은 마치 전리품일 뿐이지 자유성이 없습니다. 두 사람인 도둑과 주인의 행동 결과에서만 운명이 결정될 뿐이지 자력성이나 독자성이 일체 없습니다.
(마 12:18) 『보라 나의 택한 종 곧 내 마음에 기뻐하는 바 나의 사랑하는 자로다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마 12: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 12:20)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마 12:21) 『또한 이방들이 그 이름을 바라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마 12:22) 『그 때에 귀신들려 눈 멀고 벙어리 된 자를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벙어리가 말하며 보게 된지라』
(마 12:23) 『무리가 다 놀라 가로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마 12:25)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마 12:26) 『사단이 만일 사단을 쫓아 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마 12:27)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 내느냐 그러므로 저희가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마 12: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 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마 12:29)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야 어떻게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그 세간을 늑탈하겠느냐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늑탈하리라』
먼저 앞부분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바알세불 걸렸다고 귀신의 왕이 들려서 힘입어 귀신을 쫏아내지 않았다면 이런 일들이 있을 수 없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사실 바리새인은 왠만하면 이런 평가를 내리지 않는 모든 인간에게 존경받는 자들입니다. 함부로 판단을 하거나 함부로 결정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이런 판단의 결정 외에는 나올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이 새로 새로 심어서 나오는 판단입니다.
즉 아무리 봐도 일체의 가망이 없기에 귀신의 왕이 들렸다고 하는 겁니다.
자 여기서 제가 왜 두 번째 글을 이 내용과 결부시켜서 질투라는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는 이유는
질투란 결국 질투 곧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어두움도 지금 이 순간에 창조해 낸다는 겁니다. 즉 빛을 증거하기 위해서 어두움을 그 차이성으로써 대비시켜놓는 구별 분리의 모습이 창조주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여기서 어두움은 독자적으로 놀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는 마치 주인인냥 마치 선인인지 악인인지 아무런 판단의 유무도 없이 배치되고
예수님 자신은 지금 바리새인의 판단이 맞다 라는 식으로 너희들 눈에는 반드시 지독한 악취를 풍기는 자로만 등장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늑탈하고 빼앗는 도둑으로서 자신을 표현했습니다.
즉 도둑이라는 것은 빼앗는 것 외에 다른 의미를 붙일수가 없다는 뜻에서 도둑입니다.
이게 바로 참 이스라엘(약탈자)입니다. 이스라엘이란 빼앗는 자입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 곧 언약이란 빼앗는 겁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천국 곧 하나님 나라는 빼앗는 겁니다. (침노)
(마 11:12) 『침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빼앗지 않으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말인가요? 질투를 통한 사랑을 통한 죄를 말합니다.
다시말해서 인간이 선악과를 통해서 하나님과 같이 된 그 죄를 빼앗지 않으면
내 뼈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질투의 사랑을 되찾기를 할수 없는 겁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질투는 죽음을 뚫고서 자기 사랑을 되찾고자 빼앗는 자로써 도둑이 되는 겁니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도둑이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약속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바로 다말(창녀의 모습, 화형받아 마땅한) 이라는 부정한 이방인이 도리어 유다를 살리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족보에 오를 수 없는 여자가 이 혈통적인 남성의 혈통을 끊고 단절하고 차단하고 지워버리고 할례와 세례라는 구별을 통해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영(스캔달 불륜 부정적 십자가의 지혜)의 일을 통해서 반드시 죄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질투가 없다면 다 이루었다 라는 약속이 성취 될 수 없는 바로 이렇게 생명의 길을 비밀로써 완성하시고 들을 귀 볼 눈을 새로 창조하셔서 알려주시는 감추어진 모습으로써 사랑을 전개하신다.
절대로 자기 사랑을 되찾고야 말겠다고 잃어버림에 뛰어드셔서 도둑도 되시고 약탈자도 되시고 늑탈자 창녀 세리 강도 도둑이 되셔서 자기 사랑을 죽음 속에서 건지시겠다는 지독한 질투가 죄도 죽음도 저주도 사망도 이길수 없는 겁니다.
이 사랑을 바로 선악의 표현의 반대적인 부정적인 표현에 서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마치 율법을 그리심산(축복산)과 에발산(저주산)에서 외치도록 하여서 사랑을 그 차이성으로써 증거하고 있지 한 쪽에서만 외쳐지는 것이 아니라 양쪽에서 다 같이 외치도록 되어 있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에서도 주님만을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옥 보내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를 지옥에 보내심이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라고 찬양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의 질투가 옳았음을 알게 되고 선악은 주님 외에는 알 필요 없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질투는 뭘까요? 바로 이 주님 혼자 홀로 다 이루신 사랑에 대한 무조건의 질투입니다. 즉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은 후에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일에 무조건적인 이유없는 거부입니다. 이것은 더더욱 십자가의 피를 겨냥한 약속의 비밀에 대한 상대적인 비언약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로 노아의 아들 함의 사고방식입니다.
결국 인간의 질투는 자기를 위한 사랑에 대한 소욕에 대한 방해를 겨냥한 겁니다.
그래서 육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이 거스리도록 되어 있는
반드시 영에 의해서만 인간의 질투가 밝혀지지 육 스스로가 인간의 질투를 밝혀낼수 없습니다.
이런 비언약을 통해서 상대적인 언약의 대조로 약속이 성취됩니다.
뱀의 후손이 있어야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주 여호와의 질투가 있음으로 인해서 인간의 질투의 내막이 드러납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그가 화냄을 통해서 그 사람의 목적을 알수 있게 됩니다.
이 화냄이라는 분노 곧 질투는
참 선지자에게서는 미래의 영광(십자가의 피)이 덮쳐진 이상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국가체제를 일체 허용치 않고 화를 내면서 돌격해 옵니다.
그러나 거짓선지자의 화냄은 바로 그런 참선지자의 공격에 이 이스라엘 국가체제를 사수하기 위한 화냄이요 분노입니다.
이 둘이 반드시 충돌함으로써 (이 후에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충돌로 이어집니다.) 약속은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을 둘로 나누는 분리와 구별성을 드러냅니다. 이것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분리하고 나누는 일
결국 누구의 분노, 질투가 옳았느냐 하는 겁니다.
인간의 질투와 분노는 남을 위한 것이 아닌 오로지 자기자신만을 위한 허상인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자기챙기기를 위한 수단이요
주님의 질투는 반드시 사랑을 이루고 말겠다 라는 죄에 대한 철두철미한 거부입니다.
결국 인간의 질투도 남을 생각하는 남을 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닌 자기를 챙기는 수단으로 드러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과의 충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저들의 시기와 질투를 들추어내시는 방식입니다.
그럼 주 여호와의 질투(사랑)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십자가에서만 예수님의 질투가 완성 됩니다.
즉 버리심입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챙기기의 반대) 원수들에게 내어주신바 된
인간으로부터(자기 피조물)의 버림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버림받음을 통해서
죄에 대한 철저한 거부와 사망권세를 멸하시는 약속의 성취인 겁니다.(창 3:15)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롬 11:14) 『이는 곧 내 골육을 아무쪼록 시기케 하여 저희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려 함이라』
(롬 11:15) 『저희를 버리는 것이 세상의 화목이 되거든 그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리요』
자 여기서 사도바울은 유대인을 위한 사명감뿐인 율법에 완벽성을 갖출려는 열심인 자였습니다.
그런데 졸지에 이방인의 사도로써 유대인을 시기 곧 질투를 유발케 하겠다 라는 겁니다.
바울 자신이 율법 외에 다른 의가 덮쳐진 그 십자가의 피로써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기에
같은 원리로써 율법만을 사수하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세상(이방인)의 화목이란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만약 이 화목이 덮쳐진다면 받아들이는 것이 죽은자 가운데서 사는
무에서 유의 창조인 겁니다. 바울 자신이 유에서 유를 추구한 성화론자의 모습이 박살나고
이방인처럼 무가 되어서 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창조주를 만난겁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이다는 겁니다. 결국 거룩이 곧 질투입니다. 뭔가를 하나 표적으로 삼고 공격해들어가서 무로 뚫어버리고 없애버리고 지워버리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버림받아 마땅한 죄에 대한 거룩한 하나님의 질투입니다.
그 무에서 다시 유로 창조하심은 이 버림받은 흔적 곧 잃어버림의 흔적, 심판받은 흔적 곧 십자가의 흔적을 가지고서
나 아니였고 예수님이 옳았다 라는 비로소 믿음이 예수님의 피에서 도출 됩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의 희생제사를 통해서
정결한 자를 제물로 삼아 죽임으로써 그 의의 피가 부정한 아브라함을 도리어 살리는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정한자의 부정함이 부각이 되어야 하고 그 상대적인 정결한 자의 정결이 반드시 부각이 됩니다. 이것을 질투 만이 나누는 겁니다.
(바로 이전의 글과 연결이 되는 겁니다. 원수는 결국 주님이 밝혀내듯이 말이죠.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약속만이 비언약과 언약을 대립시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