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마가복음 26 :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

김 대식 2011. 6. 23. 11:55

마가복음 26 : 변형된 예수님의 얼굴

2011년 6월 22일 수요일 오후 9:05:53  김대식


(막 9:1, 개역)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2, 개역)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막 9:3, 개역)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심히 희어졌더라』
(막 9:4, 개역)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저희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막 9:5, 개역)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6, 개역)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하므로 저가 무슨 말을 할는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8, 개역) 『문득 둘러 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막 9:9, 개역) 『저희가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계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막 9:10, 개역) 『저희가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막 9:11, 개역) 『이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막 9:12, 개역)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막 9:13, 개역)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지난시간에 표적이란 일종의 기호라고 했습니다. 문자 싸인 흔적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얼굴성을 반영한다고 했습니다.

얼굴이라는 잉여성은 의미화(주파수)와 주체화(공명)이라는 두 개의 지층 사이에 있고 그 사이에서 정의 된다고 철학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의미화(주파수-편지용지와 새겨진 문자와 내용)는 자신의 기호들과 잉여성들을 새기는 흰벽(흰종이) 없이는 진행이 되지 않습니다.
또 주체화(공명-발신자 수신자)는 자신의 의식과 정염(사랑), 그 잉여성들이 머물 수 있는 검은구멍(블랙홀, 빈터 주께서 내 주께) 없이는 진행되지 않습니다.(임계점-응축점 커플 짝 포개짐)

이 두 개의 양자의 교차점 사이에(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다시 사심 그 사이의 3일이라는 간격) 매우 특수한 장치의 조립물(몽타주=성령을 선물=부끄 부끄 부끄 부정한 불륜의 증거물- 법궤에 담겨야할 원망의 3가지 물증)이 있으며 그것이 바로 얼굴입니다.

이 3일을 넘을 수 없도록 차단하시는 것이, 단절토록 분리 그 간격을 더더욱 넓혀버리는 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룩한 얼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인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짝이 되는 얼굴인 겁니다. 모든 인간들의 얼굴은 이 예수님의 얼굴로 인해 미끄러집니다. 자신의 얼굴을 못 쳐다 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로 장대 높이 들려야 하는 그 얼굴은 아무나 못 쳐다 봅니다. 자신의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돌려 버리는 싫어버린바 된 얼굴 즉 미끄러뜨리는 얼굴이기 때문입니다.


자 오늘 짝이 되는 얼굴들이 나타납니다.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는 것은 단절성을 말합니다. 이 단절성을 구체화 하고서는 또 다시 약올리듯이 표적을 주시는 짝을 허락하심으로써 그 간격을 벌려 놓습니다. 항상 이런 식입니다. 단절을 구체화 하시고 그래놓고서는 따로 표적을 주시는 쪽을 따로 형성합니다. 상대적인 겁니다.

표적을 주시지 않겠다는 쪽이 생겨야
표적을 주시는 쪽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은 받는 대상이 중요해서가 아니라
표적 자체에. 표적 스스로가 그 어떠한 양보가 없다는 취지입니다.
표적이 더 중요하다는 겁니다. 누가 주시느냐? 라는 누구 가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표적 때문에 받는 쪽과 받지 못하는 쪽이 갈라지는 거룩이라는 분리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 나누어짐이 거룩함이요 창조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수시로 수시로 임의로 임의로 늘 나누고 또 나누고 또 분리시킵니다.
한 쪽은 내어버려 두시고 다른 한 쪽은 무슨수를 써서라도 수갑채웁니다. 짝이 됩니다.

반대로 육의 소욕은 임의로 자기구원의 방식을 터득합니다. 그것이 나누는 방식이 아닌 일치성의 방식입니다. 차이성이 아닌 어떤 점이 일치한가?를 추구합니다. 다르다는 것을 추구해 버리면 차이의 간격이 벌어지기 때문에 그 모순을 넘어설수가 없습니다. 죄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차이성을 추구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입니다. 성령 곧 거룩(분리)의 영을 선물로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받지 않았기에 표적 안 받은 티를 반드시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따로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써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거기서 예수님이 변형이 됩니다. 그래서 변화산 이라는 별칭이 붙는 사건이 발생하는 겁니다.

산 자체는 변한 것 없습니다. 산은 일종의 도화지와 같은 흰 색의 종이 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종이에 하나의 표적이 벌어진 겁니다. 메시지가 적혀지고 그 메시지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발생케 합니다. 그 내용물을 쓴 사람과 그 편지를 받는 사람이 졸지에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의미를 부여한 것이 변화산 이다 라는 표현입니다. 메시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변화산은 의미가 없습니다. (누가복음 9장 마태복음 17장)

결국 변화산은 예수님의 얼굴의 영광성을 발현한 장소입니다.

그 영광성은 곧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이 의미가 되는 겁니다.
곧 편지지에 무엇을 적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표적을 주시지 않음으로써 표적의 의미를 그 가치를 언급했듯이

이 영광성도 동일합니다. 그것은 세사람 곧 모세 엘리야 예수님 세 사람의 대화 내용이기도 합니다.

바로 별세 에 관한 것입니다. 죽음입니다. 죽음

예수님의 변형된 얼굴성은 곧 표적이요 권능이며 영광성이요 능력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으로써 인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빨리 죽어주세요 라고 하는 겁니다.
엘리야도 빨리 죽어주세요 라는 것입니다.

빨리 죽어주세요 예수님!! 이것이 편지(표적)를 발신하는 예수님과 편지(표적)를 받는 수신자 모세와 엘리야의 대화 내용입니다.

얼마나 살벌합니까? 이것이 바로 수갑채워서 짝이 되는 포개짐의 운명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반드시 오해 하는 자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야 또 우리 또한 잘못된 생각을 이 차이성 곧 나누어짐을 통해서 그 간격을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쪽에서 수갑을 채우는 방식을 취합니다. 이 실수 아닌 실수 또는 죄성을 보여줌으로써 우리 또한 역시 마찬가지임을 발견해야 합니다.

즉 인간의 육에서 보는 시선으로 그 시각으로써의 해석이 모두 나와야 하는 겁니다. 베드로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라는 지적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주님쪽에서의 사랑을 알 길이 있겠습니까? 오로지 인간 쪽에서의 사랑 곧 죽음도 넘지 못하는 그 육의 한계점이 있는 모호한 사랑을 얼추 또 따라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적 받아야 하는 겁니다.

저는 이 부분이 지난 주에 사단아 물러가라 라는 베드로가 욕 먹는 장면과 연관해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구약의 야곱의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야곱이 어머니 말씀을 따라 형으로부터 도망을 칩니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서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그 유명한 야곱의 사다리 의 꿈을 꾸고 난 뒤에 야곱은 그 장소를 벧엘 곧 하나님의 집 이라고 명하고서는 십일조를 반드시 바치겠다고 합니다. (창 28:10-22)

(창 28:12, 개역) 『꿈에 본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섰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가 그 위에서 오르락 내리락하고』

(창 28:22, 개역)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맞습니다. 눈치 채셨죠. 야곱은 단 한번도 십일조 바친 적이 그 뒤에 없습니다. 설마 한번이라도 있었겠지? 그렇다손 치더라도 일부러 다 빼버립니다.

야곱 쪽에서 십일조를 바칠수 있다면 그것은 십일조의 의미가 되지 않습니다. 십일조가 무의미가 되고 무가치해 져 버립니다. 그리고 야곱의 사다리 라는 그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꿈도 개꿈이 되는 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전체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거룩을 달성하기는커녕 달성할 수 없음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도리어 야곱 자체를 십일조로 만드는 사건들만이 펼쳐집니다. [십일조 되기]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를 당하는 것이지요. 십일조가 인간의 행함 문제로 취급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졸지에 모호한 의문의 것이 됩니다. 이런 모호한 것은 그림자인 인간이 돈으로 우상으로 바꿔지는 인간 목사만 좋아라 하게 되는 짖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주님 쪽에서 행하시는 믿음으로써 작용하면 야곱이라는 인간 자체가 하나의 맏물이 되는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 하기]와 [십일조 되기]의 차이입니다. 십일조 하지 마시고 십일조 되세요.

대표적인 아브라함을 보시면 [복의 기준] 하기 또는 [열국의 아버지 하기] 라는 지키기 행하기가 도리어 육의 소유만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스마엘 탄생입니다.

(창 17:4, 개역)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 이스마엘의 탄생을 근거로 해서 이삭이 태어나는 겁니다. 이스마엘이 없다면 이삭도 없는 겁니다.

열국의 아버지 열국의 어머니 또는 복의 기준은 아브라함 쪽에서는 달성할 수 없음을 근거로 해서 고자와 불임여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 증거가 비웃음입니다. 그런데 그 비웃음이 바로 웃음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긍휼 곧 죽으심의 별세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예수님의 때를 바라보고 즐거워 하는 겁니다. 시공간을 초월하는 믿음이 비로소 덮쳐지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에서 발신이 되어서 거꾸로 소급이 되어서 아브라함에게 수신이 되는 겁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열국의 아버지 되기] 가 된 겁니다. [열국의 아버지 하기]가 꺽여지면 저절로, 고자 불임여성이 되는 즉 할례인간이 되는 저절로 [열국의 아버지 되기]가 되는 겁니다. 단절을 거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야곱은 바로 이 언약을 전수하는 자가 되어서 요셉 또한 맏물이 되는 [십일조가 되는] 겁니다.
십일조 되기(요셉)은 십일조 하기(나머지 형제들)로부터 시기와 핍박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되도록 되어 있는 구조입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싸우는 겁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는 의인을 죽어도 살겠고 라는 말씀이 덮쳐짐으로써 [십일조 되기]는 아무리 갈구어도 인간 쪽에서 소멸시킬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소멸이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드시 소멸시키고자 달려드는 [십일조 하기]의 무리들이 반드시 생성이 되는 것입니다. 비언약 무리 말이죠.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베드로는 집 초막 세 채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너무나도 희고 흰 영광을 육의 안목으로 해석한 결과 나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나쁘다 또는 잘못 되었다 라고 치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하나는 주를 위하여 또 초막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또 초막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짖겠습니다

이는 저희가 심히 무서워 하므로 저가 무슨 소리를 하는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겠다 또는 부여하겠다 등등 인데

주님은 받고 안 받고의 문제가 아니라. 별개의 문제로써 아니 별개의 문제라면 따로 따로 이겠지만 아무튼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는데 주님은 전혀 다른 방향의 일을 벌리시는 것입니다.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만 하시는 겁니다.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에 아들을 믿도록 하시는 일만 펼치시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여전히 베드로는 사람의 일 밖에 모르는 겁니다.
아니 그 대화(별세에 대한 모세와 엘리야와 주님의 대화)와 안 맞다는 겁니다.

분명히 신체만을 보고서는 누구인지 알수 없습니다. 또 본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어떻게 모세인지 엘리야 인지 파악할 수가 있었을까요? 얼굴입니다. 얼굴을 봐야지만 알수 있지 신체를 보고서는 알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얼굴을 파악했을 정도였지만(참신기하죠 단 한번도 본적 없으면서 말이지요. 물론 대화 내용을 들었으니까 누구인지 알았겠죠. 그런데 그 대화 내용을 들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믄 소리인지 모르는 겁니다.) 대화 내용을 듣고도 모르는 겁니다.

아브라함도 예수님의 죽음을 쳐다보고서 기다렸습니다. 죽어주세요.

모세도 변화산에서 죽어주세요
엘리야도 변화산에서 죽어주세요

그런데 베드로나 지금 현재 우리들이나 변화산에서 과연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할 수가 있겠느냐 하는 점입니다. 죽음은커녕 우리 또한 초막 세 채를 짖겠다는 것만이 나타날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의 한계입니다.

감히 뻔뻔스럽게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겁니다.

정말 정말 말할수 있는 자는 성령이 임한 자입니다. 왜 일까요?
도저히 자기 죄 때문에 살수 없음을 직시하기 때문입니다.
즉 죄인 이기 때문에 의사를 요청하는 겁니다.
원수 이기 때문에 구원자를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이나 베드로는 자신이 원수이거나 죄인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의인입니다. 어느 정도로? 초막 셋을 지어서 드릴 정도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초막을 짖고자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별세로써, 죽음으로써 이루어지는 집입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집을 언급합니다. 그리고 돈 놓고 돈 먹기 하듯이 십일조를 언급 합니다. 공간집착이 곧 자신의 축복관과 연관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이 종교입니다. 이런 종교성이 비언약으로써 위치함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은 언약으로써 그 공간과 시간(역사)를 자꾸 자꾸 날려버립니다. 쪼개고 쪼개고 쪼개심으로써 언약이 벌리는 사건 속에서 공간 집착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바로 이겁니다. 우리가 예수님께 초막 셋을 짖겠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순수하고 열심과 정성으로 아무런 사심이 없는 진짜 진짜 예수님만을 생각하는 마음이요 믿음이라고 해도 그 자체가 바로 속임수입니다. 종교성입니다.

위에서 언급한 [십일조 하기]가 바로 [초막 셋 짖기]입니다. 용어를 바꾸어서 십일조 하기로 읽었던 것을 초막 셋 드리기 로 바꾸어서 읽어보시면 결국 이것은 육의 소욕에서 나온 말입니다. 나쁘다 라고 할게 아니라 육에서 나올수 있는 최상의 표현인 겁니다.

속임수(종교성)의 이미지의 반대말이 바로 배신(십자가의 불륜)이미지 라고 했습니다.

속임수는 그 배후가 바로 선악과를 따먹도록 한 마귀입니다. 그래서 속임수의 이미지는 항상 동일하게 전제군주체제를 이룹니다. 시스템 곧 바벨탑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신체성입니다. 신이 되어버린 선악을 아는 신체입니다.

그러나 배신 이미지는 중간에 막힌 담을 찢는 낙랑공주의 이미지로 오신 예수님입니다. 주께서 내 주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제사장이 되시고 독생자 아들 예수님이 제물이 되는 방식으로써 나를 원수 삼으시고 나를 돌파하셔서 우편에 앉으시는 나의 신체를 찢어버리시는 새로운 신체 곧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시는 이미지가 바로 배신이미지입니다. 정념 곧 사랑의 커플입니다. 십자가로 원수된 자를 화목케 하는 커플 이미지입니다.
(차라리 [초막 셋 드리기] [십일조 하기]가 단절 되고 차단당하고, [십일조 되기] [초막 셋 되기]로 바꾸시는 주님의 작업이 바로 별세 라는 것이기에 죽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모세 엘리야의 대화와 짝이 되는 겁니다. 이것을 성전에서 두 사람의 기도의 차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자꾸 드렸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세리는 불쌍히 여겨 달라고 주세요 라고 합니다. 에수님은 과연 누가 의롭냐? 라고 물으십니다. 당연히 바리새인이 의롭지요? 그러나 주님은 누가 의로운 자와 짝이냐 라는 겁니다. 의를 간구하는 자입니다. 바로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불의합니다. 왜냐? 의를 소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주세요 라고 할 필요가 없이 드리겠습니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기도란 주세요 저는 무능자입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드리겠습니다 라는 것은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안듣는 겁니다.)

(눅 18:9, 개역)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눅 18:12, 개역)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눅 18:13, 개역)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눅 18:14,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마침 하늘에서 구름이 저희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음성(주파수)이 들리는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라고 그 공간을 가득채우는 공명을 이루는 겁니다. 즉 접속입니다. 접속(구멍을 뻥뻥 뚫어서 돌파하심으로써 수혈이 됩니다.)

그래서 모세처럼 엘리야처럼 빨리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별세에 대해 대화한 그 내용에
베드로를 접속 시키기 위해서, 접붙이기 위해서, 베드로를 접속 곧 수갑을 채우는 방식이 바로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쉿 쉿 쉿 하시는 겁니다.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쉿 쉿 쉿

엄청나게 예민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바하시면서 까지 말입니다.

예수님과 하늘에서 들리는 음성인 하나님과 짝이 된 것을
베드로에게 수갑을 채워서 알려주시는 겁니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5, 개역)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마 11:26, 개역)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 11:27,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마 11:28, 개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눅 10:21, 개역) 『이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눅 10:22, 개역)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
(눅 10:23, 개역)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종용히 이르시되 너희의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눅 10:24,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


제자들은 예민하게 경계하신 그 말씀을 곱씹으면서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도대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서로 묻는 것에서

예수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님이 답하시기를 그것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 하거니와
어찌하여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바와 같이 사람들이 임의로 대우하였으니라 하십니다.

서시관이 말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은 말라기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말 4:5, 개역)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개역)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그 엘리야가 마태복음에서는 세례요한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마 17:10, 개역) 『제자들이 묻자와 가로되 그러면 어찌하여 서기관들이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하리라 하나이까』
(마 17:1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마 17:12, 개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마 17:13, 개역) 『그제야 제자들이 예수의 말씀하신 것이 세례 요한인 줄을 깨달으니라』

천사의 말한바 대로 세례요한은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말라기 예언처럼 돌이키케 하는 기능을 부여받은 것입니다.

(눅 1:7, 개역)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눅 1:8, 개역)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눅 1:9, 개역)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눅 1:10, 개역)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눅 1:11, 개역)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눅 1:12, 개역)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눅 1:13, 개역)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눅 1:14, 개역)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눅 1:15, 개역)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16, 개역)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눅 1:17, 개역)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그래서 세례요한의 외침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입니다. 돌이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을 임의로 대우했듯이 인자도 이와 같이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마태복음 17:12)

다음 주에 다시 한번 살펴 보겠지만

이 말씀을 하시고 곧바로 서기관 즉 위에서 언급된 서기관 보란 듯이 하나의 사건이 벌어지는 겁니다. 마치 강퍅함 곧 살인의지를 일부러 일으키기 위해서 말이죠.

자 다시 돌아와서
지금 예수님은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든 또 표적을 주시지 않으시는 사건이든
이 모든 것이 바로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영광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영광을 위해서 모세와 엘리야는 예수님 빨리 죽어주세요 라고 외치는 겁니다.

아니 이것이 어떻게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자신이 그 영광에 대해서 쉿 쉿 쉿 하시면서 제자들에게만 알려주시고 아무에게도 알려주지 않는 말씀을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심을 말씀하십니다.

아 영광이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나심이 있구나

그래서 다시 살아나심에 대해서 뭔 말인지 몰라서 서로 묻는 가운데
서기관이 말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화두가 됩니다.

엘리야는 회복케 하기 위한 말라기의 예언에 따른 말씀을 언급하는 서기관을 끌어들임으로써

정작 엘리야가 왔지만 그 메시지를 영접하는가? 도리어 죽이듯이 인자도 죽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간격을 보게 됩니다.

죽음과 다시 살아남

그런데 이 사이에 서기관이 엘리야가 와서 회복한다는 것이 성경말씀에 기록됨을 알고 있고 또 믿는다고 하지만 정작 세례요한이 와도 안믿고 영접하지 않는다는 간격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인자되신 예수님 조차도 이 세례요한의 죽음에 같은 짝이 됨으로써 그 간격은 좁혀 지는 것이 아니라 더더욱 넓어져버립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 쪽에서 다가갈수 있는 접촉점 접속점은 그 어디에도 없게 됩니다.
아무리 선지자를 보내어서 회복을 펼칠려고 해도
회복을 자기 발로 차버리는 현상만 반복이 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관 선택관 인간의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사이에 있는 3일 이라는 간격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이 3일이라는 땅에 묻혀진 모든 것을 뚫어버릴 수 있는 능력은 인간 쪽에는 없음을 알려줍니다. 도리어 인간이 믿음이든 행함이든 신학이든 그 어떤 말씀 지킴이든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식으로 땅을 덮어버려서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3일 이라는 간격을 이길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치 시아버지 유다가 시형제결혼법을 지킬려다가 두 아들 죽고 마지막 세 번째 아들마저도 죽어버리는 그 길을 막을 길이 없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시아버지 유다의 약속관이며 언약관이며 그의 믿음입니다. 아무리 해도 마지막 세 번째 아들을 살릴길이 없습니다.

율법 외에 한 의가 덮쳐야 합니다. 그것을 다말이 시아버지결혼법으로 살리는 겁니다. 표적을 주시는 겁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세가지 증거물이 안 담겨질 길이 없습니다. 3가지 원망의 증거물이 증거궤에 담겨져야만 하는 것이 주님의 긍휼입니다. 아론의 싹난 지팡이, 깨어진 십계명 두 돌판, 만나를 담은 항아리.

베드로는 아무리 해 본들 꼬끼오 3 번을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기 쪽에서 사랑하겠다고 해 본들, 나는 저 사람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 세 번을 모른다 하니 닭이 우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사랑하시겠다고 작정하심은 나 보다 강한 겁니다.

(마 26:69, 개역)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 26:70, 개역)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마 26:71, 개역)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비자가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마 26:72, 개역)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마 26:73, 개역)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마 26:74, 개역)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 26:75, 개역)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다윗 또한 밧새바를 범하고 우리야 장군 고의적으로 죽이고 이름없는 어린아이의 죽음을 통해서 3가지 즉 3일의 간격을 보게 됩니다.

이 빈자리를 율법 지킴이나 손님대접이라는 이웃사랑 실천을 앉혀본들 미끄러집니다.(다윗)
이 빈자리에 딴 사람은 몰라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는 호언장담? 인간 쪽에서의 사랑을 놓아도 쭐꾸덕 미끄러집니다. (베드로)

이 빈자리를 빈자리 그대로 진행이 됩니다. 이 빈자리가 바로 성령의 소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단절입니다. 모든 인간 쪽에서의 의로움을 단절 시켜버리고 차단시켜서 동일화 시킵니다. 죄인 중의 괴수로 말이죠, 원수로 말이죠. 악마로 말이죠.

이 빈자리에 죄인 중의 괴수성, 원수성 악마성이 놓여질때에만 그 위에 피가 자신의 피의 가치를 발휘합니다. 이것이 영광입니다.

그래서 그 죽음에서 다시 사는 겁니다. 여디디야로 말이죠,

사랑으로 말이죠.

사랑이 영광의 자리에 놓이기 위해서 죄성와 원수성과 악마성인 육의 소유성이 담겨져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인간 자신의 영광이 되고자 구원받을짖 천국갈수 있는 짖 꺼리를 의롭고 거룩하답시고 그 빈박스에 담아버리니 도리어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그 간격을 좁힐수가 없습니다.

3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서는 시아버지처럼 3가지 더러운 부정한 물건이 다말에게 저당잡혀야 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의 믿음 사랑이 다 거짓임을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그 부정성을 저당잡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귀 때문입니다. 마귀가 저당 잡히지 않도록 율법지켜라 말씀 지켜라 이웃실천을 행하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너는 부끄러운 인간이 되면 안된다. 라고 다 마귀에게 잡히는 겁니다.

구지 예수님이 피 흘리시는 그 피가 발릴 필요가 없는 자로써 성숙 성화 하는, 영광에 일치된(파시즘) 인간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라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괜히 모세가 엘리야가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별세에 대해서 대화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모세 자신도 율법 제대로 지킨적 없습니다. 도리어 탈락이지요. 그래서 죄인입니다. 엘리야도 선지자로써 그 예언을 단 한번도 지킨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앞에서 불쌍혀 여겨달라고 죽어주세요 라고 요청하는 겁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스스로 버릴 권세와 스스로 되찾을 권한이 있기 때문이지 자기의 믿음 따위나 행함 따위에 전혀 기대를 걸지 않는 겁니다. 표적을 주시옵소서 라고 외치는 겁니다.

다들 베드로처럼 초막 세 채를 짖겠다고 다들 믄 소리인줄도 모르는 모호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십일조 드리겠다고 모호한 소리를 하는 겁니다. 지키지도 못합니다.

차라리 지키지도 못하도록 주님이 사건을 벌려서 야곱 자체를 십일조로 만드시는 것이 바로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야곱 자체가 하나님의 집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 자체가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맏물 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이 우편에 서도록 다윗을 원수 삼으시듯 말이죠.

베드로 가 초막 셋을 짖지 못하도록 베드로 자체를 성령의 전으로 삼으시는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성전이 되도록 하시는 것이 바로 별세로써 이루시는 영광인 겁니다.

베드로 성전 3채 짖기 하기를 깨뜨리고 베드로 자체를 성전삼기가 바로 별세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다윗을 성전 못 짖도록 하시는 것이 다윗가문 자체가 성전이 되는 여디디야가 되는 겁니다.

(행 7:46, 개역)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행 7:47, 개역)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행 7:48, 개역)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한 바』
(행 7:49, 개역)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행 7:50, 개역)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

주님은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입니다.

(행 17:25, 개역)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주시는 것으로 결정 납니다. 바치는 것으로 결정나는 것이 아니라 말이죠.

표적을 주시는 쪽과 안 주시는 쪽으로 갈라지는 것이 거룩이요 창조인 분리이지.
바치는 것으로 주는 것으로는 거룩에 미치지 못합니다. 모호합니다. 그런 바치는 것은 의문스럽습니다. 무슨 맘으로 했는지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이런 행한 것이 주님의 의로움 곧 영광에 보탬이 된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속임수입니다.

그 어떤 것도 보탬이 안됩니다.

주님은 주시고자 합니다. 자기 목숨입니다.

뻔뻔스럽게 모세도 엘리야도 바치겠다는 것을 변화산에서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주시옵소서 라고 합니다.

그것은 자신 또한 긍휼을 받지 못하면 지옥갈자임을 직시하는 겁니다.

그러나 산 아래의 사고방식은 자꾸 바치겠다 드리겠다 라는 의식만 가득합니다.
받은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표적을 주시고자 합니다.

의도적으로 서기관이 이야기한 엘리야에 대해서 언급하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곧 바로 서기관과 충돌하는 사건을 벌리십니다.

왜? 표적을 주시고자 말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표적을 받지 못했기에 귀신도 못 쫏아냅니다.

왜 우리는 귀신을 못 쫏아내는 겁니까? 라고 제자들이 묻습니다.

기도 외에는 나가는 법이 없다고 하십니다.
즉 무능한 자이기에 주셔야만 한다는 것이 기도인데
능력을 소유해야지만 귀신을 물리칠수 있다는 여전히 할례받지 못한
십자가를 모르는 의식 때문에 귀신을 못 쫏아내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능력이든 뭐든 행함이든 믿음이든 구원이든 자꾸 소유로 생각하고
그 소유성의 큼과 작음이 귀신을 물리치는 하나의 능력의 차이로써 생각하는 겁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기도 외에는 나가는 법이 없다는 것은 바로
이 순간 주님이 벌리신 사건이요 주님의 소유요
주님이 주셔야만 하고 주님이 하셔야만 하는
점점점 자신의 무능 죄성 원수성을 보는 것으로써 불쌍히 여겨달라는 것입니다.
귀신이 남이 아닌 자신임을 보는 것입니다.

아니 웃기잖아요 자기가 귀신인데 귀신을 물리친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건이 벌어지고 귀신을 물려칠 것을 요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이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모세의 별세에 대한 발언
엘리야의 별세에 대한 대화는
절대 절대 자신들의 영광을 위한 사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대화요 발언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발언을 할수 있을까요?
표적을 받지 않고서는 감히 발설할수 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수갑을 채우시는 겁니다.

왜 우리는 그런 무서운 발언을 못하는지를 먼저 지적받듯이
제자들은 쭐꾸덕 미끄러지는 굴욕을 당하는 겁니다.

아니 당신 제자들이 말로는 제자들이라고 하면서 병하나 못 고칩니다 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하는 겁니다.

담겨지는 겁니다.

그 무능함을 담는 것이 표적입니다.
그 무능한 미약한 닭으로부터 지적 받는 것이 표적입니다.
내가 욕하고 무시했던 다말로부터 도리어 건짐을 받는 쪽팔림이 바로 표적입니다.

나의 원수성을 뚫는 나를 원수삼으시고 나를 돌파하시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표적을 받기를
이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조건을 갖출 재간이 인간 쪽에 없음을 지적당하는 것이
표적을 주시고자 죽으셨다가 다시 사셔서 성령을 주시는 주님의 일이 바로 영광입니다.


예수님!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 갈길로 갈 수 밖에 없고
왕이 없어서 각기 제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는 나 자신이 왕이 된 영광을 추구하는 모습 뿐입니다. 이 악마성 이 원수성 이 죄성을 예수님께 포착당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께 원수성이 잡히는 자가 얼마나 행복한 자임을 알게 하소서
모세도 엘리야도 자신들의 원수성을 잡아달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요청하듯이
우리 또한 예수님의 피로써 우리의 원수성이 들통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비로소 부분적으로 보고 희미하게 보던 모든 의문의 것들은 사라지고
생생한 얼굴을 마주 볼 수 있도록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볼 수 있도록 동행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얼굴을 주시옵소서,
표적을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거두지 마시고 매일 매일 허락해 주시옵소서.
성령의 놀라운 탄식을 주시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고전 13:12, 개역)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