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분되는 사귐
흥분되는 사귐
며칠 전에 강이아빠랑 식사를 했다.
별 생각 없이 그냥 밥먹고 이야기 나누다가 해어지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미리 준비한 이야기꺼리도 없었고, 혹시 영화를 보자 라고 하자면 뭘 볼까 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였다.
그 전에 한 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는데
온 몸에 땀띠가 나서 못나가갈 것 같다고 했는데
이번에는 이번주에 교회 다녀와서 어지러움증이 생겨서
혹시 전화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막상 전화가 오니 그냥 까먹고 나갔다. ㅋㅋㅋ
그런데 이상하게도 무슨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지?
돌아와서는 아주 아주 흥분이 되었다.
둘이 대화 할때는 몰랐는데
집에 돌아와서는 흥분이 되어서
어머니에게도 둘이 나누고 웃고 떠들고 했던 이야기를
다시 막 나누면서 흥분됨을 갸늘수 없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지금도 며칠 지난 뒤라 중간에 글 적을려고 했던 것 다 까먹고 해서 귀찮고 해서 치워버렸는데
막상 생각이 떠올라서 적고자 하니
지금도 그 흥분됨이 다시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는 듯 여운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서 둘이 나눈 대화와
사도행전 1장 공부를 이어서 적고자 한다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기도하지 마시고 기도되세요 라고
참 어려운 표현이지만 정작 알고보면 무지 무지 쉽다.
한 쪽은 (전자는) 항상 주체가 나 이다. 그러므로 나의 숙제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쪽은 (후자는) 항상 주체가 예수님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숙제이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교회 다니지 마세요 라고 했다.
교회 다니지 마시고 교회 되세요
더 쉽지만 더 어렵게 들리는 말로 다시 풀이 하면
교회 제발 제발 다니지 말기 위해서 교회 다니세요 왜? 교회 다니지 말라는 소리를 교회에 가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교회가 사실상 없다.
교회가 교회 되세요 라고 하는 소리는 외치는 교회가 없고
다들 교회 다니세요 라는 소리만 외치는 교회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탈출을 교회속에 집어 넣어서 주님은 자신의 숙제를 펼치신다.
기도하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 왜? 기도하시는 분의 기도를 듣기 위해서다.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다.
그 성령의 놀라운 탄식이 바로 나를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고 알려주는 분의 탄식소리이다. 그 탄식의 내용이다. 이미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자꾸 기도할려고 기도 지키기를 한다는 것을 지적받는 것이 바로 기도 되세요 기도의 사람이다 라는 뜻이다.
기도 의 단어에 교회 성도 믿음 등등 단어를 바꾸어도 된다.
문제는 이런 사고방식이 다름 아닌 교회가 배척한다.
교회는 우상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지킬려고 하지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끝까지 죽어도 거부하는 집단이 졸지에 기독교가 되고 말았다.
이유가 뭘까?
그 이유가 바로 강이아빠랑 나눈 대화인데
우연이 나온 대화가 졸지에 나를 계속 흥분되게 지금도 온 몸에 전율이 퍼진다.
다 썩어빠진 몸에 이런 기쁨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흥분이란 바로 사귐이다.
사귐은 곧 뻔뻔함이요 싸가지 없음이다.
거짓선지자는 자나깨나 나라와 민족과 율법과 성전 그리고 말씀 지키기로 올인하면서 백성과 왕이 이 말씀을 지키기를 원한다. 그래서 평강 평강 절대로 이스라엘은 안 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사 우리 나라 평강 화목이다.
바로 이것이 거짓선지자의 특징이다.
거짓선지자의 신학은 화해의 신학 곧 변증법이다.
신과 인간의 화해
화해하지 못하고 진노가 펼쳐질 때 그 진노의 원인을 제거해서
둘 사이의 간격이 벌어지지 않도록 어찌되었던 간에 화목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의 주장이다. 오늘날 기독교의 주장이요 성화론의 주장이다.
그러나 참선지자의 주장은 그 반대다
이스라엘은 무조건 망한다는 것이다. 이유 없다.
그래서 기도하니까 에구 에구 기도 했었었졌쪘 엇었요? 라고 비아냥 거리고 비꼰다.
아무한테나 비꼬는게 아니다.
반드시 평강이다 절대 망할리 없다 라고 주장하는 저쪽만을 겨냥해서 비꼰다.
즉 상대적이다. 탕자는 반드시 맏아들에게만 눈의 가시다.
막살기는 반드시 절대로 막살면 안된다고 새삼스럽게 새롭게 주장하며 강조하는 그 무리를 겨냥해서만 막살기를 의도적으로 대립되게 외치는 것이다.
기도한다꼬? 이스라엘 안 망하는 줄 아냐? 라꼬 아무리 봐도 마귀짓으로만 보일 수밖에 없도록 행동한다.
이것이 참선지자의 주장이다.
아무리 봐도 참선지자가 거짓선지자가 아닐까?
반드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시선에서는 그런 해석 외에는 다른 해석이 나오질 않는다.
그렇다면 딴 해석을 봐야 한다. 곧 예수님의 해석이다. 즉 십자가 해석이다.
참선지자가 원인없이 결과만을 외친다.
그 원인 없이 나타난 결과로써 외치는 그 내용이 어디서 왔는지 보니까
그 결과란 미래완료이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귐에서 왔다.
그래서 거짓선지자들은 전공자인 반면에 (신학도 출신이요 박사 전공자 심지어 제사장이요 목회를 하는 직업인들인 꾼 전문가인 반면에)
참선지자는 일부러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런 계통을 비켜가서
갑자기 농사 짖다가 고기잡다가 그물 던지고 고깽이 던지고 사로잡혀서
증거하게 되는 그야말로 일자무식인 어중이 떠중이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써 외치는 것이다.
과연 이것은 선지자의 외침을 들으라는 소리일까? 듣지 말라는 소리일까?
답은 뻔하다. 들을 수 없다 라는 소리이다.
그럼 반드시 누구 소리를 듣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소리일까?
그야말로 당연히 거짓선지자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소리이다.
이런 뻔한 원인에 따른 도출의 결과를 뻔히 아시면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부러 이런 일들을 벌이시는 이유는
들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요
볼 눈이 있어도 못보도록 하기 위한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못보는
투명한 뭔가가 지나가기 위함이다.
투명한 뭔가가 뭘까? 투명한지 뭔지 하얀지 무색인지 그것 조차도 알수 없는 그 무엇이 도대체 뭘까?
여기서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갈라지는 것이다.
즉 갈라지는 차이로써 거룩이 활동한다.
아니 거룩이 거룩 스스로를 주체로 나셔 서서 , 대상을 삼은 것이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거룩을 지킬 필요가 없이 저절로 거룩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독수리를 쳐다보면서 부러워 하는 닭과 같이 길들여져 버렸다.
미운 오리 새끼 라는 동화가 그렇다.
날지 못하는 부류의 오리가 멋있게 날라다니는 기러기를 보고 부러워만 하면서
날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나는 척 하는 것으로 저거들끼리 도토리 키재기를 한다. 누가 돈 많냐? 라는 식의 인간과 같다. 누가 믿음 크냐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미운 오리 새끼 막내가 유달리 이단 같이 끝이 달라서 이단아 같은 그 덩치 큰 막내 미운오리새끼가 바로 유일하게 차이나는 거룩 그 자체로 태어났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길들여져서 나는 척만 하는 것들 속에서 같이 나는 척만 할 뿐이지 날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동전 찾듯이 99마리 나는 척 하는 놈들 내버려 두고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 곧 미운 아주 미운 그 차이날 수 밖에 없는 미운오리새끼를 찾아서 드디어 잔치를 벌려 보니 자신이 오리가 아니라 그렇게 부러워 하고 날기를 동경했던 기러기로 태어났다는 것을 비로소 목자 땜시롱 알게 된 것이다.
탁란 시켜서 애굽 속에 집어 넣어 차이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몽학선생을 붙였는데
도리어 애굽인의 사고방식 그대로를 가지고 있어서
광야에서 지킬수 없는 몽학선생으로 재교육을 받아서 그 차이성을 알려주신다.
그런데도 거꾸로 들을 수밖에 없는 그 육체를 모조리 소멸시키신다.
율법의 대표자도 탈락이다.
어디까지나 예수님의 소관에 달린 것이지 모세 소관도 아니다.
그래서 참선지자는 이스라엘을 소멸시키신다.
소멸 되어도 상관 없는 미래완료를 참선지자는 봐 버렸기 때문에
미래 완료가 덮쳐져버렸기 때문에
은혜가 임해버렸기 때문에, 다 이루었다 가 임했기 때문에
이미 다 완료된 이스라엘을 봐 버렸기 때문에
눈에 가시적인 이스라엘의 멸망은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더더욱 애착을 가지도록 하는 거짓된 화목을 거짓된 평강을 외치는 저 거짓선지자들의 외침이 참선지자들을 더더욱 간격이 벌어지는 반대되는 메시지를 외칠 수밖에 없도록 동기부여해 버린다.
그러니 뻔뻔스럽고 싸가지 없고 맨날 맨날 삐딱한 소리만 외치는 것이다.
왕권세력과 결탁된 거짓선지자들에게 세뇌된 이스라엘 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여? 또 너냐? 또 무슨 삐딱한 소리를 할려고 왔느냐 라고
왜 자꾸 부정한 소리만 하냐고 제발 좀 긍정의 이야기를 하라고 애걸복걸 달래기도 하고
목숨을 살해해 버리겠다는 협박까지도 하면서 자꾸 얼래고 달래고 별짖을 다해도
참선지자는 요지부동이다.
이미 완료가 왔으니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철거하자 라고 맘놓고 배째라는 식으로 니 마음대로 하세요 죽이든 살리든 죽으로 만들든 밥으로 만들든 난 모른다 라고 싸가지 없는 소리만 내 뱉는다.
이걸 콱 그냥 죽여버려? 라고 욱 함이 튀어나오지만
보는 눈들이 있고 또 자기자신들이 외친 소리가 있기 때문에 감히 이스라엘의 와해를 불러일으키면 도리어 이 참선지자의 계략에 말려들게 되면 진짜 참선지자의 말이 맞게 되는 것이니
그렇게 되면 안된다 싶어서 참고 참고 또 참아서
저 놈 카든 말든 자나깨나 이스라엘의 회복과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을 유지해서 이스라엘이 강성하도록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서 말씀대로 이스라엘의 거룩을 지켜 그 거룩이 유지될수 있도록 이바지 하겠다고 이 한 몸 바치겠노라 라고 거짓선지자는 충성한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과 똑같다. 오늘날 기독교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선지자는 정말 정말 착한 놈이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참선지자는 정말 정말 나쁜 놈이다.
그 시대 당시만해도 참과 거짓은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능력 조차도 인간에게 없었다. 이스라엘 속에 없었다. 예수님이 비로소 오심으로 갈라져 구분된 의미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지 않았다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구별이 바로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이다.
물론 지금도 참선지자와 거짓선지자의 구분의 구약해석을 못하고 있다.
혹 그런 연구 자료가 나와도 그것을 매장시켜버리는 사례가 빈번했다.(한국기독교역사)
그 이후 2-30년이 지난 지금 그 구별은 유순화 시켜서 이미 자신들의 유리한 방향의 내용으로 수정 보완이 되어서 나오는 실정이다.
어디에도 예수님의 시선의 해석은 없고 여전히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기도도 하고 교회도 되고, 성경말씀은 그저 대상이 되어버리는 식으로써 취급받을 뿐이다.
성경말씀 자체가 살아 움직여서 날선 검처럼 우리의 신체와 혼과 몸을 찔러 쪼개는 현실을 외면하고, 그 반대로 성경말씀을 대상으로 삼아서 유순한 것만 뽑아서 그저 양쪽다 화해할수 있도록 서로 양보하는 식으로 화해의 신학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거짓선지자의 활동을 여전히 주님께서 활성화 시키고 있다는 증거이다.
아니 대세다. 전체 다 이다. 없다고 봐야 한다.
말씀이 스스로 움직이는 현실을 볼 것이다.
바로 이것이 사귐이다.
사귀지 않는 자가 꼭 지킬려고 한다는 것이다.
신랑에게서 신부와 가정부의 차이가 뭔가?
신부는 아무리 일해도 돈 안 준다. 노등의 댓가가 없다.
그러나 반드시 가정부는 조그마한 일에도 그 노동의 댓가를 줘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정부는 신랑과 사귈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는 신랑과 사귄다. 이것이 자유다.
그러나 가정부는 그것이 무슨 자유냐 오히려 감옥이지 라고 놀린다.
사생아가 자녀인 자를 놀리는 식과 같다. 간섭받는 것이 그 징계받는 것이 무슨 자유이냐 라고 놀린다. 우리는 우리가 맘에 안들면 가정부일을 그만 두니까 결국 믿음도 내 숙제요 자유도 내 숙제요 어디까지나 모든 것이 내가 주체인데
넌 너 자신을 찾지 않고 왜 신랑의 간섭을 받는 것을 자유라고 하느냐 라고
도저히 납득이가 안되는 소리를 한다고 외친다.
납득이를 봐? 얼마나 자유로운가?
거꾸로 놀림을 받는 미운오리새끼를 놀리는 것이다. 피노키오 동화처럼
이런 사생아들의 세계에서
이런 버림받은 자들의 세계에서
아들됨의 차이는 뭔가?
징계다. 그 징계가 바로 사귐 때문이다.
내 쪽에서 사귈려고 하는 것은 사귐이 아니다. 징계를 일부러 회피하고자 하는 노림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징계 없이는 그 사귐이 사귐이 아닌 이유가 뭘까? 내 쪽에서 사귐이라고 빡빡 우겨도 소용없는 이유가 뭘까?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주님 쪽에서 넘어오시는 사귐만이 사귐인 이유는
바로 십자가 때문이다.
십자가는 변이다.
육체를 찢고 번데기가 변태가 되어야 나비가 되듯이
그 육체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는 변이하는 특이점인 십자가가 바로 오리의 습성에 빠진 기러기가 그 본래의 기러기로 변이되는 변이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광야교회라고 했다. 광야에서 자꾸 물없는 곳 양식없는곳 원망할만한 곳으로만 일부러 골라서 데리고 다닌다. 걸러내기 작업이다. 기러기 찾기 이다.
변증법자 성화론자들처럼 신과의 화목을 추구해서 기러기처럼 성화되자 라는 기러기인척 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광야가 아니라
광야란 곧 교회란 걸러내는 걸러내기 채이다. 십자가는 걸러내는 채이다.
(사귐=싸가지없음=막살기=계류=걸러내는채(검문,검색)=차이내기=빼내기)
장정만 30만명? 이제 이것도 기억 안나네 다 까먹었네? 검색해 보면
60만명이라고 나온다. 가장만 60만명 거기에 곱하기 3 아내와 자녀,
보통 할아버지 할머니 자녀 적어도 2로 하면 곱하기 5 해야 하는데
최소로 한다고 치면 3으로 해서 180만명 이 40년 광야동안 죽어나갔으니
하루에 8명 꼴 죽어서 걸러내었다는 것이다.
그들의 탈락은 그럼 지옥이냐? 라고 묻지만
그것 때문에 기록한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실제로 또 이것으로 겁줘서 돈 빼먹거나 성화를 유도하는 놈들이 한둘이가 아니다)
그 간격을 벌리는 차이성 곧 갈라내는 걸러내는 기능을 말하기 위함이다.
모세도 뭐 탈락이니까 그렇게 협박하는 놈들에게 너도 탈락인거 안다고 도로 겁줘야 할 것이다.
걸러내는 기능이 바로 교회다. 겁줘서 돈 빼먹고 댓가를 챙기고 성화를 하도록 동기부여하는 것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다. 나는 당신들의 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섬겼습니다 라는 그 따위 소리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놈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귐이 아니다.
사귐이란 걸러내고 걸러내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된 자를 보면 그 차이를 알수 있다.
딱 한 사람 바로 갈렙이다. 율법 지킨적도 없는 개같은 이방인으로써 유다지파에 편입된다. 그리고 그는 행함이 없이 그 은혜를 누릴 뿐이다. 신랑 되신 주님과 사귀는 신부됨을 누린다. 그것이 그에게는 은혜이지, 지키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사귐 조차도 주님 쪽에서 벌리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밭주인이 일꾼들에게 삯을 쳐주는 비유이다.
놀고 있던 놈들 놀지 말고 밭에 일하라 라고 중간 중간에 끼여넣는다.
이 은혜를 값없이 받은자와
처음부터 끝까지 계약된 대로 일한 자와의 그 차이성이
바로 주인의 선하심만을 드러내는 사귐에 의한 것이다.
이 사귐은 반드시 인간의 노동과의 차이를 벌린다.
왜 마르다가 마리아의 싸가지 없는 행동에 참을수 없었으며
왜 예수님은 싸가지 없는 마리아를 도리어 절대로 이 좋은 것을 빼앗기지 않는다고 했는가?
주님 쪽에서 사귐을 펼치신 결과로써의 갈라짐 간격벌어짐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못땠다. 간격을 벌리기 때문이다.
사귐은 그래서 흥분된다.
용서받은 것이 너무 너무 값없는 은혜로써 죽어도 좋아 라고 할정도로 흥분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은 정직해야 하며 착해야 한다. 그래야 그 값을 획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부조리 때문에 정직하게 일한 노동의 댓가를 정당하게 받을 수 없는 더러운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원한과 가책이 넘쳐흐르는 것이다.
때려죽어도 피해자이지 가해자가 아니다. 때려죽어도 노동의 일한 댓가를 받지 못하는 선량한 사람이지, 남의 것을 빼앗는 부당한 자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갈라지는 간격과 걸러내는 기능의 차이 곧 거룩 때문에
가인은 아벨을 죽이고 만다.
착한 가인은 싸가지 없는 아벨을 죽이고야 만다,
착한 형 에서는 , 약탈꾼 사기꾼 못땐놈 동생 야곱을 죽이고자 한다.
이 원인 없는 결과의 약속이라는 속성은 팔을 어긋맞는 사고방식인 십자가 때문에
모든 의미들이 전도 되는 것이다. 뒤바뀌어져 보는 것이다.
노력으로 전복이 아니라
주의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전복된 시각이 덮쳐보이니
알고보니 그 못땐 선지자들이 참선지자였고 이스라엘 망한다 카이 라고 말했던
또 알고 보니 그 착하고 착했던 선지자들이 거짓선지자 곧 이스라엘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고 평강이다 화평이다 라고 했던 놈들이 천상회의에서 보낸 악령이 씌여진 자였던 것이다.
사도행전 1장을 보고 깜짝 놀랬다.
이스라엘 12 지파는 단 한번도 이스라엘 스스로가 움직인적이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유다지파만 자신들이 그 약속을 사수해 왔다고 우긴다.
그러나 그 사라져버리고 딸랑 단 하나의 지파만 남았던 유다지파의 눈 앞에서
새이스라엘 12지파를 새롭게 세워버리면 과연 유다지파는 뭐라고 할까?
남들은 주를 다 버리고 해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 버리지 않겠다고 하는 그 베드로 앞에서
예수님은 베드로야 넌 나는 버린다.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나를 버릴 것이다.
그 세 번의 간격을 너는 넘어 올수 없단다. 라고 딴 제자들 앞에서 말해버리면
베드로 무안해지지 않는가?
딴 제자들은 베드로가 마운 당하는 것에 고소해 할까?
정작 베드로가 아니라 자기자신에게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다.
가룟유다를 선택해서 12사도 속에 집어넣다가
의도적으로 빼버리시고
다시 의도적으로 12사도라는 12를 일부러 맞추고자
사도행전 1장에 사건이 벌어지는데
후보도 참 할말 없게도 꼭 두 명이다. 그럼 두 명 다 집어넣으면 어차피 주의 일 하는데 좋지 않는가? 많으면 많을수록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목적이 아니다. 12을 일부러 맞춘다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니 말이다.
그럼 좀 그럴싸 하게 믿음이 가도록 진정성이 가도록 투표를 한다든지 이런 것이 아니라
가장 비믿음적인 것 제비뽑기 라는 운 뽑기 같은 천박해 보이는 식으로 말이다.
이것은 네버 네버 절대로 절대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스스로가 움직일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곧 가룟유다의 죽음을 말하면서 말이다. 가룟유다의 사고방식은 이런 생각이 가득찬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예수님을 이용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관심없다. 그런 변증법인 신과의 화목에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전쟁이다. 전쟁이 없이는 평화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반드시 12지파이다. 곧 전쟁기계이다. 그 전쟁의 기능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12이어야만 한다. 숫자는 예수님만을 말하기 위함이지 인간 쪽으로 끌어당길수 있는 것들이 없다. (전쟁 조차도 내 쪽으로 또는 이스라엘 쪽으로 끌어 당길수 없다. 그 반대다. 예수님 홀로의 전쟁에 목격자로써의 배치가 이스라엘이다. 그러니 그것을 목격만 할 뿐이다. 그리고 외친다. 승리했어요 라고 그 찬양자가 이스라엘이다. 너는 내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대로 예수님은 내것입니다 라고 외치는 사고방식이 바로 신과의 화목을 추구하고자 하는 것이 악마의 신학 곧 거짓선지자이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오셨다.)
만약 그렇다면 7일 만에 창조하지 말고 인간에게 물어보고 단 하루만에 창조하는 것이 더욱더 신 답지 않을까?
말라꼬 귀찮토록 7일라는 번거로움이 반복 되어야 하나?
정 그렇다면 10일 만에 창조하면 계산하도록 하는 것이 않좋나?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인간 좋아라 라는 것이 단 한 개도 없다.
오히려 이 숫자 마저도 하나의 걸림돌처럼 실족하게 하는 구실로써 하나 하나 일일이 작용하는 것이다.
마귀 잡는 올무 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 사냥꾼의 올무에서 벗어나는 흥분되는 사귐으로써 일일이 작용한다.
그 차이의 간격을 무슨 수로 신과의 화해라는 명목으로 사기를 칠수 있겠는가?
이 철두 철미한 십자가의 영광을 도출하기 위한 계산된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맛디아 제비뽑기가
이제는 너무 너무 감사하게 느껴진다.
아니 흥분된다. 이렇게 주님은 자신의 사귐을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다 이루셨다.
이제는 모호하고 흐릿한 나의 육체 따위에 관심둘 필요가 없다.
이미 다 이루신 그리스도의 몸만 쳐다보면
괜히 흥분된다.
이 완료된 말씀을 가지고서 흥분되어 밤잠을 설치면서
나누게 될 때 마다
생각지도 못하는 감격에 순간 순간을 살게 되니
죽어도 여한이 없다.
빨리 빨리 눈 감게 해 주십시오 주님
주님 보고 싶어요. 감히 건방지게 나 같은 놈도 주님을 보고 싶어한다니
이렇게 흥분이 된다니
참 말도 안되는 그 불가능성을
주님은 노크도 안하고 벌컥 벌컥 문을 활짝 열어 재껴 버린다.
육체는 감당을 하지 못하고 갈기 갈기 찢겨져 날라가고
새 이스라엘로써 그 흥분된 완료 다 이루셨다를 누리게 된다.
간담이 서늘하게 다 녹아버리는 것 같다. 지금 이 순간 다 녹여버리셨으면 좋겠다.
주님은 무조건 다 승리하신 분이라는 것을
(롬 8:35, 개역)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개역)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롬 8:37, 개역)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8, 개역)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 8:39, 개역)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PS
이 흥분된 사귐을 다시 만나서 이바구 하고 싶다.
(수 2:9, 개역)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수 2:24, 개역)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붙이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거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싸가지 기생라합 ? 땅을 냅따 줘버리고, 거짓말을 하질 않나. 민족과 국가를 배신때리고 있으니 원, 그러나 그런 소리 백날해도 소용없다. 이미 간담이 녹아서 흥분된 사귐에 빠져버렀다. 정작 이스라엘은 이 사귐이 없어서 이 특이점에서 40년 동안 뺑뺑이 도는 판국이 되었으니
도대체 이스라엘 맞어? 그럼 기생라합은 이스라엘도 아니면서 이스라엘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면서 이스라엘이 아니고?
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