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케 만드는 안식(눅 6: 6-11)
분기가 가득하게 만드는 안식 (눅 6: 6-11)
(눅 6:6, 개역)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눅 6:7,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눅 6:8,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눅 6:9,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눅 6:10, 개역) 『무리를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눅 6:11, 개역)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성경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인간에게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을 줘놓고서는
정작 지키냐 안지키냐를 보는게 아니라
그 사람의 출처를 보겠다는 취지입니다.
아니 출처를 봐서 뭐하게요?
창세전에 생명책에 기록된 것의 유무는 정작 성경말씀 자신이
구지 밝혀내지 않아도 말씀 스스로가 알지 않습니까?
그러면 약올릴 필요가 없이 그냥 결과 통보만을 하면
이유없이, 원인없이 그 결과 통보에 사람을 분류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순순히 거기에 순응할 자들이 아니다는 겁니다.
군대영장 나왔다고 해서 순순히 응하는게 아니라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 군입대를 빠져나갈 방도를 찾습니다.
손가락 짤라라? 몸무게 초과 시켜라. 뭐 별에 별 방법이 다 동원됩니다.
심지어 놀라운 것은 이미 군에 입소 한 뒤에도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하는 궁리를 하고
더더욱 놀라운 것은 말년 병장 제대가 며칠 앞 다가와도
어떻게 하면 빠져나갈까 라는 궁리를 찾습니다.
말뚝 박은 자들은 안그렇다고요?
아닙니다 말뚝 박은 하사관 장교들 다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자기 스스로 자원 입대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그들 인간에게서 원인을 찾을것이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쪼여온다는 점을
아주 아주 잘 부각 시키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바로 이 점을 모든 인간의 대표성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시스템 사회 구조? 즉 소위 언약의 민족이라는 그 구조에
예수라는 작자를 쪼여가는 방식입니다.
그들의 모든 거룩 장치, 구원 장치가 결국 예수님을 시험하는
예수죽이기, 예수 쪼이기에 활용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정작 이 자들이 지금 거꾸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다수가 한 명을 쪼아대지? 딸랑 한 명이 어떻게 수백 수천만명을 쪼아댈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예수를 자신들의 구조에 한 발짝도 못 들여 놓기 위해
또는 빨랑 배제시키고자, 단절이지요!
갖은 애를 다 쓰면서 까지 발악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바로 강요된 선택(자유의지)으로써 행동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본인은 자유의지이겠지만 제3자 입장에서 한발짝 떨어져 보면
아이구 바리새인놈들 바보같이 그것이 도리어 말려드는 것인데
그런줄도 모르고 예수님이 걸려들기를 바라고 있으니
아이구 이 바보 천치들, 아무리 예수님을 어리석다고 몰아본들
결국 본인들이 당대에 최고의 지혜라고 하면서 저거들이 바보인줄 모르는구나
라고 사건이 벌어지는 쪽쪽 바리새인은 그 값을 톡톡히 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바리새인 보고 과연 욕할 입장이 될까요?
그렇다고 제3의 시선을 가질수 있느냐? 여기에 그 어떤 능력이 없습니다. 배제된 입장입니다.
무능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긍휼을 베푸시고자 말입니다.
율법을 줘서 쪼여 놓고서는 벗어날길이 없는 인간에게
긍휼을 베푸시고자 말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도착성이 아닌, 율법의 도착성 보다 더 나은 사랑의 도착성입니다.
십자가의 피의 도착성 말입니다.
율법을 준 이가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쪼임 당해야 할 인간이
거꾸로 예수님을 율법으로 쪼여대고 있으니
심판주를 못 볼 뿐만 아니라
더 더욱 못 알아 먹게 하기 위해 [인자]로 오셨으니까 말입니다.
(눅 6:5, 개역)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마치 시아버지 유다의 눈에
며느리 다말은 심판주는 커녕
저 년을 어떻게 하면 심판할까 라는 논의 중에
창녀의 모습으로 더 더욱 못 알아 먹는 인자의 모습에 의해
옳타쿠나 드디어 죄 목을 찾았구나 이제 알리바이가 형성이 되었으니
그 물증으로 죽을수가 있구나 주여 드디어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군요 할렐루야 아멘
당장 화형 불에 태워라 그 증거가 바로 저 임신한 배이다.
얼마나 창녀짖을 했으면? 배가 저리도 부르냐?
잠깐 이 물건의 주인이 이 뱃속 아기의 아빠요!
뭔데 뭔데 !!!
도장 도장끈 지팡이
(창 38:18, 개역) 『유다가 가로되 무슨 약조물을 네게 주랴 그가 가로되 당신의 도장과 그 끈과 당신의 손에 있는 지팡이로 하라 유다가 그것들을 그에게 주고 그에게로 들어갔더니 그가 유다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더라』
(창 38:24, 개역) 『석 달쯤 후에 혹이 유다에게 고하여 가로되 네 며느리 다말이 행음하였고 그 행음함을 인하여 잉태하였느니라 유다가 가로되 그를 끌어 내어 불사르라』
(창 38:25, 개역) 『여인이 끌려 나갈 때에 보내어 시부에게 이르되 이 물건 임자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나이다 청컨대 보소서 이 도장과 그 끈과 지팡이가 뉘 것이니이까 한지라』
(창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십자가의 피 용서의 도착성에 말려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율법은 바로 이것이 목적입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가 누구에게 발렸느냐?
십자가의 피가 출처가 아닌 자가 누구이냐?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이 누구냐 라는 겁니다.
율법은 이 분을 봐라 라고 가리키는 화살표 입니다. 몽학선생입니다.
모세가 날 볼게 아니라 저 분을 보라는 겁니다. 누구?
장대 높이 달린 분 보라는 겁니다. 율법의 대표자가 변화산상에서도 말입니다.
바로 이 인자 되기가 바로 심판주 인자되신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불뱀에게 물렸는데 약은 안주고
유일하게 나무 장대 높이 달린 인자만을 쳐다보면 낫는다는 이 도착성
이 말도 안되는 도착성이 바로 처음자리입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안식에 집어넣는 사랑입니다.
지난 시간에 안식을 범하는 것이 참된 안식이다, 안식의 주인이 왔다 라는 증거라고 했습니다.
그럼 안식을 지키는 자들이 있어야, [범했다] 라는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 차이성으로 말이지요.
무인도에서 자기 혼자 나는 안식을 범했다 라고 우겨본들 그것은 안식을 어긴게 아닙니다.
구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환경이 안식일을 지키는 그런 구조가, 그런 바벨탑 시스템 구조가 전제 되어 있어야 합니다.
선악 나무가 없는 이상, 생명나무의 차이성을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안식일을 범했을때에
그야말로 미꾸라지가 한 마리가 온 동네를, 온 우물을, 온 구조를 흙탕물로 만드는 겁니다.
사실은 미꾸라지 한 마리가 흙탕물로 만드는게 아니라
이미 그 웅덩이가 흙탕물이였음을 미꾸라지 한 마리가 그 원래모습으로 들추어내는 겁니다.
율법이 가입된 이유입니다.
안식일을 지킨다는 인간의 마음자세가 이미 흙탕물인데
안식을 범하는 예수님을 보고서 비로소 그 흙탕물인 자신의 출처를 드러내는데
여지 없이 그 본색을 드러냅니다.
미꾸라지 예수님이 미끼로써 동원이 된 것을 모르는 겁니다. 덮썩 물죠.
차라리 소경이면 자신이 처음부터 흙탕물이였습니다 라고
그것을 제대로 지적하신 분인, 바로 참된 안식의 주인이신 인자 되신 예수님입니다 라고
그 심판주를 만난 것에 감격해야 할 텐데
오히려 죽일려고 합니다.
거 보세요 안식을 지킨적도 없으면서
껍데기는 기가막히게 안식일 지킨 거룩한 인간이라고 구색을 갖추니
그 껍데기를 예수님이 벗겨버리니까 죽일려고 하지 않습니까?
안식일 지킨다메? 그런데 왜 죽일려고 할까요?
심지어 예수님 죽는 날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안식일을 맞출려고 하고(유월절)
인간들은 안식일을 지킬려고 일부러 일부러 억지로 억지로 예수님에게 안 말려 들려고 하고
(저거들 나름대로 안식일 피했다고 우기고)
서로의 욕망, 소욕대로 채워서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달성하고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그들대로 달성한 겁니다.
그 틈 사이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모든 역사에 못 박아 버려 기준으로 삼아버렸습니다.
시아버지 유다는 유다대로 다말을 심판의 불 속에 화형시키는데 성공했고
며느리 다말은 다말대로 십자가의 3가지 물증을, 그 불의한 재물을 획득했습니다.
그 3일 이라는 그 세가지 물증의 간격을 그 어떤 인간도 좁힐수 없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확실한 증거 입니다.
바로 이 간격의 빈자리가 바로 처음자리로써 우리의 새로운 출처로
십자가로 모태를 만들었던 겁니다.
이 사랑의 도착성에 벗어날 자 있느냐 말이죠?
있으면 나와보라 하세요? 이것 보다 명료한 것은 없습니다.
율법의 외설성에 더더욱 더 나은 십자가의 피 의 외설성입니다.
누가 누가 더 나은 외설성 일까요? 시아버지 유다가 [그는 나보다 옳도다] 라고 합니다.
법 조차도 갈구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선악조차도 갈구지 못하는 생명입니다. 죽음을 이겼기에...
하나는 죽이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고, 또 다른 더 나은 하나는 살리고자 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창 38:26, 개역)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가로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시아버지 유다 입장에서는 약속을 사수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봐도 며느리 다말은 이 약속의 가정을 깨뜨릴려는 개같은 이방여자일 뿐입니다.
그러나 며느리 다말은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를 해야 합니다. 딴 자식들은 다 죽으니 말이지요.
막내아들 안 준다고 하는게 아니라, 줘 봐도 죽으니 소용없습니다.
처음부터 시아버지 유다를 노리는 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얼마나 외설적입니까?
이 선험적인 외설성에 나름대로 부랴 부랴 방어기제로 나서는 것이 바로
유다의 부조리(외설성) 입니다.
그러나 약속을 엉떠리 껍데기로만 알고 있는 유다에게 제대로 된 약속(안식)을 주기 위해서
유다(엉터리 안식)를 범해 버리는 겁니다.
유다가 다말을 범하는게 아니라
다말이 시아버지 유다를 범하는 겁니다. 계류 기술 곧 종말의 종말입니다. 바닥의 바닥 치기.
둘 다 결국은 외설적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더 나은 외설적이냐? 라는 겁니다.
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것이 성경에 적혀 있는 것일까요?
이 이 내용을 왜 예수님은 응하시는 것일까요?
그 남싸스러운 그 이야기가 유다로 끝나면 참 좋겠는데
사실은 그 며느리 다말이 오늘날까지 살아서
늘 우리에게 시아버지 유다를 범하듯이
우리를 늘 범해버릴려고 달려들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족보 보세요. 얼마나 다 그런 내용 뿐입니까?
문제는 그 족보가 아니다는 이유로 육의 족보 즉 우리는 이제 다 죽은거나 마찬가지 입니다.
우찌 빠져 나가실래요?
이 쪼여오는 분위기는 뭘까요?
우리도 어쩔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범할려고 달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말처럼 우리에게서 3가지 물증을 잡아낼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제발 좀 율법 지켜라 라고 하듯
예수님이 이 유대인들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제발 좀 율법 어겨라 라고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를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제발 좀 안식을 범하라 라고 합니다.
범해서 뭐하게요? 3가지 물증을 잡아내는 겁니다.
닭이 세번 울지 않으면 베드로는 구원 받을 길 없습니다.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달성한 것이 바로 이겁니다.
3가지 물증을 담아야 그 위에 뚜껑(시은좌)를 덮어 다시 그 위에 피를 바르는 겁니다.
멋도 모르고 유월절 어린양 살과 피를 먹고 애굽에서 부랴 부랴 빠져나왔지만
다시 되돌아 가는 악마들을 그들은 광야에서 봤습니다.
그럼 이 유월절 어린양의 살과 피를 재현함으로써 그 의미를 되새기는 겁니다.
10번 이상 원망케 만들어서 그 물증 3가지를 담습니다.
광야교회에서만 벌어지는 원망입니다.
십계명 깨어진 두 돌판 (남들은 몰라도 나만큼은 언약의 신부다, 예수님의 수제자다. 약속 지켜라 약속! 종교)
아론의 싹난 지팡이 (독재 타도, 섬기는 왕이 되어라 되어라! 정치)
만나를 담은 항아리 (먹을 것 마실 것 해결하라 해결하라! 경제)
이 세가지 물증을 담아서 그 간격을 벌리는 겁니다.
다윗에게 욕심(소욕)을 심어버리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아버립니다.
동시 다발적으로 정신없이 뻐버뻥 하고 터져버립니다. 줄 똥 싸는 거죠.
나단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찾아와 왕이여 우리 이스라엘 나라에 이런 자가 있습니다.
어떤 자인데?
어떤 손님이 찾아와 손님 대접 한다고 부자의 수 많은 살찐 소를 다 내버려 두고
가난한 자의 딱 한 마리 밖에 없는 딸같이 여기는 어린양 한 마리를 잡아서 손님에게 대접하였습니다.
아니 그런 놈이 있다니 당장 그 놈을 능지처참 하렸다!!!!!!
너야 너! 너가 범인이야! 너의 내장이 보일때까지 죽지 않을 정도로 살껍데기를 벗겨보라꼬?
넌데? 너가 바로 그 능지처참 받아야 할 자 인데?
다윗에게 느닷없이 3가지 물증이 잡힙니다.
이 손님을 지젝이라는 철학자는 마귀 악마라고 했는데 말이죠.
종교문제 즉 사랑문제는 언약을 파기함으로써 언약을 달성합니다.
즉 우리야 장군의 아내를 범합니다.
종교를 깨어버려야, 이스라엘을 깨어버려야, 교회를 깨어버려야
참성전 되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더 나은 외설성인 예수님을 말입니다.
기껏 해봐야 전남편 노릇만 하는 것들인, 눈에 보이는 것들이 죽어야
눈에 보이지 않는 소경의 눈에만 보이는 새남편이 보입니다.
우리야 장군이, 우리야 장군의 아내가 겁탈당한게 아니라
다윗이 깨진 겁니다. 계류당한 겁니다.
우리야 장군을 다윗이 죽인게 아니라, 도리어 우리야 장군의 믿음에 의해
다윗은 박살이 난 겁니다.
종말의 종말 속에서만 이것이 산 자와 죽은 자가 사실은 뒤바뀌게 보입니다.
그것도 다윗은 왕으로써 말이지요.
섬기기는커녕 우리야 너만 거룩한 전쟁하냐? 나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의 왕이다 라고
우리야를 고의적으로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지난 번에 말한 정치성입니다.
사울왕이 했던 그 짖, 바로 사울이 다윗에게 했던 그 짖을
다윗이 왕이 되니 그 사울왕의 그 짖을, 다윗이 사울왕처럼 그대로 우리야 장군에게 하는 겁니다.
설마 내가 내 자식을 잡아먹을 줄이야? 내 백성을 내가 잡아먹을 줄이야?
이것이 정치성입니다. 이것이 인간 지도자의 한계입니다.
빨랑 빨랑 한계점을 보여주고 들통나서 누락되면 됩니다.
종교 정치
이제 경제?
아니 뭐가 아쉬워서 왕이 부자들 다 내버려 두고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에게 대접할까요?
이것은 참으로 희한한 수수께끼와 같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배우고, 아무리 절제하고, 아무리 학식이 높아 수준이 높아져도
이상하게 왕이 되면
거꾸로 부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난한자 만의 재산을 빼앗는다는 놀라운 사실 말입니다.
즉 왕이 아무리 왕이 되어도
살아남을려고 가난자의 것을 빼앗지
부자의 것을 빼앗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쿠테타 일어나면 우짤려고 말이죠.
모든 쿠테타 발란은 가난한자를 압제해서가 아니라
자기 건드렸다고 벌리는 겁니다. 그것도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앞장세워서 말이죠.
그래서 왕 제도를 세우지 말라고 합니다.
왕 제도의 한계성입니다.
왕도 먹어야 할 것인데 그 먹을 것을
결국은 가난한자의 것을 빼앗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한계성이다는 겁니다.(신17장, 삼상 8장)
즉 돌을 떡덩어리고 만들어 배고픈 자의 배고픔을 해결하라 라는 마귀의 시험은
결국 그 말을 한 꺼플 벗겨보면 가난한자의 것을 빼앗아라 라는 말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웃사랑 실천 하는 메시아가 되어라.
그래서 왕직을, 경제를 유지하라 그래야 고아를 먹일것 아니냐 라는 겁니다.
뭐가 아쉬워서 왕이 그런 짖을 할까요? 그런데 인간 왕 치고 안 그러는 왕이 없다는 겁니다.
왜 왕이 배고파서 거지 고아 가난한 자의 것을 빼앗아 먹습니까?
웃기죠? 웃기잖아요? 이상하게 왕이 가난뱅이의 것을 빼앗지 못하면 왕자리를 못 유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법의 외설성이라고 했습니다.
이웃 사랑 하지 마세요잉! 재발!
교회에서 웃기게도 권력이라는 것이 없어야 하는데 이상하게 있게 되면, 아니 있을 수 밖에 없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 있는 자를 빼앗는게 아닙니다.
쥐뿔도 없는 자의 것을 빼앗아야 그 권력이 유지되는 참 요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
권력이라는 정치성입니다.
다른 왕들은 다 그냥 지나쳐도 다윗은 그 짖을 지적당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왕만이 진짜 왕만이 지적하는 사랑입니다. 다윗은 지적 당해야 합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이웃을 사랑할려고 하지 마세요
도리어 고아 과부 나그네로 부터 건짐 받으세요
이 다윗을 건질려고 우리야가 꺽으신 뼈가 되는 겁니다.
즉 다윗의 외설성 보다 우리야 장군의 외설성이 더 강했던 겁니다.
죽어서도 다윗을 건질려고 하니 말이지요.
누가 더 나쁜 남자 입니까? 다윗? 근처도 못갑니다.
우리야 장군 입니다.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우리야 장군 나쁜 사람
나쁜 사람 되세요. 막 사세요.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서
이런 안식으로부터 지적 받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자신이 지켜온 안식은 다 가짜임을 지적 받을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나 자체를 지적하는, 나 자체를 무시 하는 그 진짜 안식의 심판성, 외설성을 말입니다.
안그러면 엉뚱하게 자신의 안식으로 남에게 적용시키는 외설성을 부리는 겁니다.
행함은 사랑이 아닌,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적을 받을 준비자세가 되어 있다고요?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처럼 반발하도록 되어 있는 육체를
우리도 그 육체를 더욱더 사랑하기 때문에 그 육체를 찢김 당하기 전까지는
새 옷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처럼 일부러 안식일날 사건을 벌리십니다.
안식일에 회당에서 가르치실때에
오른손이 말라버린 사람이 있는 겁니다.
마침 카메라가 바리새인을 클로즈업 합니다.
옳타쿠나 안식일날 저 예수가 병자를 고치는지 안고치는지 잘되었구나 죄 몫을 찾을 기회이구나???
참 이상하지요? 예수님이 도리어 10가지 이상의 원망을 들어서 언약궤 증거궤 속에 집어넣을
물증 3가지를 잡아야 하는데
어쩜 그렇게도 바리새인들은 분주한지
예수님으로부터 물증을 잡을려고 얼마나 분주하게 설쳐대는지 모릅니다.
물론 결국 잡아내지요
죄목 3가지
자칭 하나님, 메시아, 그리스도 라는 참람죄,
성전 모독죄, 성전을 헐라 3일 만에 다시 세우리라. (옛언약 파기와 새언약 완성)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는 불경죄. (세리를 욕하면서 동시에 성전을 보호하기 방책으로써 권력가들과의 손잡는 경제성)
예수님께서 보란 듯이 이 3가지 마귀의 시험을 거부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유대인, 곧 바리새인 속에서, 그런 내막을 드러내기 위해서
마귀의 3가지 속성이 뭔가를 드러내시는 겁니다.
드러내지 않으면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기에 드러내시고자 마귀의 3가지 시험 속으로 들어가시는 겁니다.
그 여러 시험 중에 하나가? 왜 안식일을 안 지키느냐? 라는 시험인 겁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외설적인 악마성이 그들의 [안식일 지킴] 입니다.
의와 인과 신은 버려놓고, 박하와 회향과 근채를 챙기는 모습말입니다.
(마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그래서 저들의 외설성에 더 나은 외설성으로써 안식일을 범해 버립니다.
즉 안식일을 완료 시켜 버립니다.
사랑 때문에 안식일 지키는지? 아니면 안식일 때문에 사랑을 거부하는 지?
진짜 안식을 지킨 적이 없기에
안식을 지키는 인간의 악마성을 들추어 내임 당한적이 없는 겁니다.
막상 진짜 안식을 이루니까, 안식을 지켰다고 자부하는 인간들이 악마로 돌변하는 겁니다.
아니 마귀를 들추어낼줄 모르는 안식을 말라꼬 지킵니까?
사랑이 없기 떄문입니다.
즉 사랑이 사귐을 가져준 적이 없기에
신부가 아닌 가정부가 사랑의 껍떼기를 갖추는 겁니다.
왜 다윗이 안식일을 어기고 거기에 제사장 아히멜렉도 안식 범함에 동참합니까?
그들은 가정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신부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가정부들이 반발 합니다.
안식일을 지켰다는 가정부들 말입니다.
에서는 미워하기로 작정 되어 있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 되어 있습니다.
핵심은 사랑이라는 사귐입니다.
이 사랑의 여부가
가정부로써 형 에서는 미움받는 짖만 골라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안식일 지키기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 야곱은 사랑받을 짖만 골라서 하는 겁니다. 그것이 안식 범하기입니다.
범해도 사랑한다는 이유의 동행 때문에, 함께 하심 때문에 뭐든지 이뻐 보이는 겁니다.
전재산의 결혼반지 다이아몬드를 잃어버려도 그저 이뻐보이는 것은
주님의 긍휼히 여기심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이쁜겁니다.
그러나 가정부는 불안하기 때문에 지키는 겁니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하기는커녕
일점일획도 떨어뜨리지 않을려고 합니다. 문제는 그 뒤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했는데? 안받아주니 미쳐돌아버리는 겁니다. 인정을 안해주니 말입니다.
그것은 가정부가 아닌 신부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두 사이의 간격을 극과 극으로 점점더 벌려 버리는 겁니다.
가정부의 특징은 안식일을 범할 수가 없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안식을 범하면 자신의 직장이 날라가 버립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날라가 버립니다.
즉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요 살고자 하는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에서
살고자 할 뿐이지 죽고자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자신이 목숨걸만한 것들이 외부에서 나타나 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주변에 설사 있어도, 설사 나타나도 모르는 거죠.
목숨 걸대가 없다는 겁니다.
지젝이 이부분을 죽은 신을 위하여 라는 책에서 언급했는데요
목숨 걸만한 것이 있다는 것이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이 없는 자가 불행한 자라고 말이지요.
아마 마틴 루터킹 목사의 말을 인용한 것이지 싶은데요?
즉 기꺼이 목숨을 걸만한 가치 있는 것
그것이 과잉의 과잉, 잉여의 잉여죠. 곧 자유이라고
니체가 말했는데요
그것만이 팔딱 팔딱 살아있는 부드러움이요 사랑이고
그 나머지는 다 죽어있는 딱딱한 것이다 라고 말이죠.
주인과 종의 삶의 차이를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다윗을 이 종의 삶에서 더더욱 종의 삶인 잉여의 삶
율법 외에 한 의의 삶으로 옮기고자
율법 속에서의 인간의 한계를 빨랑 빨랑 부딪히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 속에 있으면 율법이라는 의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빨랑 빨랑 마귀의 3가지 시험에 걸려 빨랑 빨랑 한계를 드러나게 하시고
주님께서 준비하신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즉 사랑 사랑 사랑을 선물로 무조건 받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안식을 범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안식이 덮칩니다.
진짜 안식은 안식을 범한 자를 용서하는 안식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이 관계에, 이 사귐에 시기하는 자
이 십자가의 피의 용서를 거부하는 자가
졸지에 율법을 지키는 자로써 살인하는 자입니다.
이게 말이 안되지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곧 살인하는 겁니다.
살인하지 말라 라는 계명 자체가 살인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보세요 바리새인이 결국 그렇게 하잖아요
이 바리새인에 의해 유대인 전체가 그 살인에 동참하지요
거국적으로 거시적 정치를 펼칩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죽여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자 이니까 못박아라 못박아라 ....
모든 인간이 여기에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녀노소 어린아이 늙은지 병든자 소경 모조리 다 동참합니다.
왜?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사랑이 없기에 두려워서 율법을 지키는 겁니다. 죽기가 무서워 종노릇 하는 겁니다.
정작 내가 죽어야 할 그 자리였는데 말입니다.
가정부 노릇만 하는 겁니다.
거기서 신부로 옮기는 작업은 십자가의 용서 뿐입니다. 안식의 완성이요 주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일부로
일부러 보란 듯이 안식일날 오른손 마른 자를 고쳐 버립니다.
즉 참 안식이 왔다는 겁니다. 뿌뿌뿌 나팔 소리로 희년을 선포하는 겁니다.
그 나팔 소리에 반응하는 인간은 참으로 희한하게도 적들이 반응합니다.
안식일을 어긴 자라고 말이지요. 안식일날 일했다 라는 거죠.
그럼 예수님께 당연히 말려들었기에
저들을 보란 듯이 반박해 버립니다. 그래야 죽이고픈 마음이 들것 아니겠습니까?
하여튼 예수님은 죽을려고 환장해 있어요!!
제발 제잘 날 죽여라 너희들은 날 죽이도록 되어 있다 라고
그들을 졸졸졸 따라다니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 하는 것 같습니다.
(눅 6:7, 개역)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눅 6:8, 개역)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눅 6:9,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곧 선을 행하시는 방식입니다. 사랑입니다.
자 안식일날 선을 행하는 것이 낫냐? 악을 행하는 것이 낫냐?
라고 물으니까 당연히 말 못하죠
말 했다가는 자기 입으로 그 엉터리 가짜 안식 체제를 무너뜨리는 꼴이 되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왜 그러면서도 인간은 그런 구색을 갖추는 것일까요?
그런 헌옷이라고 구색을 갖추어야 자기생존을 장담할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진짜 문제는 예수님 쪽입니다.
그 헌옷이 새옷이 오기까지는 헌옷이라고 여길수가 없는데
새옷으로 왔으면 좀 알아먹기 쉽게 새 옷의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시면
저들이 저렇게 나오지 않을까 아닙니까? 왜 일부러 화평케 하시러 온게 아니라
분란케 하시는 것일까요? 원수지간으로 오시는 겁니까?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것은 예수님께서 누누이 말씀드리지만 인간을 먼저 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기 때문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제가 만났습니다. 우연히든 필연이든 말이죠.
그럼 만나면 그 만남 자체가 둘 사이에만 서로 알아먹을수 있는 소통으로써의 대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못 알아먹는 식으로만 대화에 나서시는 겁니다.
이것을 개방이 아니라, 소통이 아니라 단절성이라고 했습니다.
아니 그럼 만나면 그냥 말하지 한 사람은 나를 통하지 않고 딴 말만 자꾸 하면 그게 대화가 되겠습니까?
바로 이점 때문에 예수님을 다 잘못 보고 있는 겁니다. 개인 뿐만 그렇게 대하시는게 아니라
유대인 전체도 그렇게 대하시고 인간 전체도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소위 인간언어의 대화법을 무시하시는 겁니다. 땅의 소통 방식을 거부하십니다.
오로지 하늘의 대화법인 십자가의 언어로만 말씀하시니까 다 왜곡되어 들리는 겁니다.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리는 희년 선포는
사실상 놀랍게도 귀머거리에게만 들리는 겁니다.
이게 말이 되나요?
귀머거리는 소리를 못 듣습니다
그런데 이 희년이라는 복음이, 십자가의 용서가
들을 귀 없는 귀머거리에게만 들리고
정작 들을 귀 있는 정상인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비유의 목적이 바로 이겁니다. 소리를 못 듣는 진짜 귀머거리에게는 천국의 비밀인
비유의 수수께끼가 다 들립니다.
그런데 소위 소리를 듣는데 전혀 문제가 없는 정상인들은 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모르는 겁니다.
도통 알수가 없습니다. 단절성이다는 겁니다.
안식일의 주인이다 라는 말도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구약에 없는 문장이 나와서 생전 처음 들으니까 말이지요.
오직 학습된 것만 딱 쥐고 있으니 믄 소리인지 모르죠,
어떤 누구도 알려준 적이 없거든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합니다. 왜? 소경에게만 보이거든요.
(사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마 13:14, 개역) 『이사야의 예언이 저희에게 이루었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막 4:12, 개역) 『이는 저희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행 28:26, 개역)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게 말이 안되잖아요?
맞물리는 겁니다. 소경 곧 실로암 소경을 저들이 끌고오다 시피 예수님께 들이댑니다.
뭐 희년이 소경만 본다고?
오냐 보여봐라? 우리가 희년에 대한 박사학위만 딴게 수천개인데?
눈이 보이니까 땃겠죠.
그런데 실로암 소경에게만 예수님이 빛으로 보이지
딴 사람에게는 빛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빛을 제대로 만났기에 자신이 진짜 어두운 소경임을 알 것 아니겠습니까?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우리는 어두운 눈입니다.
소경입니다.
그래서 본다고 하니 못보는 소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대화하면서도 나를 상대로 하지 않고
내 속의 어두움만 상대하시는 겁니다.
나의 죄악만, 나의 암덩어리만, 내 속의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겁니다.
맞습니다. 저는 마귀입니다. 저를 고쳐주시옵소서 라는 자에게만
이 안식을 제대로 누리는, 예수님만이 안식을 완성하실 분으로 보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오히려 죽이고픈 마음에 안식의 완성이 더더욱 밉게만 보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무조건 사랑받기로 작정 된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미움 받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그것을 바꾸고자 예수님을 미워해야 할까요? 죽일까요?
오히려 나의 그런 암덩어리를 고치고자
십자가에 대신 달리셨습니다.
그래서 환자에게만 이 단절성의 예수님이 의사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을 부르러 오신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이유입니다.
그래야 일부러 바리새인 마귀들 보는 앞에서
안식일날 일부러 어기면서
우리의 병든손 병든 마음 매말라 버린 오른 손을 고치시는 겁니다.
그 사랑만이 죽음이라는 지옥의 출처를 시기케 만드는 겁니다.
출처싸움 때문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오신 겁니다.
이 검을 거치지 않고서 어떻게 치유 곧 안식을 누리겠습니까?
칼로 암덩어리를 제거해야 우리는 치료 받을수 있는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그 찌른 창에 의해서만 치유되는 것입니다.
바로 불뱀에게 물리게 하시고서는 그 불뱀을 달아 놋뱀을 쳐다봄으로써 낫듯이
인자를 장대 높이 달지 않으면
아무도 건짐받지 못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만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겁니다.
뭘해도 이미 죄인에게만 그 십자가가 옳았습니다 라고 나옵니다.
법의 외설성이 아닌, 더 나은 사랑의 외설성 즉
사랑의 도착성은 이 정도로 지옥보다 음부보다 죽음의 권세보다 더 질투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귀는 이 결과로 분노가 가득하게 됩니다.
마귀를 분기가 가득하게 만들지 못하는 안식은 가짜일 뿐입니다.
인간을 강퍅케 못하는 안식은 가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