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하나님의 절대주권 교리 라는 마귀사상
김 대식
2008. 9. 27. 17:35
주권(섭리)이란?
2008-09-27 08:57:15,
저를 깨닫게 해 주시는 이도 주님이시요 허깨비 자아에서 한 발짝도 못 빠져나오게 하시는 이도 주님이지 않나요 모든것은 주님 섭리 아래 있는것인데 제가 뭘 할수 있겠습니까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움직이는 수 밖에요
회개하는 마음도 주님이 주셔야 하고 이미 모든것을 다 보여 주셨는데로 못 보면 그것 또한 주님의 섭리 아닌가요
답변:
주님의 뜻 곧 섭리인 주권을 수용하는 것이 신앙이요 믿음이 되어버리면
거봐 거봐 나도 하나님의 섭리를 수용하는 마음이 있다고 주장하게 됩니다.
정작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과정을 봤다면
이런 하나님이 싫어야 하고 도망치고 싶고 믿지 못하겠다 라고 그게 무슨 하나님이냐 라고
절대로 수용치 못하겠다 라고 해야 합니다.
대부분 수용하는 자는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결과가 아니라 종교에서 교육 받아서 그런 겁니다.
그래야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안 받거든요. 이게 목적이죠 저주의 벌 피하기
그래서 반드시 구원이(벌 안 받기) 아닌 심판(벌 당연히 받기)의 모습으로 일관되게 주님이 일하심입니다.
님으로부터 그 교회 사기꾼 목사와 님과의 생각을 질문을 통해서 들어보면
구원 개념이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벌 안받기의 구원(나만 쏙 벌에서 빠지기, 제외되기)을 목적으로 섭리와 주권과 하나님과 언약과 선택과 교리와 교회와 십자가를 아무리 같다 붙여도 미완료입니다. 여전히 자기의 숙제입니다. 그런 숙제는 풀어도 또 문제가 또 닥칩니다.
마치 부자가 부요함에 족한 것이 아니라 더 큰 부자가 나타나면 자기는 졸지에 또 결핍을 느낍니다. 그게 성화죠 자신의 못난이(그 모습 그대로 이끕니다.) 됨에 감사하는게 아니라 더 잘난 모습에 늘 결핍이라는 미완료로 끝나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가 할 줄 아는 성경문자 명령어만 지킵니다. 그카이 더더욱 미완료죠. 때려죽어도 못지키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명령어가 인간의 손에 못 닿도록 불가능성으로 된 것을 가능하다고 여기니 명령어 자체에서 상반되는 명령어로 다가오니 하나 지키면 반대로 하나를 어기는 식이 되는 겁니다.
예로 하나님의 주권을 난 믿습니다 라고 자기 믿음으로 믿었을때에
전능자 곧 괴롭히는 하나님은 안 믿습니다 라는 결론이 되는 겁니다.
주권 자체가 인간이 수용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쳐들어 오기 때문이지요
선택의 모습이 아닌 구원의 모습이 아닌 그 반대인 버림받는 모습으로 심판의 모습으로 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인자입니다. 그 인자를 나다나엘이 졸지에 만나고
니고데모는 이 인자를 사람의 일로써 풀려고 하기에 중생을 자기 숙제로 아무리 해도 안되는 종교라는 중용의 처세술(인간 쪽에서 최선의 예의를 다 하는 = 이게 성화죠)만 부릴 뿐입니다.
주권이란 다시 한번 강조 합니다. 주권의 반대개념인 절대로 인정못하겠다 라는 내 속의 본심을 들추어내면서 들이닥칩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만이 영생이요 생명이라고 했을때에 (독점적인 표현)
그 동안 기적 보고 따라왔던 엄청난 군중들이 다 그 자리에서 떠나고 다시는 따라 다니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이게 주권이 비로소 진가를 발휘하는 겁니다. 즉 악한 세대였다 라고 규정하지요.
그렇다면 주권은 남이 아닌 나를 악하다 라고 규정할때에
일만의 구원받을 가치도 없음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어제 이것을 현실 또는 오늘 또는 하루 라고 했듯이) 주님이 인정한 나에 대한 승리가 (내가 아무리 패배를 인정해도 계속 그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공격하심으로써 주님 본인이 승리했다고 = 평화 외칠 때 까지 나는 주님의 적으로써 전쟁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세 언약 다윗언약 계속 그 실상이 이어지는 겁니다.)
2008-09-27 09:05:59,
우리는 늘 회개할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성화구원론자가 하는 말과 다르지 않은것 같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마음이면 자연스레 회개할수 있게 되고
또 육을 죽여 주시는 일에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기지 않나요 좀 혼돈이 오네요
답변:
아 글쎄 그 주시는 마음이 우리는 강한 반발로서 작용하지 순순하게 항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새언약이라는 용서를 알려면 옛언약이라는 끝까지 반발하고 용서를 무색케 만드는 그것도 남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의 악마성을 봐야 하는 겁니다. 내 거울이거든요
일만달란트 비유를 용서만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역으로 인간이 소유하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길때에 그 임금의 무한한 용서의 사랑을 무색케 하는 그 인간의 내막까지 다 들추어 내는 것이 바로 그 비유의 목적입니다.
그렇다면 모든 예수님의 비유는 나를 악마로 규정하는 식입니다.
이것을 어떤 누구가 수용하겠습니까? 성화론 자체가 나를 잘난 인간 만들어 보겠다는 행함인데 그 정반대의 길로 꼬라박는 모습으로만 일관 합니다. 종교란 가능성을 제시하는 넓은 길입니다. 그러나 꼬라박는 불가능의 좁은 길을 간다는 것은 얼마나 내가 그 좁은 길을 무지무지 싫어한다 라는 내 속의 내막을 까발리면서 주권 곧 전능이 발휘되는 겁니다. 그 좁은 길은 보이지도 않는 갈수도 없는 [없는] 길입니다. 못 오도록 차단 당한 길입니다. 두루두루 불검을 든 천사들이 가로막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그 가로막히는 그 참담한 실상이 드러나는 것이 좁은 길인데 아무렇지도 않은 듯 종교꾼들은 연기를 해대기 시작하는 겁니다.
가면 갈수록 그 연기력을 뛰어나게 되는 것이 당연해지고 누구나다 다 갈수 있는 가능성의 세계가 되는 거죠. 그 속에서 말하는 주권도 마찬가지가 되는 겁니다.
정작 주권이란 너희들이 죽인 예수님을 살려내었다 라는 것에 모든 것을 올인하고
예수님을 죽인 너희들은 모조리 다 지옥 보내겠다는 식으로 전능함이 닥칠때에
비로소 그 심판과 맞딱드린 자의 고백이 주권으로 인해서 나옵니다.
자발적인 주권 수용은 없습니다.
2008-09-27 09:18:51,
내가 못 깨닫는것이 주님때문이 아니다라는 근거가 십자가이고 그것이 심판의 근거가 된다는것이군요
이것도 분리였군요
그리고 깨닫게 해 주시는것을 통해 네가 아니라 나를 통해야 가능하다 하시고 은혜를 알게 해 주시는것이군요
답변 :
도리어 감사하죠 내 깨달음 자체가 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
정작 그렇다면 내 깨달음에 신경 쓸게 아니라 성경말씀 속에서 인간의 깨달음이 아닌
무엇이 심판과 구원을 이루고 무엇이 비언약과 언약을 성취하고
무엇이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지를 봐야 합니다.
피입니다.
실존주의는 결국 내가 믿냐 안 믿냐로 내가 안믿어뿌리면 천국 따위도 지옥 따위도 없다는 식인데 이게 종교화 되면 예수도 내가 선택하는 사항에 따라서 예수의 색깔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이런 모습 마저도 구약의 이스라엘 속에서 다 까발렸습니다.
성경지식을 수용하고 지식습득 스폰지처럼 빨아 들였더니만
도리어 그 지식 때문에 더더욱 감추어진 죄악들이 들추어집니다. 언약을 자기가 이용할려고 했는데 언약이 도리어 날 이용하는 식으로 유도한 겁니다. 마치 탁란현상처럼
그렇다면 늘 우리는 예수님을 악마로 본 바리새인의 입장이 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 분이 진짜 예수님이고 내가 수용해 버리는 예수란 내가 조작해 낸 나의 창작품일 뿐입니다. 내 죄가 드러날 이유가 없지요
실존주의의 정반대는 약속입니다.
약속만 있으면 족합니다. 구지 나까지 챙기거나 구원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약속이 이루어진 이상 완료된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자꾸 나를 집어 넣게 되면 또 미완료로 남게 되고 늘 숙제 덩어리가 남게 되고 풀어도 또 풀어도 늘 풀리지 않는 숙제 덩어리가 남아있게 되는 겁니다.
오죽하면 아이들이 시험숙제 없는 세상에 살고 싶다고 할까요?
이미 완성된 채로 사랑은 다 덮고도 남았습니다.
2008-09-27 09:24:55,
롬 8:32, 개정)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성경은 인간에겐 이어령 비어령 같습니다
이 구절을 이용해 어느 누구든 다 보여 주셨기에 우리는 다 전체를 보고 가는것이다 라고 하고 보고도 못 봤다고 하면 할말이 없다 라고 하면 진짜 할말이 없겠네요 하하
아무튼 주님 밖에 없습니다
멋진 주님이십니다
답변 :
멋진 주님을 수용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심입니다.
그래서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하신 말씀은 여기서 아이러니 하게도 너도 철두철미하게 아끼지 않고 예수님의 뜻에 써먹을대로 써먹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피조물은 마땅히 당해도 삽니다. 어떤 권리도 없기 때문이지요.
걱정마세요 님이 수용치 않고 인정안해도 주님이 알아서 써먹습니다.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으로 아낌없이 써먹습니다. 이것을 [예언대로] 즉 [예정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여기에 양보한 적 없고 방해 받은적 없습니다.
그 뜻이 진가를 발휘함에 있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뜻에 더욱더 매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2008-09-27 09:38:21,
우리는 나의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데 예수님 외엔 축복 받을 자 없다 이런말을 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하나님일뿐이지 주관적인 하나님은 아니다 나와 관계성을 가진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할겁니다
이것도 구원을 자기쪽으로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라 볼수 있겠죠 내가 죽고 주님이 사셔야 나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이 되는것이고 산자의 하나님이 될수 있는것이다 주님이 날마다 나를 새로운 존재로 이끌고 거듭나야 날마다의 부활이 되는 것이다
답변:
날마다의 부활은 없습니다 날마다의 심판 뿐입니다.
죽음 속도 들어가본적도 없는 인간이 무슨 부활입니까? 모든 종교는 부활종교죠 그런 종교의 목적이 자기 분신 확대로써의 부활이라는 탐욕을 꿈구는 겁니다.
부활이란 예수님이 격은 죽음도 이긴 그 십자가의 사건을 십자가의 영이신 성령의 일로써 규정시킨 겁니다. 결국 그 다음은 너 차례다. 너가 십자가의 저주를 받으려므나? 라고
십자가의 사건에 참예 시키는 겁니다.
부모란 죽음으로 몰아 넣는 자가 부모라고 했습니다. 계시전달자죠
선지자가 그 일을 전담하다가 개죽음 당했습니다.
세례란 우리를 죽음 속으로 몰아 넣으므로써 그 죽음 속에서 부활의 세계인 마음판에 할례의 세계인 생명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개인 부활 곧 개인 구원이란 없습니다.
집단적인 14만4천이라는 새이스라엘이 성령께서 전체 판대기를 엎어버리는 식으로써 이 땅을 심판하는 겁니다. 집단 14만 4천의 무리는 뿌뿌뿌 하고 나팔소리로 새노래를 부를때에 끝났다 완료다 더 이상 미완료는 없다 라고 그 완료된 십자가의 확정된 피만을 앞장세우고 이 세상을 판대기 자체를 뒤엎어버리는 식으로 전진하는 겁니다. 역사는 이 묵시(계시)로만 끝나는 것이지 인간의 잘못에 의한 환경파괴나 핵미사일 단추 누르는 실수나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망하는 지구란 없습니다.
2008-09-27 09:51:48,
그것도 내 열심이면 안 되고 주님의 열심이 하는것이다라고 하면서 그렇다고 가만 있으면 저절로 되는게 아니라 부지런히 경작하고 움직여야 한다 고 하니 이것도 주님을 보여 주시기 위해 반대급부로 움직이게 하는건가요
따라 올테면 따라 와바로
내가 주체가 아니라 주님이 주체라고 하면서 다시 보면 내가 주체라는것으로 말하니 이것도 나에서 빠져나올수 없게 하시고 다 주님의 공로와 영광으로 돌리게 하시고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게 하시기 위한 주님의 사랑인것 같습니다
답변:
언약(약속) 자체가 개입되게 되면 내 속에 씨앗이 뿌려지는 셈입니다.
나는 아무리 가만히 있어도
내 뱃속에서 나를 양분으로 삼아서 나를 야금야금 갉아먹는 자아를 없애는 작업을 성령이 일하십니다. 가만히 노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그 반대 급부의 행동으로 인간은 방어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바벨탑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노아 방주라는 물심판에 의한 반작용입니다. 노아언약이 없었다면 나오지도 않는 성쌓기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아벨의 제사를 편애했다는 자체가
가인 성을 쌓게 되는 자체적인 복 따내기 능력 갖추기 에너지 확보하기 이것이 국가체제가 되죠.
그러면 그럴수록 성은 높아지고 국가는 이유없이 커지고 강해져야 합니다.
성이 강하고 튼튼하고 높으면 높을수록
그 성을 깨뜨리는 언약의 일은 더더욱 빛납니다.
그래서 기생라합이 이스라엘도 믿지않는 여호와의 전쟁에 간담이 써늘해져서
아무도 기억치도 않는 다 까먹은 사건을 40년 이상 그 사건이 자기에게 닥치기를 소망한 겁니다.
자 여기서 아무도 기억치 않고 다 까먹는다 라는 것은 이미 무가치하고 불의함으로 남아버린 겁니다. 정결하다 라는 것은 인간은 늘 손대고파 하는 겁니다. 그러나 부정함이란 인간이 손대기 싫어하는 의미없는 겁니다. 이런 선악의 사고방식을 역으로 이용해서 주님이 싫어버린바 된 모습으로 온다는 것은
인간은 그 싫어버린바 된 즉 싫어버린바 되는 나의 미움을 유발케 하는 의미로써 반드시 반응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 인간은 없다니깐요.
주님이 아침에 해를 뜨게 하시면 인간은 아무리 눈뜨기 싫어도 눈 뜰 수밖에 없는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제가 누누이 피조물이라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다시 긍휼의 그릇 진노의 그릇을 톡톡히 해 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원치는 않지요
원치 않아도 지옥 갈 놈은 반드시 지옥 가도록 되어 있고
천국 갈 놈은 천국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방식이 내 뜻대로 안되기에 가만히 있는 척 안 움직이는 척척척만 할뿐이고 핑개될 뿐이지
그 맡은바 대로 부지런히 달려왔고 또 달리고 있고 주님의 계획에 누락됨이 없이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
걱정 하덜덜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