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2017

그 날에 용을 죽이시리라 (사 27, 1- 13)

김 대식 2018. 9. 14. 14:26

그 날에 용을 죽이시리라 (27, 1- 13)

 

 

(27:1, 개역) 그 날에 여호와께서 그 견고하고 크고 강한 칼로 날랜 뱀 리워야단 곧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벌하시며 바다에 있는 용을 죽이시리라

(27:2, 개역) 그 날에 너희는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노래를 부를지어다

(27:3, 개역)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상해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27:4, 개역) 나는 포도원에 대하여 노함이 없나니 질려와 형극이 나를 대적하여 싸운다 하자 내가 그것을 밟고 모아 불사르리라

(27:5, 개역) 그리하지 아니할 것 같으면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할 것이니라

(27:6, 개역) 후일에는 야곱의 뿌리가 박히며 이스라엘의 움이 돋고 꽃이 필 것이라 그들이 그 결실로 지면에 채우리로다

(27:7, 개역) 주께서 그 백성을 치셨은들 그 백성을 친 자들을 치심과 같았겠으며 백성이 살륙을 당하였은들 백성을 도륙한 자의 살륙을 당함과 같았겠느냐

(27:8, 개역) 주께서 백성을 적당하게 견책하사 쫓아내실 때에 동풍 부는 날에 폭풍으로 그들을 옮기셨느니라

(27:9, 개역) 야곱의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 곧 그가 제단의 모든 돌로 부숴진 횟돌 같게 하며 아세라와 태양상으로 다시 서지 못하게 함에 있는 것이라

(27:10, 개역) 대저 견고한 성읍은 적막하고 거처가 황무하며 버림이 되어 광야와 같았은즉 송아지가 거기서 먹고 거기 누우며 그 나무 가지를 먹어 없이하리라

(27:11, 개역) 가지가 마르면 꺾이나니 여인이 와서 그것을 불사를 것이라 이 백성이 지각이 없으므로 그들을 지으신 자가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시며 그들을 조성하신 자가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시리라

(27:12, 개역)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아 그 날에 여호와께서 창일하는 하수에서부터 애굽 시내에까지 과실을 떠는 것 같이 너희를 일일이 모으시리라

(27:13, 개역) 그 날에 큰 나팔을 울려 불리니 앗수르 땅에서 파멸케 된 자와 애굽 땅으로 쫓겨난 자가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산에서 여호와께 경배하리라

 

(27:1,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좁고 예리한 큰 칼로 벌하실 것이다. 매끄러운 뱀 리워야단, 꼬불꼬불한 뱀 리워야단을 처치하실 것이다. 곧 바다의 괴물을 죽이실 것이다. / 전설적인 바다 괴물.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민족들을 상징함

(27:2, 새번역) 그 날이 오면, 저 아름다운 포도원을 두고, 너희는 이런 노래를 불러라.

(27:3, 새번역) "나 주는 포도나무를 돌보는 포도원지기다. 나는 때를 맞추어서 포도나무에 물을 주며, 아무도 포도나무를 해치지 못하도록 밤낮으로 돌본다.

(27:4, 새번역) 나는 포도원에 노여워할 일이 전혀 없다. 거기에서 찔레와 가시덤불이 자라서, 나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한다면, 나는 그것들에게 달려들어, 그것들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것이다.

(27:5, 새번역) 그러나 나의 대적들이 내가 보호하여 주기를 원한다면, 나와 화친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 나와 화친하여야 할 것이다."

(27:6, 새번역) 앞으로 야곱이 뿌리를 내릴 것이다. 이스라엘이 싹을 내고 꽃을 피울 것이니, 그 열매가 땅 위에 가득 찰 것이다.

(27:7, 새번역) 야곱을 친 자들을 치신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혹독하게 야곱을 치셨겠느냐? 야곱을 살육하던 자들을 살육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그렇게 많이 야곱을 살육하셨겠느냐?

(27:8, 새번역)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포로로 보내셔서 적절히 견책하셨고, 거센 동풍이 불 때에, 거기에 좀더 거센 바람을 보내셔서 이스라엘을 쫓아내셨을 뿐이다.

(27:9, 새번역) 그렇게 해서 야곱의 죄악이 사함을 얻으며, 이렇게 함으로써 죄를 용서받게 될 것이니, 곧 야곱이 이교 제단의 모든 돌을 헐어 흰 가루로 만들고, 아세라 여신상과 분향단을 다시는 세우지 않을 것이다.

(27:10, 새번역) 견고한 성읍이 적막해지고 집터는 버려져서 아무도 살지 않으니, 마치 사막과 같을 것이다. 거기에서는 송아지가 풀을 뜯을 것이며, 송아지가 거기에 누워서, 나뭇가지들을 모두 먹어 치울 것이다.

(27:11, 새번역) 나뭇가지가 말라 꺾어지면, 여인들이 와서, 그것들을 땔감으로 주워다가 불을 피울 것이다. 이 백성이 이렇게 지각이 없으니, 그들을 만드신 조성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다.

(27:12, 새번역) 너희 이스라엘 자손아. 그 날이 오면, 주님께서 유프라테스 강으로부터 이집트 강에 이르기까지, 너희를 알곡처럼 일일이 거두어들이실 것이다. / , '그 강'

(27:13, 새번역) 그 날이 오면, 큰 나팔 소리가 울릴 것이니, 앗시리아 땅에서 망할 뻔한 사람들과 이집트 땅으로 쫓겨났던 사람들이 돌아온다. 그들이 예루살렘의 거룩한 산에서 주님을 경배할 것이다.

 

 

먼저 모든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은 인간 개개인에게 선물을 주는 듯한

산타클로스 할배가 선물 주듯이 하는 구원을 구원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 반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아는 것이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다른 말로

용의 멸망을 보는 것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자 이렇게 되면 개인 구원은 안 보이겠고 안따지겠죠

왜냐하면 개인 숙제가 없으니까요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숙제 밖에 기록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종교는 기가막히게 인간의 숙제로 돌려 버리는데 도사입니다.
이 발람의 꾀 가 아무리 모든 것을 장악해도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그러나 인간이 종교를 가진다거나

종교 속에서 벌어지는 사태

예를들면 명땡교회에서 오늘 뉴스를 보니

김목사가 하는 일에 반대하는 자들을

다 마귀로 몰아버리는

이런 식으로 보게 되면 졸지에 개인 숙제가 되어버립니다.

즉 종교가 되요

666 이 됩니다.

 

즉 세습에 성공을 거두어야만 하는 김목사 개인의 숙제와

그것을 막겠다고 나서는 개인들의 숙제가

종교를 형성하고 곧 역사가 되지요

그 시공간을 이긴자가 장악하는 식입니다.

 

하나는 마치 로마 독재와 같고

하나는 그것을 막겠다고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는 바리새인

또는 하나님나라를 건설하겠다는 가룟유다의 사고방식과 같다 말이죠

 

이 둘이 선악을 펼칠때에

 

주님은 이 시공간 곧 시간은 역사요 공간은 예루살렘 곧 구원의 장소이지요

이 둘을 찢고 부서버리고 헐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오히려 하나님나라 운동하는 가룟유다와 바리새인의 적은 예수님이 되어버린다 말이죠

신념의 적은 진리가 되고, 진리의 적은 신념 곧 종교가 되니까 말이죠

 

종교는 음녀요 국가는 짐승이니까 말이죠

 

둘다 진리에는 관심 없어요

예수님에게는 관심 없어요

오로지 눈에 보이는 성전 교회 예루살렘만 관심두기에

이 눈에 보이는 성전만 사수할수 있다면 마귀와도 독재와도 언제든지 손잡을 의향이 있는 것이 인간의 종교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신앙 인간의 믿음 인간의 신념이다 말이죠

 

그런 신념에 정반대 되는 것이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이 종교라는 신념에 인간이 못 넘어서는 이유는 갇혔기 때문이다는 거죠

 

갇힌 것을 모르니까 오히려 믿숩니다 라고 신념을 굽히지 않는 겁니다.

그 신념이 바로 구원을 달성해준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광명한 천사처럼

선한 일, 정의 로운 일에 더더욱 매진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반대의 모습은 악마로 취급하고 그런 마음을 악마 쫏아내듯이 한다 말이죠

 

그런데 이거 우짭니까 광명한 천사의 모습이 바로 마귀라는 것

정의를 추구하고 마치 정의사제구현단처럼

가룟유다처럼 하나님 나라 건설 운동처럼

바리새인의 독립운동처럼

 

그 시간과 공간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자는 운동

이스라엘을 예루살렘을 회복자하는 운동들이 다 마귀에게 갇혔기에 나타나는 겁니다.

 

그럼 진짜 구원은 뭐냐

바로 마귀에게 갇혔기에 저런 죄인 중의 괴수 짖만 했다는 것을

마귀의 멸망을 보고소 비로소 아는 것입니다.

 

즉 이 말은 마귀에게 갇혔고

그 마귀를 멸하시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보게 되었기에 나오는 고백이 되는 거죠

그러니 자기 숙제는 하나도 없고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벌렸는가를 주목케 되는 겁니다.

 

절대로 눈에 보이는 독재는 안 사라지도록 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거기에 덤비지 말라는 것이다 말이죠

개인숙제가 없으니 독립운동 하나님나라운동 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히려 하나님나라 운동 한다는 자체가 마귀 짖이다는 겁니다.

가룟유다와 바리새인이 그랬거든요

 

오늘날 하나님나라운동은 웃끼게도 기독교문화운동 밖에 안되더라 말이죠

놀기는 놀아도 기독교 적으로

노래를 불러도 기독교 적으로 부르자 라는 것이

기독교 문화 운동이다 말이죠

 

기독교 영화 만들어서 수익을 창출하자는 식으로 말이죠

 

영화를 만든다는 자체가 수익을 따진다는 것이거든요

일부러 망할려고 만들지는 않는다 말이죠

 

십자가 라는 거리끼는 걸림돌 지혜를 만들어 보세요

영화 보자 마자 망치 들고

영화만든자 망치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만드는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있겠냐 말이죠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설교 듣고 망치 들고 당장 죽여버리겠다 라고 나서게 만드는 그런 설교는 안 한다 말이죠

가급 적이면 돈을 많이 낼수 있도록 만드는 설교를 할 꺼다 말이죠

 

아 그런데 오늘 이사야는 그야말로 몽둥이 들고 개 패듯이 패겠다고

마음먹도록 만드는 복음을 증거합니다.

아마 그래서일까요?

히브리서에서는 이사야가 톱으로 켜짐당하는 죽음을 당했다고 하던데 (11:37)

 

바로 마귀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죽음을 당하는 겁니다.

 

도대체 히브리서 11장에서 말하는 믿음이란

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 도대체 뭐길래 자꾸 악마의 실상을 들추어낼까요?

 

종교에서 말하는 믿음 곧 신념은 개인의 숙제 뿐이지

악마의 실상을 들추어내는 것과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저 도 딱고 마일리지 많이 쌓아서 개인 천국행만 따는 것

거기서 조금 확대되어 가족 구원 좀더 확대되면

동네 친구, 마을, 사회, 민족, 국가로 발전 등등이다 말이죠.

그러니 처음부터 음녀는 짐승이라는 국가에 올라 탄 겁니다.

 

아무리 국가가 이 음녀 곧 유대인을 핍박해도

유대인들이 야생마와 같은 국가가 아무리 날 뛰어도 반드시 길들여서 올라타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놀아나듯이 말이죠

반드시 올라타서 예수님을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런 마귀의 실상을 낱낱이 들추어내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말이죠

아니 사랑이라면

구원이라면

진리라면

거짓문제 죄문제를 해결하지도 않고서 따로국밥처럼 구원을 펼치겠냐 말이죠

 

구원이라는 의미 자체가 뭐뭐로부터 탈출인데?

그리고 반드시 뭐뭐로부터 탈출해서 반드시 뭐뭐로 입 들어가는 것인데?

출 과 입

빠져나옴과 들어감이 명료하고 명확한데

종교는 이게 흐릿해요

개인 숙제로 돌려버린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이런 종교와 손잡고 돈에 빠져있다 말이죠

명땡교회는 하나의 증상일 뿐인데

저거 문제 해결 되면 오히려 더 심각한 것을 못 본다 말이죠

뿌리채 다 썩은 것을 못 본다 말이죠

그러니 해결할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교회 다니면서도 이 사망의 몸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죄인 중의 괴수이구나 라고

그 고백하라고 주님께서 벌리신 사건입니다.

인간이 벌린게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다들 거꾸로 해석하고 보고 있으니

그 썩은 부분만 도려내서 안 보여주고 감추면 된다고 보는게 더 큰 문제다 말이죠

 

좌파기독교들이 아주 신이 났어요, 소위 개혁주의나 성화론자들 다 해당되죠.

자신들의 가치가 높아지니까 말이죠

그런 의문의 반복을 왜 십자가가 또렷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우파기독교는 원래 짐승이고

좌파는 그 짐승을 자기들이 회개시켜서 올라탈려고 한다 말이죠

 

이 둘이 짜고 치는 고스톱을 펼쳐요 글쎄

 

예수님의 눈물은 명땡을 보고 우시는게 아니라

명땡을 제대로 고치겠다고 하는 자들을 보시고 울 것이다 말이죠

모든 자들이 명땡목사와 같은 사고방식으로써 살아가고 있는데

모두다 갇혔는데

한치도 벗어날 적이 없는데

날 때부터 소경인 자는 우리인데

뭐 남을 고치겠다고?

내가 소경인데? !! 남을 고치겠다고 눈뜨게 하겠다고?

 

아차 괜히 비밀을 말했넹

듣고 깨달아 고침을 받으면 안되는뎅

 

자 그렇기 때문에 용을 왜 죽이시는 줄 모르는 겁니다.

개인 숙제 하기 바쁜데 누가? ? 용을? 그것도 숨어 있는 용을 죽이는 줄

안 봐요

그저 자기 숙제 하기 바빠요

개혁하겠다는 둥

성화 하겠다는 둥

막살지 않겠다는 둥

 

갇힌 줄을 모르니까

가만히 서서 못 보는 겁니다.

 

지난 시간에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바로 오늘날

종교들이 외치고 있는 개인 구원입니다.

그러니 개인 성화하기 바빠요

남 성화 되길 바라지는 않아요

부자청년이 그랬다 말이죠

왜냐하면 이웃이 바로 불편하기 때문에 이웃이거든요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이웃을 누가 사랑하겠냐 말이죠?

 

남이(이웃, 그것도 불편한 이웃) 용서 받는 꼴을 못 봐요
맏아들이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십자가의 용서를

그 꼴을 못 봐요

천한 계집종이 왕비가 되게하는 지혜(예수님의 의로우심)를 격동하면서 견디질 못해한다 말이죠
개같은 이방인 다말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꼴을 못 봐요
창녀 라합이 예수님의 족보에 올라가는 꼴을 못 봐요

 

오늘날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남 구원을 바라지 않아요

자기 구원 밖에 몰라요

남 구원 되는 꼴을 못 보는 자들이 오히려 교회다니는 사람들이다는 거죠

자기 성화한 것 모조리 다 남 줄수가 없다 말이죠

 

그러니까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바로 개인구원이 되는 겁니다.

전체구원이라는 판대기를 안 볼려고 해요

완악하기 짝이 없어요

유대인은 그러면 자기 민족만큼은 구원받기를 바랄까요?

안 바랍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집단성이 강한 이유가 뭘까요?

흩어지면 개판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더 잘 알거든요

그래서 혼자 율법 지키는게 아니라 집단으로 율법을 지키는 교육이

그 어떤 민족 보다 강해요

자 그러면 전체 구원을 바래서일까?

아니다고 했지요

흩어져보니 엄청난 손해를 봤기에

그 역사 속에서 느낀 육체이기에 조금 알고 있을 뿐이지

사랑이 있어서가 아니다는 거죠.

 

역시나 많이 탕감받은 자를 가장 미워하는 자들이 유대인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인류애 라는 사상을 유대인이 가장 모든 민족에 퍼트려도 말이죠.

 

쉰들러 리스트 보면 뿅 가잖아요

그런데 홀로코스트 비용으로 사기친자들 역시 유대인이거든요

그러니 유대인 이라는 오히려 의문의 반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완악한 자로

사단의 회로 보시면 되는데

그것을 또 한국이 막 따라해요 글쎄

 

 

아무튼 지난 시간에 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의 반대를 보여주는

그 상대적으로 한 세트가 되는 그 반대의 것이 바로

요나의 표적

곧 땅이 삼키운 죽은자를 다시 내 뱉도록 하는 것이 바로 의이다 라는 겁니다.

 

오늘 부제목을 적는다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라고

갑자기 구하라의 폭행이 생각나넹 ㅋㅋㅋ

 

예수님의 나라와 예수님의 의를 구하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의 이다는 겁니다.

 

그럼 이 의는 무엇이다고 지난시간에 이야기 했는고 하니

 

땅이 삼켜 죽은 자를 다시 내 뱉도록 하는 것이 의이다는 것인데

 

정작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다 죽은자요

그 죽은자로써 주여 저는 마귀로부터 갇힌 죽은자입니다.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고백해야 한다는 것은

의가 내 쪽에 있는게 아니라

율법 외에 한 의가 내 바깥의 저 분에게 있는데

저 분 만이 땅이 삼킨자를 다시 내뱉는

큰물고기 곧 깊고 어두운 바다가 삼켜버린 요나를 다시 내 뱉는

이 일을 벌리시는 분이 의이다 거룩이다는 겁니다.

다른 거룩은 없어요

 

아무리 인간이 율법을 지켜보세요 의가 생기나?

죽은자를 다시 내 뱉어 살리는 일을 할수 있는가?

오히려 다들 자기 살려고 자기 구원받을려고 교회다닌다 말이죠

남이 구원받는 꼴을 못 봐요

자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날 때부터 소경인 죽은자이다는 겁니다.

 

차라리 주여 저 죄인입니다.

주여 저 죽은자입니다.

주여 저 죄인 중의 괴수입니다.

주여 저는 날 때부터 소경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이 고백 자체가 외부에서의 의를 보게 되니까

나오는 증상인데

 

안 보이는 자는 다른 대책 대안이 없잖아요

그러니 자기 의를 내세우는 것이 전부이고

그것에 승부를 건다 말이죠

 

바로 이것이 갇힌자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 날에

용을 왜 죽이시는 줄도 모르고

오히려 용을 죽이시면 안된다고 나서게 된다 말이죠

 

아니 바리새인과 예수님의 충돌을 자세히 보세요

용을 죽이는 장면이 나오나? 안 나오잖아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바리새인의 속을 박박 끓어댑니다

 

네 네 맞습니다.

바로 이것이 용을 죽이시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예수님은 한 시도 안 싸우신적이 없습니다.

 

항상 용과 싸우신다 말이죠

 

자 그러면 자꾸 덤벼드는 예수님을 용이 가만히 둘까요?

드디어 본색이 드러납니다.

 

뱀인 사탄인 용은 이 예수님의 소욕을 반대하고자

자신의 소욕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소욕은 뭡니까? 마귀의 소욕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생명을 막는 겁니다.

생명책에 기록되었다는 이 의 , 이 거룩을 막고 배반하고 거부하고 반발하고

맞써 싸우는 것이 마귀의 소욕입니다.

음녀의 비밀이지요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이지요

 

제사장 딸로써

땅의 지분이 없는 맏물

분리되어서 거룩을

그것도 하늘의 거룩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는 자가

 

오히려 땅의 지분을 가진자 보다 더한 소욕으로써 탐내는 자들이다는 겁니다.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소위 유대인들이 땅의 지분을 더 탐내는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더라 말이죠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살리는게 아니라 말이죠

오히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라고

자기 쪽에서 거룩으로 구분짖기를 해요 글쎄

간극벌리기를 해요 글쎄

 

자 그러면 팔을 어긋맞게 하시죠

누가 봐도 저주산인 에발산인 세리가 도리어 구원축복을 받고

누가 봐도 축복산인 그리심산인 유대인 바리새인이 저주를 받는 겁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구분짖기를 하는게 아닙니다.

그 반대죠

예수님의 의로

요나의 표적으로

십자가의 피 용서로 구분짖기를 외부에서

율법 외에 한 의에서 해요

율법에서 하는게 아니라

그 바리새인은 썩은 동앗줄을 잡은거다 말이죠

 

유다지파가 사실상 12지파 중에서 6지파씩 나누어져서

축복산 그리심산에 올라갔습니까?

아니면 에발산 저주의 산에 올라갔습니까?

 

유다지파는 에발산 저주산에 올라갔어요

그래여 상대방에서 날라오는 축복을 받는다 말이죠

저주의 자리에서 말이죠

 

이것이 율법의 정신 바로 사랑입니다.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다 말이죠

 

아 그런데 오히려 제사장 딸로써 가장 잘 알아야 할 유다지파인 유대인이

그 유대인 중에서 선생이라는 공직 공무원인 자가 아니 글쎄

축복산에 올라가게 되니까 남을 정죄하기 바빠요

저주 산에 올라가면 많이 탕감받기 바쁜데

 

안식일을 지키기 바빠요

저주산에 올라가면 안식의 주인을 만나기 바쁜데

 

의를 거꾸로 해석한 겁니다.

 

이 의를 예수님이 다 이루었는데

오히려 예수님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차 있더라 말이죠

 

민족의 정신을 모으고 흩어진 이스라엘의 정신을 모으는

정신적인 지주인 이 예루살렘성전 46년 동안 짖고 있는 이 성전을

아니 글쎄 허물라니??

 

이 사람 위험한 사람일세

우리 이스라엘의 정신을 흩어놓을려는 심뽀네

이거 없으면 간따나 흩어짐 마음을 모을길이 없고

하나님 나라 독립운동도 할 수가 없는데

목적성이 사라지는데

 

이 이스라엘을 흩을려고 하는 자를 가만히 살려둘수가 없다 말이죠

이스라엘을 없애버릴려고 하니까 말이죠

 

그럼 이스라엘 모이면 뭐합니까?

예루살렘이 회복이 되던가요?

안 되요

트럼프가 그럼 구세주 입니까? 회복시켰으니?

아니지요 그 어떤 유대인도 트럼프를 구세주로 안 봅니다 사이코 패스로 보고 있지

그저 이용해 먹을려고 단물 빠지면 뱉어버릴 생각이다 말이죠

 

이런 식으로 한국도 트럼프 이용해서 통일을 이룰려고 한다 말이죠

모든 인간의 역사는 그저 이 의문의 반복으로만 만족할려고 해요

흐릿하고 모호한 것으로 만족할려고 한다 말이죠

 

또렷한 십자가를 원치 않아요

그래서 의가 외부에서 쳐들어 와야 합니다.

아무도 원치 않기에

의를 원치 않아요

 

정의니 의로움이니 거룩이니 라고 내세운 꼬라지를 보니

다 거짓이고 의문의 반복이고 흐릿하고 모호해요

여전히 불확실한 미래처럼 불확실성이다 말이죠

 

그럼 의가 뭐냐?

용을 죽이는 겁니다.

용을 죽이지 못하는 의는 의가 아니무이다

 

이것을 글쎄 모든 인간들은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신비요 비밀입니다.

그러니까 갇힌거죠

 

자 그럼 의를 어떻게 보느냐

소위 인간들이 내세우는 의와 선함 착함 정의 거룩 이런것들을 다 없애버리면

비로소 악이 등장해요

 

바로 그겁니다.

악은 바로 인간들이 내세우는 그 의와 선과 거룩 뒤에 숨어있었던

광명한 천사였었었었었던 것이였던 것이였습니다.

 

그러니 악은 이 선이 없으면 못살아요

선도 이 악이 없으면 못살아요

자신들의 가치는 서로가 서로를 보충해 주고 있었던 겁니다.

 

이 선악을 없애버리는 것이 바로

진짜 의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다 말이죠

 

그러니 누가 봐도 해석할 줄 아는 악을 없앨게 아니라

누가 봐도 선하다 라고 하는 그 선을 없애버리면

바로 악이 자신의 가면을 더 이상 쓰질 못하고

그 정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니 십자가는 이 악마의 정체를 들추어내는 겁니다.

오직 십자가만이

곧 요나의 표적만이 저들의 가면을 다 벗겨서

그 정체가 낱낱이 들추어짐을 당하도록 하는거다 말이죠

 

가장 선하다고 존경받던 바리새인이 악마의 최고의 하수로써

들통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자 그래서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과 주변 이방나라와 같이 죽여버리는

이 주님의 의를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의가 입혀진 자가 돌아온다고 외치는 겁니다.

 

남은 자가 돌아온다는 의미는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27:12, 공동) 그 날 야훼께서 마당질하시리라. 유프라테스 강 줄기에서 이집트로 건너가는 개울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후손들아, 하느님께서 너희를 일일이 모아들이시리라.

(27:13, 공동) 그 날이 오면, 큰 나팔 소리 요란하리니 아시리아 땅에 귀양갔던 이들도, 이집트 땅에 뿔뿔이 흩어졌던 이들도 돌아와 예루살렘 거룩한 산에서 야훼께 예배를 드리리라.

 

자 그러니 예레미야 선지자가 정작 이스라엘이 밧줄에 꽁꽁묵여 포로잡혀 갈때에

박수치고 춤추고 노래부르면서

너희들 구원받았다고 노래부른다 말이죠

표시해 두어라 다시 돌아온단다

쨍하고 해띁날 돌아온단다 라고 외친다 말이죠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으로 말이죠

신부로써 말이죠

 

아니 지금 누가 봐도 실패 했는데

포로 되었는데

잡혀서 저주받는 식으로 종살이 하게 되었는데?

저주산 에발산에 가게 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신부로써 찬양자로써의 남은자 이다는 겁니다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1:9, 새번역)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얼마라도 살아 남게 하시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마치 소돔처럼 되고 고모라처럼 될 뻔하였다.

(9:29, 새번역) 그것은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군의 주님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주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이 되었을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 / 1:9(칠십인역)

(1:9, 공동) 만군의 야훼께서 조금이라도 살려두시지 않으셨더라면 우리는 모두 소돔같이, 고모라같이 되고 말았으리라.

(9:29, 공동) 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전능하신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주시지 않았던들 우리는 소돔처럼 되었을 것이요, 고모라와 같이 되었으리라." / 이사 1:9.

 

 

그들 자체가 남은자라는 조건을 갖춘다는게 아니라

존재가 아니라

 

남은씨를 말하는 기능이 된다는 거죠

저주산에서 찬양자 유다지파로써 말이죠

 

어떤 찬양?

이런 죄인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의를 찬양하라

라고

시편의 다윗처럼 밧세바를 취하고

우리야 장군을 죽이고

이름 없는 꺽으신 뼈를 만들게 하신

 

여호와의 의를 찬양하라 라고

(나를 죽은자 만든 율법 안에서 죽은자로 다시 예수 안에서 다시 산 자로 만드시는

이 주님의 의, 십자가의 표적을 찬양하라)

 

같은 찬양

같은 다윗언약을 다윗이라는 유다지파 곧 찬양자로써

찬양케 된다는 거죠

 

찬송의 옷을 입혀주셨으니 안 찬양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단순히 요셉이 일부러 간첩 만들어서 뺑뺑이 세 번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만든게 아니다 말이죠

 

지금 이사야가 요셉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간첩 만들어서 괜히 포로잡혀가도록 하는게 아니다 말이죠

 

다니엘서에 나오듯이 70 이레 라는 간극을 만들기 위함이다 말이죠

한때 7이레 두때 62이레 반때 1이레 라는

삼년반(계시록에서는 1260)이라는 간극

꼬끼오 꼬끼오 꼬끼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 간극을 왜 벌리시느냐

삼일의 간극을 왜 벌리시느냐

 

자기의 의가 탈탈탈 털리고

마귀에게 사로잡힌 포로가 되어서

다시 땅이 이 죽은자를 내 뱉는

 

이 의가 옳았다

찢으셧으나 도로 싸매어주시는 이 의가 옳았다

자기 의를 내세우는 시아버지 유다가 아니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한 며느리 다말이 옳았다 라고

이 다말로부터 나온 의

불 속에서 나온 의를 가지고

 

유다가 요셉의 간첩몰기 작전에

십자가의 표적을 보고 통과 패쓰 합격하는 겁니다.

자기가 친 시험이 아닌

며느리 다말이 대신 친 시험 합격 통지서를

들고서 합격 패쓰 하더라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지혜

곧 여호와의 의

요나의 표적 외에 보여줄 표적이 없는 겁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는 이 의를 증거하는 겁니다.

 

그러니 거짓선지자는 그 반대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증거하겠죠

대충 대충 심상히 고치지

제대로 또렷하게 명료하게 고치지 못한다 말이죠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영을 받은 자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러나 참선지자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게 없어요

 

그것이 바로 삼년반 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엘리야처럼

이 삼일이라는 간극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주의 의를 증거하는 자입니다.

 

자기 의가 아니라 말이죠

 

이사야 선지자는 지금 용의 입속에 집어넣고 이스라엘을 삼키라고 이스라엘을

용의 입 속에 집어넣습니다.

땅 속에 집어넣습니다.

죽음 속에 몰아넣어요

포로 되게 만들어요 글쎄

 

아니 근데 용의 입 속에 들어간 이스라엘이 오히려

씹지도 뜯지도 못하고 내 뱉는 겁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은 압니다

자기 꼬라지가 뭐가 대단해서 용이 도리어 죽은 우리에게 깔려 죽는지?

 

바로 십자가의 의가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그래서 이스라엘은 찬양아니 하고는 못배기는 자로 태어난

찬양자로 태어난 겁니다.

 

마귀는 반대로 이스라엘에게 찬양의 조건을 갖추어서 찬양자가 되어야 한다고 우깁니다.

그래서 안식일 지키고 하듯이 자꾸 지켜서 자기 의를 갖추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의란 이 삼일의 간극을 만드는 겁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이 간극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성도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바로 처음사랑의 자리이다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무조건 용서한 그 사랑이 처음사랑인데

점점점 조건만을 가득채운 회칠한 무덤으로

자기도 못하고 남도 못가게 하는

 

이 주님의 의

삼일의 간극

행함이 있는 믿음을 거부하고

 

소위 종교라는 신념 곧 오기 똥고집 완악한 마음으로

산당을 누가 누가 더 크게 짖느냐 라는 싸움에

누가 누가 더 성화되었냐

누가 더 크냐 라는

이 우상숭배에 빠진 자를

 

마귀가 고맙게도 그것을 탈탈탈 털게 하는 부정적인 도구로 삼아서

자기 의 로 백날 이 사망의 권세를 이길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써

7 이레 동안은 이스라엘 자기 죄 때문에 핍박 당하고

62 이레 동안은 이유 없이 주변나라로부터 핍박 당하고

한 이레 동안은 아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해서 핍박당하는

 

찬양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이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의 지혜 곧 의를 외치는 찬양자로써

이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이 간극을 보여주는 자로써

 

이사야는 신나게 이스라엘을 용의 입 속으로 집어넣는 겁니다.

 

남은씨가 벌써 이겼다고

이겼으니 용의 죽음

사망의 권세가 멸망한 주의 성실함 곧

주의 성실 곧 부지런히 마귀의 입속에 이스라엘을 집어넣는 그 성실하심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 큰 골리앗 애굽과

가장 미약한 이스라엘을 싸움 붙이시는 이 성실하심을

 

이 성실하심으로

주의 인애와 자비로 아침에 새벽이슬같은 주의 청년으로 나아오는

 

예루살렘에 모이는 자

곧 예수님에게 모일 수밖에 없는자로 만들기 위한 주님의 조치

주의 성실하심과 인자하심이라는

 

주의 의를

이사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지금하고 있는 계시록의 사건과 너무 너무 딱딱 맞아 떨어지는지

사망과 음부를 마치 의인화 시켜서 영원한 불못에 던지시고

상대적으로 생명책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의가 덮쳐진 자만이

찬양자 유다지파처럼 이렇게 하시는 주의 의가 옳았다고

중간의 세겜에서 외치듯이 말이죠

 

아주 아주 신났어요 글쎄 ~~~~

 

이 주의 의가 나 보다 옳았다고

천국에서 이 찬양만 할 것 밖에 없다 말이죠

그 찬양을 천국에서 부를 찬양을

미리 천국을 지금 누리는 겁니다.

 

주의 의를 찬양하는 천국을

미리 주의 의를 찬양하는 겁니다.

 

이 미래 완료를 땅겨서 누리는 자를 생명책에 기록된 자

곧 찬송의 옷을 입혀짐 당한 그리스도의 신부 곧 교회라고 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