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여호와의 진노가 쉬지 아니 하리라 (사 9: 8-21)
혹독한 여호와의 진노가 쉬지 아니 하리라 (사 9: 8-21)
사랑하신다는 최고의 증거 사랑의 회초리
(사 9:21, 개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사 9:8, 개역) 『주께서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셨은즉』
(사 9:9, 개역)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거민이 알 것이어늘 그들이 교만하고 완악한 마음으로 말하기를』
(사 9:10, 개역) 『벽돌이 무너졌으나 우리는 다듬은 돌로 쌓고 뽕나무들이 찍혔으나 우리는 백향목으로 그것을 대신하리라 하도다』
(사 9:11, 개역)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르신의 대적을 일으켜 그를 치게 하시며 그 원수들을 격동시키시리니』
(사 9:12, 개역)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13, 개역) 『이 백성이 오히려 자기들을 치시는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도다』
(사 9:14, 개역)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하루 사이에 이스라엘 중에서 머리와 꼬리며 종려가지와 갈대를 끊으시리니』
(사 9:15, 개역)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사 9:16, 개역)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사 9:17, 개역)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18, 개역) 『대저 악행은 불 태우는 것 같으니 곧 질려와 형극을 삼키며 빽빽한 수풀을 살라서 연기로 위로 올라가게 함과 같은 것이라』
(사 9:19, 개역)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 9:20, 개역)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 9:21, 개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8, 새번역) 『주님께서 야곱에게 심판을 선언하셨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를 것이다.』
(사 9:9, 새번역) 『모든 백성 곧 에브라임과 사마리아 주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신 것을 마침내는 알게 될 터인데도,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으로 서슴지 않고 말하기를』
(사 9:10, 새번역) 『"벽돌집이 무너지면 다듬은 돌로 다시 쌓고, 뽕나무가 찍히면 백향목을 대신 심겠다" 한다.』
(사 9:11, 새번역) 『이 때문에 주님께서 그들을 치시려고 르신의 적을 일으키셨고, 그들의 원수를 부추기셨다.』
(사 9:12, 새번역) 『동쪽에서는 시리아 사람들이, 서쪽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그 입을 크게 벌려서 이스라엘을 삼켰다. 그래도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사 9:13, 새번역) 『그런데도 이 백성은 그들을 치신 분에게로 돌아오지 않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지도 않았다.』
(사 9:14,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머리와 꼬리, 종려가지와 갈대를 하루에 자르실 것이다.』
(사 9:15, 새번역) 『머리는 곧 장로와 고관들이고, 꼬리는 곧 거짓을 가르치는 예언자들이다.』
(사 9:16, 새번역) 『이 백성을 인도하는 지도자들이 잘못 인도하니, 인도를 받는 백성이 멸망할 수밖에 없다.』
(사 9:17,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들의 젊은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으실 것이며, 그들의 고아와 과부를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모두가 불경건하여 악한 일을 하고, 입으로는 어리석은 말만 한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 ㉣사해 사본을 따름. 마소라 본문에는 '기뻐하지'』
(사 9:18, 새번역) 『참으로 악이 불처럼 타올라서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를 삼켜 버리고, 우거진 숲을 사르니, 이것이 연기 기둥이 되어 휘돌며 올라간다.』
(사 9:19, 새번역) 『만군의 주님의 진노로 땅이 바싹 타버리니, 그 백성이 마치 불을 때는 땔감같이 되며, 아무도 서로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사 9:20, 새번역) 『오른쪽에서 뜯어먹어도 배가 고프고, 왼쪽에서 삼켜도 배부르지 않아, 각각 제 ㉤팔뚝의 살점을 뜯어먹을 것이다. / ㉤또는 '자식의'』
(사 9:21, 새번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먹고,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고, 그들이 다 함께 유다에 대항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진노를 풀지 않으시고, 심판을 계속하시려고 여전히 손을 들고 계신다.』
이방나라도 이렇게 혹독하게 진노하지 않았는데
오히려 자기 자식이라고
이스라엘 만큼은 이방나라가 놀랄정도로
혹독하게 진노를 퍼붓습니다.
이방나라가 놀리죠 아이고 너희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하나님을 너희는 말라꼬 믿냐 라꼬
그런데 이들 이방나라는 눈에 보이는대로 나타나는 대로만 볼 뿐이지
시공간이라는 역사로써 말이죠
묵시로 약속으로는 못 보는 겁니다.
바로 우상에게서 빼앗기지 않겠다는 주님의 열심이 담겨진 징계이기에
이것은 그야말로 사랑하신다는 증거이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사랑이라고 여겨도
이런 안목을 가진다는 것은
마치 방금 표현한 가진다 곧 소유한다는 것은
인간 쪽에서 소유하듯이 되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다가오심으로만 생기는데 그것이 바로 징계요 진노이다는 겁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고 우기는 엘리야에게
7천명을 남겨놨다 라고 하시면서
인간은 자기가 소유한 자기와 그런 자기의 눈 자기의 귀로 포착한 입장에서 볼 때
나 만 최종적으로 소유한 것은 나 밖에 없으니까
나는 의심할수 없으니 나만 남았고
그 나만 남은 나의 안목에서 보니 정작 아무도 없는 겁니다.
7천명의 남은자가 보일 리가 없다 말이죠
이것이 역사 곧 시 공간은 인간이 차지했다고 소유했다고 보는 안목에서 나왔다 말이죠
왜? 모든 최종적인 가치는
나는 나를 의심할수 없을 정도로 존재가 또렷하니까 [코기토 에르고 숨 (Cogito ergo sum)]
생각=나=존재 모조리 다 이꼬르. 동일시 하는 "생각이 나요" "내가 생각이요" "내가 존재요" "존재가 나" 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저런 인간과의 차이로써 우상과의 차이로써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으로써 세미한 음성으로 나타났기에
이 세미한 음성에 걸맞는 칠천명
한 아기로 나타났기에 한 아기에 걸맞는 흑암의 백성
부활이시기에 부활로 나타나심에 걸맞는 과부를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의인, 건강한자를 부르시러 온게 아니라 죄인, 환자를 부르러 왔다 말이죠
생각 나 존재를 부르러 온게 아니라
비생각 비자아 비존재인 기능을 부르러 오신 세미한 음성이요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칠천명 이라는 천 이라는 묵시와 일곱이라는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 앞에서
인간의 모든 소유에서 나오는 모든 주장은 거꾸로 무시 당해야 마땅한 판국에 놓여지는 진노인 것인데
거꾸로 칠천을 무시하고
한 아기를 구하지 않고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고
요나의 표적을 구하지 않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구한다는 자체가
우상숭배자임을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밝혀짐에도 불구하고
완악하게 이 십자가를 거부하면서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심판하고 진노를 퍼붓는 그야말로 우리는 구제불능이다는 겁니다.
그런데 왠 말입니까? 이 진노를 쉬시지 않겠다는 말이
이 보다 더 기쁠수가 없다 말이죠
이 진노가 아니였다면 벌써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말이죠
완벽한 심판이자 동시에 완벽한 거룩을 멈추지 않겠다는
주님의 의만 나타내시겟다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겠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찢으셨으나 다시 꿰메시는 이 의를 멈추지 않겠다는 것은
저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겁니다.
실제로 이런 안목을 가진 자가 있는데
그 대표적인 자가 바로 기생라합입니다.
어서 어서 심판해 달라고
간담이 녹아서 구원을 떨림으로 기다렸다 말이죠
40년 동안
왜?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주님의 약속을 봤기에
어서 어서 여호와의 진노를 퍼부어 달라고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인 주님의 의로움이 어서 어서 여기 흑암에게도 펼쳐지게 비추게 해 달라고 말이죠
완전 배신이야 배신이죠 매국노죠 나라 팔아 먹는 기생라합이니까 말이죠
독립운동을 펼치는 가룟유다와 완전 정반대죠
이미 완료된 묵시를 못 보고
자기가 소유한 시간과 공간을 차지했다는 그 이유로
이 하나님의 진노를 해석할려고 하니
예수 너는 나무에 달린 자 마다 하나님께 저주 받았으니 너야 말로 저주 받았구나 라고 보더라 말이죠
왜? 소유에서 소유로 해석하니까
자기를 소유했고 그 소유한 자기에게서 나오는 눈과 귀로 밖에 해석 못하니까
좀더 확대해서 망원경처럼 범위를 더 많이 넓게 보면 해석이 더 넓어져서
오차가 줄어든다고 착각하지만
아무리 봐도 넓게 해석하고 넓은 안목으로 바라봐도
이 십자가는 듣보잡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묵시 그 자체
미래완료의 또렷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인데
저주로 볼 줄 알고 저주로 해석할줄 아는 자기의 눈과 귀가 있으니까
예수 너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 이다 라고
이 해석에서 벗어날 길이 없더라 말이죠
그런데 왜 이사야가 발가벗고 3년 동안 돌아다녔냐 말이죠
마치 하나님의 진노를 받은자처럼 말이죠
어떤 목사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자꾸 독자적인 개인 숙제로 가르치는데
반드시 맞물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저들의 발가벗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지자가 너희들 거울로 발가벗었따 말이죠 이게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엘리야는 3년 반동안 비오지 않기를 기도했고
기생라합은 거짓말로 정탐꾼인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숨겼고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였다 말이죠
즉 상대적으로 맞물리는 것은 우상이다는 겁니다.
행함과 반대되는 믿음을 약속을 믿은 것이지
우상을 쫏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 세 사람이 말이죠
그런데 행함이 있는 믿음을 펼치라꼬 목사가 가르치면서
믿음을 가르치는게 아니라 도리어 행함을 곧 우상을
곧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것을 가르치고 있더라 말이죠
뭐 하긴 가르친다는 자체가 이미 말이 안되죠
믿음은 가르친다고 되는게 아니니까 말이죠
약속이 그 사람을 소유하지 않는 이상
믿음은 안 나오게 되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이 안나오게 되니까
믿음 없는 목사가 본인이 불안하고 답답해서
교인들을 닦달내듯이 보채더라 말이죠
안그러면 교회 운영이 안된다고 말이죠
주님을 자꾸 목사 자기처럼 노시는 분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사 9:12, 개역) 『앞에는 아람 사람이요 뒤에는 블레셋 사람이라 그들이 그 입을 벌려 이스라엘을 삼키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17, 개역) 『이 백성이 각기 설만하며 악을 행하며 입으로 망령되이 말하니 그러므로 주께서 그 장정을 기뻐 아니하시며 그 고아와 과부를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사 9:21, 개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시 121:4, 개역)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절대로 쉬지 않으신다 말이죠
절대로 사랑을 멈추시는 법이 없어요 징계가 안 멈추어져요
이것 자체가 우상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니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방식은 자꾸 진노를 멈추게 하고자 함이 목적인데
이게 우상인데
그런 우상과의 차이가
절대로 진노를 멈추지 않겠다고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겠다는 겁니다.
왜?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약속 그 자체 이시거든요.
이미 벌써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다 이루었다로 선언하고 나타나셨거든요.
이게 기쁜소식 약속이다 말이죠
으메 징글 징글한 이 십자가의 사랑이요 피남편이다 말이죠
자 그런데 보세요
이미 다 완료된 입장이라고 했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으면 벌써 멈추고 가만히 있을꺼다 손놓고 놀기만 할꺼다 말이죠
왜 다 이루었기 때문에 말이죠
이게 묵시고 이것이 약속이라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정반대입니다
완료되었기에 더더욱 부지런히 진노를 퍼붓고
이 진노를 멈추지 않고 쉬지도 주무시지도 않고 퍼붓는다는 겁니다.
얼마나 기쁘지 짝이 없는 기쁜소식이요 사랑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은 미래완료로써 다 이루었다 라고 이것이 묵시라고 약속이라고 주장해도
그 때부터 멈추고 그때부터 손 놓고 그때부터 쉬어버린다 말이죠
왜? 우상이기에
아닙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부지런히 부지런히 주님께 나의 죄악을 실어 날라야 합니다.
이런 죄악도 용서하셨다니 놀라고 자빠지는 하루 하루에 쩔어 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쩔 어 ~~~~ 소금 팍팍, 왜? 부패하고 썩지 않도록 말이죠 저 바리새인 성화론자와의 차이로써 말이죠
그러니 우리의 안목은 뭘 해도 다 틀렸다고 들통당하는
주님의 쉬시지도 않는 칠천명 남겨두심이 부지런히 펼쳐짐으로써
우리는 매일 매일 이 쉬지도 않으시는 주님의 다 이루심으로 인해
매일 매일 들통당하는 주님의 쉬지 않으심의 진노에 의해
죄가 마구 마구 쏟아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죄가 멈추는게 아니라
또 그렇다고 일부러 은혜를 더하고자 죄를 짖는게 아니라
죄를 짖는다고 죄가 되는 그런 죄는 없어요
인간이 다룰수 있는 죄가 없다니깐요
죄가 인간을 다룹니다
그렇기에 쉬지도 않는 하나님의 진노인 징계가 부지런히 우리의 죄악을
죄악을 우리를 삼켜버렸기에 부지런히 죄악을 수셔대어서 우리의 살점 하나 하나를
죄악으로부터 뜯어내는
우상으로부터 하나 하나 뜯어내시는 작업을 우리 죽을 때 까지 계속하신다 말이죠
안 그러면 성경이 틀린거다 말이죠
아니 왜 사도바울의 사단의 가시를 왜 안 뽑냐 말이죠
즉을 때 까지 안 뽑아요
이 하나님의 진노를 쉬지 않고 사도바울에게 박아 넣었다 말이죠
불의한 재판관인 고레스 왕을 메시아로 삼지 않으면
우리는 과부가 안된다 말이죠
죽은자가 안된다 말이죠
사단의 가시가 아니면 말이죠
나를 위한 구원은 없어요
주님을 위한 구원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과부를 위한 부활이 없어요
부활을 말하기 위한 과부이다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 다 말이죠
흑암의 백성을 위한 빛은 없어요
빛을 위한 흑암의 백성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 갈릴리 스불론 땅 남달이 땅이다 말이죠
나사렛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말이죠
(롬 11:36, 개역)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새번역)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롬 11:36, 공동) 『모든 것은 그분에게서 나오고 그분으로 말미암고 그분을 위하여 있습니다. 영원토록 영광을 그분께 드립니다. 아멘.』
모든 것이 주를 위해 낫고 주를 위해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인데
어딜 봐서 나를 위한 것이 어디 있냐 말이죠
우상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주께로 나서 주께로 말미암고 주께로 돌아감이다 말이죠
이 주님의 계획 주님의 소유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진노가 있다는 자체가
이 얼마나 기쁘기 짝이 없는 기쁜소식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본문처럼
약속의 땅이 우리의 죄악 때문에
바로 이런 자기 구원을 위한답시고
아하스 왕처럼 왜 그 당시 유대인의 대표성인 왕이니까
아하스 왕처럼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는 이 우상성으로 인해
약속의 땅이 척박한 땅으로 변하는 것을 직접 격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 진노 자체가 아직까지도 하나님 쪽에서 이 관계성을 유지하겠다는 주님의 의지요
주님의 계획이요 하나님의 열심 곧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사랑이다 말이죠
뭐 안 구하겠다고? 안 구할거야 라고 안구해지는게 아니라
구하든 안구하든 이미 임마누엘이 떳고
한 아기가 떳기 때문에
하나님이 불의하냐 정결하냐
하나님이 진노를 퍼붓냐 안퍼붓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진노 자체가 떳고
한 아기가 떳다는 그 이유로
우리는 원하든 원치않든 상관없이
흑암의 백성의 자리에 놓여지는 재배치를 통해서
이 우상을 어떻게 해결하시는지를 보게 되는
역사가 아닌 묵시의 활동상을, 약속이 스스로 실행하시는
약속이 약속을 이루시는 그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이스라엘로 태어난 것이 복인 줄 알아라 말이죠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야곱아 이스라엘아 라고 부르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운 좋은 줄 알아라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소유에서 나오고
시공간의 역사에서 나왔기에
예루살렘을 떡 하니 차지하면 되는줄 알았는데
오히려 지금 쫏겨나면서 도리어 쫏겨나는 것이 복인줄 알아라 라고 하신다 말이죠
왜? 다시 되 찾겠다는 겁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너거들이 싸놓은 똥에 예루살렘을 청소해서 다시 들여놓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이 묵시가 펼쳐지는 그 속에 놓여지는
양탄자를 탄 것이 복인줄 알아라 라는 거죠
하나님의 진노 라는 양탄자 말이죠
그러니 칠천을 남겨놓지 않았다면 너 벌써 끝났어
이 칠천을 남겨놓으신 것이 복인줄 알아라 라는 겁니다.
일곱은 바로 이런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으로 인해
완벽한 하나님의 진노가 덮쳐지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심판으로 인해 죽음으로 인해
다시 살리는 하나님의 완벽한 거룩으로
새롭게 맺는 이 약속이
저 우상에게 없는 하나님의 의 이라는 겁니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의 말이죠
그러니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다는 겁니다.
죄가 없어도 물론 없을 리가 없지요
자기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역사 속에서 저질러 놓는 과거의 행적으로써의 죄가 아니라
그 반대로 일곱이 떳다는 그 이유로 무조건 죄인으로 만들어지고
이 일곱의 기능 때문에
미래완료에서 오는 죄, 다 이루었다는 말하기 위해서 다 이루었다에서 나오는 환자라는 기능
곧 의사를 외치는 저분이 나를 제대로 고치신 나의 죄악을 나의 우상숭배라는 질고를 고치신 분이다 라고
하나님의 심판을 진노를 받아야 하고
다시 하나님의 거룩인 의가 덮쳐져서 다시 살아나야만 하기에
이 일곱이 옳았다를 외치기 위해서 노래하기 위해서
다말 그가 나보다 옳도다 를 말하기 위해서
죄인이라는 미래완료가 설정하는 자리에 놓여지는 겁니다.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의사가 규정해 놓는 환자의 자리에 놓여지지
의사도 없이 지 마음대로 환자의 자리 죄인의 자리를
자기 마음대로 설정할 수가 없다 말이죠
그건 보험사기단이요 자해공갈단이다 말이죠
아버지의 징계 라는 관계가 아니라, 약속에게서 나온게 아니라
지 마음대로 사생자처럼 자기 스스로 회초리를 자기가 자기를 때려요
바알과 아세라 850명이 그렇게 자학을 하잖아요
그게 종교이고 그게 우상 아니냐 말이죠
어딜 속일려고 드냐 말이죠
인간 쪽에서는 안되는데 되었다고 우기니 참 나
그러니 배신 당했다고 울부짖고 이를 갈고 있더라 말이죠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그러고 있는데
주변인들은 광명한 천사의 탈에 다들 속고 있으니
도대체 십자가가 밝히 보여주지도 않는가봐
그 정도로 우리는 우상숭배에서 못 벗어나기에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 심판이 아니면 몰랐을 꺼다 말이죠
누가 벌거벗었냐 말이죠
우리 아닙니까 그런데 이사야 보고 발가벗었데
그것을 우리 눈이 봤다고 우기고
우리 귀가 들었다고 우겨요
맞잖아요 본 것이 맞고 들은 것이 맞다 말이죠
맞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틀리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너가 발가벗었다고 보여주는 거울로써 율법과 선지자이다는 겁니다.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로써 예수님이 아니라
너가 바로 하나님의 저주 받았다고 보여주는 반사거울이다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남을 저주 하기 바쁘고 남을 심판하기 바빠요
우상숭배자는 바로 나 인데
그런 나에게 속아서
나는 하나님의 저주를
하나님의 진노를 안 받고 있다는 것 자체가
저주인줄도 모르고
오히려 저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가 옳았다고 외치도록 만드시겠다는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우리를 우상에게서 빼앗기지 않겠다고
대신 죄값을 치르시고자
원수에게 내어주신바 된 거다 말이죠
이 척박한 땅으로 안 만드셨다면
우리는 아버지의 징계를 받는 아들이 아니라
징계가 없는 사생아로써 지옥 갈뻔 한 아찔하기 짝이 없는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거다 말이죠
다행히도 척박한 땅을 만드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비로소 보게 됨으로써
아 약속의 땅을 포기하시지 않으셨구나
굶주림에 자기팔을 자기가 먹고
이웃이 이웃을 잡아먹는
이런 참혹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놓여졌다는
하나님의 진노가 맹렬하게 쉬지도 않고 퍼부어진다는 자체가
(사 9:15, 개역) 『머리는 곧 장로와 존귀한 자요 꼬리는 곧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라』
(사 9:16, 개역) 『백성을 인도하는 자가 그들로 미혹케 하니 인도를 받는 자가 멸망을 당하는도다』
(사 9:19, 개역) 『만군의 여호와의 진노로 인하여 이 땅이 소화되리니 백성은 불에 타는 섶나무와 같을 것이라 사람이 그 형제를 아끼지 아니하며』
(사 9:20, 개역) 『우편으로 움킬지라도 주리고 좌편으로 먹을지라도 배부르지 못하여 각각 자기 팔의 고기를 먹을 것이며』
(사 9:21, 개역) 『므낫세는 에브라임을, 에브라임은 므낫세를 먹을 것이요 또 그들이 합하여 유다를 치리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약속은 살아 있지
우상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시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약속 그 자체로써
우상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주님의 의지를 보여주시고
그것을 알려주시고자
관계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너무나도 너무나도 즐거운 기쁜 소식이 아닐수 없습니다.
이 쉬지도 않는 하나님의 진노가 아니였다면 말이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히 12:5, 개역)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6, 개역)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이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히 12:7, 개역)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히 12:8, 개역)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히 12:9, 개역)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히 12:10, 개역)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히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계 3:19, 개역)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