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여호와의 의로운 맹세 (사 45:22-25)
모든 혀가 맹약하는, 돌아오지 않는(이미 성취되어 마침이 된) 여호와의 의로운 맹세 (사 45:22-25)
모든 사람의 무릎을 꿇게 만드는 남겨둔 한 아기(십자가라는 기묘와 모사)의 맹세 성취
(사 45:23, 개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사 45:23, 새번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한다. 나의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이 거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빌 2:10, 새번역)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 ㉡사 45:23(칠십인역)』
(사 45:23, 공동) 『내가 나의 이름을 걸어 맹세한다. 내 입에서 나가는 말은 틀림이 없다. 내 말은 반드시 그대로 이루어지고야 만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나에게 무릎을 꿇고 모든 민족들이 제 나라 말로 나에게 신앙을 고백하리라.』
(롬 14:11, 개역)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롬 14:11, 새번역)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다. 내가 살아 있으니, 모든 무릎이 내 앞에 꿇을 것이요, 모든 입이 나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 ㉥사 49:18; 45:23(칠십인역)』
(롬 14:11, 공동) 『성서에도, "㉠정녕 나는 모든 무릎을 내 앞에 꿇게 하고 모든 입이 나를 하느님으로 찬미하게 하리라." 한 주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 ㉠이사 45:23.』
(사 45:22, 개역)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3, 개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하기를 나의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은즉 돌아오지 아니하나니 내게 모든 무릎이 꿇겠고 모든 혀가 맹약하리라 하였노라』
(사 45:24, 개역) 『어떤 자의 내게 대한 말에 의와 힘은 여호와께만 있나니 사람들은 그에게로 나아갈 것이라 무릇 그를 노하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리라마는』
(사 45:25, 개역) 『이스라엘 자손은 다 여호와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자랑하리라 하느니라 하셨느니라』
(사 45:22, 새번역)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서 구원을 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나 밖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사 45:23, 새번역) 『내가 나를 두고 맹세한다. 나의 입에서 공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이 거저 되돌아오지는 않는다." 모두가 내 앞에 무릎을 꿇을 것이다. 모두들 나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다.』
(사 45:24, 새번역) 『'참으로 주님께만 공의와 능력이 있다'고 사람들이 나에게 고백할 것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올 것이나, 그에게 대항하던 자들은 모두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사 45:25,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모두 주 안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영예를 얻을 것이다.』
지난 주에 숨어계신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이 숨어계신 하나님과 오늘 나오는 모든 무릎을 꿇게하고 모든 혀가 맹약 맹세 신앙고백케 만드는
한번 나가버려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처음과 나중이 또렷한
마침이 되는, 다 이룬바 되는, 의로운 맹세와 연결이 되기에
또 맹세에 대해서 마태복음에서 다루었기에
바로 이사야 46장으로 넘어가지 않고 마침 딱 맞아서
이 돌아오지 않는 맹세에 대해서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숨어계신 하나님과 그럼 대조를 이루는 상대적인 한 세트로 구성된 것이 뭡니까?
네 맞습니다. 바로 숨어있지 않은 하나님입니다.
곧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하나님 곧 기적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여줄 하나님은 스스로 숨어계신
싫어버린바 된 하나님
곧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하나님이 없는 겁니다.
이것을 우상숭배자인 개같은 이방인에게서는 찾을 수 없겠지요
그들은 아예 여호와 하나님을 모르니까 말이죠
자 그럼? 네 맞습니다. 이스라엘 곧 유대인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누구를? 우상숭배화 된 숨어있지 않은 하나님을 말이죠
아하스 왕이 그래서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듯이
이미 산당을 시온산 가득 까가득 채워 버렸으니 그 믿는 구석이 들통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악적인 언어로 선한말을 해도
그것이 악한 말인줄 모르는 이유는
주님은 우리를 안 보시고, 상대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우리 속에 있는 선악 곧 하나님과 같이 된
죄만을 상대하시고 다루신다 말이죠
그러니 겉으로는 오히려 가장 우상숭배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로 껍데기를 갖추어도
속으로는 가장 우상숭배자로 도배가 되어 있음을 아시기에
(그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삼가하라 라고 하셨듯이)
그것을 까발리는 지혜가 곧 기묘와 모사가 바로
정반대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차이로써 말이죠
그러니 다들 숨어있지 않고 나타나는 하나님를 바라고 있는 그 가운데
(특히 마태복음 4장의 메시아에 대한 기대를 마귀가 대신 보여주잖아요
이런 이런 메시아가 되어 다오 라고 말이죠)
정작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숨어계신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즉 듣기는 들어도 깨달을수 없는 모습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는 모습세미한 음성으로 오신다는 겁니다.
분명 눈에 보이는데 안 보여요
분명 들었는데 안 들려요
이것이 바로 숨어계신 하나님으로써
오늘 나오는 의로운 맹세, 여호와 자신의 맹세로 오신다는 겁니다.
자 그럼 이 의로우신 맹세는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들이 맹세를 남발하는 그 상황에서
저마다 자신들의 맹세를 이루고자 하는 그 모습을 카페트로 깔고서
그 위에 오신다는 겁니다.
그럼 당연히 모든 무릎이 모든 혀가 안 꿇고 충성을 맹약하지 않을 거 잖아요
그런데 모든 무릎이 꿇는데요 글쎄
모든 혀가 충성을 맹세한데요 글쎄
이상하죠
모든 무릎이 안 꿇었고 모든 혀가 맹약하지 않았는데
그렇게 규정하자마자
보셨죠 아무도 십자가에
여호와의 맹세완료에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 무릎 꿇는자 없는지 봤죠 라고
예수님에게 따지니까
예수님은 뒤 돌아 보라고 하니
따진 자가 뒤 돌아 보니까 다들 무릎이 박살이 나서 다들 항복 항복 하더라 말이죠
분명 십자가에 예수님을 못 박아 죽여서 인간들의 맹세가
곧 인간의 맹세는 반드시 예수님을 죽이고야 말겠다 라는 맹세 뿐이기에
그랬던 자들이 오히려 십자가로 인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성취가 되어버린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앞에 무릎이 다들 박살이 나서 충성하겠다고 항복 항복을 외치더라 말이죠
결론을 내자마자 바로 역전이 되어서
모든 무릎이 다 꿇어요
모든 혀가 맹세를 해요 글쎄
그럼 안들렸는데 듣기게 되고 마치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말이 안되잖아요 날때 부터 귀머거리인데?
그럼 안보였는데 보이게 되니 마치 눈먼자는 볼 것이요 처럼 말이죠 말이 안되잖아요 날때 부터 소경인데?
(마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 15:29,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사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산에 올라가 거기 앉으시니』
(마 15:30, 개역) 『큰 무리가 절뚝발이와 불구자와 소경과 벙어리와 기타 여럿을 데리고 와서 예수의 발 앞에 두매 고쳐 주시니』
(마 15:31, 개역) 『벙어리가 말하고 불구자가 건전하고 절뚝발이가 걸으며 소경이 보는 것을 무리가 보고 기이히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새번역)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시 8:2(칠십인역)』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결국 소경 아니다고 하는 건강한 눈은 건강한 귀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수 없고
도리어 소경 맞습니다 고쳐주세요 귀머거리 맞습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환자입니다 죄인입니다 라고 제발 고쳐주세요 라고 하는 눈과 귀는
안들리는데 듣게 되고
안보이는데 보게 됨으로써
여기서 중요합니다.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우기는 이스라엘은
이 예수님의 의로운 맹세가 실현되는 것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이 십자가를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고
도리어 섬들아 주를 앙망하라
섬이 뭡니까 고립된 섬은 우상숭배자들을 칭하는 의미 아닙니까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땅끝 까지 흩어진 자들아주 여호와를 앙망하라
곧 땅끝 백성이 뭡니까? 흑망의 백성이요
사망의 그늘에 폭삭 주저앉은 자요
개같은 이방인 곧 갈릴리 스볼론 땅 납달리 땅 개같은 이방인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이들에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이 우상숭배자들에게
주님의 맹세 다 이루신 맹세가 덮쳐지니까
이 십자가를 하나님의 영광으로써 자랑하더라 말이죠 모든 혀로 말이죠
저들 우상숭배자가 아니다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고 하는 유대인은
여호와의 완료된 맹세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부끄러워 하며 거리끼는 걸림돌로 여기는데 말이죠
반드시 상대적인 차이로써 두 언약으로 증거되더라 말이죠
(사 45:22, 개역)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2, 새번역)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서 구원을 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나 밖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에게 빛이 비추었고
스스로 숨어계신 하나님이 나타났고
(안보이는데 나타난 것을 이스라엘 백성은 못보고 지옥백성인 우상숭배자들은 보고있고)
찬송가에도 나오잖아요
그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나 알 위해 지셨네
이것이 오늘 본문의 제목인 한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이미 성취가 되어버려 마침이 되는
여호와의 의로운 맹세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맹세는 마침이 없어요 늘 의문을 반복만 할 뿐이다 말이죠
참말로 이사야서는 정말 기이해요
숭고해요 숭고 곧 거룩은 거룩인데 그냥 거룩이 아니라
나의 모든 더러움을 까발려서 자신의 거룩으로 덮어 씌우는 거룩이기에
나의 가짜 거룩으로 포장된 것을 못 까발린다면 숭고함이 아니다는 겁니다.
숭고 崧高 숭 위대하고 장엄할 숭, 숭배 할 때 그 숭이다 말이죠
그리고 고 고귀하고 고차원적이고 높다
마치
시온 산이 세상의 중심이듯이
이 시온에서 율법 곧 거룩이 나오는데 (예루살렘은 말씀이 나오고요)
그냥 거룩이 아니라
그렇게 되면 인간은 마치 바로 구름타고 오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지나개나 다 영접하도록 되어 있기에
자신의 죄악을 안 들키고도 충분히 내 쪽에서 인간 쪽에서 영접할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동질성 합일성으로 접속이 가능한데
아무리 봐도 접속 자체가 단절된 모습
곧 싫어버린바 된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흠모할 모양이 전혀 없는
그야말로 고개를 돌릴수 밖에 없는 공포 그 자체의 모습으로
그저 우상조각하다가 떨어져 나간 돌삐
가치없는 쓸모 없는 돌삐
건축자들이 쓸모없다고 여겨 버린 돌로써
머릿돌 로 오실때에
숭고 곧 철학자들은 이것을 공포에서 온다고 합니다.
인간 쪽에서 두려워 하는 두려움에서 불안에서 오는 공포가 아니라
대상이 거꾸로 정반대로써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으로써 그러니 사랑 보다 더 강한 폭력이 없다는 거죠
죽음은 폭력 축에도 못 끼인다는 겁니다.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이 폭력으로써
그냥 거룩은
마치 아름다움은 그냥 아름답구나 라고 나를 기분좋게 만들 뿐이고
그것을 따라하고 흉내내는 접속이 가능하지만
즉 내 쪽에서 충분하게 대상물로 삼아서 충분히 다루고 충분히 감당할수가 있지만
이 숭고는 아름다움을 넘어서서 공포로 폭력으로 다가와서
내가 대상물로 삼는 거룩이 아니라
따라하고 흉내내고 동질성으로 추구할수 있는 그런 거룩이 아니라
아예 차단 된 아예 단절된
불가능성으로써
공포로 폭력으로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부정의 부정)으로 다가올정도로
도리어 내가 대상물이 되어서
반드시 나를 압도해버리고 나를 작게 만들어 버리는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모든 혀가 맹세 아니하고는
찬양 아니하고는 못 배기도록
애모를 저절로 부르게 된다 말이죠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는가?
그대 등 뒤에 서면 내 눈은 젖어드는데 꼭 우는자로 만드는 천국 같아!!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렘 31:22, 새번역) 『너 방종한 딸아, 네가 언제까지 방황하겠느냐? 주님께서 이 땅에 새 것을 창조하셨으니, 그것은 곧 여자가 남자를 ㉡안는 것이다." / ㉡또는 '보호하는'』
이 예레미야 말씀에 딱 맞아요
당신은 나의 남자여 ~~~~~ 나는 당신의 여자요 ~~
이 한번 나가버린 맹세 다시는 돌아올수 없도록 아예 성취가 되도록 다 이루어짐이 되도록
사랑의 완성인
율법의 완성이 뜨인돌로써 시온에서 나오는 겁니다.
이 결혼은 누구 끊을수 있겠냐 말이죠
모든 무릎을 꿇게 하는
원수의 전에서 상을 베푸시겠다고
마귀 보란 듯이 펼쳐지는 결혼이다는 겁니다.
(시 23:5, 개역)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새번역)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시 23:5, 공동) 『원수들 보라는 듯 상을 차려주시고, 기름 부어 내 머리에 발라주시니, 내 잔이 넘치옵니다.』
(시 23:5, 쉬운) 『주님께서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식탁을 차려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 머리 위에 향기로운 기름을 바르시며 내 잔이 넘치도록 가득 채워 주십니다.』
(시 23:5, 한글킹) 『주께서 내 원수들의 면전에서 내 앞에 식탁을 마련하셨나이다. 주께서 내 머리에 기름으로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 23:5, 현대인) 『주께서 내 원수들이 보는 가운데 나를 위해 잔치를 베푸시고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셨으니 내 잔이 넘치는구나.』
(시 23:5, 현대어) 『원수들 두 눈 뜨고 쳐다보는데 보란듯 이것 앞에 잔칫상 차려 주시고 귀한 손님 대접하듯 기름 발라주시며 잔이 흘러 넘치라 하고 부어 주시네.』
벙어리도 귀머거리도 소경도 그 앞에서 번쩍 놀라서
눈이 띄여져서 무릎 꿇고
귀머거리도 듣고 놀라서 무릎 꿇고
벙어리도 건방지게 벙어리로 남아서 찬양못한다고 핑계치 못할 정도로
입을 열어서 반드시 찬양케 만들어 버릴정도로 압도해 버리는
그야 말로 공포 중에 가장 큰 공포, 폭력 중에 가장 큰 폭력으로써의 거룩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욥이 격었잖아요
아참 맞다 지난 주일에 하나 빠뜨린게 있는데
이상한 것 하나 발견했거든요
(히 12:11, 개역)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히 12:12, 개역)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히 12:13, 개역)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히 12:14, 개역)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바로 이 부분입니다.
말씀을 나누는 중에 또 막 생각이 났어요
고난이 글쎄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운데요 글쎄
말이 됩니까?
성경 말씀은 말이 되는 것이 단 하나도 없어요
말이 안되는 것만 골라 골라 골라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고난이 과연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울까요?
아니잖아요!
오히려 고난이 피곤하게 만들어 버리고
오히려 고난이 무릎을 일으켜 세우기는커녕 거꾸로 무릎이 펴지지 않도록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리잖아요
꼭 엘리야가 제단에 불 붙게 할려고 마른장작 나무에 물을 일부러 붓는것 같아
인간의 그 어떤 믿음도 다 차단하는 식이다 말이죠
인간의 종교성은 선악이기에
악한 세대는 기적을 바라거든요
기적의 요소를 다 제거해 버려요
아 그런데 뭘 믿고 성경말씀은 이렇게 반대로 거룩하시는 것일까요?
인간의 인식과 완전정반대 이잖아요
왜냐하면 이 징계가 바로 진짜 사랑이기에
죽여버려서 다시 살리신다는 주님의 의 곧 인애와 자비이다는 겁니다.
거봐 거봐 죽이잖아요
그럼 피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 맞네
거봐 거봐 무릎을 펴기는커녕 다시는 펴지지 못하도록 죽여버리니 아예 꺽어버리니
펴진다는 자체가 아예 의미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앉은뱅이로 만들어 버리네
이렇게 죽은자로 죽은태로 죽은자와 방불한 자로 만드시는 이유가 뭘까요?
그야 말로 숭고 곧 폭력, 공포가 아니고 뭐냐 말이죠
그런데 이 죽음 속에서 살아나온 사람이 없으면 모르겠는데
살아 난 사람이 있다 보니까 뭐라 반박을 못하겠다 말이죠
욥도 그랬구요
이사야가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압도 당해서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천사처럼
마치 여섯 날개로를 이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당해서
안죽을려고 다 가리면서도 동시에
입으로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고 있으니 말이죠
얼마나 공포스러울까요?
타 죽을까봐 싶어서 천사가 여섯 날개로 가리고 있는 판국인데
그 영광 앞에서
이 나약하기 짝이 없는
풀과 같은 인생에게 영광의 빛이 비추어 졌으니
이건 뭐 풀에 불을 갖다 대 보세요
바로 홀라당 타버린다 말이죠
그런 가시떨기 나무의 빛으로만 나타내시겠다고 하시니
우리는 안 죽고 배기겠습니까?
오히려 안 죽는게 비정상이다 말이죠
욥이 이 거룩 곧 숭고한 거룩이 덮쳐지는 바람에
자신의 되도 않는 의로움은 모조리 다 거짓으로 판명이 나면서
다 토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라는 둥 이런 헛맹세도 다 토해내도록 말이죠
어딜 감히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의로운 맹세인 주님의 맹세 앞에
그딴 되도 않는 인간의 의로움 인간의 맹세를 가지고 오느냐 말이죠
이 애매한 고난이 과연 욥의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절망으로 가득한 욥의 입술을 과연 신나게 자랑하는 혀로 과연 만들수 있겠냐 말이죠
그것도 모잘라서 독수리 같이 날개를 펴서 높이 높이 나를수 있겠냐 말이죠
이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피곤치 않는 발 걸어가도 고단치 않는 아름다운 발이 되겠냐 말이죠?
우는 자가 어떻게 복이 되겠냐 말이죠
재처럼 다 타버린 죽은자가 어떻게 화관을 쓴 순결한 신부가 되겠냐 말이죠
어떻게 근심이 고난이 찬양이 되겠냐 말이죠
그런데 여호와의 맹세는 이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선포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한 세트가 되는 인간의 맹세는
믿고픈것만 믿고 보고픈것만 보고 듣고픈것만 듣고
맹세하고픈것 맹세를 골라 골라 해서
그저 자기 하나 구원받고자 고난 자체를 피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죽은 적도 없으니 다시 사는 여호와의 의와 곧 거룩과 무관하게
따로 국밥의 거룩을 실천했노라 라고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부자청년이 그 사회를 대표하면서
그 사람들이 율법 해석이 다 이런 식임에 있어서
과연 율법의 완성인 사랑 곧 죽음 보다 강한 이 폭력적인 사랑을 나타내보라 라고 했을때에
전재산을 커녕 밥 한 톨이라도 가난한 자에게 줄수 없는
완악함이 들통나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맹세로써 헛맹세가 들틍나는 거죠
마침이 없어요
아직도 전재산을 무슨 수로 나눌수 있는지 이 의문의 증서에 답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리신 겁니다.
듣고 보고 깨달아 고침이 될까 주님은 두려워 하셨거든요
약속이 맞아야지 박살이 나면 안되니까 말이죠
그 인간의 의로움 거룩이 과연 죽은자를 살려낼수 있냐 말이죠
뭐 남을 7번 용서했다 굽쇼? 과연 부자청년처럼 어릴적 부터 율법 다 지킨것 맞는지 따져 볼까요?
과연 남을 7번 이라도 용서 했는것 맞는지 볼까요?
전재산을 우리의 아들 딸을 죽은 세월호 사건에 무책임으로 일관한 닭그네에게 전재산을 나누어 주듯이
용서를 할 수 있을까요?
택도 없어요
나의 가족이 죽어가는데 방관한, 살인을 방조한 자인데????
오냐 진짜 돌아오지 않는 맹세 한번 당해보라고
그 남을 7번 용서했다고 나서는 그 당사자를
주님의 맹세로써 죽였다가 다시 살려버리니까
이 압도적은 공포인 숭고 괴기스러운 거룩 앞에서
남을 7번 용서하기는커녕 도리어 7에 70번 용서 해 달라고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주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찬양하는 겁니다.
남이 아닌 나를 원수로 만들어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라 라고 했을때에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인데???
내가 내 아들 딸을 죽인 내가 살인자로써
다가오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인데?
죄책감요? 자살요? 그것은 여전히 무책임한 겁니다.
그렇다고 책임지라는게 아니라
이 모든 것을 책임을 다 져버리신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라는 겁니다.
원수로써 말이죠
교회 다니면요 원수로써 십자가의 피 용서를 보는게 아니라
교회 속에서 가장 잘 믿는 자로써 십자가를 볼려고 하니
오히려 가장 우상숭배자임이 드러나더라 말이죠
안그러는 자가 없어요
정작 십자가는 원수를 찾는데
다들 의인 찾는 줄 알고
그 분위기를 조장해요 글쎄
그러니 똑똑한 목사는 벌써 눈치를 채고서 아예 십자가를 떼어버리죠
진작 카지
십자가 십자가 고만캐라 마이 무따 아이가 ~~~
자 이렇듯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이다는 자가
거룩한 자이다 라는 자가 오히려
이미 다 이루어진 맹세인 십자가를 찬양하는 자일까요?
아니면 거리끼는 걸림돌로 건축자들이 버리는 돌처럼 삼을까요?
머릿돌로 과연 여길까요? 마침이 되는 율법의 완성으로 여길까요?
율법이 완성이 되어버리면 자신들의 직장이 다 날라가요
마침이 되고 단번에 제사가 다 끝나버렸거든요
그래도 원할까요?
이사야 선지자 곧 선지자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을 날려버려요 해체시켜버려요
그럼 자기의 직장이 날라가 버리니까
누가 과연 제일 싫어할까요?
거짓선지자인것 처럼 오늘날 누가 교회가 해체되는 것을 누가 제일 싫어할까요?
자 그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찬양하는
이 말도 안되는 불가능성을 노래하는 자가 누구일까요?
정작 교회다니는 사람은 못해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아니올시다
이들은 의인이요 건강한 자이다고 우기기에 말이죠
정반대입니다.
흑암의 백성이요
눈먼자 소경이요
벙어리요
귀머거리인
이들이 글쎄 찬양을 더 잘해요
저들이 때려죽어도 못 부르는 새노래를
이 여호와의 다 이루어진 맹세인 십자가를 노래하는 자는
죄인 밖에 없어요
그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십자가를 찬양하는 자를 부르러 오셨다 말이죠
왜? 유대인들을 시기케 만드는 찬양이니까 말이죠
수천년 동안 찬양 악보 볼줄 알고
성악 테크닉 배웠고 그 기술을 전수 했고
온갖 모든 악기를 다 동원했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들에게서는 소리가 안나요
목에 탁 걸려서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않아요
경계를 치는 자들이니까 말이죠
우상숭배하는 우상을 찬양하는 자이기 때문이거든요
그런데 벙어리가 방금 입이 뜨여져서 찬양을 하고
눈먼자가 방금 눈을 떠서 콩나물 악보를 볼줄도 모르는데
수천년의 기술 정통 정통 우려먹는 자들보다 더 찬양을 잘하고
맞습니다 저 개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먹지 않습니까 라고
주님을 단 한번도 부른 적도 없는 자들이 주의 이름을 제대로 찬미할 줄 아는데
왜 유대인은, 이스라엘은, 교회 다니는 자들은, 주님을 찬양할 줄도 모를까요?
왜 총명함이 없어서 기묘라 모사라 이 모사가 없어서
저 짐승의 수를 세지 못하고
십사만 사천에 들어가지 않을려고 하고
새노래를 부를려고 하지 않을려고 하고
그저
강도의 소굴 쌓기에 바쁘고
강도의 소굴에서
오히려 예수님이 눈먼자 앉은뱅이를 고치시는 그 일에 분노를 하고 덤벼들까요?
병고치는것 반대하는게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찬성해요
그런데 왜 하필이면 안식일날만 골라서 하냐 말이죠
평상시에는 천사들이다 말이죠
안식일만 되면 화를 내면서 교통체증에 동원이 된 경찰들의 멱살을 잡고 주먹으로 칠려고 하냐 말이죠
이슬람도 유대교도 주일성수로 사기치는 기독교도 안그러는 종교가 없어요
종교란 광명한 천사의 탈을 쓴 늑대 짐승이다 말이죠
거룩한 성전의 거룩측량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찬양하지 못하고
반대로 거룩측량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제일 끝의 사람이 오히려 주님을 찬양해요
이것이 주님의 맹세가 이루어짐을 입은자들이고
저들은 자기 맹세를 지키기 바빠서
주님의 맹세가 이루어지면 안된다고
자기 밥줄 날라간다고
계속해서 미완료로 남겨두어야
자기 직장이 안 날라가 버린다 말이죠
의문으로 남겨두는 겁니다.
십자가 십자가 고만캐라 마이 무따 아이가
엘리야 엘리사처럼 선지자는
고아 과부 문둥병자에게만 예수님은 보내심을 받은 것일까요?
왜 땅 끝의 모든 백성인 죄인에게만 보내심을 받아서 그들만이 주를 앙망하고
정작 이스라엘 백성인 건강한자 의인인 자는 왜 주를 앙망하지 못할까요?
(사 45:22, 개역)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며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
(사 45:22, 새번역) 『땅 끝까지 흩어져 있는 사람들아! 모두 나에게 돌아와서 구원을 받아라. "내가 하나님이며, 나 밖에 다른 신은 없기 때문이다.』
이 새 일을 누가 가장 싫어할까요?
이 새 일 곧 팔을 어긋맞게 하시는 이 새 일 곧 여호와의 맹세 완료를 누가 싫어할까요?
누구든지 주를 믿는자는 구원을 얻는데
(기생라합 아닙니까 사도행전 2장 21절은 무조건 기생라합을 생각하시면 딱이다 말이죠
기생라합도 찬양하는데 왜 이스라엘은 못할까요?)
(행 2:20, 개역)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행 2:21,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 새번역)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마지막 날에 나는 내 영을 모든 사람에게 부어 주겠다. 너희의 아들들과 너희의 딸들은 예언을 하고,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꿀 것이다. / ㉣욜 2:28-32(칠십인역)』
(행 2:18, 새번역) 『그 날에 나는 내 영을 내 남종들과 내 여종들에게도 부어 주겠으니, 그들도 예언을 할 것이다.』
(행 2:19, 새번역) 『또 나는 위로 하늘에 놀라운 일을 나타내고, 아래로 땅에 징조를 나타낼 것이니, 곧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이다.』
(행 2:20, 새번역) 『주님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오기 전에, 해는 변해서 어두움이 되고, 달은 변해서 피가 될 것이다.』
(행 2:21, 새번역) 『그러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다.'』
(행 2:22, 새번역)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이 말을 들으십시오.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께서 기적과 놀라운 일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증명해 보이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 ㉤그, '이스라엘 남자들' ㉥그, '나사렛 사람'』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롬 10:9, 개역)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롬 10:10, 개역)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11, 개역)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사 28:16(칠십인역)
(롬 10:12, 개역)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롬 10:13, 개역)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욜 2:32
(롬 10:14, 개역)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5, 개역)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사 52:7
(롬 10:16, 개역) 『그러나 저희가 다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가로되 주여 우리의 전하는 바를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사 53:1
(롬 10:17, 개역)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8, 개역)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시 19:4
(롬 10:19, 개역)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신 32:21
(롬 10:20, 개역)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사 65:1
(롬 10:21, 개역)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사 65:2
(사 65:1, 개역)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게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사 65:2, 개역)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벧전 2:6, 쉬운) 『성경에 이와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시온에 주춧돌을 놓고, 이 보배로운 돌 위에 모든 것을 세울 것이다. 누구든지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결코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왜 교회다니는자 이스라엘 유대인은 왜 사단의 회로만 고집을 피울까요?
이것이 바로 맹세의 달인인 우상숭배자 곧 바리새인의 의 가 아닌
바리새인의 의 보다 더 나은 의로써 오신
이미 실현된 맹세로 오신 여호와의 맹세이다 말이죠
이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여호와의 맹세를 안 쳐다보고
자신의 맹세지키기 라는 속임수 꾀로
십자가를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상을 숭배하고 있기 때문에
임마누엘의 징조를 안구하는 겁니다.
여전히 의인이라고 배불러 있다는 거죠, 남을 7번 용서 해 보라 말이죠. 배부른 소리 해 보라 말이죠.
우는 자가 아니기에 천국이 없고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슬픔 대신 희락을)
다 타버린 잿더미가 아니기에 남겨둔 씨를 못 보고 (재 대신 화관을,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반석)
고난 속에 있지 않기에 사생자처럼 새노래를 못하는 겁니다.(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오히려 이 돌아오지 않는 맹세 앞에
주여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울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판국인 죄인 중의 괴수 이다 말이죠
그러나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인간의 맹세는
우상숭배로 성령을 훼방하는 훼방꾼으로
단 한번도 이룬적 없이 그저 맹세 한 것으로만 남아, 그 의문의 반복을 서로 서로가 용납하는 사회를 구성해 버린
사단의 회로써 강도의 소굴로써 자리잡은 것을 뭐 대단한 거룩인냥 떠들고 다니면서
저 세리와 같지 않다고 경계선을 쳐서
대 놓고 우상숭배자임을 자랑하고 있는 강도의 소굴이다 말이죠
섬이다 우상숭배이다는 겁니다.
그래놓고 남 보고 우상숭배자 래요 글쎄 ~~~~~
섬들처럼 고립이 된 우상숭배자임을 도리어 자랑하고 돌아다니더라 말이죠
두루 두루 소경이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 들어가게 만드는
삥뜯는 토색하는 세리가 자기들이면서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할 정도로
우리는 어두운 눈이다 말이죠
고쳐 달라고 울어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라샤 ~~~~~~~~
정작 그들이 욕하고 있는 살인하고 있는
저 섬들은
저 땅끝 백성
흑암의 백성에게는 빛이 비추었는데
이유 없이 무조건 눈 떠서 볼수 밖에 없도록 눈이 부신데 ~~~
그럼 나사렛 예수 이름을 따를려고 하니
이 나사렛이 너무 너무 더러워서 따를수가 없는 겁니다.
이게 숭고다 말이죠 거룩이다 말이죠
자신들의 거룩과 안 맞아요 단 하나도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과 단 하나도 안 맞는다 말이죠
똥물에 7번을 어떻게 담굴수가 있겠냐 말이죠
그것도 간따나 피부병인 문둥병자인데
피부병을 더더욱 번질려고?
죽으라는 소리 아니냐 말이죠
욥이 잠도 못자면서 빡빡 끌어대는데
거기에다가 똥물 퍼붓듯이
새까맣게 타 버린 죄악의 잿가루를 뿌린다굽쇼?
피부병 더 번질려고?
잠을 아예 안잘려고?
죽으면 죽으리라 라고
더더욱 죽음 속에서 빠져나오는게 아니라
더더욱 죽음 속으로 들어가겠다고?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진노 속에 더더욱 들어가겠다고?
이미 여호와의 맹세가 다 이루어졌거든요
이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다고?
한 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의로운 맹세라고?
유일하게 실현되는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그 나사렛 곧 선한 것이 날수 없는 더럽기 짝이 없는 이름이?
안그러면 인간은 그저 아름다움을 보고
그 아름다운을 대상물로 삼아서 자기의 즐거움을 위해
아름다움을 볼줄 아는 눈으로 포작해서
자신에게 그 아름다움을 선사해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듯이
자신에게 맛나는 음식을 제공해 주듯이
여전히 자기가 의미가 있도록 모든 것을 대상물로 삼아
좋은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을 구분 시켜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을 버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낙타) 부자를 등쳐먹는 이 가짜 거룩을
도리어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숭고함 곧 공포로써 다가와
압도적으로 나는 작게 만들어버려서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작아지지?
욥도 이 숭고한 애매한 고난 때문에
흑암의 백성이 되어야만 흑암의 백성에게 비추이는 빛으로 인해
고난 속에서 힘을 얻고
고난 속에서 무릎이 펴지는
이 말도 안되는
이 새 일을 나타내시는
한번 나가면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맹세를 도리어 외치는
자신의 헛된 맹세를 손놓고서
제대로 된 찬양을
벙어리가 되어서 찬양하고
눈먼자가 되어서 찬양하고
죄인이 되어서 찬양하는
이 하나님의 의 곧 인애와 자비인 불쌍히 여겨주심에 놓여지게 되더라 말이죠
(사 43:19, 개역)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65:17, 개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43:18, 개역)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사 43:19, 개역)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사 43:20, 개역)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
(사 43:21, 개역)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사 43:22, 개역)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이스라엘아 너는 나를 괴로워하였으며』
(사 43:23, 개역)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 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사 43:24, 개역)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 짐으로 나를 수고롭게 하며 네 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
(사 43:25, 개역)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사 43:26, 개역) 『너는 나로 기억이 나게 하고 서로 변론하자 너는 네 일을 말하여 의를 나타내라』
(사 43:27, 개역) 『네 시조가 범죄하였고 너의 교사들이 나를 배역하였나니』
(사 43:28, 개역) 『그러므로 내가 성소의 어른들로 욕을 보게 하며 야곱으로 저주를 입게 하며 이스라엘로 비방거리가 되게 하리라』
그래서 인간의 의로움 인간의 맹세가 아니라
그들은 일부러라도 광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말이죠
그런데 하나님의 맹세 돌아오지 않는 한 번 나가버린 의로움은
이미 성취된 채로 나타나기에
일부러 광야에서 길을 내고
죽음에서 길을 내요 글쎄 마르다 마리아에게 내가 부활이다 라고
반드시 인간의 가짜 믿음인 부활교리와 상대적인 내가 부활 그 자체이다 라고
나사로를 살려내듯이
광야에서 길을 내고
또 반드시 사막에서 샘물을 넘치게 한다 말이죠
아니 지옥에서는 물 한방울도 없는데
지옥 같은 삶을 산 거지나사로는 물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생명의 품에 놓여지게 되고
오히려 물이 철철철 넘쳐났던 부자는
지옥에 가서 하루 하루 허구헌날 그저 물 물 물 걱정 밖에 할 수 없는
메마른 물 한 방울이 없는 곳에서 허덕거리는
생명이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사막에 놓여지더라 말이죠
이 의로운 맹세를 쳐다봐야 하겠습니까
아니면 되도 않는 죽은자도 살리지도 못하는 나의 의로움 나의 거룩실천
나의 맹세를 쳐다봐야 하겠냐 말이죠
누가 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달려
죽은 나를 살린자 입니까?
주님의 맹세입니까
인간의 맹세요 나의 맹세요 인간의 믿음이요 나의 믿음이요 내 행함이요 인간의 신앙입니까?
그래서 공포적으로
폭력적으로
십자가 로만 오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맹세로만 오십니다. 인간의 맹세 아닙니다.
아름다운 풍채 하나 없이
싫어버린바 된 그 공포
그 공포는 사실은 내가 원치 않아서 더더욱 가차이 오게 만들었고
인간들이 고개를 돌려버렸기에 돌려버리고 타조처럼 눈을 가린다고 위험이 사라지지 않는다 말이죠
오히려 더 만들어내고 있는 식이다 말이죠 폭력을 공포를 숭고함을 말이죠
흠모할수 없는 것을 어떻게 반드시 찬양케 만드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열심으로 써만 되는 겁니다.
인간의 열심은 노동한 댓가를 따지고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상해 달라는
협박 공갈 사기인 속임수입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기를 치냐 말이죠
모든 무릎이 꿇고 모든 혀가 찬양하는
이 여호와의 맹세가 안 보이냐 말이죠
흑암의 백성
땅끝의 백성
지옥의 백성까지 찬양하는데?
왜 유대인은 교회다니는 자는 이스라엘은 왜 찬양하지 못할까요?
그러니 어서 어서 심판해 달라고
진노를 퍼부어 달라고
우리의 어두운 눈을 뜨게 해 달라고
주여 소경이오니 고쳐 달라고 부르짖어야 할 것입니다.
왜? 이미 새 일이 나타났고 다 이루어졌기에
섬들도 우상숭배자도 우상을 버리고 주 여호와를 앙망하는 판국에
무슨 놈의 그 잘난 무릎이라고 꿇지 않겠으며
무슨 놈의 그 잘난 혀 라고 찬미치 못하냐 말이죠
이유 없이 무조건 우리를 찬양케 만드시는 그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이
나보다 무조건 이유 없이 옳았다 라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