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했던 우리에게 겉옷까지도 (마 5:38-40)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마 5:38-40)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 라고 예수님에게 원수 갚고자 했던 우리의 헛맹세
(마 5:38, 개역)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마 5:39, 개역)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마 5:40, 개역)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마 5:38, 새번역)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 ㉧출 21:24; 레 24:20; 신 19:21』
(마 5:39, 새번역)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 대어라.』
(마 5:40, 새번역)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시 22:16, 개역)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개역)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 22:19, 개역)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성경말씀을 우리에게 지키라고 준게 아닙니다.
이것을 성화론자들 곧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는 자들은
지키라고 헛맹세를 유도케 하지만
정작 율법의 완성이 아닌, 돌아오지 않는 맹세가 아닌
되돌아 와서 자신들의 노동가치에 더욱더 의미를 두고자
되돌아 와서 번제와 제사에 빠지도록 하는 겁니다.
결국 말씀은 지키라고 준게 아니라 오히려 죄 아래 가두고자 함입니다.
(고소하면서 까지 속옷을 빼앗고자 함은 성경에 나오는 시편 곧 약속의 성취이지
(시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 40:15, 개역)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시 40:15, 한글킹) 『내게 "아하, 아하."라 말하는 자들이 그들의 수치의 대가로 인하여 절망하게 하소서.』
(시 40:15, 현대어) 『나를 쳐다보며 `하하 꼴 좋다' 이렇게 비웃는 것들 짓밟혀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하소서.』
역사 속에서 지키고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했던 짖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고자 빌라도 법정 유대인 법정 온갖 법정에 다 세운 모습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이제 우리가 누리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신나게 말이죠)
지킬려고 하는데 도리어 지키면 지킬수록 죄의 감옥에 가두어 진다?
이것을 왜 성화론자들은 말하지 않을까요?
그들이 성경 지식이 없어서 아닙니다
다 압니다.
알면서도 안 가르쳐줘요
신학교에서 다 배워서 목사된 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알면서도 안 알려주는 것은
그랬다가는 목사가 된 자신이 의미가 없어져 버리니까
우상이 의미가 없어져 버리니까
직장이 날라가 버리니까 못하는 겁니다.
즉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자에게 속옷 뿐만 아니라 겉옷까지 내어줄수가 없는 겁니다.
선을 추구하는데 도리어 그 선함이 악으로 드러난다???
율법이라는 거룩을 지키고자 강도만난자의 시체와 같이 된 부정함을 만질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만약 안 그렇다면 성화론자들 말대로
너를 고소하면서 까지 속옷을 가질려고 하는 사람에게 겉옷까지 내주어라 라고
목사 본인부터 그것을 지켜보라 말이죠
실천 가능하면 성경에 기록될 리가 없습니다.
그런것이 기록이 되면 묵시가 아니라 역사책일 뿐입니다.
즉 인간 정치술 밖에 안된다 말이죠
성화론은 종교정치술입니다. 사기예요 사기
이것이 실제로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부자청년에게 말씀하셨다 말이죠
현재 현대인 중에 목사가 가장 많이 말씀을 잘 지킨자 아닙니까
부자청년이다 말이죠 말씀에 부자들이다 말이죠
그런데 그들이 오히려 가장 말씀과 먼 자들이다는 겁니다.
금방 믿어서 새신자가 아니라
오히려 가장 말씀을 가장 모르는 자가 목사 곧 말씀부자인 목사들이다 말이죠
결국 율법 지키는 문제에서
졸지에 내가 죄악에 갇혔다는 그 증거가 들통나 버린 겁니다.
강도만난자를 그냥 지나치는 제사장 이니까 말이죠 목사다 말이죠 살인자들 입니다
살인 방조죄 말이죠
레위인도 오늘날로 치면 신학생 전도사들도 그냥 지나치는 겁니다.
저런 목사를 따라해야 목사가 되니까 목사와 똑같은 행동을 해야 하거든요
말씀에 대해서 빠삭한 지식과 성경박사들이 말이죠
말씀부자가, 부자청년이, 목사들이,
율법 지키기는 커녕 나도 가난한 자가 될 까봐 걱정이 먼저 앞서서 등 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나도 강도만난자 처럼 부정한 자가 될까봐 모른채 하고 지나가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 이면에는
도리어 7에 70번 용서 받아야할 죄 아래 갇힌 자신의 모습이 들통날까봐
그 남을 7번 용서함으로써 그것을 덮고자 한다는 겁니다.
진짜로 남을 사랑해서 7번 이나 용서하는게 아니라
자기의 죄악 7에 70번의 무한대의 죄악을 덮을려고
자기가 자기를 구원하는 길 밖에 없는 이 불의한 법령, 우상인 애굽으로 수치를 가리는 구원
헛맹세로 불법을 지키는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저주받은 티를 팍팍 내는 것이다 말이죠
애굽으로 수치를 가릴려고 해요
그 애굽이, 그 힘이,
세상에 먹혀드는 힘이, 바로 애굽처럼
남을 7번 용서하는 껍데기를 보여줌으로써
나는 저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죄인 중의 괴수인 세리 매국노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한다 말이죠
하나님을 자기 쪽으로 끌어와서 라도 자기편 만들어서 자신의 맹세를 주장하더라 말이죠
이웃사랑 실천했다고 예수님 까정 끌어와서 두 계명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이 헛맹세인 우상 곧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더라 말이죠.
인간 편이 되어 주는 하나님이 무슨 놈의 하나님입니까?
다른 신들처럼 우상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그래서 나는 남을 7번 용서하듯이
십의 일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한다고
이것을 불법을 발포하는 자 라고 했고
이것을 인간의 손에서 해결할수 없는 우상성을
마치 더 큰 힘을 추구함으로써 애굽으로써 자신의 수치를 가릴려고 한다고
성경말씀은 인간의 선함이나 행위 자체에 머물지 않고
인간의 저 깊은 마음 깊은 속까지 죄를 건드리는 겁니다.
저 첫아담의 세계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된 세계
이전 것의 세계
지나간 세계
사라질 것의 세계를 팍팍 수셔대요
그 우상의 세계를 염두하시고서
시비걸고 건드리면서 지적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그저 자기 혼자 딸랑 단독자로써 나의 실천력을 평가해달라고
개인으로 다루어 달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개인으로 안 다루고 집단으로 다루십니다.
모든 인간의 공동적인 욕망인 첫아담으로써 다룬다 말이죠
예수님은 사람을 개인으로 다룬적이 없어요
모조리 다 우상숭배자로 다루는 집단성과
아니면 이스라엘로 다루시는 이 집단성 밖에 없어요
우상이냐? 아니면 약속이냐? 약속이 담긴 잃어버린 이스라엘이냐?
반드시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냄을 받지 않았다 라고
귀신들린 딸의 어미 라는 개인을 찾는게 아니라
99마리 집단과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의 대조로써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성을 찾는다고
그 하나 속에 이스라엘이라는 그리스도의 몸이 있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를 완성하시니까 그 머리의 그 몸이다 말이죠
이게 집단성인 하나 됨 이다 말이죠
하나 라고 하니까 99처럼 숫자가 아니라 하나 라는 관계성 곧 그리스도의 몸을 말한다 말이죠 숫자가 아니다 말이죠
숫자를 넘어서는 숫자요
불편한 숫자요
깨림직한 거리끼는 숫자 하나 됨이다 말이죠
관계와 존재가 차이납니다
우상은 존재를 우기고
관계는 기능을 말한다 말이죠
죄인이라는 존재를 우겨요 글쎄
죄인이라는 관계를 말하고자 하는 기능은 예수님이 이런 죄인도 용서하시는 구원자임을 말하고자 하는
의사를 외치는 환자이다 말이죠
이 깨림직한 거리끼는 불편한 환자, 불편한 죄인을 못되면서
존재적인 우상적인 죄인이라고 우기니 참 나 원 ㅋㅋㅋㅋ
오죽 죄인 중의 괴수가 되었으면 이 사도바울을
얼마나 불편하게 여겨서 잠도 안자고 밥도 안먹어서라도 맹세로 반드시 죽이고 난 뒤에 잠자고 먹겠다 라고
맹세를 유발케 하는 죄인이 아니면 죄인 아닙니다.
죄인 됨을 지켰다고 우겨요 글쎄 ㅋㅋㅋ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놀랍게도 성화론자들이 아니였다면 개인구원이 퍼질 리가 없어요
종교요 사단의 회요 짐승인 666이니까 말이죠
그러니 그들은 이것을 더더욱 감추고자
공동체 운동을 해요 글쎄
그냥 예수님이 하시도록 내버려두는 꼴을 못봐
기여이 자신들이 할려고 해요
그랬다가 부메랑처럼 다시 되돌아 오니까
가룟유다가 하나님나라 운동을 해서
다시 되돌아 오니까 그 부메랑에 피할 수가 없어서 자살하더라 말이죠
율법은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이거든요
남을 정죄 할려다가 자기가 정죄 당하더라 말이죠
피할 길이 없거든요
한번 나가면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율법의 마침이 된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의 피 용서를 못 보니까
율법이 마침이 안되어서 다시 되돌아 오는 그 헛맹세에
자기가 자기가 던진 부메랑에 꼿히도로 되어 있는 겁니다.
부자청년도 부메랑에 맞아서 등돌리고 가고
한 율법사도 두 계명을 지켰다고 우기니까
부메랑에 맞아서 자기 입으로 저 철천지 원수인 사마리아인이 이웃이다고 자기 입으로 시인하게 되니
이 시인한 것으로 예수님을 죽일려고 하더 말이죠
참 이웃이라고 오히려 자신은 이웃이 아니다고 들통나 버리는
부메랑에 맞더라 말이죠
다시 되돌아 오니까 말이죠
그래서 자살 아니면 타살로
남을 죽이든 자기가 자신을 죽이든
하여튼 모든 인간의 율법 지키기는 살인 살해의지를 표출할 뿐이다는 겁니다.
사마리아인을 죽일려다가 그것은 이미 과거에 아벨을 죽였으니 해도 소용없다고 아니까
이제 예수님을 막 죽일려고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드디어 하나님을 죽이는 기회를 율법 지키는 자들이
말씀을 실천하는 자들이 맞이하게 되는 겁니다.
안그러면 자신이 실천한 것을 예수님에게 모조리 다 삭제 당할 판국이니까 말이죠
마일리지 다 날라가요 글쎄
혈맹의 맹세를 해서라도 예수님을 기필코 죽이는 것이
인간의 믿음 이라는 종교성이다 말이죠.
때리는 시어마이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다고
탕자 보다 아버지를 죽일려고 해요 글쎄
마침이 없으니 이것만 의문의 반복처럼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반복하는 겁니다
가인의 제사를 말이죠.
번제와 제사를 말이죠
이 불법을 저들은 얼마나 사랑하는지
인애와 자비를 쳐다보지 않아요
그럴꺼 같으면 벌써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봤겠죠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회개하면서 말이죠
끝까지 나는 다윗처럼 율법 4배나 갚으라고 정의를 외치는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 를 외치는 정의로운 이스라엘의 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다 라고 우기면 우길수록
그 율법 지킨 것이 예수님을 죽이는 결과로만 나타나는 것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반발 합니다.
내가 선지자를 죽였던 그 때로, 그 조상의 때에 만약에 다시 돌아가 있었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자꾸 자신의 개인적인 자질로써 평가해 달라는 반면에
예수님은 그 말을 너희 조상들도 똑같이 그렇게 말했다 라고
거봐 거봐 그 조상에 그 자손,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고
너희 아비는 마귀다 라고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안다고
자꾸 집단적으로 묶어서 인간을 평가 하고
그 집단성을 염두하시고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나오시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나오는 성경말씀은 단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 개개인이 말씀을 지켰니 못 지켰니를 안 따집니다
배후세력이 우상의 맹세인 마귀냐 아니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맹세완료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예수님이냐
이것 뿐이다 말이죠
지켜야 할 법으로
남은 숙제로 보게 되면 부메랑이 다시 돌아와서 자살하게 됩니다.
아니면 등 돌리고 근심하고 돌아선다 말이죠.
이제 지켜야 할 법이 없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꾸 우리들이랑 부딧혀 가면서 알려주시는데
우리는 자꾸 눈이 있다고 귀가 있다고 여기니까
과부 아니다고 우기니까 불의한 재판관이신 예수님의 말씀이 안 이루어져서
부메랑 다시 되돌아 오는 부메랑에 맞아서 자살할려고 해요 글쎄
의문의 반복에 빠져요
마침이 없이 계속 반복이 되어 되돌아 오는 헛맹세에 빠진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원수에게만 해당된다 말이죠
다들 원수 안 될려고 말씀지키겠다는 것이
들통나는 겁니다.
지켜야 할 율법이 완성이 되어서 다시는 부메랑처럼 되돌아 올 맹세가 없게 된
율법의 마침이 되신 이 예수님의 숙제완성을 다 보게 되면
숙제가 없으니까 부메랑이 안 돌아온다 말이죠
이미 벌써 피했으니까 말이죠
제발 말씀 지키지 마세요 자살하게 됩니다.
이게 진짜 복음인데 ㅋㅋㅋㅋ
그러니 이 둘의 차이로써 은혜로만 말씀하시는 겁니다.
우상이냐 약속이냐
행함이냐 믿음이냐
행함은 아직도 남은 숙제가 있다 쪽팔려서라도 성화를 해야 한다는 쪽의 불법을 행하는 자냐
아니면 믿음 곧 이제 남은 숙제는 없다 예수님이 다 이루셨다 라는 것을 믿는 믿음이냐
이 은혜를 오히려 성화론자들은 오히려 가장 이 산상수훈을 강조하면서도
은혜가 아닌 선악으로, 행함으로, 강요된 선택으로, 아직 지킬 것이 남아있는 말씀실천 으로써 강요합니다.
왜냐하면 율법 강화이니까 행함의 강화로 강요를 해야
목사 자신의 거짓선지자의 기능이 강화가 되거든요
맡은바 소임을 다 하도록 가룟유다처럼 어서 너가 맡은 일을 해야지
유대 독립을 위해 열심이 열심일수록, 특심일수록, 율법강화 일수록
율법(의문의 증서)을 지키고자 하는 자신을
예수님은 더더욱 안 도와주거든요
예수님도 팔고 자신도 자살하고
되돌아 오는 헛맹세에 그 부메랑에 정통으로 맞아버리는 겁니다.
똑같은 짖을 베드로가 하지만
그 부메랑을 예수님이 대신 맞으심으로인해
베드로는 나음을 입게 됩니다.
그가 대신 째찍에 맞음으로 말이죠
이 하나님의 일을 보고
제발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아라 말이죠
베드로가 가룟유다 보다 나은 것 단 하나도 없어요
오히려 가룟유다 보다 더 못한 인간이다 말이죠
오로지 남겨둔 한 씨 예수님 때문에
저 가룟유다처럼 부메랑에 맞아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그 죄책감에 자살하고도 벌써 남았을 베드로를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주님께서 아무리 사단이 밀까부듯이 청구를 송사를 해도
모든 허물을 다 덮었다 그 죄 값을 다 치러서 다시는 그 죄값을 묻지 못하도록 하셨다 말이죠
이 새 일이 엄연히 있는데
왜 성화론자들은 이전의 것을 주장하고
처음아담의 것을 주장하냐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 같고도 남았을 베드로를
남겨둔 한 씨 예수님 때문에 건져진바 된 것이지
베드로 개인이 아닙니다.
개인 베드로 구원 없어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반석 구원 밖에 없다 말이죠
그러니 개인 구원을 외치는 저 성화론자 물론 대놓고 말로는 안 그럽니다
그런데 막상 격어보면 결과적으로 항상 그런 결론을 주장해요
처음부터 말했으면 안 속았을텐데
결국 그들은 교회(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개념이 없어요
오히려 더더욱 집단성이 강해요
가짜라서 더더욱 교회 답게 하겠다는 그 맹세만이 강해요
그래서 공동체운동에 자신들을 도배를 했으니까
그러니 99마리 양 맞죠
종교 권력이다 말이죠 이게 애굽으로 자신의 수치를 가린 모습이다 말이죠
인간의 맹세(행함, 실천, 믿음)으로 결속을 혈맹하듯이 뭉쳐졌으니까 말이죠
정반대는 잃어버린 모습이거든요 약속은 말이죠
그러나 우상은 힘을 갖추어요
오히려 우상은 더더욱 집단이라는 종교권력으로 세력화 합니다.
고립된 섬들의 특징이다 말이죠
저들은 딸랑 혼자 홀로 선지자를 세우지 않아요
그러나 주님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곧 엘리야를 딸랑 혼자 세웁니다.
그리고 딸랑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도록 하십니다.
한 뭉둥병자에게만 엘리사를 보내신다 말이죠.
(약 5:17, 개역)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약 5:17, 새번역) 『엘리야는 우리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비가 오지 않도록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니, 삼 년 육 개월 동안이나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았으며,』
(성경말씀은 약올리는 것 같아요 ㅋㅋ
성정이 같은 사람인데 사람에게서 나올수 없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 나오니까 말이죠
마치 불의한 재판관 비유처럼 말이죠. 무슨 수로 해석하냐 말이죠
이게 무슨 성정이 같냐 말이죠 다르잖아요
네 맞습니다. 다른 것을 보도록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게 은혜로 만들었지 선악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이죠
즉 개인이 아니다는 겁니다.
한 편이 되는 뒤에서 리모콘으로 로봇 조종하듯이 엘리야를 조종하는 자가 있다는 말이다 말이죠
자유의지는 무슨 놈의 의자 로봇이 되는 것 보다 기쁜 것이 없는데
피조물 되는 것이 얼마나 기쁘냐 말이죠 그게 막사는 자유인이다 말이죠
저들은 로봇이 되기 싫은 로봇이 되고 말았다 말이죠
죄 아래 갇혀서 평생 사망의 종노릇을 한다 말이죠 그래놓고 무슨놈의 자유의지냐 말이죠
독자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여겨야
논리가 맞다고 자기들이 성경을 변호해요 글쎄
변호할 생각 말고 변호 당하라 말이죠
얼마나 자유하지 못하면 자유의지라는 교리로 먹고 살까요
그 교리 안 세우면 불안하거든요 )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찾으시는 목자,
그 목자를 말하기 위해서
약속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정작 선한 목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잃어버린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인 이스라엘을 찾는다 말이죠
이스라엘 의미 자체가 잃어버린 한 마리 이거든요
잃어버렸다는 것은 누가 찾고 있다는 기능을 말하는 것이기에
죄인도 그런 기능인데
자꾸 죄인 되었다 라고 존재를 우겨요 글쎄
그러니 잃어버림이라는 기능이 없이
어떻게 목자를 외치냐 말이죠
이스라엘이라는 의미 자체가
전리품인데
주인을 결박해서 세간을 빼앗은 도둑을 말하고자 하는 세간이요 전리품인데?
아무도 전리품 될 생각은 추호도 없는 것이 우상숭배자 아니냐 말이죠
가장 미약한 백성을 선택해서
가장 강력한 애굽과 싸움을 붙였으니 말이죠
세상에서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고 약한자를 택해서
가장 슬기롭고 지혜로운자를 부끄럽게 만드시고자 하는
이 십자가의 지혜를 나타내시고자 말이죠
왜 지혜란 천한 계집종을 택해서 왕비로 만들어야
세상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면서 나 그 결혼 반댈세 라고
세상이 반발해야 그것이 진짜 지혜이다 말이죠
견딜수 없어서 발악을 해요 글쎄
안그런 지혜는 지혜가 아닙니다.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는, 말도 안되는 일을 주님은 약속으로 나타내시는 겁니다.
말되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우상이다 말이죠
말도 안되게 거인 골리앗과 소년 다윗을 싸움 붙이는 이 약속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아동 인권 착취 아닙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상숭배자 사울왕을 들추어낼수가 없다 말이죠
반드시 약속은 이 사울왕과 다윗을 한 세트로 삼아야 하니까 말이죠
최전방의 우상문제해결하는 전쟁에 갓난아기, 젖먹이를 보내는 신이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전쟁입니다.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이다 말이죠
안그러면 우상제거에 마침이 없이 되돌아오는 부메랑과 같아서
자기가 우상을 제거했다고 자기가 우상이 되어요 앗수르처럼
몽둥이 앗수르로 우상을 다 깨뜨리니까
이 앗수르가 또 교만해서 우상이 된다 말이죠
이것이 오늘날 강도의 소굴이 된 개혁주의자들이 특히 그렇잖아요
정의를 부르짖는 정의사제구현단처럼 말이죠
이 의문의 반복 되돌아오는 부메랑에 자기가 도로 우상이 되는
이 마침이 없는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는 자들에게서
누가 건져주겠냐 말이죠
정 그러면 본인이 속옷까지 빼앗김을 당해 주고 거기에다가 겉옷까지 주라 라고 하는 말씀을
지켜보라 말이죠
단 한명도 지킨 놈을 못 봤어요
이 말씀은 도리어 고소까지 당하고 속옷까지 빼앗을려고 달려드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고 외친 우리들에게
심지어 또 겉옷까지 내어주신 분은
예수님 한 분 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보고 지키라고 말씀하시는게 아닙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감히 속임수 사기를 산상수훈으로 치는
미친놈들인 성화론자들의 말을 듣지 마세요
그들의 누룩을 삼가하세요
뭐 하긴 우리가 다 이 성화론자와 똑같은 한 치도 벗어난 적이 없는 자들이니 뭐
이 사망의 몸에서 못 벗어난다 말이죠
(히 3:16, 새번역) 『듣고서도 하나님께 반역한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모세의 인도로 이집트에서 나온 사람들 모두가 아니었습니까?』
(시 60:11, 개역) 『우리를 도와 대적을 치게 하소서 사람의 구원은 헛됨이니이다』
성화론 이거 지켰다가는 처음에는 지켜서 속아요
그 자기자신에게 속은 것을
주변사람들이 부추겨 주어서 잘한다 잘한다 라고 홀긴다 말이죠
다들 소경이라서 소경의 길로만 인도한다 말이죠
누구 하나 인도해 주는 자들이 아무도 없어요
(시 89:48, 새번역) 『산 사람치고 어느 누가 죽지 않고 살 수 있겠습니까? 어느 누가 제 목숨을 ㉣스올의 손아귀에서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셀라) / ㉣또는 '무덤' 또는 '죽음'』
(롬 7:24, 개역)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 7:24, 새번역)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계속해서 무거운 율법이 주어지게 되면
부메랑처럼 되돌아 옵니다.
그래서 자살까지 간다 말이죠
주님의 창조주 됨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더라 말이죠
뭐 속옷까지 내어주고 겉옷까지 주라굽쇼?
목사 지도 못하면서 왜 남에게 강요합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 본인이 완성하겠다고 되돌아 오지 않는 마침이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목사놈들이 글쎄 이 마침을
마침이 없이 반복을 해서
교인들에게 짐을 지워요
백날 해보세요 마침이 되나?
이 부메랑을 피할 방법은
부자청년이 자기가 아무리 부자여도
오히려 제가 가난한 자입니다 라고 하면
전재산 바칠 필요도 없고
율법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주장할 필요가 없어요
그러니 부메랑을 피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우상사회가 된
메시아 사상을 집어넣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우상세계에서는 안 통하는 겁니다.
성령을 받지 않는 이상 못 벗어나요
그러나 완료된 맹세가 덮쳐지면
하나님의 맹세는 됩니다.
왜? 그 가난한자인 부자청년 자신을 위해
전재산인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예수님이 떳기에
율법의 마침이 떳기에
율법의 완성이 떳기에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완룍된 맹세가 떳기에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 부메랑이거든요
그런데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는 오늘날 완악한 목사들
특히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이 바리새인의 의를 갖춘 이 목사들은
한 아기를 구할까요
아니면 믿는 구석인 시온산에 세운 산당을 믿고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노라 할까요
강도의 소굴인 교회를 믿어요 글쎄
다 믿는 구석이 있다 말이죠
오늘날에 딱 맞아 떨어져요
오늘날 목사들은 그저 교회에 미쳐있어요
어떤 놈은 크게 짖는 양적인 것에 미쳤고
어떤 놈은 양은 의미 없고 질적인 것이 중요하다고
교회를 교회답게하고자 성경신학적으로
구속사적으로 해야한다고
자꾸 숙제를 던져준다 말이죠
저런 양적인 것을 추구하는 저런 수준낮은 교회가 아니라
질적인 면만을 추구하는 수준높은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성경적인 교회가 되어야 한다고 말이죠
이거 뭐 보통 마귀가 아니야 ㅋㅋㅋㅋ
오히려 그렇게 지킨거
완성한거 딱 한 개라도 있는자 있으면
그런 교회 있으면 저에게 알려줘 보세요
지킨놈 하나 있으면 그 하나 내세워서 우상화 해서
지킨것도 아닌데 지킨 것으로 여겨서
지켰다고 우상화해서
마치 손양원? 이름 맞나? 또 누구죠 옥한흠? 하여튼 대놓고서
나는 우상숭배를 하기로 작정했다고 영화까정 만들면서 대놓고 외쳐요
우와 주여 주여 어서 저들 마귀들에게서 빼내주세요 라고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그 놈으로, 그 우상화된 자들로, 자신의 수치를 가릴려고 하는 빤스로 삼아서
더더욱 겉옷까지 안 빼앗겨도 자발적으로 안 줘도 된다는 정당성을 추구하더라 말이죠
여기에 사로잡힌 자가 바로 다윗이였습니다.
다윗이 오늘날 성화론자들 주장처럼 즉 한국교회 전체라고 보시면 됩니다.
율법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이스라엘 왕 다움을 왕답게 추구했다고 주장합니다.
내 열심이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나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이 주장 받아주면 엘리야 자살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자살하지 말라꼬
혼자 남으면
개인 구원이 되면 자살하니까 도로 저주 받으니까
예수님께서 대신 매맞는 모습인 세미한 음성으로 오심으로써
7천을 남겨뒀다고 집단화 시킵니다.
이 엘리야의 운명은 곧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이 되고
이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에서 왔다고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에서 은혜에서 왔지
선악의 법칙
행함의 법칙
부메랑의 법칙 되돌아 오는 맹세에서 오지 않았다고
7천 곧 일곱이라는 완벽한 심판을 받고 완벽한 거룩이 입혀짐에서 왔다 말이죠
이 삼일의 간극이 아니면 우리는 다 자기 헛맹세에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짓을 하게 된다 말이죠
마치 오늘날 처럼
교회다니는 사람 답게 말씀을 실천했다고 우기듯이 말이죠
이런 사람들이 모여있으니까 자연재해로 교회가 무너지면
기쁜게 아니라 절망해요
살아계시는 주님을 만나는게 아니라
원망을 한다 말이죠
번개가 쳐서 지붕이 떨어져 누구 하나 깔려 죽게 되면
저 사람은 예배 중에 하필이면 주일날 천정? 천장에 있던 무거운 합판 보드가 떨어져 맞아 죽으면
다들 저주 받았다고 하지만 (천장이 표준말이라고 하네요)
오히려 그 사람 진짜 행운아 아닙니까?
얼마나 주님을 보고싶은 소원이 이루어진게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개인 구원 이라는 오늘날 거짓선지자인 목사들이 가르쳐준대로 보게 되면
개인 구원이니까 저 모습이 전혀 구원받은 모습으로 안 보이는 겁니다.
누가 이런 해석을 집어넣었을까요?
두 살 밑으로 죽은 아기를 위해 편들겠다고 예수 때문에 다 죽었다고
세상사람들이 해석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요?
아기 개개인으로 보는 해석이
세상 사람이 개개인의 안목으로써 개인을 염려하는 그 안목과 뭐가 다르냐 말이죠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개인화 되었지
이제 더 이상 관계성은 없는 겁니다.
(욥 27:3, 개역) 『(나의 생명이 아직 내 속에 완전히 있고 하나님의 기운이 오히려 내 코에 있느니라)』
(사 2:22, 개역)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창 6:1, 개역)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창 6:2, 개역)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창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사람의 생명은 관계성을 말하고 있지
숨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목숨이 넉넉한 소유 보다 귀하지 않게 된 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 없는 개인 그 자아 라는 개인을 만들어 조작해 냄으로 인해서
졸지에 구원도 개인 숙제 완료하듯이
개인 구원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사람의 구원은 헛된데? 그 허구를 왜 구원하냐 말이죠
성화론자들의 개인 숙제로 완성한 그 성화로
과연 자신의 수치를 가릴수 있을까요?
이게 우상입니다.
헛 맹세인 사람의 맹세 입니다. 사람의 일 입니다.
이것이 불의한 법령을 발포하는 짓입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그런 인간의 속임수로 꾀로 속일려고 하냐 말이죠
또렷하고 완료된 마침바 된 주님의 맹세가 있는데
어딜 감히 인간의 맹세를 들고오냐 말이죠
애굽으로 수치를 가려질 꺼 같으면
다윗이 벌써 벌써 4종 세트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벌써 되었게?
이 4종 세트가 바로 애굽인데?
의문의 반복인데?
마침이 없이 되돌아 오는 부메랑인데?
또 다윗을 위해 반석을 두 번 쳐야 할까요?
단번에 깔끔하게 해결 되었다 말이죠
다시는 안 돌아와요
이거를 외치는 성화론자들을 본적이 없어요
외치게 되면 교회를 그만 두어야 하거든요
교회를 손 놓을 리가 없잖아요
그러니 말을 못합니다 말을
입이 있어도 못해요
그 부끄러운 십자가를 말 못해요
날 위해 지셨네 다 지키시고 완성하셨네를 말 못해요
그래도 조금 우리의 숙제가 남겨져 있다고 우겨야
눈에 보이는 교회를 의미 둘수 있게 된다 말이죠
양심상 성화를 해야 한다고 우기잖아요 양심상 그게 회칠한 무덤인데???
오죽하면 주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 국가 전체를 공중분해 해체 시켰을까요?
눈에 보이는 이스라엘 국가 있으면 뭐합니까?
시온산에 산당을 해결할 길이 없는데
우상을 해결할 길이 없는데
여호와를 입으로는 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저주가 가득한
우상으로 가득차 있는데
눈에 보이는 교회를 유지할려고 하면 할수록 더더욱 산당이 가득해요
애굽으로 가득차 있더라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신원하기는커녕
있는 놈이 벼룩에 간 빼가듯이 더더욱 갈취를 해요 글쎄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이
바리새인의 성전중심사상이였듯이
오늘날 교회가 이런 짖에 거의 미쳐 환장해 있다 말이죠
이 우상을 무슨 수로 해결하겠습니까?
다윗 왕도 못하는 판국에?
뭐 성화론
다윗이 말합니다.
자기가 벌써 다 해 봤다고
통할 것 같으면 벌써 했게요?
사람들이 착각하는게
산상수훈을 성화론자들에게 들으니까, 불교가 그래서 산상수훈을 좋아라 해요
율법 강화이니까 완벽한 법이거든요
그러니 자꾸 지키자고 더더욱 강하게 지켜야 한다고 하는데 그 반대입니다.
지키지 말라고 산상수훈을 언급 하시는 겁니다.
즉 고소까지 해가면서 속옷을 빼앗을려고 하는 자는
너무 너무 가난해서 이 속옷이 아니면 나 죽습니다 라고 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런자 같으면 겉옷도 다 내어줄만 하겠죠
그게 아니다 말이죠
고소 까지 하는 자는 없어요 그런 법정까지 이용할줄 알면 속옷을 신상으로 벌써 돈주고 샀을꺼다 말이죠
고소까지 하면서 법 하나님의 법 유대인 법 로마 법 까지 동원해서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 앞에서만 반드시 튀어나오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속옷을 주는 나
겉옷까지 주는 나
이런 멋있는 나가 되어야 한다고 해석하는 놈은 다 마귀들이다 말이죠
그 정반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고소까지 해가면서 속옷을 빼앗어
부끄러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려고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성화론자 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에이 설마 우리가 그 더러운 남의 빤스가 뭐가 필요해
차라리 새 속옷이 낫지 라고 그런 상황이 안 올 것이다 라고 우기지만
그게 아니라 자신의 속옷 곧 애굽으로 가리운 것을 빼앗기기 싫어하는 이 우상성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인간 자신의 우상을, 자기라는 우상을 파괴하시고자 깨작 깨작 시비걸고 오시는 이 예수님을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고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할 수밖에 없도록
예수님이 행동하신다 말이죠
예수님이 이 말씀을 이루시고자 아니 이미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다가오실때에
우리가 고소까지 하면서 속옷 빼앗는 모습으로 들통난다는 겁니다.
그런다고 호락호락한 인간이 아니지요 반격을 하는게 모든 인간이거든요
그렇게 되면 우리의 수치를 안드러나게 할려고 역으로 예수님에게 수치를 뒤짚어 씌우고자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예수님에게 행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막 15:24, 개역) 『십자가에 못 박고 그 옷을 나눌새 누가 어느 것을 얻을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왜냐하면 역사 속에서 시공간에서 실천하라는게 아니라
정반대로 묵시에서 이미 이루어진 바 대로 나타나는 약속성취의 증상이다는 겁니다.
역사라는 무대는 그저 묵시가 발현되는 카페트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죠
그러니 속옷을 빼앗고자 고소하는 자가 세상에 어디있습니까
그런데 약속의 말씀대로 나타나더라 말이죠
우리는 예수님을 속옷을 빼앗을려고 고소한 자들이다 말이죠
얼마나 성화론자들의 해석이 엉터리였고 얕았으면 얕게 해석해서
깊은 것을 못 보게 할까요?
그들이 하나님의 깊은 것을 못 보는 이유는
사단의 깊은 것까지 못 보고 있다는 겁니다.
당연하죠 자신들의 죄악을 볼 리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시편 말씀의 성취다 말이죠
(시 70:2, 개역) 『내 영혼을 찾는 자로 수치와 무안을 당케 하시며 나의 상함을 기뻐하는 자로 물러가 욕을 받게 하소서』
(시 70:3, 개역) 『아하, 아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물러가게 하소서』
(마 27:35, 공동)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고 나서 ㉠주사위를 던져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갖고 / ㉠시편 22:18.』
(막 15:24, 공동) 『마침내 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그리고 ㉠주사위를 던져 각자의 몫을 정하여 예수의 옷을 나누어 가졌다. / ㉠시편 22:18.』
(막 15:34, 공동) 『세 시에 예수께서 큰소리로 "엘로이, 엘로이, 레마 사박타니?" 하고 부르짖으셨다. 이 말씀은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뜻이다. / ㉠시편 22:1.』
(시 22:16, 개역)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 22:17, 개역)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저희가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 22:18, 개역)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 22:19, 개역)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 22:20, 개역) 『내 영혼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요 19:24, 공동) 『그들은 의논 끝에 "이것은 찢지 말고 누구든 제비를 뽑아 차지하기로 하자." 하여 그대로 하였다. 이리하여 "㉠그들은 내 겉옷을 나누어가지며 내 속옷을 놓고는 제비를 뽑았다." 하신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 ㉠시편 22:18.』
(요 19:28, 공동) 『예수께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아시고 "㉠목마르다." 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으로 성서의 예언이 이루어졌다. / ㉠시편 22:15.』
(요 19:29, 공동) 『마침 거기에는 ㉠신 포도주가 가득 담긴 그릇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포도주를 해면에 담뿍 적셔서 히솝 풀대에 꿰어가지고 예수의 입에 대어드렸다. / ㉠시편 69:21.』
(요 19:36, 공동) 『이렇게 해서 "㉠그의 뼈는 하나도 부러지지 않을 것이다." 한 성서의 말씀이 이루어졌다. / ㉠출애 12:46(민수 9:12; 시편 34:20 참조).』
예수님의 영혼까지 빼앗고자 속옷까지 빼앗고자 고소하는 자들
아하 아하 라고 하면서 속옷을 제비뽑기로 취하고 있다 말이죠
즉 약속성취 곧 되돌아 오지 않는 [주께서 내 주께] 한 맹세를 말하고 있지
우리 보고 지키라고 율법강화, 법 강화라고 가르치는 거짓선지자의 말에 속으면 안된다 말이죠
자 그렇다고 그들에게 악을 악으로 갚아야 할까요?
바로 우리들에게 말이죠 악으로 안 갚습니다.
그럴꺼면 말라꼬 약속을 믿냐 말이죠
성화론자들 말처럼 우상을 믿어도 충분한데 말이죠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14, 개역)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롬 12:15, 개역)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롬 12:16, 개역)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롬 12:17, 개역)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롬 12:18, 개역)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9, 개역)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 12:20, 개역)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롬 12:21, 개역)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이런 말을 하니까 성화론자들이 저를 원수 보듯이 해요 글쎄
그럼 그런 원수를 왜 사랑하지 못할까요?
산상수훈 지키라메? 왜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까요?
속옷까지 주는 판국인데 왜 겉옷까지 못 줄까요?
성화론자들은 정말 정말 거짓으로 도배가 되어 있어요
그런데 본인들은 누가 봐도 자신들이야 말로
말씀을 제대로 지키고자 힘쓰고 있다고
주변인들도 다 고런 고런자들끼리 모여서
글쎄 공동체 운동으로 결성이 되어 있으니
서로 서로가 속이고 살아요
친한 벗끼리 이웃으로 삼아서 이웃사랑을 실천하고 있데요
그것이 그들이 말하는 공동체요
교회라고 우긴다 말이죠
참 신기해요 말씀이 딱 맞아 떨어져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으니까
사람들의 맹세만이 가득하다러 말이죠
이런 말을 안 하면 그야 말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천사들이다 말이죠
얼마나 대접도 잘하고 최대한의 인격적으로 대우를 해 주고 말이죠
허물도 용서를 팍팍해줘요 마치 예수님처럼 행동해요 글쎄
그런데 십자가의 피 용서 라는 다시는 되돌아 오지 않는 하나님의 맹세를 이야기하면
갑자기 돌변해요 얼굴이 안색이 변해요
평일에는 천사였는데 안식일날 차가 막혀 버리면 마귀로 돌변해요 글쎄 ㅋㅋㅋ
얼마나 살기가 넘쳐나는지 도망가야해 ㅋㅋㅋ
눈빛이 달라요 다 죽여버리겠다고 광명한 천사에서 졸지에 마귀로 돌변해요 글쎄
자기들의 맹세를 건드렸거든요
저들이 애굽으로 가려진 가면을 우연히 나도 모르게 건방지게 겁도 없이 툭건드려 벗겨버리니까
광명한 천사들이 졸지에 늑대가 되어 나타나더라 말이죠
다윗이 율법 네배로 갚으라 라고 하는 모습이 이래요
광채나는 수건을 안 벗을라꼬
벗으면 돌삐 던지는데?
싫어버린바 되는데?
그러니 애굽으로 끝까지 가릴려고 하니
주님께서 다윗을 건지시고자 꺽으신 뼈로 오시는 겁니다.
과연 애굽으로 가려질 것 같으면 벌써 가렸을 것이다 라고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라는 4종 세트로 가릴려고 해도 안되더라 말이죠
도리어 살려내고자 했던
절대로 예수님은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베드로가 외쳤듯이
도리어 살려내고자 했던 그 아이가
절대로 꺽어지는 뼈가 되시면 안된다고 다윗이 4종세트로 막아서고자
금식 눈물 회개 기도로 아무리 꺽으신 뼈를 막고자 해도
사랑은 죽음 보다 더 강한 숭고 불편하기 짝이 없는 불편한 아름다움이요
불편한 거룩이다 말이죠
이 불편한 거룩이 아니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말이죠
이 꺽으신 뼈로 불편한 거룩으로 즐거워 하는 기뻐 노래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인 이 십자가로 노래하는 겁니다.
다윗이 꺽으신 뼈를 살리는게 아니라 그래 되면 우상이다 말이죠
자신의 죄악이 들통나지 않은 상태로 구원받겠다는
종교(음녀 제사장 딸)이요 국가(애굽)인 짐승이다 말이죠
꺽여지는 뼈로써만 죽은 다윗을 살려내는 겁니다.
다른 것으로는 살려내지 못해요
오로지 한 아기 로만 말이죠
저 종교인 음녀와 짐승인 애굽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벌써 음녀와 애굽 같았을 꺼다 말이죠
오늘날 교회가 음녀와 애굽 같거든요
서로 누가 누가 더 큰 애굽으로 가렸는가를 자랑을 해요
십일조 낸 성화
이레에 두번 금식한 성화
산상수훈 누가 누가 더 많이 지켰는가 성화
그런 수준 떨어진 모습이 아닌 수준높은 겸손한 성화
로 가렸는가를 말이죠
꺽으신 뼈 만이 죄 아래 갇혀진 다윗을 건져내더라 말이죠
되도 않는 애굽으로 수치를 가릴려고 했던 그 다윗을
제대로 된 빤스인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수치를 가린다 말이죠
노래하고 춤추고 먹고 마시고 하지 않을수가 없는 겁니다.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겁니다.
되돌아 오지 않는 하나님의 맹세로 기뻐한다 말이죠
안 그러면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자살한다 말이죠
수치는 산상수훈을 지킨다고 가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을 말하는게 산상수훈인데
산상수훈을 지킨다고 수치가 가려지지 않는다고 말하는게 산상수훈인데
도리어 산상수훈을 지키면 가려질수 있다고 가르쳐요 글쎄
우와 이거 마귀들 아닙니까?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는데 더더욱 맹세를 해요 글쎄
맹세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해요 ㅋㅋㅋㅋ
산상수훈을 법으로 해석하니까
그 법을 지키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실천해야 한다고 우겨요
그러면 그럴수록 수치를 애굽으로 가릴려고 하는데 있어서 더더욱 집착하게 되더라 말이죠
(계 16:15, 개역) 『보라 내가 도적 같이 오리니 누구든지 깨어 자기 옷을 지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계 16:15, 새번역) 『("보아라, 내가 도둑처럼 올 것이다. 깨어 있어서, ㉠자기 옷을 갖추어 입고,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니지 않으며, 자기의 부끄러운 데를 남에게 보이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 ㉠그, '자기 옷을 지키다'』
(계 16:15, 한글킹) 『보라, 내가 도둑같이 오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켜서 벗은 채로 다니지 아니하고, 사람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계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자 보세요 오늘 본문과 안 맞아요
속옷 까지 빼앗고자 고소를 하잖아요
이거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겉옷까지 주라는 말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사건을 두고 말합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율법강화는 율법을 더욱더 강하게 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더욱더 더 깊은 의미이다고 더 잘지키라는 말이 아니라
그 더욱더 깊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깊은 것인 십자가와 연결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깊은 것까지 파고 들어간다는 것이다 말이죠
왜? 한 세트 이니까
우리 속의 사단의 깊은 것까지 파고드는 겁니다.
그리고 앞의 글에서 언급했듯이
사도바울을 죽이고자 속옷까지 빼앗고자 고소하듯이 나오잖아요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취지가 뭘까요? 고소까정 하면서
법원까지 동원한다 말이죠 법을 동원해요 법을
유치하게 더러운 빤스를 왜 훔치냐 싶지만은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이런 일에 미쳐 있어요
구지 갑질하는 재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독재인 닭그네만 그런게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이래요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모두다 가해자로 들통나는 겁니다.
이것이 오히려 가장 거룩한 말씀을 지킨다고 하는 유대인들 대제사장들이 하고 있다 말이죠
왜 잠도 안자고 밥도 안먹어서라도 반드시 사도바울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거죠
이 맹세를 달성하지 못하면
유대사회가 무너져요 사단의 회가 무너지니까 죽기 살기로 달려들 수 밖에 없다 말이죠
거룩한 성전이 무너지고과거 이스라엘 국가가 해체가 되었듯이
그 트라우마를 이 돌삐 하나 굴러온 예수 때문에 벌어지고 있으니
로마가 갑자기 중요한게 아니라
로마와 손을 잡아서라도 예수님을 발가벗겨서 십자가에 매 달아
수치를 당케 만들고자 하나님의 저주로 즉 율법으로 심판해야 한다 말이죠
법이라서 그래요 법
그 법을 지키는 겁니다.
거 보세요 법을 결국은 지키잖아요
죄 아래 갇혀 버린 티를 팍팍 내 잖아요
무슨 수로 이 죄에서
이 사망의 몸에서 건짐을 받을수 있습니까?
자 자 그래 그래 더러운 빤스 훔쳐가라 옛다 라고 줘버리면
발가벗겨짐과 더불어 이 수치를 무엇으로 가리냐 말이죠
네 맞습니다 눈치 채셨군요
수치를 가릴 것이 없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로 인간들은 죽기살기로 달려드는 겁니다.
예수 너를 발가벗겨서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발가벗겨지실려고 오셨다 말이죠
괜히 심각하게 달려든 겁니다.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기 까지 복종하시고자 오셨다 말이죠
이사야가 발가벗고 3년동안 돌아다니는 이유는
너거들이 발가벗었다고
예수님께서 처음부터 십자가에 달려 죽고자 오신 이유는
처음부터 모든 인간들이 발가벗은 애굽으로 수치를 가리고자 한
성화론자들도 애굽으로 가릴려고 해요
자기의 되도않는 맹세로
말씀실천하기 라는 불의한 법령을 발포 맹세하기로 가릴려고 해요
즉 십자가 곧 처음부터 발가벗고 오신 이유가
인간은 자기를 안 건드리면 절대로 안 움직이거든요 속내가 안 나타나요
속을 빡빡 긁어야 해요
건드렸기 때문에 움직인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인간들의 속옷을 건드렸다 말이죠 인간 속의 우상
아니 인간 자체가 우상이니까 우상을 건드렸어요
수치를 애굽으로 가린 것을
그 애굽을 건드린 겁니다.
계시록이 종말론 영화를 다루듯이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내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다 말이죠
큰 성 바벨론인 나를 건드린거다 말이죠
그 속에서 어린양만 졸졸졸 뒤따라가는
십사만사천명이라는 새노래를 부르는자를 새로 만들어내는 겁니다.
의사만을 외치는 죄인을 새로 만들어 낸다 말이죠
그러니 나를 건드리지 않는 예수님은 가짜다 말이죠
우상화 된 예수고
진짜 예수님은 매일 매일 나를 죽음에 넘겨버린다 말이죠
배신이다 말이죠 배신
예수님이 졸지에 인간의 수치 곧 속옷을
애굽으로 가린
애굽을 건드렸기에 죽기 살기로
그 얌전하기 짝이 없던 자들이
발끈하고 나서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반드시 수치를 드러나도록 부끄럽게 만들겠다는 취지이다는 거죠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말이죠
우상의 소욕과 예수님(마침이 된 약속성취)의 소욕
그러니 인간 자체가 우상이 된 입장에서
이것이야 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법칙 속에
인간들이 죽기 살기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칙을 지킬려고 하는 취지가 들통나는 겁니다.
죽기 살기로 산상수훈을 지켜야 한다고 우긴다 말이죠
이것을 글쎄 누구에게 써먹도록 되어 있다?
반드시 자신의 죄 아래 갇혀진 모습을 감추고 싶은 상대급부의 상황이 벌어질 때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가고 그때만큼은 지킬려고 달려든다 말이죠
예수님께서 인간들이 자기 수치를 가릴려고 한 그 애굽을
애굽이라는 속옷을 건드렸기 때문에 말이죠
그때서야 발똥을 해요 발동
평상시에는 가만히 있다고 여차저차 해서 미루어두었던 법을
누가 건드리면 비로소 지킬려고 한다 말이죠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말씀실천을 평상시에는 안해요
정의를 위해서 쉼도 없이 부정부패 몰아낼려고 지구끝까지 죽기살기로 안해요
그럼 언제 이 말씀을 반드시 지킬려고 비로소 꿈틀 거리느냐
맞습니다.
나를 건드릴 때
그때 비로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지킬려고 해요
이상하죠
그야말로 사망의 몸이다 말이죠
화로다 화로다 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무슨 수로 건짐받겠노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안된다 말이죠 안돼
그러나 사람은 할수 없으나
하나님은 하십니다.
행함은 할수 없으나
믿음은 하신다 말이죠
예수를 저 하나님의 저주인 저 수치에 매달아 죽여야 한다고
비로소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라고 인간들이 자기를 건드린 예수님을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로 달려들때에 비로소
예수님이 우리를 제대로 건드리신 진짜 예수님이다 말이죠
원수가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지 않는데
어떻게 주의 오른팔이 나타나겠습니까?
그 원수가 누구냐 말이죠
진짜 눈 에는 눈, 이 에는 이 로
주님의 의가 펼쳐지면
저 우상숭배자 니느웨 백성이 멸망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요나가 먼저 멸망해 마땅한 자들인
원수가 아니냐 말이죠
오히려 니느웨 성은
이 우상숭배자들은 회개를 하는데
왜 이스라엘은 회개를 하지 못할까요?
그야 회개를 하고 있다고 여기니까 못하고 있는거죠
하고 있다고 하니까 못하는거죠
못하고 있다고 여기면 할텐데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자신들의 수치가 애굽으로 가려졌음을 들통당하는 식이 되는 겁니다.
니느웨 백성은 오히려 십자가의 피 용서로 가리움을 받는데
맏아들 동생 탕자는 십자가의 피로
하나님의 맹세로 가리움을 받는데
맏아들은 애굽으로 가리우고서 여지껏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 우겨요
꼭 성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모습과 똑같아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면 자기를 스스로 변호할 필요가 없잖아요
아버지가 알아서 변호하면서 나설텐데?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도 변호 안해요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불러도 불러도 대답없는 하나님이다 말이죠
아무 말이 없거든 사랑하는 줄로 알아라 말이죠
자 답이 없다는 것을 누가 또 보겠습니까
당연히 마귀들이지요 우리가 보고 있으니까
이제 마음 놓고 푹 찌르는 겁니다. 죄책감도 필요없이
신나게 찌릅니다 하나님도 외면했으니 우리야 뭐 그것을 합리화 시켜서
하나님도 버린 자 이다 라고 말이죠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으로 버림 받았는줄도 모르고 말이죠
그래서
시체로 만들었는데 그 시체로 깔려 죽는 시체가 되는 것이
십자가의 지혜 이다 말이죠
괜히 베드로 시체를 마귀가 덮썩 물어서 미끼를 확 물었다 말이죠
이스라엘은 미끼 이거든요
우상들이 이 이스라엘을 안 물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뭐 율법의 4배나 갚으라 라고 하나님의 율법으로 가렸다고 자부했지요?
자기가 미끼가 되어야할 다윗이
도리어 미끼를 물어서 부메랑을 맞아야 해요
무슨 수로 피합니까?
맞습니다
대신 매 맞는 꺽으신 뼈로서만
이 우상에서 빠져나올수 있다 말이죠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맹세인 율법 네배나 갚으라만 주장하고 있지
부메랑을 맞고 있지 자기 꾀에 자기가 속고만 있지
하나님의 되돌아오지 않는 맹세를 쳐다보고 있지 않는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고 있다 말이죠
한 아기가 대신 죽어야 함을 안 구하고 있다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죽은 하나님이요 애굽의 힘으로 가리고자 했다는
거봐 거봐 죄 아래 갇힌 티를 팍팍 내고 있잖아
라고 나단 선지자가 지적을 하는 겁니다.
아뿔사 들통났네 ~~~~~~
가려지기는커녕 도리어 들통나버리는 겁니다.
왜? 남을 발가벗길려고 속옷까지 빼앗을려고 말이죠
자기가 발가벗겨지지 않을려고 하니까 남의 속옷까지 고소하면서 법까지 동원해서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 까지 동원하면서 까지 빼앗고자 할까요
우리 속에 있는 죄악을 제대로 건드리신 겁니다.
성화론자들은 때려죽어도 인정 못하지만
그 정도로 우리는 악하지 않다고 우기겠지만
주님은 죄인 중의 괴수로 반드시 만드시는 겁니다.
왜? 자신의 의사됨을 약속됨을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우리를 우상숭배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래야 고쳐달라고 할꺼 아니냐 말이죠
오죽 하면 건강한 자라고
성화론자라고 자랑할 정도로
우상숭배에 빠져 있냐 말이죠
부자청년은 율법을 어릴적부터 다 지켰으니까
겉옷까지 좋은 것으로 가릴 것 다 가린 수치가 가려진 자라고 자부했는데
그럼 가난한자 곧 발가벗겨진자를 너가 가려주라 라고 하니까
그랬다가는 나도 가난한자가 되어서 발가벗겨져서
수치가 다 드러나
천국에 못 들어가면 우짤려고
미쳤다고 전재산을 나누어 줍니까?
미쳤다고 그 동안 쌓아올린 성화된 것을 아무 값없이 공짜로 나누어 줍니까?
그래서 근심하고 등돌리고 돌아서는 겁니다.
자신은 애초부터 애굽으로 수치를 가렸지
율법의 완성인
한번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하나님의 맹세
주께서 내 주께 이룬 말씀으로는
덮쳐지지 않는 가리운바가 되지 않은
인간의 맹세로 애굽으로 우상으로 가린 것을 예수님에게까지 자랑했던 것이
들통나 버렸다는 겁니다.
이것을 또 오늘날 한국교회가 다 이렇게 강요를 해요
그거 사기입니다. 속지 마세요
애굽으로 가려본들 가려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홀라당 불탄다 말이죠
불타지 않는 정금으로 만든 옷을 사라 말이죠
(계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이것이 바로 다윗이 죄가 가려진
주의 맹세로 인해 벌어진 사건을 찬양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이죠
이것이 개인 문제가 아니라이스라엘 전체로 번집니다.
집단화 되요
개인 구원 없어요 성화론자들은 모조리 다 개인 숙제로 돌려요
만약 집단이 맞다면 죽기살기로 강요를 해야 하는데
그랬다가는 교회 장사 안될까봐 교회 안올까 싶어서
그것은 또 살살해요 집단화 시키질 못해요 개인 숙제만 강요해요
그래서 선생이 중요하다고 선생짖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를 하는 겁니다.
바리새인 시스템과 똑같잖아요
이 바리새인 의 보다 낫지 못하면 천국에 못간다고 그래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간이 내세울 의라는 것 인간이 내세울 선생이라는 것은
겨우 바리새인 밖에 안된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인들이 의를 내세우고 주장할 때
자기 교회의 목사 밖에 없더라는 거죠
그 정도로 빈약하기 짝이 없는 겁니다.
풍요롭게 넉넉하고 흘러 넘치는 것이 은혜가 하나도 없어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없이
죽은 하나님만 있는 겁니다.
겨우 내세울 꺼리가 목사 밖에 없다니 말이죠
겨우 겨우 급급하게 조작해 낸 급하게 조성한 목사의 의 로움 뒤에 숨어서
자신들이 옳다 라고 주장하는 식 밖에 안되니
그 목사 뒤에 숨어본들
그 법궤 뒤어 숨어본들
법궤가 오히려 블레셋 군사들아 홉니와 비느하스 여기 내 뒤에 숨었다어서 잡아 죽여라 라고 하더라 말이죠
이상하죠 도대체 하나님은 누구 편 입니까
이스라엘 편 아닙니까?
그런데 블레셋 편 들고 있잖아요
거 보세요 우상 문제를 블레셋으로 메시아 삼아서 없애버리겠다는
새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우상을 해결할 길이 없어요
그 블레셋도 어차피 우상숭배자이니까 없애버리고요
이런 배신을 하나님의 배신을 무슨수로 감당하겠냐 말이죠
목사가 언제 배신할 줄도 모르는데? 왜 목사를 믿냐 말이죠
십자가에 달려 대신 죄 값을 치른적도 없는
그 애굽으로 수치를 왜 가리느냐 말이죠
앞의 간음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왜 모세에게 이혼증서를 써 달라고 강요를 하냐
돌다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그런데 먼저 들킨자가 여자 일 뿐이다는 겁니다.
그 정도로 약하거든요
사회 생활하는 여성이 남자보다 몇배나 허물어지기 쉽다 말이죠
그런데 남자 보다 여자가 먼저 들통나니까
옳타구나 싶어서 이 기회를 자신의 간음을 음욕을 정당화 하는 기회로 삼는 겁니다.
이혼증서 써 달라고
마치 십자가의 예수님과 이혼케 해 달라고
저 봐라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달렸는데
내가 왜 저 예수를 믿어야 하느냐
나는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가 아닌
십자가에 달리지 않는 예수 곧 우상을 믿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나도 같이 십자가에 하나님의 저주에 달리는 말이냐?????
남자는 휴 다행이다 내가 먼저 들통당하지 않았네
남자인 내가 먼저 간음했음에도 말이지
그래서 남자는 어서 어서 이혼증서를 모세에게 협박하면서 써 달라고 한다 말이죠
법을 지킨다는 것이 더더욱 완악함으로 맞물린줄 모르고 말이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이니까
이것이 정의실현이다 라고
나도 들통나면 그때 처벌 받으면 될꺼 아니냐
그러나 지금은 들통나지 않았고
먼저 여자가 들통났으니 어서 심판해 달라고 하더라 말이죠
우와 참 대단한 정의다 말이죠
이것이 인간들이 외치는 정의실현이다 말이죠
정의사제구현단들이 마귀들인 이유가 다 이런 식이다 말이죠
참 고맙게도 전두환이 먼저 들통났고
아직 자신들은 들통나지 않았으니까 이 전두환이를 심판해 달라고 하더라 말이죠
맞아요 그런데 어차리 너도 언젠가는 들통날테니 진짜 정의를 실현할려면
정의를 외치는 너도 같이 사형시키자 말이죠
그카이 뒤로 빼는 겁니다.
아니 정의 실현하자매????
이것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의 저들의 해석 아니냐 말이죠
법대로 하자매?
그런데 주님은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선악에서 나온 정의가 아니라
은혜에서 나오는 정의이기에
이 의란 사망의 권세를 이기를 의로움이기에
선악의 법칙을 이긴다 말이죠
그래서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이 십자가라는 피 용서를 외치는데 있어서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는
정의를 외치는 가룟유다처럼
바리새인처럼
인간의 의를 외치더라 말이죠
이 불의한 법령을 발포를 하더라 말이죠
주님은 전두깽이든 정의사제구현단이든 똑같은 마귀새끼로 보고 있는데
둘다 심판 속에 다 집어넣어야 하는데
촛불시위를 한 자들이든
문재인이나 문빠든
친박 비박 박박 이든 모조리
태극기 집회를 하는 꼰대들이든 뭐든 모조리 다 말이죠
처음 아담에 속한 자들은 다 이전의 것으로써
모조리 다 삭제 당해야 할
모조리 다 심판해야 하는 것이 정의인데
그런 정의는 또 안된데
뭐 이런 엉터리 정의가 어디있냐 말이죠
이 정의는 되고 저 정의는 안되고
ㅋㅋㅋㅋ
그 정도로 이것을 수치로 못 보는 겁니다.
자신들의 정의가 수치인줄
배설물인줄
모르고
오히려 스카이 캐슬이래요 글쎄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래요 글쎄
똥 덩 어 리 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다들 스카이 캐슬 중의 스카이 캐슬이 되기를 원하지
누가 죄인 중의 괴수가 되고파 하겠냐 말이죠
은혜를 모르는 자는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니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까정
율법을
하나님의 것을 반드시 대동하면서까지 자기 정당화에 나서는 겁니다.
이것이 맹세하지 말라는 또 어기는 식이다 말이죠
목사가 하는 짖이 맨날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와서 협박 공갈을 하잖아요
그래야 먹혀드니까 말이죠
하나님의 명령이다 어서 이거 지켜라 라고
건축헌금이나 충성봉사 등등을 강요하잖아요
주님은 도리어 강도의 소굴을 해체 시킬려고 왔는데 말이죠
누구처럼 지신밟기를 하는
부처상의 목을 잘라서 우상타파를 했다고 우기는
그게 우상이면 그 우상을 짜른 자신이 우상된 목은 왜 안 자를까요?
눈 에는 눈 이에는 이 라는 해석을 할줄 안다
이것을 나는 실천하겠다
정의의 이름으로 라는
이 해석 자체가 엉터리임을 오늘 본문에서 밝히시는 겁니다.
그런 정의를 실현하는 자기 속에 정의가 과연 단 한 개라도 있기는 있냐 말이죠
다윗은 비로소 정직한 영이 없다고 합니다.
뭘 해도 다 죄 밖에 없다고 합니다.
죄에서 나온 정의실현구현이다는 거죠
일반인이 그렇게 한다면 몰라서 그렇구나 라고 이해라도 하겠지만
꼴에 카톨릭 신부라는 놈들이 저러고 있으니
목사들도 똑같은 놈들이지요 공부를 안해요 아예
그저 장사할 궁리 밖에 없어요
강도의 소굴이 카톨릭만 아니라 개신교도 강도의 소굴
사단의 회입니다. 짐승 666이다 말이죠 종교는 다 666이다 말이죠
뭘 해도 함량 미달이라
자가가 함량미달 거룩을 저울에 달아보니 미달인데
남보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선언할줄 아는 자기가 정의롭데?
웃끼죠
우리에게는 정의가 단 하나도 없어요
정직한 영이 없어요
날 때부터 소경일 뿐이다 말이죠
그저 고쳐주세요 라고 우는자 일 수밖에 없는
제대로 된 하나님의 심판과 완벽한 심판과 거룩을 만나지 않는 이상
내 속의 우상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는 겁니다.
주여 하하 라고 웃는 자들에게서 건져주소서
그렇게 하하하 비웃는 우리들에게서 예수님을 구원해 주소서
이 성취된 약속만을 바라보게 하소서
(시 35:21, 새번역) 『그들은 입을 크게 벌려 "하하!" 하고 웃으면서 "우리가 두 눈으로 그가 저지르는 잘못을 똑똑히 보았다" 하고 위증합니다.』
(시 35:25, 새번역) 『그들이 마음 속으로 "하하,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졌구나" 하고 고소해하지 못하게 해주십시오. "드디어 우리가 그를 삼켜 버렸지" 하고 말하지도 못하게 해주십시오.』
(시 40:14, 개역)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자로 다 수치와 낭패를 당케 하시며 나의 해를 기뻐하는 자로 다 물러가 욕을 당케 하소서』
(시 40:15, 개역) 『나를 향하여 하하 하는 자로 자기 수치를 인하여 놀라게 하소서』
(시 40:16, 개역) 『무릇 주를 찾는 자는 다 주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며 주의 구원을 사랑하는 자는 항상 말하기를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게 하소서』
(시 40:17, 개역)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