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8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심 (마 8,14-17)

김 대식 2019. 5. 10. 15:42

우리의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시고 질병을 짊어지셨도다 (마 8,14-17)
(왜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려 죽어야만 하는가? 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야만 했는가?)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대신 짊어지심

(마 8:14, 개역)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마 8:15, 개역)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마 8:16, 개역)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마 8: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4, 새번역)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셔서,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셨다.』

(마 8:15, 새번역) 『예수께서 그 여자의 손에 손을 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그 여자는 일어나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마 8:16, 새번역) 『날이 저물었을 때에, 마을 사람들이 귀신 들린 사람을 많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내시고, 또 병자를 모두 고쳐 주셨다.』

(마 8:17, 새번역)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 ㉥사 53:4』

 

(마 8:17,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 8:17, 새번역)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는 몸소 우리의 병약함을 떠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 ㉥사 53:4』

(마 8:17, 공동) 『이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셨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이사 53:4.』

(마 8:17, 쉬운)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가 말한 것을 이루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짊어지셨고 우리의 질병을 떠맡으셨다.” 예수님을 따르려면』

(마 8:17, 우리말) 『이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몸소 우리 연약함을 담당하셨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사53:4』

(마 8:17, 킹흠정) 『이것은 대언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려 하심이라. 이르시되,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담당하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졌도다, 하였느니라.』

(마 8:17, 한글킹) 『그렇게 하심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것을 이루려 하심이니, 말씀하시기를 "그가 친히 우리의 연약함을 맡으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느니라."고 하셨더라.』

(마 8:17, 현대인)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의 다음과 같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담당하시고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셨다.'』

(마 8:17, 현대어)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ㄴ)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 (ㄴ. 사53:4)』

 

 

인간의 손에서 조작된 하나님은 곧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것은

마치 요즘 대세인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현대판인 어벤져스는

질병을 없애 버리는 신이지 영웅이지

대신 짊어지지는 않습니다.

대신 짊어지게 되면

 

인간 보다 못한 존재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런 존재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그래서 사람이 원하는 존재로써의 구원자는

계속해서 영웅으로 남아야지

약해지는

대신 질병을 걸려서

 

싫어버린바 되고

아름다운 풍채도 없고

고운 모양도 없고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리는

질고 곧 질병을 끙끙 앓는 자는

 

인간의 선악의 사고방식에서는 신이 될 수가 없는 겁니다.

인간의 손에 조작된 신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이지
사람을 기쁘게 하지 못하는 신은 가짜가 되는 거죠
결국 신은 인간의 자기투영인 겁니다.

 

이런 인간의 악마성에 예수님은 겁도 없이

인간에게 시비를 거시는 겁니다.
감히 신이 된 인간에게 말이죠.
슈퍼 히어로 에게 덤비다니 ~~
유대인(모든 인간의 대표성)에게 감히 감히 덤비다니 ~~

 

이게 믿음입니다.

 

인간에게서의 믿음은 그 반대죠

아까 말한 그리스 로마 신화의 현대판 미국 영웅 초인인데 말이죠

어벤져스 복수자

나를 괴롭히는

인간을 못살게 구는 자들에 대한 복수를 실행하는 자가 바로 영웅 곧 신이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모든 믿음은 복수심입니다.

 

그 정도로 병에 걸려 있다 말이죠

 

이 사망에

이런 병마에

이런 죄악에 겁도 없이 덤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 이십니다.

 

그 질병 내가 대신 짊어지겠다 라고 말이죠

 

인간은 바로 이런 수치를 가리기 위해서

더한 수치가 되는 애굽으로 수치를 가릴려고 합니다.

아니 수치를 가리는데 더한 수치 덩어리인 애굽으로 가릴려고 말이죠

 

마치 영웅 슈퍼맨으로 수치를 가릴려고 해요 글쎄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대신 못 박혀 죽는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가룟유다의 소원대로 저 악마인 로마 독재를 향해 복수를 해주는 어벤져스로

수치를 가릴려고 해요
그런 메시아가 되어 달라고 해요 글쎄

 

그런데 답이 없어요

 

그래서 자살을 해요

어차피 답을 때려죽어도 알수 없으니, 살아서 뭐 하냐 라는 식이니까 말이죠
헛맹세로 다시 부메랑처럼 되돌아오는 겁니다.
그 복수심(인간의 믿음)이 원수를 향하던 것이
의문의 반복이 되어버리니까 자기에게로 복수를 향해버리는 겁니다.

 

답이 없으니 태어나지도 말았어야 했다는 겁니다.

 

이 자살의 형태가 바로 얼마전에 다룬 부활의 골짜기 거주민 예루살렘 사람들이었다 말이죠

오늘로 치면 교회 다니는 사람이지

 

즉 교회가 아닌 사람들이지요

 

교회 다니는 자가 바로 가룟유다의 자살처럼 부활의 골짜기에 살면서도

에라이 어차피 내일 죽을꺼 먹고 마시다 죽자 라고 하는 자들이라면

그럼 교회 안다니는 사람이 되면 되겠네 라고

역시나 교회 다니는 자와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사는 자들이다 말이죠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은 겁니다.

 

교회 다니든 안다니든 상관없이

 

성령의 전은 바로 너희다 라고 했듯이

 

(고전 6:19, 개역)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내가 교회가 아니면

백날 교회 다녀도 소용이 없고

백날 교회 안다녀도 소용이 없듯이

 

교회가 안되면 소용이 없는 겁니다.

 

부활의 골짜기에 살면 뭐해요

부활 할 수가 없는데

부활의 골짜기에 안 살면 뭐해요

역시나 부활 할 수가 없는데

 

아니 십자가만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 하는게 아닙니다.

부활도 마찬가지로 거리끼는 걸림돌이다 말이죠

 

질병에 걸렸는데 이 질병에서 건짐을 과연 누가 받을 수 있겠냐 말이죠

 

본인도 안되고 그 주변인들도 안된다는 것을 알기에

 

놀랍게도 비로소 이제 본격적인 사기(인간의 꾀)를 펼치는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을 가지고 장난을 쳐요

종교오락을 펼쳐요

이 인간의 꾀인 종교라는 오락게임(마약)과 십자가가 밝히 보이심과 한 세트를 구성해서 대조를 
그 차이를 그 공백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철저한 간극인 단절을 말이죠.



인간의 꾀는
날때 부터 소경이 된 실로암 소경에게

저 사람의 죄는 자기 죄인가? 부모 죄인가?

 

경찰청 철창살은 외철창살이냐? 쌍철창살이냐?

 

잰말놀이 오락 게임을 하고 있다 말이죠

어차피 죄를 해결할 마음은 없어요

 

원인만 찾으면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과학의 세계입니다.

과학은 종교예요

불편함을 해결하고자 편리함으로 만들면

그것이 또 불편함으로 나중에 자리하고 마는 겁니다.

시이소를 한 쪽을 눌러서 해결했다고 치면

어느새 다른 한 쪽은 올라가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곪아 섞어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를 해결하니까 다른 쪽이 문제로 다시 부풀어 올라 나타나더라 말이죠

불치병 매독을 해결하는 약을 개발하니까 다시 불치병 에이즈가 나타나더라 말이죠

선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런데 이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함이다 라고

 

완전 거꾸로 보고 계시더라 말이죠

 

(요 9:1, 개역)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 9:2, 개역)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즉 인간은 원인만 찾으면 해결된다는 식의 시공간에 갇힌

육적인 사고방식이고

 

예수님은 그 반대로 결과가 떴기에 원인이 없다 라고

도리어 원인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답변인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도리어 사건을 일부러 일으키시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외치시고 산에서 내려오니까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것일까요?

 

왜 베드로의 장모가 하필이면 그때 질병이 걸린 것일까요?

지금 생각해 보니

누가 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를 예수님이 기도의 의미로써 하셨는가 라고 물으셨는데


결과로써 즉 미래완료로써 곧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로써

이 비유를 보게 되면

비유 즉 비밀 자체가

답으로 보이지 않는 이상

문제로 보면 문제만 남지 답이 안보이고


답을 누가 몰래 미리 알려주는 반칙을 벌리면

문제가 전혀 안보이고 답만 보인다 라고


그 반칙을 벌리는 자가 바로 사랑이다 라고 했다 말이죠
즉 사랑 자체가 반칙이다 말이죠.

 

그러니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답에서

아 기도란 이런 것이구나 라고

답을 미리 누가 반칙으로 알려준 입장에서

 

이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그야말로 지혜가 됩니다.

 

상대적으로 정의로운 재판관을 이미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이상

불의한 재판관은 마치 십자가처럼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는 겁니다.

 

마침 바로 앞의 글 이사야 59장에서

분명 이스라엘의 죄악으로 심판을 퍼붓겠다고 하시는데

아 그럼 절망이구나 나는 끝났구나 라고 생각할 만도 한데

도리어 너희들이 엉망이니까 내가 아예 너희들에게 기대를 하지 않겠다 라고

이제 너희들을 영원히 버리겠다 가 아니라

 

도리어 이제 너희들에게 아예 기대를 하지 않으니까

나의 성령을 부어 넣고 나의 말씀을 너희와 너희 자손에게 영원히 함께 하도록 떠나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이상하죠

 

즉 이것은 우리는 못 알아먹는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는 말씀인 겁니다.

 

즉 우리는 왜 말귀를 못 알아먹는고 하니

이미 마귀가 심어버린 선악의 법 의식이 있다 보니

모든 것을 전도된 것으로 사회를 구성하고 조직한 시공간을 즉 역사를 구성했다는 겁니다.

 

그것이 앞에서 살펴본 엉터리 금식을 하듯이

엉터리로 부활의 골짜기에 살면서도 부활을 못하는 식이

 

바로 마귀가 곧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그 습관에 쩔어 살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공간의 해석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답이 없어도 문제만 있어도 잘 사는 세계를 따로 형성하더라 말이죠

 

그 천국을 주님께서 허물겠다고

천국을 침략하시는 자로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그 엉터리 예루살렘을 허물어서

진짜 예루살렘을 빼앗기지 않겠다 라고

산상수훈에서 외치시고 드디어 실행하시는 겁니다.

 

병이 걸려서 그 병의 원인을 따지고 그 원인을 찾아내서

고쳐서 결과를 도출하고자

 

부모 죄인가? 자기 죄인가? 라고 원인이 누구냐 라고 따지는

역사의 사고방식인 반면에

 

예수님은 거꾸로 그 반대로

결과가 떴기에

문제를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
죄인을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겁니다.(의인을 부르러, 건강한 자를 부르러 오신게 아니듯)

즉 수수께끼를 냅니다.

 

왜? 문제가 없기에

 

왜? 문제가 없기에 문제를 내는 겁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라고

 

그래서 바리새인에게 시비를 걸더라 말이죠

 

왜?

 

희년이 떴기에 나타난 증상이기에

 

(요 9:7, 개역)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 9:8, 개역)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요 9:9, 개역)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요 9:10, 개역)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요 9:11, 개역)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요 9:12,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요 9:13, 개역)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요 9:14, 개역)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요 9:15, 개역)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요 9:16, 개역)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요 9:17, 개역)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한대』

(요 9:18, 개역)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요 9:19, 개역)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요 9:20, 개역)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요 9:21, 개역)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요 9:22, 개역)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요 9:23, 개역)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요 9:24, 개역)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요 9:25, 개역)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요 9:26, 개역)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요 9:27, 개역)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요 9:28, 개역)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요 9:29, 개역)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요 9:30, 개역)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요 9:31, 개역)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요 9:32, 개역)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요 9:33, 개역)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요 9:34, 개역)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요 9:35, 개역)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를 믿느냐』

(요 9:36,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요 9: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개역)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요 9:39,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요 9:40, 개역)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요 9:41,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그래서 마귀만을 상대로 하시기에

바리새인에게 시비 거시는 겁니다.

 

수수께끼

곧 문제를 내십니다.

이미 답을 보여줬어요

 

실로암 소경을 답으로 보여줬다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니까

너는 마귀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니가 소경이다 라고 본다고 하니 소경이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말이죠

 

즉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정작 눈 못 보는 소경은 보고 듣고 믿으나

정작 본다고 하고, 소경 아니다 라고 하는 자는 못 보고 못 듣고 못 믿으니

진짜 소경이 누구냐 라고

 

수수께끼 풀어보라 라고 문제를 내시는 겁니다.

 

또 그 유명한 문제 수수께끼

 

다윗이 다윗의 자손에게 주여 라고 했다면

다윗의 자손은 다윗의 주가 되는가?

아니먼 다윗의 자손이 되는가?

 

주 께서 내 주께를 풀어보라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이거 답하지 않으면

나도 너희에게 안 알려주겠다 라는 식으로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말이죠

 

(마 22:41, 현대어) 『[그리스도는 누구의 자손인가? ; 막 12:35-37, 눅20:41-44] 예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는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셨다.』

(마 22:42, 현대어)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누구의 자손이냐?'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다윗의 자손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눅 20:1, 개역) 『하루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실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눅 20:2, 개역) 『말하여 가로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 권세를 준 이가 누구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눅 20:3,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내게 말하라』

(눅 20:4, 개역) 『요한의 침례가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

(눅 20:5, 개역) 『저희가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눅 20:6, 개역)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백성이 요한을 선지자로 인정하니 저희가 다 우리를 돌로 칠 것이라 하고』

(눅 20:7, 개역) 『대답하되 어디로서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니』

(눅 20: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눅 20:9, 개역)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즉 부활의 골짜기인 예루살렘에 백날 살아도

오늘날로 치면 교회 백날 다녀도

 

산자로 사는 자가 아니라

즉 답만 있고 문제가 없는 자로 사는 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죽은 자의 하나님만 대따 많이 믿는

즉 문제가 있고 답이 없는 자로만 살고 있는 것이

 

들통나 버리는데

그래서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식으로

 

어서 어서 날 죽여라 라고 속을 빡빡 끍어대시는 겁니다.

 

그래서 산 자는 죽은 자들에게

산척만 하고 있지 실제로는 죽은 자들에게

특히 부활의 골짜기에 살고 있는

죽은자에게

 

문제만 있고 답이 없는 자들에게

문제만 대따 많이 드세요 라고 문제만 까가득 채워 풀어보라고 하시고

 

상대적인 한 세트인 긍휼의 그릇에게는

그 문제 내가 담당할께요 느낌 아니까 답을 아니까 라고
그 질병, 그 연약함, 그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음을 내가 대신 짊어질께요 느낌 아니까 라고

 

일부러 비정상적인 자들을 저 정상이라고 우기는 자들과 대비시켜서

자신의 긍휼 즉 일방적인 편파 편애를 담아서 증거하시는 겁니다.

 

자 그럼 제가 문제를 내 볼께요 답을 맞추어 보세요

아주 아주 쉽습니다.

방금 답을 다 알려 드렸거든요

 

자 그럼 주님은 기도 할 때 낙망하지 말라고

죽은 기도가 아니라 산 기도를 말씀하시고자

비유로써 수수께끼로서

문제가 아닌 답을 미리 미래완료로써 미래표절로써 말씀하시는데요

 

정상적인 정의로운 재판관으로 과부의 기도 비유를 하실까요?

아니면 비정상적인 하나님도 안 두려워하고 사람들도 무시하는 비정상적인 데다가

더군다나 불의하기 짝이 없는 불의함 까지 갖춘 불의한 재판관을 들어서

 

기도에 대한 비유를 하실까요?

 

어떤 자를 들어서 기도에 대해 비유 곧 수수께끼로 말씀하셨나요?

 

수수께끼 곧 삼손의 수수께끼는 삼손 개인만의 경험입니다.

 

모든 성경은 오로지 예수님 개인만의 숙제입니다 곧 답이다 말이죠

그 개인을 죽여서 원하시는 자에게 심어버렸습니다.

이제 개인이 아니라 우리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럼 그 자는 다윗의 자손입니까 다윗의 주 입니까?

즉 개인의 숙제 있습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숙제만 있습니까?

 

주님의 살과 피를 먹은 자는

산 자 입니까? 죽은 자 입니까?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예수님을 먹은 자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신 자입니다.

 

즉 나는 병자입니다 죄인입니다 라고 하는 자만이 약이 필요하고 약을 먹듯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자 이지

 

건강하다고 의인이다고 하는 자는

끝까지 윤리 도덕 선악의 법을 따지는 종교 오락게임을 절대로 포기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건강하다고 의인이다고 소경 아니다고 본다고 우기는 그 게임을 펼치는 겁니다.

 

(눅 20:15, 개역)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눅 20:16, 개역)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시니 사람들이 듣고 가로되 그렇게 되지 말아지이다 하거늘』

(눅 20:17, 개역)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함이 어찜이뇨』

(눅 20:18, 개역) 『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겠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하시니라』

(눅 20:19, 개역)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의 이 비유는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눅 20:20, 개역) 『이에 저희가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이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눅 20:21, 개역)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치 아니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눅 20:22, 개역)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눅 20:23, 개역)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눅 20:24, 개역)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뉘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대답하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눅 20:25, 개역)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눅 20:26, 개역)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히 여겨 잠잠하니라』

(눅 20:27, 개역) 『부활이 없다 주장하는 사두개인 중 어떤 이들이 와서』

(눅 20:28, 개역)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여 모세가 우리에게 써 주기를 사람의 형이 만일 아내를 두고 자식이 없이 죽거든 그 동생이 그 아내를 취하여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울지니라 하였나이다』

(눅 20:29, 개역) 『그런데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아내를 취하였다가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0, 개역) 『그 둘째와 셋째가 저를 취하고』

(눅 20:31, 개역) 『일곱이 다 그와 같이 자식이 없이 죽고』

(눅 20:32, 개역) 『그 후에 여자도 죽었나이다』

(눅 20:33, 개역) 『일곱이 다 저를 아내로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그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

(눅 20:34,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눅 20:35, 개역) 『저 세상과 및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함을 얻기에 합당히 여김을 입은 자들은 장가가고 시집가는 일이 없으며』

(눅 20:36, 개역) 『저희는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니라』

(눅 20:37, 개역) 『죽은 자의 살아난다는 것은 모세도 가시나무 떨기에 관한 글에 보였으되 주를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라 칭하였나니』

(눅 20:38, 개역)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에게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 하시니』

(눅 20:39, 개역) 『서기관 중 어떤 이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말씀이 옳으니이다 하니』

(눅 20:40, 개역) 『저희는 아무 것도 감히 더 물을 수 없음이더라』

 

그래서 다시는 질문을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감히 더 물을려고 해도 자신들이 죽은 자의 하나님만을 믿은 것이 더더욱 들통나니까 말이죠

 

그렇다고 부정한자 비정상적인 자를 앞장세우는 예수님의 산 자의 하나님은 못 믿겠고

즉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으니까 부활의 골짜기에 살아도 부활이 아니라 죽은자 임이 드러나는

그래서 더더욱 수치를 가리고자 애굽으로 수치로

수치인 애굽으로,

수치(죽은자의 하나님=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무녀의 자식)를 수치(애굽)로 가린

 

그래서 예루살렘에 살고

부활도 못 믿으면서 즉 서기관

또 부활을 믿는다고 우겨도 즉 바리새인

여전히 부활을 거부하는

부활이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그저 숙제하기를 했다 라고 문제만 까까득 예수님 앞에 내어놓으니

과연 풀었는지 보자 말이죠

문제를 내니까 하나도 모르는 겁니다.

그럼 모르면 모른다고 하고

알려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소경이니 고쳐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본다고 하고

소경 아니다 라고 하니 소경인 겁니다.

 

즉 성경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되는데

꼴에 성경박사들이고

더군다나 율법학자 박사들이고

그런 지위와 자리에 앉았다고 우기나

 

그럼 제대로 아시는 분이 왔으면 말석으로 내려오면 되잖아요

아 그런데 끝까지 모르면서 성경 안다고 하니

 

성경 문제를 내니까 하나도 모르는 겁니다.

모르면서

모르는 것 들통 났으면서도

끝까지 건강한 자의 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고

의인의 자리에 끝까지 앉아 있으면

 

과연 의인일까요? 악인 일까요?

 

사람이 불안과 공포가 자리 잡으면

 

손 놓으면 편안해 집니다.

맡겨 버리면 편안해요

 

아 그런데 불안과 공포가 바로 없는 자아

그것도 성경박사 라는 자아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서

그 없는 자리에 기여이 앉아서

때려죽어도 내려오지 않으니까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더욱 더 크게 작용하는 겁니다.

 

절대화 필연화 하면 할수록 더더욱 무너지기 쉬워요

 

그만큼 허상이거든요 안개이다 말이죠

후 불면 날라가요

 

어차피

 

차라리 처음부터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그대 ~~~ 라고

우연으로 보시면

 

필연이 없는

절대성이 없는

동질성 합일성이 없는

 

조건, 원인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다면

모든 것이 예 곧

답만 있지

아니오 함이 없다 말이죠

 

숙제가 없어요

 

그런데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 라고

절대화 했다는 자체가

불안과 공포에서 나온 절대성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전재산을 다 나누어 주라 라고 율법의 원래 취지가 사랑이거든요

그거 해 보라고 하니까

 

수치를 엉터리 애굽으로 가렸던 것이 홀라당 벗겨져서

원래 공포와 불안이 없던 자아를 만들어서

그 자아에게 숙제 하라고 억지로 가르치고 억지로 행했으니

얼마나 위로와 상호인정, 상호기대, 상호기만이 얼마나 고팠겠냐 말이죠

 

그래서 위로받을 줄 알았는데

확 벗겨 버리니까

수치가 드러나니까

 

아니 그동안 수치를 가릴려고 그것을 지켰는데

확 벗겨버리면

남들이 보는 앞에서 발가벗겨 버리면

불안과 공포가 확 몰려올 거 아니겠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안 벗기면 안 되는 겁니다.

그거 가짜야 라고 자신의 살과 피로만 수치를 가릴 수 있지

다른 것으로는 대신 감당이 안돼 라고 벗겼는데

도리어 불안과 공포

곧 근심하고 돌아서 등 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건강한 자 맞죠

의인인거 맞죠 라고

 

수치를 완벽하게 가렸는데

 

아니야 넌 병자야 라고 그런 엉터리 애굽으로 수치를 가릴수 없단다 라고

수치로 수치를 가릴려는 인간들의 종교 오락을 벗겨 버리고

이제 입혀 줄려고 하니까

 

본인이 도망쳐 버리더라 말이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할 정도로

나는 그 정도로 나쁜 놈 아니다 라고

그럴 정도로 환자가 아니다 라고

 

그 정도 까지는 죄인이 아니다 라고

등 돌리고 가버리는 겁니다.

 

왜? 예수님 꼬라지를 보니

자기 보다 더 더러워요

더 시꺼멓게 태양빛에 그슬려서

30대 양반이 60 넘은 늙은 얼굴 피부라

흠모할 고운 모양도 없고

아니 질병을 고친다는 양반이 도리어 질병이 걸려 있는 양반 같아

 

괜찮은 나를 허상으로 만들어 놓았는데(없는 나를 존재로 만들었으니 더더욱 결핍이 심하니까 채울려고 종교오락게임에 빠졌는데)

 

그런 괜찮은 나를 더더욱 더 괜찮게 하고자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는데

 

아니 이 예수라는 양반은 나 보다 더 못한 모습이라

 

죽은자 같아

질병 걸린자 같아

 

그런데 어떻게 이 양반을 믿겠으며

더더욱 살과 피를 먹겠냐 말이죠

아니 식인종의 그런 의미보다

 

도리어 내가 살과 피를 떼어 줘야 할 정도로

발가벗었는데

아니 나 보고 발가벗었다니

 

어라 진짜 벗겨 버리네

아 그럼 주님이 가려주셔야 하는데

예수님은 더더욱 벗겨진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네

 

답은 하나도 못 찾고

문제만 잔뜩 남아서

에라이 못 풀겠다고 등 돌리고 가는 겁니다.

도저히 못 풀겠다고

 

주여 풀어주세요 라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라꼬 하니

나 보다 더 못해 보여!!!

 

그러니 도움을 구하겠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된다고 돌아서는 겁니다

 

끝까지 없는 자아를

그 자아 중심에서 벗어난 생각을 못하는

자아에게 갇혀 포로 되었다 말이죠

자아란 없는데

모든 인간은 공동된

욕망이라는 분모에서 생성된

[자아] 라는 자아가 태어나다 보니

이상하게 같은 욕망을 가지더라 말이죠

 

그래서 항상 남과 비교하면서 삽니다

남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죄를 없애 준적도 없는데

그 남들을 의식하면서 말이죠

 

그러다 보니 예수님은 비정상적인 자들을 동원해서

즉 십자가의 지혜는

어리석고 미련한 자를 택해서

슬기롭고 지혜롭다 라는 자를 폐하러 왔다 말이죠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6, 개역)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전 1:30, 개역)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 1:31, 개역)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안 폐하면 그 가짜로

죽은 하나님으로

수치를 가렸다고 우길 테니

 

시온에서 나온 뜨인돌이

그 기능이 우상을 허물지 않으면 그 기능대로 뜨인돌이 아니잖아요

 

의사인데 못 고치면 의사 아니잖아요

부활의 골짜기에 사는데 부활 못하면

죽은자의 하나님이잖아요

 

주님은 산자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래서 사망을 폐하러 왔다 말이죠

 

그 엉터리 부자청년을 폐해야 합니다.

엉터리 성경박사들 폐해야 합니다.

 

안그러면 십자가가 아니요

산자의 하나님이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먼저 희년 되신 예수님이 떴기에

베드로 장모는 죄인으로 병자로

소경으로 병든자로 비정상적인 자로

 

마치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처럼

하나님이 하실 일을 나타내시고자 날 때부터 소경이 되어야만 했듯이

 

에수님이 떴다는 그 이유로

베드로 장모는 멀쩡히 그동안 있다가

갑자기 열병을 앓아서 죽게 되는

죄인으로써 새롭게 만들어져서

환자로써 새롭게 만들어져서

 

저 분이 의사임을 나타내고자

저 분이 구원자 임을 나타내고자

 

그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겁니다.

 

누가 이 질병을 짊어지는자 인가를 보라 라는 겁니다.

 

저 총명한자와 지혜롭다 라고 성경 가르치는 선생 노릇하는 자들은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는 이 예수님을

 

너희 죄인들 환자들은 예수님의 반칙으로 인해

딱 보아도 알고

딱 들어도 아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저 죽은자의 하나님 곧 썩은 동앗줄 붙잡지 말고

나를 붙잡으라 라고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답을 알지 못해서 망하는

그래서 답을 알려 주시고자

저들에게서 비정상적인 자로 취급받는

이 환자의 자리에서

이 죄인의 자리에서 즉 상대적인 한세트를 구성한 저 건강한자라고 우기는

저 의인이라고 우기는 자의 주장을 폐하시고자

 

주님이 일부러 이 비정상적인 죄인인 환자로 만들어서

 

베드로 장모를 열병에 걸리도록 하셔서

이 질고를 대신 감당했다는

 

이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다 라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마 8:17, 현대어)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다. ㄴ) `여호와의 종이 우리의 온갖 질병을 대신하여 앓고 우리가 당해야 할 고통을 대신 당하였다.' (ㄴ. 사53:4)』

 

(사 53:1, 개역)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사 53:2, 개역)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사 53:3, 개역)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사 53:4, 개역)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사 53:5, 개역)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자 그럼 각기 제길로 가는 양같은자가

막사는 자 일까요? 곧 죄인일까요? 아니면

의인일까요?

 

앞의 글 막살아서 마땅히 심판 받았는데 어라 정직한 영을 부어주시겠다고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이사야 59장에 말씀하시고

 

정작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부자청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둥(맏아들)

이런 자에게 예수님이 자신의 살과 피를 먹으라 라고 줘도

 

안 먹는다 말이죠

왜? 각기 제길로 가는 양 같지 않았다고 우기니까

나는 저 매국노 세리와 같지 않음을

저 막사는 자 같지 않음을

 

나는 저 비정상적인 환자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했으니

어떻게 산자의 하나님을 만나겠냐 말이죠

 

예수님이 전혀 안보이고 안들리는

예수님 앞에서 본다고 우기고 들린다고 귀머거리 아니라 라고 우길뿐이다 말이죠

 

 

(눅 4:16, 개역)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눅 4:17, 개역)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눅 4:18, 개역)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눅 4:19, 개역)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눅 4:20, 개역)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눅 4:21, 개역)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눅 4:22, 개역)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눅 4:23,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눅 4:24, 개역)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눅 4:25, 개역)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눅 4:26, 개역)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눅 4:27, 개역)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눅 4:28, 개역)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눅 4:29, 개역)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눅 4:30, 개역)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그래서 선지자가 고향에서 곧 나사렛이죠, 환영을 못 받고 낭떠러지로 내몰릴 정도로

 

그 정도로 듣기는 들어도 못 듣는 소식이요

보기는 보아도 못 보는 샬롬이 없는 평안이 없는 악인임이 드러나는

 

그저 인간들이 바라는 메시아는 마귀가 우상과 하나님을 섞어버린

마귀의 세 가지 문제나 해결하라 라고

경제 배고픔 문제

종교 구원 부활문제

정치 존재가치 인정받는 으뜸이 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수치를 가리는 것이다 라고 우길 때에

 

예수님은 이 악마가 심은 것을 폐하러 왔다는 겁니다.

그리고 새롭게 죄인을 만들어서

그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로써

새롭게 환자로 만들어서

그 환자에게만 필요한 의사로써

 

사렙다 한 과부에게만

수리아 사람 한 문둥병자 나아만 에게만 보내심을 받은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포로된 자 갇힌 자 억눌린 자에게만 보내심을 받은 이 믿음이라는 선물이

산자의 하나님이라는 새언약이라는 약속이

 

이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오듯이

베드로 장모를 예루살렘으로 만들어서 그 예루살렘에서만 말씀 곧 예수님이 나오듯이

이 이사야의 말씀을 성취했다 라고

너희 귀에 응했다 라고 선언하심으로써

그 증상으로써 베드로의 장모의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는 겁니다.

 

즉 병을 없애는게 아니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바로 이것에 반발하는 죽은자가 나타나도록 하셨다 말이죠

 

이 사랑을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는 십자가의 지혜를

원수의 목전에서 펼치시니까 말이죠

 

하필이면 원수의 목전인 안식일을 지키는 그 코 앞에서

월요일 화요일 수요일 목요일 금요일 일요일 다 냅뚜고

하필이면 토요일 안식일날만 골라서

안식일 지키는 자들 코 앞에서

손마른자를 고치심은

 

진짜 누가 병든자 인가?

베드로 장모가 비정상적인 환자인가?

아니면 건강하다고 우기는 자가 참비정상적인 자인가를

 

주님께서 마구 마구 쑤셔대고 
이 예루살렘을 빵구멍을 내버리는 겁니다.

 

인간들이 손으로 세운 천국을 빵구멍을 뻥뻥 내버리니까

못쓰도록 말이죠

 

천국을 침략하니까

이 가짜 천국을 사수하고자 나서는 자들이 다 악마들로 들통나는 겁니다.

 

이 가짜 천국을 허물어 뜨려서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짖겠다 라고

 

진짜 예루살렘을 빼앗기지 않겠다 라고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삼아서 거기서 예수님이 곧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시온에서 율법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말씀이 나오도록

 

성령과 말씀을 부어 넣겠다 라고

그동안 엉터리로 가득 찬 것들을 다 퍼내고 다 걸러내고 다 부수고

다 폐하고 다 엎어버리고

 

다 헐라

 

삼일 만에 짖겠다 라고

 

새롭게 담아서

그 예루살렘에서

베드로 장모를 예루살렘 곧 교회로 만들 듯이

우리를 신부로 만드셔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만들어서

원인 없는 결과로

 

거기서 [말씀] 되신 예수님이 나오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산 자의 하나님이 나오시는 겁니다.

 

그 증상으로 우리는 날마다 죽도록 되어 있는

산 자는 저 분이시다 라고

우리의 죄악을 대신 감당하신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짊어지신 분임을 외치도록 만드시고자

 

우리를 죄인으로 새롭게 만드시는 겁니다.

죽은 자 같으나 산자 라고

 

우리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게 말이죠

 

(고후 4:7, 개역)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개역)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고후 4:9, 개역)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 4:11, 개역)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