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8

[비웃음]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의 차이 (마 9,18-26)

김 대식 2019. 6. 29. 14:24

18-39 [비웃음]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의 차이 (마 9,18-26)

걸어다니는 성전, 죽은자의 집에 찾아오는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성전)

(마 9:18, 개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직원이 와서 절하고 가로되 내 딸이 방장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으소서 그러면 살겠나이다 하니』
(마 9:19, 개역)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 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마 9:20, 개역)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마 9:21, 개역)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마 9:22, 개역)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가라사대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
(마 9:23, 개역) 『예수께서 그 직원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훤화하는 무리를 보시고』
(마 9:24, 개역) 『가라사대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저들이 비웃더라』
(마 9:25, 개역) 『무리를 내어 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마 9:26, 개역)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마 9:18, 새번역)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지도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께 무릎을 꿇고 말하였다. "내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그 아이에게 손을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살아날 것입니다."』
(마 9:19, 새번역) 『예수께서 일어나서 그를 따라가셨고, 제자들도 뒤따라갔다.』
(마 9:20, 새번역) 『그런데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뒤에서 예수께로 다가와서, 예수의 옷술에 손을 대었다.』
(마 9:21, 새번역) 『그 여자는 속으로 말하기를 "내가 그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나을 텐데!" 했던 것이다.』
(마 9:22, 새번역) 『예수께서 돌아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기운을 내어라,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 때에 그 여자가 나았다.』
(마 9:23, 새번역) 『예수께서 그 지도자의 집에 이르러서,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마 9:24, 새번역)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두 물러가거라. 그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그들은 예수를 비웃었다.』
(마 9:25, 새번역) 『무리를 내보낸 다음에, 예수께서 들어가셔서, 그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났다.』
(마 9:26, 새번역) 『이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졌다.』

자꾸 제목을 뭐와 뭐의 차이 라고 붙이게 되는데
즉 이 말은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인간의 행함과 그 차이로써의 예수님의 믿음이기에

이 둘을 한 세트로 해서
그 차이를 봐야

평상시 인간들이 행함으로 차이내는 것들이 다 거짓임을 보게 되는 겁니다.
곧 차이란 거룩이거든요
인간의 거룩 지키기가 얼마나 엉터리임을

예수님의 믿음로 인해서 비로소 제대로 된 거룩(차이)가 뭔가를 보게 되는 겁니다.
이 차이만 곧 예수님의 거룩만 반복되는
차이의 반복 거룩의 반복입니다.

여기에 상대적인 인간의 거룩 곧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상숭배적인가를 지적 받게 되는 거죠

자 그럼 오늘 나온 단어 중에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좀 생소한 단어가 바로
훤화 라는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에는 없고 풀어서 나오는데

(마 9:23, 공동) 『예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러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며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마 9:23, 쉬운)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예수님은 피리를 부는 사람들과 떠드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마 9:23, 우리말)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곳에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곡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마 9:23,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 치리자의 집에 들어가사 노래하는 자들과 떠드는 자들을 보시고』
(마 9:23, 한글킹) 『예수께서 그 관원의 집에 오셔서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들썩한 무리를 보시고』
(마 9:23, 현대인) 『예수님은 회당장의 집에 들어가 피리 부는 사람들과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시고』
(마 9:23, 현대어) 『예수께서 그 회당장의 집에 닿으니 사람들이 피리를 불며 떠들썩하게 곡을 하고 있었다.』

구글에 검색하니

훤화, 喧譁
명사
지껄이어 떠드는 것. 훤조.

그런데 이런 의미는 우리가 성경에서 자주 접하는 의미입니다
즉 울음꾼입니다.

울음꾼 하면 대표적인 사건이 울어서 망한 보김이 생각 나지요
그 유명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유명했던 박땡선 목사의
[구원 그 즉각성과 점진성]에서 보김에 대해서 잘 나오죠

보김 = 우는 자들 이라는 뜻입니다.

(삿 2:1,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길갈에서부터 보김에 이르러 가로되 내가 너희로 애굽에서 나오게 하고 인도하여 너희 열조에게 맹세한 땅으로 이끌어 왔으며 또 내가 이르기를 내가 너희에게 세운 언약을 영원히 어기지 아니하리니』
(삿 2:2, 개역) 『너희는 이 땅 거민과 언약을 세우지 말며 그들의 단을 헐라 하였거늘 너희가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도다 그리함은 어찜이뇨』
(삿 2:3, 개역) 『그러므로 내가 또 말하기를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 하였노라』
(삿 2:4, 개역) 『여호와의 사자가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이 말씀을 이르매 백성이 소리를 높여 운지라』
(삿 2:5, 개역) 『그러므로 그곳을 이름하여 보김이라 하니라 무리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더라』

(삿 2:4, 새번역) 『주님의 천사가 온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 말을 하였을 때에, 백성들은 큰소리로 울었다.』
(삿 2:5, 새번역) 『그래서 그들이 그 장소의 이름을 ㉡보김이라 부르고, 거기에서 주님께 제사를 드렸다. / ㉡'우는 사람들'』

(삿 2:5, 현대어) 『온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소리 높여 울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곳을 ㄱ) 보김이라고 불렀다. 온 백성은 거기서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다. (ㄱ. `우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또 누가 우리에게 잘 알려졌는 사건인고 하니
바로 죽은 나사로 오빠 사건이죠
그때 울음꾼들이 등장합니다.

구글 검색에 4복음 대조 야이로의 딸 이라고 치면 오늘 본문이 뜨고요
4복음 대조 나사로 무덤 이라고 치니까 요한복음에서만 기록 되었다고 나옵니다.http://kcm.co.kr/BIBLE01/Evangels/main077.html

http://kcm.co.kr/BIBLE01/Evangels/main121.html

아무튼 저들이 예수님이 왜 늦게 왔느냐 사랑한거 맞냐
차라리 우리가 나사로를 위해서 울어주겠다 라고 울음꾼 자처하겠다면서 울때에

저들의 눈물을 보시고 쪽팔려서, 민망해서 우시는 장면입니다.

(요 11:33, 개역)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
(요 11:33, 새번역)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우는 것과, 함께 따라온 유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하여 괴로워하셨다.』
(요 11:33, 공동) 『예수께서 마리아뿐만 아니라 같이 따라온 유다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올랐다.』
(요 11:33, 쉬운)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리아의 뒤를 따라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격한 감정이 들면서 몹시 아프셨습니다.』
(요 11:33, 우리말) 『예수께서는 마리아가 흐느껴 우는 것과 따라온 유대 사람들도 함께 우는 것을 보시고 마음이 비통해 괴로워하셨습니다.』
(요 11:33, 킹흠정)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그녀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고』
(요 11:33, 한글킹) 『그때 예수께서 그녀가 울고 있는 것과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으로 신음하시며 괴로워하시다가』
(요 11:33, 현대인) 『예수님은 마리아가 울고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까지 우는 것을 보시고 몹시 안타까와하시며』
(요 11:33, 현대어) 『예수께서는 마리아뿐 아니라 유대인들도 마리아와 같이 통곡하는 것을 보시자 애처로운 생각에 매우 침통해하시며』
 

오늘 본문의 훤화 라는 우는자들은
보땡상조처럼 직업으로써 울음꾼들이 죽은 자의 주변에서 떠들고 노래하고 울고 하는 겁니다.

문제는 이런 인간의 세계에
이런 모습이 보편화 된 세계에

예수님은 자신의 믿음의 세계를 펼치시고자
멀쩡하게 자기들의 질서대로 흘러가고 있는 곳에
난데 없이 예수님 자신의 믿음의 세계를 밀어넣으면서
쳐들어 와서 기존의 모든 질서를 밀어낸다는 점입니다.

마치 지난 주의 헌 술과 헌 부대의 세계 속에
새 술과 새 부대의 세계를 침투 시켜서
가나안 땅 정복하듯이
밀어서 쫏아내고 있다는 거죠

천국을 침략하듯이 침노하듯이 말이죠

자 그렇게 되면 새로운 세계로 재편성이 되는 겁니다.
기존의 법과 기존의 질서와 기존의 행동양식들이
이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인해
물러나야 하는 판국에 놓여지게 되는 겁니다.

자 놀랍게도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습니다.
죽었다 라고 서두를 끄집어 내는 것은 성경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인간이 아닙니다.

성경이 먼저 운을 그렇게 띄웁니다.

그리고서 말도 안되게
회당장이 내 딸이 죽었다고 예수님이 오시면 다시 살것입니다 라고 하는 말이
말이 안된다는 점입니다.

즉 기존의 질서에서 말이죠
헌 술 헌 부대의 세계에서는 말이죠

자 여기서 차이 곧 거룩이 발생하는 겁니다
거룩이란 손씻듯이 깨끗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분리 된다는 겁니다. 분별 구별 선별 선택이라는 믿음의 용어이지
기존의 세계의 용어에서는 종교꾼들처럼 우상숭배하듯이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십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 하는 것이
거룩이 아니다 말이죠
성화론자들이 아직도 이렇게 가르쳐요 글쎄

자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울음이든 웃음이든(비웃음을 이삭 곧 웃음으로 바꾼)
인간 쪽에서는 생전 듣고 보도 못한 예수님의 믿음의 세계가
불도져처럼 기존의 세계를 밀어붙여서 평평하게 평준화 일반화 할때에

어떻게 죽음 이라는 사망을 잔다 라고 표현하냐 말이죠

이것이 그 유명한(제가 의도적으로 붙인 유명한) 의로움 곧 거룩인 바로
이사이오팔
이사야 25장 8절

저들의 거룩과 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룩인 의(義)가 바로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사 25:8, 공동) 『그리고 죽음을 영원히 없애버리시리라. 야훼, 나의 주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시고, 당신 백성의 수치를 온 세상에서 벗겨주시리라. 이것은 야훼께서 하신 약속이다.』

입니다.

즉 사망을 의도적으로 끌어와서 
이 사망을 기존의 세계에서는 감당이 안되기에
그냥 밀쳐 놓은 것을
주님은 끌고 와서
이 사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이 간극을 벌리시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는 이 삼일의 간극

즉 오늘 본문의 단어로 표현하자면
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죽음과 잠 이라는 그 사이를 졸지에 만들어 버리셨다 말이죠
죽으면 죽었지 잠이 왜 생겨야 합니까?

이 공백을 만들어야
이 흔적을 만들어야

바로 사망이 걸려드는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 된다 말이죠

즉 기존의 세계는
죽음이 되었으면 죽음 뒤는 없으니까
그냥 죽음 그리고 울음꾼으로  되는 겁니다.
간극이 없어요
이것이 그들의 간극 곧 거룩실천이 되는 겁니다.,
죽은 자에 대한 최대의 예우 예절 도리 도덕 선함이 바로
울어주는 것 밖에 없다는 거죠

잠이 졸지에 생겨 버리면

기존의 질서에 흡집이 나게 되는 곧 빵구멍이 뻥뻥뻥 뚫리게 되는

그야말로 사망이 졸지에 빵구멍이 나게 됩니다.

이 진짜 현실이 바로 이사야 이오팔 이다는 겁니다.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계 21:4, 공동)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 ㉠이사 25:8.』

곧 아가서와 연결이 되지요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자 그러면 다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을 칭찬을 할 뿐이지
이 야이로의 믿음으로 인한 상대적인 비언약과의 충돌은 언급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목사들이 이런 믿음이 되라 라고 자기도 못하면서 남에게 강요를 하는데
바로 그런 목사들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오는 비언약의 세계로써
언약의 세계를 몰고 오신 예수님으로부터 밀려나야 한다는 겁니다.

마치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이라는 헌금이
성전의 돌 위의 돌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하듯이 말이죠

가난한 자의 전재산을 헌금으로 바친 것을 칭찬하기 위함이 아니다 말이죠
그렇게 설교하는 목사의 목을 목 위에 목이 남지 않도록 하기 위한
종말을 확 땡기는 믿음의 세계로 성전을 헐어버리는 의미이다는 겁니다.

어딜 감히 속임수로 교회를 우상화 하는데 동원할려고 하느냐 말이죠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을 구글에 검색하니까 다들 회당장의 믿음을 칭찬하는 설교 밖에 없어요

이 믿음이 무엇과 충돌하는 지에 대한 자세한 의미는 은근슬쩍 뒤로 감추어 버리더라 말이죠

왜 새술과 새부대입니까?
기존의 질서를 헌술과 헌부대로 취급해 버리고자 등장한 것 아니냐 말이죠
그런데 헌술과 헌부대를 언급하지 않고 슬그머니 감추어 버리니까
새술과 새부대의 의미로 흐리멍텅 얼렁뚱땅 넘어가더라 말이죠

거룩이 뭡니까 사망을 멸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백날 거룩지키기를 인간이 해 본들
사망은 은근슬쩍 손도 못대고 넘어가더라 말이죠
그런 거룩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그럼 너는 사망을 건드리기는 하냐
물론 저도 못합니다
그러나 저 분은 하시잖습니까? 라고
실상을 이야기 하면
꼭 이 실상을 그림자 속에서 이야기 하면
갑자기 니만 예수 믿고 우리는 예수 안 믿냐 라고
교회가 무슨 대수라도 된냥
교회에서 쫏아내더라 말이죠

얼마나 다행인지 강도의 소굴에서 빠져나온 것이 말이죠

이것이 인간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한계입니다.,

그러나 직접 걸어다니는 성전은
이 죽음을 못 본채 할 수가 없어서
직접 찾아 오시는 성전입니다.

이 보다 더 또렷한 실상이 어디있습니까?
그림자의 세계는 이 실상인 믿음의 세계 앞에서 끼일 틈이 없이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입니다.

그 믿음의 세계를 보고
회당장 야이로가 딸이 죽었으니까 살려달라고 하는 겁니다.
참 기존의 세계에서 나오는 표현이 아닙니다.

주님이 먼저 떴기에 내 딸이 죽을 수 밖에 없었고
내 딸을 주님이 다시 살리시는 유일한 분임을 말하기 위해서
내 딸이 죽었다 라고 하는 겁니다.

앞의 내용들 중에서 베드로 장모가 그 동안 멀쩡하다가 갑자기
예수님의 걸어다니시는 성전 되심 때문에
열병이 걸려 죽게 되어야만 하고
그로 인해 예수님이 그 질고 질병을 대신 짊어지시고자
그렇게 아프게 했다는 거죠

예수님 자신의 세계가 이 기존의 질서 세계를 밀어버리고
폐기처분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시고자
하나의 증상으로 나타난 사건인 겁니다.

그러니 회당장 야이로는 마치 십자가 상의 두 강도 중의 한 쪽 강도처럼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말도 안되는 소리를
십자가에 달려 죽는 사람에게 부탁한다는 것이 말이 안되잖아요

똑같습니다 이미 죽은 딸을 이제 살려주셔야지요? 주님
당신의 세계를 보여주시고
이 세계를 밀어버리십시오 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 그렇게 이 죽은 딸에게 가는 도중에
걸어다니는 성전임을 더더욱 이중반복 즉 또렷하다는 거죠
구체적 보편성이다는 겁니다
이 말은 반대로 보편성이 이 구체적 보편성에 반기를 드는
한 세트로 나타나기 위해서
더더욱 또렷함으로 미래완료성을 증거하는데 있어서
가는 도중에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이
본인은 멈추어서 정체된 자인데
고정이 되어서 마치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포로된 
붙잡혀서 묶여 있어서 움직일수 없는데
하필이면 예수님의 이동 경로에
자신의 위치 점이
겹쳐지는 바람에
그 예수님의 이동 하시는 스쳐지나가는 와중에
옷자락을 만지니까

병이 낫게 되더라 말이죠

자 이러면 또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는 것으로 대부분 해석하고 설교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예수님 본인의 믿음으로 펼치신 사건인데
그녀에게 도리어 칭찬하시면서
사실상 마귀 보란 듯이 칭찬하시는 겁니다 마치 베드로야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말이죠
베드로는 알지요 자기 믿음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이 더 잘 아시면서 라고 화답하는 겁니다.

즉 마귀보란 듯이
비언약의 세계를 수시고자 의도적으로 예수님 자신이 해 놓고서는
그 여인을 칭찬함으로써 (마치 아가서 8장 6절처럼 도장 새기듯이 기념이름을 새기듯예수님 자신의 믿음을 이 여인에게 도장 새겨 버리는 겁니다.)
세상이 견디지 못하게 격동 시키기 위한 의미이다는 거죠.

(잠 30:21, 개역) 『세상을 진동시키며 세상으로 견딜 수 없게 하는 것 서넛이 있나니』
(잠 30:22, 개역) 『곧 종이 임금된 것과 미련한 자가 배부른 것과』
(잠 30:23, 개역) 『꺼림을 받는 계집이 시집간 것과 계집 종이 주모를 이은 것이니라』

그래서 지혜(하나님을 아는 지식 = 야다 곧 사랑) 라는 이 실상과 그림자의 대조가 펼쳐지는 겁니다,
우리 또한 그림자로써 이 실상에 의해 불도져로 평평하게 평탄케 하심을 당하는 것만이
바로 구원이 되는 겁니다.
사랑에 의해서만 일반화 평준화 되거든요
아니면 울리는 꽹과리에 빠져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아니 무슨 수로 이 소돔과 고모라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믿음이 아니였다면 말이죠
믿음 곧 실상 곧 그림자를 다 지워버리시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또 누가 그림자로 속이겠냐 꾀냐 말이죠

그래서 마치 짠거처럼
자작극처럼
마치 딸이 죽은 것을 기다린냥
어서 예수님 살려 주세요 라고 하고
마치 짠 듯이
12년 동안 혈루증 앓은 여인이 있는 곳에
예수님의 이동 동선을 의도적으로 맞추어서
스쳐지나가는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낫게 된다는

그야 말로 말도 안되는
왜? 이 헌술 헌부대라는 기존의 질서의 세계에서는 택도 없는 이야기가
이 말도 안되는 이야기가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온다는 이 세계를
원인이 없는 결과의 세계인 믿음의 세계 곧 예수님의 세계가 밀어버린다고
이런 사건들을 충돌로써 보여주시는 겁니다,
충돌 곧 각인 곧 진짜 현실로써 가짜 현실인 기존의 질서를 밀어버려 흡집을 내는 겁니다.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않은
움직이는 성전이 말이죠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돌 위에 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가루로 만드는 
이 참현실을 펼치시겠다고 말이죠
이게 충돌인 겁니다. 사건.

이 고래 등 싸움에 새우등 터지면서 의를 배우는 겁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거든요 즉 성령으로만 기록하셨다는 겁니다.
인간의 산물이 아닌,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다는 거죠

그러니 기존의 인간의 세계의 것이 들어갈 틈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초등학문과 또는 철학 등등이 들어가질 못해요

보세요 회당장 야이로 가
아이가 죽자 마자 살려달라고 하는 이 믿음과 대조로
사람들은 울음꾼을 자처하면서 이웃사랑실천을 펼치는 상부상조를 하고 있다 말이죠

그런 울음꾼이 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갈 틈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일부러 틈을 간극을 만듭니다.

아니 틈이 없다면서 왜 틈을 만드냐?
사람들이 습관적으로 기존의 질서에 따라서
죽음과 다시 살려주세요 라는 회당장의 요청 그 사이에 떡 하니 자리 잡고서
그 틈에 눌러 앉은 울음꾼들을
어떻게 예수님께서 밀어버려서 평평하게 만드시는지를
회당장은 딸의 죽음 덕분에 봐야하기 때문이다 말이죠

즉 사람의 손으로 펼쳐진 의, 거룩, 말씀실천이 아니라
이 사망을 멸하시는 다시 살려내시는 주님의 거룩을 꽉꽉 채워달라는 요청에
예수님은 응답하시는 겁니다.

다시 강조하면

이사야 이오팔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예수님 곧 움직이는 성전의 활동은, 그림자가 아닌 실상의 활동은
눈물을 씻기시며, 수치를 제거하심인데

울음꾼들은 눈물을 씻기시는 예수님 앞에서 훼방꺼리 밖에 안되는
눈물로 도배를 하고 있더라 말이죠

그때 눈물흘리는 울음꾼들에게만 귀에 번쩍할 소리를 하십니다.
자신들의 울음이 쓸모없고 무용지물로 만드는 소리 말이죠


마치 인간의 의로움, 거룩실천, 이런 것들이 아무런 소용이 없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그저 경건의 모양만 갖춘 껍데기
눈물꾼들의 모양만 갖춘 껍데기임을 폭로하는 소리
죽은 자의 하나님 들만 예민하게 들릴 수밖에 없는 소리
아니 모든 인간이 반발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말이죠
아니 잘 것 같으면
그 아비가 딸이 죽었으니 살려달라는 소리에
아니 난 죽은 딸에게 갈 필요가 없단다
자고 있거든 이라고 말로 끝내고

예수님이 이동할 필요가 없이
회당장 야이로가 딸아 미안하다 ~~~~~~ 가 아니라 딸아 어서 일어나 밥묵으라
예수님을 만났는데 너 안 죽었고 잔데 라고

마치 둘 만의 언어 소통으로 끝나면 될 것을

구지 거기서 이야기 안하시고
구지 딸에게까지 이동해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겨냥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했을때에

당연히 비웃을 수밖에 없는 이 상황을 만드신다는 점입니다.

마치 이것은
구약의 출애굽기처럼

이스라엘 가장 약한 민족을 가장 강한 애굽에 탁란시켜 놓고서
갑자기 노동인력을 다 빼버리니까
자연스럽게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비웃고
그 비웃음을 듣고서 내가 누구인지 기다려봐(우비소녀) 알려줄게 라고
확 빼버러니까

노예 상태인 이스라엘이 다시 살게 되는 자유가 되고

반대로 노예를 통해서 고아자리에서 멀리 있었고
과부 자리에 멀리 있었고
나그네 자리에서 멀이 있었던 자들이

갑자기 노예가 다 빠져나가버리고 자유인이 될려고 하니까
그것을 못 막아서면 졸지에 자신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 판국이니

울음꾼 자신들이 무의미한 존재가 되고 만약 직업꾼들이라면
자기 입에 풀칠을 할 수가 없게 되니

결사항쟁으로써 여호와의 구원을 막아서야 하고
죽는한이 있더라도 예수님의 회당장 딸 살리기를 막아서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여호와의 구원이자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아이를 다시 살려낼수 없다면
그 의로움 그 거룩은 다 가짜요
유익이 없는 겁니다.

결과가 없어요
그래서 원인만 대따 갖추어요
그런 원인 조건만 대따 갖추는 것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울음꾼으로써

껍데기만 대따 갖추는 겁니다.
예의로써
이웃에 대한 예의
회당장과의 예의
나중에 자신의 집에서 누가 죽으면 또 서로 상부상조하는
이런 질서가 있다 말이죠

그 질서가 아이를 살려내지 못하는 이상은
그저 우상일 뿐이다는 겁니다.

아까 출애굽을 언급했듯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되기 위해서
죽지 않기 위해서

노예가 히브리 잡족이 자유인이 되는 것을 막지 못하면
자신들이 졸지에 노예처럼 살아야 하니까
또 노예를 잡으러 전쟁을 해야 하니까
그 밑고 끝도 없는 전쟁을 계속 할순 없다 말이죠

죽은자가 안 되기 위해서 더더욱 총 칼 방패를 잡아야 하듯이
울음꾼들은 기존의 질서에 충실해야만 한다 말이죠

그런데 구원이 칼과 방패에 있지 않다고
출애굽을 벌리시듯이

주님의 거룩은 즉 산자의 하나님은
울음꾼이라는 열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에 있다 라고

이 사랑이 이미 떴기에
그 차이(거룩)로써 그 한 세트로써

울음꾼 곧 울리는 꽹과리들이 쫘아악 카페트로 깔리는 겁니다.

빛을 말하기 위해서
어두움이 카페트로 깔리듯이

묵시, 계시, 언약, 새술 새부대를 말하기 위해서
역사와, 시공간, 비언약, 헌술과 헌부대가 배경판으로 카페트처럼 깔려서 그 위로 오시는 겁니다.

아까 말한
이스라엘에 대한 구원 곧 사랑을 말하기 위해서
애굽이라는 울리는 꽹과리가 동원이 되듯이

기존의 질서가 깔리는 겁니다.

그리고 애굽왕 바로와 그의 군대 애굽군사를 통해서 영광을 받듯이

이 울음꾼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이들의 비웃음의 배후세력을 들추어내시면서
주님은 믿음의 세계 곧 의의 세계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곧 부활 즉 산자의 하나님을 말이죠

백날 다윗처럼 회개 눈물 금식 기도 4종 세트 드려보라 말이죠
아이를 살려낼수 있는가?

경건의 모양을 아무리 갖추어도
아이를 살려내는데는 아무런 유익이 없더라 말이죠

바로 그런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이 울음꾼들의 울리는 꽹과리를 깔고서
예수님 자신의 사랑의 세계로 

이 사망의 권세를 밀어버리는 겁니다. 평평하게 말이죠

그럴때에 이 울음꾼과 기존의 질서를 따르는 자들은
모조리 다 우상숭배자였음이 들통나는 겁니다.

그저 고아 안될려고
과부 안될려고
나그네 곧 노예 안될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부활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이 말이죠

에스겔 478 이라고 외우면 이건 성전에서 나오는 물이거든요 8절 9절 10절 계속 나오는데

하도 이사야 47팔이 안 외워져서 에스겔 47팔은 과거에 알던 것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는데
이사야 47팔은 새로 발견하다 보니 잘 안외워져서 이렇게 해 봤습니다.

이사야 47잘 팔 절 부터가 바로 우상섬기는 목적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우상을 섬기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목적이 같아요 ㅋㅋㅋㅋ
거짓교사들이 그렇게 가르쳐서 그렇다 말이죠

아이의 죽음이 언급이 되었듯이

모든 인간은 이미 벌써 죽은 상태인 겁니다.
처음 창조한 피조물에서 벗어난 이상은 이미 죽은 거다 말이죠

그러니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될려고 하니 더더욱 우상이라는 속임수에 더 속아넘어가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 쪽에서 불쌍히 여기셔서
자신의 부활세계 
의의 세계
이 의를 배우라 말이죠
이 생명의 세계로

이 죽은 자의 세계에 침략해서 죽음을 밀어버리겠다고 직접 내려오시고
직접 찾아오시고
직접 만져주시는 겁니다.

이 사랑이 옳겠습니까?

아니면 밑도 끝도 없는 저 울음꾼이라는 기존의 세계가 옳겠습니까?

탈출해야 한다
도망쳐야 한다 라는 의식이 없는 자들에게
즉 눌러 앉아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는 자들에게는

이 예수님의 말과 행동 모두가 비웃음 꺼리 밖에 안되는 겁니다.

그런데 어서 떠나야 한다 라는 의식이 있는 자들에게는
물론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심어버리십니다.

탈출 도망 탈주 포로됨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의식은
포로된자 갇힌자 억눌린자에게만 해당 된다 말이죠

눌러 주저앉아 안주하는 자들에게서는 그런 의식이 없습니다.
누가 간담이 녹아가면서 40년 동안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겠습니까?

탈출 당하기를 바라지 않는 자는 모두다 병든자 이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목사도 선생도 학자들도 다 병든자인데
심지어 병을 고치는 의사들도 다 병든자들이다 말이죠

누가 제대로 고칠자가 어디 있겠냐 말이죠
그러니 병든자의 말을 왜 듣냐 말이죠
소경이 소경의 길로 인도할 뿐이다 말이죠

또 오늘 나온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인을 고쳐봤자
나중에 다 죽어요
그럼 왜 고치실까요?

고침이 목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탈출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구원입니다,

물론 인간의 구원론은 그게 아니지요 탈출 의식이 없으니
도리어 인간의 구원론은 우상입니다.

저런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탈출 의식을 가진자가 되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이
저들의 구원관이다 말이죠

따라서 회당장의 딸도 또 언젠가 다 죽어요
그럼 말라꼬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라고 하셨냐 말이죠

주님은 고치는게 목적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세계가
또 기존의 세계가
심지어 유대인 아닙니까 하나님을 따른다 라고 우기는

이런 세계가 다 엉터리 이다는 겁니다.
뭘 해도 엉터리요
뭘 해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벌서 병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런이 병든 세계
죽은 세계를
근본적으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가운데에

주님이 건드리시는 겁니다.
불도져로 이 엉터리 세상을 밀어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가룟유다가 하나님 나라 회복운동으로 독립을 해도
역시가 이스라엘 내부에서는 고아 과부 나그네 라는 이스라엘 처음자리를 핍박하기는 매 마찬가지니이 그런 의문을 완성하는게 아니라
아예 처음자리로 밀어버리시는 겁니다.

죽은 딸 살려주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 죽은 세상에 근본적으로 죽어버린 세상에

죽음을 흡집내어서
생명의 세계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겁니다.

이 생명의 세계로,
믿음의 세계로 나 예수와 함께 떠나자 라는 겁니다.
이 땅에서
이 몸에서
이 세계에서 탈출하자 라고 말이죠

부활의 세계로 말이죠

다들 피 흥 치 거리면서 다들 배꼽잡고 비웃는 거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 말이죠.

신이 되어버린 인간들 속에서 신은 죽었다고 외치니까 다들 비웃듯이
신이 어떻게 죽냐 라고 말이죠 
죽으면 그게 무슨 신이냐 말이죠
이런 듯이 저들의 신에 대해 반대를 위한 반대 곧 구체적 보편성으로써
바로 이 차이를 이 거룩을 펼치시는 겁니다.

안죽는 영원불멸의 신에게서 죽는 신을,
유대인에게서 탈출하시는 겁니다.

체제전복은 이미 가룟유다가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고 있다 말이죠
그래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라고 봄을 다시 되찾고자
빼앗긴 땅을 되찾는 독립운동을 펼칠 뿐이지

그 독립해 본들 역시나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될려고 하고자
또 고아 과부 나그네를 압제하는 자로 독립군들이 변모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모양만 얼쑤 갖출 뿐이지
아무런 유익이 없고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고야 마는 당사자가 된다 말이죠

보세요 비웃잖아요

경건의 능력은 곧 성령은
인간의 가능성을 믿지 않는 자만이 긍휼을 바라는 자만이
바라는 마음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저 경건의 모양 껍데기 갖추는데 평생을 미쳐 있을 뿐이다 말이죠

즉 떠날 마음이 없는 겁니다.

초반부에서도 언급했지만
회당장 야이로는 마치 십자가 상의 한 쪽 강도처럼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죽어가는 예수님에게 간구하고 있꼬

반대로 오늘 나온 울음꾼들은 다른 한 쪽의 강도처럼
둘이 무슨 귀신시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느냐
죽으면 끝인데 뭐?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꼬?
예수 너는 그것을 또 받아주니
니가 더 이상한 자이다 라고

자기 말 마따나 죽으면 끝난다고 라고 본인이 이야기 하면서도
끝까지 비웃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죽으면 끝나는데 왜 비웃냐 말이죠
그것은 비웃도록 되어 있는 진노의 그릇의 역할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지
죽는 주제에 자유의지가 있다고 우겨본들 소용이 없다 말이죠
즉 죽음은 늙어서 죽는게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죽는 겁니다.

산자의 하나님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죽는 겁니다.

이 말이 틀렸다면 끝까지 안죽고 안늙고 끝까지 비웃어 보라 말이죠
그 비웃음도 아무런 효과 없이 무익하게 사라져 가더라 말이죠

아까 그 비웃던 강도 도대체 어디갔냐 말이죠?
그저 주님의 뜻대로 진노의 그릇 역할을 했다 라는 주님의 뜻만 남아있을 뿐이지
그 강도 뭐냐 말이죠 그저 껍데기일 뿐이다는 겁니다.
실체가 아무것도 없어요

자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을 보자 말이죠
이것도 실체가 아닙니다.
껍데기입니다.
실상이 없어요

생기가 그 호흡에서 떠났어요

(창 2:7,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창 6:3,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창 6:4, 개역)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창 6:5, 개역)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창 6:6, 개역)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7, 개역) 『가라사대 나의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8, 개역)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창 6:9, 개역)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살아있다고 우길수 없는 겁니다.
동행하지 않고 떠나서
다시는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좀비처럼 무익하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닌 것처럼 살뿐이다 말이죠

그러나 함께 한 자가 있다고 하시는 겁니다.
이 동행을 중심으로 한 은혜의 세계를 따로 마련하셨다 말이죠
바로 예수님입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의 세계
곧 의의 세계

사망을 멸하시고자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이 간극을 벌리시는 이 이사야 25팔 이라는
의를 거룩을 펼치실때에

마치 생기를 다시 집어넣어주심이 아니면
누가 산 소망을 가지겠느냐 말이죠

누가 이 사랑 곧 사망의 골짜기를 평평하게 다림질 하지 않으면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겠냐 말이죠

울리는 꽹과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그 대규모의 블랙버스터 영화처럼 출애굽사건 같은 화려한 기적의 장면은 하나 없어도
지금 이 소녀를 통해서 아주 아주 보일 듯이 말 듯이 세밀한 음성으로 보여주시니까
다들 무시하는 겁니다.

구름타고 내려오시면 다들 절하고 
울음꾼도 절하고
바리새인도 영접하겠지만

진짜 사명 진짜 실상은
반드시 무시받는 식으로
짐승의 구유에 태어나셨듯이
이 소녀에게도 그렇게 요나의 표적인 진짜 산 자의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해야지만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니라
요나의 표적은으로
반드시 비웃음 당하는 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이 예수님의 실상되심이

그 구약의 출애굽의 거대한 구원사건으로 안 보이는 겁니다.
뭐 천둥이 있습니까? 큰 폭풍 큰 지진 큰 번개 벼락 그런거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니까 말이죠
그거 보여주면 예수님을 비웃지 않고 다들 서로 영접할려고 하고
서로 임금 삼고자 삼세판이나 쫓아다닐꺼다 말이죠

그러나 출애굽 때에도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하등 도움이 안되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인간의 주특기는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기 때문에
원망만 할 뿐이다 말이죠

원망할 것 뻔히 알면서도 왜 주님은 하실까요?
의를 배우라 라고 왜 이런 일들을 벌리실까요?

(사 2:3, 개역)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주님은 인간 상대 안하십니다 이미 죽어있는 좀비들에게 아예 기대를 하지 않습니다.
성화를 백날하고 주여 주여 귀신도 물리치고 사탄도 하늘에서 떨어뜨려도
상대 안하십니다,

주님은 마귀만을 상대하시고
사망의 권세만을 상대하시기에

이 사망을 밀어버려서
자신의 사랑을
곧 인애와 자비만을 펼치실 뿐이고
이미 다 이루어 놓았습니다.

믿음으로 못 보는 우리만 손해일 뿐입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얼마나 간담이 녹아가면서 기다리고 기다렸겠냐 말이죠

회당장 야이로도 생명의 주 되신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자신의 딸이 죽을 수 밖에 없었꼬
다시 살려내시는 이 의로움
이 거룩을 얼마나 기다리고 기다렸겠냐 말이죠

즉 이 말은 인간의 거룩을 아예 거부했다는 거죠

자신의 숙제에 아예 기대걸지도 않고
가능성에 아예 기대 걸지 않고
오로지 예수님의 숙제만들 기다리고 기다린

이것이 바로 산자의 하나님입니다.

그런 자에게만
예수님의 하는 행동 하나 하나가

또렷하고 그 외의 것은 왜 속임수인가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이 십자가라는 사랑이 밝히 보인다면
다른 모든 것은 그저 의문의 반복인
모양만 껍데기만 갖춘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인줄 

예수님 덕분에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과
가족과
교회와
사회와 국가와
이 지구 전체를
자꾸 자꾸 흡집을 내시는 주님처럼


죽음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울음꾼의 비웃음에
죽음에 흡집을 내어서 잔다 라는 틈을 벌렸듯이

이 십자가 라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피용서로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흡집을 내신 예수님의 흡집낸 흔적물로써
여러분이 그 증거를 받은 겁니다.

이 야이로의 딸은
자신의 죽음에 흡집을 낸 예수님의 기념이름 새겨버리심 덕분에

나는 죽다가 살아났으니까 절대로 죽으면 안된다가 아니라
도리어 어서 빨리 예수님의 품이라는 실상이 있다는 믿음 덕분에
어서 어서 껍데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고 바랬을 것입니다.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이 산소망을 주님이 심으신 겁니다.

기념 이름을 도장 찍듯이 새겨버린 것입니다.

(눅 10:17, 개역) 『칠십 인이 기뻐 돌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
(눅 10:18, 개역)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단이 하늘로서 번개 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눅 10:19, 개역)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
(눅 10:20, 개역)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