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거룩한 그 길에 ~~ (사 35, 1-10)
18-45 거기 거룩한 그 길에 ~~ 거룩한(의로운) 길 (죽음을 가르고 생긴 큰 길, 내가 곧 길이요) (사 35, 1-10)
(사 61:3, 개역)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사 35:1, 개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 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사 35:2, 개역)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 35:3, 개역)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여주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주며』
(사 35:4, 개역) 『겁내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는 굳세게 하라, 두려워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수하시며 보복하여 주실 것이라 그가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5, 개역)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사 35:6, 개역)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사 35:7, 개역)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 시랑의 눕던 곳에 풀과 갈대와 부들이 날 것이며』
(사 35:8, 개역) 『거기 대로가 있어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일컫는바 되리니 깨끗지 못한 자는 지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입은 자들을 위하여 있게 된 것이라 우매한 행인은 그 길을 범치 못할 것이며』
(사 35:9, 개역) 『거기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이 그리로 올라가지 아니하므로 그것을 만나지 못하겠고 오직 구속함을 얻은 자만 그리로 행할 것이며』
(사 35:10, 개역)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
(사 35:1, 새번역)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처럼 피어 즐거워할 것이다.』
(사 35:2, 새번역) 『사막은 꽃이 무성하게 피어, 크게 기뻐하며, 즐겁게 소리 칠 것이다.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샤론의 영화가, 사막에서 꽃 피며, 사람들이 주님의 영광을 보며, 우리 하나님의 영화를 볼 것이다.』
(사 35:3, 새번역) 『너희는 맥풀린 손이 힘을 쓰게 하여라. 떨리는 무릎을 굳세게 하여라.』
(사 35:4, 새번역) 『두려워하는 사람을 격려하여라. "굳세어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의 하나님께서 복수하러 오신다. 하나님께서 보복하러 오신다. 너희를 구원하여 주신다" 하고 말하여라.』
(사 35:5, 새번역)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사 35:6, 새번역)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사 35:7, 새번역)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사 35:8, 새번역) 『거기에는 큰길이 생길 것이니, 그것을 '거룩한 길'이라고 부를 것이다. 깨끗하지 못한 자는 그리로 다닐 수 없다. 그 길은 오직 그리로 다닐 수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악한 사람은 그 길로 다닐 수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그 길에서 서성거리지도 못할 것이다.』
(사 35:9, 새번역) 『거기에는 사자가 없고, 사나운 짐승도 그리로 지나다니지 않을 것이다. 그 길에는 그런 짐승들은 없을 것이다. 오직 구원받은 사람만이 그 길을 따라 고향으로 갈 것이다.』
(사 35:10, 새번역) 『주님께 속량받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뻐 노래하며 시온에 이를 것이다. 기쁨이 그들에게 영원히 머물고, 즐거움과 기쁨이 넘칠 것이니, 슬픔과 탄식이 사라질 것이다.』
에스겔이 말씀을 먹게 되는 강요함을 당하게 된 것처럼
약속의 자녀는 예수님의 거룩한 길 곧 의의 길을 보여주기 위해서
사막으로 물없는 곳으로 황무지로 소경으로 앉은뱅이로 잃어버림을 당하는 자로
내몰리게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왜? 인자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함을 강요 당하듯이
거룩한 길이 이미 먼저 떴기에
황무지 속에서 거룩한 길을 걸어야 하니까 말이죠
먼저 인자가 장대 높이 달리심이 먼저 떴기에
그 인자를 쳐다보기 위해서
불뱀에게 물리도록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그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구원의 길을 내시는
예수님이 곧 길이요 생명이요 부활이심을 외치고 찬양하도록 되어 있는 찬양자 이기에 말이죠
그래서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반드시 광야 속에서 곧 물 없는 곳으로 양식 없는 곳으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원망할 수 밖에 없는 곳으로 인도를 받음으로 인해서
목이 곧은 백성의 곧은 목을 낮추시는
패역한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죄인으로 만드시고
불뱀에게 물려 죽는 환자로 만드심으로써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보는
거룩한 길을, 구원의 길을 내시는 주님의 의를 보여주시는 겁니다.
인자를 안 쳐다보는 자는 지만 손해입니다,.
그 인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담은 박스 상자처럼
인자의 신체에 우리의 죄악을 담고서
그 위에 피를 뿌려 다시는 그 허물을 안 보시겠다는
주님의 의를 쳐다보라는 겁니다.
이 사랑이 아니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니까 말이죠
소돔과 고모라가 황무지 입니까?
에덴 동산과 같은 애굽 나라가 물이 없는 사막입니까?
왜 그런 곳에 구원의 길을 내시지 않고
꼭 일부로 극과 극으로써 대조시키면서
광야에 거룩한 길을 내시는 겁니다.
우리의 교만한 목은 딴 게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이유 없이 나는 구원 받아 마땅한 자이다는 그 사고방식과
예수님 곧 인자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죄악을 담고서 대신 저주 받는
이 예수님의 마음 곧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그 모습과 대조시켜서
교만한 목을 낮추시겠다는 겁니다.
참 너무 하지요? 하나님과 같이 된 높고 높은 이 인간은
천하디 천한 인자 되신 낮고 낮은 무능하기 짝이 없는 어린아이 젖먹이 소자처럼
낮추고 낮추시겠다니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아닙니다 그래도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그래서 창녀 고멜로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이 패역한 딸로 만들지 않으면
주님의 거룩한 의를 볼 수가 없습니다.
불뱀에게 물려 죽는 심판 받아 저주 받아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으로 만들지 않으면
주님의 의를 볼 수가 없는 겁니다.
이 원수를 사랑하시는 이 십자가의 사랑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왜 이 원수에게 뛰어드시고자 그 십자가의 저주에
하나님의 저주에 뛰어드시는 것일까요?
왜 솔로몬의 영광으로 가시지 않고
들에 핀
광야에 핀
사막 곧 죽음의 땅에 핀 백합화 로써 오시는 겁니까?
그것도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인자의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하나님과 같이 된 인간에게서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모습으로써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습니까 라고
예수님에게 까지 그 방법을 터득할려는 신이 된 인간에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구원을 따낼려는 인간에게
예수님은 도리어 신에게 갈려는 인간에게
그 반대의 길인 사막에 거룩한 길을 내는 의의 길을 내시는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는 증거 합니다.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못 듣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다.
인간이 아니라 신이 되어버린 인간이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습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예수님은 거룩한 길을 이미 벌써 내셨음을 선언해 버렸습니다.
이 외에 다른 길도 없고 다른 이름도 없습니다.
(행 4:12, 개역)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나(예수) 인자(애가 애곡 재앙을 담은 신체)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말이죠
(요 3:13, 개역)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요 3:14, 개역)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5, 개역)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6, 개역)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 3:17, 개역)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8, 개역)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 3:19, 개역)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 3:20, 개역)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요 3:21, 개역) 『진리를 쫓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왜 세례요한은 일명 도끼맨은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만들어 버렸을까요?
광야에는 나무가 없어서 도끼로 찍을 수가 없어요
아무도 없는 사막인데
죽음의 땅인데 거기에 누가 온다고 거기서 복음을 외칠까요?
이렇게 선지자는 애가를 부르며 애곡을 하며 재앙을 자신의 신체에 담으니까
사람들이 먹지도 마시지도 않는다고 귀신 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인자되신 예수님은 거꾸로 먹보에 술꾼에 세리와 강도와 창녀라는 죄인의 친구로써
씹고 뜯고 마시고 즐기는 자로써 오셨다 말이죠
마치 선지자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울어야 하는 자로써 나오고
곧 로마서 7장 이지요
즉 고멜과 같은 창녀로써 패역한 딸로써 상한 심령이 되어서
나를 고쳐달라고 우는 자로 만드시고
(렘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그런데 바로 로마서 8장으로 넘어가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 라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 시켰다 라고 선언을 해 버리시는 겁니다.
(롬 8:1, 개역)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롬 8:2, 개역)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더러운 창녀인 고멜과 같은 우리에게 그 더러운 죄악에 바리깡으로 큰 대로를 내어버림으로써
뜨인돌로써 첩경을 허물어 뜨림으로써 제로, 0점, 모조리 다 허물어서 1층으로 만드는
평준화 일반화
더러운 창녀와 거룩한 제사장이 일반이 되는
황무지와 생명의 샘물이 평준화 되는
이 거룩한 길을 냄으로 인해서
홍해라는 죽음에 길을 내어서 그 바리깡으로 밀어서 사망권세가 의미 없도록 만들어 버리는
사랑의 길을 내심으로 인해서 그 원수 된 우리를 자기 신부로 삼는
창녀 고멜을 자기 신부로 삼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로 신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해서 마귀에게 사로잡힌 베드로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신의 의의 길을 보여주시려고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몰아서
그 속에서 생명의 길을 내시는 겁니다.
안 그러면 우리는 이 낮아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못 보고
그저 어떻게 하면 구원 얻느냐 라고
어린아이는 절대로 묻지 않는 그 물음을
불안해서 공포 때문에 죽기를 무서워 하는 마음으로 인해 받고자 하는
거짓선지자가 가르쳐 준 것을 배워서
구원에 대한 탐욕을 부르는 그 교만한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과 대조시켜서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이 생명의 길을 갈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저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 지식인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다 말이죠
어찌 자기 목숨을 잃는 광야에 거룩한 길을 보겠다고 가느냐 말이죠
원망한 것 뻔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가보세요 백 프로 원망하지
원망 안 하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 아니냐 말이죠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그리고 유대인들은 이것을 겪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목이 곧은 백성을 낮추시는 주님의 마음을 격었으면서도 불구하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출애굽 광야에서 보여준 여호와의 기적 베푸심을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탐심 우상으로 바꾸어 버려서
목이 곧은 백성의 목을 꺾는 것으로 보는 게 아니라
도리어 거짓선지자로 인해서 더 꼿꼿하게 목을 더더욱 높이 쳐드는 기적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배움으로 인해서 그것이 보편화 된 입장이다 보니
(오늘날 한국교회도 똑같죠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뭐 나는 수준 낮은 성화론자가 아니라 수준 높은 성화론자라고 해도)
역시나 오늘날 또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에 빠져 살기에
그들에게 십자가라는 낮추심은
목이 곧을 백성을 꺾으심은
그야말로 거리끼는 걸림돌이 되어버린 겁니다.
왜? 불 속에
심판 속에
진노 속에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 속에
다니엘의 세 친구가 들어가야 합니까?
그 속에 이미 예비된 예수님과 함께 춤추고 노래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거룩한 길이 그 속에서만 있어요
주님의 낮아지심과 우리는 결혼하도록 되어 있거든요
주님은 신났어요 결혼하고 싶어서 말이죠
그 하이라이트가 바로 요한 계시록입니다.
그런데 이놈의 거짓선지자들이 요한 계시록은 공포로 만들어 버려서
못 보도록 만들어 버려요
알려주는 이도 없어요
사랑이 죽음 보다 강한데
왜 죽음 보다 강한지는
사막 속에 들어가서
패역한 창녀 고멜로 만들어서 보여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예수님과 결혼 못하도록 만들고자 그 꼴을 못 보겠다고
보게 되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게 될 테니
그저 번제와 제사의 달인들로 만들어 버리는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는 자로 만들어 버리더라 말이죠
예수님이 만드시고자 하는 죄인과
마귀가 만들고자 하는 의인 만들기 라는
두 소욕이 서로 대립되어 있기에
오늘 말씀이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케 만드시는
죄인 만드시는 그 이유가 명백히 또렷이
미래완료적으로 밝히 나옵니다.
이 십자가의 사랑이 또렷한데 누가 꾀겠습니까?
거짓선지자는 평강이다 평강이다 외치지만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것 뻔히 알면서도 원망 속에 집어넣음은
너의 배신하지 않는 믿음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또렷함을 보여주시고자
거룩한 길을 보여주시고자
하나님의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시고자
이 인자를 쳐다보게 하실려고
모든 허물을 저 분이 다 짊어지신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을 보여주시고자
주님의 믿음은 우리는 당당히
죄인의 자리에 우리를 몰아가서
창녀 고멜로 만들어 버리시고
그 원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자신의 사랑을 확증 시킨
이 십자가의 사랑을 다 이루었다는 이 십자가가 먼저 떴기에
우리를 불 속에 집어넣어서 그 죽음 속에서 결혼잔치를 벌리시는 겁니다.
이제 인자는 누가 잔칫날에 금식하느냐 라고
혼인잔치를 벌리심으로써
고멜과 같은 우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심으로써
자신의 거룩한 길을 죽음 속에서 바리캉으로 죽음을 두 패로 갈라 찢어 버리시는
이 생명의 길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이 예수님 자체가 길이심을 나타내시고자 말이죠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생명이고 나머지는 다 죽은자입니다.
그 죽은 자를 살리시는
그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를 쳐다보지 않는 자는 죽음 뿐입니다.
다른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 자체가 부활이지
부활이란 인물이지
모든 종교가 외치는 부활교리 라는 종교사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구원의 탐욕이 그 우상숭배가 극대화가 된
우상을 극락에게 까지 집어넣겠다는 인간의 탐욕에
예수님은 자신이 부활이심을
그래서 죽음을 깨뜨리시는 바리깡을, 뜨인돌을 준비하셔서
바로 그런 부활되겠다는 구원의 탐욕을 그 높아진 마음을 모조리 다 허물어 뜨리는
46년 동안 지은 성전, 그 사람의 손으로 지은 구원의 탐욕인 우상 강도의 소굴
그 부활의 바벨탑을 허물어 뜨리겠다는 겁니다.
오늘날 모든 교회를 허물어 뜨려서
삼일 만에 짖는 성전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인간의 부활탐욕, 구원탐심, 영생불멸의 우상숭배가 예수님을 죽이는
십자가의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이 보다 더 또렷하고 밝히 보이는 것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우리의 죄악을 얼마나 낱낱이 밝히 보여주셨는지 말이죠
나의 죄악을 밝히지 못하는 3일 만에 짖는 성전이 아니면
가짜입니다. 46년도 가짜고
사람의 손으로 지은 것은 다 가짜이다 말이죠
종교라는 마약이고 666입니다.
사람의 손에서 지어지는 국가도 말이죠 짐승 아닙니까
그 속에서 빼내시겠다고
광야로
죽음으로
십자가의 저주로 몰아가시는 이 사랑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말이죠
그러니 이 남겨둔 한 씨
곧 인자 누구 누구의 아들 이라는
이 젖먹이가 아니면
우리의 높아진 교만한 목을 꺾을자가 없기에
감사하게도
죽은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죽은자 같으나
그 죽음 속에서 큰 대로를 내어
거룩한 길이라는 칭하는 생명의 길을 내어서
죽은자 같으나 산자로 만드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주님의 의를 우리 입 속에서 집어넣어버렸기에
세상은 견디질 못하고 격동하면서
우리를 미워하지만
바로 이런 일을 하신 예수님을 미워함으로써 나타난 증상이기에
뭘 해도 감사 밖에 나오지 않는
주님의 세계를 나타내심에 있어서
뭘 해도 예 뿐입니다.
이 사랑을 막살면서 막 씹꼬 막 뜯고 막 마시고 막 즐기면서 누리시면 됩니다.
이미 벌써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기에 말이죠
그래서 거룩한 길이 이미 떴기에
일부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마 15:25, 개역)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마 15:26, 개역)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마 15:27, 개역)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8, 개역)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