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이마가 굳은 백성과 주의 성신이 임한 인자 에스겔 (겔 3, 7-15)
19-06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마음의 백성과 주의 성신이 임한 인자 에스겔 (겔 3, 7-15)
(겔 3:7, 개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이마가 굳고 마음이 강퍅하여 네 말을 듣고자 아니하리니 이는 내 말을 듣고자 아니함이니라』
(겔 3:8, 개역) 『내가 그들의 얼굴을 대하도록 네 얼굴을 굳게 하였고 그들의 이마를 대하도록 네 이마를 굳게 하였으되』
(겔 3:9, 개역)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겔 3:10, 개역)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이를 모든 말을 너는 마음으로 받으며 귀로 듣고』
(겔 3:11, 개역) 『사로잡힌 네 민족에게로 가서 그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시더라』
(겔 3:12, 개역)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내 뒤에 크게 울리는 소리가 들려 이르기를 여호와의 처소에서 나는 영광을 찬송할지어다 하니』
(겔 3:13, 개역) 『이는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 곁에 바퀴 소리라 크게 울리는 소리더라』
(겔 3:14, 개역) 『주의 신이 나를 들어올려 데리고 가시는데 내가 근심하고 분한 마음으로 행하니 여호와의 권능이 힘있게 나를 감동하시더라』
(겔 3:15, 개역) 『이에 내가 델아빕에 이르러 그 사로잡힌 백성 곧 그발 강 가에 거하는 자들에게 나아가 그 중에서 민답히 칠 일을 지내니라』
(겔 3:7,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은 너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온 이스라엘 족속은 얼굴에 쇠가죽을 쓴 고집센 자들이어서, 나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겔 3:8, 새번역) 『내가 네 얼굴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억세게 만들었고, 네 얼굴에도 그들의 얼굴과 맞먹도록 쇠가죽을 씌웠다.』
(겔 3:9, 새번역) 『내가 네 이마를 바윗돌보다 더 굳게 하여, 금강석처럼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반역하는 족속이니, 너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들의 얼굴 앞에서 떨지도 말아라."』
(겔 3:10, 새번역) 『그런 다음에, 그가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내가 너에게 하는 모든 말을 마음 속에 받아들이고, 귀를 기울여 들어라.』
(겔 3:11, 새번역) 『그리고 가서, 포로로 끌려간 네 민족의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에게 전하여라. 그들이 듣든지 말든지 '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고 그들에게 말하여라."』
(겔 3:12, 새번역) 『그 때에 주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시는데, 주님의 영광이 그 처소에서 나타날 때에, 내 뒤에서 지진이 터지는 것같이 크고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겔 3:13, 새번역)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와, 생물들의 곁에 달린 바퀴들의 소리가, 그렇게 크고 요란하게 들렸다.』
(겔 3:14, 새번역) 『주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려서 데리고 가실 때에, 나는 괴롭고 분통이 터지는 심정에 잠겨 있었는데, 주님의 손이 나를 무겁게 짓눌렀다.』
(겔 3:15, 새번역) 『나는 델아빕으로 갔다. 그 곳 그발 강 가에는 포로로 끌려온 백성이 살고 있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이레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얼이 빠진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 ㉠또는 '그가 본 것과 들은 것 때문에'』
먼저 15절 민답 이라는 말은 다른 번역에서 얼이 빠진
민답(悶沓) - 답답할 민 합할 답
답답함이 더더욱 합해졌다는 거죠
(겔 3:15, 우리말) 『그리하여 나는 그발 강가 델아빕에 살고 있는 포로들에게 갔다. 그리고 그들이 살고 있는 곳, 그곳에서 내가 7일 동안 놀란 상태로 그들 가운데 머물러 있었다.』
(겔 3:15, 킹흠정) 『그때에 내가 텔아비브에 있던 그 포로 된 자들 곧 그발 강가에 거하던 자들에게 나아가 그들이 앉은 곳에 앉고 거기서 그들 가운데서 놀란 상태로 이레를 지내니라.』
(겔 3:15, 한글킹) 『그때 내가 텔아빕에 있는 사로잡힌 자들에게로 가니, 그들은 크발 강가에 거하는데 내가 그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앉아 그들 가운데서 놀라서 칠 일을 지내니라.』
(겔 3:15, 현대인) 『그렇게 해서 나는 그발 강가의 델-아빕으로 갔다. 그 곳은 포로들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 나는 거기서 정신이 얼떨떨한 채 7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
(겔 3:15, 현대어) 『나는 그발 강가의 성읍 델아빕에 사는 포로민들에게 이르렀다. 나는 그곳에서 7일 동안 온몸이 굳어져서 꼼짝 않고 앉아만 있었다.』
그 외 번역은 대부분
놀라고 놀란 상태이다는 겁니다.
즉 앞 부분에서 백성들이 고집이 세어서
에스겔이 외치는 주의 말씀을 안 듣는다고 했습니다.
아직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을 미리 예언 하는 겁니다.
그들의 얼굴은 굳었고 이마도 굳었다고 합니다.
(겔 3:9, 개역) 『네 이마로 화석보다 굳은 금강석 같이 하였으니 그들이 비록 패역한 족속이라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라 하시고』
마치 신약으로 치면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하셨듯이 말이죠.
이방이 아닌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 말이죠.
(마 23:27,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또 구약 출애굽기로 치면
강퍅한 애굽왕처럼 같은 얼굴이고
출애굽 후 광야로 집어넣으니까
목이 곧은 백성처럼 나오는 겁니다.
자 이 모든 것이 무엇이 먼저 떴기에 증상으로 나타나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인자가 먼저 떴기에 그런 겁니다.
거기 [거룩한 그 길]이 먼저 떴기에
즉 인자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는
예수님의 살과 피가 먼저 떴기에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는 애곡 애가 재앙이 기록된 말씀을 먹었기에
이 일이 벌어지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말씀을 먹은 증상으로써 나타나는 거죠
그래서 에스겔은 놀랍니다.
아니 저들의 굳은 얼굴 굳은 이마에
똑같이 굳은 얼굴과 굳은 이마로 만드신다고 해 놓고서는
내용물이 저들과 다릅니다.
쉽게 설명하면
저들이 발가벗은 모습을 이사야처럼 반사 시켜 보여주고자
이사야 선지자가 3년 동안 발가벗고 맨발로 돌아다녔듯이
이스라엘 백성의 발가벗음과
이사야의 발가벗음은
둘다 발가벗었지만
서로의 내용이 정반대인 거죠
이것이 보편성과 그 보편성을 받고
받은 보편성을 뒤집어 엎어 버려서 구체적 보편성으로 만드는 식입니다.
마치 살인 무기인 칼을 보편적인 힘과 권력의 의미로써 받고
그 보편적인 칼의 살인무기를 고무총 고무칼로 만들어버리는 장난감으로 만들었을 때에
그 칼은 그 죽음은 구체적 보편적인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울리는 꽹과리와 같이 되는 겁니다.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바로 저런 힘을 못 모아서 억울해 합니다.
분명히 지옥을 보낼줄 알던 마귀가
지옥을 보내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으로부터 지옥으로 쫓겨나야만 하는 자로 들통나게 하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피 용서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의 굳은 회칠한 마음에
겉으로는 아름다우나 속은 더러운 그 마음에
그 이마에
이 폭력 보다 그 더러움 보다 더 폭력적인 더 더러운 죽음 속에 들어가고자
에스겔의 이마도 굳게 만드시는
발가벗기시는
이 주의 신이 임함이
바로 인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즉 아무도 안 쳐다보는 겁니다.
심지어 누구 조차도?
완악한 이스라엘 백성 조차도
저들의 더러운 마음에
더 싫어버린바 된 더러운 모습 (부정의 부정)
우리의 허물을 다 담은 모습
질고를 지고 우리의 죄악을 다 담은 모습
곧 상하고 썩어 뭉드러진 모습을 주의 성령을 통해서 주의 신이 임해서
에스겔에게 인자의 모습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 모습을 보고 에스겔은 민답 놀라고 놀라는 겁니다.
우리의 허물을 저 분에게 다 담았는데 우리는 그를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하나님과 동일시 여겨서 저주를 퍼붓는 이 죄악을 보고 놀라는 겁니다.
두 번 죽는 거죠 놀라는 거죠.
우리의 죄악을 너무 너무 더러운 죄악을 저 분에게 감당시킨 것에 놀라고,
그런데 우리의 어두운 눈이 도리어 저 분을 더럽다고 정죄하는데 미쳐 있는 그 모습에 놀라고.
마치 딴나라당처럼 미쳐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이 십자가 앞에서 그런 모습이 들통난 거죠
주 권사처럼 마귀에게 죄송합니다 아 베가 아파요 라고 말이죠
이런 모습에 놀라고 놀라는 겁니다. 바로 우리 모습이니까 말이죠.
민답 곧 경끼를 일으켜 소스라쳐서 놀라 자빠지는 겁니다.
이 인자의 모습을 마치 예수님의 모습은 미리 앞당겨 보여주듯이
[종말의 인간=인자]의 모습을 말이죠.
예수님 당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에스겔은 바벨론 포로 당시입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에 지배 당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현재는 모든 인간이 자본주의에 돈에 포로 당한 상태입니다.
공산주의가 아무리 자본주의를 욕해도 그들 지도자들은 자본주의에 만취해 있습니다.
자 그렇게 겨우 겨우 출애굽 했는데 광야에서 목이 곧은 백성의 곧은 목을 낮추기 위해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수밖에 없는 곳만 골라서 인도하십니다.
인자가 먼저 떴기에 말이죠.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겠다 라는 그 교만한 마음을 꺾기 위해서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성화하겠다는 그 교만한 마음
개혁을 하겠다는 그 교만한 마음
막살지 않겠다 라는 그 완악한 굳은 마음
역시나 막살겠다 를 지키겠다 라는 이마가 굳은 마음
베드로로 치면 예수님을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라는 그 교만한 마음을 꺾기 위해서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은 높아진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것이 나의 숙제로 보고 있다는 것이 완악한 마음입니다.
주님의 숙제를 안 쳐다보겠다는 것이 굳은 마음이다 말이죠
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흘렸겠냐 말이죠
그 의미를 다시 상기시키기는 겁니다.
피 발림 당해 놓고도 그 피가 왜 발렸는지를 자기 숙제에 빠지다 보니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어린양의 희생을 생각지 않는 그 교만한 마음을 꺾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의 의미를 다시 무한반복시키시는 겁니다.
낮아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안 쳐다보기는 가난한 자도 매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의 마음을 쳐다보라고 예수님의 귀하신 죽음을 우리 신체에 담고자
우리를 낮추신다는 겁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기쁜 소식 이거든요
높아진 마음이 교만한 게 아니라 예수님의 낮아진 마음 곧 죽기까지 복종한 그 사랑은 안 쳐다보는 것이 교만한 거다 말이죠
이웃사랑 실천하는 자들이 다 이래요 얼마나 교만한지 몰라요 자기 숙제하기 미쳐서 말이죠.
오죽하면 테레사 수녀가 하나님 있기는 있냐 라고 비로소 솔직하게 실토를 하더라 말이죠.
이런 십자가의 피 용서의 구원관이 먼저 떴기에
그 앞의 모든 기존의 모든 구원관
천국관 성령관 거룩관 성전관 모조리 다 뿌셔지는 겁니다.
세례 요한은 그것을 모조리 다 물에 빠뜨려 아무것도 아니게 하고
다시 십자가로 출발하자고 하는 겁니다.
에스겔도 마찬가지 이사야도 마찬가지
십자가의 죽음에서 다시 출발하자 라고
인자로 출발 합니다. 누구 누구의 아들
너 바로 너
너 다윗 때문에 죽어야만 하는 꺾으신 뼈(인자)로 출발하는 것이 기쁜 소식 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는
모조리 다 울리는 꽹과리였고
이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는 겁니다.
이 사랑을 쳐다보라고 말이죠
자기가 잘난 인간인데 누가 구지 사랑을 쳐다보겠습니까?
죽게 된 자만이 쳐다볼까 말까인데
그래서 그 죽음 속에 놓이도록 하고자
에스겔을 인자로써
이 패역한 백성의 패역함을 신체에 담고자
모든 허물을 담도록 하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 속에서 거룩한 길을 내시겠다는 겁니다.
다들 바벨론 포로 속에서
여전히 완악한 마음으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는 가운데
로마 압제로부터 식민지 노예생활에서 벗어나는
여전히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실제로 독립운동을 펼치고 하나님 나라 회복 운동을 펼치는 가운데
주의 신은 에스겔을 인자로 만들어 버리고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다.
간따나 나약해서
힘이 없어서
저 힘 센 군대와 맞서고자 독립운동을 펼치는 이 완악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주님은 권력이나 기적을 베푸시는 게 아니라
도리어 더 나약하기 짝이 없는 모습으로써
젖먹이로써 우상 문제를 해결하시겠다고 하니
오히려 이스라엘이 더 짜증을 내는 겁니다.
그들의 이마가 더더욱 굳어지는 겁니다.
이마란 얼굴 중에서 뭔가를 새겨 넣어 가장 확 눈에 띄이게 하는 곳입니다.
즉 확증적인 것을 보여준다 말이죠
과거에는 노예에게 이마에 글을 새겨버립니다.
새겨버리면 얼굴에 나타난 심리상태를 구지 따질 필요가 없이
확정된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이마에 새겨져서 그 이마에 기표를 보고서 판단하죠
현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 표를 보고
그 물건이 잘 만들어졌는지 하나 하나 뜯어보면서 불량이 있는지를 안 살핍니다.
그냥 브랜드의 가치를 보고 그 표, 기호, 기표만 보고 삽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이 착하니 악하니 안 따집니다.
이마에 표를 보고 결정이 이미 나버린 상태를 볼뿐입니다.
짐승의 표인 666이 새겨졌으면 지옥 자식이고
반대로 어린양의 이름이 새겨졌으면 천국 자녀인 겁니다.
(계 14:1, 개역) 『또 내가 보니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계 22:4, 개역)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계 14:9, 개역)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계 17:5, 개역) 『그 이마에 이름이 기록되었으니 비밀이라,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더라』
그러니 이마의 표는 아까 말한 과거의 노예처럼
누구 누구의 아들 이라는
소속 개념인 겁니다.
그러니 집단의 의미이지
개인의 자질 즉 개인의 성화됨, 개인구원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의 신인 성령께서는 곧 예수의 영은
예수님의 마음인 사람의 모양인 곧 인자로 에스겔을 몰아가게 됩니다.
저들의 패역함 보다 더 패역함으로 더 더러움으로
더 저주받은 모습으로
아이고 그것도 죄냐? 그것도 죽음이냐? 그것도 더러움이냐? 라고
예수님께서 인자의 모습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다 담아버린
그 모습을 보여주고자 에스겔은 인자가 되어서
저들이 이 바벨론 포로 됨으로부터 구원받기를 바라는
그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그 완악하고 패역한 마음에
주님은 아이고 포로 됨도 나약함도 그것도 포로 됨이냐?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영과 혼을 죽이시는
그래서 에스겔을 더 더러움으로 몰아가는 주의 신을 임하게 함으로써
아이고 그것도 죄악이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우리의 허물을 담당하신 저 모습을 보라고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이 기쁜 소식을 보라고
이 십자가의 사랑을 보라고
이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는 내 죽음 내 더러움 내 죄악은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라고
이 인자 되신 예수님 곧 예수님의 마음을 보라 라고
에스겔을 인자의 모습이 되게 할려고 몰아가는 겁니다. 주의 신이 말이죠
자 이 에스겔 개인 문제로 끝날까요?
우리가 시편을 살펴보면서
다윗이 겪었던 그 과정이 다윗 개인으로 끝나는 문제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바통을 이어받아서
참선지자들이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보여주고 있고
참 선지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예수님 마저도 그 모습으로 오고
결국 이스라엘이 바로 이 예수님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써
이 과정을 미래완료에서 덮쳐짐을 당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과정이라고 표현하니까 시간순으로 생각하기 쉬우니
좀 차이를 두고자 경과 라고도 표현하기도 하던데
바로 대조적인 것이 바로
부자청년처럼 우리는 자꾸 결과만 따먹을려고 하니까
어떻게 하면 구원 얻냐 라고 예수님에게 다가와서 예수님을 이용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런데 어린아이는 그렇게 묻는 어린아이는 없어요
어린아이는 무능하니까 그냥 자기 숙제할 꺼리가 뭐냐 라고 묻는 어른과 달리
결과만 따먹을려는 어른과 달리
어린아이는 동행 곧 관계성으로써
예수님과의 관계성 이것이 바로 인자 라는 예수님의 마음이다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형상
형상 이라고 하니까 이미지 곧 그림 사진 그런 게 아니라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사건
곧 예수님의 함께 동행하게 되니까
졸지에 인자처럼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당하게 되는
그 경과를 겪게 된다는 거죠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 가족이
갑자기 예수님을 믿게 되니
원수로 졸지에 변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이미지 그림이 아니지요
얼굴이 아닙니다.
이마입니다.
새겨지는 겁니다.
굳 잡 도장 쾅쾅
결과만 따먹을려는 자들은 그 결과에 맞게 자신의 숙제로 원인을 갖추고자 합니다.
그러나 경과는 주님과의 관계성입니다.
자 그렇기 때문에
이런 인자를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인자는 곧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이 사람이 되심입니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신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우리에게 심어버리심입니다.
이것만이 참 인간상입니다.
이 이스라엘이 그래서
포로 잡힘 속에서
광야 됨 속에서
죽음 속에서
살게 되는 구원되는 결과를 따먹고자
더 큰 힘 더 큰 능력
그래서 가룟 유다처럼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고 독립운동을 하는
이 모습이 인자의 모습과 정반대의 모습이다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따먹을려고
조건을 갖추는 겁니다.
부자 청년처럼 어릴 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고 말이죠
그런데 경과는 인자의 모습으로써
육체는 죽이는 자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영과 혼을 죽이시는 자를 두려워해서
내 죽음은 죽음도 아니다 라고
예수님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는 겁니다.
율법의 네 배나 갚으라 라고 하는 것은
도리어 죄악에 대한 저항과 정의 실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죄악을 도리어 감추고자 하는 바 이다 말이죠
칼을 이기기 위해서 더 큰 칼을 찾는 식이다는 거죠
이 부조리를 이기는 것은 내 쪽에서는 이길 수 없고
더 심한 부조리를 이루신 십자가의 사랑을 완성한
칼을 졸지에 고무칼로 만들어 버리는 부조리 보다 더한 부조리가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이렇게 되면 법을 실행할 수가 없어요
법을 의지하는 자들은 졸지에 뭐가 되냐 말이죠
정의를 의지하는 자들은 졸지에 뭐가 되냐 말이죠
말씀을 지키는 자들은 졸지에 뭐가 되냐 말이죠
바로 그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울리는 꽹과리로 만들어 버리는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말이죠
도리어 이 꺾으신 뼈로
율법대로 네 배나 갚으라 라고 사기를 치는 너를 대신해서 죽으신
이 꺾으신 뼈, 꺾여진 죽음, 이 죽음으로 기뻐하라는 겁니다.
이것만이 기쁜 소식이다는 겁니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그래서 황무지에서 죽음에서 광야에서
예수님 자신이 거룩한 길이다 라고
길을 내기 위해서
인자의 모습으로 오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을 저들 패역한 자들 속에서
이사야로 치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고 있는데
졸지에 하나님의 영광이 덮쳐져서
타 죽어 마땅한
쨉도 안 되는 거룩이나 의로움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맞이할려고 하다 보니
택도 안되는 함량 미달의 거룩으로는 죽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서
허걱 거리면서 외치는 겁니다.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고 있었다고 말이죠
그 속에서 이사야가 졸지에 인자의 모습이 되듯이
곧 졸지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입혀지듯이
에스겔 또한 졸지에 패역한 백성 중에서 같은 패역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졸지에 인자로써 주의 신이 임해져서
참인간상인 인자로 삼아버리시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로써 말이죠
그러니 인자의 모습으로써 세상에 내던져지는 겁니다.
저들의 죄악을 담은 거울 반사시키는 신체로써
우리의 죄악을 담은
왜? 이미 십자가의 사랑이 떴기에
이 원인 없는 결과가 떴기에
졸지에 우리는 경과를 겪게 되는 겁니다.
천한 계집이
죄인 중의 괴수가 졸지에 구원을 얻고
왕비가 되다 보니
세상이 격동하면서 견디질 못하는 그 증상을 그 경과를
사건으로써 누리게 되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인 사랑이 이미 뜨니까
나타나는 죄악들이 허물들이 말이죠
이것 마저도 너끈히 이기시는 이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누가 끊겠냐 라고
이미 떴기에
그 증상으로써
사방에 우겨쌈도 당하고
죽음에 넘겨지고 하는 겁니다.
이런 인간상을 인자라고 하는 겁니다.
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창조하시는 겁니다.
아무도 원치 않거든요
그래서 주의 신이 우리를 그렇게 몰아붙여버리는 겁니다.
마귀도 일으키고
칼도
죽음도
광야도
사방의 우겨쌈도
주변의 이방 나라의 왕도
모조리 이 일에 동원이 되는 겁니다.
이 새 창조 말이죠
이 앞에서 에스겔은 으악 이라고 외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너무 충격적이고 놀랍고 놀라워서 민답히 7일 동안 멍해져서 큰 충격에 빠지는 겁니다.
아니 이 인간상이 주님이 원하시는 참인간상이라니
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겠다니?
우리의 모든 허물을 지고 싫어버린바 되어 다들 고개를 돌리는 저 모습이
저 처참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의 저주인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이
기쁜 소식 이라니????
거리끼기 짝이 없는 걸림돌인데
죄인에게 환자에게
심판받아 마땅한 자에게서는
이 십자가 보다 더 또렷한 사랑이 없는 겁니다.
이렇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이 모습을 에스겔은 주의 신이 임해서 인자가 되어서
저들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기쁜 소식으로써 외치게 되는 겁니다.
믿으라고
구원해 주고 싶어서 안달이 나서 가 아니라
이미 확정이 나 버린
이 보다 더 또렷한 미래완료는 없다 라는
예수님의 죽음만이 또렷한 사랑인 십자가의 피 용서인
구원 곧
거룩한 그 길 그 큰 대로 유리바다 이다는 겁니다.
이 거룩한 길에 우리는 연합이 되어서
함께 동행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인자의 살과 피를 마시면서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