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9

25인의 백성 지도자와 주의 신(겔 11, 1- 4)

김 대식 2019. 12. 22. 12:38

19-24 주의 신(성령, 새 것, 묵시)과 25인의 백성 지도자(육체, 옛 것, 역사)  (겔 11, 1- 4)

서로 원수 지간인 서로를 거스리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겔 11:1, 개역) 『때에 주의 신이 나를 들어 데리고 여호와의 전 동문 곧 동향한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그 문에 이십오 인이 있는데 내가 그 중에서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를 보았으니 그들은 백성의 방백이라』
(겔 11:2, 개역)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사람들은 불의를 품고 이 성 중에서 악한 꾀를 베푸는 자니라』
(겔 11:3, 개역) 『그들의 말이 집 건축할 때가 가깝지 아니한즉 이 성읍은 가마가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나니』
(겔 11:4, 개역) 『그러므로 인자야 너는 그들을 쳐서 예언하고 예언할지니라』

(겔 11:1, 현대어) 『[지도층의 죄악과 주님의 심판] 하나님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셔서 예루살렘 성전의 동쪽 문으로 데리고 가셨다. 그 문의 입구에는 나라의 지도자 25명이 모여 있었다. 나는 그들 가운데에서 국가의 최고 지도자들인 앗술의 아들 야아사냐와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 두 사람을 알아보았다.』
(겔 11:2, 현대어) 『주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저들은 이 도시에서 은밀하게 사람들을 때려 죽이고 파괴 공작을 획책하는 흉악한 것들이다.』
(겔 11:3, 현대어) 『그들은 이렇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 `이제는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가 되었다. 우리 도성은 가마솥처럼 안전한 철옹성이니 어떠한 외적이 와도 우리를 보호해 줄 것이다.'』
(겔 11:4, 현대어)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심판을 받아 멸망하리라고 선포하여라.'』


3절이 무슨말인가 해서 각번역본을 봤습니다.
조금은 방향이 반대인 해석도 있지만
대부분 이런 의미입니다.

(겔 11:3, 새번역) 『그들은 모두 '㉠집을 지을 때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이 성읍은 가마솥이고, 우리는 그 안에 담긴 고기다' 하고 말한다. / ㉠또는 '집을 지을 때가 곧 오지 않겠느냐?'』
(겔 11:3, 공동) 『그러면서 서로 '집은 지어놓았것다. 우리는 냄비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살점 아니냐?' 하고 말한다.』
(겔 11:3, 쉬운) 『그들이 말하기를 ‘아직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 이 성은 솥이고 우리는 고기다’라고 한다.』
(겔 11:3, 킹흠정) 『그들이 이르기를,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우리가 집들을 짓자. 이 도시는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되리라, 하느니라.』
(겔 11:3, 한글킹) 『말하기를 "때가 가깝지 아니하니 집들을 짓자." 하며 "이 성읍은 가마솥이 되고 우리는 고기가 된다." 하는도다.』
(겔 11:3, 현대인) 『그들은 `우리가 집을 지을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 이 성은 가마솥과 같고 우리는 그 안에 든 고기와 같아서 이 성이 우리를 보호할 것이다.' 하고 말한다.』


가마솥같이 안전하게 고기가 있듯이 안전하게 보호받는 철옹성같은 도성이
예루살렘 성전이다 라는 겁니다.
즉 성전을 사수하기만 하면
주변나라가 아무리 멸망해도
이 성전 안에는 그 멸망이 오지 않는다고 여겨서
이 성전을 유지하기 위한 악한 행위들이 정당화 되더라 라는 거죠

예를 들어서 앞의 장들에서도 나왔듯이
이스라엘 절대로 망하지 않게 해 달라고(거짓선지자들의 주장처럼)
비밀의 방 우상의 방을 만들어서 우상숭배를 하고
태양신 담무스신을 섬기면서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말이죠

바로 이것이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보여주는
시공간의 역사성이다는 겁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은 성전을 붙잡고
성전 안에 무엇을 꽉꽉채워 넣는고 하니
마치 역사에 무엇을 꽉꽉 채워 넣느냐 하면
바로 제사를 곧 번제와 제사를 꽉꽉 채워 넣습니다.
오늘날로 치며는 성화된 자신의 의로움을 꽉꽉 채워 넣듯이 말이죠

우리가 이사야 22장에서 힌놈골짜기 부활의 골짜기 환상의 묵시의 이상의 계시의 골짜기인
예루살렘에 대해서 살펴봤었잖아요

적군이 쳐들어 와서 포위를 당하니까
에라이 어차피 내일 되면 죽을꺼 오늘 먹고 마시고 죽자 라고 예루살렘 사람들이
부활의 사람들이 그렇게 나왔다 말이죠

오늘 본문도 같은 양상입니다.
이제는 반대로 우리의 정성과 모든 열심을 교회에 꽉꽉 채워넣으면
지성이면 감천이다 라고
이 번제와 제사를 보시고 멸망치 않고 구원해 주실 것이다 라고 
성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어떤 악행도 마다하지 않고 서슴없이 하겠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이것이 인간이 모든 인간이 종말에 대한 대처법
심판에 대한 모든 인간에게서 튀어나오는 행동들이 되는 것이죠
바로 25명의 백성 지도자들의 행동이다 말이죠

(겔 11:2,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이 사람들은 이 성읍에서 포악한 일을 꾸며 내며 악독한 일을 꾀하는 자들이다.』
(겔 11:2, 공동) 『거기에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이들은 이 도성에 재난을 끌어들이는 일만을 생각하고 나쁜 일만을 꾸미는 자들이다.』

이들은 마치 특정장소와 특정시간을 움켜 쥐고서
그곳에 자신들의 의로움을 꽉꽉 채우는 식입니다.

이것이 헌 것 곧 지나가는 사라질 것을 반복하는 헌 것이다 말이죠

여기에 비해 성령 곧 새 일은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처음 아담의 것은 지나가고 삭제시키는 일을 하십니다.
사람의 일로 하나님의 괴롭히는
예수님을 넘어뜨릴려고 하는 그런 25인의 백성 지도자
그것도 예루살렘 백성 이스라엘 백성 지도자들 이다 말이죠
나중에는 바리새인 또한 이런 모습을 동일하게 보이잖아요
이스라엘 선생들 말이죠
이들과의 차이로써 성령이라는 묵시 계시는
역사를 찢으면서 어떻게 활동하시는가 하면
특정 장소와 무관하게
장소를 옮겨버립니다.
새성전을 짖는데 있어서 특정장소인 공간이 날라가 버리고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움직이지 못하는 부동산이 아니라,
바벨론 포로 된 그발강가의 에스겔 이라는 인자에게 새 영을 부어서
새 성전 곧 움직이는 성전으로써 성령의 전을 만드신다는 겁니다.

자 그래서 예수님은 죽었다가 다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는 참 성전을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인간은 강도의 소굴을 사수하는데 있어서 악한 짖을 하는 겁니다.

말이 악한 짖이지
오히려 인간의 관점에서는 곧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오히려 선한 것이고
도리어 예수님이 짖겠다 라는 성전은 곧 묵시적인 성전은
역사적 관점에서는 악한 성전이 되는 것이지요
왜? 역사적인 46년 동안 짖는 성전을 찢어버리니까 말이죠

공간이라는 장소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시간 곧 특정시간이라는 안식일 지키는 것을 확 찢어버립니다.
안식교만 그런게 아니라 주일교 일요일교도 다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그래서 안식의 주인이 안식일 날만 골라서 손마른 자를 고치시니까
비로소 악한 인간의 마음이 들추어지는 겁니다.
거 보세요 악하잖아요
25인의 백성 지도자들이 어떻게 성전을 유지하는지 이제 아시겠습니까?
손마른 자와 같은 부정한 자를 성전에 지금 거룩한 것을 꽉꽉 채워야 하는데
저런 부정한 자가 들어오면 되겠냐 말이죠

마치 전체주의 히틀러처럼 우월한 게르만 민족에게서는
유대인들은 다 몰살해야만 하고
마찬가지로 독일인 중에서 장애인과 같은 자들은 다 죽여버려야
집단 거룩이 되니까 말이죠

성화론자들의 발상이 다 이런 식입니다.
역사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거룩을 성전에 꽉꽉 채우겠다 라고
심지어 자신의 신체라는 성령의 전이라고 성경에 나오니까
그렇게 경건을 꽉꽉 채우겠다 라고 말이죠

아 그런데 부자청년에게 가난한 자의 가난을
부정함을 니 신체에 담아 보렴 이라고 하니까
근심하고 돌아서잖아요

이것이 육체의 한계입니다.
역사의 한계이다 말이죠

자 이렇게 안식의 주인은 부정한 손마른 자를 자신의 신체에 담아서
인애와 자비를 펼칩니다.
이것이 새 것 곧 하나님의 일이자 하나님의 공의인
죽었다가 다시 사는 의 인데

인간은 이런 의 진짜 의가 없으니까
유사 의로움으로 성전에 꽉꽉 채울려고 한다 말이죠

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나쁜짖 부정한 자가 되면
이 성전에 움직이지 않는 이 예루살렘 성전에 거룩을 채울수가 없으니까
멸망 당하게 된다 말이죠
그래서 어서 어서 부정한 것을 제거하고
손마른자를 가까이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 안 망하게끔 해야
메시아를 맞이할수 있다고 본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괴롭히는
예수님을 넘어뜨릴려고 하는 사탄의 생각인
인간의 역사관인 신앙관입니다.

여기에 성령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써의 신앙은
저런 인간의 기특하기 짝이 없는 생각들을 다 배척하심으로써
오로지 성령으로써만 일하시는 겁니다.

이미 벌써 사망을 멸망하지 않고서 나오는 의로움이니
그런 의로움으로는 택도 없는 거죠
없는데서 있게 하시고
죽은자 같으나 산 자로 일하시는 이 새 일은
바로 저런 헌 일을 들통내면서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그 어떤 연결점이 없이
단절로써 일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은혜이다 말이죠
선물 이란 그 어떤 것도 연결점이 없이 주어지는 겁니다.
만약 연결점이 있어서 주어진다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노동의 댓가요 일한 것에 대한 값을 치르는 보상인 거죠

성령을 보혜사라고 하는데
저는 처음 교회에서 이런 용어를 들었을때에
뭐야 불교 용어 아닌가 했다 말이죠
한문 때문에 그런 것인데 말이죠

그냥 쉽게 말해서 돕는자 라는 의미입니다.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기에
성령의 놀라운 탄식으로써 
쟈가 순 엉터리로 기도 하고 있으니 주님 쟈 기도 듣지 마시고
인간의 기도 인간의 믿음 인간의 것 받지 마시고
제가(성령=예수님의 영(마음)) 대신 기도 대신 믿음 대신 행하겠습니다 라고
옆에서 나의 것 인간의 모든 것을 커트 칼처럼 짤라서 단절 시키는 것이
바로 돕는자 보혜사 성령이다는 거죠

그러니 기존의 한국교회의 성령론은 엉터리 가짜
곧 25인의 백성의 지도자의 사고방식으로써
자기신체나 또는 교회에 그런 엉터리 성령을 꽉꽉 채우는 식이니까
저런 증상물 빤스 목사와 황교활이 나오는 겁니다.

악을 심었으니까 악이 나오는거다 말이죠

아무리 회개해서 이제는 악이 아니라 선을 심어야지 라고 해서
선을 심어 보세요
역시나 저런 놈들이 나온다니깐요

성령으로 하지 않으면 다 죄이거든요
성령은 오히려 단절 시켜 버리는 겁니다.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라는 것을 성령은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울 수밖에 없는 거다 말이죠
상한심령이 되게 만들어 버리시는 겁니다.
안 망할려고 몸부림치면서 거룩을 꽉꽉 채우는게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자임을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 밖에 안됨을 고백하게끔 하신다 말이죠

이 죽음 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도록 하시는 것이 성령이다는 거죠
결국 성령은 우리는 심판 속에 집어넣는 기능을 하시는 겁니다.
왜일까요? 백날 해 봐라 함량 미달 이다는 겁니다.
그렇게 죽이십니다
그래놓고 말도 안되게
원인 없는 결과로써

다시 살리심으로써

이 삼일의 간극 이라는 하나님의 의 이라는 긍휼 곧 십자가의 흔적을 벌리신다 말이죠
이게 거룩인데

인간들은 엉뚱한 거룩 곧 성화론을 막 해요 글쎄

그게 성화가 아니라 악이다니깐요
바리새인 보세요 그렇게 인간들에게 선한 자가
가장 선한 이스라엘 사람인 모범생 멘토 선생인 지도자들이
예수님 앞에서는 마귀 자식으로 밝혀지잖아요

인간이 못 밝혀 내었거든요

결국 이 악함이 어디서 왔는가?
특정한 공간과 특정한 시간을 붙잡고 기대를 걸었다 라는 겁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것이 움직이지 않는 
움직이지 못하는 성전이자 동시에
인간의 신체 이다 말이죠

이것이 역사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악해요
새 것이 나오지 않거든요

암논과 다말처럼 바로 바로 미움으로 변해버렸으니까 말이죠

그런 인간의 신체 성에
그 인간의 신체를 찢어버리는
역사를 찢어버리는
존재 아닌 존재인 비존재(존재 보다 더 또렷한 비존재)를 생산 하시는데 그것이 바로
인자 라는 성령을 부어서 만든 새로운 인간형 새성전인
인자 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 인자는 곧 누구 누구의 아들은
인간이 자신의 신체에 거룩을 지식을 지혜를 의로움을 꽉꽉 채울려고 할때에
마치 성전에 그렇게 하듯이 안식일을 그리고 강도의 소굴을 그렇게 하듯이

반대로 인자는 백성들의 허물을
부정함을 대신 채워서 벌거벗는
심판받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더라 말이죠

지난 주에 선지자는 왜 죽음이라는 사망권세와 연관이 되어서 나타나야만 하느냐 라고
마태복음 14장의 세례요한의 죽음을 언급했듯이 말이죠

이것이 새 일이다 말이죠
거짓선지자는 그 반대죠
어떻게 하면 심판과 멸망과 죽음을 피하는 방식만을 백성들에게 인도합니다.

반대로 참선지자는 자꾸 죽음 속으로 몰아 넣어요
무화과 나무 잎이 없는 쪽으로
포도 열매가 없는 쪽으로
눈물로 씨앗을 뿌리는 쪽으로 말이죠

이 다음 글 마태복음 14장의 오병이어의 표적에 대해서 나오는데
사람들은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이 정상적인 이성으로 해석을 하기를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듯이
표적을 그렇게 해석하는 겁니다.

심지어 본인들 자체가 샘이 되어야 하기에
사막에 무엇을 꽉꽉 채울려고 할까요?
맞습니다 샘과 같은 생명과 거룩과 의로움 등등을 채울려고 할꺼다 말이죠

문제는 사막이라는 죽음을 거치지 않고 샘을 채울려고 하니까
도리어 살인을 해야 하더라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삯꾼 목사들에게 속았으면
말씀을 지키면 지킬수록 살인 하는 줄 몰라요

부자청년이 거룩을 지키면 지킬수록 가난한 자를 더더욱 많이 양성하는 줄 몰라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 부자가 싸질러 놓은 똥을 너가 책임 져 보라 라고 하니까
근심하고 돌아서잖아요
거룩 지켜야 하는 율법 지키는 자가 어떻게 더러운 똥을 책임 지냐 라고 말이죠

안식일 지켜 보세요 안식의 주인을 죽일려고 달려든다 말이죠

사람들 웃끼는 것이
윤리 도덕 법 율법 말씀을 지키는 것이
도리어 사람을 죽이는 줄 몰라요

지 혼자만 독대라
다 맞물려 있는 줄 몰라
마치 부자 되면 될수록 말이죠

또 그렇다고 살인자 되라는 말이냐 라고 따지는데
살인자 안 되어도 이미 살인자로 행세하고 있거든요

또 이러니까 그럼 중간치 하겠다 라고 하는데
거 보세요
인간 그 어떤 것도 의로움이 나올수 없는
그저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오히려 기뻐해야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심판의 기준이 바로
새로운 인간형 곧 인자 되신 예수님이 떴기에
우와 드디어 저 새로운 인간 덕분에

이 엉터리 가짜 인간에게서 벗어날 수 있구나
어서 어서 이 엉터리 육체의 장막을 벗겨주세요 라고

율법에 저촉 받는 몸에서 벗어나
율법 외에 한 의로움에 저촉 받는 저 새 몸 덕분에
벗어나야 함을 비로소 알게 되닌
이 순 엉터리 몸에서 탈출 할수 있도록 해 주신 자가 바로
주의 신 이다 라는 겁니다.

에스겔이 인자로써 그렇게 다루어 지는 겁니다.
이 25인의 백성 지도자 와의 차이로써 말이죠

저들의 소욕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는 자로
주의 신이 에스겔을 인자로써 다룬다 말이죠

요즘으로 치면 성화론자나 개혁주의자들
소위 경건한 자
제대로 된 기독교 인 이라고 하는 자들과의 차이로써
(물론 저런 빤스 목사와 같은 수준 낮은 자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경건한 성화론자들과의 충돌
곧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말이죠 적어도 대중들에게 모든 기대치를 한 몸에 안고 있는 자들과의 차이로써 말이죠, 권력 뿐만 아니라 권력은 곧 정치는 항상 지역적 이거든요
장소 공간 역사에서 나와요. 그런 권력이 과거 현재 미래 라는 시간을 장악하니까 말이죠
괜히 성화를 추구하는게 아니거든요)
25명의 백성 지도자들이 멍청한 자 이겠습니까?
천재 중의 천재들 아니겠냐 말이죠 백성을 이끌어 가는 지도자요 선생인데?
그것도 문재앙으로부터 나라를 멸망 당하지 않도록 할려면
보통 머리로 되겠냐 말이죠 모든 지혜가 다 동원될꺼 아니겠냐 말이죠

바로 이런 25명의 소욕에 반대되는 자로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하는 자로써 배치 당하는 겁니다.
역사를 찢는 거죠
특정장소 특정시간을 마구 마구 찢는

그러다가 세례요한이 개죽음을 당하거든요

참선지자는 그저 인간 세계에 어떤 기대치도 아예 없어요
이미 새 일 새 것이 떴기에
그 앞에서 사라져 줘야만 하는
그는 흥하고 나는 망해야 한다는 것 밖에 없는 겁니다.

아주 신나게 죽어요 글쎄

아니 주의 길을 평탄케 할려면
자신이 살아 남아서
주님이 가시는 길에 돌삐나 장애물이나 다 불도져로 밀어서
첩경 울퉁불퉁한 길을 평평하게 길 딱는다메요
딱는다 라고 해 놓고서는
하나도 안 딱고 

도리어 퍼뜩 퍼뜩 무대 뒤로 누락이 되어서
그 누락 되는 길로 예수님이 걸어가시도록 하니

이 얼마나 성화론자들의 사고방식과 정반대 아니냐 말이죠
주인공에게 모든 숙제를 맡겨 버리고
일부러 조폭 깡패에게 시비를 걸어서 퍼뜩 죽어서 무대 뒤로 누락될려고 하니
요즘 같은 선교사들의 생각과는 완정 정반대 아닙니까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이것이 성령이 부어짐 받음을 당한 인자 곧 새로운 인간 형으로써
남은자 지끄래기 부스러기 잉여 열두 바구니 열두 지파인
새 이스라엘 이다는 겁니다.

이 새이스라엘을 건설하시고자
역사 이스라엘을 찢어버리시고
묵시 이스라엘을 새로 만드시는 일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 얼마나 서로가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할까요?

마치 예수님은 끝까지 바리새인의 엉터리 해석들을 다 깨부수고 돌아다니시고
반대로 바리새인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꼬 하는

이 충돌만이 펼쳐지듯이

지금 새성전 새 일이 이미 떴다 라는 그 이유로
그 증상물로써 에스겔은

기존의 헌 성전을 중심으로 생각한 이스라엘 육체들과 그 지도자들과의 충돌을 펼치시는 겁니다.

이 찔림에 우리 또한 찔림이 되면 됩니다.

우리가 성전이라고 하는 교회에
또는 성령의 전이라고 하는 자신의 신체에
얼마나 엉터리를 꽉꽉 채우는 그 짖에 못 벗어남에 있어서

주의 신이신 성령 곧 예수님의 마음은 어떻게 우리를 탈탈탈 터시는지
그의 성실함을 누리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