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해 주는 여호와의 칼 (겔 11, 5-13)
19-25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해 주는 여호와의 칼(진노) (겔 11, 5-13)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사랑) 망함
(호 4:6, 개역)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겔 11:5, 개역)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너는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이렇게 말하였도다 너희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내가 다 아노라』
(겔 11:6, 개역) 『너희가 이 성읍에서 많이 살륙하여 그 시체로 거리에 채웠도다』
(겔 11:7, 개역)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성읍 중에서 너희가 살륙한 시체는 그 고기요 이 성읍은 그 가마려니와 너희는 그 가운데서 끌려 나오리라』
(겔 11:8,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가 칼을 두려워하니 내가 칼로 너희에게 임하게 하고』
(겔 11:9, 개역) 『너희를 그 성읍 가운데서 끌어내어 타국인의 손에 붙여 너희에게 벌을 내리리니』
(겔 11:10, 개역) 『너희가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변경에서 너희를 국문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11:11, 개역) 『이 성읍은 너희 가마가 되지 아니하고 너희는 그 가운데 고기가 되지 아니할지라 내가 너희를 이스라엘 변경에서 국문하리니』
(겔 11:12, 개역)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너희가 내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 사면에 있는 이방인의 규례대로 행하였느니라 하셨다 하라』
(겔 11:13, 개역) 『이에 내가 예언할 때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기로 내가 엎드리어 큰 소리로 부르짖어 가로되 오호라 주 여호와여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다 멸절하고자 하시나이까 하니라』
(겔 11:5, 현대어) 『그때 주님의 영이 내 위에 임하여 나를 사로잡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전하라고 명령하셨다. `주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너희가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계획하는지 내가 다 알고 있다!』
(겔 11:6, 현대어) 『너희는 이 도성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억울하게 때려 죽였고 이 도성의 모든 거리를 맞아 죽은 사람들의 시체로 가득 채워 놓았다.』
(겔 11:7, 현대어)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말한다. 이 맞아 죽은 사람들이 바로 이 도성이라는 가마솥 속의 고기다! 그러나 너희들은 내가 이 솥에서 꺼내어다가 처형시키겠다.』
(겔 11:8, 현대어) 『너희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칼이니 내가 너희들을 칼에 찔려 죽게 할 것이다. 나 여호와가 하는 말이다.』
(겔 11:9, 현대어) 『바로 내가 너희를 이 성중에서 끌어내어 외적의 무서운 폭력에 넘겨 주고 그들을 시켜서 내가 너희에게 내린 멸망의 심판을 집행하겠다.』
(겔 11:10, 현대어) 『너희는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칼로 처형될 것이다.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라는 것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겔 11:11, 현대어) 『너희는 솥 안에 든 고기처럼 이 도성 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이스라엘의 국경에서 너희에게 내린 사형 선고를 집행할 것이기 때문이다.』
(겔 11:12, 현대어) 『그러면 그제서야 내가 여호와인 줄을 너희가 깨닫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나의 지시를 이행하지도 않았으며 내 명령에 따라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웃 백성들의 법률과 풍습을 지키며 살아왔다.'』
(겔 11:13, 현대어) 『내가 이와같이 말씀을 전달하는 동안에 브나야의 아들 블라댜가 죽었다. 나는 땅에 엎드려 얼굴을 가리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주 나의 하나님.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작정이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 마라
나는 검을 칼을 주러 왔다 라고 말이죠
지난 주에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언급 했습니다
육체와 성령은 우리가 서로 상대적이다 라고 알겠지만
소욕 이라는 단어는 똑같은 단어로써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봐야 합니다.
즉 육체의 소욕은 육체를 중심으로 해서 육체와 근접한 것들 중심으로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눅 12:51,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화평입니다.
즉 육체를 중심으로 한 화평 곧 육체에 가까이 근접하도록 하게 한 것들인 거죠
즉 육체의 소욕 곧 육체에 가까이 근접 시키고자 하는 것들이
오히려 성령의 소욕과는 원수지간이 된다는 겁니다.
아비와 아들
딸과 어미
며느리와 시어미 와의 관계를 화평으로 즉 가깝게 둘려고 하는데
이것이 육체의 소욕인데
정작 성령의 소욕은 서로 원수지간으로 만들겠다 라는 겁니다.
결국 성령의 소욕은 이런 근접하게 가까이 둘려고 함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멀고 멀었던 것을 가까이 두라 라고 하십니다.
그 세가지가 바로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
그리고 선지자 곧 종말을 미리 앞당겨 선포하는 자 로써의 종말의 인간형인 인자죠 인자
그리고 소자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인자 라는 젖먹이입니다.
그냥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라는
그 어린아이 곧 여호와를 아는 지식 곧 사랑을 쳐다보는 자로써
버림받는 임마누엘 이다는 거죠
사랑안에는 두려움이 없는 젖먹이 이다는 거죠
자 이 세가지 십자가와 선지자 그리고 소자로
이 육체의 소욕인 이 인간의 세상을 밀어 붙을 수 있을까요?
사망의 권세를 밀어 붙일수가 있을까요?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 10:37, 개역)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마 10:38, 개역)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마 10:39, 개역)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마 10:40, 개역)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마 10:41, 개역)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마 10:42, 개역)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없기 때문에 육체의 소욕은 저런 것은 멀리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고
반대로 가까이 둘려고 하는 것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
어미와 딸
시부모와 며느리 라는 관계로써
마치 오늘 본문 예루살렘 성전을 마치 철옹성같은 방어막으로
가마솥과 고기 와의 관계로써
육체의 소욕을 형성케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우상과 함께 섞어서 조작하게 되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화평관계(만약 이 관계가 깨지만 고아가 되는 거죠 기업이 날라갑니다.
물려받을 재산 한 푼 없는 아빠찬스 할배찬스가 다 날라가는 거죠 고아 말이죠)
그리고 어미와 딸의 화평관계 (이거 깨지면 과부인 거죠 뭐)
그리고 시어미와 며느리의 화평관계 (이거 깨지면 개같은 이방여자 취급 받는 나그네가 되는 거죠)
가까이 둔다는 것은 그 정도로 육체의 자랑이 되는 것이겠죠
예루살렘 성전이 이들의 자랑이 되는 것이겠죠
25인의 백성의 지도자들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자랑꺼리가 도리어
원수의 속성이 되도록 하니까
졸지에 가까이 두고픈 것들이 멀리 멀리 두고픈 상황이 되도록 하시겠다는 겁니다.
시아버지 유다의 입장에서 며느리 다말은 그야말로 약속의 가문을 다 망치는
그야말로 십자가에 불 태워 죽여야 하는 멀리 멀리 해야할 여자였다 말이죠
가차이 두면 안되걸랑요
그런데 졸지에 십자가를 가차이 두고 (공백 곧 도장 도장끈 지팡이 라는 꼬끼오 세 번의 긍휼)
선지자를 가차이 두고 (그가 나 보다 옳았다)
그리고 소자 때문에 (꺾으신 뼈 덕분에 접붙임 당하는) 기뻐하심을 입게 된다 말이죠
마찬가지로 너희 이스라엘 백성이 멀리 멀리 떨어뜨리고자 했던
그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도리어 가까이 두도록 하고
선지자 오늘 나오는 에스겔 같은 선지자 이지요 인자 곧 우리의 허물을 담은 신체
이 인자를 사랑치 않는 자는 저주를 받도록 하시듯이 말이죠
또 소자 곧 꺾으신 뼈 죠
오죽 하면 다윗이 자기 아이를 자기 왕 됨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야를 동침케 만들어서 이 아이를 등 떠밀어서
자기와의 관계성에서 낳은 아이가 아니다 라고 멀리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듯이
우리야 장군의 아이로 만들려고 하다가 실패했듯이
이 소자(죽은자)를 멀리 멀리 할려고 했다 말이죠
심령이 가난한 자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
애통하는자
핍박 받는 자 등등 팔복에 해당 되는 우는 자 말이죠.
(마 10:42, 현대인)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아주 보잘 것없는 사람이지만 그가 내 제자라는 이유로 그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다.'』
부자 청년이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못 주듯이
도리어 멀리 멀리 하고자 어릴적부터 율법을 지켰다 아입니까
그러니 우리의 신앙이란 이 세가지를 멀리하고파 하지
정작 가까이 할려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 곧 믿음이란 우리 내부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로써
어떻게 외부의 이 믿음이 나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목격하는 것이지
나의 내부에서 신앙할려고 하게 되면
이 육체의 소욕에 의해서 멀리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는 것이
성령의 소욕이 된다는 거죠
이 세가지 십자가 와 선지자와 소자 말이죠
이 세가지가 바로 오늘 본문으로 치면
칼이 됩니다.
검을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고
화평처럼 보이는 것을 가까이 둘려고 하겠지만
이것이 육체의 소욕이지만
정작 성령의 소욕은
이 칼을 가까이 두도록 근접케 만들어 버리십니다.
이것이 사랑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말이죠
든든한 도성인 철벽수비 방어막이 되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까이 두고 싶어 했는데
도리어 이 예루살렘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서
우리가 자랑했던 예루살렘 성전은 가마 솥이요 우리는 그 속의 고기로 안전하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 도리어 거꾸로 되어서
우리는 가마솥에 팔팔 끊는 고기처럼 죽임을 당하게 되는
살육의 현장이 되는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먼저 일어나게 된다 라는 거죠
하나님의 집에는 절대로 심판이 올 리가 없다 라고 생각한 것이
도리어 가장 먼저 1번 타자로 벌어지는 심판의 장소가 되는 겁니다.
(벧전 4:17, 개역)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칼을 두려워 해서 칼을 멀리 멀리 하고팠는데
그것을 알고 칼을 도리어 가장 가까이 두겠다 라고
바벨론에 의해서 망하도록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여호와가 누구인줄 알게 하겠다 라는 거죠
그 정도로 여호와가 누구인줄 모른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 당시에
예수님이 누구인줄 유대인들은 아무도 몰랐듯이
오늘날도 마찬가지
예수님이 누구인줄 교회나 기독교가 아무도 모르도록 하시듯이 말이죠
그럼 언제 아느냐
내가 두려워 하는 죽음 이라는 이 칼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하신다는 거죠
곧 십자가 선지자 소자를 통해서 말이죠
교회가 이 세가지를 얼마나 얼마나 멀리 떨어뜨릴려고 도망을 쳐왔지 않았냐 말이죠
그럼 교회는 무엇을 가까이 할려고 했을까요?
강도의 소굴처럼 돈입니다.
우상입니다.
돈 많은 자들과 형제 자매가 될려고 하고 가까이 이웃으로 삼듯이
우상과 곧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자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동적으로 멀리하게 되는 자가
소자가 되는 거죠
나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저 우리야 장군에게 떠밀어 버리고자 하는 꺾으신 뼈가 되는 거죠
단순히 가난한 자에게 동냥해주는 차원이 아닙니다.
내가 이 고아 과부 나그네의 자리에서 구원받은 자이다 라는
주님의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믿음 또는 신앙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사랑인 피 용서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를 가까이 두고자 한다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자기가 자기를 관리하는 차원이 아니라 도리어 손떼고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신앙에게 믿음에게 맡겨버리는 것이 신앙이 된다 말이죠
결국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주어지는 선물이다는 것은
내부에서 연결을 시도하는 모든 것을 다 차단하는 단절성이다는 거죠
성령의 소욕이 말이죠
아니 누가 내부에서 이 십자가 선지자 소자를 원합니까
도리어 멀리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지요
오히려 가까이 둘려는 것은 가족(원수인데도 불구하고 말이죠)
선지자 보다는 거짓선지자 곧 절대로 망할리 없다고 외치는 삯꾼목자
그리고 소자 보다는 부자
오죽하면 부자청년에게 가난한 자들인 소자에게 전재산을 나누어주라 라고 하니까
등돌리고 멀리 떠나버린다 말이죠
그 정도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이런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단절성인 칼 곧 검으로 오신 겁니다
십자가 선지자 소자
도리어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서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까봐 바벨론 여자들이 우상을 섬겼듯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되고자 말이죠
그 칼을 도리어 가까이 두시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진노가 옳기 때문에
이 심판 속에서 이스라엘이
곧 탕자를 부르시러 오신 것이다 말이죠
양준일 이라는 사람이 잊혀 졌다가 갑자기
언론인이 이 사람을 띄워주니까
다들 너도 나도 다 띄워주더라 말이죠
그 동안 투명인간 취급해서 미안한 마음에서 말이죠
그런데 탕자는 다들 잊어버릴려고 노력하지
아무도 기억하고자 다시 소환하고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칼은 너희가 멀리하고자 하는
이 탕자를 기억하고 잊지 않았노라 하시고
도리어 인간은 잊지않고자 영원히 기억하고자 했던
그 이스라엘 땅의 예루살렘 성전과
가족들 혈통들 아비 어미 자녀 며느리 가족 이웃사촌 등등을
칼로써 단절 시켜 버리겠다 라고 하시면서
십자가를 잊지 않겠노라
너희가 죽인 선지자를 다시 소환시키고
너희가 멀리 떨어뜨릴려고 하는 병자 소자를 가까이 두셔서
세리 강도 죄인의 친구가 되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 여호와의 칼입니다.
두려워 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 사랑 없음에 두려워 하는 것에 의해 멸망하도록 말이죠
결국 칼을 두려워 한다는 말은
칼로 망하는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하는 겁니다.
힘의 원리를 여전히 고수하겠다 라는
힘의 세계
선악의 세계에
이스라엘은 처음사랑 곧 십자가와 선지자와 소자로 움직이는
긍휼의 세계이다 라는 거죠
이 처음사랑이 없어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망하는 겁니다.
이 여호와의 칼로
진짜 단절 시켜야 할 것과
가까이 두어야 할 것인
두 소욕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눅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눅 12:23, 개역)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귀족들이 그렇게 자부했던
철옹성의 가마솥 같은 안전한 예루살렘 성전이
도리어 이스라엘을 죽이는 가마솥으로 변하는데 있어서
같은 단어 로써의 소욕이 정작 그 기능을 서로 거꾸로 반대로 본 겁니다.
(반드시 맞물려서 인간의 해석을 비켜가는 식입니다. 일부러 말이죠)
마치 교회가 구원의 장치로 될 줄 알았는데
도리어 지옥으로 보내는 장치로 작용하듯이 말이죠
천국처럼 구원의 장치로 여겼던 것이
지옥으로 끌고가는 심판의 장치가 된 겁니다.
마치 법궤를 앞장세우면 전쟁에서 이길줄 알았는데
법궤가 도리어 홉니와 비느하스를 바벨론 군사들아 잡아 죽여라 라고 했듯이
반대의 소욕의 기능을 한 겁니다.
자 그렇기에 소유가 넉넉하면 넉넉할수록 불안합니다.
창고를 늘렸던 부자가 내 영혼아 편히 쉬자 라고
소유의 넉넉함을 가까이 둠으로써
가마솥의 고기처럼 안전함을 화평을 누릴려고 했지만
정작 그 소유 오늘밤 니 영혼 취하면 그 소유가 누구 것이 되겠냐 라고
갑자기 공포로 변해 버리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내가 누구인줄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성전 안에 두 사람의 기도에서
정작 세리는 곧 매국노죠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인줄 알기에
두려워 떱니다
즉 주님은 칼이다 불이다 라는 겁니다 심판의 주 이다는 거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자신이 구원 받을 수 밖에 없는 근거물들을 가차이 두었다고 자부합니다.
십의 일조 내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았다 라는
이런 것들을 가까이 했으니까
구원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심판의 근서가 되는 줄 몰랐던 겁니다.
믿음이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즉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통해서 주어집니다.
그러니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임을 볼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 앞에서
인간의 속임수 곧 자기가 자기를 관리 했다는 것을 내세울수가 있겠냐 말이죠
오히려 믿음이란 이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보고
자기자신을 손 놓을 수밖에 없는
주님의 숙제를 비로소 보는 것인데 말이죠
무엇이 밝히 보이는 또렷한 겁니까?
십자가 입니까? 자기를 관리한 의로운 행동들 입니까?
그 의로운 행동들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못하게 되는
자기 목을 자기 스스로 조르는 것이 된다 말이죠
이런 의미에서 이 여호와의 칼이 아니면
우리는 주님이 누구신지 여전히 모르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너 나 누군지 모르지? 그래 알려 주마 라고
가까이 둘려고 했던 것들이 멀리 멀리 해야 할 것으로 변하게 만드시고
반대로 멀리 멀리 둘려고 했던 것들을 가까이 하게 만드시는
이 여호와의 칼의 기능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마치 전능자가 누구인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겁니다.
어딜 속일려고 말이죠
나를 제대로 심판하는 자가 아니면
다 거짓입니다.
주변의 강국인 바벨론을 일부러 두신 이유는
바로 이런 엉터리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의 죄악을 심판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두려워 떨수 밖에요
그 두려움에서 구원 시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두려움 속에 집어 넣으십니다.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면
인간은 먹을 것이 고갈이 되어서 공포에 떱니다.
빈털터리가 될까봐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될까봐 우상숭배를 할 수밖에 없으니
그 속에서 구원 되고자 한다면
그 하나님은 여전히 우상과 썩여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말이죠
여호와가 누구인지 여전히 모르는 겁니다.
만약 그 속에서 구원 받으면
자기가 자기를 구원함으로써 더더욱 자기 라는 올무에 얽매이게 되는 거죠
자기를 손 놓을 수가 없게 됩니다.
외부의 구원이 아닌 여전히 내부에서 자기를 자기가 구원하고자 하기에
우상이든 뭐든 다 동원하는 거죠
이런 두려움으로 형성된 허구가 바벨론 아입니까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게 될까봐 우상을 섬기는 저 바벨론을
공포로 여겨 두려워 떨게 된다면
이스라엘은 오히려 더더욱 두려움에 더 두려움인 꼽배기 두려움이 되는 식이다 말이죠
그래서 여호와의 칼은 저들 바벨론을 더더욱 멀리하도록 구원하시는게 아니라
더더욱 가차이 두도록 하시는 구원을 펼치시는 겁니다.
대놓고 골리앗을 붙이시더라 말이죠
오로지 어린아이 다윗만이
공포나 두려움은커녕 도리어 신나게
너 골리앗아 하나님이 누구신지 너 모르지?
내가 알려주마 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다윗아 어딜 감히 교만한 말을 하느냐 라고
겸손해야지 라고 나오고 갑옷과 등등을 채워준다는 것은
도리어 거걸치는 거추장한 것들이 된다 말이죠
다윗 개인의 싸움이 아니다 말이죠
자기 자신의 싸움이 아닙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어린아이 곧 젖먹이를 주님이 보내심으로써
모욕적인 구원을 펼치십니다.
멋들어진 구원이 다 깨어지는 거죠.
그 공포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공포에 더 나은 공포가 되도록 하신다 말이죠
두려움에 더 나은 두려움 곧 사랑이 되게 하신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입니다.
죽음에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저들의 칼에 더 나은 칼이 되도록 오히려 더 칼로 작용하는 구원을 펼치신다 라는 거죠
기드온의 칼이여
칼 없어요
그런데 칼 보다 더 칼 같은 기능을 해요
한꺼번에 몰살 해서
저거들끼리 칼로 자기편을 다 죽이는 겁니다.
기드온 쪽은 칼이 있던가요?
이 믿음이 기드온에게서 펼쳐진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래서 가장 겁쟁이를 사용하신 겁니다.
그런데 용사 래요? 용감한 장수 래요?
말 되는 소리는 성경에 없어요
다 말도 안되는 소리 밖에 없는 겁니다.
정작 이런 여호와를 보고
이방인은 무릎 꿇어서 입술로 주라고
만군의 여호와를 아는데
오히려 이스라엘은 모르는 겁니다.
창조주가 누구인지를 못 알아 본다는 점에서
이런 사건들을 의도적으로 펼치시는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 내부가 아닌
전 세계의 열방들을 움직이시면서 까지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하시겠다 라고
여호와의 칼로써
성령의 소욕을 펼치심으로써
육체의 소욕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내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소유하는게 아니라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나를 소유하여 여호와의 칼을 보여주시겠다는 겁니다.
성전의 기능은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바리새인의 기도는 자신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소유했다 라고 외치고 즉 기도하고
반대로 세리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나를 소유했다 라고
그 칼에 찔림을 당하듯 여겨
어찌할꼬 어찌할꼬 라고 외치는 우리가 주님을 죽였구나 라고 외치는 겁니다.
즉 회개 곧 야곱아 돌아오라 라는 그 음성으로 인해
탕자가 되어서
회개자가 되어서
돌아오도록 되어 있는 것이
여호와의 칼의 기능입니다.
자기가 회개를 달성해서가 아니라
회개가 탕자를 돌아오도록 해서 말이죠
이것이 여호와의 칼의 기능입니다.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6, 개역)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행 2:37, 개역)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행 2:38,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행 2:39, 개역)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행 2:40, 개역)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개역)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침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행 2:42, 개역)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행 2:43, 개역)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행 2:44, 개역)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행 2:45, 개역)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행 2:46, 개역)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행 2:47, 개역)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