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8

[소자를 업신 여기지 말라] 와 [손 발 찍어 내버리라] (마 18, 8-10)

김 대식 2020. 5. 9. 21:39

18-83 소자를 업신 여기지 말라 와 손 발 찍어 내버리라 (마 18, 8-10)

(마 18:8, 개역)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9, 개역)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마 18:10, 개역)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 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 18:11, 개역) 『(없음)』

(마 18:8, 새번역) 『"네 손이나 발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서 내버려라. 네가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손이나 발 없는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또는 '죄 짓게'』
(마 18:9, 새번역) 『또 네 눈이 너를 ㉥걸려 넘어지게 하거든,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불 붙는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눈으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 ㉥또는 '죄 짓게' ㉦그, '게헨나'』
(마 18:10, 새번역) 『"너희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한 사람이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1절 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11. 인자는 잃은 사람을 구원하러 왔다'가 첨가되어 있음』


성경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모든 세상의 시선에 마치 도전하는냥
모조리 다 거꾸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치 소유의 넉넉함 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 

(눅 12:15,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시고』

라고 하셨듯이
아니 누가 생명 때문에 소유의 넉넉함을 바라지
소유의 넉넉함 떄문에 생명을 귀하게 여기겠냐 말이죠

그런데 막상 모든 가치가 생명 보다
소유의 넉넉함에 뒤바껴 있다고
탐심 곧 우상숭배를 지적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다들 쉬쉬하는 것을 노골적으로 까발리고 있다 말이죠

오늘 본문이 그러합니다.
너무 너무 잔인하기 짝이 없다고 여겨질 정도입니다.

너의 손과 발이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려랴 라고
얼마나 무시 무시하고 잔인하게 말씀 하시냐 말이죠

그런데 이유가 있다 말이죠
바로 더 귀한 생명을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경우는 마치 손 발이 썩은 마치 당뇨환자들이나
불의의 사고로 손이나 발이 썩어서 짤라야 할때에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말이죠

바로 그런 취지로 말할수 있는 자는 의사 밖에 없다 말이죠

의사만이 생명을 살릴수 있으니까 말이죠

여기에 나의 의견이 개입 할 수가 없게 됩니다.

자 그렇듯이
내 손 내 발 이라고 내 몸에 붙어 있다고
그렇게 귀히 여긴다 라면

왜 소자는 마치 나의 한 몸으로 안 여기느냐 로

주님은 이 소자는 나의 몸과 같다 라고 생명 취급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상대적으로 내 손 내 발이 아무리 내 생명에 붙어 있어도
썩었다면 짤라내라
그래야 생명이 다치지 않는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자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의 취지를 어느 정도 이해가 됩니다.
우와 소자를 주님은 자신의 몸으로 하나로 결부 시키시는데 있어서
우리는 그렇지 못해구나 라고 말이죠

그러나 문제는 소자 라고 했을때에
이미 상대적인 나는 대자 중자 로 취급해 버린 이상
이 소자는 계속해서 소자로 남아 버리고 나는 대자로 곧 큰 자로 남는다는 점입니다.

그 정도로 우리는 죄악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이 심각성을 주님은 지적하고 있다는 겁니다.
선악 이라는 우상숭배 곧 탐심 이라는 죄악에 말이죠

그러니 모든 타인은 지옥 인 것 만 뿐만이 아니라
모든 타인은 소자가 되는 겁니다.

아니 소자로 만들지 못하면
자신이 대자 큰 자가 되지 못한다 라는 거죠
그런 인간들끼리 모여사는 곳이 바로 이 세상이다는 거죠

그런 세상에
말도 안되는 소리를 이 세상에 내 던지셨다 라는 것은
예수님이 곧 예수님 본인이 소자로 취급 받아서
이미 열외로 재껴 놓은 사람 취급 당하고파 환장한 사람처럼 행동하신다는 겁니다.

바로 이겁니다.
이 세상은 소자들은 살 수가 없는 세계이다는 겁니다.

그럼 구원은 뭡니까
그런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고 입니까
아니면 어서 떠나자
이 땅은 이미 심판 받은 땅이다 라고 떠나는 것이 구원 입니까

누가 그런 세상을 원할까요?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라고

저 세상이 부럽지 않는 자에게는
예수님의 모든 거꾸로 된 시선은
다 헛소리 일 수 밖에 없는 거죠

즉 소자가 아닌
다들 큰 자 들 밖에 없는 겁니다.

자기는 큰 자가 되는 것에 실패했다 손 치더라도
자기 자식은 어떻게 해서든 큰 자가 되어서
큰 자 만이 소통이 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를 바란다 말이죠

작은 자가 될까봐 얼마나 부모들이 자식을 매질 하냐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은 자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래요
애통하는 자가 되어래요

의에 주리고 목 마른자
이것을 또 성화론자들은 의로운 자가 되어라 라고 사기를 치는데
그 반대입니다.
의가 없어서 의를 달라고 부르짖는자가 되어래요
즉 지난 주에 강퍅케 한 애굽왕을 붙이셔서 부르짖는자 되게 만드신다는 겁니다.

내 숙제가 없어요
애통하는 자가 인간 숙제에서 나올 수가 없어요
주님의 십자가 라는 불도져가 나를 불도져에 깔려 죽게 만들어서
애통하는 자롤 만들겠다는 겁니다.

자 아무튼 다시 돌아와서
인간이 자기 몸에 붙어있는 자기 손 과 발이 있는 이상
내 몸의 바깥의 존재는 무조건 소자가 되는데 있어서
더더욱 소자인 어린아이는

이미 열외가 되어버렸따 말이죠
그런 어린아이를 내 목숨처럼 귀하게 여긴다?
말도 안 되죠

여기서 어린아이는 또는 작은 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죽은 자 곧 십자가만 졸졸 따라 다니는
예수님의 자녀를 두고 말합니다.

자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임마누엘을 곧 누구 누구의 아들
인자를 구한다 안 구한다

안 구하는 겁니다.
다들 고개를 돌려 버려요

불뱀에게 물려 죽는 판국에도 
생명을 쳐다 본다?
인자를 쳐다 본다?
안 쳐다 봐요

왜냐하면 전혀 생명처럼 안 보이거든요
도리어 죽어 있는 자로 보여요

바로 이 죽은 자가 바로 소자입니다.

바로 이런 소자를 업신 여기는데 있어서
이 세상은 만연하다 못해
이 죽은 자를 찾아서 또 죽이는데 열중하는데 미쳐 있습니다.
그래야 밟고 일어서서 큰 자가 되거든요

즉 어린아이는 늘 무시꺼리의 대상이 되는 거죠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홀로 살수 없기에 말이죠
늘 어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한다 말이죠

바로 이 무시꺼리
미말에 둔 구경꺼리가 된 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왜 홀로 자립을 못하냐 라고 세상으로부터 놀림을 당하는 거죠

너무 너무 예수님에게 의존적이라서
따로 독자적으로 몸을 구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남아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바리새인 보세요 저는 요 십의 일조를 하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이 얼마나 독자적 입니까

그런데 세리를 보세요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오늘날 목사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죠

죄 죄 죄 고만 카고
좀 독자적으로 행동하라 라고 나온다 말이죠
언제 까지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할 꺼냐

이제 국가가 뭘 해 줄꺼냐 라고 묻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묻자 라는 식으로 나온다 말이죠

(케네디 취임 연설 맥락“···새로운 힘의 균형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강자는 정의롭게 약자는 안전하게 평화가 유지되는 법이 지배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합시다. 이 모든 일은 ··· 이 행정부의 임기 중에는 물론, 우리의 생애 안에도 이 지구상에서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은 해봅시다 ··· 우리 노선이 궁극적으로 성공하느냐 성공하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저보다 여러분에게 달려 있습니다 ··· 그것은 나라를 위해 무기를 들라는 부름이 아닙니다. 그것은 ‘희망이 보일 때 즐거워하고 고난이 있을 때는 참으면서’ 오랫동안 긴 싸움의 짐을 지라는 부름입니다 ··· 이 역사적인 노력에 여러분도 참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 저는 우리 중의 어느 누구도 다른 국민이나 다른 세대에 우리 책임을 떠맡기기를 바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그러므로 국민 여러분, 여러분의 나라가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물어보십시오 ··· 신의 축복과 도움을 기원하면서, 이 땅 위에서 신이 하시는 일이 진정으로 우리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합시다.” )

모든 종교 모든 국가는 바로 이런 취지의 사고방식인
육적인 사고방식이다 말이죠

마치 히틀러가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주장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장애인들을 다 죽였다 말이죠

그런 장애우들을 손 발 짜리듯이
자신의 탐욕의 근원을 짤라 보라 말이죠

남아나는 것이 있겠냐 말이죠

그렇게 짤려 나가는
정작 짤라야 할 자신의 탐욕은 냅뚜고
업신 여김 당하고
무시 받는
열외 꺼리에게

주님은 자신의 생명을 결부 시켜 버렸다 라는 취지로써
이 육의 사고방식에 도전을 하시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애굽을 강퍅케 하셔서
이스라엘을 부르짖게 함으로써

이 소자 이스라엘을 업신 여긴 애굽을 짤라내시는
출애굽 구원 사건을 말이죠

그런데 이제 거꾸로 이스라엘이 도리어 애굽이 되어서
이스라엘 처음사랑을 발로 차버리는
고아 과부 나그네를 신원하기는커녕
도리어 압제하고 등쳐 먹고 있는 상황을

주님은 어린아이를 통해서 까발리고 계시는 겁니다.

과연 수긍이 될까요?

수긍이 된 다면 우리는 얼마나 예수님을 무시하는 지
업신 여기는지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예수님을 구하지 않는다 라는 것은
업신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여전히 내 숙제로써 내가 직접 해결해 보겠다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주변에 바벨론을 배치 시키시고
애굽왕을 강퍅케 만들어서

애굽군사와 애굽왕으로 인해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모르고 시드기야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지 않고
어떻게 해서든 불뱀에게 물려 죽게된 상황을
자신의 숙제로써 약을 찾고자
구원받고자 애를 썼으나
큰 자가 되기는커녕
자신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자에게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고방식을 짤라내시고자
손 과 발을 짤라내시고자
바벨론 애굽 등등을 배치 시켰다 말이죠

베드로의 그런 사고방식을 짤라내시고자
마귀를 배치 시켰다 말이죠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라는 이 높은 마음 말이죠
이것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을 쳐다본다 안 본다?
안 쳐다 보고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안 쳐다 보는 겁니다.

사탕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말이죠

그 높아진 마음을 꺽고자
주님께서 마귀를 통해서 베드로의 곧은 목을 꺽는겁니다.

그렇게 마음을 낮추게 함으로써
막살게 하심으로써 (절대로 막살지 않겠노라 라고 했던 높은 마음을 꺽으심으로써)
비로소 소자의 마음

곧 성령 이라는 새 마음
부드러운 마음

낮아진 마음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부르짖는 마음을 부어주심으로 인해

비로소 도리어 업신 여기는 자리에서
업신 여김을 당하는 자리
무시 받는 자리에 놓여져서

주님과 함께 저 무시 받는 십자가를 통해서
주님이 이렇게 우리들에게 무시 받았음을 비로소 보게 되는 겁니다.

바로 이 십자가가 주님의 사랑이였다는 것을 말이죠

이 부끄러운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
이 무시받는 십자가 날 위해 지셨네 ~~~

날 위해 지셨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