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소욕의 싸움과 모욕적인 일만달란트 용서의 세계 (마 18,23-35)
18-87 서로의 소욕을 못하게 하는 모욕적인 용서의 세계 (마 18,23-35)
(마 18:23, 개역)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 18:24, 개역)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마 18:25, 개역)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 18:26, 개역)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 18:27, 개역)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 18:28, 개역)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9, 개역)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 18:30, 개역)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31, 개역)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 18:32, 개역)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 18:33, 개역)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 18:34, 개역)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 18:35, 개역)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23, 새번역) 『그러므로, 하늘 나라는 마치 자기 종들과 셈을 가리려고 하는 어떤 ㉡왕과 같다. / ㉡또는 '왕의 사정과'』
(마 18:24, 새번역) 『왕이 셈을 가리기 시작하니, 만 ㉢달란트 빚진 종 하나가 왕 앞에 끌려왔다. / ㉢한 달란트는 노동자의 15년 품삯』
(마 18:25, 새번역) 『그런데 그는 빚을 갚을 돈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그 아내와 자녀들과 그 밖에 그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마 18:26, 새번역) 『그랬더니 종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참아 주십시오. 다 갚겠습니다' 하고 애원하였다.』
(마 18:27, 새번역) 『주인은 그 종을 가엾게 여겨서, 그를 놓아주고, 빚을 없애 주었다.』
(마 18:28, 새번역) 『그러나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나자, 붙들어서 멱살을 잡고 말하기를 '내게 빚진 것을 갚아라' 하였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마 18:29, 새번역) 『그 동료는 엎드려 간청하였다.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마 18:30, 새번역)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 하지 않고, 가서 그 동료를 감옥에 집어넣고, 빚진 돈을 갚을 때까지 갇혀 있게 하였다.』
(마 18:31, 새번역) 『다른 종들이 이 광경을 보고, 매우 딱하게 여겨서, 가서 주인에게 그 일을 다 일렀다.』
(마 18:32, 새번역)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다 놓고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마 18:33, 새번역)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 18:34, 새번역) 『주인이 노하여, 그를 형무소 관리에게 넘겨주고,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가두어 두게 하였다.』
(마 18:35, 새번역) 『너희가 각각 진심으로 자기 ㉤형제자매를 용서해 주지 않으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 ㉤그, '형제'』
주님은 이 세상을 은혜로 창조하셨습니다.
즉 용서로만 이 세상을 만드셨기에
주님과 인간의 관계는 용서로만 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용서가 아닌
선악으로만 소통하게 되어 있어요
즉 우상입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냐 유익이 되지 않냐 라는 계산속에서만 소통을 따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자 그러다 보니
오늘 본문도 이렇게 따집니다
아니 주님은 뭐든지 다 용서하신다면
바로 용서의 왕 중의 왕 이시다면
(마 18:27, 개역)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주님의 용서를
주님의 불쌍히 여겨주심을 거부하는 자도 용서 해 주어야 하지 않냐 라고 나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용서가 남을까요? 또 선악 곧 우상만 남을까요?
자 그래서 오늘 본문 끝에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단호한 징벌을 이야기 하십니다.
용서를 거부하는 놈은 반드시 심판하시겠다 라고 말이죠
이 심판이 용서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들까요?
아니면 더더욱 용서의 가치를 높이 높이 더더욱 높이고 있을까요?
아니 용서로만 소통 한다메
용서로만 소통 한다고 해 놓고서는 왜 천국만 만들지 지옥을 왜 만드냐
왜 뭐든지 용서하지 않고
지옥을 만들어서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고 지옥 보내냐
라고 나옵니다.
이런 자들은 마치 구원의 하나님을 원인으로 두고 그 구원의 결과를 자기가 받아야 한다는
배불러 터진 구원을 바라고 있는 우상숭배자인 거죠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요 자기를 위한 예수를 믿는 겁니다.
바로 그것을 깨뜨리시는 것이 용서의 하나님입니다.
즉 저들은 존재를 따져요
존재를 따지겠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에 기준을 두고서
자기 존재를 투사시켜서 그 하나님의 존재를 믿고 가치를 두겠다는 식입니다.
이런 세계가 바리새인의 세계 곧 유대인의 세계요 마귀의 세계요
선악의 세계입니다.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이기에
이 세상의 모든 인간 세계는 선악만이 소통이 되는 세계이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자들 보는 앞에
그들의 코 앞에서
그들 보란 듯이
천한 계집종을 아무 연고 없이 용서해서 왕비의 자리에 놓게 되면
세상이 견디질 못하고 격동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 라는 인물
곧 용서 라는 인물이 펼치는 용서의 내막인 십자가의 피 용서입니다.
그러니 반드시 죄인 만드시는 용서 인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도 언급했듯이
용서는 왕에게는 필요가 없어요
배불러 터진 왕에게 용서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바로 그런 왕을 죄인의 자리
원수의 자리에 놓아서
왕이 졸지에 솔로몬의 영광을 다 버리게 됨을 당하는 잃어버린바 되고
졸지에 사막에 피는 들에 핀 백합화가 되었을때에
아무리 왕 일지라도 그 왕은 오로지 불쌍히 여겨주심만을 바라는
죄인의 자리에서 누가 진정한 실상의 왕인가를 외치게 될 거 아니겠냐 말이죠
이것이 이스라엘 이라는 특이한 나라의 왕인 유다 사자 새끼 이다 말이죠
그런데 사생아와 다를바 없이
사자가 아닌 일반 동물과 다를바 없이
주께서 왕 이십니다 나 아닙니다 주님이 왕이십니다 라고 외쳐야 사자 유다가
도리어 이방 나라의 왕처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목숨을 건다 라고 나오면
그게 사단의 일만 생각하는 자 이지
하나님의 일을 생각 하는 자 이겠냐 말이죠
남들은 뭐라고 해도 저는 하나님의 일만 하겠습니다
라고 각기 제 갈 길로 가는 양 같지 되지 않고자 하는 자들은
바로 이방인 이다 말이죠
이런 이방인과 다를바 없는 유대인에게서의 십자가는
거리끼는 걸림돌이다는 겁니다.
자꾸 옆길로 빠지도록
각기 제 길로 양 같은 자로 만드시는
이 요나의 표적을 들이내미니
소통이 안되는 겁니다.
관계가 형성이 되지 않는 겁니다.
자꾸 동일성 합일성을 추구하고픈데
차이성으로 요나처럼 도망치게 되니
그런 쪽팔리는 모욕적인 구원은 싫다 라고 나온다 말이죠
일만달란트 빚 탕감이 과연 기쁜소식일까요?
모욕적일까요?
멋들어진 배불러 터진 금액일까요?
얼마나 모욕적이냐 말이죠
내 손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거든요
내가 구원 받았다면 뭔가 잘되어야 하는데
구원이 그런 멋들어진 배불러 터진 구원이 아니라
니 지옥 가는 것 막고자 내가 내 목숨 값을 대신 지불 했단다
너 지옥 안가게 되었어 가 과연 기쁠까요? 모욕적일까요?
그럼 지금 당장 먹고 살도록 해주는 복은 왜 안 줍니까?
아니 내가 너를 지옥에서 빼냈단다
나는 너에게 내 목숨을 주었잖니
다 주었는데 뭘 또 달라고 하니?
다 주었는데
아니 그건 그거고요
지금 당장 내 가치가 땅바닥으로 떨어지는 실패의 삶에서
성공의 삶으로 옮겨갈수 있는
경제 돈을 떡을 주던가
종교 문화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적을 주던가
정치 권력으로 사람들을 휘어감을수 있는 영웅이 될수 있도록 도와 주던가
지금 뭔가 해 줘야지
물에 빠진자를 건져 놓으셨다면 책임을 지셔야지요
거지 꼴로 살게 해 주시면 되냐 말이죠
용서로는 불쌍히 여겨 주셔서 살려주심으로는 세상에 나가 살수 없다니깐요
소통이 안되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꺼리를 저 세가지 경제 종교,문화 정치 중에 하나 라도 줘야 할꺼 아니겠습니까
아니 물에 빠진 놈 건져줬더니 보따리 내 놓으라 라고 하는 식이다 말이죠
은혜를 모르고 말이죠
이것이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하시는데
또 자꾸 선악으로 독의 세계로 또 들어갈려고 하더라 말이죠
네 맞습니다. 서로의 소욕을 못하도록 하고자 서로 밀어낸다 말이죠
7에 70번의 용서의 세계는 남을 7번 용서하는 것을 그것도 용서 축에 들어가냐 라고
거부 합니다.
(갈 5:17, 개역)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서로가 원하는 것을 못하도록 한다 말이죠
성령의 소욕은 죄악의 소욕 곧 선악의 소욕을 거부하는 거죠
게임이 된 장난은 이 성령을 거부하고요
열명의 문둥병자 곧 죽은자를 살려줬다 말이죠
그런데 9명의 유대인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갔다 말이죠
즉 게임장으로 도박장에 다시 들어간 겁니다.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살려줬더니
도리어 다시 죽으러 게임장으로 간 겁니다.
다시 율법 지키러 성전이 있는 곳에 말이죠
그러나 단 한 명의 사마리아 문둥병자는
왜 너도 안 가고 뭐하냐
아니 생명이 여기 있는데 제가 어딜 가냐 라고 나온다 말이죠
일만달란트 용서 곧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다시 저 용서가 없는 게임장 뭐든지 이겨야만 하는 선악의 세계인 게임장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니까
용서의 가치를 무용지물로 만드는 것에 대해서
절대로 허용치 않고자
반드시 징벌 내리시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 모습을 용서의 왕 중의 왕이 펼치시는 겁니다.
자 이로소 용서의 기능은 계속 남은 것일까요?
용서가 무가치 하게 된 것일까요?
존재를 따지는 자들에게는 용서가 결국 없는 거네 라고 나오고요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 보는 자는 우와 진짜 용서가 저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네 ~~~~~
로 보겠냐 말이죠
존재를 따진다는 것은
마귀를 거치지 않고서 예수님을 하나님을 보겠다 라는 식이 되는 겁니다,.
그런 예수 그런 하나님이 곧 마귀인 우상인 셈인 거죠
뭐 마귀도 존재로 따질테니 백날 마귀를 거쳐본들
존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거죠
용서의 기능이 아니라
용서의 존재로 따지니까 내 돈 띠 먹고 도망친 놈을 도저히 용서 못하는 겁니다.
존재는 허구다 말이죠
실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꾸 행동을 해요
행함이란 결국 내가 원인이고 내가 결과가 되는
나 라는 존재를 의식해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나 바깥의 저 분은 어디까지나 나 바깥의 존재인 거죠
내가 그 존재와 동일시 할려는 행동만 지킬려고 할 뿐인 겁니다.
그가 내 속에 들어오는 기능은 있을 수 없는 거죠
그가 네 속에 들어오게 되면 나 라는 존재는 사라지니까 말이죠
쌍둥이 권법 도플갱어 권법 양발차기 이니까 말이죠
나 또한 마귀로써 원수로써 지적을 받아야 하니 말이죠
마귀만 발차기 당하는게 아니라
내 속에 있던 마귀가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오심으로 인해서
마귀만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나 또한 같이 양발차기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일만달란트 탕감받은 자가 용서의 왕 중의 왕에게
양발차기를 당하는 겁니다.
이것이 용서의 기능이다 왜 우짤래 라고 말이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이런 말이 있다고 카더라 말이죠
제가 난독증이 심해서 책을 잘 못 읽습니다.
그래서 책 설명해 주는 강의를 듣다 보니 들은 내용인데
사람은 자기 부모를 죽인 원수는 잘 잊어먹어도
자기 돈 떼 먹은 놈은 절대로 잊을 수가 없다고 한다 라고 말이죠
오늘 본문에 딱 해당 된다 말이죠
내 부모를 죽인 원수 김땡규는 금방 다 까먹어 잊어버려도
내 돈 띠 먹고 도망친 전땡환이는 죽어도 못 잊는다 말이죠
그래서 배신하는 자들을 가장 싫어한다 라고 말이죠
자기는 국민들은 심심하면 밥 먹듯이 배신하면서 말이죠
자 그래서 저번에 녹음 중에 이런 말을 했어요
인간에게는 원수가 없다 라꼬
머리가 나빠서 금방 까 먹는다 라고
아니 원수를 잊지 않으면 자기 몸이 힘들어지니까 금방 잊을려고 해요
그래야 본인이 편해요
그런데 주님은 이 불쌍히 여겨주심을 통해서
반드시 원수를 소환 시키시는 겁니다.
원수를 거치지 않으면
자기가 원수인줄도 모르고
원수 마귀를 거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무이다
자꾸 배불러 터진 구원을 바래요
앞의 글 에스겔처럼
네 왕 중의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시드기야처럼 배불러 터진 구원을 자꾸 바래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마귀의 세 번째 시험에 빠진다 말이죠
그런 내 숙제로 이룬 남을 7번 용서 하기 로는 이 세상에서만 소통이 되지
저 언약의 나라
용서의 나라
십자가의 피 용서의 나라에서는 못 살아요
택도 없어요
함량 미달
짐승의 수입니다.
사람의 일이다 말이죠
용서의 나라는 7에 70번 무한대의 용서의 나라 이다 말이죠
일만달란트 20조의 15만년의 탕감 즉 영원한 나라 이다 말이죠
존재를 따진다는 자체가 손가락 새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배불러 터진 소리냐 말이죠
그래서 원수 마귀를 거치시도록 하시는 겁니다.
마귀는 이 십자가의 피 용서에서 비로소 밝혀 집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하는 놈들은 다 마귀입니다.
성화론자들이 십자가 피 용서를 말하면 살기가 넘쳐서 눈 빛이 막 달라져요
자신들의 소통꺼리가 무용지물이 될까봐 말이죠
성화됨 곧 행함을 소통해야 하는데
어딜 감히 우리 구역에 와서 십자가를 외치냐 라고 막 따져요
주님은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면 자신을 나타낸 적이 없어요
오로지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바로 다음 글이 이사야 서 53장 마지막 부분인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이시기로 작정 하신 것을 기뻐했다 라고
기쁜소식은 이것 뿐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인간은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면
하나님을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다 보니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동일시를 추구해요
존재에서 존재로 말이죠
다들 서로가 멋들어진 하나님과 같이 되자
호모 데우스 가 되자 라고 나오는 이 세상의 판국에
예수님은 거꾸로 하늘 영광 버리고 하나님 되심을 버리시고
거꾸로 도플갱어 쌍둥이로
죄인으로 오셨다 말이죠
자 이렇게 되니 다들 고개를 돌리는 겁니다.
으악 얼굴이 망가진 괴물이 된 얼굴이다 보니
주님은 거울 비추듯이
마치 이사야가 발가벗고 3년 동안 벗고 돌아다닌 것처럼
너희들이 애굽을 의지하는 것이 발가벗은 애굽을 의지하고 있음을 거울 비추듯이 비추듯
예수님의 얼굴은 망가진 얼굴로 오심은
이게 너의 모습이야 라고
어딜 니가 선악의 달인인 하나님의 얼굴을 하고 있어?
너의 얼굴은 그게 아니라
이게 너의 진짜 얼굴이야 라고
쌍둥이로 오시는 겁니다.
인간으로 와요
이게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안 그러면 원수 마귀도 거치지도 않으니
십자가를 통해서 마귀를 못 보는 겁니다,
계시록에 총명한 자 곧 성령 받은 자는 짐승의 수를 세어보라고 했다 말이죠
무엇이 짐승의 수 인지
무엇이 사람의 일인지?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가
장지지겠다 라는 그 집사 국회의원 이름 뭐죠
그게 바로 사단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고 하는 자 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냐 말이죠
배신의 정치를 외치면서 협박하는 년이나
장지지겠다 라는 놈이나
그러니 해답 곧 십자가
언약의 완성인 다 이루었다 라는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고서는
마귀를 거치지도 않았기에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겁니다.
그저 존재로 따져요
존재로
그러니 손가락 세고 있는 겁니다.
손가락은 존재하거든요
그러나 용서의 세계에서는 손가락을 세지 않아요
손가락이라는 존재는 무의미해요
그저 용서만 있을 뿐이니까 말이죠
어느 정도로 용서 받았는가
불쌍히 여김을 받았는가?
십자가의 피가 아니다면 하나님을 모르기에
만약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 (십자가를 거치지 않고서-하나님이 심판 당하심) 라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이유가 없을꺼다 말이죠
그러니 하나도 몰랐던 겁니다
그 정도로 아무것도 모르니까
용서 하시고자 십자가에 달리시고자 오신 겁니다.
이 십자가가 우리 그리스도 인에게는 영광인 거죠
헬라인에게는 어리석은 지혜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자신의 처음자리를 발로 차버리니
근원 중심점이 날라가 버리니까 떠도는 이방인 떠돌이가 된 겁니다.
지금의 유대인들이 그렇잖아요
계속해서 의문의 반복만 해요
답을 모르니까 제자리에 계속 빙빙 돌아요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말이죠
마치 앞의 글 에스겔의 젊은 사자처럼
여호아하스 왕
여호야김 왕 (엘리야김)
시드기야 왕
처럼 말이죠
각기 제 길로 양 같이 되지 않을려고
끝까지 내 나라는 내가 지키겠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왕 다운 모습이다 라고 하는 것이
도리어 이스라엘의 왕 다움을 해치는 슬픈 비극이 되는 겁니다.
기쁜소식이 없잖아요
감사가 없다 말이죠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율법을 주신 이유를 모르는 겁니다.
율법은 바로 옆길로 빠져서
나는 뭘 해도 막사는 자이고
뭘 해도 가짜이고
뭘 해도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 이다
이런 죄의 무거움을 모르니까
율법의 취지를 모르고 자꾸 지킬려고 달려드는 겁니다.
누구처럼? 저 네 사자 새끼처럼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내 구원은 내가 구원 따낸다
주여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
그런데 어린아이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아요
옆으로 빠져요
8살? 18살 여고냐처럼 말이죠
각기 제 길로 가는 양처럼 말이죠
주님 홀로 담당 하시는 이 십자가를 모르니까
율법 지킬려고 달려드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율법을 어기게 되는 겁니다.
죄의 깊이를 모르니까
얼마나 얍잡아 봤으면 말이죠
율법은 왜 내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죄인인가를
죄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사망의 밑바닥 까지 가야 할 정도의 무거운 죄안 줄도 모르고
깨작 깨작 뿅뿅뿅 남을 7번 용서하면 죄의 무게가 가벼워 지겠죠? 장난하냐 말이죠
뭘 해도 죽어 마땅한 죄인임을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서는 모르는 겁니다.
그저 존재를 따지는
즉 동일성 합일성 개방성을 따지지
존재를 따지지
단절을 몰라요 단절을
그러니 하나님과 자기를 위한 우상과 함께 썩어서
기가 막힌 자기를 투사시킨 멋들어진 하나님을 만들어 놓았는데
재수 없게 예수님은 망가진 얼굴로 오시더라 말이죠
백날 꾸며 보라 말이죠
너의 얼굴이 이 얼굴이야 라고 괴물의 모습으로 오시는 겁니다.
즉 선악을 따지는 곧 존재 곧 우상만을 따지고 있는
나를 위한 하나님을 따지고 있는 자에게서는 절대로 보여지지 않는
장대 높이 달린 인자 이다 말이죠
누구 때문에
어느 정도의 죄의 무게이기에
인간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무게의 죄임을
십자가를 통해서 봄으로써
그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다는 겁니다.
이 해결할 수 없는 죄악의 무게를
하나님께서는 그가 상하게 됨을 통해서 기뻐하신다 라고 하십니다.
그를 상하게 하심을 작정하심이 기쁨이 되도록 말이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 십자가의 사랑이 아니였으면
우리는 죄에 대한 무서운 저주와 심판 뿐이였습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대가를 그가 대신 징계를 받으심으로 인해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된 겁니다.
다른 길로는 없습니다.
오로지 십자가의 피 용서 뿐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원수를 보게 됩니다
이 십자가의 지혜로 인해
원수 마귀가 격동하고 견디질 못하는 겁니다.
이 용서를 무가치 하게 만들려고 하는데 있어서
주님은 그 마귀의 소욕
그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는
십자가의 영을 완성 하셨거든요
이 처소를 예비하심으로 인해서
우리는 성령의 전으로써
성전 곧 언약의 완성만을 바라보는 겁니다.
요나가
(욘 2:4, 개역)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라고 고백합니다.
아니 죽음의 밑바닥에서 왜 주의 성전을 바라본다고 했을까요?
그런 여유가 있을정도로 주의 성전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죽음의 순간에서 이 고백을 했어야만 했을까요?
성전은 언약의 완성 장소입니다.
바로 예루살렘에서 말씀 곧 용서가 나옵니다. 은혜가 나와요
인간이 지키는 말씀이 아니라
지킨 적도 없는 말씀 되시는 예수님이
이미 다 이룬채로 말이죠
예수님이 참성전으로써
우리의 죄악을 거룩으로 바꾸는 장소가 되는 겁니다
에스겔은 그 성전이라는 장소가 인물로 바뀌는 거죠
바로 인자입니다
새성전과 새마음
이것이 언약의 완성입니다.
눈에 존재하는 존재로써의 눈에 보이는 성전은 공중분해가 되고
그림자를 사라지고
실체 곧 진짜 죄 용서하시는 분은 바로 저 분이다 라고 말이죠
도플갱어 옹고집전에서
진짜 원본은 사라지고
복사본 가짜가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더라 말이죠
하나님과 같이 된 진짜 인간은 사라지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가짜 하나님은 영원히 살더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사 주 가 되게 하셨다 라는 겁니다.
진짜 인간인 나의 돈 띠 먹고 도망친 친구를 족치게 한 나를 사라지게 만들어 버리고
가짜 하나님의 일만달란트의 빚 탕감 이라는 기쁜소식은 영원히 남더라 말이죠
똑같이 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의 예수님 미리 장사 치르는 비존재와 같은 행동은 영원히 기념이 되는 복음이 증거 되는 곳마다 증거가 되고
제자들의 윤리 도덕 양심
아니 너는 양심도 없냐 왜 그 비싼 향유를 땅에 부어 허비하고 낭비하냐
그 돈으로 가난한 자를 얼마나 많이 먹일수 있지 않느냐 라는
이 멋들어진 이야기는 복음에서 전혀 기념이 되지 않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을 통해서
싸가지 없는 마리아와
열심이 특심인 마르다 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는데
싸가지 없다 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싸가지 없게 붙이니까
갑자기 같이 복음을 나누던 자들이 떨어져 나가는 겁니다.
얼마나 다행인지
잘 떨어져 나갔구낭
다르게 제목을 붙여 보면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마리아와
끝까지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습니다 장 지지겠습니다 라는 마르다
누가 좋은 것을 택했을까요?
(눅 10:38, 개역)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눅 10:39, 개역)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눅 10:40, 개역)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시나이까 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눅 10:41, 개역) 『주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눅 10:42, 개역) 『그러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자 이것을 오늘 본문에 적용해 봅시다
싸가지 없는 일만달란트 용서냐
아니면 열심이 특심인 백데나리온 정의실현 이냐
좋은 편이 뭡니까?
좋다 라고 하니까 앞의 글에서도 언급한
좋은 무화과 나무와 악한 무화과 나무 비유가 생각난다 말이죠
(렘 24:1, 개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렘 24:2, 개역)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렘 24:3,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라』
싸가지 없는 여고냐는 좋은 무화과 나무
왜? 주님이 원인이고 주님이 결과가 되어서
아무것도 안 것이 없이 용서 받기만 하는
일만달란트 빚 탕감
그 어떤 누구도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예수님이라는 새성전을 통해서
죄를 거룩으로 바꾸시는 언약의 완성을 누리게 되는 반면에
절대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열심이 특심인 장 자지겠다 라는 시드기야는
언약의 완성인 새성전을 못 보는 겁니다.
슬픈 노래의 예언대로 되어버렸다 말이죠
이 모욕적인 구원인 십자가의 저주가 옳았는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누가 이 십자가가 기쁜소식인줄
하나님의 영광인줄 누가 알았으리요
오히려 인간은 멋들어진 구원
배불러 터진 구원을 이룰려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내 숙제는 내가 한다
내 구원은 내가 이루겠다
이레에 두 번 금식
십의 일조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기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음
이제 뭘 더 하면 구원 얻겠습니까?
율법사는 큰 계명 두 계명을 지켰다고 자랑할때에
주님은 지키는게 아니라
누가 너 라는 강도 만난 자를 이웃으로써 도와 주는 자 인가?
하나님은 너를 도우시는 자
(시 121:1, 개역)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시 121:2, 개역)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누가 너를 돕는 이웃인가?
이 십자가에 피 흘리시는 예수님 아니면 이웃 아니다 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헛되게 하실까요? 아니면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시기 까지
확정 하실까요?
다른 용서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