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으니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7-30)
18-93 영생 상속은 모든 것을 다 버린 자 인가? 주를 위하여 잃어버림 당했다가 다시 되찾는 자 인가? (마 19,27-30)
남을 7번 용서하는 자 인가? 도리어 남으로부터 7에 70번 용서 받아야 할 자 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나이다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7에 70번, 일만달란트 용서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뭐든지 다 하신다 (마 19,23-26)
마태복음 2018 2020. 7. 12. 10:53
18-92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은 뭐든지 다 하신다 (마 19,23-26)
(마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마 19:30, 개역)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 19:27, 새번역)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받겠습니까?"』
(마 19:28,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마 19:29, 새번역)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아버지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땅을 버린 사람은, ㉦백 배나 받을 것이요, 또 영원한 생명을 물려받을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아버지나 어머니나'와 '자식이나' 사이에 '아내나'가 있음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여러 배'』
(마 19:30, 새번역) 『그러나, 첫째가 된 사람들이 꼴찌가 되고, 꼴찌가 된 사람들이 첫째가 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지난 주에 이어서 예수님과 제자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제자와의
구원(영생)에 대한 의견 충돌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계속해서 구원에 대한 시각을
연합 협동 합동 개방 동참 등등의 적극적인 개입을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청년이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냐 라고
영생을 얻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운운하는 반면에
주님은 반대로 자꾸 단절성을 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청년은 등돌리고 갔습니다.
(영생 또는 구원이란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겁니다.
그런데 다들 이런 구원이라면
누가 구원을 얻냐 라고 합니다. 다들 등돌리게 하는 구원은 듣도 보도 못했던 거죠
구원을 차단 단절 하는 구원인 겁니다.
즉 인간이 따로 생각해 놓은 구원이 있었던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따로 기존의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그 하나님을 깨뜨리시고자 주께서 내 주께로 비유로 무슨말인줄 모르는새 일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 새로움이 오늘 본문에도 나옵니다.)
(마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이제는
이 부자와 같은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봐도 다르다 저 부자와 같지 않음으로써의 구별짖기로써
베드로는 마치 아무나 할 수 없는 대단한 일을 했다 라고 자부하면서 이야기 합니다.
주여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라고 말이죠
부자청년이 결과적으로 해 내지 못한 행동을 자신은 했다 곧 했음이 갑자기 가능성으로 보여서
자신있게 이 좋은 찬스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베드로는
부자청년이 못한 행동을 자기자신은 했으니
영생에 부합이 되지요 라고 나오는 겁니다.
따로 국밥의 영생을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건 가짜 영생이고
진짜 영생은 주님의 살과 피에 부합 되지요 라고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주님의 살과 피에 부합 되지요 라고 묻는 자는 없습니다.
우연찮게 예수님이 부르시고 따라오라 라고 하심에 있어서
그물을 던져 버리고 따라왔던 과거가
마치 지금 이 순간에 맞는 적합한 행동이였음에 확신하고
베드로가 이 구원에 개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 일이 아닙니다.
지난 시간에도 우와 부자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지
여기에 모든 인간은 동의를 하지
예수님처럼 반대를 하지 않는다 말이죠
오히려 모든 것을 다 버리라고 합니다.
자 이러니까 베드로가 자신의 개인적인 사적인 행동 과거의 행적을 놓치지 않고
이 틈에 끼어 개입시키고자 합니다
저는 다 버렸습니다 주님 무엇을 주실 겁니까
그래 그랬구나 내 살과 피를 주마
아이고 아이고 아닙니다 취소 취소 나는 그 정도로 나쁜놈 식인종 아닙니다
부자청년과 다른자 맞지요 라고 했는데 똑같습니다
우와 베드로 대단해요 라고 다들 말하지
다들 동의를 하고 있지
예수님처럼 이렇게 삐딱하게 나오지 않는다 말이죠
베드로의 이런 사고방식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자 할때에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된다 라고
정 그러면 나도 주님을 끝까지 따라가서 십자가에 함께 죽겠다 라고 나옵니다.
이 얼마나 대단 하냐 말이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부어서라도
주님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면 라는 자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께서 난 반댈세 라고 나오신다 말이죠
이유는 아무리 모든 인간이 박수를 치는 행동과 마음가짐이라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육이다 라는 겁니다.
육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 약속을 이루고자
자신따나 백세 넘기 전에 반드시 아이를 가지고자 했다 말이죠
그래도 그것은 육입니다 육
베드로의 그 가상하기 짝이 없는 마음
부자청년과 다를줄 알았겠지만 역시나 같았던 겁니다.
부자청년 또한 자기 따나 가상하기 짝이 없는 마음
그리고 아브라함 또한 어떻게 하면 주님을 위해서
약속하신 바를 이룰려고 그렇게 까지 100세 넘기기 전에 이루고자 했다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육에서 나온 겁니다 육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면 안되는 겁니다.
다들 인간 자기 뜻이였었던 였었던 것이었던 것이였습니다.
(요 1:11, 개역)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요 1:12, 개역)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3, 개역)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것을 인간의 창의성 창조성 이라고 합니다.
이런 능력이 없으면 이 세상에서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베드로는 창의력을 발휘해서
어떻게 해서든 주님의 뜻에 맞도록 하고자 노력했다 창의력을 발휘했다 말이죠
예수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행위
이 얼마나 창조적인 행동 입니까
그러나 이것은 주님의 세상을 새롭게 하심과 안 맞습니다.
(마 19:28,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다행히도 이 새로움이 무슨 의미인가를 에스겔과 이사야 서를 통해서 요즘 자주 언급하면서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마치 주님의 의로움 주님의 거룩인 거죠
상대적인 인간의 의로움 인간의 거룩한 행위 오늘 베드로처럼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른 행위는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새 일과 안 맞다는 겁니다.,
(마 19:28,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새 세상에서 인자가 자기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라온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마 19:28, 공동)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나를 따랐으니 새 세상이 와서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때에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마 19:28, 쉬운)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나를 따라오는 너희들은, 인자가 영광의 보좌에 앉는 새 시대에,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부족을 심판하게 될 것이다.』
(마 19:28, 킹흠정)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재판하리라.』
(마 19:28, 한글킹)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를 따르는 너희들은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새 세대에,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 19:28, 현대인)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분명히 말한다. 새 시대가 되어 내가 나의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 너희도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마 19:28, 현대어)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새 세상이 되어 인자가 그 나라에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다른 번역에서는 새 시대
새 세상 이라고
인자의 나라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인자가 뭡니까 새성전 아닙니까
에스겔 서에 의하면 인자(저희 죄악을 담는 박스 신체, 대신 매 맞는 고난 받는 종)와 새마음 곧 성령이 합쳐진 것이 바로 새성전이거든요
이 새 일과 이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와
베드로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름과 같습니까 안 같습니다,
네네 그래도 얼마나 대단하냐 라고 나오신다면
그래 베드로가 말한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그래 그래 대단한 일 했다 치자
그래 주마
내 살과 피
곧 영생
어이구 어이구 싫습니다 라고 나온다 말이죠
아니 내가 식인종도 아닌데
그 정도로 나쁜놈으로 보시면 섭섭합니다 라고 나올꺼 아니겠냐 말이죠
그러나 주님은 이 살과 피 외에는 나와 연결 될 방법이 없다 라고 하신다 말이죠
행하고 믿어준 보상으로써의 영생이
기대하고 고대했던 구원이
주님의 살과 피와 전혀 안 맞더라 말이죠
그런 자기 의로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거 보세요 부자청년 등돌리고 돌아서 가잖아요
복종 못하는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맞습니다 인간 쪽에서 주님을 영접하겠다고 다가오는 방식은 모조리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지식을 쫓은 것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다른 하나님을 들이대더라 말이죠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복종치 않고
자기 의를 세울려고 하니
이것은 오히려 유대인처럼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사탄의 회 모습이였던 겁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릴려는 자 이다
사람의 일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다 라고
인간의 의로움은
죽은 자를 살릴수 없는 그저 자기 개인 하나 챙길려는 수법 꾀 속임수 뿐입니다.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냐 말이죠
니 옆에 욥 다니엘 노아가 옆에 있어도
그래 니 하나 너의 의로움으로 구원 시킨다 치자
그러나 니 아들은 구원 못 시킨다 라고
개인 구원은 없다 라는 겁니다.
(겔 14:14, 개역) 『비록 노아, 다니엘, 욥, 이 세 사람이 거기 있을지라도 그들은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겔 14:20, 개역) 『비록 노아, 다니엘, 욥이 거기 있을지라도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오니 그들은 자녀도 건지지 못하고 자기의 의로 자기의 생명만 건지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니라』
집단 구원 밖에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몸 밖에 없어요 그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것도 새 이스라엘입니다
기존의 이스라엘이 아니라 혈통 육정 사람의 뜻으로 똘똘똘 뭉쳐진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이 아니라 말이죠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는 유대인처럼 행동하는 사고방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성화론자들을 보면 가관입니다
개혁주의니 뭐니 다 그래요
박땡순 따라 할려고 다들 자꾸 자살할려고 해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새로움(창조성)을 갖추고자 합니다.
그 새로움에 주님이 응해 주실 것을 믿고파 합니다.
확증편향인 거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창의력 창조성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그 창의력인 새로움을 알아주지 않는
예수님을 더더욱 미워 할 수밖에 없는 살인의지를
유대인들처럼 똑같이 우리도 펼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창의력이 아니라 새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우상숭배
곧 위에서 언급한 자기 의로움을 세울려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완악한 마음입니다.
그러고 보니
세계에서 창의력이 가장 우수한 민족이 유대인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새로움은 예수님의 새로움과는 전혀 맞는게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 새로움을 넘어뜨리는 우상을 넘어뜨리듯이
뜨인돌이 나오서 네 짐승을 넘어뜨리듯이
자꾸 실족케 만드는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바로 주님의 새로움입니다
네 맞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새로움 곧 새 일,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이란
바로 [하나님의 죽으심]입니다.
이사야 53장 고난 받는 종을 통해서 우리가 살펴본 말씀이 바로
심판 하시는 하나님과 심판 당하시는 하나님으로써 언약 곧 새 일을 이루심이다 라고 했습니다.
주께서 내 주께 말이죠
즉 베드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라는 원인이 자신이 되었고
그리고 그 결과로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겠는가 라고 받아야 하는 결과물로써 자신이 졸지에 결과가 되어야 함에 있어서
주님은 반대로 너가 원인이고 너가 결과가 되면 안된다 라고
예수님 자신이 새로움의 원인이요 즉 알파요
예수님 자신이 새로움의 결과 즉 오메가 이다 라고
그 새로움이 바로 십자가에 달려 죽는 하나님 이다는 겁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원인이고 심판 당하시는 하나님이 결과이다 라는 겁니다.
이런 창조주는
인간의 창의성에서는 나올수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에
인간의 의로움은 절대로 복종하지 않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열심만 있지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습니다 만 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겁니다.
큰 지진 멋들어진 번개 파도 지진으로 오시는게 아니라
들릴까 말까 라는 세미한 음성 곧 모욕적인 구원
곧 세미한 음성이 뭡니까?
큰 벼락이 떨어져 보세요
며칠전에 중부에 번개가 1000번 넘게 벼락을 쳤는데
가까이에서 번개를 경험하면 온몸이 떨려서
저절로 신을 찾습니다 하나님이든 예수님이든 부처님이든 십자가든 다 있는대로 찾아요
그런데 세미한 음성은 다들 무시하는
거들또 안 보는 무가치 한 겁니다.
그 모습으로 오시는 심판당하는 하나님으로 오신다 라는 것이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새 일입니다.
시온에서 나온 율법으로 인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해 불뱀을 보내 다 죽도록 하셨다 말이죠
그럼 그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이스라엘이 불뱀에게 다 물려 죽어야 하는데
오히려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 보게 함으로써
심판 당하시는 하나님을 보게 함으로써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긍휼을 베푸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 새 일을
인간의 머리에서는 도저히 나올수가 없어서
베드로는 사람의 일로 떼울려고 합니다.
(요 13:37, 개역)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요 13:37, 새번역)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왜 지금은 내가 따라갈 수 없습니까? 나는 주님을 위하여서는 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무슨소리 하십니까 주님 저는 반드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라고
자꾸 사람의 일을 들이댑니다
아니 이런 제자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얼마나 믿음직 스럽나요
그런데 이것이 믿음이 아니라
주님은 마치 시셈을 하시듯이 니 믿음 안 받을 거야
내가 너에게 너 믿음 탈탈 털어서 가짜 믿음 탈탈 털어서
내가 내 믿음을 너에게 심어서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할 거야 라고
주님의 믿음을 심어서
새 마음을 심어서
도저히 인간의 믿음에서 나올수 없는 고백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앞의 주와 뒤의 주가
주께서 내 주께 라는 이 언약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인해
주님의 의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에 복종 하더라 말이죠
좀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주의 살과 피를 먹지 않겠다
영생을 먹지 않겠다 라고 우기더니
이제야 주여 저는 주의 살과 피가 없으면 못사는 자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고
나 같은 죄인
나 같은 환자는
의사 되신 예수님 없이는 못 삽니다 라고
하나님의 의 곧 십자가
곧 심판하시는 하나님과 심판당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영생을 새생명을 얻게 된다 말이죠
이 새 일을 보여줄려고
니느웨 백성을 나중 된 자를 먼저 되게 하시고
둘째(탕자)가 뉘우쳐 돌아오도록 하시고
맏아들은 정작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완악한 자로 만드시는 겁니다.
그럼 유대인 곧 이스라엘은 에스겔서처럼
둘째 아들로 만들고자 하실까요?
(마 21:28, 개역)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 21:29,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마 21:30, 개역)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마 21:31, 개역)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아니면 먼저 된 자로 만들려고 하실까요?
어 여기 마 21장도 나중된 자가 먼저 들어간다는 내용이 나오네요
자 이렇게 유대인들은 자꾸 먼저 된 자가 될려고
자꾸 자기 의를 세울려고 하는 겁니다.
첫 번째 이스라엘 왕 사울왕이 그냥 세워진게 아니다 말이죠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왕의 조건을 다 갖추었기에 세워진 겁니다.
그런데 두 번째 이스라엘 왕 다윗 왕은
아무도 그를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마음이 추호도 없는 모습으로 왕으로 세워집니다
그것도 나라 바깥에서
도망치는 가운데
외국 나라에서 동굴에서
그것도 어중이 떠중이 도망자 나그네 그들속에서 왕으로 세워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추호도 이 도망자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데 보탬이 된 적이 없습니다.
사울왕의 권세 아래에서도 충분하다 라고
그 악의 권세에서 벗어나고픈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말이죠
이 나중된 자가 먼저 되는 둘째가 뉘우쳐 돌아오는 겁니다.
자 이렇게 영생은
새로움은 가만히 창의력을 펼치듯이 자기 의로움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영생이 나를 죽이고자 달려들고
아니 영생이라면서 나를 죽이면 그게 무슨 영생이냐 라고
자꾸 전쟁을 벌리는 영생이고
새로움은 나의 헌 것 곧 새로움의 창조성이라고 우기는 그 헌 우상성을 깨뜨리면서 다가오는 겁니다.
그러니 주의 이름은 가만히 있는 문자가 아니라
나의 이름을 겨냥해서 충돌하고 전쟁을 벌리시면서 오는 것이 주의 이름이다는 겁니다.
(마 19:27, 개역)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9, 개역)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베드로가 주장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에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가 없습니다.
즉 자기 이름을 위하여 버렸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이름을 위하여 라고 나옵니다.
내 이름을 위하여 라는 표현을 우리가 지난 주 에스겔 말씀을 통해서 살펴봤습니다.
19-53 내 이름을 위해 약속의 땅에 인도할때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겔 20,40-44)
(겔 20:40, 개역)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온 족속이 그 땅에 있어서 내 거룩한 산 곧 이스라엘의 높은 산에서 다 나를 섬기리니 거기서 내가 그들을 기쁘게 받을지라 거기서 너희 예물과 너희 천신하는 첫 열매와 너희 모든 성물을 요구하리라』
(겔 20:41, 개역)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열국 중에서 나오게 하고 너희의 흩어진 열방 중에서 모아 낼 때에 내가 너희를 향기로 받고 내가 또 너희로 말미암아 내 거룩함을 열국의 목전에서 나타낼 것이며』
(겔 20:42, 개역) 『내가 너희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 곧 이스라엘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들일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고』
(겔 20:43, 개역) 『거기서 너희의 길과 스스로 더럽힌 모든 행위를 기억하고 이미 행한 모든 악을 인하여 스스로 미워하리라』
(겔 20:44, 개역)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너희의 악한 길과 더러운 행위대로 하지 아니하고 내 이름을 위하여 행한 후에야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44절에 나오죠
즉 지금 베드로처럼 추호도 영생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그저 베드로가 얻고자 하는 것은 자기의 의로움 쌓기입니다.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지 않을려고 합니다.
에스겔이 지금 이스라엘에게 외칠때에
때려죽어도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어 할 때 입니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을 때 입니까
이사야 때는 반드시 바벨론 포로 속에서 나오는 기쁨을 누리게 하시겠다에서
기뻐할까요? 나쁜소식 일까요?
이런 주님의 의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시는
이 의에 복종하기 싫어한다는 겁니다.
이 새로움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를 싫어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인간 이름을 위하여만 살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산 적이 없다는 겁니다.
살수도 없습니다.
살려고 하지 마세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사는 것은 내 숙제가 아니라
주님의 숙제로써 펼치시겠다는 겁니다.
그 주의 이름에 나의 이름은 그저 당하고 삭제당하는
주님의 숙제만이 펼쳐질 뿐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자꾸 주의 이름으로 인해
자신의 우상성
엉터리 새로움
엉터리 구원
엉터리 용서
이런 멋들어진 구원에
주님은 초라하고 싫어버린바 된
모욕적인 세미한 무가치한 음성으로써만 구원을 펼치시겠다 라고
그가 찔림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는 방식으로만 일하시겠다
이 살과 피를 먹을래?
이 기쁜소식을
다들 고개돌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믿음 떨어지지 말라고
반드시 주의 살과 피를 먹고
주여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주의 꺾으신 뼈로 기뻐하리라 라는
이 모욕적인 구원
하나님께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다 라는 이 기쁜소식으로만
새 마음으로만
우리의 헌 마음
우리의 우상의 마음
우상과 하나님을 썩은 선악을 밀어버리시겠다
에스겔서처럼 모조리 다 불질러 다 태워버리겠다 라는 것이
새로움입니다.
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어떻게 주님이 직접 일하시는 지를
베드로는 당하면서 목격하도록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