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8

비꼬는 천국 비유인 포도원 일꾼 비유 (마 20, 1-19)

김 대식 2020. 7. 26. 09:35

18-94 비꼬는 천국 비유인 포도원 일꾼 비유 (마 20, 1-19)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으니 무엇을 얻으리이까? (마 19,27-30)
마태복음 2018 2020. 7. 18. 13:40
18-93 영생 상속은 모든 것을 다 버린 자 인가? 주를 위하여 잃어버림 당했다가 다시 되찾는 자 인가? (마 19,27-30)

(마 20:1, 개역)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2, 개역) 『저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 보내고』
(마 20:3, 개역) 『또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4, 개역) 『저희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저희가 가고』
(마 20:5, 개역) 『제 육 시와 제 구 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 20:6, 개역) 『제 십일 시에도 나가 보니 섰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7, 개역) 『가로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섰느뇨 가로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가로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 20:8, 개역)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 20:9, 개역) 『제 십일 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 20:10, 개역)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 20:11, 개역)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 20:12, 개역)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3, 개역)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 20:14, 개역)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5, 개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마 20:17,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려 하실 때에 열 두 제자를 따로 데리시고 길에서 이르시되』
(마 20:18, 개역)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
(마 20:19, 개역)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어 그를 능욕하며 채찍질하며 십자가에 못박게 하리니 제 삼 일에 살아나리라』

(마 20:1, 새번역)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고용하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어떤 포도원 ㉠주인과 같다. / ㉠또는 '주인의 사정과'』
(마 20:2, 새번역) 『그는 품삯을 하루에 한 ㉡데나리온으로 일꾼들과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원으로 보냈다. /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
(마 20:3, 새번역) 『그리고서 아홉 시쯤에 나가서 보니, 사람들이 장터에 빈둥거리며 서 있었다.』
(마 20:4, 새번역)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적당한 품삯을 주겠소' 하였다.』
(마 20:5, 새번역) 『그래서 그들이 일을 하러 떠났다. 주인이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 나가서 그렇게 하였다.』
(마 20:6, 새번역) 『오후 다섯 시쯤에 주인이 또 나가 보니, 아직도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왜 당신들은 온종일 이렇게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소?' 하고 물었다.』
(마 20:7, 새번역)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기를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켜주지 않아서, 이러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당신들도 포도원에 가서 일을 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마 20:8, 새번역) 『저녁이 되니, 포도원 주인이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기를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품삯을 치르시오' 하였다.』
(마 20:9, 새번역)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을 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마 20:10, 새번역) 『그런데 맨 처음에 와서 일을 한 사람들은, 은근히 좀 더 받으려니 하고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마 20:11, 새번역) 『그들은 받고 나서,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말하였다.』
(마 20:12, 새번역) 『'마지막에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았는데도, 찌는 더위 속에서 온종일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였습니다.'』
(마 20:13, 새번역)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마 20:14, 새번역) 『당신의 품삯이나 받아 가지고 돌아가시오. 당신에게 주는 것과 꼭 같이 이 마지막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내 뜻이오.』
(마 20:15, 새번역)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내가 후하기 때문에, 그것이 당신 눈에 거슬리오?' 하였다.』
(마 20:16, 새번역) 『이와 같이 꼴찌들이 첫째가 되고, 첫째들이 꼴찌가 될 것이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부름받은 사람은 많으나, 택함받은 사람은 적다'가 첨가되어 있음』
(마 20:17, 새번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열두 ㉣제자를 따로 곁에 불러놓으시고, 길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제자'가 없음』
(마 20:18, 새번역) 『"보아라, 우리는 지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들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것이며,』
(마 20:19, 새번역) 『그를 이방 사람들에게 넘겨주어서, 조롱하고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달아서 죽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날 것이다."』

(마 20:1, 현대어) 『[포도원 일꾼과 품삯] 하늘나라는 또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느 포도원 주인이 자기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아침 일찍이 나갔다.』
(마 20:17, 현대어) 『[수난에 대한 세번째 예고;막10:32-34,눅18:31-34]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열두 제자를 곁으로 불러』


지난 주 에스겔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부정적이고 삐딱한 비유를 말하는 자가 아니냐 라고 했습니다.
비유 자체가 부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 속에 엉터리 하나님을 마귀가 심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선악으로 인해 뒤바뀐 전도된 시선을
비유는 노리고 이 선악을 이 우상을 들추어내면서 증거 됩니다.
비유가 주인공이라서 그렇다 라는 겁니다.

비유란 원래 주체가 되는 실체를 말하기 위해 보조수단을 빗대어 비슷한 다른 것들을 동원해서 말하는 것이다 라고 사전에 나오는데

그냥 가장 쉽게 이해하기 쉬운 의미로는
둘 만이 아는 싸인이 되는 것으로써
야구에서 투수와 포수가 서로 나누는 남은 알지 못하는 싸인 표적 말이죠

마치 십자가의 죽음을 요나의 표적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비유가 되는 거죠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 둘만 아는 비밀인 겁니다.

그런데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요구하는 기적으로써
하나님은 그런 기적은 모른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서로 주고 받는 싸인이 비유가 틀리게 되니
단절이 되는 겁니다.

고로
이스라엘 조차도 하나의 비밀 덩어리
비유덩어리가 되는 것인데

이 비밀성 즉 특이성인 거죠
이 특이성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에스겔 선지자가 비유로 말하는 그 비유를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셈인거죠

오히려 가장 이스라엘이 아무도 못 알아먹는 비유를 오히려 가장 잘 알아먹어야 하는데
더 못알아먹게 되었으니

이스라엘이 아닌 셈이 되는 것이죠

특히 예수님은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시지 않겠다 라고 하십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이스라엘이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소리인줄 모른다는 거죠

(마 13:34,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막 4:34, 개역)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그런데 껍데기는 이스라엘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전혀 무슨소리인줄 모른다 가 되면
가짜 이스라엘 가짜 교회 이다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인가? 아닌가를 구분 짖기는 비유로써 갈라진다는 겁니다.
말씀 전체가 비유인 거죠

특히 예수님의 비유는 전체가 천국 비유입니다.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겠다 라는 식이 비유를 모르는 셈입니다.

천국이 자기 백성을 골라 골라 구분짖고자 직접 찾아나서고자
직접 내려와 이 땅에 침략하여서 자기백성을 탈출시켜 작살 꼿아서 데리고 가는 방식으로써
비유는 천국이 인간 속에서 이스라엘을 골라내는 겁니다.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자 이렇게 되면 혈통적인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닌 것이 들통이 납니다.
에스겔서에서는 다윗언약에 맞는 주의 이름에 무릎꿇고 주를 시인하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만민이 이스라엘이 된다 말이죠
그 만민이 부르는 주의 이름에 맞는 백성 만들기로써
잃어버리게 하는
다윗언약에 맞는 다윗의 운명 속에 집어넣어서
처음자리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짖는 자로 만드시고자
새 일을 새로운 마음을 집어넣고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로 만들기를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우상은 상대적인 우상은
자기 의를 세우는 겁니다.

베드로는 부자청년이 전재산을 못 버린 것에
자기는 버렸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다 라고 합니다.

이것 또한 부자청년이 우기고 있는 자기 의로움이요
하나님에 대한 열심 이었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니요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였다 말이죠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분명 부자청년은 못 버렸고
베드로는 버렸다 말이죠
못 버린 것은 악에 해당 되고
버린 것은 선에 해당된다고 본 겁니다.
이것이 인간의 선악의 판단인 우상이라는 죄입니다.
인간의 죄는 딱하나 뿐입니다 선악입니다.

베드로는 이런 자기 의로움을 스스로 못 벗어버린다 말이죠
그래서 하나님의 의가 덮쳐지니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서 덮쳐지니
도저히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울수 없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이 새 일
이 잃어버림을 격게 되는 겁니다.
그래야 베드로 속의 사탄의 일
사람의 일이 날라가고
새 일 하나님의 일이
예수님의 긍휼로써 덮쳐져서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주님의 탄식 덕분에
베드로는 비로소 이 실상인 십자가의 죽음에 비로소 연관이 됩니다
믿음인 십자가의 죽음에 관계성으로 역어지게 됩니다.
그 외의 것은 다 단절이 되는 겁니다.

진짜로 연결 되어야 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곧 단절 곧 새 마음)과 연결 되고
즉 단절(성령, 십자가의 영)과 연결이 되고

반대로 단절 아닌 그 외의 모든 연합과는 모든 개방과는 다 단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스겔이 탄식해야만 하듯이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베드로는 들어가는 겁니다.

자 오늘 본문에도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된다 라고 나옵니다.

(마 20:16, 개역)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인간의 선악의 사고방식에
부자는 모든 네트워크에 연결 접속 합체가 된 사고방식에 의해 천국은 당연한 것이다
천국과 합체 된 자는 부자 곧 복 받은자이다 라는 공식이 깨어지고

모든 것을 못 버린 부자청년에 비해
자신은 모든 것을 버렸다 라는 베드로의 역시나 부자청년과 같은 자기 의로움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또는 하나님께 열심있음 또한 천국에 들어간다는 공식이 깨어지고

오히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화로다 화로다 나여 가장 거룩하다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는 줄 알았는데
입술이 더럽기 짝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면서 여호와의 영광을 봐버렸으니
불에 타 죽어야만 하는 화(火) 불 火 불 火 불 화(불)가 나에게 미쳤구나

(사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자 지난 주 이런 천국 비유를 어른들은 무슨소리인줄 몰랐다면
어린아이도 몰라야 하는데 정작 어린아이는 알아먹고
어른들이 몰랐다 말이죠

그러니 어려워서 못 알아먹는게 아니라
기존에 품고 있던 하나님이 가짜였다는 겁니다. 에스겔에서 말이죠
오늘 마태복음에서는 엉터리 천국이였다는 거죠

방금 이사야 6장 5절 구절을 올렸는데
바로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말이죠
결국 어린아이란 죽은자를 말하는 겁니다.
육체적인 어린아이 조차도 더 어린아이인 젖먹이가 되지 못하면 안되듯이
죽은자를 말하는 겁니다.

제가 기가막힌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목사는 고신측에서 꽤 유명한 목사이거든요
자꾸 교인들은 어린성도 라고
반드시 어린 어리다를 붙여요
심지어 그의 부모인 장로님 권사님 조차도 그렇게 대하고
그의 부모 조차도 그렇게 인식을 해요

곧 자신은 목사이니까(만인제사장을 무지 반대하는 종교개혁주일을 무지 지키는 자)
장성한 자이고
교인들은 어리다 라고 보고 있던데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간다
또 장성한 자가 되어야지 그래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라

(막 10:15, 킹흠정)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의 왕국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는 자는 그 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며』
(눅 18:15, 쉬운) 『<어린아이와 같지 않으면>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원하여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제자들이 이를 보고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눅 18:17, 쉬운)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마 18:3, 현대어)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가 죄에서 돌아서서 하나님께로 돌아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너희는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마 18:4, 현대어)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막 10:14, 현대어) 『예수께서 이 광경을 보고 매우 언짢아하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막 10:15, 현대어) 『내가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결코 그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고전 13:11, 개역)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전 14:20, 개역)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
(엡 4:13, 개역)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고전 13:11, 새번역) 『내가 어릴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습니다.』
 
이 두 구절의 의미가 서로 반대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오히려 하나인 개념입니다.

즉 복음서의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라는 말씀은 역시나 죽은자입니다.
이사야 서를 통해서 자주 언급하는 잃어버린 양 곧 잃어버린 자
이스라엘의 처음자리입니다. 

죽은자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만 기쁜소식 희년이요
눈먼자 소경, 앉은뱅이, 문둥병자에게만 복음이다 라는 겁니다.
즉 살아있다 라고 주장하는 자에게는 전혀 기쁘지 않은 나쁜소식이다는 거죠.

(마 11: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마 11:5, 개역)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개역)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그러니 어린아이의 일을 버린 장성한 자란 지난 주 녹음처럼
죽음에 뛰어드는 자입니다.
딱딱한 음식을 먹는 자는 죽음을 먹는 거다 말이죠

(고전 3:2, 새번역) 『나는 여러분에게 젖을 먹였을 뿐, 단단한 음식을 먹이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는 여러분이 단단한 음식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여러분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히 5:12, 새번역) 『시간으로 보면, 여러분은 이미 교사가 되었어야 할 터인데, 다시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 원리를 남들에게서 배워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은 단단한 음식물이 아니라, 젖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히 5:14, 새번역) 『그러나 단단한 음식물은 장성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들은 경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는 세련된 지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즉 손이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라고
더러운 발 더러운 몸을 손이 씻어주지 아니하면 그 몸은 죽은 몸이 되는 거죠

손이 더러운 발을 씻어주고자 더러운 것을 만져줘야
비로소 더러운 발을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개인 구원 개인 부활 없어요
집단 구원 그것도 이스라엘만 구원 받아요
문제는 껍데기 이스라엘 곧
혈통으로나 육정(초코파이 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우리는 우리 개인 스스로를 부자청년처럼 영생을 얻고자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고
하고자 하는 자기 스스로 하나님께 열심을 낼려는 자세를 이미 갖추고 있다 말이죠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지식을 여기서 지식은 사랑이지 공부 잘하는게 아닙니다.
머리 나쁜 자도 주의 사랑이 덮쳐지면
이 하나님의 지식에 의해 구원이 되는데 문제는 개인이 아니다 말이죠
집단성이라는 우리 개념은
인간 스스로가 동아리 만들 듯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웃 개념에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개인 개념에서는 사랑이 안 나와요
그 이웃도 자기가 설정한 이웃이 아니라
원수 개념입니다.

그러니 이 잃어버림 이라는 것은
반드시 죄인 만들어서
원수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죽은자 만들어서 영생을 주신다는 겁니다.

이것 조차 개인의 숙제인냥 
자기 개인 스스로 죽은자가 될 수가 없어요

개인 혼자 장성한 자가 될려고 딱딱한 음식 죽음을 먹는다고 해서
그거 죽음 아닙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 찾는
일곱을 먹어야 해요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을 말이죠
그것을 이사야가 먹여 주셔서 먹은거지
지 혼자 무슨 수로 먹어요

이 외에는
이 하나님의 의 외에는
나머지는 모조리 다 자기 의로움을 세울려는 인간의 선악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하나님의 지식을 사랑 곧 십자가의 죽음에 복종치 않는 것이다 라는 겁니다.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래서 지난 주 베드로는 자기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 라고 나올때에
자기 의를 세울때에
그래 영생 줄게 내 살과 피를 먹어라
새 일을 새로움을 먹어라
곧 하나님의 죽음을 먹어라 라는 겁니다.
이 영생수를 먹지 아니하면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말이죠

그러니 그 목사는 장성한 자도 아닌데 장성한 자라고 우기고
어린아이와 같지도 않은데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한 목사라고 우기니
그 속임수에 다 넘어가는 겁니다.

그런 창의성 곧 남을 7번 용서 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쫓고자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새로움이 아니라
자기 의를 세우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않는 거다 말이죠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된 자는 자기 의를 세웁니다.
단순히 자기 의를 세우고자 함이 아니라
이 세상의 선악이라는 기준이 있기에
인간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다 보니
그 구조에서 살아남을려면
자기 의를 세우지 아니하면 못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선지자의 비유가 어렵다고 한 이유가
이미 이 세상에서 안통하는 법칙을 자꾸 말하니까 어렵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본인들이 비유덩어리 인데
교회 자체가 비유 덩어리 인데
세상의 종교모임 절간과 똑같은 666집단 
사탄의 회 곧 유대인 뿐만 아니라
자기 의를 세워서 구원 영생 천국 갈려는 그 엉터리 구원 영생 천국을 추구하는
가짜 하나님 곧 우상 곧 선악을 성경과 자꾸 섞을려고 하더라 라는 겁니다.

무식한 권정땡 사모가 말씀을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 라는 말씀을
진짜 문자 단어 하나 빼면 안된다 라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그러니 성화론이 맞다 라고
신경질을 부리더라 말이죠
아니 성화라메? 그런데 왜 신경질 부리냐
성화 아닌 거 잖아요

껍데기만 더하지도 빼지도 말라를 지켰지
알맹이는 다 빼먹고
엉터리 가짜 하나님을 곧 우상을 막썩어서
결국은 선악을 주장해요 글쎄
성화론을 추구하면 할수록 더더욱 선악에 예민해지거든요

지도 못 지키면서 남보고 지키래
자기도 천국 안 들어갈려고 하고 남도 천국 못 들어가게 막고 있어요

그러니 교회로 장사를 하는 모습으로 최종적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결국 돈이 예요 돈
그 유명한 고신쪽 목사도 자기 목사 생존을 위한 성화였지
종교는 돈 빼면 시체예요
돈 빼고 죽음 속에 놓여져야 비로소 정체가 드러나요

주님의 의에 의해 긍휼의 그릇인지
진노의 그릇인지를 말이죠

바로 그 상황을 그 유명한 포도원 품꾼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먼저 된 자는 자신들의 선악만을 주장해요
나는 이렇게 선한데
왜 당신은 악한 짓을 합니까 라는 결과 밖에 없어요

즉 나를 구원하지 않으면 무조건 악한 신이 되는 겁니다.
무턱대로 내가 나를 구원해 달라는게 아니잖아요
나 나름대로 선함을 갖추었거든요 라고
나 혼자만의 기준이 아닌

내 주변에서 다 인정하는 선함을 갖추었다 라고 말이죠

결국 나 혼자만의 기준의 선함이 모여 모여서
다수를 이루었다 뿐이지
개인 구원
개인의 선함이다 말이죠

아무리 주체가 여럿이 모려서 객체 곧 다수가 되어서
객관적이라고
주관적인 개인의 똥고집 똥고집주장이 아닌 객관성이라고 우겨도
역시나 주관적이다 라는 겁니다.
개개인이 모여 다수가 된다고 해서 객관적인게 아니라 도리어 주관적이다 말이죠
그게 국가 라는 짐승이거든요

세상에는 객관적인게 없어요
주관 밖에 없어요
객관성이라고 우기는 과학이 죽음을 절대로 해석을 못하듯이
과학은 주관적인 겁니다. 곧 종교일 뿐이다 말이죠
편리함만 추구하거든요

그리고 객관성이라고 해서 선이 아닙니다.
자 그러니 이 주관을 깨뜨리는 주의 이름은
결국 부정의 부정인 겁니다.

바로 이 선악을 깨뜨리는
엉터리 가짜 하나님과 안 맞는 임마누엘 아기
이 우상을 건드리면서 그 차이로 나타나는 천국이기에
반드시 서로의 소욕을 하지 못하게 하는 충돌 전쟁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 충돌이

먼저 왔던 자들의 주인의 계산법에(십자가의 죽음, 곧 긍휼의 계산 법) 반발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귀들이 맡은 역할이 이겁니다.

악을 저질렀으면  벌을 받아야 하지만
지난 시간 까지의 마태복음 내용들이
내가 더러운 손이다면 벌 받아야 하지만
아니 깨끗한 손
부자청년은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등등의

선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선함에 맞는 보상을 안 준다 라면
불합리 즉 객관성이 없고
오히려 주관적인 악이 아니냐 라고 나온다는 거죠

왜 선을 갖추었는데도 불구하고
선을 인정하지 않는 당신은 악마 아니냐 라고
비로소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바로 이 선악을 들추어내지 못하는 주의 이름 곧 예수님은 가짜이다 말이죠
비유로써의 천국이 가짜 천국이다는 겁니다.

진짜 천국은 우리 속에 매일 매일 피어나는 이 선악을 들추어내시고자
새로움 곧 하나님의 죽음 속에
십자가 속에 몰아넣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 이다 말이죠
이 의에 복종치 않는 것은

자기 의를 세우고 있다 라는 반작용인 거죠

진짜 새 영 새 마음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복음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요?
늦게 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 까지 만땅 다 채운 자의 임금과 똑같은 임금을 주시는
그 긍휼을 베푸시는 마음 아닙니까?

어린아이는 너무 쉬워요
그런데 어른들은 때려 죽어도 못 받아들여요

아니 그렇다고 주기로 약속한 임금을 덜 주었나요? 아니잖아요
기준이 달랐던 겁니다.

바로 그들 마음 속에 있는 헌 마음 이라는 기준을 
새 마음이라는 새기준 곧 하나님의 죽음이 그들의 우상(그것도 하나님 뺀게 아니라
하나님을 반드시 썩어 넣어서 만들 우상)을 제대로 건드린 겁니다.

이런 우상을 건드리지 못하는 복음은 가짜입니다

내가 나를 우상화 하는 그 우상성을 건드리는 것이 바로 비유이다 말이죠

이것이 먼저 된 자 나중 되고
나중 된 자 먼저 되는

아니 입장 바꿔 생각해 보자 말이죠
먼저 왔다고 우기지만
정작 나중 왔다고 생각해 보세요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이 바로 이방인이 주께로 와서
혹 

(사 56:3, 개역)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나중에 나를 갈라내실겁니까
내가 고자라고 마른나무라고 버리실겁니까 라는 소리를 하지 말라 라는 겁니다.
오죽 이스라엘의 텃새가 심하면 미리 이런 이야기를 하실까요?


(사 56:4,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사 56:5, 개역)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오히려 천국을 위한 고자라면 그 사람과 결혼하시겠다 라고 먼저 선언하신 분이 여호와 이다는 겁니다.
그 일빠다 일번타자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다 라고 했지요
고자로 만들어서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
믿음의 신부 이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 되신 예수님이
믿음이가 아브라함을 첫 번째 신부처럼 삼았다는 겁니다.
그럼 이 신부는 오늘 본문처럼

늦게 온 나중 된
이방인처럼
나중 된 자와 결혼하니까

먼저 된 자와 결혼 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이스라엘이 얼마나 열받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선악이 아닌
마귀가 그래서 쿠테타 반란을 일으켰던 겁니다.
그 첫 번째 신부는 나 였어야 하는데 라꼬 말이죠

바로 이 선악을 깨뜨리는
새로움이 바로
주님의 긍휼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이 새 기준이 떳기에
그 증상물로써
이런 비유로서
실제로
이방인에게 구원의 빛이 비추어지니까

먼저된 이스라엘이 사탄의 회처럼 행동하는 모습들이 들통나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움 이라는 

십자가의 죽음을 교회에 증거하면

두 패로 나누어 집니다.

대부분 선악을 주장할 뿐이지

교회 속의 교회는 눈에 잘 안 보입니다.

그러니 천국은 멍청하게 인간이 올라올때까지 기다리는게 아니라
오히려 땅으로 직접 내려가서

천국 자신의 증상물을
우상과의 차이를 들통내시면서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을 찾아 나서시는 겁니다.

이 수많은 종교 속에서
이 수 많은 기독교 종파 속에서
이 수 많은 교회 속에서

엘리야는 오로지 단 한 사람 사렙다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고
가장 더러운 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과부도 아니요
모든 이방인도 아니요
많은 이방인 과부도 아닌
딱 한 사람

또 엘리사는 오로지 단 한 사람 문둥병자 니느웨 나아만 장군
가장 더러운 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도 아니요
모든 이스라엘 백성 중 많은 문둥병자도 아니요
모든 이방인도 아니요
많은 이방인 문둥병자도 아닌
딱 한 사람

천국이 기필코 찾아내는 자기 신부이다는 겁니다.

어린아이 곧 죽은자는

할매 내네
내가 죄인인데 할매 내네 라고 하듯이

이 주님의 긍휼을 아는 지식이 있지만

어른은 자기 의로움 때문에 무슨 소리인줄 모르는 겁니다.

먼저 된 자는 자기 의로움 만땅 다 채운 자신의 선함(새로움=창조성) 떄문에
주님의 선함(새마음=긍휼히 여기시는 십자가의 죽음)과 충돌이 되어서

도저히 썩일 수 없는 물과 기름으로 영원히 갈라지는 겁니다.

그렇게도 하나님과 자신을 잘 썩었는데 그 창의력 창조성은 전혀 새로움이 아니였고
남을 살리지 못하는 첫 번째 아담

진짜 새로움은 남을 살리고자 자신이 죽는 이 새일을 다 이루어 놓으셨다는 겁니다.
그 증상물로써 교회 곧 신부를

찾으시는 겁니다.

99마리 양은 필요 없습니다.

단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만이

진짜 주의 이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