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018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 (마 21,18-22)

김 대식 2020. 9. 6. 09:35

18-100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갑자기 말라 버렸습니까 (마 21,18-22)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마 21,12-17)
마태복음 2018 2020. 8. 29. 13:45
18-99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드는도다 (마 21,12-17)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21:18, 새번역) 『새벽에 성 안으로 들어오시는데, 예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 21:19, 새번역) 『마침 길 가에 있는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보시고, 그 나무로 가셨으나, 잎사귀 밖에는 아무것도 없으므로, 그 나무에게 말씀하셨다. "이제부터 너는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무화과나무가 곧 말라 버렸다.』
(마 21:20, 새번역) 『제자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서 말하였다. "무화과나무가 어떻게 그렇게 당장 말라버렸을까?"』
(마 21:21,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이 무화과나무에 한 일을 너희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져라' 하고 말해도, 그렇게 될 것이다.』
(마 21:22, 새번역)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루어질 것을 믿으면서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받을 것이다."』

(마 21:18, 현대어)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막11:12-14,20-24] 이튿날 아침 예루살렘으로 되돌아오시던 예수께서는 매우 시장하셨다.』


인간의 모든 관심사는 자기 자신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고
신을 믿고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를 믿고
바로 이런 믿음 곧 비밀이 담겨지지 않은 믿음을
자기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믿을려고 달려들면서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한다는 겁니다

결국 최종적인 목적은 자기자신이다는 거죠

그런데 문제는 그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허구 허상이기에
자아란 없다 라는 겁니다.

없는 것에 대한 애착을 왜 이렇게 가지게 된 것일까요?
마귀의 유혹으로 인해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라고
성경말씀을 밝히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이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되어버렸기에
신을 끌어와서 그 신을 아주 높이겠다 라는 겁니다.
즉 자기를 높이는 것이죠
그 신이 그 하나님이 결국 자기자신을 투사한 것이니까 말이죠

그것이 좋으신 하나님 이라는 종교용어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좋으신 하나님이 졸지에 나쁜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이 선악에 딱 걸려 버립니다.
모순의 뫼비우스 띠에 걸려 넘어지더라 말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의 주로 오신 겁니다
아무리 봐도 심판할 구석이 보이질 않아요

너무 천하디 천하니까 말이죠

적어도 심판을 할려면 즉 저주를 할려면
귀한 분으로 여김 받아야
다들 무릎을 꿇고 경배를 할거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봐도 천해요

그 천하디 천한 분이
갑자기 무화과 나무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하시면서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는데 열매를 못 내니까 저주를 해 버리시고 말라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을 본 제자들이 놀라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에서 이스라엘을 철이 녹는 풀무불 속에 집어넣겠다 라고 저주를 하시는 겁니다.

아니 도대체 왜 이러시는 것일까요?
얼마나 자극적입니까

마태복음 지난 주에도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그 상전상을 엎어버리시고
동물들을 쫏아내시면서
강도의 소굴로 만드신다 라고 하시니
얼마나 극단적으로 들리냐 말이죠

상대방에 대한 예의도 없고
일방적으로 자극적인 말을 하시냐 말이죠
배려 따위는 일체 없이 말이죠

(마 21:12, 새번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성전 뜰에서 팔고 사고 하는 사람들을 다 내쫓으시고, 돈을 바꾸어 주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고,』
(마 21:13, 새번역)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성경에 기록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였다. 그런데 너희는 그것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 ㉥사 56:7 ㉦렘 7:11』

그런데 문제는 바리새인이 이거 그냥 넘어가질 않을꺼 아닙니까
꼬투리 잡으면 딴나라당처럼 지구 끝까지 따라잡을 듯이 달려드니 얼마나 좋으냐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또 반박 할수 없는 일을 해 버리시니까
대중이 무서워서 또 잡지를 못해요 글쎄

(마 21:14, 새번역) 『성전 뜰에서 눈 먼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예수께 다가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고쳐 주셨다.』
(마 21:15, 새번역)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께서 하신 여러 가지 놀라운 일과, 또 성전 뜰에서 "다윗의 자손에게 ㉧호산나!" 하고 외치는 아이들을 보고, 화가 나서 / ㉧'구하여 주십시오!'를 뜻하는 히브리어였으나 찬양의 감탄으로 사용됨』
(마 21:16, 새번역) 『예수께 말하였다. "당신은 아이들이 무어라 하는지 듣고 있소?"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에서 찬양이 나오게 하셨다' 하신 말씀을, 너희는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 ㉨시 8:2(칠십인역)』

꼬투리 잡기에 좋은 말만 하면 참 좋겠는데
어라 맞는 말을 하시면서 바리새인이 고치지 못하는 소경과 앉은뱅이 문둥병자를 고쳐버리시니까 반박을 못해요

대중이 무서워서

그 동안 대중을 의식하는 말만 했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했다는 거죠
즉 자기를 귀히 여겼지
하나님의 집
기도하는 집이 그 동안 귀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 오락하는 집을 엎어버리시겠다 헐어버리시겠다 라고
맛배기로 강도의 소굴을 엎어버리시는 겁니다.

여기에 화가 나는 거죠 언젠가는 죽여버리겠다 라고 다짐케 만드는 거죠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오락을
가장 귀하게 여기는 즐거움을 슬픔으로 만드는 예수를 가만히 두지 않겠다 라는 겁니다.

비밀이 담겨진
하나님의 비밀
창조의 비밀이 담겨진 기쁜소식이 뭡니까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 하셨다 아입니까

즉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하는 복음인데

종교오락은 자기 의를 세우는데 미쳐있으니
이 즐거운 오락을
슬픔으로 불행으로 지옥으로 만드는 기쁜소식이 아니면
박살이 과연 나겠냐 말이죠

그래서 모세가 변화산에서 갑자기 모세가 왜 거기서 나와 라고
갑자기 예수님이 별세해 주세요 죽어주세요

또 비싼 향유를 부은 여인이
주님을 미리 장사 치르는 이 비밀이 담겨진 행동을 했을때에

사람들은 못 알아먹고 비방거리로 구경꺼리로 찌그래기로 취급하고자
율법을 동원하고 윤리 양심을 동원해서 비방하더라 말이죠

그들이 그저 예수님 죽어주세요 라고 끝나는게 아니라
그 정도로 나는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이 죽음 속에 뛰어들어서
죽음 속에 있는 나를 건져주세요 라는

비로소 요나의 표적을 구하더라 말이죠

자신이 죽음 속에 놓여있지 않으니까
배불러 터짐 입장에서 외쳐지는 구원의 손은 그거 가짜이다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또 종교오락인 셈이다 말이죠
누가 귀하다? 종교오락을 하고 있는
자기의 의를 세우는 자기가 귀한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 열심인 자기가 귀해요 너무 귀해도
그런 나를 천하게 취급하고
찌끄래기로 취급해서

임마누엘을 구한다?
하나님 어서 죽어주세요를 구한다?
하나님의 의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이 심판주 이시고 하나님이 심판 당하시는 그 의를 구한다?

웃끼지마 나는 절대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노라
아하스의 외침은 우리의 외침과 같은 우리 속의 우상의 외침이다 말이죠

베드로가 절대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 않겠노라
그 베드로의 외침이 우리의 평상시 전혀 창조의 원리가 담겨져 있지 않은
남들이 다 알아먹는
비유로써의 외침이 아니다 말이죠
그저 우상적인
인간의 즐거움을 쫏았던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구원을 추구했음을 평상시 그래왔던 것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다급하니 그 추궁에 대한 변명이 다급하게 평상시에 속에 있던 것이 그대로 드러나더라 말이죠

지옥이 튀어나오는 겁니다.
이 지옥
고쳐달라고 해야 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서 내가 그거 고칠려고 십자가에 달려 죽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은 지극히 당연하게
그래 내가 날 때부터 생명이니까 너 고치마 라고 나오시는데
나는 날 때부터 죽음입니다 가 안 나오니까
주님이 이렇게 해서라도
베드로 속에 있는 지옥을 끄집어 내시는 겁니다.
그것이 천국이 하는 일 아니겠냐 말이죠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주님이 직접 우리에게
베드로에게 실행하시는 겁니다.

주여 저 죄인입니다 소경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고쳐 주소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

생명을
빛을 
바로 당신 나의 심판주를 보기를 원하나이다
심판 주 만이 긍휼히 여기시는 구원의 주 아닙니까 라고

이 죄인을 부르러 오셨기에
베드로를 우리를 죄인 만드실려고 하시는데

때려죽어도 완악한 수건을 안 벗을려고 하니
아무리 해도 스스로 못 벗겨요
오직 주님의 숙제로

주님이 사랑하시는 자만 벗기시는 겁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시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시잖습니까 라고
당신이 나의 완악한 수건을 벗긴 분이시지요 라고 하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감사하게도 앞의 글 에스겔 22장에 이스라엘을 찌기로 취급하시고
철에 녹이는 풀무불 속에 철 쇠 납 은과 함께 불 속에 녹이시겠다 라고 하시는 그 부분이

오늘 무화과 나무 저주 내용과 닿아 있습니다.

그 저주가 감사하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을 귀하게 보지 못하고
그저 만만하게 보고 있는 그저 이용꺼리로 삼고 있다는 겁니다.

왜? 내가 더 귀하니까 말이죠

앞의 글 에스겔 에서도 언급했듯이
저주를 하신다 라는 것은

사랑을 하신다 라는 겁니다.
매를 대시는 이유가 뭡니까?
사생자 이면 매를 댈 이유가 없다 말이죠

이스라엘의 기능을 주님이 직접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그래 하이소마 라고 불 구경하듯이 하는게 아니라
주님에게 멱살 잡혀 가면서 그 이스라엘 기능을 실행하시는 주님의 아바타가 되어서
자기도 모르게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아 그래서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군요 라고 말이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롬 10:1, 개역)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롬 10:2, 개역)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롬 10:3, 개역)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지옥은 다른 민족이 보려줄수가 없어요
반드시 이스라엘만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말은 그렇기 때문에 천국 또한 이스라엘 만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아 그런데 가짜 이스라엘 육적 이스라엘은 자꾸
죽어서 좋은데 가는 곳
율법 못 지키고 말씀 실천하지 못한 자는 죽어서 나쁜데 가는 곳으로만
그건 모든 종교가
오락하는 놈들이 다 하는 이야기 이다 말이죠

몇 번 자주 언급했지 싶은데
고등학교 윤리 선생이 갑자기 성경 이야기를 하시더라 말이죠
물론 저는 그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 때 였는데 말이죠

갑자기 지 혼자 화를 내면서 구약에 보면 아무리 봐도 전쟁의 신인데
잔인하기 짝이 없는데 
심지어 자기 백성 마저도 지옥 불에 넣겠다 라고 공갈 협박하는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 라는 겁니다.
사랑이라면 다 용서해야지 쫌생이처럼 배신했다 라고
신 답지 못하게 인간 보다 더 못한 놀부씸뽀처럼 말이죠

그래서 윤리 선생 본인은 답답하고 미치겠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이런 살인마 하나님이 신약에서 갑자기 사랑의 하나님이 되냐 말이죠
신약 말고 구약을 보라 말이죠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된다 라는 겁니다.
본인이 윤리 선생이니까 윤리 선생 답게 말한다 라고 말이죠

그런 사고방식은 교회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래요

또 공장에서 똑같은 사고방식인데 말만 다를 뿐이지 내용은 같은 겁니다.

좌로 가나 우로 가나 가는 길만 다르지 결국은 천국이라는 도착점은 같은거 아니냐
그러니 나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말아라 라고 미리 장벽을 치더라 말이죠

즉 교회 다니는 사람들 또한 그래요
강도의 소굴로 만든 종교집권자들의 하수들 답게

이사야 서만 달달 외우는 수준이지
내용 자체는 몰라요

그래서 내용을 들려주면 처음 듣는 이야기래요 자꾸
목사는 그런 말 안하던데 왜 너는 그런소리를 하냐 처음 듣는다 라고 해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이나 말이죠

죽음 속에서 만나 보지 못한 예수를 증거하니까
예수 믿는 자기가 귀하고
예수는 그저 브랜드로 이용해서 돈벌이로 이용해 먹다 보니
그런 사기꾼들에게 들은 이야기들만 퍼져 있지

내용 자체는 전혀 모르는 겁니다.

공장 옆에 있던 교회가 새건물로 건축하면서
벽돌 하나 하나에 교인들 이름 새기는 심정으로 건축하겠다 라는 목표를 세우니까
그동안 그렇게 흉물처럼 낡아빠진 교회가 갑자기 새건물로 웅장하게 세워지니
얼마나 즐겁고 뿌듯하겠냐 말이죠

종교 오락으로 삼지 못하고 게으르게 지내다가
종교 오락으로 삼도록 하니
밤에 잠도 안자고 먹지도 않을 정도로 즐겁고 좋은
귀한 것으로 갑자기 취급하게 되니
건물이 벌떡 서 버리는 겁니다.

어라 제가 졸지에 비법을 알려준 셈이 되었네요
그래 그렇게 해서라도 원수임을
강도의 소굴임을 알아라 말이죠

벗어날 방법이 없어요
무너뜨리시는 분이 외부에서 오지 않는 이상 말이죠

그러니 무화과 나무 저주가
곧 나에게 하는 저주 같아서
제자들이 그 자극이 되어버린 이상

각인이 되어버리면
다른 것을 생각 하고 싶어도 못해요
이미 말려 들어버렸으니까 말이죠

폭력적이거든요
모든 시선을 다 빼앗아 버리거든요

각인 이론에 의하면 그래요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자리 잡게 되잖아요
평생 못 벗어나요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폭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생긴 자는
그 폭력으로 벗어나고자 자신 또한 가해자로 변해서 벗어나고자 해요 글쎄

다윗이 그렇잖아요
늘 사울 왕으로부터 창 던짐을 당할 정도로 늘 시달렸다 말이죠
어라 그런데 사울 왕이 죽고 없어지니까
자기가 사울왕이 되어버리고
자기 자식이 사울왕이 되어서 또 죽자고 덤비더라 말이죠

자신이 사울 왕처럼 변해 버려서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야 장군을 죽이잖아요
미필적 고의를 위장한 살인을 철저하게 계획까지 세워서 말이죠

그런다고 벗어납니까?

이런 육체의 연약함을 마귀가 놓칠 리가 없잖아요
반드시 이용하지

벗어나는 길은 딱 하나입니다.

더한 폭력자를 만나는 것 뿐입니다.

마귀의 폭력을 폭력 축에도 못 끼이는 폭력을 행사 하시는 분 말이죠

자기 아들 마저도 원수에게 내어주시는
죽음 보다 더 강한 폭력이 바로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이것을 요청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자입니다.

누가 이 무화과 나무에 대한 저주를 자신이 당해야 할 저주이며
이것이 기쁜소식이다 라고 여기겠습니까?

이 말도 안되는 저주인데

즉 이 저주를 행하시는 분
그것도 말도 안되게
아직 열매 맺을 철도 아닌데
시간도 아닌데 

그런 말도 안되는 저주를 퍼붓는 자가
나의 구세주를 드디어 만났다 라고 누가 여기겠습니까?

누가 믿었으리요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저주 받아 마땅하다고 여기는 자에게만 믿을꺼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말하는 믿음은 자신을 귀하게 여김을 전제로 깔고 믿음을 운운하는 겁니다.
그런 비밀이 없는
창조의 원리가 없는 종교오락이요 신념이요 오기 똥고집 완악한 수건 안벗기 일 뿐입니다.

믿음이란 오히려 그 반대로 나를 천하디 천하게 만드는 겁니다.
왜? 드디어 귀하디 귀한 분을 외부에서
나 아닌 곳 나 아닌 분으로써 
타인은 지옥인데
어떻게 타인은 지옥 즉 나를 불행케 만드는데
그 정도로 나는 행복이어야 하는데 이유 없이 나는 행복하고 즐거워야 하는데
그렇기에 타인은 무조건 이유 없이 결국은 지옥인데

제대로 된 심판주가 나의 기쁨이 될 줄이야
고로 나는 슬퍼해야만 하는 우는 자로 만드는 회개의 사람으로 만드는
저 십자가가 도대체 왜 날 위해 죽으셔야만 하느냐
나는 천한데 쓰레기 루저 센척하는 겁쟁이 못뗀 양아치 인데
왜 도대체 당신 내 한테 무슨 짖을 한 거냐 말이죠

무슨 짖? 그래 저주를 했다 라는 겁니다.
무화과 에게 하듯
나에게 저주를 해야 하는데
그 저주를 대신 당했다 라는 겁니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왠 다이아 라고 노래부르는 휘트니 휘스튼을 밀치고
경호원이 대신 총 맞아서 병원에 실려 가듯이

내가 뭐라꼬

왜 저주를 당했냐 말이죠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의로움을 거룩함을 당장 내어놓질 못해요

뭐 남을 7번 용서했다 라 굽쇼? 장난하냐 말이죠
그건 개같은 이방인도 다 한다 말이죠

뭘 해도 가짜요
뭘 해도 함량 미달 이다 말이죠

그것을 소통해 와 놓고서는
거룩이다 라고 우기고 있으니
상을 엎어버리고
강도의 소굴을 헐어버려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완벽한 거룩 아니면
7에 70번 용서가 아니면
찍어버려야 할 것 아니냐 말이죠

그 도끼에 찍혀 내일 아궁이에 던져 버려야 할 그 곳에서
그 풀무불 속에서

7에 70번의 용서를 만날 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솔로몬의 영광? 
들에 픈 백합화
즉 찌끄래기
그것도 내일 아궁이에 던질 그 들풀 보다 못해요

왜? 주님 께서 넘어왔거든요
함량 미달에서 정량 딱 맞게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차고도 넘쳐요 흘러 흘러 넘쳐요
감당이 불감당입니다.

이런 거룩 봤냐 말이죠

그 거룩 그 의를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라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어요
안 그러면 배 불러 터져서
멋들어진 구원만 바라고 있다 말이죠

왜?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실까요? 그것도 말도 안되게

말이 되면 안되요 말이 안되어야 합니다.
즉 부당해야 해요

제철에 딱 맞을때에 열매를 달라 라고 요구하시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아직 때가 되지도 않았을 때에
열매를 달라 라고 요구를 하셔야만 하고
열매를 내지 못하니까
저주 받아 마땅한 무화과 나무로 취급해 버리시는 겁니다.

부당하고 부조리 하고 폭력적이고 말이 안되어야
각인이 된다 말이죠
너무 너무 자극적이라서
선악만 알고 있는 자들에게
도대체 이 무슨 일이냐 라고 볼게 아니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폭력적이니까 말이죠
자기도 당할까 싶어서 트라우마가 생길까 싶어서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할꺼 아니겠냐 말이죠

바로 무화과 나무는 창조주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피조물
즉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더 쉽게 말하면
귀하신 분이 누구신가를 말하기 위한 천한 찌끄래기가 되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기능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어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기능을 제대로 못 보여주고 있는 자들이
지래 겁 먹고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듯이
깽기는게 있는 사람이 지래 놀라는 겁니다.

맞아요 지래 놀라 라꼬 하는 겁니다.

의사를 말하기 위해서 환자가 발생해야 하는 겁니다.
구원자를 말하기 위해서 죄인을 일부러 만드시는 겁니다.

생명을 말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일부러 죽이시는 겁니다.

바로 앞의 글
창조주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풀무불에 넣는
솔로몬처럼 귀한 자가 아니라
그 반대로 들에 핀 백합화
그것도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으로 만드신다는 겁니다.

그게 탕자요 그것이 비천한 자리에서 예수님의 귀한 죽음
곧 기쁜소식을 외친 비싼 향유를 부은 마리아
그냥 마리아가 아니라 창녀 마리아 이다 말이죠

다들 창녀를 교회에서 빼먹을려고 해요
목사들이 자꾸
캥기는 겁니다.

창녀 마리아가 맞아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다섯 여인이 더러운 여자들 맞아요
그 더러운 찌끼 같은 여자들이
깨끗하다 라고 우기는 머슴아를 살려내는 인자의 모습 아니냐 말이죠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딜 사기를 치냐 말이죠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자꾸 우리 손으로 할려고 해요

자기 의를 세우고
하나님께 열심이고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지식 곧 사랑을 쫓은게 아닙니다
폭력적인 사랑
죽음 보다 더 강한 사랑에서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은 완악한 마음 곧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은
강퍅함에서 나온 거다 말이죠

자기가 귀해서 나온거지
예수님이 귀해서
여호와 하나님이 귀해서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잃어버림에서 나온게 아닌
하나님의 의에서 나온게 아닌
요나의 표적
곧 십자가의 사랑에서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자기의 의로움에서 나온 거다 말이죠
그러니 바리새인이 마귀 자식으로써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선생으로써
예수님으로부터 강퍅한 자로 들통 당하는 겁니다.

어딜 속일려고 ~~~~~~

그래서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시는 겁니다.
모두가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이 귀하디 귀한 자의 위치에서 구원에 약속에 말씀에 보탬이 되겠다 라고 나설때에

정작 주님은 자신의 구원의 오른팔로
이스라엘을 저주 하십니다
원수 만드십니다.

그 죽음 속에서
그 심판 속에서

주님이 왜 생명이신가를
왜 길이요 진리이신가를

이 요나의 표적을 보여주시지

무화과 나무의 저주가 아니면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잔뜩 기대하고 있는 자들의 기대치를
이 무화과 나무 저주 한방이면 그저 추풍낙엽처럼 우수수수 떨어뜨릴 것 아니겠냐 말이죠

어딜 멋들어진 구원을 바라고 있어 내 때는 말이야
십자가의 때 뿐이야
십자가는 누가 키워 소는 누가 키워 말이죠

다들 속이고 속이는 속임수가 예수님에게까지 미치고 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러 왔거든요
하나님의 의로움에 복종하러 왔거든요

이 순종에 제사를 운운해요
어딜 사기를 치냐 말이죠
누가 꾀냐 말이죠

제사????

그 껍데기?

늘 남의 눈을 의식해서 나오는 남을 7번 용서하는 거????

속 알맹이
진짜 귀한 것은

7에 70번 용서하시고자
바로 그렇게 남을 7번 용서할려는 그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을려고 하는
솔로몬의 영광을 구하는 자를
천하니 천한 찌기로 만들어서

비로소 귀한 분에게 제발 제발 용서해 달라고 제발 살려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싹싹 비는

주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제발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제발 용서를 해 달라고
싹싹 비는

천박하기 짝이 없는 모습마저 나올 수밖에 없도록 탈탈탈 터시는
그 텅빔을 만드시겠따 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이 직접 똥 되기
아무것도 아닌 것 되기
미련한 것 되기
약한 것 되기를 하셨다 말이죠
이것이 십자가의 도 이다는 겁니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17, 개역)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주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케 하려 하심이니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전 1:18, 개역)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고전 1:19,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고전 1:20, 개역)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 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고전 1:21, 개역)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무화과 나무의 저주를 보고
성령을 받은 자면
약속하신 성령을 받은 자면
오히려 기뻐할 겁니다.

드디어 나의 남을 7번 용서하는 완악한 수건을 벗기시는
심판의 주를 만났기 때문에 말이죠

드디어 나를 제대로 7에 70번 용서하시는 분을 만났기 때문에 말이죠

드디어 번제와 제사를 손 떼게 하시는
의문의 반복을 손 떼게 하시는 겁니다

그것은 나를 귀하여 만들지
주님이 귀하게 만들지 못해요

나 라는 것은 의문의 반복인데
마침이 없는데
그거 귀하게 여겨서 뭐 해요

허상인데

그럼 주님을 즉 여호와를 유대인이 귀하게 여겼지 귀하게 여기지 않았나요?
네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말이죠

우리 어무이 말 마따나
이스라엘이 창조주를 모를 턱이 있나
네 몰랐어요
창조주를 단 한번도 믿은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는 창주조다 나는 여호와이다
너희 몰랐지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마 기다려봐 라고

강퍅한 애굽왕 바로왕이 여호와가 누구관데? 라고 나올때에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마 라고
심판 곧 재앙 10가지를 퍼붓더라 말이죠
그 속에 이스라엘도 속에 있었어요
그런데 단지 아쿠아 룸 처럼 두 손으로 감쌌기 때문에 안 당했지
재앙 바깥에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재앙 그 저주 이제 이스라엘에게 퍼붓습니다.

내가 여호와인 줄 비로소 알 것이다 라고 말이죠
그럼 그 심판 속에서 우리는 여호와를 곧 구원자를 보게 되지

죄 바깥에서
심판 바깥에서 보는게 아니다 말이죠

의인 됨에서 보는게 아니라
건강함에서 보는게 아니라

모든 인간은 환자입니다.
건강한 자 아무도 없습니다 라고 회개하는 자로써 의사를 
귀한 분 곧 유일하게 생명을 살리는 자는 의사 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의 의사는 자기가 죽을까봐 싶어서 미리 돈을 챙길려고 하는 강도들 밖에 없어요

그 강도 소굴에서 우리는 벗어날 길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부르짖는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 라고 크게 크게 부르짖는
그래야 인간 의사 라고 나서는 제사장들이 싫어할꺼 아니겠냐 말이죠

인간 의사 가족들 마저도 이 시점에 죽어봐야 정신차리거든요

네 맞아요 과거와 같이 요즘은 의사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기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래서 돈을 챙기는 것 맞아요
그렇다고 그것을 바란다는 것도 웃끼잖아요

의사들 또한 가스렌지 만드는 사람들이 있어서 요리 해 먹고 사는 겁니다.
똥 푸는 사람들이 있어서 집이 위생적으로 유지할수 있어요

다들 껍데기를 귀하게 여낄 뿐이지
아무도 알맹이를 쳐다도 안 봐요

그래서 주님은 아예 이스라엘에게 기대 자체를 하지 않습니다.
아예 직접 나서십니다.
그게 찌기 만들기요
그것이 풀무불에 철 쇠 주석 납 은과 함께 넣어 녹이시고자 지옥 불에 넣는 겁니다.

무엇이 중한지를 모르니 말이죠

진짜 귀한 것을 모르는 어두운 소경들만 있는 세상에서

무화과 나무 저주는 일종의 우리의 마음
완악하고 딱딱한 마음에 흡집 내기입니다.
홈 파기 홈 패임이다 말이죠

이 상처가 아니면
누가 긍휼을 바라겠으며
누가 크게 크게 부르짖으며 살려 달라고
제발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겠냐 말이죠

안 그러면 다들 제사에 미쳐있고
번제에 미쳐 있고
껍데기에 미쳐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귀한 것이 뭔지를 보라 라고 우리는 찢으시는 겁니다.

그 잃어버림 속에서
그 무화과 나무의 저주 속에서

무엇이 귀한 것이고 알맹이 인지를

못 본다고요? 볼 줄 모른다 라고요
그럼 예수님에게 보여달라고
크게 부르짖으라 라고 벌리신 사건 아니냐 말이죠

내가 당연히 축복 받아야 한다는 것이
나는 귀하다 라는 사고방식이
이 저주를 통해서 와르르

성전을 헐라처럼 와르르 무너지는 겁니다.

진짜 귀하고
진짜 세워져야 할 것은

우리 라는 허구가 아니라
우리는 당연히 무너져야 하고
진짜 축복 받으셔야 하는 분은
내 대신 저주 받으시고자 대신 매 맞으신 저 분이 귀하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기능이거든요
이것이 무화과 나무가 저주받아 말라 비틀어 죽어가면서까지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기능임을

이스라엘은 전혀 감을 못 잡는 가운데서도 펼치심으로써

예수님은 내가 여호와 인줄을 알게 하겠다를 이루시는 겁니다.

즉 나사로를 일부러 의도적으로 죽이셨듯이
무화과 나무를 저주 하시는 겁니다.

도리어 이 말은 나사로를 도로 살리시는 분 역시 누구다?
일부러 의도적으로 죽시는 분이다 말이죠

말도 안되게 아직 열매 맺는 철도 아닌데 저주해서 말라 죽게하신 분 역시
말도 안되게 열매 맺도록 다시 살리시는 분 역시 누구다? 바로 

내가 생명이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곧 진리이다 내가 길이다 라고 하시는 분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우리는 뭘 해도 죽음이요 저주이거든요
아니면 생명이라면 왜 놀라고 왜 무화과 나무의 저주가 깜짝 놀랄 일입니까
도로 살려내면 되잖아요
믿음은 없거든요
왜? 내가 귀하거든요
남을 7번 용서하는 내가 귀해요 번제가 귀하고 제사가 귀히고 껍데기가 귀해요
그러니까 천한 무화과 나무는 나 보다는 안 귀하길래 살리고픈 마음이 없어요

그러나 믿음(곧 예수님)은 그런 무화과 나무와 같은 저주 받아 마땅한 나를
자신이 찌기가 되시면서 까지
우리를 7에 70번 용서하는 귀하디 귀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셨다 말이죠

왜 이거는 말이 되어야 합니까

말이 안되어야 해요

무화과 나무가 제 철도 아닌데 저주 받는 것만 말이 안된다 라는 것은
부당한 주장 아니냐 말이죠
저쪽이 먼저 부당하다구요?

생명의 주를 외치는 이스라엘의 기능을 주님 덕분에
대신 우시는 분 덕분에 펼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것이 나의 나 됨은 주의 은혜임을 주님이 홀로 이루시는 방식
곧 십자가의 지혜입니다.

(고전 15:8, 개역)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9, 개역)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고전 15:10, 개역)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나 아니오 예수님만 옳으면 됐다 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