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019

사마리아 보다 더 음란한 예루살렘의 음행 (겔 23,11-24)

김 대식 2020. 9. 20. 08:37

19-63 사마리아 보다 더 음란한 예루살렘의 음행 (겔 23,11-24)

음란한 자매 사마리아(오홀라) 예루살렘(오홀리바) 죄인 만들기 (겔 23, 1-11)
에스겔 2019 2020. 9. 12. 11:30
19-62 음란한 자매 사마리아(오홀라) 예루살렘(오홀리바) 죄인 만들기 (겔 23, 1-11)


(겔 23:11, 개역) 『그 아우 오홀리바가 이것을 보고도 그 형보다 음욕을 더하며 그 형의 간음함보다 그 간음이 더 심하므로 그 형보다 더 부패하여졌느니라』
(겔 23:12, 개역) 『그가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연애하였나니 그들은 화려한 의복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말타는 자들과 준수한 소년이었느니라』
(겔 23:13, 개역) 『그 두 여인이 한 길로 행하므로 그도 더러워졌음을 내가 보았노라』
(겔 23:14, 개역)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것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겔 23:15, 개역)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용모는 다 존귀한 자 곧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겔 23:16, 개역) 『그가 보고 곧 연애하여 사자를 갈대아 그들에게로 보내매』
(겔 23:17, 개역) 『바벨론 사람이 나아와 연애하는 침상에 올라 음란으로 그를 더럽히매 그가 더럽힘을 입은 후에 그들을 싫어하는 마음이 생겼느니라』
(겔 23:18, 개역) 『그가 이와 같이 그 음행을 나타내며 그 하체를 드러내므로 내 마음이 그 형을 싫어한 것 같이 그를 싫어하였으나』
(겔 23:19, 개역) 『그가 그 음행을 더하여 그 젊었을 때 곧 애굽 땅에서 음행하던 때를 생각하고』
(겔 23:20, 개역) 『그 하체는 나귀 같고 그 정수는 말 같은 음란한 간부를 연애하였도다』
(겔 23:21, 개역) 『네가 젊었을 때에 행음하여 애굽 사람에게 네 가슴과 유방이 어루만진바 되었던 것을 오히려 생각하도다』
(겔 23:22, 개역)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너의 연애하다가 싫어하던 자들을 격동시켜서 그들로 사방에서 와서 너를 치게 하리니』
(겔 23:23, 개역) 『그들은 바벨론 사람과 갈대아 모든 무리 브곳과 소아와 고아 사람과 또 그와 함께 한 모든 앗수르 사람 곧 준수한 소년이며 다 방백과 감독이며 귀인과 유명한 자, 다 말 타는 자들이라』
(겔 23:24, 개역) 『그들이 병기와 병거와 수레와 크고 작은 방패를 이끌고 투구 쓴 군대를 거느리고 치러 와서 너를 에워쌀지라 내가 심문권을 그들에게 맡긴즉 그들이 그 심문권대로 너를 심문하리라』

(겔 23:11, 현대어) 『그런데 오홀라의 동생 오홀리바는 자기 언니의 비참한 종말을 잘 보고서도 오히려 언니보다 더 더럽게 살았다. 자기 언니의 음란한 행실보다 한층 더 불량하게 음탕한 생활을 하고 더 많은 정부들과 사랑에 빠져 안달을 하였다.』
(겔 23:12, 현대어) 『오홀리바도 앗수르의 군인들에게 반해 버렸다. 그들은 모두 화려하게 자줏빛 옷으로 차려 입은 총독과 장군들이었고 전차와 군마를 타는 멋진 사나이들이었다.』
(겔 23:13, 현대어) 『오홀리바는 그 언니와 똑같이 그들에게 몸을 내맡기고 자기 몸을 더럽혔다.』
(겔 23:14, 현대어) 『그러나 오홀리바는 그러고도 성이 안 차서 붉은 색으로 벽에 그려진 바벨론 군인들의 그림을 보자』
(겔 23:15, 현대어) 『그들의 그 화려한 허리띠를 띠고 머리에는 긴 수건을 아름답게 감아 늘어뜨리고 긴 머리카락이 뒷머리로 파문을 이루며 흘러 내리는 모습에』
(겔 23:16, 현대어) 『금방 욕정을 일으키고 바벨론으로 심부름꾼들을 보내어 그들을 초대하였다.』
(겔 23:17, 현대어) 『그러자 바벨론 사내들이 와서 연애하는 그녀의 방으로 들어가 온갖 음탕한 짓으로 그녀의 몸을 더럽혀 놓았다. 오홀리바는 바벨론 사내들에게 짓눌려 더럽혀진 뒤에야 마음이 그들에게서 떠나가게 되었다.』
(겔 23:18, 현대어) 『오홀리바가 이처럼 보란 듯이 음탕한 짓을 마음 놓고 저지르고 자신의 부끄러운 곳을 내놓으며 욕정을 채운 다음에는 마음이 변하였다. 그래서 나도 그녀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였다. 전에 내 마음이 그녀의 언니에게서 떠나갔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제는 내 마음이 그녀에게서 떠났다. 그녀가 지긋지긋하게 미워졌다.』
(겔 23:19, 현대어) 『그런데도 오홀리바는 다시 새 정부들을 찾아다니며 더 음탕한 짓을 그칠 줄 모르고 애굽 땅에서 음란한 짓을 하던 소녀 시절을 그리워하였다.』
(겔 23:20, 현대어) 『그 당시에 놀아났던 애굽의 남자 친구들, 물건이 수나귀의 성기만큼이나 커지고 수말들처럼 격정적으로 발정을 하는 애굽의 사내들을 동경하였다.』
(겔 23:21, 현대어) 『애굽 사내들이 그녀의 숫처녀 젖가슴을 주무르던 그 옛날 소녀 시절처럼 오홀리바는 다시 한 번 그들과 놀아나고 싶어하였다.』
(겔 23:22, 현대어) 『[오홀리바에게 내릴 심판]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제 네가 전에 어울리던 사내들을 선동하여 네게로 몰아오겠다. 네가 함께 놀아나다가 정이 떨어져서 돌아서 버린 그들이 이제 사방에서 몰려와 너를 칠 것이다.』
(겔 23:23, 현대어) 『바벨론 사람들이 브곳과 소아와 고아 지방의 사람들을 부추겨 함께 몰려오고, 앗수르 사람들까지 함께 올 것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전차와 군마를 타는 멋진 젊은이들이요 총독과 장군들이다.』
(겔 23:24, 현대어) 『그들이 모두 전차를 몰고 오며 완전 무장한 대군을 거느리고 너를 치러 올 것이다. 그들이 모두 갑옷과 방패와 투구로 무장을 하고 북쪽에서 내려와 너를 사방으로 포위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너를 그들의 손에 넘겨 주어 그들이 자기들의 풍습대로 네게 벌을 주도록 하겠다.』

(겔 23:1, 쉬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겔 23:22, 쉬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심판하시다>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싫증을 낸 네 연인들을 부추겨 너를 치게 하며 사방으로 너를 에워싸게 만들겠다.』
(겔 23:36, 쉬운)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사람아, 네가 오홀라와 오홀리바를 심판하겠느냐? 그렇다면 그들이 저지른 혐오스런 모든 짓들을 일러 주어라.』

(겔 23:1, 현대어) 『[오홀라와 오홀리바]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겔 23:22, 현대어) 『[오홀리바에게 내릴 심판] 그러므로 오홀리바야, 나 주 여호와가 말한다. 네가 그런 짓을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나는 이제 네가 전에 어울리던 사내들을 선동하여 네게로 몰아오겠다. 네가 함께 놀아나다가 정이 떨어져서 돌아서 버린 그들이 이제 사방에서 몰려와 너를 칠 것이다.』
(겔 23:36, 현대어) 『[경고가 되는 두 자매] 여호와께서 내게 또 말씀하셨다. `너 사람아, 오홀라와 오홀리바에게 책임 추궁을 하여라! 그 두 여인이 저지른 부끄러운 짓들을 낱낱이 들어 그들을 규탄하여라!』


소제목이 달린 번역서를 올려 봤습니다.
즉 예루살렘인 오홀리바에 대한 심판이 더 강조될 정도로
오홀리바 즉 유대인에 대한 심판을 더 첨가 시키십니다.

왜 일까요?
이 심판 속에서 창조주 곧 누가 생명이요 길이요 부활리요 진리인지를 외쳐야 하는
이스라엘의 기능 때문입니다.

다른 민족은 보여줄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이스라엘 만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심판도 긍휼도 말이죠
(오홀리바 내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언약 곧 집이다는 거죠
그런데 내부 라고 하니까 공간으로 인식하면 또 자기 숙제인냥 내부로 따지지만
정작 외부입니다.
공간에서의 내부 외부가 아니라 공간이 해체됨으로써의
나 라는 자아는 없고
이스라엘은 없고 그 이스라엘 속에 있던 약속이
외부에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나의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인 것처럼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남으로써 이스라엘의 기능을 펼치도록 하시는 겁니다. 미끼로그러니 존재로 이스라엘을 존재로 보는 자들은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겁니다
존재로 본다는 자체가 이미 나누어 버렸으니 말이죠
안 나누어 지는 잔여인데 기능인데 공백인데 공백을 자꾸 채울려고 하니 미끄러지는 거죠)

일곱 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오로지 이스라엘만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얼룩으로써 사라지는 매개자 로써 말이죠

다음주에 할 내용의 구절을 미리 보면

(겔 23:25, 개역) 『내가 너를 향하여 투기를 발하리니 그들이 분노로 네게 행하여 네 코와 귀를 깎아버리고 남은 자를 칼로 엎드러뜨리며 네 자녀를 빼앗고 그 남은 자를 불에 사르며』
(겔 23:26, 개역) 『또 네 옷을 벗기며 네 장식품을 빼앗을지라』
(겔 23:27, 개역) 『이와 같이 내가 네 음란과 애굽 땅에서부터 음행하던 것을 그치게 하여 너로 그들을 향하여 눈을 들지도 못하게 하며 다시는 애굽을 기억하지도 못하게 하리라』

창조주의 창조주 되심을 보여주시는데 있어서
이스라엘을 가지고서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질투로 말이죠

거짓선지자의 메시지에서는 나올수 없는 내용입니다.
이미 이들은 존재로 보게 되니 긍정하게 되지
부정적인 비존재로써의 이스라엘을 외칠수가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는 창조주의 메시지와 동일합니다.
창조의 비밀은 잃어버림 속에서 되찾는 사랑이거든요
모든 허물을 다 덮는
모든 상처를 다 치유하는

(아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사랑은 죽음 보다 강하기 때문에
질투를 하신다 말이죠
그 질투를 보라는 겁니다.
죽음 에 다 넘어가 버린 이 이스라엘을 끄집어 내시고자

의도적으로 죽음 속에 다 집어 넣어 일괄처리 해 놓고서는

그 음부의 권세
그 사망의 권세


죽음 보다
사망아 너가 쏘는 것이 누구냐 라는 그 사망 보다
더 질투하는 것이 사랑이다 라는 겁니다.

(호 13:14, 개역) 『내가 저희를 음부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음부야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 뉘우침이 내 목전에 숨으리라』
(고전 15:55, 개역)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네 그렇습니다
주님은 인간 개개인의 죄 하나 하나를 따지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망이 그렇게 하나 하나 따집니다 곧 선악이지요

주님은 권세 곧 배후세력을 따지십니다.
사망아 너가 쏘는 것이 어디 갔니 라고 사망이 하는 일이 무용지물이 되게 말이죠
마찬가지로 사망의 권세 음부의 권세 또한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무용지물로 만들고자 나서는 겁니다.

이 두 소욕의 싸움에 우리는 중간에 낑긴 
고래등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의

네 네 맞습니다 맞고요 미끼입니다 미끼

주님은 인간을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관해서 일하십니다.
이스라엘을 미끼로 삼아서 마귀를 들추어내십니다.
그러니 지옥 심판 저주 또한 이스라엘만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지 (포로 잡힌 잃어버림 속에서)

다른 민족이 보여주는 지옥은 지옥 축에도 못 듭니다.

제가 이번주에 올라온 일당백 무신론자를 위한 구약성서 강의를 너튜브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참을수 없는 가벼움을 운운하는 내용에서

오홀리바와 출생의 비밀 이라는 제목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비나는 키치에 반대하면서 똥되기를 추구하더라 말이죠
인간이 막살기를 실천한다고 해서 막살기가 되는게 아니라
주변에서 키치 곧 무거움이 가만히 두지 않아요 결국은 무거움으로 가두어 버리죠
마치 설리(최진리)가 키치의 세계에서는 불편할 수밖에 없듯이 말이죠.
진리는 막살아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죄인과 세리의 친구이지만
키치는 옆에서 금식을 하거든요 그 꼴 못 보니까 저런 별명을 붙여서
가까이 하지 말라고 규정 곧 못 박아 버립니다. 
신의 똥되기는 저들에게는 참을수 없는 가벼움 이거든요. 
온갖 가벼움을 별명으로 다 붙여요.
술꾼에 먹보에
그래 그래 이 심판 이 저주 견뎌봐 라고 말이죠
주님이 하실 일을 자기들이 해요
정작 주님은 그 똥되기에 그 이스라엘 속에 참예 하시는데
인간은 참예 한적 없어요
도리어 주님이 참예 하십니다.

아무나 이스라엘이 되는게 아니거든요 이스라엘 조차도 이스라엘이 될 수가 없을 정도이니까
자기 손으로 하는 할례가 무슨 할례입니까
백날 해도 마음판은 할례를 할수 없는
손이 안 닿아요 단절입니다.
행함이 닿질 않아요 잡을 수가 없거든요

비밀은 곧 단절은 주님이 직접 졸지에 그 이스라엘 속에 참예 하십니다.
음녀가 된 이스라엘에게 뛰어드심입니다 지옥에

도저히 할수 없는 실패 속으로 들어온다 말이죠
도저히 참을수 없는 가벼움 속에 뛰어드심 똥되기 죄인되기 말이죠

마치 오늘날 교회 백날 다녀도 평생을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다 다녔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고
또 맏아들처럼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단한번도 어긴적 없다 라고
귀한 존재로써 구원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우기지
누가 똥 이다 죄인이다 라고 주님 앞에 나오겠습니까?

인간의 교회 되기는 마치 행함처럼 사람의 손으로 할례 했음을 우기지
주님 전 안 됩니다 제발 고쳐주소서 나는 죄인 똥 환자입니다 라고 안 나온다 말이죠

성령의 전은 주님의 숙제입니다
아무나 막사는 탕자 곧 왕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가 없다 말이죠
개인 숙제도 아니고 말이죠

막살기를 백날 해 보세요 개인 숙제이니 또 존재로 빠져요
전체 일괄적으로 막살기는

광야에서 불뱀에게 물리도록
물없는곳 양식없는곳 원망 안하고는 못 배기는 곳으로 몰아가야
전체적으로 막살기가 튀어나오는 겁니다.
주님의 숙제에 의해서 말이죠
그래야 먼저 있었던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볼 것 아니겠습니까?
나누어지지 않는 초과잉적 잉여를 볼 것 아니겠습니까?
그 속에서도 마저도
불뱀에게 물려 죽는 판국에서도
십자가의 처형 속에서 죽는 판국에서도

쳐다본다고 낫겠냐
뭐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하소서 라는 똥되기를 거부한다고
미친 광기를 거부한다고

안죽냐 말이죠 죽는 판국에 무거움을 추구해본들 키치를 추구해본들
음부의 권세가 아이고 무거워라 도망가냐 아이고 무서워라 하고 피하냐 말이죠

탕자는 이미 죽은자 이미 똥이 된자에게 아무도 기대치 않는 자입니다.
시체는 가벼워요 누가 시체에게 기대를 겁니까 아무도 기대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지
그런데 역설적으로 나누어지지 않아요 즉 규정이 되어버린 겁니다.
바닥을 쳤거든요
이것이 이스라엘 기능입니다.

자기가 자신을 규정해 버리면
또 나누어질까봐 또 전전긍긍 ㅋㅋㅋㅋ

이 다음 글 마태복음 창기와 세리가 먼저 천국에 가는 이유입니다.

주님이 그 죽음 속에 자신의 죽음으로 오셨거든요
똥되기로 말이죠

정작 바리새인은 자기가 자신들을 거룩으로 규정해 버렸는데
(존재가 되어버렸으니 기능은 없는 그래서 행함으로 껍데기로 포장해야 하는 행위를 따지는 겁니다.)(그리고 누가복음을 통해서 바리새인을 보게 되니
꼭 귀신들린 점쟁이가 사도바울을 계속 졸졸 따라다니면서 괴롭힐때에
귀신을 물러가게 하니 비로소 권세 즉 귀신들린적이 없는 정상인이
포주로써 점쟁이가 더 이상 점을 못 치니까 돈을 벌수 없게 되었다고
숨어있던 남자들 권세들이 나타나서 바울을 고소하듯이 바리새인이 바로
유대인들의 선생 포주로써 주님은 들추어내시거든요
그래서 감옥의 간수 이야기 로 이어지거든요
마치 다음글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예루살렘을 애굽으로 여기고 그 속에 들어가셔서
그 음부의 권세 속에서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는 방식이다 말이죠)

(행 16:16, 개역)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을 크게 이하게 하는 자라』
(행 16:17, 개역) 『바울과 우리를 좇아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행 16:18, 개역)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행 16:19, 개역)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바리새 라는 뜻이 구별된자 거룩한 자 이거든요
선민 이다는 거죠 구원받은 자

그럼 그 구원의 내용이 들어 있어야 해요
하나도 없어요

오늘날 성화론자들도 마찬가지 구원의 내용이 없어요
즉 창조의 비밀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은 십자가의 피 용서가 없어요
정반대로 선악의 법만 잔뜩 그 배설물만 잔뜩 들어있어요 똥 덩 어 리
그럼 저 똥입니다 고쳐주세요 아니
저를 고치실려고 똥이 되셨습니까 라고 나와야 하는데

아무리 봐도 임마누엘 
하나님이 서로 달라
예수님이 서로 달라
똥이 된 적 없는 예수 이거든요
죄인이 된 적 없는
죽은 적이 없는

그러니 죽음 속에서 만날 이유가 없어요
음녀 됨 속에서 만날 이유가 없어요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볼 이유가 없어요

의사를 쳐다볼 이유가 없어요

우리의 죄악을 더러움을 그 허물을 덮고자 더 더 더 더러운 모습으로
우리는 나의 거울을 도리어 더럽다 라고 
아름다운 모양이 없다고 키치가 없다고 싫어버린바 되었다고 다들 고개를 돌렸다 말이죠.

(사 53:6, 개역)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 각기 제 길로 가는 양 같은 자에게
여호와는 우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는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한 기쁜소식을 마련했다 라는 겁니다.

(사 53:10, 개역)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것이 약속 이다 말이죠
이 언약 대로만 밀어붙이시는 겁니다.
이데올로기를 깨뜨리는 유일한 비이데올로기 이다 말이죠
키치를 깨뜨리는 가볍기 짝이 없는 아무도 귀히 여기지 않음입니다.

이것만이 나누어지지 않는 이스라엘 이라는 비밀
출생의 비밀이다 말이죠

반대로 인간은
육적 이스라엘은 자꾸 자기가 자기 스스로 이스라엘 답게 할려고
자꾸 나누어 지는 이스라엘로 만들려고 해요 글쎄
자기에게 자꾸 손을 댈려고 해요
손 대겠다는 것은
더 좋은 존재로 꾸밀려고 하지
더 가치 있는
더 귀한 존재로 말이죠

누가 무익한 종이 될려고 하겠냐 말이죠
누가 자신을 새까만 얼굴로 만들려고 하겠냐 말이죠

물론 누나 지킬려고 안 맞을려고 새까맣게 구두약을 칠하는 남동생도 있지만
정작 무섭게 보여야 안 맞을 것 아니냐 말이죠
폭력에 저항하는 독립군이 될려고 하지
누가 두들겨 맞을려고 얼굴을 새까맣게 칠하냐 말이죠

이스라엘이라는 출생의 비밀 곧 창조의 비밀
창조란 다른 민족을 통해서 안 보여줍니다
다른 민족은 오히려 이스라엘을 이스라엘 답게 동원이 되는 사탄의 가시로써
이 미끼를 덮썩 무는 부정적인 도구로 등장해요
애굽의 강퍅함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동원이 되듯이

(출 14:4, 개역) 『내가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 온 군대를 인하여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으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
(출 14:17, 개역) 『내가 애굽 사람들의 마음을 강퍅케 할 것인즉 그들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갈 것이라 내가 바로와 그 모든 군대와 그 병거와 마병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리니』
(출 14:18, 개역) 『내가 바로와 그 병거와 마병으로 인하여 영광을 얻을 때에야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시더니』

오로지 이스라엘만을 통해서 창조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어요
소멸도 마찬가지입니다.

[통해서] 라고 하니까 또 오해 할라, 착각하지 마시고
이스라엘을 [대해서]

통해서는 이스라엘 자기가 자기 숙제로 보는 식이고
대해서 는 이스라엘을 가지고서 주님 자신의 숙제를 보여주시는 주님만의 숙제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을 가지고서 말이죠
즉 대해서 라는 말은 늘 주님의 숙제를 당하도록 질질질 끌려다닌다는 겁니다.
마귀 보다 더 심하도록 말이죠

그러니 다른 민족은 안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가지고서
갑자기 어머니께서 말씀을 나누자 라고 해서
에스겔 본문을 가지고서
창세기 1장 1절의 창조에 대해서 나누었다 말이죠.

오홀리바에 대한 창조의 비밀
출생의 비밀을 말이죠.

나누어지지 않는 비밀을 이스라엘 말하기 위해서
아무리 나눌려고 해도 안 나누어짐을 창조주가 직접 보여주시는데
물 속에 집어 넣어도 안 나누어지고
불 속에 집어 넣어도 안 나우어지는데

어라 이스라엘이 처음자리 버리고
비밀을 버리고 
자기가 존재가 되어버려서
귀한 존재가 되어버려서
자기가 도리어 남과 나눌려고 해요
자기 얼굴에 누워서 침뱉기를 해요 글쎄
출생의 비밀을 발로 차요 글쎄

기능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 되기 즉 똥되기 이고
존재는 자꾸 자기가 자신을 손 대는 것
누가 잘 될려고 하지
선악으로 인해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하나님이라는 이데올로기와의 동질성 합일성을 추구하지
이게 종교 666 아닙니까
누가 그 반대로 가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어요

아 그런데 예수님이 그 반대의 길로 가면서
자기 신부 조차도 곧 이스라엘 곧 새이스라엘인 교회도
그렇게 만드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저 종교가 이기지 못하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짐승의 수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봐도 이미 벌써 누구 보다 가장 먼저 졌는데
오늘 본문 봐 보라 말이죠

오홀라 곧 사마리아 보다 더 더 더 몇배나 더 심한 음녀이다 말이죠

오죽 하면 사마리아의 창녀됨을 욕하고 있는 창녀이니 자신의 창녀됨은 아예 못 봐요
누가 봐도 창녀인 사마리아는 다들 창녀라는 것 알아요

그런데 예루살렘은 그런 창녀를 정죄하는 더 더 더 더 심한 창녀인데
모든 사람들의 눈을 가려서 이스라엘의 선생으로 취급하도록 세뇌를 시켰으니

예수님이 오지 않고서는 그 비닐이 벗겨지지 않는 겁니다.

(막 2:16, 개역)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7, 개역) 『예수께서 들으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눅 7:34, 개역)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눅 7:35, 개역)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꼬투리 잡고자 뒷조사를 하는 와 중에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어라 선지자 라는 사람이 자기를 만지는 여자가 누군지 알았더면 거부했을텐데
어라 도리어 받아주넹?????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말이죠

(눅 7:36, 개역)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눅 7:37, 개역)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눅 7:38, 개역)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눅 7:39, 개역)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선지자 라면 창녀라는 존재와 멀리해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본인이 거짓선지자이고 본인이 거짓선지자를 추종하다 보니
존재로 보고 있으니 존재에게서 한 수 배울려고 했는데
기능을 보고(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금식 곧 남을 살리는 금식)
그 반대의 상황을 보고 이해가 안되는 겁니다.

어떻게 저 여자가 창녀인 것을 모르고 있지?
어떻게 창녀와 함께 먹고 마시지?

그러나 창녀 마리아는 감히 이 죄인의 집에
이 지옥의 집에
감히 몸둘바를 모를 정도로 이 비천한 천한 계집의 집에 주님이 오셨다는 소리에
맨발로 나와서 그 더러운 예수님의 발에 입을 맞추고
머리로 발을 씻고
뺨에 뽀뽀 하고
영접하기에 바쁘다 말이죠
얼마나 신이 났냐 말이죠

로또 대박 저리가라입니다.

이것이 정작 거룩하고 거룩한 바리새인인 이스라엘이 그 이스라엘 기능을 안 보여주고
자기들이 더럽다 라고 창녀라고 욕하고 있는
창녀 마리아가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보여주고 있으니

도저히 해석이 안되니

미끼를 확 물어버린 것이여 가 되는 겁니다.

많이 탕감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 라는

(눅 7:42, 개역)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눅 7:43, 개역)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눅 7:44, 개역)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눅 7:45, 개역)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눅 7:46, 개역)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눅 7:47, 개역)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8, 개역)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눅 7:49, 개역)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누가복음은 그야말로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 아닙니까
이방인에게 덮쳐지는 창조주의 비밀 이거든요
어떻게 더러운 이방인이 새이스라엘이 되냐 말이죠
말도 안되는 거죠

창조의 비밀
곧 선악으로 만들지 않았고 법 법 법 키치로 만들지 않았고

은혜로 사랑으로 용서로 만든 창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들은 과거의 것을 지금까지 지켜서 창조를 질질질 끌고와서 창조신앙이라고 믿는다고 우기지만
정작 창조주를 버리고 있는
어떤 창조주

지금 창조자의 창조 라는 사건을 저들은 지금 창조를 거부하는 모습으로써 
과거의 창조와 안 맞다 라는 식입니다.

나는 1300년 묵은 모세의 제자이지
너는 겨우 3년 짜리 예수의 제자냐 라는 식처럼 말이죠
누가 존재론적으로 우월하냐 라는 식입니다.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을 더더 더 더 사마리아 보다 더 더 더 더럽게 만들어서
지금 새롭게 창조의 비밀을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곧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으심 이라는
하나님의 의를 펼치십니다 이사야 이오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 곧 자기 사랑 자기 어여쁜 자야 로 말이죠

여기에 이스라엘은 싫든 좋든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냥 밀어붙이십니다.

오홀리바의 죄악이 뭡니까?

지난 주에 오홀라의 죄악은 바로 앗수르 라는 짐승과 바람 피었다는 겁니다. 곧 우상숭배

(겔 23:5, 개역) 『오홀라가 내게 속하였을 때에 행음하여 그 연애하는 자 곧 그 이웃 앗수르 사람을 사모하였나니』
(겔 23:6, 개역) 『그들은 다 자색 옷을 입은 방백과 감독이요 준수한 소년, 말 타는 자들이라』

행음

그런데 오늘 오홀리바 곧 예루살렘의 죄악은 더 심해요

(겔 23:14, 개역) 『그가 음행을 더하였음은 붉은 것으로 벽에 그린 사람의 형상 곧 갈대아 사람의 형상을 보았음이니』
(겔 23:15, 개역) 『그 형상은 허리를 띠로 동이고 머리를 긴 수건으로 쌌으며 용모는 다 존귀한 자 곧 그 고토 갈대아 바벨론 사람 같은 것이라』

음녀 라는 겁니다. 행음자
선지자 시대의 우상 개념은 바로 음행
다른 남자와 바람 피는 것을 우상이라고
그 이전의 모세 율법 시대는 조각 상을 우상이라고 했고
신약에서는 탐심이 우상숭배 라고 했습니다.
즉 상대적인, 탐심의 반대는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욕심이 아닙니다.
그 반대죠
자아입니다
그러니 최고의 종교 불교처럼 욕심을 버리는 그런 사상을 지키는
교리를 지키는 것이 바로 탐심이 되는 겁니다.
불교 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가 오히려 탐심을 부추겨요
그러니 신약 때의 탐심이라는 우상숭배는
자기 사랑을 그 반대 급부에 두는 겁니다.
여기서 끝나는게 아니라
자기 사랑 안 하는 놈 어디 있어요 다 하지
그래서 주님의 숙제가 동원이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모든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즉 죄는 십자가의 죽음이 아니고서는 회개를 못한다 라는 겁니다.
깨우치는 깨달음 조차도 탐심이 되기에
회개의 달인 조차도 이 십자가라는 거리끼는 걸림돌에 넘어진다는 겁니다.
바리새인 회개의 달인 아닙니까

고맙게도 주님의 십자가가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주는
회개케 만드시고자
자신의 숙제인 의사됨을 이스라엘 됨 곧 죄인 됨 속에서 펼치시는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에 복종케 만들고야 마시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무조건 항상 이유없이 감사와 기쁨과 기도가 멈출수 없는
나누어 질 수가 없는 잔여로써 이스라엘로써 초과잉적으로 흘러 흘러 나오는 겁니다.

(살전 5:16, 개역) 『항상 기뻐하라』
(살전 5:17, 개역) 『쉬지 말고 기도하라』
(살전 5:18, 개역)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왜? 그 위에 나옵니다.

(살전 5:10, 개역)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냥 밀어붙이셔서
원인 없는 결과로 다 이루셨습니다.

게임 오바

우리는 그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언약 완성의 증상물로써

이 징후를 즐기는 감사만 나올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