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양립불가인 십자가

목사라는 직업 허물기

김 대식 2009. 9. 10. 12:10


목사라는 직업 허물기

목사라는 직업 허물어 버리는 은사

(꼴찌는 따 놓은 당상 : 실패 해도 상관 없는 예수님만 흥하면 되는 은사)



주님께서 교회가 하나 임을(하나 되기가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하나 였음을 잉여물로써 창세전의 처음자리로 이미 영원히 결정난 사항을 통보하는 한 몸) 보여주시기 위해서 교회에게만 특별히 허락한 선물이 있는데 바로 은사이다.

은사란 그 사람이 잘하는 주특기(달란트)가 아니다.
직업이란 그 사람이 그 직업을 통해서 그 사람의 가치와 그 사람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왜 그런 직업을 택했습니까? 택한게 아니라 먹고 살려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겁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님께서 그 직업을 허락한 이유는 먹고 살려고 준게 아니라, 그 일이 아니면 그 사람을 소모시킬 가장 적절한 일이 없기 때문에 소모 시키고자 즉 죽이고자 한 것을 인간은 항상 자신만을 쳐다보기 때문에 자신이 먹고 살려고 자신의 가치성을 자신이 마치 투자한냥 그렇게 과시 자랑하는 것이다. 죄를 보라고 허락한 것인데 도리어 죄를 못 보게 되었으니 주님의 일하심에 딱 걸려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직업이 목사다. 목사 안되면 죄를 볼 길이 없기에 허락한 것인데 도리어 죄를 보는 눈을 가리우게 한 것이 목사 라는 직업이 되고 말았다.
은사란 예수님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 인간의 성화나 행위로 불가능하기에
주님의 영이신 십자가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 멱살 잡혀서 질질질 끌려가도록 하기 위해 주시는 끌려당함을 입는 것을 말한다.

마치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라고 한 것처럼

(눅 2:14, 개역)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샬롬 곧 전쟁으로 인해 자신의 해체 당함을 통해서 비로소 주님의 전쟁에 해체당함으로 처음자리로 되돌림 당하는 기뻐하심을 입는(처음 안식의 자리 되돌림 당하기) 것이 바로 은사이다.

예수님은 이런 은사 곧 성령의 일을 어떻게 보여주시는가?
처음자리 의 반대인 고정자리를 노리는 인간의 욕망을 보여주시면서 그 차이로 증거 하신다.

맞다 은사란 바로 이런 인간의 양파 껍떼기 속처럼 벗겨도 벗겨도 아무리 벗겨도 그 속내가 드러나지 않는 그 불가능한 감추인 욕망을 함께 들추어내면서 그 차이로 드러나는 것이다.

처음자리가 아닌 고정된 자리가 무엇인가?
바로 마귀가 심은 것이다. 은사는 성령 곧 십자가의 영이 심은 것으로 항상 빈터이고.
마귀가 심은 것은 반드시 십자가를 반대하는 고정된 자리이고 빈터를 채워서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 하는 방식이다.

그것이 바로 마귀에게 모든 인간들이 갇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심지어 목사들 조차도 너끈히 장악한 마귀의 실체를 드러내신다.

바로 고정된 메시아를 요구하는 대중을 대변하는 목소리이다.
어쩜 오늘날 목사들의 외침이 마귀를 대변하고 교인들을 대변하는 소리와 똑같다.

고정된 메시아는 먼저 인간의 빈터를 채워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간은 빈터로써 창조 되었다는
오직 말씀으로 살지 떡으로 사는 것이 인간이 아니다는 것이다.

위에서 예정하신 그 말씀의 계획 대로만 살도록 되어 있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도록 사는 존재가 아니다는 것이다.

마치 솔로몬이 부요케 해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기도에 구체화 된다. 일용할 양식 이다.
인간은 원래 빈터 였다는 것이다.
그 빈터를 엉뚱한 것으로 채워지는 것을 통해서 그 차이로 말씀의 계획 프로젝트를 알게 해 달라는 것이 주의 기도이다.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의 세계를 보는 것이다.

두 번째로 고정된 메시아 고정된 인간 고정된 교회 고정된 하나님이 무엇인가?
바로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라는 것을 이루어 달라는 것이다.

거룩하고 깨끗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순교와 같은 자기목숨을 버리는 현장에서
기적과 같은 반전이 일어나서 천사들이 그 자기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를 두 손으로 떠 받드는 말씀에 기록된 일이 벌어지도록 해 달라는 반드시 사랑 받을 자는 사랑받는 티를 대중에게 확인케 해 달라는 사랑의 확정성 사랑의 고정성을 보여 달라는 것이 마귀가 인간의 장악한 모습으로서의 고정된 믿음이다.

그러나 편애란 도리어 지독한 미움으로 증거 된다. 그 차이성을 증거한다.
정말 의인인가? 과연 의인이고 거룩하고 깨끗한 자이고 성화된 자이다면
이 세상의 모든 미움을 다 퍼부어도 상관 없을 정도로 너끈히 통과하는 자이다.

그러나 모든 종교는 그런 고난을 정면으로 서서 맞써 싸우고자 한다. 싸워서 꺽어서 내가 승리자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지만 예수님 조차도 맞써서 싸워서 이기고자 하지 않았다.
옆으로 서서 통과 시켜버린다.

정면으로 맞서서 싸워서 이겨서 꺽어버리고자 하는 것은 시험든 것이다.
시험이란 자기를 챙기는 것이다. 정면으로 맞서고자 하는 것은 이긴 나를 또 세우고자 함이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미쁘신 뜻대로 행하신다. 미쁘심이 시험의 반대의 의미이다.
그 미쁘신 아버지의 믿음직 스러운 뜻이 무엇인가? 자기를 내어주심인 빈터이다.
자리는 원래 없었다. 편애의 자리는 원래 없었다.
무에서 유로 창조한 창조자의 마음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다들 편애의 자리에 넢쭉 앉고야 말았다.
남이 앉지를 못해서 버림을 당하는 말든 자기자신만을 그 편애의 자리를 당연히 앉아야만 하는 그 알 수 없는 이유도 없는 다급하고 급박한 마음이 그 편애의 자리를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넢쭉 앉게 된다. 유일한 단 하나의 자리를 말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자리이다.
그런데 앉고 보니 감히 앉을 수 없는 자리를 앉아버리고 말았다.
하나님의 자리를 넢쭉 앉고 말았다.
그런데 주인이 나타나야 비켜주고 내려 앉느냐 마냐 인데
주인이 나타나지를 않는다.
빈터로 고정된 자리로 해석이 내려지자 마자 냉큼 주어서 챙긴다.이 얼마나 미쁘신 계획인지 ...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자리에 앉으면 머리에 황금관이 저절로 생겨버리게 되니 자기자신이 너무 너무 멋져 보인다.

그러나 정신차리자 하고 그 자리에서 내려앉자보니 그 화려한 머리에 쓰여진 황금왕관은 사라지고 이제는 반대로 너무너무 자기자신이 초라하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추락하고 실패자로만 보여질 뿐이다. 자기가 자신을 쳐다보아도 역겹다. 그리고 그 내려앉아서 보게 된 그 높고 거룩한 자리는 너무 너무 영광스러운 자리로 영원히 고정된 안정감이 있는 자리이다.

마이다스의 손처럼 사랑의 맛은 보았고 그 사랑에 목마름을 격게 되었으니
인정받고자 하는 자리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사랑을 쟁취하는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바로 그런자들만 모아 모아 끌어모아둔 곳이 교회라는 곳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두 패로 철저하게 가려낸다. 그것 때문에 동원된 청함을 받은자가 많지만 택함을 받은 자는 적은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기자신이 초라하기 전에 그 내려앉은 자리를 냉큼 다시 오르게 된다.
(싫어버린바 되기 전에, 지독한 미움과 저주를 받기 전에, 세상에 찌끄래기, 구경거리가 되기 전에 - 그래서 모인 곳이 교회이다. 곧 교회란 종말의 단체로써 종말의 단체가 아닌 애굽에서 종말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교회로써 종말성을 따로 보여준다.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보여주는 것이 종말이다. 다른 사적인 종말이란 있을수 없다. 왜? 한 머리를 보여주는 누락성 때문이다. 머리만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은 없는데서 생겨난 종말단체이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깨끗한 그 높고도 높은 자리에서 자기의 머리에 씌여진 왕관이야 말로
모든 이들로부터 영광을 받을 만한 자리이다.

은사란 자기 자신을 치셔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자기 부정 자기 부인 자신은 망하고 타인(원수)은 흥하게 하는 이웃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단 한명의 예외도 없이 목사는 반대로 가르쳐 왔다. 그 하수인 장로는 행동대장으로써 더 심하게 족치면서 말이다. 자기자신을 쳐서가 아니라 타인을 쳐서 자기와 자기 정치적 단체가 함께 흥하는 방식이다. 다윗이 가난한자의 양을 빼앗아 자기손님을 대접하는 원리처럼, 바로 그런 정치적인 집단성이 바로 오늘날 교회의 모습과 동일하다. 그럼으로 망함으로써 빈터가 됨으로써 교회는 은사에 휘말리도록 되어 있다. 물론 징계를 받는 교회만 그렇다.)
그러나 목사란 이웃을 등쳐먹어야만 유지되는 직업이 되고 말았다.
의사가 환자가 생겨야만 자신의 의사직을 유지할 수 있듯이
남이 아프면 자신에게는 곧 기쁨이 된다.
왜 성화론을 외칠까? 자기자신도 못 지키면서 말이다.
그것은 곧 남이 죄짖는 것이 자기자신에게는 기쁨이 되는 직업이
땡잡은 직업 목사라는 직업이다. 어디에서든 먹어주는 엘리트 집단인 것이다.
핍박 받는 직업이고 천대받고 3d 업종이면 아무도 하지 않을려고 할텐데 말이다.
그러나 하면 할수록 보람 된다. 자부심이 생기고 가족 친척들도 우러러 본다.
미친놈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런 거짓선지자에게 미친놈 취급받고 원치도 않아 억지로 붙잡혀서 세워진 자가 참선지자이다. 반드시 상대적인 직업군이 있을 수 없는 직업군에 졸지에 낯설게 생겨난 자들이 종말 곧 저주와 미움을 담은 선지자의 등장이다. 주님이 주신 은사에 또 다른 주님이 주신 은사 받은 자가 등장한다. 주님이 허락한 이스라엘 왕 사울 왕 앞에 또 다른 주님이 세운 다윗 왕이 등장이다. 반드시 주님에 의한 두 왕이다. 가려내기 위한 것이다. 누가 자기 자신을 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인지를 주님이 반드시 만들어내고자 하는데 하나는 도저히 자기부인 하고파도 자기부인을 할 수 없는 자로 세움을 받아야만 하고, 또 하나는 아무리 자기긍정만 하고파도 반드시 자기부인만을 할 수 밖에 없는 자로 세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웃을 등쳐 먹어도 상관 없다. 그 정도로 악한 놈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웃을 등쳐 먹지 못하면 불안해서 살 수 없는 직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목사다.

왜 그런고 하니
교인들이 복음에 관심이 없어 버리면 곧 바로 죽어야만 하는
마치 사사 시대의 제사장들과 같다.

그래서 거짓선지자와 삯꾼 목자들이 살 길은 딱 하나 밖에 없다.
세상에 빠진 교인들의 눈을 돌리는 방법이 바로
교회 안에 우상을 세우는 것이다.
곧 목사 자신을 세우는 것이다.

은사란 반대이다.
그 머리의 자리를 항상 빈터 곧 십자가의 죽음의 피 외에는 다른 머리를 두지 않기로 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쳐서 자신을 내어주는 자기의 죽음을 반드시 동반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은사로 주어진 목사직을 행할 수 있는 자는 없다.
자신이 목사인냥 그런 소리를 외쳐도 막상 보면 꼭 반대로만 사기만 치는 놈들 뿐이다.

결국 은사란 바로 이런 어두움의 고정된 인간 속의 괴물성이 어떻게 이 은사들을 자기의 유익대로 써먹는가의 내막들을 완벽하게 드러낸 상태에서 또 다르게 세우시는 은사로 인해
자기자신을 자기자신이 치시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목사란 자기 목을 유지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자기 자신의 목을 유지하는 악령을 받은 자가 목사로 허락받아서 나타나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허락된 은사 받은자가 나타난다. 자기자신의 목을 매일 매일 빈터로 날려버리는 자가 나타남으로써 두 은사자의 두 종말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래에서 땡기는 지옥과 천국에서의 두 은사자가 말이다.

아무나 지옥 못 간다. 지옥에서 보냄을 받은 자 만이 자기 목을 세우는 목사가 된다.
아무나 천국 못 증거한다. 천국에서 보냄을 받은 자만이 자기 목을 날려버리는 빈터를 만드는 은사에 의해서 십자가의 은혜만을 증거한다.

사랑은 빈터로 만드는 성령의 선물만으로만 외쳐지는 것이다.

빈터는 십자가 외에 다른 것이 없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치는 것만이 은사다. 곧 자기부인이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