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오전설교

회개 (누가복음 3: 7- 9)

김 대식 2010. 2. 8. 13:02

회개

2010년 2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3:7-9

(눅 3:7, 개정)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아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눅 3:8, 개정)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눅 3:9, 개정)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상당히 충격적이고 도발적이고 격한 말을 서슴없이 세례요한이 내뱉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음과 같이 반발할 수 있습니다. “너나 나나 같은 인간인데 네가 뭐길래 감히 우리를 향하여 그런 심한 말을 하느냐?”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단순한 요한이 아니라 ‘세례 요한’이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세례’라는 아이디어는 세례 요한의 개인적인 견해가 아니라 대중들이 요구한 바도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작업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필히 들어가야 될 요소가 바로 ‘세례’입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회개하고 세례 받는다’고해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말하는 바가 됩니다.

사람들은 뭐든지 ‘자기 구원’ 위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극도의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일은 ‘사람 구원 위주’가 아니라 ‘하나님 행하심’ 위주입니다. 즉 행하심 그 자체에 대해 비중과 초점을 두고 계시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행하심을 자기 구원에 도입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차이성이 오늘 본문에도 분명히 나옵니다. 세례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 받으려 나오는 사람을 보고 도로 호통칩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일러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렇다면 누구나 삐칠 수밖에 없는 과격한 발언이 됩니다. 이런 과격함이 세례 행위를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취지에 담겨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장담했습니다. 즉 ‘아브라함 자손’의 자격으로 세례를 받고 더 나아가 세례의 합당한 열매를 맺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그런 의식이나 사고방식이 바로 ‘악마의 자식’들이 할 짓이 된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 구원이 될 것 같으면 차라리 길 가에 있는 돌멩이들도 능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결국 ‘독사의 자식’들은 길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보다도 더욱 질이 나쁘다는 말이 됩니다. 길에 있는 돌멩이들과 ‘독사의 자식들’과의 차이점은 ‘주체’에 있습니다.

즉 주체적으로 회개가 가능한 것은 ‘독사의 자식’들이요 그렇지 않는 자들은 ‘돌멩이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사의 자식’들을 놔두고 길의 돌멩이들을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구원하지 않으시는 이유는, 바로 ‘세례’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의 의미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5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함을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물’이나 ‘성령’이나 모두 하늘에서 주신 일방적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요 3:27) 즉 물 세례의 최초의 의미를 부여하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요한 물 세례에 참여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는 결국에서 성령까지 내리시는 성령의 세례의 주체자가 되십니다. 결국 이것은 성도가 맨처음 돌멩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말이 됩니다. 돌멩이로부터 출발해서 ‘아브라함 자손’이 된다면 물 세례가 필요치 않습니다. 하지만 돌멩이보다 더 못한 ‘독사의 자식’로부터 ‘아브라함 자손’이 되려면 여기에 누가 개입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개입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라 완성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완성이 바로 ‘성령 세례’입니다. 물로서 시작한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이라는 불 세례, 즉 저주 세례 받으시고 궁극적으로 자기 사람에게 성령 세례를 베풀므로서 구원이란 ‘하늘에서 주시지 아니하면 성사될 수 없음’이 분명히 확실해져 버리게 됩니다. 돌멩이가 아니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사람은 희망없이는 못삽니다. 천국가겠다는 것도 모두 사적인 희망의 산물이요 열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독사의 자식’으로서의 희망입니다. 과거를 짤라야하듯이 뿌리채 도끼로 잘라져야 합니다.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본인의 기대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 사람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인간으로부터 파악될 수 있는 보이는소망이 아닙니다. 성도는 보이는 소망을 소망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로마서 8:24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다”고 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소망은 미래에서 와서 현재를 덮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방으로 전근을 하게 된 사람은 우선적으로 그 지방에 적응하려고 조마조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과거의 뿌리에서 나오는 희망성에 준한 주체관 때문에 발생된 감정입니다. 앞으로는 다른 주체관이 구성됩니다. 즉 거대하고 강력한 자석이 진행하면 졸지에 주변에 있는 철물들의 배치의 방향성이 달라지고 재배치되는 것처럼 지방으로 전근하는 성도 안에 들어있는 그 귀한 복음으로 인해 그 지방이 비상걸리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듯 성진정한 성도는 이 주체가 둘로 갈라져야 합니다. 균열이 일어나야 합니다. 희망에 속한 주체와 소망에 속한 주체로 갈라져야 합니다. 그래서 과거 자기 희망의 노선에 속한 자아상은 물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이 죽음에 이미 예수님께서 물 세례로서 참여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겁니다. 즉 예수님의 일대기와 그 노선을 뒤따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되면 세례의 합당한 회개의 열매란 딴 게 아니라, 자기를 더 살려내기 위해 여분의 것들을 제거하는 구조를 받아들이는데 있습니다.

2절에 보면,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도대체 왜 받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구조에 편입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개인은 죽고 그 구조가 요구하는 자로 탈바꿈 당해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탈바꿈 당해야 하는가’ 아니면 ‘탈바꿈을 해야 하는가’입니다.

12절 전체를 다시 보겠습니다.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고 되어 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되지 그 뒤에 또 뭐가 필요합니까?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라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보아서 세례를 그냥 받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고 난 뒤에 달라진 인간상을 보인다는 조건 하에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해하고들 있습니다.

즉 “나는 세례를 받을 테니까 받고 난 뒤 우리가 어떠한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합니까?”라고 묻는 물음입니다. 전과 어떤 식으로 달라야 합니까 라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곧 차이를 뜻합니다. 즉 세례란 세례 전과 후에 차이가 진다는 겁니다. 이 차이의 내막을 세례라는 것이 어떤 구조를 나타내느냐에 달린 것입니다.

기존의 주체 안에는 환상을 유발하는 요인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유발요인을 겨냥하면서 설교를 하고 예언을 하고 있는 겁니다. 꿈을 스스로 깨는 겁니다. 그 깨는 것을 회개의 합당한 열매라고 규정합니다.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어서 두 벌이 없게 하라 왜냐하면 몸은 하나인데 옷이 두 벌 있다는 말은 꿈을 이룬 시점에서 입을 옷을 미리 장만한 것 밖에 안되는 겁니다.

여유가 있도록 먹을거리가 있는 자들도 그 여유분을 스스로 삭제하라는 겁니다. 세금 징수자도 그렇게 하고 힘을 가진 군인들도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축적된 힘의 누적분을 스스로 제거하라는 겁니다. 이것이 새로운 구조 안에서의 삶이다 는 겁니다. 이것은 곧 ‘독사의 자식’으로 간주하라는 말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의 다음 조치를 고대하는 겁니다. 즉 꿈을 버리고 자신에게 덮칠 일관된 하나님의 계획과 처신에 모든 것을 일임하며 사는 것이 새로운 천국 세계에 합당하다는 말입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도끼가 와서 우리의 허구적 삶을 뿌리 채 잘라버린 다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에 보물이 있어 그 보물로 인하여 주변이 새롭게 반응을 나타내는 인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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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우리교회주일설교녹취(눅 3:7-9/회개)

2010-02-09 11:16:43   녹취 : 오용익
 
20100207 우리교회주일설교/누가복음 3장 7-9절/회개(이 근호목사)

(기도)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셨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에 하신 언약이며 이삭에게 하신 맹세며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곧 이스라엘에게 하신 영영한 언약이라.”(시편 105:8-10)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계획하시고 실행에 옮기시고 그것을 성취해 나가시는 그 언약을 저희들이 알게 되었사오니 감사합니다. 부질없는 세상 변할 수밖에 없는 세상 끝장날 세상 여기에 연연해하지 않게 해 주시고 하나님이 세우신 영원한 언약의 나라 그 약속을 다시 한 번 저희들이 바라보게 하시고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귀한 시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7절에서 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91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3:7-9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방금 우리가 보았던 본문,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 사람은 도대체 누구냐? 만약에 방금 본 이 말씀을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제가 이야기 할 때 현대인들의 반응이 ‘너는 뭐냐?’입니다. ‘너는 뭐 길래 감히 남을 힐난 하느냐? 너나 나나 똑같은 인간인데 너는 왜 너 자신을 특별난 인간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너보다 하급하고 질적으로 뚝 떨어진 수준 낮은 인간으로 취급해서 함부로 인간의 존엄성을 모독해도 되느냐?’ 하고 시비 걸고 나올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오늘날 목사님들이 성경을 모를뿐더러 성경을 안다 할지라도 복음대로 교인들에게 전할 수가 없어요. ‘우리가 돈 안주면 너도 굶어죽는 인간인데 너는 뭐야?’ 이렇게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목사가 교인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주의 사자다. 나는 주의 종이다.’ 이렇게 나온다면 ‘얼씨구! 주의 종 많이 해봐라. 그래, 돈 없이 살 수 있는가? 내보낼 테니 네 식구끼리 주의 종 잘해봐라. 소꿉놀이 잘 해봐라.’ 하고 내쫒아 버릴 때……, 요새는 주의 종 같은 것이 안 먹히는 시대거든요.

악한 시대가 되어서 옛날에는 복음을 싫어했는데 요즘에는 관심자체가 없으니 이게 더 무서운 이야기 아닙니까? 남녀관계에 있어서 어떤 남자가 자기여자를 미워한다고 하면 아직도 그 남자는 여자한테 관심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전화를 해서 “오빠, 어떻게 지내?” 하니까 “누구시죠?” 하면서 잊혀 진 존재가 되면 이것은 기가 막히는 겁니다.

오늘날 이 시대 자체가 복음에 대해서 십자가에 대해서 미워하는 단계가 아니고 잊혀 진 세계, 복음 자체가 전혀 필요치가 않은 세계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 다닌다고 6, 7년 소비했지요, 청춘을 거기에 다 쏟아 부었지요, 배운 기술이라고는 신학밖에 없지요, 설교학도 공부는 했지요, 애는 셋이나 낳아놓았지요, 일만 했다 하면 아픈 게 또 목사지요, 할 수 없이 고객이 왕이지요.

원하는 대로 해 줘야지요. 복음 같은 소리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왜 전합니까? 굶어 죽으려고. 그래서 방금 읽었던 그 본문이 주의 종 입장에서 상당히 신나는 이야기거든요. 늦게 오신 분들을 위해서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늦게 오신 분들이 있어서 은혜롭게 자꾸 되새기게 됩니다. “……… 독사의 자식들아 ……….”

간단히 줄이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에게 장차 올 진노를 미리 피하라고 힌트를 줬더냐,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아니하면 너희들은 아브라함자손이 될 수 없다. 너희들이 아브라함자손 될 것 같으면 이 돌멩이라도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한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네가 회개하지 않으면 너는 불에 태워진다.’ 이렇게 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상큼하고 신바람 나는 이야기입니까? 주의 종 입장에서.

그런데 누가 먹어줘야 말이지요. ‘그만 해라. 그런 이야기 많이 들었다.’ 그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결국 제가 처음 이야기했듯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 상당히 협박으로 들리고 공갈로 들리지만 그들이 하는 이야기는 “도대체 너나 나나 똑같은데 그렇게 이야기하는 너는 댗에 누구냐? 네가 뭘 그리 잘난 인간이기에 이 시대에 우리에게 이렇게 함부로 공갈 성, 협박성 발언을 하느냐?”입니다.

이렇게 나온다면 오늘날 목사들은 깨갱, 하고 꼬리 내리고 ‘앞으로 이런 소리 안 하겠습니다.’ 하고 고개 푹 숙인다 이 말이지요. 그렇다면 세례요한같이 저주라든지, 진노랄지, 도끼가 나무뿌리를 잘라낸다, 하나님의 진노가 덮친다, 네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사기다, 라는 말을 퍽퍽 해 댈 수 있으려면 세례요한은 그냥 요한이 아니고 세례요한이 되어서 한 겁니다.

이 ‘세례’라는 의미가 아주 중요합니다. 세례라는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은 교회 나오는 이유가 자기 구원에 관심 두고 구원받기 위해서 교회 나오잖아요. 그런데 세례라는 것이 들이대 버리면 인간이 구원받겠다는 것 자체도 탐욕이 되고 죄가 된다는 것이 드러나는 겁니다. “회개하라. 그 다음에 구원받아라.” 하면 사람들은 자기 구원에 급급하기 때문에 회개하고 반성하는데 나섭니다.

그런데 그런 회개, 그런 반성 전혀 자기 구원되는데 도움 안 됩니다. 세례요한의 이 세례의 의미를 알아야 돼요. 그냥 세례요한에서 요한만 생각하면 안 되고 이 사람은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오신 특별한 사람입니다. 세례를 베풀러 왔기 때문에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것은 신경도 안 쓰고 자기 할 말을 그냥 퍽퍽 해 대는 거예요.

“옜다, 이것이 세례의 시작이다.” 이 말이지요. 요한복음 3장 2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했어요. 요한복음 3장 5절에 보면 상당히 유명한 구절이 나오는데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나라를 볼 수가 없다.”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어떤 사람이 질문하기를 “성령의 세례는 잘 알겠는데, ‘물과 성령으로’라고 해서 성령으로 거듭나면 될 문제를 왜 거기에 추가해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했습니까? 거기서 물의 의미가 뭡니까?” 라고 질문했어요. 질문 예리하지요? 답변을 할 수 있겠습니까? 성령이 최후적이라면 마지막 것으로도 충분한데, ‘육으로 난 것은 육이고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까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만 해도 충분한데 왜 주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라고 해서 물을 집어넣었느냐고 물은 거예요.

답변을 할 수가 없지요. 알아야 답변을 하지요. 요한복음 3장 27절이 바로 해답입니다.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한 겁니다. 성령만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몰고 온 물세례도 세례요한 본인의 아이디어, 세례요한 본인의 견해가 아닙니다. “이놈의 인간들을 어떻게 할까?”라고 자기가 지어낸 연출이나 퍼포먼스가 아니에요.

세례요한은 태어날 때부터 예언되어서 태어난 사람이고 선지자 계열에 있는 사람입니다. 신학교에 가서 목사 되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이 사람이 말을 함부로 퍽퍽 던지는 것은 그 사람 말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거예요. 본인이 하고 싶어서 그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세례요한이 튀려고 광야에 가고 건강식 챙기려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는 것이 아닙니다.

그 하나하나가 그 악하고 어두운 세계를 예표 하는 선지자적인 기능을 벌이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밥벌이하겠다든지 교회를 키워보겠다는 것은 복음 근처에도 안 갔어요. 그것은 더 나빠요. 질이 아주 나빠요. 복음을 전할 때는 ‘오늘로 제 인생은 끝났습니다. 저는 이제 오늘 밤에 죽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가짐 아니면 복음 전할 수 없습니다.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권리가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없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만 11절부터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이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여분의 것, 내일의 것을 사용할 권한을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준 적이 없다 이 말입니다. 나를 위한 여분의 장소를 하나님께서 허락한 적이 없다는 말입니다. 더 쉽게 이야기할까요? 이 말도 물론 어렵습니다만 소망과 희망이 달라요. 희망이라 하는 것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느냐 하면 나의 과거에서부터 미래로 이어지는 그 활주로, 그 활주로가 희망입니다.

내 과거에서 줄기차게 밀어왔던 나의 계획이 내일 그 그대로 된다면, 내일이 되면 이런 성과가 있을 것이고, 모레가 되면 이런 성과가 있을 것이라고 마음에 품는 것을 희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희망을 갖지 말라.’ 하는 겁니다. ‘네가 뭔데 함부로 그런 허구와 허상을 꾸미느냐?’ 말이지요.

그러면 소망은 뭐냐? 소망은 과거에 내가 생각했던 것에 더 추가해서 미래가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미래에서 나를 낚시 바늘로 그냥 낚는 거예요. ‘낚였어. 낚였어!’ 안 합니까? 미래에서 내려온 긴 혀, 파리 잡아먹는 곤충 이름이 뭐지요, 그 이름을 잊었는데, 그 곤충이 혀가 길 대요. 자체적으로 파리채를 갖고 있는 거지요.

유동적인 파리채가 있어서 처음에는 가만있다가 파리가 날아오면 그냥 찍어서 말아 먹는답니다. 재주도 희한해요. 소망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덮쳐서, 미래가 덮쳐서 현재에 살면서도 미래가 자기를 뒤집어 쓴 사람입니다. 그 곤충, 그냥 ‘파리말이’라고 합시다. 그 이 파리를 말았다면 그 파리는 자기 나름대로의 미래의 희망이 있는데 그 희망을 묵사발 내버리고 소망이 희망을 잠식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감아서 그냥 끌고 가는 겁니다.

“철사 줄로 두 손 꽁꽁 묶여” 가듯이 그냥 끌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희망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지만 소망은 우리에게 예상이 안돼요.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사람마다 희망 없는 사람 없어요.

‘뵈게트’라고 빵이름 비슷한 사람이 있어요. 그 사람이 지은 연극 중에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있습니다. 그 연극 때문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인데 그 작품에서 ‘고도’라는 사람이 오지 않아요. 안 오지만 기다리는 거예요. 결국 사람이라 하는 것은 희망 때문에 존재할 의미가 있고 만약 희망이 없어지면 사람은 자살합니다.

자식을 왜 키웁니까? 기대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죽어도 안 죽는 이유가 뭡니까? 내일은 좋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서. 왜 교회를 안 말아 먹습니까? 내일은 개혁될 줄 알고. 이게 바로 희망이거든요. 세례요한은 도끼로 이야기합니다. 과거로부터 차올라오는 과거의 뿌리를 잘라버리라는 겁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모르느냐 하면 그 놈의 과거 때문에, 그 놈의 과거 때문에! 왜 남성 직장인들이 직장 마치고 집에 안가고 포장마차 찾아들어서 진로 먹고 참이슬 먹고, 왜 그렇게 하느냐 이 말이지요. 담배연기 자욱한 그곳에서 돼지고기 삽겹살 구워먹으면서 왜 그런 짓을 하느냐는 겁니다. 그놈의 과거, 과거의 기억 때문에.

술 먹다가 엎어져서 울고 주사 부리고 여기 저기 웩웩 토하고, 집에 데려다 준대도 “오빠 못 믿나?” 이러는 이 전부가,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어려운 이유가 그놈의 과거 때문에 그래요. 과거가 머리에 남아서 사라지지를 않네요. 그게 나무뿌리 같아.

뿌리 없는 줄기 없고, 뿌리 없는 이파리 없고, 뿌리 없는 열매가 없듯이 사람들은 자기 좋으라고 하는 그 열매,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뭐가 되겠습니까, 자기 영광을 위한 열매죠, 그런 것을 생각하면서 과거의 모든 실패, 낙담 같은 것을 극복하면서 ‘하면 된다’ ‘의지의 한국인’ 이런 것을 해서 희망을 갖는데 우리 주님은 세례요한의 오른손에 도끼를 쥐게 해서 근질근질하게 발목에 도끼를 가져다 대면서 ‘회개 할래, 안 할래? 그 희망 접을래, 안 접을래?’ 하고 ‘안 접으면 내가 접어줄게.’ 하고 도끼로 찍어 버리는 거예요.

‘도끼로 이마 까라.’가 아니라 ‘도끼로 발목 까라.’가 되는 겁니다. 도끼로 발목을 까일 때에 그 때 번개같이 치는 말이 뭐냐 하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단다. 천국 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단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 만이 이미 구원받았고, 그리고 구원을 알고, 그리고 그동안 내 희망에 가려졌던 하나님의 소망이, 비로소 내 뿌리가 도끼에 잘린 순간, 우리 자신 자체가 도끼에 작살나는 순간 비로소 내 욕심에 가렸던 주님의 소망이 보이는 겁니다.

‘아, 이거였구나. 그래서 내 희망과 하나님의 소망이 그래서 틀어지는구나.’ 자꾸만 틀어지고, 틀어지니까 왜 내 인생 실패하게 만드느냐고 얼마나 하나님을 원망해 댔습니까? 물세례 없이 성령세례 주면 사람들은 공짜라고 주니까 얼른 받아요. 그런데 물세례를 통해서 성령세례가 오게 되면 ‘도끼로 발목 까라.’의 경로를 밟으면서 그 위에 성령이 오게 되어 있어요.

세례요한의 물세례의 의미를 제대로 아시는 분은 누구냐? 세례요한에게 제대로 물세례를 받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의 물세례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어요. 물세례 받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말은 우리도 물세례 받은 자 만이 주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가게 되고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세례요한의 물세례의 의미에서, 다른 말로 하면 도끼에 의해서 나의 발목, 나의 과거가 까인 사람만이 십자가는 내 대신 예수님이 까인 발목인 것을 안다는 말이죠.

나의 희망과 나의 과거를 고수하는 한 주님의 십자가 피가 우리에게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냥 주시는 은혜가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그 물세례 받은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세례가 오지요. 그래서 우리는 알지요.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바로 예수님의 일대기 전체를 다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음부터 십자가지려고 설친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에게 가서 세례요한한테 물세례 받음으로 세례요한이 갖고 있던 구약에 있는 모든 총정리된 것, 수능 앞두고 총 정리하듯이, 학원에서 시험 앞두고 총 정리하듯이, 선지자로부터 내려오는 구약의 모든 말씀의 총정리는 세례요한이 다 수용하고 있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갖고 있는 구약의 모든 의미를 예수님이 합류해서,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이 이르기를 ‘이로서 우리가 의를 이루는 것이 낫다.’ 해서 세례 받고 세례 받으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는데 그걸 불세례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세례, 저주의 세례를 받으시고, 저주의 세례를 받으신 바로 그분의 세례로 성령 주는 것을 가지고 성령세례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은혜라 하는 것은 소유용이 아닙니다. 항상 (도끼로) 까이는 용이죠. 아직 본문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만 본문 들어가는 것이 힘들어서 먼저 서론에서 하나 더 이야기 하고 본문 들어가겠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울산에 공부하러 가는데 최 장로님께서 운전해 주셔서 네 분이 같이 갔습니다. 가는 중에 ○○○권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최 ○○ 성도님이 대구에 계시다가 이번 화요일에 상주로 전근 가신답니다. 권사님이 걱정될 수밖에 없지요. 주말부부 해야 되니까 보통 걱정이 아닙니다. 그 때 권사님은 걱정을 했지만 저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습니다. ‘바로 저거다! 이번 주 설교의 핵심이 바로 저거다!’ 이 말이죠.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상주로 전근 가는 것과 세례요한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관계있어요. 최 지수 성도님이 상주로 전근가면 상주는 그냥 있으니까 있는 상주에 최 ○○성도님이 들어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반인들의 생각이고 세례요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우리 최 ○○성도님을 상주로 보내는 것은 최 ○○성도님이 없는 상주와 있을 때의 상주가 영적인 배치가 달라요.

아, 최 ○○성도님께 또 부담 줍니다. 지금 최 ○○성도님 안에 성령이 계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있다고 한다면, 스티로폼에 지남철을 담고 가면, 그냥 밖에서 보면 스티로폼이지만 주변에 있는 쇠붙이가 전부 다 방향을 어디로 트느냐 하면 지남철 있는 곳으로 틀게 되어 있어요. 배치가 새로운 배치가 되지요.


만약에 자기 안에 복음이 없이 상주 가게 되면, 상주라는 것이 엄연히 있고 그 상주의 분위기에 내가 맞춰야 된다, 내가 적응해야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게 보통 일반인들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성도를 상주에 보내는 것은 상주의 모든 것, 곶감부터 시작해서 사과와 그 모든 분위기가 이제 새로운 복음, 하나님께서 일을 하는 그 중심지, 예수 그리스도 그 지남철을 품고 있는 사람이 떴을 때 상주의 영적 배치가 새롭게 배치되는 겁니다.

누가 중심이냐, 누가 옴파로스냐, 누가 세상의 배꼽이냐? 복음을 가진 성도가 그 시대의 중심이 되는 거예요. 세례요한이 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지체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권사님이 순간적으로 걱정을 한 것은 ‘아이고, 상주에서 어떻게 적응하나.’ 한 겁니다. 상주에 가서 적응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상주가 골치 아파요.

상주가 이제는 최 ○○성도님에게 적응하려고 골치 아프게 생겼어요. 물론 최 ○○성도님이 그렇게까지 생각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냥 참고로 하자 그 말이지요. 우리가 세상의 중심이에요. 스데반집사가 가면 스데반집사 때문에 그 주변이 영적으로 반응을 나타나게 되어 있고 베드로가 가면 베드로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 새로운 영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사도바울이 예루살렘에 있다가 로마에 가면 로마의 영적인……, 최 ○○성도님이 이제 오셨는데 다시 해야 되는데 큰일인데……, 사도바울이 로마에 가면 인간의 주체 뒤에 숨어 있던 모든 영적인 인식들이 이제는 ‘복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하는 새로운 분위기에 들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내가 그들 분위기에 쏘리쏘리, 아부 못해서 환장했잖아요. 그들은 강한데 나는 약하니까 약한 것이 강한 것에 기죽어야지, 라는 식으로 그들에게 대충 묻어서 돈만 빼내는 것, 생존차원, 그것만 생각하잖아요. 그러나 성도 안에는 성도의 생존, 살고 죽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게 바로 복음의 비밀이에요.

본문에 들어가면 구조는 이렇습니다. 본문이 어렵기 때문에 구조로 그냥 설명해 드릴게요. 세례요한이 하는 말이 세례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올 때 ‘감사합니다. 오셨군요.’ 이렇게 해야 될 것인데 오히려 벌컥 화를 냅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세례를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도대체 뜻이 통하지를 않습니다. 왜 뜻이 통하지 않느냐 하면 진노 받을 인간들 같으면 아예 세례요한이 그 사람들과 만날 일도 없어야 돼요. 그냥 멀찍이 지켜보면서 ‘에이, 진노 받을 놈들 저주나 받아라.’ 하고 관찰하고 있기만 하면 되지 무엇 때문에 세례를 받으라고 외치느냐 말입니다.

외쳤으면 인간적으로 ‘아이고, 잘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래야 될 것인데 세례를 받으라고 해놓고는 온 사람들보고 하는 말이 “누구야? 누가 너희더러 진노를 피하러 오라고 했어. 응?” 하고 막 나무라는 식으로 하니까 이것은 오라는 말인지 오지 말라는 말인지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여기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베푸는 것이 너희를 구원하기 위한 용도로써 세례를 베푸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2천년 기독교 모든 교회 역사가 다 잘못된 이유가 사람을 꾀어서 구원시키겠다는데 초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연유로 모든 신학과 설교가 다 틀린 거예요. 세례요한은 그런 뜻이 없습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의 계획이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할 뿐이지 ‘누구누구 구원받으세요.’ 하는 것은 자기소관이 아닙니다. 세례요한도 자기 맘대로 못해요. 자기 집안 누구누구 그런 것도 없어요. 세례요한은 그냥 하나님의 뜻만 펼칠 뿐이지 꼭 누가 구원받아야 된다는 생각은 세례요한 속에는 일체 들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간들의 종교욕구를 근본적으로 비켜가는 거예요. 사람이 구원 받겠다, 하는 것도 제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소망이 아니고 그 사람의 희망에 해당되는 거예요. 사적이고 이기적인 희망이 되는 겁니다. 희망과 소망은 노선이 갈라져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희망은 도끼에 나무뿌리가 잘라져야 돼요.

그렇다면 세례요한이 이야기하는 것은 소망에 의해서 낚인 자, 파리말이 곤충이든 개미핥기든 그 긴 혀가 날아와서 낚아채는 사람, 낚아챈다는 그 작업을 세례요한은 그냥 소개만 할 뿐이에요. 그 일을 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오셔서 아버지가 나에게 보낸 사람만 마지막 때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린다.’고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 손 든 사람 구원해줄게, 라는 그런 법칙은 없어요. 그걸 한마디로 말해서 제가 아까 이야기 했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지 구원받고 싶어 환장해서 구원되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명도 없어요. 그냥 하나님의 은혜가 덮쳐서 구원받는 거예요. 소망이 와서 덮치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구원받는 것이 소망이야, 희망이야? 확실히 해.” 하는 그 문장이 뭐냐 하면 “누구야? 당신보고 여기 오라고 누가 이야기했어? 이 저주받은 인간들!” 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럴 때 “구원 좀 받으려고 교회 왔는데 기분 되게 나쁘네. 나, 가겠소.” 하면 세례요한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가세요. 제발 가세요.” 천국 가지도 못할 인간이 세례 받을 뻔 했다고, 큰일 날 뻔했다고 하면서 가시라고 하는 거예요. 아까 ○○○ 집사님이 그래요. “전도가 뭡니까?” 전도는 천국 못갈 사람 그냥 집에 가시라고 하는 것이 전도라고 했어요. “집에 그냥 가세요.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 것이 전도라고 했어요.

정 있고 싶다면 정 오고 싶다면 그 다음 말에 대해서 우리가 감당을 할 수 있어야 돼요. “이 독사의 자식들아, 세례받기 전에는 독사의 자식들인 줄 몰랐지. 하지만 엑스레이 기사 같은 나(세례요한)에게 왔기 때문에 내가 한평생 살아온 것이 뱀의 새끼로 마귀새끼로 살아왔다는 것이 노출될 겁니다.” 라는 말을 세례요한이 하고 있는 겁니다.

말을 아주 함부로 퍽퍽 해요. 우리 정 낙원목사님 글에 보면 이렇게 해 놓았어요. 욕이 막 나옵니다. 이 ××가 막 나와요. 그걸 보고 사람들이 대박이라고 하면서 댓글 달아놓은 것을 봤는데 설교 멋지다는 거예요. 설교할 때 말고 설교 문에 노골적으로 ㅅ자 들어가면서 ‘××’ 하는 것이 있어요. 그렇게 하니까 깜짝 놀란 거지요.

그렇다면 그들이 오기 전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고 한 겁니다. ‘아브라함자손’은 약간 있다가 설명을 드리고요, 아브라함자손이라고 여겼던 그 사람을 세례요한은 뭐로 보느냐 하면 독사의 새끼들, 뱀의 자식들, 악마의 자식들이라고 이야기한 거예요. 아브라함자식이라고 생각한 것이 악마의 자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자손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에게 세례 받겠다고 나온 것이 뭐가 잘못인가? 이것이 궁금하지 않습니까? 거기에 나온 말이 뭐냐 하면 ‘너희들이 아브라함자손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 돌멩이라도 아브라함자손이 되게 한다.’ 라고 했어요. 자, 이 말이 어려워요. 집중력을 가져야 합니다.

돌멩이라도 아브라함자손이 될 것 같으면 사람들, 독사의 새끼들은 놓아둬 버리고, 길가에 널려 있는 그 많은 돌멩이가 좀 많습니까? 광야에서 세례를 주지 말고 ‘돌멩이야, 돌멩이야, 너희들을 아브라함 자손 되게 하마. 어서 사람 되어라.’ 하고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이죠. 제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아브라함자손이라고 우기는 너희들이 아브라함 자손 될 것 같으면 그 정도 같으면 돌멩이로도 그렇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듣던 아브라함 자손은 기분 나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삐져서 “그럼 나 교회 안 나올래. 세례요한 그럼 네 맘대로 해. 돌멩이 주워서 맘껏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하나님하고 둘이 잘 먹고 잘 살아. 우리는 교회 안 올게.”라는 말을 할 수가 있다 이 말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은 돌멩이 가지고 아브라함자손 만드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그게 목적이라면 아예 세례 하지도 않았지요. 그럼 세례는 뭐냐? 돌멩이 같은 인간을 아브라함자손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을 아브라함자손 되게 하는 거예요. 자칭 아브라함자손이라고 우기는 인간들,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들, 목사이기에 구원받는다는 인간들, 그것은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들입니다.

장로이기에, 집사이기에 하나님의 자손이라고 우기는 인간들,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입니다. 돌멩이와 독사의 자식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독사의 자식들은 자기주관이 뚜렷해요. 그런데 돌멩이는 툭 건드려도 그냥 있어요. 주체가 없어요. 다시 말해서 뭐가 안 되는가? 돌멩이는 회개가 안 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을 아브라함자손 되게 하는 것은 뭐를 축출하기 위함인가?

회개라는 것을 축출하기 위함입니다. 회개와 하나님의 거저주신바 되는 세례와의 만남, 오늘 정말 어렵습니다. 집에서 한 번 더 들으세요. 회개되지도 못할 로봇을 세례 주는 것이 아니고 로봇보다 돌멩이보다 더 못한 인간을 천국백성,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는 그 와중에서 밑바닥까지 내려간 인간을 천국까지 올리는 그 과정전체에 하나님의 세례, 하나님의 행하심이 거기에 개입되는 겁니다.

그렇게 개입되어 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느냐? 자칭 아브라함 자손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주체가 단단해서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밖에 없기에 거기서 자꾸 행함을 발휘합니다. 발휘하는데 여기에 물세례가 주어져 버리면 이것이 둘로 갈라지게 되어 있어요. 주체가 둘로 갈라집니다. 균열, 깨어짐입니다.

무슨 뜻인지 모를 것 같아서 다시 상주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최 ○○ 성도님이 상주로 전근 갑니다. 대구에 계시다 상주로 가게 될 때 겁이 덜컥 나지요. 상주가 어떤 동네인지, ‘나’라는 인간이 거기에 적응을 제대로 할지, 거기서 상급자에게 예쁨을 받을지, 거기서 일 잘해서 승진을 할 수 있을지, 하나님께서 왜 거기에 보내시는지 여러 가지로 복잡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본인도 듣고 계시지만 복잡하다는 것은, 지금까지 대구에서 잘 살아왔던 주체가 하나였잖아요. 하나였는데 주께서 상주로 보내면서 여기서 주체가 벌써 갈등이 일어나지요. 갈등이 일어나는데 ‘그래, 대구에서도 잘했으니 상주에서도 잘하자.’라고 한다면 그 주체가 안 갈라지고 그냥 상주라는 세계에 적응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최 ○○성도님 안에 복음이 있다면 상주 자체를 복음화 시키기 위해서, 야, 참 거창하다, 최 ○○성도님 가정에 비상이 걸린 것이 아니라 사실은 누가 비상 걸린 겁니까? 상주시 그쪽이 비상 걸렸어요. ‘상주시야 기다려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쪽이 복음의 지남철, 하나님의 자석을 들고 가니까 그쪽의 영적구조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렇게 되려면 최 ○○성도님의 주체가 옛날에는 자기중심으로 살다가 이제는 ‘복음 때문에 내가 움직이는구나.’라고 주체가 둘로 갈라져야 되겠지요.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인다.’ 이 말은 ‘옛날 그냥 사는 식대로 편하게 내 몸 하나 살면 돼.’라고 생각했던 그 주체는 물속에 빠져서 죽어야 되는 겁니다. 물속에 빠져 죽어야 돼요.

‘이 정도 살면 아브라함자손이고 이렇게 살면 심지어 독사의 자식이겠어?’라고 했던 그것, 그것이 나중에 보니까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차원에서 산 그 전부가 다 독사의 자식이었어요. 주체가 분열되면서 주체가 하나였는데 두 개가 되었지요. 두 개기 때문에 하나 죽어도 괜찮지요. 희망으로 다져진 주체는 죽고 소망으로 잠식당하는 주체는 영원히 같이 물세례 받는 주님과 함께 새로운 주체로서 거듭나게 되고, 그것이 바로 물세례와 연결되어 있는 성령세례로 같은 한 노선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비가 올 때 차창을 닦는 윈도우브러시가 초당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면서 닦지요. 비가 계속 내릴 때 휙 하고 한번 닦고 지나가면 잠시 보이다가 또 계속해서 빗방울이 떨어지면 또 안보이지요. 우리 인간개체라는 것은 그런 물방울 같아서 주님의 복음을 날마다 가려요. 교회 왔다가 문 열고 나가면 또 ‘주여, 뭐 먹고 살까요?’

맨 날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주여, 뭐 먹고 살까요? 그래도 교회는 다녔으니 아브라함 자손이 맞지요?’ 합니다. 자기는 독사의 자식이면서 그렇게 하니까 날마다 윈도우브러시를 통해서, 회개를 통해서 너의 생존으로 제발 복음 좀 가리지 말라고 휙휙, 닦아 주는 거예요. ‘네 희망 때문에 내 소망 다 가린다.’ 하는 거예요. 주님의 소망이 우리의 사적인 희망 때문에 다 가려져 있는 겁니다.

사람의 희망이라는 것은 두벌 옷 입고 있으면 세벌 옷 입고 싶고 세벌 옷 입고 있으면 네 벌 옷 입고 싶고, 자꾸 입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먹는 것도 창고에 쟁여놓고 싶고, 세리는 자기 월급보다 더 강탈하고 싶고 군인은 받은 임금보다 더 많이 빼앗고 싶고, 그런 것이 죽 나오거든요. 그러니까 자꾸 여분의 것을 갖는다는 말은 과거로부터 이어진 이 몸을 미래까지 유지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것을 가져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에 대해서 10절부터 보면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 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여기 보면 재미있는 것은 12절에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합니다. 말이 이상하지요. 세례 받으러 왔으면 세례 받으면 되는데 세례를 받고자 하면서 또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하지요. 세례 받으면 그것으로 끝나지 하기는 또 뭘 합니까? 그러니까 이것은 ‘세례 받는 것으로는 안 되고 거기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까지 해야 구원받는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그게 아니고!

'~not ~but' 용법입니다. ‘~아니고 ~이다.’ 용법입니다. 이미 세례를 받은 자는 추가해서 착한 일을 하라는 말이 아니고, 자기를 헌신하고 아이티에 성금 보내라는 말이 아니라 자기에게 소망이 구조로 내려앉아 버리면 관심사가 나의 희망이 관심사가 아니라 주께서 당겨주는 소망이 관심사가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전에 내가 생존차원에서 관심을 두던 것이 다 허망한 것이고 허상이고 환상인 것을 본인이 날마다 알게 되는 겁니다. 집이 네 채에 부동산이 15만평 있는 이것이 전에는 나의 노후대책이며 자랑거리였지만 그게 자랑거리가 아니고 그것이 있으나 없으나 관계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되었다.’라는 것을 아는 그 재미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 재미가 온유와 화평, 양선, 형제우애가 되는 겁니다. 그것이 성령의 열매이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 진짜 세례 받은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열매가 되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아브라함 자손의 의미가 뭐냐?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빠졌던 그 구멍에 같이 합세한다, 이렇게 보면 되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여러 가지 일이 이제는 완성상태에서 만들어진 그 자리가 있어요. 아브라함 자손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리가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그 자리가 행함의 자리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 믿음의 자리에요. 아브라함은 자기가 행하지도 않은 것을 풍성히 얻고 살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또 어려운데 쉽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먼저 사마리아 여인의 과거를 들춰냈어요. “당신의 지금 있는 남자가 처음이 아니지요?”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까 “다섯 명 남자가 지나갔고 지금 여섯 번째 남자 사귀고 있구나.”라고 했지요.

‘복음을 이야기하면서 날 믿어라.’ 하면 될 텐데 왜 과거를 다 끄집어내느냐 이 말이지요.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리에요. 과거라 하는 것이 그냥 과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과거라 하는 것은 뭐든지 내 노력과 내 행함으로 내 미래를 개척한다는 그 버릇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과거입니다. 그랬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거예요.

‘행한 것도 없이 경건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착한 일 한 것도 없이 착한 사람 되는 것이 은혜로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거예요. 그게 아브라함의 자리입니다. 교회 몇 년 다니고 직분 받고 그런 것 다 소용없어요. 목사된 것 아무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자리 바깥에 있으면 ‘내가 구원받고 내가 착하려면 내가 나에게 무슨 행위를 가해야 된다.’는 겁니다. 구제를 하든지, 자기 자신을 절제를 한다든지, 자기 자신을 관리를 잘 한다든지, 교회를 나와 준다든지 뭔가 자기에게 조치가 가해져야 새로운 작품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자기자리에요. 아브라함의 자리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자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인데 그 은혜 안에 뭐가 들어 있습니까?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인간이 하나님의 의인의 자리에 가려면 이미 아브라함 자리를 만드신 그 의가 현재 우리에게 먼저 찾아와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독사의 자리를 파쇄 해버리고, 부정해 버리고, 부수어버리고, 그것을 저주해버리고 미워하는 작업이 일어나는 사람…….

다시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행위를 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원치 않는 바꿔치기, 주체의 바꿔치기, 주체를 균열시키고, 균열된 하나의 주체를 죽이고 나머지 주님의 소망의 주체를 자꾸 살려내고 ‘주의 은혜로만 되었습니다.’라는 말을 자꾸 살려내는 그런 작업이 이루어질 때, 그런 것이 계속 이루어질 때 그런 사람만이 바로 ‘내가 돌멩이보다 더 못한 독사의 자식이요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라는 것을 고백해 내는 아브라함 자리에 해당되는 아브라함자손이 된다는 말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세례라 하는 것은 요한 자신의 사적인 견해가 아니라 세례요한,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안에서 일을 했어야 될 그 분이 오셔서 뭐라고 했느냐? ‘세례 줄게’라고 했을 때 ‘지금 잘 하고 있는데 세례 받으면 더 훌륭하게 되겠다.’ 싶어서 왔는데 그게 아니고 ‘이 독사의 새끼들아.’ 하고 욕만 실컷 얻어먹은 거예요.

‘돌멩이가 너희보다 낫겠다.’고 한 거예요. 그런 소리를 듣는 순간 주체가 한 개였다가 갑자기 둘로 갈라지면서 ‘맞구나. 내가 내 행함으로 구원받겠다고 하는 이 자체가 뱀의 새끼들, 악마의 자식들이나 하는 짓이고 그냥 주께서 내 안에 작용하시는구나. 나는 내 안에 지남철이 있는데 나는 그냥 스티로폼인데 중요한 것은 이 스티로폼이 아니고 주님의 복음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 살아가는구나.’ 할 때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자리요 자손이라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에 이것이 은혜로 주어지며 은혜로 주어진 이상 옛날 우리가 세상 살던 그 방식대로 내가 나에게 힘을 가해서 새사람 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오히려 내가 독사의 새끼라는 것이 부각되는 식으로 하나님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저희들 은혜로 알았습니다. 이게 바로 구원받은 아브라함 자손의 자리인 것을 잘 알아서 이 모든 은혜가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에서 나왔다는 것을 증거 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