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교회/오전설교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누가복음 4: 1- 4)

김 대식 2010. 3. 8. 11:41
예수님과 마귀의 만남

2010년 3월 7일                                본문 말씀: 누가복음 4:1-4

(눅 4:1, 개정) 『예수께서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요단 강에서 돌아오사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성령에게 이끌리시며』
(눅 4:2, 개정)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더라 이 모든 날에 아무 것도 잡수시지 아니하시니 날 수가 다하매 주리신지라』
(눅 4:3, 개정) 『마귀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
(눅 4:4, 개정)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기록된 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였느니라』


성경에 성령이라든지 마귀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현실에 있지도 않는 존재라고 일축합니다. 맞습니다. 하늘이 닫힌 상태에서는 그들을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누가복음 3;21에 보면, 하늘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거기서 성령님이 내려왔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에게 임했습니다.

이때부터 성령님이 임한 예수님이 가시는 길마다 숨어있는 악마와 귀신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비로소 성령이라든지 악마나 귀신은 비현실적 존재가 아니라 실제라는 존재로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과 더불어서 말이지요. 그렇다면 그 악마는 어디있습니까? 귀신이나 악마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만 반응을 나타냅니다.

누가복음 2:35에 보면,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등장하셔서 앞으로 하실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들고 사람들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그 칼로 모든 이의 마음을 찢는 일을 하십니다.

여기서 인간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게 됩니다. 사람들 속에는 ‘애벌레 자아’라는 것이 듬뿍 담겨있습니다. 애벌레 자아는 한 두 마리가 아닙니다. 여러 마리입니다. 이 자아는 성장해서 의식의 표면을 이르러서는 자아가 됩니다. 주체가 됩니다. 이 애벌레가 자아가 한 둘이 아닌 이유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태들에 대해서 각자 종류가 다른 자아들이 반응을 나타내게 됩니다.

즉 애벌레 자아를 둘러싸서 감추고 있는 것은 ‘막’인데 사람들은 흔히 이 막을 자신의 전부라고 남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닌다는 것이 평생이 두꺼운 막을 더욱 두껍게 만드는 작업에 불과합니다. 속에 애벌레 자아는 구더기처럼 오골오골거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검으로 이 막을 찢게 되면 그 동안 곱게 숨어있던 모든 괴물같은 애벌레 자아들이 한꺼번에 쏟아져서 예수님에게 대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 인간들로부터 피해를 봐서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야지만 이 세상이 확연하게 악마가 지배하고 통솔하는 세상인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만 구원되는 겁니까? 하나님에게 인간은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습니다. 오직 아담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그 한 사람인 아담의 자손들일 뿐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상대해도 그 아담으로 상대합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과실을 절취한 그 아담 말입니다.

이 아담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속성을 담아서 다루십니다. 그것이 바로 창세 전에 사랑받기로 작정된 사람과 미움받기로 작정된 사람으로 나누는 겁니다. (로마서 9:13) 그 나누는 방식이 바로 하늘이 열리면서 내려오신 그 성령이 임한 그 분이 하신 말씀을 근거로 하여 나눕니다. 그래서 참되고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라면 사람들이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는 말을 하지를 못합니다.

오로지 ‘들을 귀 있는 자’만 들리는 말씀을 합니다. 이 점을 알기 쉽게 하는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화투장 48장을 미리 방바닥에 한꺼법에 다 깔아놓습니다. 그리고 과연 그 화투장이 ‘사랑받기로 작정된’ 화투장인지 아니면 ‘미움받기로 작정된’ 화투장‘인지 하는 것은 ’구원될 자‘들만 알아먹는 내용을 예수님을 통해서 증거케 하시는 겁니다. 

즉 그 화투장에 그려져 있는 그림을 나오도록 들추는 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이미 확정된 인생이며 팔자대로 갈 수 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우리 성도의 그림에는 반드시 말씀이 그려져있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그림이 있습니다. 물론 아담의 욕심의 그림도 함께 그려져있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를 좋아하는 그림이 함께 들어있는 겁니다. 그 그림이 빠져있는 성도란 없습니다. 교회란 스스로 자신을 새 사람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창세전의 운명을 확인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씀으로 산다’가 들어 있는 않는 사람은 오로지 ‘떡으로만 산다’로 일관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그것은 말씀의 구조가 그 사람 속에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아벨의 죽음 이후에 땅의 저주를 뿜어내게 되어있습니다. 노아 홍수 직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모든 것이 악하기 때문에 내가 정결한 짐승의 죽음을 통해 인간들의 악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를 주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무지개가 보여주시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그 은혜는 지상의 ‘피 값’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피 값’이란 이미 사람들에게 물어보지도 않으시고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피를 보시고 햇빛과 공기와 비를 내리시면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살게해주고 계시다는 겁니다. 만약에 분식집에 들어가서 만두를 먹고 그냥 가면 주인이 ‘만두 값’달라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만두 값’입니다.
그런데 이 ‘피 값’에 해당되지 않는 존재가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귀신이요 악마입니다. 악마가 아담의 세계를 점령하고부터는 다른 방식의, ‘산다’를 인간에게 강요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힘’으로 사는 겁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40일 동안 굶게하셔서 힘이 쏙 빠지게 하셨습니다.

애벌레 자아가 추구하고 소망하고 노리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막 너머로 튀어나와 힘을 있는대로 긁어모아 힘있는 자아를 구축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악마는 힘이 다 빠져버린 예수님에게 다가가서 힘을 축적하라고 유혹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면 된다”는 구호는 즉 “할 수만 있거든 힘 모아라”는 구호입니다. 힘으로 전도해서 목회성공한다는 겁니다. 그게 현실적으로 교회가 살아남기 위해 유일한 비책이라고 우십니다. 악마의 외침이요 울부짖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에게 생명나무로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삶, 즉 ‘힘으로 사는 삶’을 선전하고 전도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겁니다. 들을 귀 없어도 누구나 수긍이 되는 이야기로서 교회를 키우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말합니다. “십자가만이 생명의 힘‘이라고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말씀 가지고 쉴새없이 쑤심을 당하고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회투패 그림 안에 예수님의 피로 적셔져 있음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안이 악마의 소굴임을 알고 예수님께서 왜 말씀으로 십자가만을 언급하시는 그 취지를 헤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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