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3 : 기적과 잃어버림의 특이성 (메모)
마가복음 3: 기적과 잃어버림의 특이성
(기적이란 죽음과 결부 되면서 증거되는
잃어버린 자를 찾는 방식이다.)
2010년 8월 25일 수요일 오후 7:00:34 김대식
기적이란 곧 죽은자입니다 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결국 기적 보다 쪽팔리는 것이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기적을 쪽팔리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신을 더욱더 부각 시키는데 활용한다.
은사도 그러하다
은사란 거룩이라는 선물이다.
거룩이 우리에게 있을 수가 없기 때문에 거룩이라는 선물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거룩을 통해서 자신이 죽은자임을 아는 것이 거룩을 제대로 만난자의 특징인데
도리어 거룩으로 자신을 더욱더 돋보이게 하는 역할로써 발판으로 삼고자 하는
두 양상이 드러난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기도하는 집이다.
기도란 난 죽어도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것이다. (금식도 같은 의미)
울부짖음이란 난 죽었군요 더 이상 살 자격조차도 없음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그래서 기도와 결부된 구약의 의미는 곧 옷을 찢음이다.
거룩을 만나고 보니 자신의 옷은 찢겨져야만 하는 더러운 옷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마귀를 개입 시킨다.
찢겨질 옷에 대한 미련과 고소자 꺼리로 없어져야 할 것을 가지고 시비거는 멍청한 자를
철저하게 개입 시킴으로써 보이지 않는 것을 감추인 옷을 드러내신다.
그것이 바로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일부러 마귀의 시선에 포착토록 했다.
마귀란 법에 달인이다. 송사꺼리를 찾으라고 일부러 법을 줘버렸다.(스가랴서)
마치 일부러 간음하는 여인을 바리새인 눈에 띄이도록 절대로 놓치지 못하도록 포착케
현장에서 즉결심판이 이루어 지도록 하셨다.
예수님에게 딱 걸린 줄도 모르고
마귀는 좋아라고 예수님 앞에 당당히 내세운다.
마찬가지로 기적이라는 것은 인간은 죽어 있다 라는 것을 기정사실화 시키는 의미로써 등장한다.
그러나 기적이라면 기적에 익숙한 기적을 포착할줄 아는 기적을 믿을 줄 아는 것을
역사적으로 답습하면서 기적이라면 누구보다 우리들이 믿을 줄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등장한다.
바로 유대인이다.
바로 이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유대인 보라는 듯이 기적을 행하신다.
유대인이라면 기적의 달인들이다.
기적이라면 모세까지 들먹이면서 자신들의 믿음의 정당성을 추구한다.
역사화 되어 있고
객관적이며
그런 정통에 하자가 없다는 것에 뿌듯해 하는 신념이 가득하다.
그런 유대인에게 예수님은 보라는 듯이 기적을 행하신다.
즉 기적 행위가 아닌 기적을 통한 죽은 자를 뽑아 내신다.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자를 뽑아내신다.
예수님이 심은 씨앗은
어떤 땅에 가장 잘 어울리는 가?
예수님이 베푸시고 행하시는 십자가의 복음은 그 기적은
누구에게 가장 적합한 기적들인가?
바로 잃어버린 자 이다.
이것이 예수님 자신의 이미지 곧 특이성이기 때문이다.
99마리 양은 잃어버림이 없기에 찾는 목자가 필요가 없다.
그러나 단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에게는 찾는 목자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목자의 특이성 곧 찾으심에 부합되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린 양은
예수님의 숙제 대상이 된다. 목적이 된다.(이번 대구 강의에서도 언급 됨)
이 특이성 자체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이런 언약의 약속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다.
그것을 우리가 요한복음과 사도행전을 공부하면서
처음자리 라고 했다.
첫사랑이라고 했다.
그런데 참 희한하게도 유대인들 본인들이 이 처음자리를 무지 무지 싫어라 한다.
첫사랑의 그 처음 자리를 죽으라고 싫어한다.
마가복음도 세례요한의 세례로 출발하는 이유는
기도가
금식이
죽음의 자리를 말하듯이
세례 또한 죽음으로써 시작 한다는 것이다.
왜 죽음일까?
죽음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이라는 것을 말한다는 자체가 거짓이기 때문이다.
또 죽음이란 아브라함이 거쳐서 알게된 믿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을 통해서만 아브라함은 미래의 예수님 곧 믿음을 보게 된다.
이삭의 죽음이 아니면
제물 됨이 아니면 볼 길이 없다.
그래서 믿음을 말하기 위해서
죽음을 시작, 개시하는 것이다.
죽음 속에서 도출 된 것이 믿음이기 때문이다.
의인은 죽어도 산다 라고 했다.
곧 의인은 죽음 속에서 도출 되는 것이다.
결국 기적이란 살아 있음에서 도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일부러 죽은 자를 찾아내는 방식이 기적이다.
이것을 요나의 표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유대인 곧 소위 기적의 달인
기적에 대해서는 쫌 안다고 자부하는 자들이
기적 카면 우리다 우리에게 물어보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대조적으로 기적을 시작 하신다.
죄인을 부르러 온 기적인데
의인을 찾는 기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