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특이한 선물(자식:약속)을 뜯어 먹는 부모?

김 대식 2010. 8. 26. 14:25

특이한 선물(자식:약속)을 뜯어 먹는 부모?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요 21장)

2010년 8월 26일 목요일 오전 10:19:47  김대식

 

어제 교회로 가기 전에 두 시간 정도 어머니랑 나눈 대화가 너무 너무 중요하다 싶어서
까먹기 전에 내용을 메모하고자 한다.


어무이! 내가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께요 들어보세요

어떤 사람이 밭농사를 지어서 옥수수를 키우는데 그 옥수수 알갱이가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생명에 대한 신비로움과 감사가 넘쳐났는지?

그런데 또 옆에 있는 농사꾼도 자기 밭의 소출로 인해서 그 생명의 신비의 놀라움으로
열매의 경이로움의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 똑같이 하나님에게 감사를 하고 경탄의 소리를 외친다.
(이 모습을 같이 밭농사 지었을때에 어머니로부터 보았던 표정이다. 그런데 인정머리라고는 털끝만치도 없는 내가 그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투덜거렸는지?)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무이 두 사람에게 아름다운 장미가 피어나고 그 두 장미로 인해서 두 사람다 똑같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신비로움에 찬양을 하고 있는데

하고 있는데!!~~~

난데없이 하늘에서 씩씩 거리면서 하나님이 찾아와 아냐~~ 아니란 말야 ~~라고

한 쪽 사람의 장미를 베어버리고, 말라 비틀어 죽게 만들어 버리면
얼마나 황당 시츄에이션 인가?  멍 때리는 것인가?

그 감사와 신비와 경이로움에 한껏 도취되어서 그 옥수수 알갱이 하나 하나를 만지면서
아기피부처럼 보들보들하게 느껴지니 여자로써는 마치 아기를 낳은 기쁨 보다 어디 더한 것이 있겠습니까? 

강호동이 나오는 무릎팍 도사에서 최진실이가 나왔는데 이미 얼굴이 우울증에 걸린 모습으로 모든 이야기가 자기방어기제로 가득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최진실이가 얼굴이 밝았던 것은 나 같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우지? 나와 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되는데? 또 아프면 어떻게? 아이를 낳는 고통은 그야말로 죽을 것 같은 고통인데? 온갖 걱정을 하는 가운데 실제로 너무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은 고통이 너무 너무 심했는데? 막상 낳아보니? 그 생명의 신비에 뿅 가버려서 그렇게 아프던 것이 싹 다 잊혀져 버렸다는 것이다. 여자에게 허락된 창조자의 기쁨이 그런 기쁨이기에 싹 다 잊고도 남을 정도로 너무 너무 기쁨이 아픔을 이길 정도로 크다 라는 것을 너무 너무 기쁘게 최진실이가 이야기 했다.

그런데 그런 기쁨을 한순간에 짖밟아 버리고 빼앗아 버리면 어떻게 되는가?

좀 전 까지만 해도 그렇게 기뻐서 감사가 넘쳤는데
세상을 모두다 아름답게 보고
이명박이 사대강 어떻고 저떻고
북한 핵미사일 어떻게 저떻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그 생명을 안은 기쁨
본 기쁨
생명이 들낄랑 말랑 움찍 움찍 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그야 말로 뿅 가버린다. 아무 소리도 듣기 싫다
그 아기의 새근 새근 거리는 소리만 듣고파서
머리를 파묻고 얼굴을 들이대며 조그마한 소리도 놓칠까봐 쫑긋 귀를 세운다.

그 아기를 그 생명을 빼앗아 가버리니
얼마나 황당 할까?
그 다음 부터는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다 덮쳐져서
좀전까지 누렸던 그 기쁨을 찾을래야 찾을 길이 없다.

하늘에서 유치스럽기 짝이 없게도
그 큰 하나님이
조그마한 그것도 한 여자의 기쁨을 그렇게 못때빠지게 싹 빼앗가 가 버린다.

아냐 아냐 그것은 감사가 아니야
기쁨도 아니야
그건 너가 착각한 하나님이야 라고

하나님 혼자 애민하게 달려들어서 기여이 아니다 라고 알려준다.
그러는거 아니야 그러는거 아냐 그러는거 아니래두


그런데 왜 나에게만 일까?

나와 저기에 있는 사람 둘 중에 꼭 나일까?

저 사람도 똑같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생명의 경이로움에 감탄해서 찬양하고
나와 똑같이 외치고 똑같이 감사하고
마치 쌍둥이처럼 똑같이 고백하는데

왜 저 쪽이 경탄에 마지 않는 생명은 가만히 놔두고
내 생명은 쳐 버리는 것일까?

저 쪽 장미는 멀쩡하다. 내가 감탄해 하는 내 장미는 밟아버린다.

왜 일까?

이것을 어머니 한테 말하니? 다른때 보다 더 쫑긋이 귀를 기울인다.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이 이스라엘 이라고

이스라엘은 남들과 똑같이 그저 살고 있을 뿐인데
하나님은 만큼은 이 이스라엘을 가만히 두질 않는다.

자꾸 자신의 특이성을 부여한다.

난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고 그런 하나님이란 없다고
그러니 니가 외치는 하나님은 순 엉터리 라고

자꾸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그 하나님이 그 하나님이 아니다고 하나님을 쳐 버리니
이스라엘은 미칠 지경이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 (딴 하나님, 낯선 듣도 보도 예상치도 예상도 안되는)
곧 하나님의 특이성을 심으시는데 있어서

이 이스라엘은 그 특이성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다른 시선을 가지기 싫어도 가질 수밖에 없는
특이성이 덮친다.

그것을 언약이라고 한다.
그것을 말씀이라고 한다.

그 약속의 말씀은 창 3장 15절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키는 것이다.

얼마나 특이한가?

뱀의 후손은 또 뭐고
여자의 후손은 또 뭔가?

 

또 어머니 한테 반복적으로 설명을 했다.

어무이 잘 들으세요

두 사람이 있는데 둘 다 하나님에게 생명의 신비에 대한 놀라움을 감사하면서
찬양 봉사 사랑 이웃실천 둘 다 하고 있는데

두 사람 중에 유별나게 한 쪽 사람만큼은 가만히 두질 않는겁니다.
유치하게 그 큰 하나님이 개미 만한 크기의 인간을 그것도 한 쪽 인간을 단순히 개미 취급하지 않고 억수로 괴롭힙니다. 괴롭히는 자 전능자 로써 말입니다.

전능자란 유치하다는 뜻입니다. 크고 크고도 큰 하나님이 조그마한 비일락 말락한 그 한 쪽 인간을 괴롭힐려고 온 우주를 동원해서 장난치는 것을 전능자 라고 합니다.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렘 31:15, 개역)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어느 정도로 유치찬란 한지?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이네요 양의 탈을쓴 무리 가 한 말인데

전능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특이성인 약속
그 약속만 빼돌릴려고
일부러 지옥에 있던 마귀들을 다 풀어 버립니다.

마귀들은 이 아기 예수님을 죽일려고 끝까지 잡을려고 그렇게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놓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전능자 하나님의 뜻대로 마귀는 약이 바짝 올랐던 겁니다.
그 약올라 버린 이 마귀들이 그만 두 살 밑으로의 아기를 다 죽여 버립니다.

마치 애굽 나라를 일부러 만들어 버리는 식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런 모세 시절에 대한 자부심을 유대인들은 절대로 포기 할 수가 없는 거죠,

그랬다고 우기는 당사자들이 정작 모세 노선은 예수님이 그것도 아기 예수님이 가고 있고
자신들은 모세 노선은커녕 약이 잔뜩 오른 애굽의 강퍅과 동일하게 작용하는 겁니다.

아무튼

마귀들이 놓쳐버린 것으로 약오른 그 분풀이 안색이 변함 그 화풀이를 두 살 밑으로의 아기를 죽여버림으로써

아기 엄마들은 기가 막히게 된 겁니다.

누가 태어났든 누가 그 태어난 아기를 죽이려 했든 이명박이가 4대강을 우찌했던
북한이 핵 미사일 전세계 기후가 온난화로 이상기후현상이 어떻든 저떻든 상관없이

그저 눈 앞에 있는 그 생명체에 그 신비로움에 모든 것을 뿅하고 도취 되어 있는
그 아기를 손에 쥔 기쁨에 모든 것을 까마득 하게 잊고 있을때에

저 쪽 아기는 멀쩡한데
이스라엘만이 안고 있는 아기 생명체는 홀라당 말라버린 무화과나무처럼 허무하게 죽어버린 겁니다.

기가막힌 일입니다.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 부어버리는 특이성입니다.

마리아가 남자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가운데 단지 혼인하기로 약정이 되어 있는 약혼자가 요셉이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난데 없이 성령에 의해서 덜커덕 임신을 하게 되니

이스라엘 남자들이 과연 가만히 있겠는가 하는 점입니다.

마리아 본인도 남자에게 안기든 남자를 안아보든 해야
아 이렇게 결혼이고 한 남자의 아내가 되고 아이도 낳겠구나 라는 식일텐데
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그냥 배가 불러오고 그냥 아기가 저절로 생겨버리니
황당 합니다.

본인도 황당한 판국에
덜커덕 약속이 자기 뱃속에서 자리잡고 있을 뿐인데

사람들은 그런 시선이 아닙니다. 법의 시선을 전제로 하고
법의 시선을 깔고서 봅니다.

처녀가 애를 낳아도 할 말이 있을낀데
쟈는 뭐꼬? 뭐가 저리 배를 당당하게 내미노?
뭐 잘낫따고?

누가 잘낫따고 캅니꺼?
배를 내밀고파서 내밉니까?
남자도 안아 본적도 없고, 안긴 적도 없는데?
난데 없이 배를 불러 오는데
내 보고 우짜라 말입니까?

하소연 해 본들 소용 없다.
이미 법의 잣대로 본 이상
캐봐도 더더욱 자기무덤 파는 꼴이다.

이런 법과 사회와 하나님의 질서를 무너뜨릴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것은
거룩한 법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도 때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해야 한다.
이 집중력에 요셉도 별수 없다.
종용히 조용히 그저 끊고자 할 뿐이다.

지가 별수 있나?
어차피 그 조직 사회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사회에서 허락한 생존만을 누리며 살 뿐인데?

그런데 참 기가 찰 노릇이다. 이제 나이 19? 18? 스무살도 안 된 처녀일 것인데?
무슨 운명의 장난이 어린 처녀? 소녀라고 하기 뭐하고? 처녀라고 뭐한?
어린 예비 신부를 저렇게 짖 밟아 버리는가?

그러나 하늘은 그것도 관심 없다.
오로지 그건 아냐 그러는거 아니야 라고

너거들이 생각한 하나님을 보란 듯이 마귀취급해 버린다.

그래서 마귀를 풀어버리고서
아기 예수님을 놓쳐 버린
그 약이 잔뜩 올라버린 마귀들이 2살 밑으로 아기를 다 죽였을때에

비로소 특이성
곧 구별성
차이성을 드러낸다.

구원받으라고 주는 차이성 구별, 분리, 선택이 아니다.

착각마라
약속이 심겨졌다 라는 것이다.

그 약속이 뭔데?


창 3장 15절

그게 뭐 어쩌라고?

(창 3:15, 개역) 『내가 너(뱀)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주님의 숙제이기에 어느 누구도 관심이 없다.
이스라엘이라고 해서 관심 있는가? 없다.

목사? 아예 관심도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목사로 세운 것이다.
목사란 자기 밖에 모르는 자들이다. 그 직을 이용해서 등쳐 먹을 뿐이다.
자기 스폰서나 찾아 돌아다닐 뿐이다.

우리는 원래 관심 없다.

그래서 약속은 약속 스스로 숙제를 하신다.
언약은 언약 스스로가 이루지
인간은 도리어 철저한 배제성이다,.
그 배제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스라엘 이다.

얼마나 특이한가?

이스라엘의 특별성은
바로 이 전쟁을 약속이 벌리는 전쟁을 보고
그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라고만 외칠 뿐이다.

외친 것 밖에 없는데 졸지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졸지에
발꿈치가 상하듯
그 상한 자리에 참예가 된다.

마리아는 율법에 의해 돌삐를 맞아야 할 판국이고
약혼자로부터 종용히 짤리는 끊어짐을 받아야 할 판국임에도 불구하고

하늘의 묵시의 구조를 보고 뿅 간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하나님이 약속의 구조대로 창세전의 예정된 계획대로
마귀를 풀어 버리고 그 마귀들이 아기 예수님을 잡을려고하다가
아기 예수님을 빼돌려버리는 것을 통해, 예수님을 놓쳐버리고서는
약빨이 올라 강퍅성을 살인의지를 두 살 밑의 아기에게 퍼부음으로 말미암아
아기 엄마들은 위로 받기를 거절 당하지만
그것이 바로 아기 예수님을 빼돌린 언약의 완성에 참예 되는 방식인
약속이 심겨진 특이성이다.

안그러면 자기 아기 안고 정신팔려 있는데
누가 하늘의 전쟁이 이 땅에 가시화 되는 것을 볼수 있겠는가?

이 하늘의 계획과 묵시가 벌리는 전쟁을 보고
마리아는 비로소 기도 찬양한다.

그 전쟁 이 땅에 실현 시켜 주십시오.
반드시 현실화 시켜 주십시오.

말씀의 현실화 이다.

말씀이 땅에 부어짐 이다.

땅이 흔들리고
감당이 불감당이다.

그러나 그것 만이 생명이다.
그것 보라고
남들이 격지 않는 것
곧 자기 아기의 죽음을 통해서
시선이 인자가 달린 죽음을 보게 된다.

뱀에 물렸다. 죽게 되었다.
그러나 장대 높이 달린 인자만을 쳐다 보기만 하면 낫는다.

위로받기를 거절 당한 아기엄마들은
이 특이성에 동참 된다.
아기들이 죽어가면서 날 쳐다보지 말고 저 아기를 쳐다보라고 한 것이다.
죽은 아기들은 선지자다.

마귀가 놓쳐버린 아기를 쳐다 보라는 것이다. 나 말고 저 아기?
자기 소유의 아기가 있는데 미쳤다고 남의 소유의 아기를 보겠는가/
못 본다.
그래서 하나님만이 빼돌린 아기를 쳐다볼려면
빼앗긴 자들(잃어버린자, 죽은 자, 위로받기를 거절 당한자, 전능자가 괴롭힌 자)
이것이 특이성이다.
그 빼앗긴 자만이 하나님이 보내준 아기를 보게 된다.
쳐다 보게 된다.

보게 되니 비로소 상한 모습임을 알게 된다.
자신이 상해 버린 마음 보다
그건 상한 축에도 들지 않는다.

그 상한 심령을 보게 된다.
(어제 설교에 일부러 구원의 조건에 들기 위해 가난함을 인간이 추구하니까 그 보다 하나님 자신이 가난해 버리니 그 거짓 가난이 다 발가벗겨진다. 그렇게 발가벗겨지는 조롱꺼리가 되는 것이, 주의 목전에서 범죄한 자임을 비로소 상한심령을 보고서 입이 쑥 들어간다. 그래서 다윗은 금식 기도 회개 다 때려치우고 잔치를 벌린다. 세례요한 때까지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지만 예수님이 온 이상 먹고 마신다.)


그래서 어무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마귀를 풀었는데
마귀가 상하게 하는 교회가 없다면 그거 가짜 교회다고
마귀가 시기하는 성도가 없다면 그거 가짜 성도다고

인간이란 그 교회의 성격에 맞출려고 적응할려고 할 뿐이지
교회 조차도 약속에는 관심 없다.

그래서 그런 관심 없는 교회에 은사를 퍼붓는다.
은사란 선물인데
그 선물은 몽둥이다.

서로 서로 삐치고 싸우고 치고 박고 시장난장판 보다 더 추한 본색들이
발가벗겨지듯이 드러나도록 은사라는 선물과 직분을 주시는 것이다.

왜?

어차피 약속에는 관심 없으니까
목사든 사모든 장로든 권사든 집사든 청년이든 학생이든 아이든

비로소 약속 스스로가 움직여서 자신의 숙제를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처럼 타민족이 아닌 이스라엘 내부에서 못볼 것 안볼 것 모조리 그 썩은 것을 다 끄집어 낸다.

약속 이라는 특이성 때문이다.
약속 때문에 약속만 관심 있지

이스라엘 이라는 약속을 담는 그릇은 관심 없다.
그릇은 그저 그 약속의 특이성을 발현하는데
이스라엘 내부에서 그 발현의 반대 세력과
똑같이 원치도 않지만 자신도 모르게 숙제함을 당해 버려서
반대파의 반대를 할 수 밖에 없는 남은자로써 실행케 된다.

그 사람 자체가 약속의 현실화 로써 말이다.

그럼 그 사람은 구원 받겠네?
어허 껍데기가 구원 받아서 뭐하나?
그런 독자성은 없고
알고보니 뒤에 오실 예수님의 노선을 미리 예고편으로 방영하는 소리일 뿐이이다.
소리는 예고편 끝나면 없는거다.
본편이 상영 되면 뒤로 물러나는 누락 될 1회용 소모품이다.
소모품 된 것으로 영광인줄 알아라 이것들아.
교회는 누락이다.

아무도 원치 않는 그 약속 창 3장 15절의 양상ㅇㄹ
이스라엘 내부에서 발현 한다.

딴 민족을 마당으로 하지 않는가?

때려죽어도 안한다.

그 약속에 양보 없는가?
양보 없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내부에서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있고
두 패로 갈라지는 것도 이스라엘 내부에서만?

그렇다

아 그래서 일부러 가라지를 냅 뚜는 것인가?

마귀를 일부러 풀어버린다니깐?

왜 자기 아들만 빼돌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남의 아이는?
죽든 말든 상관 안한다.

에이 너무하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그 죽어간 아이들이
빼앗김을 당한 아이들이 외친다.
날 쳐다보지 말고 저 아기 쳐다 보라고
죽은 아기의 엄마들이 위로받기를 거절 당했다면
과연 누가 그런 소리를 한닥 듣겠는가?
물론 안 듣는다?

그러나 죽은 아기의 소리는 듣는다


믄 소리인가?
자꾸 귀신 시나락 까먹는 소리 좀 하지 말라

무슨 소리를 하는가?

그래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무이
부모라는 것은
자식을 뜯어먹으라고 주신, 하나님의 선물인 자식을 뜯어먹는 자입니다.

엥?

성경에서 말하는 부모란
죽었다가 살아난 경험 곧 홍해라는 죽음을 통과한 세례 받은자
죽다가 살아난 십자가를 지는 자를 말합니다.

죽어도 소용 없습니다. 다시 살지 않으면 말이죠.
다시 살아도 소용 없습니다. 죽지 않으면 말이죠.
나 다시 살아난 부활 한 자다 라고 우겨도 확인 할 길이 없으니
정 확인 할려면 죽여보면 압니다. 부활 하는지 안하는지?
의인은 믿음으로 다시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런 부모가 없기 때문에
부모 라고 우기면 곤란 합니다.

그래서 반대로 부모 만들려고
이미 그 이전에 이런 사건이 벌어집니다.

부모랍시고
아이를 낳았습니다.
자기가 낳을수 있는 능력으로
그 가능성으로 아기를 낳고 부모 노릇을 하갰노라고
너는 모태 신앙이야 그래서 넌 내 아들로써
나의 믿음을 이어야 해

나에게 찾아오신 언약의 하나님의 그 언약을 이어야 해

그래서 낳았습니다. 얼마나 이쁘고 귀엽고
넌 선택 받은자야 내가 알고 있는 하나님
말씀
계시
약속
언약
모두다 부어주마
전수해 주마

기업으로 주마


그런데 아브람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아니야 아니야 그러는게 아냐 그러는게 아니야

그래서 자신이 생명이랍시고 그 생명에 자신의 믿음을 담고자 시도 했던
그 그릇을 가짜 임을
약속을 절대로 담을 수 없음을
그 반대의 그릇을 주겠다. 생명을 주겠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나의 능력이 행함이 실천이 믿음이 절대로 개입 할 수가 없는
도리어 철저하게 배제 된 모습으로만 일관 합니다.

얼마나 얄미운지
그런 불가능성에 내가 개입이 안된다는 이유로 피식 웃게 됩니다.
부정성입니다.

올치

드디어 성공이다.

그 부정성이 비웃음을 담고서
필히 담고서
조롱함을 담아서 나오는 그릇이다.

그래서 넌 비웃었지만 난 웃음을 준다 라고 해서

이삭이라고 합니다.

이 이삭을 더 기가 막히게
줄때는 언제고 이제는 바치라고 빼앗겠다고 합니다.

사람 시껍합니다.

또 제가 이렇게 말하니 바치면 되지 뭐 어렵냐? 라고
실제로 어떤 전도사가 자기 아들을 이삭처럼 제물로 바친 놈이 있었습니다.
종교는 사람 다 배립니다. 미친놈이죠.

절대로 바치면 안됩니다.
솔직해야 합니다. 차라리 솔직하게 못 바치겠다 라고 버팅겨야 합니다.

문제는 행함의 개념이 아니라.
이삭입니다.

이삭이라는 아들은 그런 인간이 손 댈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는 겁니다.
약속 덩어리 인데

이삭이 보여주는 것은
꼭 희생을 통해서 미래의 예수님의 죽음을 보여준다는 것에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새언약입니다.
제가 여기서 이것을 얼마전 글에 반칙이라고 했습니다.
미래의 것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는 반칙

자 그렇다면 지금 현재 이삭의 희생  으로만 끝나면
반칙이 아닙니다.
순탄한 겁니다. 더 나은 제사가 아닌 그냥 제사입니다.
그것은 약속이 아니라
특이성이 아니라
순리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아까 말한 두 사람 중에 그냥 평범하게 하나님에게 감사,
생명의 경이로움에 그저 감탄만 하는 자로서의 분류일 뿐입니다.

그러나 잃어버림이라는 이스라엘의 특이성은 예수님 자신의 숙제요
자신이 친이 자신의 특이성을 심어 넣고 찾는 식이기 때문에
잃어버린 당사자는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애달아 하는 자는 예수님이지 우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예수님 자신의 숙제를 자신이 푸는 겁니다.
우리 숙제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숙제함을 당할 뿐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내가 너를 얼마나 찾았는줄 아니 내가 널 잃어버려서 얼마나 애가 탓다고?

뭘요 저는 지금 여기서 가만히 있었을 뿐인데요?

아냐 아냐 그러는게 아냐 그러는게 아니야

내가 찾았어 내가 드디어 죽었다가 살아난 자식을 찾아서

라고

잔치를 벌리고 금가락지 끼우고
좋은 옷을 입히고(그리스도의 옷) 살진 송아지를? 살진 소를 잡고

그런데 이것이 반드시 누구를 자극 하는 식으로 행해진다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미래완료가 덮쳐지지 않은 자에게는
도저히 아버지의 그 사랑이 반드시
거부성으로써 나타나는 방식의 자극입니다.

그래서 마귀를 일부러 푸시는 겁니다.

마귀를 보란 듯이 빼돌렸다
마귀는 자극을 받아서 약빨이 잔뜩 오른 겁니다.

그러니 마귀가 하는 짓은 뻔합니다.
발꿈치 상하게 하는 짓 외에는 할게 없습니다.


여기서 마귀는 괜히 그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바람에
그 상한 자리 에
이스라엘이라는 상한 심령 때문에 졸지에 생겨버린 특이성
접붙임이 마귀 덕 택에 생겨버리는 겁니다.

라마에서 아기 엄마들은 비록 위로받기를 거절했지만
그 아기들의 희생 덕분에
마귀들이 아기들을 죽이는 것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빼돌려 버린 그 약속의 특이성에
참예 당해 버립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상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리아처럼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현실화 시키는 그 전쟁을
봤다고 구원 되는 것도 아니요
그것을 볼 줄 아니 구원 마땅하지 않냐 라는 것도 의미 없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관심 사는
자기 아들 빼돌리기입니다.

그것은 마귀만을 의식했다 라는 겁니다.

은사를 왜 주실까요?
은사를 주시지 않으면 마귀의 개입을 모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거쳐서 자신을 보라는 겁니다.

탕자를 볼려면 맏아들을 거쳐서 봐야 이해가 되듯이 말입니다.
거지 나사로를 볼려면 부자를 거쳐서 보라는 겁니다.

제가 어머니 한테 이렇게 말했습니다.

광명한 천사가 마귀인줄 어떻게 알수 있습니까?
알라 치면 천사처럼 행세 하는데?
도통 알길이 불가능 하다고

그런데 언제 그 마귀가 화를 내는가?

약속이라는 특이성 곧 잃어버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마귀가 비로소 화를 낸다고
특이성 (죽은 모습, 상한 모습, 잃어버린 모습, 그것도 그냥 한쪽이 아닌 상대적인 저쪽은 안 그런데 이쪽은 이렇게 졸지에 된 상대적인 대조로써 말입니다. 일부러, 철저하게, 유치스럽기 짝이 없게, 일부러 자작극, 얄미운 농락, 장난 )

그런데
아무것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긍휼을 받는
그 특이성에
마귀는 견디질 못합니다.

그래서 약빨이 올라 그 광명한 가면을 비로소 벗고
본색을 드러내는 겁니다.

뭐야 어디갔어?
에이 놓쳤잖아

어이구 분해라

대신 발꿈치 라도 상하게 하자?


라고 생겨 버린 티오의 자리에

이스라엘이 접붙임 당하는 겁니다.

원가지가 실패하면 죽은 가지

죽은 가지가 원래 이스라엘의 처음모습입니다.

그 짤려진 틈에 우리가 나무에 접붙임 당하는 겁니다.

그 짤려진
상해버린 그 틈 사이가 벌어진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 입니디.

이것만을 예정 한 겁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말도 안되는 소리죠.

그 예정은 마귀가 없으면 이루어 질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 특이성

지울 수 있으면 지워 보세요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사도들의 선포의 특징이

자꾸 찔림이 되는 소리만 골라 합니다.

너희가 죽인 예수
주가 되었단다

그 나사렛 예수가 주가 되었단다.

반드시 그 상함을 앞장 세워서
그 상함의 자리에 그 틈 사이에 접붙이고자
상한 그 자리에 접목시키는 겁니다.

내가 죽였는데 도저히 불가능 합니다.
내가 상하게 했는데 안될겁니다.

내가 죽인 예수님 인걸요?
내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님인데요?

그러니까 주 죠

베드로에게 찾아온 주란
일부러 그런 과거를 형성한 주다.

주님이 일부러 만들어낸 상처요
주님이 일부러 만드신 꿰메심이다. 평탄케 하심이다.

그런데 그 과거가 대수냐? 주님이 넘지 못할 산을 평탄케 하셨다.
주님과 베드로와의 사이에 가로막힌 그 막힌 담을 주님이 부셔버렸다.

베드로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신의 되도 않는 신념으로 다가갈려는 숙제를 펼칠려고 했다.

주님이 세우고 주님이 부시심으로써 자유가 되지
내가 세우고 내가 이룸으로써 성취함으로서 믿음으로써 자유란 도리어 옭아매는 올무다.

내 양을 먹이라

바로 이런 내용을 가지고 이 특이성을 먹이라 라는 것이다.
너가 먹은 것을 먹이라 라는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다.
다들 어떻게 뜯어먹어? 안돼 안돼
그러나 먹지 아니하면 상관이 없다.

발꿈치 상한 그 상한자리에 접붙임 당하지 않으면 소용 없다.
원가지도 그 특이성을 거부했다.
처음자리 첫사랑 빈자리를 눈에 보이는 보편성으로 갖추어 버렸다.
주님과 나만의 특이한 비밀을
개와 돼지에게 던져 버렸던 것이다.

둘 만이 아는 비밀인데?

그리고 내 양을 치라 라고 했다.
은사란 치는 것이다.
이것이 나올때까지
그 특이성이 아니면 사생아 다.

주님과 상관이 없는 자다.

치면 칠수록 그 입에서 먹은 것이 나온다.
마신 것이 나온다.

주님의 살과 피가 맞군요 맞아

그래서 치라고 주는 선물들이 자식이다.

자식은 부모를 치는 선지자다. 계시 전달자 이다.
물론 특이성의 자식만 그렇다. 항상 그 특이성은 보편성을 갖춘 자식을 동반하면서 말이다.
그러니 한 뱃속에 두 자식이 있는 셈이다.
이스라엘 내부에 두 이스라엘이 그래서 두 열매에 두 나무가 드러나는 배경이 된다.

또 다시 내 양을 먹이라 라고 하신다.

(요 21:15, 개역)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 21:16, 개역)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 21:17, 개역)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세 번씩이나 물으시니 근심이 된다.
즉 내 쪽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주님이 아십니다.
맞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려고 내 숙제로 다가간 것은
꼬끼오 세 번에 날라가 버렸습니다.
내가 무시했던 그 꼬끼오
보잘 것 없는 미물로부터 지적 당했습니다.

그런 내가 사랑할려고 했던 예수는 가짜였고 그런 우상을 만든 나는 사탄이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줄 내가 알고 주님이 아십니다.

그 발꿈치 상한 그 틈사이에 접붙이시는 성령의 일이 만드시 육의 일과 대비 되면서 나타날줄 주님이 숙제를 이루실 줄 압니다.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오매
즉 마귀까지도 풀어버리시는 줄 아시오매

마귀 보란 듯이 이루시는 그 약속에 양보 없으심을
그 십자가의 사랑에 한치 오차 없으심을
잃어버린 자를 찾으시는 그 특이성에

제가 당해 봤잖습니까?

누가 나를 위해 갈꼬?

네 맞습니다. 제가 이 내용을
이 사랑을
먹이겠습니다.

(요 21:18, 개역)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요 21:19, 개역)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래 너 죽어라


특이성 이다.

죽은 자를 찾겠다는 취지로 세 번식이나 물으니 근심하며 답한다.

죽이겠다는 것이다.

죽음이 아니 고서는 접촉점
접붙임

그 상한 자리
발꿈치 상한 자리에

마귀가 고맙게도 마련해 준 그 자리에 들어갈수가 없다.

그것을 주님이 너에게 실시하겠다 라고

실시해도 되겠니? 라고 물으신다.

아이고 마!

내가 반대한다고 그만 두실 분 입디꺼?

내가 도망치고 멈춘다고
포기하실 분입니까?

위로 받기를 거절한

(마 2:18, 개역)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어미 라헬의 애곡

그 상한 심령도 이루시는데

독생자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롬 8:32, 개역)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지독한 사랑이신데

누가 말리겠습니까?

마귀 보란 듯이 하십시오.


아들

선물이다.

상한 자리를 만들어 주는

그래서 아들 땜에
아브라함은 믿음이
미래 완료의 예수님의 상한심령이 덮친다.

아들이 그거 보여줄려고
그 특이한 약속을 보여줄려고

희생 제물이 된 웃음 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