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사장 책임제와 이웃사랑
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오전 12:55:05 김대식
사실 낯선 표현을 들어버리면 그 용어에 의해 사로잡혀 버린다.
결국 인간이란 언어에 종속이 되어 있고
생각에 종속 당하며 살고 있지
도리어 생각을 발설하고
언어를 발설하니
생각과 언어를 주도한다고 착각한다.
한 예가 바로 몇 년전에 복음의 말씀을 국어문법에 종속시키지 않는다고 반발하는 자들을 보고 진짜 상식이하 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무리! 양의 탈을 쓴 무리들에게 전교회가 농락당하는 것도 더 웃꼈다.
그렇지만 그들이 활동해 주지 않으면 복음이라는 보석은 개나 소나 다 던져질테고
발에 밟혀 무가치하게 될 것이니
보석 스스로가 빛을 내기 위해서 희소가치로 남는 것이다.
주가 믿음이시다 라는 말귀를 못 알아먹으니까
국어문법을 거슬렸다고 우긴다.
결국 그들은 국어문법으로 사기를 쳤다는 반증이다.
(창 4:7, 개역)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왜 이 대제사장 책임제 라는 용어에 사로잡혔는고 하니
처음 들으니까 그런 것이다.
사실 하나 하나 따지고 보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어떤 연결고리를 몰고 온다는 점에서 낯설다. 아주 아주 낯설다.
결국 그 어떤 연결고리가 같이 몰려 오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수련회 녹취록을 읽다가
법과 몸의 만남이 바로 대제사장 책임제 라고 했다.
왜 법과 몸이 만나야 하는가?
그것은 이웃사랑 때문이다.
여기서 이웃사랑이란 다른 몸이 있다는 것이다.
이웃사랑이 목적 개념이 아니라 다른 몸이 목적이다.
결국 다른 몸은 무조건적인 이웃사랑을 펼치는 몸이다.
선악의 몸 처럼 따져서 따져서 나오는 조건부의 몸이 아니다는 것이다.
(눅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즉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에 대한 책임성 부여이다.
그 몸은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몸이다.
그리고 둘째로 남의 타인의 몸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명화 곧 법화 되어 있다.
즉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이 몸을 볼수가 있다.
먼저 법에 이해를 깨뜨려 보자 바닥을 쳐 보자.
법이란 법이 출현함과 동시에 법의 상대방을 일방적으로 설정해 버린다.
그렇다면 그 상대방은 어쩔수 없이 그 법의 테두리에 갇혀 버린다.
이것이 바로 법의 폭력성 또는 가해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폭력적이다 가해적이다 라는 부정적인 표현 때문에 간과 해서는 안되는 의미가 있다.
바로 타인이다.
타인이라는 몸을 보기 위해서는 법의 테두리에 갇혀짐을 당하는 법이 동원이 된다.
결국 법이란 타인 때문에 동원이 되는 것이다.
타인이 없다면 법이란 있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웃이 생겨버리면 법이 동원이 된다.
그리고 그 타인을 통해서 자아 혼자만의 몸이 아닌
집단적인 사고 속에서의 법을 의식해야만 하는 것이다.
각자의 개별성을 하나로 묵는 조직성 곧 한 개의 아담으로 묵는다.
그렇기에 반드시 법이 개입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법이 하나 하나의 개별자를 하나로 묵는 대상으로 삼음과 동시에 그 대상이 되는 각자의 자아는 이미 자신만의 법을 가지고서
이런 하나로 묵을려고는 법을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법은 어디서 온 것일까?
법이 개입 하기 전에는 죄 라고 규정할 수 없다.
그렇다고 법이 없다고 해서 인간은 죄다 죄 아니다 라는 것이 없었는가?
있었다
분명히 있다. 흔히 양심이라고 한다. 그럼 그 양심은 어디서 왔는가?
놀랍게도 몸 이다.
그 몸이 뭐 어째서?
법이 된 몸이다. 그래서 법이 외부에서 오기도 전에 이미 양심에 눈 떠 버린 몸이
놀랍게도 스스로 죄를 규정한다.
그것이 바로 벗었다는 부끄러움 이다. 수치다.
결국 법이란 이미 선악을 알아버린 몸으로써 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자 그렇다면 다른 몸을 말하는데 있어서
법의 테두리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두 법을 하나로 묶는다.
그리고 다시 그 두 법을 영원히 갈라버린다.
이것은 곧 두 몸을 말한다.
두 몸의 영원한 결별을 위해서 법이 동원이 된다는 뜻이다.
도대체 어떤 몸이 길래 두 몸 두 몸 이라고 하는가?
한 몸으로 다 묶었다면서?
그렇다 한 아담으로 묶는다.
그러나 그 한 아담으로 묶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마지막 아담을 말하기 위함이다.
그리거 이 두 몸을 갈라버리는데
한 아담의 몸은 법에 저촉 받는 몸으로써 영원히 갈라버리고
또 다른 마지막 아담의 몸은 법에 저촉 받지 않는 몸으로써 영원히 갈라버린다.
선악으로 인해 부끄러운 수치를 느낀 몸은
이제 갈라져 버려서 영원히 영원히 봉합될수 없는 극과 극으로 벌려버리는 취지로써
이 두 몸을 말하기 위해 법이 동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란 무엇인가?
죄의 소원이 있는데 그 소원이 뭘까?
놀랍게도 봉합이다. 하나 되기 이다. 일치성 추구이다.
그러나 반대로 아들의 소원은 뭔가?
바로 그 따위 봉합을 시도하는 법 또는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들의 소원이다.
도리어 이 두 몸을 영원히 영원히 갈라버리는 것이 바로 아들의 소원이다.
자 그럼 죄의 소원은 곧 죄의 사명이다.
죄가 펼치는 사명이 있다.
일치성이다.
어떻게 해서든
신이든 국가든 하나님이든 예수든 종교든 민족이든 뭐든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여서 유비쿼터로 하나 되기가 바로 죄의 소원이다.
(나는 공각기동대 라는 온갖 철학사상을 다 동원해서 만든 영화를 보고 오로지 네트워크 형성에 최종목적을 두는 것에 깜짝 놀랬다. 이것이 영화화 된 것이 바로 메트릭스다.)
어떤 흡집이든 어떤 상처든 뭐든 봉합해 버리는 법
또는 몸
이것이 가인이 추구하는 제사 이다.
모든 아담의 제사이다.
자기 종교도 못 버리면서 타인의 종교와 하나 되자 라고 모순의 모순을 극복하고
하나 되고자 하는 봉합술. 그런 몸 그런 법이다.
그러나 여기에 아들의 소원은 도리어 영원히 갈라버리도록 쭉쭉 찢어버리고
서로 원수 되고 하고
서로 언어가 안통하도록 언어 흩어버리고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도록 만들어 버리는
가인의 제사를 파토 나게 하는
더 나은 제사이다.
뭐 하나 아쉬운 것이 없고
뭐 하나 결핍난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봉합술을 시도한다는 자체가
결핍채우기에 나서는 것이다.
더 나은 제사는 이미 넉넉한 완료이기에
아쉬울 것이 없는데 네트워크를 따로 구축하고자 하는 저 발상에 걸림돌이 될 뿐이다.
이미 다 나은 것이 있기에
다른 것을 일체 허용치 않고자
찢고 빼앗고 터트리고 파토나게 하는 폭력성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사실상 누가 더 폭력적일까?
뭐 하나 아쉬울 것이 없는 넉넉함에
인간은 돕는 배필 조차도 하나가 아닌 타인으로 취급해 버린다.
그리고 그 타인을 이용해서 타인을 준 하나님이라는 타인 조차도 개별자로 봐 버린다.
(하나님이 주신 여자 때문에?)
(창 3:5, 개역)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창 3:6, 개역)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창 3:7, 개역)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 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창 3:8, 개역)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개역)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개역)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개역)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개역)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이유는 자신이 하나님과 같이 된 이유도 있지만 즉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더 큰 이유는 자아라는 개별자가 자신에게 지옥의 몸으로써 자리잡아버려 왕노릇을 해 버리기 때문이다.
즉 몸이 이제는 지옥의 소원을 펼치는 몸이기 때문에 두려움과 공포가 엄습하여서
모든 것을 자기의 죽음과 연관 시켜 버리는 법적 신체에 갇혀 버렸다.
없는 자아라는 허구에 자아가 갇혀버렸다.
죄의 소원이란 뭔가?
마귀는 이미 너무 너무 잘 알고 있다.
선악을 아는 그 고유권한에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할 만큼 하여 일치될 수 밖에 없음을
선악나무를 내어 놓으면 백이면 백 손아귀에 쥘 수 밖에 없음을
예수님 자신의 피조물에 대한 책임에 흠집이 나는 범법 상황을
하나님 스스로가 조작한 범법임을 말이다.
이것이 마귀 생각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서 이 선악사상을 표출 시키고
그것을 배경으로 깔고 하나님나라를 증거하신다.
이 선악사상을 카페트로 깔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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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9월 10일 금요일 오후 2:34:41
이것은 선악의 몸에서 생명의 몸으로 교체시키고자 함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라 하지말라로 선악의 몸의 한계점을 찍고
그 종말로 인한 더 이상의 갱신이 필요없는 생명의 몸을 곧 다른 몸을 말하기 위함이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은 이 다른 몸을 말하기 위한 그림자에 불과한 장막이다.
떠날 것을 염두한 몸이다. 다른 몸을 말하기 위한 몸이다.
의를 말하기 위한 죄수복이다.
뭘 해도 죄가 되는 신체 뿐이지만
비록 죽는 몸 이지만
죽는 몸으로써 안 죽는 의의 몸을 외친다.
자기 몸도 아닌데 그 몸이 진짜다 라고 외친다.
남의 몸을 말이다.
그것은 그 남의 몸이 자기를 위해 목숨 버린 몸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듣던 말던 사랑은 그런 이유로 폭력적이다.
더 이상의 저항을 불가능케 하니 이것보다 더한 불공평한 폭력이 어디 있으랴?
그래서 법의 테두리로 온다. 이미 인간 자체가 법적인 신체로 인간 몸이 법이 되었기에
진짜 법에 한번 당해봐야 가짜 법에 대한 비늘이 벗겨졌다.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행 9:18, 개역)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침례를 받고』
눈이 밝아진 이유는 볼 필요 없던 것을 보게된 선악렌즈를 낀 것이다.
그러니 뭘 봐도 선악으로만 보인다. 하라 하지말라 로만 보인다.
이제는 그 렌즈비늘이 벗겨졌다.
비로소 제대로 보인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몸의 시선으로 보게 된다.
반대로 보인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더냐?
십자가와 꾀는 것들만 보인다.
(갈 3:1, 개역)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괜히 밝아져서 모든 것을 선악으로 봤고
그래서 모조리 다 내가 곧 법인 내가 곧 하나님인 내가 곧 왕인 시선에서 본 것이다.
그래서 그 따위 왕 뭐가 대수인지 한 번 되어 보라?
되어 보니 아무것도 아니였다 허구였다.
그것이 다윗이 격은 상한심령의 시선으로 새롭게 된 비늘벗겨진 시선이다.
솔로몬은 왕 되어 보니 별거 없었다. 도리어 허무 허무 허무 뿐이다.
(시 51:1, 개역)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시 51:2, 개역)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시 51:3, 개역)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시 51:4, 개역)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시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시 51:6, 개역) 『중심에 진실함을 주께서 원하시오니 내 속에 지혜를 알게 하시리이다』
(시 51:7, 개역)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를 씻기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시 51:8, 개역) 『나로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듣게 하사 주께서 꺾으신 뼈로 즐거워하게 하소서』
(시 51:9, 개역)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시 51:10, 개역)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시 51:11, 개역)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시 51:12, 개역)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3, 개역)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시 51:14, 개역)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시 51:15, 개역)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시 51:16, 개역)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시 51:17, 개역)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시 51:18, 개역)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시 51:19, 개역)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도리어 그 가짜 왕의 비늘을 벗기고자
누가 대신 죽었다는
왕 되어 보고 (부정성) 그것이 얼마나 부정한가를 아는데 까지
바닥을 쳐 보는 것이다. 그 바닥 뒤에 누가 있다.
옆에서 대신 질타를 받는 그 책임성 고엘성 허물에 대한
대신 모든 죄값을 치르는 책임
그것이 바로 사랑이요
이 사랑 보다 더 강한 더 폭력적인 더 가해적인 것이 어디있는가?
(렘 20:7, 개역)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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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강-삼하19장11-15(왕의귀환)-2sa100815
왕의 귀환
2010년 8월 15일
본문 말씀: 사무엘하 19:11-15
(삼하 19:11, 개역) 『다윗 왕이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너희는 유다 장로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왕의 말씀이 온 이스라엘이 왕을 궁으로 도로 모셔오자 하는 말이 왕께 들렸거늘 너희는 어찌하여 궁으로 모시는 일에 나중이 되느냐』
(삼하 19:12, 개역) 『너희는 내 형제요 내 골육이어늘 어찌하여 왕을 도로 모셔 오는 일에 나중이 되리요 하셨다 하고』
(삼하 19:13, 개역)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대신하여 항상 내 앞에서 군장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삼하 19:14, 개역) 『모든 유다 사람들로 마음을 일제히 돌리게 하매 저희가 왕께 보내어 가로되 왕은 모든 신복으로 더불어 돌아오소서 한지라』
(삼하 19:15, 개역) 『왕이 돌아와 요단에 이르매 유다 족속이 왕을 맞아 요단을 건네려 하여 길갈로 오니라』
육적인 사실이 어떻게 영적으로 전환되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육에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반대로 영으로 시작해서 영으로 가는 것도 환각이나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실제로 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영적 세계인 부활의 세계에 진입하게 된 그 경로를 우리 성도의 입에서 고백하게 하십니다. 다윗의 왕 자리는 분명 육적인 자리맞습니다. 하지만 그 육적으로만 알고 그 자리에서 어떤 영적 지혜가 작용하게 될까요? 모세 시대에 있어 이스라엘이 나라 체제는 왕 체제가 아닙니다. 대제사장 책임제였습니다.
왕이 처음부터 필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곧 육적인 현실에서 영적 세계로의 진입은 오로지 대제사장을 통해서 보여지는 하나님의 계시로 국한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대제사장이 제대로 유지되면 나라가 제대로 유지되고 대제사장이 허물어지면 그 나라도 허물어지는 나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왕이라는 직위가 따로 필요했을까요? 원래 이스라엘의 왕은 보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지금도 이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그 분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보이지 않으신 왕께서는 제사장 구조를 통해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계셨습니다. 이 의도는 백성들이 채택한 의사가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아무런 재산이 없습니다. 단지 백성들이 십일조를 바쳐야 살아갈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쉽게 말해서 백성들이 하나님을 안 믿는다고 선언해 버리는 순간, 제사장은 굶어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백성들은 자신들이 힘들게 애써서 번 돈에서 10%를 제사장에게 상납하는 겁니까?
원래 그 약속의 땅이란 사람들이 들어갈 수 없는 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 날개 위에 얹어서 자기 백성을 그 땅에 들여놓았다고 하십니다. 즉 인간의 힘으로 정복되거나 침범될 장소가 약속의 땅이 아니라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일방적 사랑으로 그들을 그 땅에 쏟아놓았으니 그 땅의 주인은 오직 한 분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세금내는 것이 당연합니다. 남의 땅, 임대해서 농사짓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있어 품군입니다. 십일조를 낸다는 말은, 나머지 아홉은 농사꾼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실은 나머지 90%도 자기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몽땅 다 하나님 것인데 단지 하나님께서 봐주어서 10%만 받겠다는 겁니다.
이 은혜가 유지된다고 제사장들도 얼마든지 “하나님 덕분에 삽니다”는 말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땅에 살던 백성들이 이웃 이방민족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법으로 존재하는 나라들을 본 겁니다. 얼래? 하나님 믿는 나라보다 더 잘 살고, 더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어 있어 언제든지 힘으로 이스라엘 정도로 밀어붙일 태세입니다.
이제 백성들이 자진해서 그들의 믿음을 철회하기 시작합니다. 십일조 바쳐서 복받는 것이 아님을 이제 안 겁니다. 차라리 애굽식으로 차라리 이방나라 식으로 사는 것은 자기네들 타고난 인간 본성에 합해서 좋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니 십일조거 원활하게 거두지지 않게 됩니다.
생계 위협을 느낀 쪽은 제사장들입니다. 하나 둘씩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고용한 개인이나 단체의 복이나 빌어주는 고용인 변해갔습니다. 군대에 근무하는 군목, 사학에 근무하는 교목, 병원에 근무하는 원목, 교회에 근무하는 회목들이 이런 자들입니다. 이들은 그냥 개인 사업체의 직장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은밀하게 다윗을 왕으로 간택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이 옹립하는 왕이 아니라 도리어 왕이 백성들을 새로 생산하는 체제로 돌입하게 된 것입니다. 왕이 일방적으로 뽑는 것이 왕 역할의 주안점이 아니라 필히 제사장의 진정한 존재 이유를 아는 자들만이 백성이 되는 것이 주안점입니다.
제사장들이 하나님 덕분으로 산다는 것은, 곧 그들 손에 안수당하고, 그들 손에 희생당하고 불에 태어지는 그 제물의 운명을 자신을 운명으로 일치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20:26-28에 보면,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근본 원칙은 희생입니다.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강탈당하는 행복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날 때부터 잃는 쪽이 아니라 끌어모으는 쪽입니다. 하지만 제사장을 통해서 선택받은 왕을 이해한다는 것은, 밑으로 내려가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밑바닥에 내려가는 그 길이 바로 메시야가 거쳐지나간 노선입니다.
그것이 바로 육적에서 영적 세계로 빠지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다윗왕은 자기주변에서 벌어지는 권력장에서 바로 이 메시아의 경로를 알아 챈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되 잃었음을 경험하는 자는 자기 직속 최고 사령관 자리에 앉힙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아마사입니다. 다윗은 자기 조카를 자리를 새로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요압이라는 위대한 장군이 차지하고 있는 그 자리를 적군의 장수에게 내어줍니다.
그는 전에 압살롬 진영에서의 군대장관이었습니다. 이것은 거꾸로 사는 삶입니다. 권력 끌어 모음과 반대되는 행정처리입니다. 전쟁에서 승자는 모든 것을 가져갑니다. 그 어떤 시혜나 자비는 장래를 생각해보면 위험한 짓이 됩니다. 아예 싹을 잘라야 한다는 것이 인간들의 삶의 경험이요 지혜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뒤엎습니다. 그렇게 뒤엎을 때, 진정 하나님의 왕되심을 이해하는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마태복음 10:6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잃어버리는 체험을 제공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그런 경로를 가면서 바깥에 예수님의 피흘리심의 모습이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는 경로는 천국으로 통하는 경로입니다. 육신적인 것이 늘 삭제당할 때 그 배후에서 영적 세계의 면면이 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십자가 지신 주님과 함께 살면서 함께 길을 가고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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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종말 (레위기)
십자가마을 2010 여름수련회 레위기 종말의 종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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