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집과 일용할 양식
2010년 9월 22일 수요일 오전 9:50:30 김대식
(사 56:7, 개역)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막 11:17, 개역)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눅 19:46,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니라』
(사 56:1,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공평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의가 쉬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은즉』
(사 56:2, 개역)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치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같이 행하는 사람, 이같이 굳이 잡는 인생은 복이 있느니라』
(사 56:3, 개역)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말하지 말라』
(사 56:4, 개역)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나를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사 56:5, 개역) 『내가 내 집에서, 내 성안에서 자녀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주며 영영한 이름을 주어 끊치지 않게 할 것이며』
(사 56:6, 개역)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사 56:7, 개역)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사 56:8, 개역) 『이스라엘의 쫓겨난 자를 모으는 주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이미 모은 본 백성 외에 또 모아 그에게 속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사 56:9, 개역) 『들의 짐승들아 삼림 중의 짐승들아 다 와서 삼키라』
(사 56:10, 개역) 『그 파수꾼들은 소경이요 다 무지하며 벙어리 개라 능히 짖지 못하며 다 꿈꾸는 자요 누운 자요 잠자기를 좋아하는 자니』
(사 56:11, 개역)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사 56:12, 개역) 『피차 이르기를 오라 내가 포도주를 가져오리라 우리가 독주를 잔뜩 먹자 내일도 오늘 같이 또 크게 넘치리라 하느니라』
(마 21:7, 개역)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8, 개역)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마 21:10, 개역)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마 21:11, 개역)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마 21:12, 개역)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모든 자를 내어 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고』
(마 21:13, 개역) 『저희에게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하시니라』
(마 21:14, 개역) 『소경과 저는 자들이 성전에서 예수께 나아오매 고쳐 주시니』
(마 21:15, 개역)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의 하시는 이상한 일과 또 성전에서 소리질러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 아이들을 보고 분하여』
(마 21:16, 개역) 『예수께 말하되 저희의 하는 말을 듣느뇨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렇다 어린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찬미를 온전케 하셨나이다 함을 너희가 읽어 본 일이 없느냐 하시고』
(마 21:17, 개역) 『그들을 떠나 성 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신다.
시온이란 메시아가 오시는 것에 대한 화답으로 외쳐야 할 땅이다.
비로소 부정함과 정결함이 만나는 긍휼히 눈 앞에서 똑똑히 펼쳐지는 스크린마당이다.
그 희년은 고자도 말라버린 자도 이방인이라서 끊쳐졌던 자도 다 처음자리처럼 첫사랑에 감사만이 펼쳐진다.
그래서 그 날은 언제인지는 모르나 메시아가 예루살렘에 입성했다면
그 날은 무조건 희년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마 21:3, 개역)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마 21:4, 개역)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마 21:5, 개역)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마 21:6, 개역)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마 21:7, 개역)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마 21:8, 개역)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마 21:9, 개역)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심이 마땅한 분이시며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호산나
땅에서는 평화 곧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결국 땅은 겉잡을 수 없는 소동이 벌어진다.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즉 칼날처럼 매끈한 말씀, 포착할 수 없는 말씀, 매끈하고 날렵한 날샌이처럼 재빠른 말씀이니
어느 누가 그 말씀을 잡았다고 이해 했다고 할 수 있는가?
(히 4:12, 개역)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마 10:34, 개역)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마 10:35, 개역)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마 10:36, 개역)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칼의 예리한 날 선 위의 뾰족하고 날카로운 끝과 같다는 것이다. 그 날 위에 있는자를 잡겠다? 이해하겠다? 다 거짓이다.
다 미끄러지는 주제에, 다 실족하여 넘어지는 주제에 잡겠다고?
아마 도리어 잡혀야 함을 당해야 함을 모르니 웃기는 소리인줄 모른다.
율법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도 따먹을려구?
말도 안된다. 선악과에 따먹힌 당한 주제에? 마귀에게 따먹힘 당한 주제에?
비로소 하늘의 소리가 땅에 가시화 되니
땅에서는 평화가 아닌 전쟁이 비로소 발발 한다.
처음의 전쟁이다.
생전 보도 못한 전쟁이다.
사실은 이스라엘이 했던 여호와 거룩한 전쟁이다.
이스라엘 본인들도 몰랐던 하기 싫어했던 거룩한 전쟁이 드디어 떳다.
이 전쟁은 젖먹이 전쟁이다.
희년 전쟁이다.
매끈한 전쟁이다.
죽은자 전쟁이다.
이스라엘 잃어버린자 전쟁이다.
소동으로 인해서
(미꾸라지처럼 그 미끄러움이 숨어있는 흐름을 드러낸다. 미꾸라지가 맑고 고요한 샘물을 흙탕물로써 어지럽히듯이 미끌 미끌 하다. 미끄러움을 통해서 숨어있던 것이 밖으로 드러난다. 안과 밖의 뒤 바뀜이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누구지 누구냐? 누꼬 라고 무심결에 내뱉게 된다.
그 조용 조용한 동네에서
겸손 떨고
침묵 떨고
평화 떨고
안정감 떨고 있는 위선으로 가득한 동네에
갑자기 날까로운 칼 날이 스쳐 지나가듯이
홈이 페이게 되자
비로소 홈 페인 그 상처난 곳에서 새살이 돋는다. 매끈한 새 살 이다.
그냥 살리는 법은 없다. 죽이고 그 죽음 속에서 삐집고 돋아난 새 살만 챙기면 된다.
다들 한결같이 누꼬 누군데 도대체 언놈이 이렇게 시끄럽게 만드는데? 누구냐?
라는 반응은 마치 애굽의 바로 왕의 반응과 같다.
(출 5:2, 개역)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가 누군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데?
누꼬?
왜 나의 평화를 깨뜨리는데? 언놈이냐?
인간들은 명절이 되는 날에 고요하고 쉼이 되는 안식을 원한다.
그런
고요한 밤 밤 밤
거룩한 밤 밤 밤
조용히 지내고픈데 그 적막에 편히 잠자고 싶은데
모든 시름 걱정 아픔을 잊고 삭제하고픈데
모든 복잡하기 짝이 없는 것 잠시나마 멈추고 싶은데
그 적막한 깨뜨리는 돌맹이 로 와장창 깨진 유리 깨진 소리 (매끈한 균열의 날카로움이 귓청을 찢어버린다.)
누꼬? 언놈이냐?
애들이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또 애들이냐? 에구 뭐
매끈하다. 젖먹이다.
잡아 본들 잡겠다고 나서는 어른 체면만 구긴다.
그냥 쫏아내고 만다.
어 그런데
도리어 예수님이 쫏아낸다.
고요함을 더더욱 고요하게 만드는 자본을 엎어버린다.
조용 조용하게 쉴 수 있는 안식터를 쫏아내신다.
저 비둘기 양 염소가 없으면 일년 맘 편하게 죄책감없이 살수 있을텐데
그 양 염소 비둘기를 다 쫏아내 버리고
그 제사를 드림으로써 목사들의 입을 채워주지 않으면 1년 내내 들들 뽁여
돈 내라는 소리를 안 들을 수가 있는데
그 돈 보따리 상을 뒤 엎어버리다니
도대체 정신이 있는 것이 철딱서니가 있는 건지? 애들과 같은가?
루터 2003 라는 영화를 봤다.
조용하게 그저 시키는대로 헌금내고 봉사하고 예배드리는 것에 족하며 사는 것 같지만
아니다. 인간이 그렇게 호락 호락 하지 않다.
인간이란 교회에 와서든, 예배를 드리던 뭐를 하든 자기만을 찾을 뿐이다.
애굽에 의해 종살이 하는 것에 노예로써 전부인 낙으로 여기면서 살다가
막상 애굽의 지옥상을 보고 빠져나오게 됨을 당하게 되니
꼴 좋다 라고 그 지옥에다가 욕 한마디씩 내 뱉는다.
그러나 막상 광야 속에서는 자신이 욕한 그 애굽 보다 더 악한 애굽이
철저하게 자신의 눈 앞에서 망했음을 봤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망한 지옥같은 애굽이 자신 속에 있음을 광야에서 들추임을 당하게 된다.
얼마나 소름이 끼칠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그 바닥의 바닥 뒤에 정죄치 않는 몸, 다른 몸 이 있다.
이스라엘이다. 미끄러운 몸이다. 젖먹이 몸이다. 어린양의 피가 발린 몸이다.
죽은자 같으나 산 몸이다. 죽은자 라는 말은 살았다는 자의 몸에 무조건 반대의 반대의 몸이다는 취지이다. 그래서 죽은자가 아니라 죽은자 같다 보인다는 것이다. 반대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로만 갈 수 밖에 없는 반대인간이라는 것이다. 결국 상대적인 의미이다.
그렇게 힘 앞에서 고분 고분 하게 조용히 이끼처럼 살지 않고
철딱서니 없게 힘 에게 도전을 하다니
그러나 막상 그 젖먹이 철딱서니 없는 것이 이겨버리면
언제 그랬느냐는냥 철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어서 딸랑 딸랑 회장님 이라고 앵겨붙는다.
그래서 누꼬 도대체 소동을 일으키는 철딱서니 없는 자가 누구냐 라고 한다.
그래서 다 뒤엎어버린다.
불의한 정의를 외친게 아니다. 심심하면 개혁주의자들은 그런식으로 해석해서 또 돋 뜯는다.
예수님 밖에 없는 진정성은 내가 만든 내가 창조한 이스라엘은 그게 아니다는 것이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라고 했다.
기도란 이스라엘만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뭔가?
죽은자 이다. 죽은자 라는 것은 무조건 반대로 가는 자이지
일부러 죽은자 될려고 죽을려고 자살하라는 말이 아니다.
자살 보다 더 힘든 것이 믿음이다.
불가능이다. 자살은 가능하지만 믿음은 불가능 하다.
그렇게 종교꾼들에게 허벌나게 남용이 되고 믿음 장사로 돈을 벌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다.
믿게 해 줄테니 돈 달라, 날 인정해 달라, 우울증 환자에게 희망주는게 아니다.
불가능이다.
미끄러운 새살과 같은 죽은자 속에서 피어난 매끄러움처럼
죽은자 같아서 죽은 줄 알고 무시하고 마음껏 칼로 내려쳤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친 칼이 미끄러져서 아무리 쳐도 죽지 않는 자이다.
이것이 반대를 위한 반대의 몸이다.
무시를 알리바이를 잡았고
살인의지를 알리바이로 잡았다.
철저한 저쪽 세계의 소욕을 들추어내는 몸, 덥썩 물도록 하는 미끼 몸이다.
그럼으로 인해 이스라엘 자신들은 기도를 한다.
그 미끄러운 몸을 만드신 주님을 거부 하지 않도록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십자가를 거두지 말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빠다를 더욱더 발라 달라고
더욱더 미끌 미끌 하게 해 달라고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죽은자 같음을 더더욱 죽은자 같게 해 달라고 한다.
이 땅의 몸들이 지옥 몸임을 뼈져리게 느꼇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미끄려져서 빠져나오게 되었기 때문에
그 미끄러움의 흐름을 끊쳐지지 않도록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다.
소욕이 달라진 세계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조차도
썩을 것들을 구한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소욕이 끊어지지 않도록 절대로 고자와 같이 말라버린자가 되지 않도록 기도한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로 말라버린자 고자 이미 끊어져 버린 이방인을
만민이 기도하는 집 내 집에 채우신다.
죽은자를 채우고
말라버린 자를 채우고
미끄러운 젖먹이를 채운다.
호산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저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맞습니다. 저 말라버린 자입니다. 저 고자입니다. 저 말라버린자입니다.
맞습니다. 저 이미 창세전에 끊쳐져버린 이방인입니다.(사 56:3)
맞습니다. 저 저주 받아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맞습니다. 제가 그 나무입니다.
(마 21:18, 개역)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마 21:19, 개역)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마 21:20, 개역)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마 21:21,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
(마 21:22, 개역)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마 9:27,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가실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마 20:30, 개역) 『소경 둘이 길 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함을 듣고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니』
(마 20:31, 개역) 『무리가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더욱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 하는지라』
이것이 특이성 곧 이스라엘에게만 먹이시는 양식인 세상에는 없는 양식
미끄러운 양식 곧 일용할 양식이다.
실족케 하는 양식이다.
기도하는 자는 이스라엘 뿐이다.
이스라엘은 무엇을 구하는가? 일용할 양식이다.
이것을 오늘 아침 명절이라고 모인 가족들에게 이야기 하다가 나 혼자 기뻣다.
(물론 이것 때문에 분위기 다 따운 시켜버렸다. 아침부터 초 치는 재수없는 말만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살아 있어서 산 나를 기준으로해서 양식이 끊어지지 않는 방식으로써의
일용할 양식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다.
나를 죽었다 라고 양식이 주체가 되어 나를 그렇게 죽었다 라고 선언하고서
죽은자에게 주어지는 매일 매일 공급해 주는 양식이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양식을 주다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불가능이다는 것이다.
그 불가능을 주님 자신의 숙제로써 펼치신 주님의 믿음이다.
반드시 이 일용할 양식을 먹이겠다는 자는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다.
그리고 이 양식을 구하는 기도하는 자도 자발적인 우리가 아니라
그렇게 기도케 구하게 찾게 두드리게 만들겠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믿는자 예수님에게는 쉽다.
새로 만들면 된다.
기도하는 자가 아니다. (기도할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기도하게 되는 자 이다. 선악의 법적 인간이다. 중언부언)
기도자로 만들면 된다. (기도할 필요 없이 기도의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가 가는 길에는 기도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마치 복의 근원인 믿음의 조상처럼 말이다. 믿을 필요 없이 믿음으로 태어난 자 말이다.)
기도하는 자는 넘어갈 수 없는 자를 만든다.
가인의 제사가 넘어갈수 없는 더 나은 제사를 아벨 자체가 제사드릴 필요 없는 제사인간이다.
제물 된 인간이다.
예수님이 바로 일용할 양식이다.
아무도 안 먹는다.
안 쳐다 본다.
불뱀 물렸는데 불뱀 쳐다 보라고?
어찌 사람의 살과 피를 먹으라고?
아직도 배부른 것이다.
탕자가 아닌 배부른 양심도 있고 선함도 있고 겸손도 있고 부모공경도 있는 맏아들이라고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
그거 다 바닥 치라고 있던 것들인데
바닥쳐봐야
탕자만이 먹는 일용할 양식을 먹는다.
이 미끄러운 양식은 미끄러운 몸만 먹는다.
(미끄러운 전쟁을 이스라엘을 기피하게 되니까 결국 내부전쟁으로 전환 되어 벌어지는데
얼마나 웃기는 것은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전쟁을 내부전쟁에서는 죽기살기로 한다. 참 미끄럽다.)
이스라엘만 먹는다.
기도사람만 먹는 양식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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